사람 보는 마음

 


  사람을 볼 때에는 이름표를 보지 않습니다. 누군가 당신 이름표에 어떤 이름을 적어 넣든 하나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누군가 당신 이름표에 ‘진보’나 ‘혁명’이라는 낱말을 적어 넣었대서 대단하지 않습니다. ‘평화’나 ‘자유’나 ‘민주’라는 낱말을 당신 이름표에 적어 넣었기에 훌륭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볼 때에 주민등록증을 보지 않습니다. 누군가 나보다 한 해 일찍 태어났대서 우러를 만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나보다 한 해 늦게 태어났대서 얕볼 만하지 않습니다. 띠가 같은 웃나이라 하든 아랫나이라 하든 조금도 남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을 볼 때에 주름살이나 눈썹을 보지 않습니다. 사람을 볼 때에 종아리나 목덜미를 보지 않습니다. 사람을 볼 때에 귓불이나 발가락을 보지 않습니다. 그저 그 사람을 오롯이 봅니다. 그예 그 사람 삶과 넋과 사랑을 봅니다.


  어떤 졸업장이나 자격증이 어느 한 사람을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력서나 소개서가 어느 한 사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든 이녁이 들려주는 말마디마다 삶이 묻어나고 사랑이 깃들며 꿈이 드러납니다. 어느 한 사람이든 이녁이 보여주는 몸짓마다 생각이 샘솟고 믿음이 퍼지며 빛이 번집니다.


  경기도 일산에 있는 킨텍스에서 모임을 하건, 전남 고흥 시골마을 밭둑에서 모임을 하건, 사람들 스스로 살아가는 매무새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도시 한복판 커다란 시멘트 건물에서 모임을 하기에 더 나쁘지 않습니다. 시골 한복판 들자락에서 모임을 하기에 더 좋지 않습니다. 생각을 하는 사람일 때에 생각이 빛납니다.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일 때에 마음이 빛납니다. 사랑을 나누려는 사람일 때에 사랑이 따스합니다.


  입으로 이루어지는 진보는 없다고 느낍니다. 땀방울로 이루어지는 진보가 있을 뿐이요, 온몸으로 흙내음 누리며 빚는 진보가 있을 뿐이라고 느낍니다. 이 나라에는 온통 기름밥 진보와 아스팔트 진보만 판칩니다만, 기름밥이건 아스팔트이건 날마다 몸속에 밥 한 그릇 넣어 주지 않으면 목숨을 건사하지 못합니다. 책상물림이건 노동조합이건 햇볕을 누리고 바람·물·흙이 없을 때에는 삶을 거느리지 못합니다.


  아름답다고 느낄 때에 무엇이든 이루어집니다. 아름답다고 느끼며 바라볼 때에 내가 좋아하며 사귀는 사람이구나 싶습니다. 아름답다고 느끼면서 나 스스로 내 살림집을 마련할 마을을 찾습니다. 아름답다고 느끼는 동안 내 하루 내 온 기운 쏟아 예쁘게 돌봅니다. 밤새 내 가슴에 엎디어 자던 아이가 새벽부터 내 무릎에 누워 잡니다. 이 아름다운 잠보 얼굴을 살살 어루만집니다. 새벽을 부르는 들새와 멧새는 우리 집 둘레에서 기쁘게 노래합니다. 새날 새 볕살이 스밉니다. 따스한 기운이 집안으로 깃듭니다. 진보운동이든 평화운동이든 민주운동이든 하는 분들이 도시에서 더 많은 사람을 일깨워 더 빨리 온누리를 바꾸려고 땀흘리는 일도 좋으리라 느끼지만, 이에 앞서 진보와 평화와 민주를 바라는 꿈 그대로 이녁 스스로 날마다 좋게 누릴 삶을 빛낼 삶터를 찾아 호젓하게 웃음꽃 피울 수 있기를 빕니다. 눈물을 펑펑 흘리며 슬픈 일 되풀이되는 데에서는 진보도 평화도 민주도 없습니다. 자가용을 버리고 두 다리와 자전거로 예쁜 이웃이랑 오순도순 살아갈 만한 데에서, 진보모임이나 평화모임이나 민주모임을 꾸린다면 참 홀가분할 텐데 싶습니다. (4345.5.15.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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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2-05-15 07:03   좋아요 0 | URL
좋은 글이네요. 오늘따라 마음에 와닿습니다.

숲노래 2012-05-15 10:14   좋아요 0 | URL
통합진보당인지 진보통합당인지... 쳇바퀴 도는 모습이 온갖 매체에 시끌벅적한 모습을 떠올리면서 쓴 글이에요... 이분들이 부디 입으로 떠드는 진보 굴레를 털어낼 수 있기를 빌어요.

고흥 옆 순천에서 진보당 국회의원이 된 분조차 '당권파'로 막말과 폭력을 한몫 거든 모습이 참 안쓰럽습니다...

pourquoi28 2012-06-11 16:5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처음으로 인사 드립니다.
된장님의 서재 드나들며 아껴가며 글 잘 읽고 있는 독자입니다.
그날 실황중계 지켜보며 느꼈던 아픔이 아직도 아물지 않은거 같은데..
마음의 상처에 약이 되는 글, 너무 잘 읽고 갑니다.

숲노래 2012-06-11 18:03   좋아요 0 | URL
우리 스스로 좋은 삶을 사랑하며
재미나게 살아가면
가장 좋은 길이라고 느껴요.

언제나 좋은 날 누리시기를 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