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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하야후루 1
학산문화사(만화)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내 좋은 벗들
[만화책 즐겨읽기 144] 스에츠구 유키, 《치하야후루 (1)》
봄날 아침 하얀 안개가 온 들판을 덮습니다. 하얀 안개 덮인 들판은 잘디잔 이슬방울을 촘촘히 매답니다. 흙은 촉촉하게 젖습니다. 풀잎은 싱그러운 아침을 먹습니다. 이윽고 해가 멧등성이 위로 올라서면 맑게 따사로운 기운을 골고루 나누어 받습니다.
꽃잎 떨군 매화나무는 열매를 도톰히 맺으려고 부산합니다. 꽃잎 보얗게 피우는 모과나무는 한창 가루받이를 할 때일 테지요. 새잎 싯푸르게 내놓는 감나무는 나뭇가지마다 몽우리를 맺으려고 애쓰겠지요.
봄에 일찌감치 찾아드는 꽃잎이 있고, 풀잎조차 천천히 맺는 나뭇가지 있습니다. 아직 땅에서 돋지 않은 풀이 있습니다. 이제 막 첫 싹을 틔우는 풀이 있어요. 모두들 제 삶에 맞추어 기지개를 켭니다. 서로서로 가장 좋아하는 삶을 누리려 제때와 제철을 기다립니다.
제비는 먼먼 나라에서 따스한 날씨를 누리려 이곳까지 찾아듭니다. 참새와 노랑할미새와 멧비둘기와 까마귀와 직박구리와 소쩍새와 동박새 들은 추운 날씨는 추위대로 견디며 따순 봄을 맞이합니다. 온통 얼어붙다가 눈으로 소복히 덮인 때에도 저마다 제 먹이를 찾고 제 삶을 누립니다.
- “내가 와타야라면, 놀리려고 메모까지 하는 사람이랑은 말하기 싫을 거야.” (13쪽)
- “왜 때려, 치하야! 너, 지금 촌닭 편드는 거냐?” “타이치, 네가 이렇게 소갈머리 좁아터진 자식인 줄은 몰랐다!” (17쪽)
- “부모님 월급날 돌아오기 전까진 새 안경을 살 돈이 없대.” “아, 응. 대체 얼마나 가난하면 그래? 너도 그 촌닭 좀 그만 싸고돌아라.” (66쪽)
온몸 뜨거운 아이를 가슴에 얹히고 재웠다가는 팔베개를 했다가는 끝없이 오락가락하며 밤을 지새웁니다. 조금도 느긋하게 잠들지 않는 아이를 보듬으며 생각합니다. 이 아이가 몸이 힘드니 이렇게 꼼지락꿈지럭하면서 뒤채겠지요. 몸이 힘드니 끙끙 소리만 낼 뿐 달리 칭얼거리지도 못하겠지요.
내 몸이 힘들거나 아플 때에는 어떤 모습일까 하고 그림을 그립니다. 내가 아주 어린 날 몸이 힘들거나 아프면 내 어버이는 어떤 삶을 보냈을까 헤아립니다. 힘들거나 아픈 아이를 밤새 끌어안고서는 곱게 토닥토닥 달래겠지요. 힘든 기운과 아픈 기운 말끔히 털 수 있기를 바라면서 살살 등판을 쓰다듬고 가만가만 머리를 어루만지겠지요.
아이가 제대로 잠들지 못하니 어버이도 제대로 잠들지 못합니다. 아이가 이럭저럭 아침에 깨어나 이리 기고 저리 앉으며 놀면, 비로소 한숨을 돌리며 하루를 열 생각을 합니다. 간밤에 아이들 갈아입힌 옷과 기저귀는 대야에 담급니다. 환한 아침햇살을 느낍니다. 이른아침에는 개구리 우는 소리가 안 들리네, 밤새 그렇게 울었으니 개구리는 이른아침에는 고요히 잠드나, 아무래도 이른아침부터 뭇새가 먹이를 찾으러 돌아다닐 테니까 모두들 어딘가 깊이 숨었을까나.
- “이것 봐 봐!” “아니, 내 거랑 똑같은데, 뭐.” “난 상장 받아 보는 건 이게 처음이야! 너무 좋아! 신난다!” (55쪽)
- “선생님, 죄송해요. 아프셨어요?” “아, 아니.” “저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카루타답게 카드를 잡아 봤어요! 처음이에요!” (113쪽)
둘째 아이를 가까스로 재운 지난저녁, 첫째 아이가 뒤따라 깨며 쉬를 누다가는 안아 달라 보챕니다. 아이를 무릎에 누여 토닥입니다. 한동안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가 두 팔에 힘이 폭 빠지며 곯아떨어집니다. 이대로 누인 채 한손으로 만화책 하나 집습니다. 나도 아이들 곁에 곯아떨어져야겠다 싶으면서, 드러눕기 앞서 무언가 하나 새기며 잠들자 생각합니다.
손에 쥔 만화책은 스에츠구 유키 님 《치하야후루》(학산문화사,2009) 첫째 권. 만화책 주인공이라 할 ‘치하야’라는 아이가 시골에서 도시 학교로 온 아이를 따스히 감싸는 첫 모습을 곰곰이 바라봅니다. 어떤 올바른 넋이나 착한 얼일 수 있지만, 내 좋은 벗들을 생각한다면 더없이 마땅한 모습입니다. 내 좋은 벗을 어떻게 따돌리거나 괴롭히거나 들볶을 수 있나요. 내 사랑스러운 벗을 어떻게 등치거나 못살게 굴거나 다그칠 수 있나요.
그러고 보면, 내 좋은 옆지기와 아이들과 따사로이 말을 나눌 삶입니다. 내 사랑스러운 옆지기와 아이들이랑 날마다 새 웃음과 맑은 눈빛으로 즐거이 누릴 삶입니다. 딱히 ‘감싼다’고 하기보다는 그예 ‘어깨동무’하듯 살가이 느끼는 모습입니다. 좋은 느낌 그대로 살피고, 사랑스러운 마음 고스란히 들여다봅니다.
- “정정당당하게 싸우고 진 게 창피할 게 뭐 있어!” (65쪽)
- ‘오호라! 깔끔하게 감쌌구나! 하지만 저 안경 쓴 아이가 뛰어나간 것은, 저 눈초롱이가 맞는 카드를 잡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겠지!’ (108쪽)
흙 한 줌은 좋은 벗입니다. 물 한 방울은 좋은 벗입니다. 햇살 한 자락은 좋은 벗입니다. 새 한 마리는 좋은 벗입니다. 풀 한 포기와 꽃 한 송이 모두 좋은 벗입니다. 옆지기와 아이들 모두 좋은 벗입니다. 나는 흙과 물과 햇살과 새와 풀과 꽃 모두한테 좋은 벗이 되어 살아갈 좋은 목숨입니다. 나는 옆지기와 아이들 모두한테 좋은 웃음 주고받는 좋은 목숨입니다.
아침마다 기쁘게 일어나고, 저녁마다 즐거이 잠듭니다. 햇살을 나란히 느끼고, 바람을 함께 맞습니다.
내 좋은 벗님과 무얼 하며 하루를 누릴 때에 가장 빛날까요. 내 좋은 이웃과 어떤 생각을 속삭이며 하루를 맞이할 때에 가장 어여쁠까요. 나는 어떤 말과 넋과 삶으로 내 꿈을 가장 따사로이 북돋울까요.
- “언니가 언젠가 일본 최고가 되는 게 내 꿈이야!” “니 그거 꿈 아이다.” “뭐?” “남 하는 일 가지고 저그 꿈이라 카믄 안 되는기라.” (19쪽)
- “하하, 하하하! 그래, 그렇구나! 그래도 확실하게 외우는 것도 있지? 바닥에 놓인 카드만 봐도 앞 구절이 딱 떠오르는 시가 말이다.” (121쪽)
한 걸음씩 천천히 내딛습니다. 한 마디씩 차근차근 읊습니다. 한 가지씩 알뜰히 주고받습니다. 한 가락씩 나긋나긋 노래합니다.
좋은 생각을 익히고 배울 뿐 아니라, 좋은 벗들과 기쁘게 익히고 배우고 싶은 학교입니다. 누군가를 따돌리거나 괴롭히면서 킬킬거리고픈 학교일 수 없습니다. 좋은 벗과 어깨동무하며 서로 즐겁게 익히고 배워 다 함께 좋은 삶을 누리고 싶은 학교입니다. 누군가를 젖히거나 밟으면서 혼자 으스대고픈 학교일 수 없습니다.
학교는 지식을 물려주는 데가 아닐 테지요. 학교는 시험성적에 따라 아이들을 줄세우는 데가 아닐 테지요. 학교는 회사에 들어가기 앞서 잔재주를 가르치는 데가 아닐 테지요.
좋은 앎을 좋은 삶에 바탕을 두어 찬찬히 그립니다. 좋은 꿈을 좋은 사랑에 발맞추어 살뜰히 빚습니다. 좋은 이야기를 좋은 눈짓 손짓 몸짓으로 시나브로 이룹니다.
- “자기와 관계 깊은 시는 누구보다도 빨리 집을 수 있게 되지. 백인일수는 모두 100수다. 100명의 친구가 생겼다고 여기고 사이좋게 지내거라.” (123쪽)
- “치하야, 너는 모르는지 몰라도, 안경이의 할아버지는 영세 명인이라고, 굉장한 분이란다.” “네? 명인?” “척 보면 알지. 안경이는, 할아버지한테서 배워서 카루타를 그렇게 잘하게 됐을 거야. 그런 할아버지가 편찮으시다는데, 얼마나 걱정되겠니?” (155∼156쪽)
‘치하야’를 비롯한 아이들은 재주나 솜씨를 바라지 않습니다. 어떤 점수나 시험이나 등급이나 이름을 바라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서로 아끼며 좋아할 삶을 바랍니다. 아이들은 오래오래 웃으며 누릴 맑고 밝은 터를 바랍니다.
‘일본에서 첫손 꼽는 솜씨’란 하나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지구별에서 가장 뛰어난 재주’란 조금도 대단하지 않습니다. 일본에서도 지구별에서도, 또 온누리에서도 뭇누리에서도, 서로 좋아하며 아낄 수 있는 맑은 꿈과 밝은 사랑이면 됩니다. 왜냐하면, 내 좋은 벗들이거든요. (4345.4.24.불.ㅎㄲㅅㄱ)
― 치하야후루 1 (스에츠구 유키 글·그림,서현아 옮김,학산문화사 펴냄,2009.11.25./42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