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문명 - 한 지구 시민의 생태 평화 순례기
마사키 다카시 지음, 김경옥 옮김 / 책세상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작은 숲과 작은 사람을 사랑하며
 [환경책 읽기 35] 마사키 다카시, 《나비 문명》

 


- 책이름 : 나비 문명
- 글 : 마사키 다카시
- 옮긴이 : 김경옥
- 펴낸곳 : 책세상 (2010.10.12.)
- 책값 : 9500원

 


  봄을 맞이한 들판은 금세 푸른 물결이 됩니다. 봄바람 가볍게 살랑일 때에는 푸르게 푸르게 물결칩니다. 마늘밭도 유채밭도 여느 풀밭도 눈부시게 반짝이며 물결칩니다. 아마 예전에는 보리밭 푸른 잎사귀가 함께 물결쳤겠지요.


  문득 돌이키면 지난날에는 ‘보리고개’라 했어요. 보리고개 넘기 벅찼다고 했어요. 그무렵에는 어떠한 삶이었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어떻게 끼니를 이었을까 궁금합니다. 내 어릴 적 학교에서 교사들한테서 ‘보리고개’ 소리를 듣고 이것저것 배울 때에 늘 궁금했습니다. 왜 굶고 왜 힘겨우며 왜 고된 나날을 보내야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느냐고.


  나로서는 알기 어려운 이야기라 할 만한 1950∼60년대 이야기를 〈민족일보〉라는 신문 줄인판을 헌책방에서 장만하여 읽으며 되새긴 적 있습니다. 1950∼60년대 어두운 그늘 이야기가 〈민족일보〉라는 신문에 날마다 실렸는데, 이무렵 〈민족일보〉 첫머리를 채우는 기사 가운데 참 자주 나오는 이야기는 ‘오늘은 몇 사람이 길에서 굶어죽었느냐’하고 ‘오늘은 몇 아이가 어버이 잃은 채 길바닥에서 우는가’예요.


  서울이나 부산처럼 커다란 도시에서는 굶어죽는 사람이 길바닥에 몇몇씩 널브러졌다고 했어요. 갓난쟁이들이 포대기에 감기거나 바구니에 담긴 채 ‘제법 먹고살 만하게 보이는 집’ 문간에 놓이는 일이 흔하다고 했어요. 예전 신문을 찬찬히 읽다 보면, 시골에서는 들판이나 멧자락에서 풀이라도 뜯으며 목숨을 잇지만, 도시에서는 뜯을 풀조차 없으니 굶어죽는다 했어요.


.. 눈앞에 있는 이렇게 가까운 나라인데 보이지 않았을 까닭이 없습니다. 보이지 않았던 것은 외면하고 있었던 탓입니다. 그렇다면 왜 외면했던 것일까요? … 자연이 심하게 병들어 있어, 그 아픔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고자 나무를 심었던 겁니다. 그랬는데 나무를 심는 일이 이토록 기쁘고 즐거운 일일 줄이야. 아프고 어두운 기운 같은 건 어디론가 훌쩍 날아가 버리고, 기쁨만이 산을 가득 채우게 되다니, 왜일까? … 그 나라들을 일부러 화나게 해서 반일 감정을 갖게 하고, 그 반발하는 감정으로 일본을 위협하게 해서, 일본 국민들로 하여금 군대를 가질 필요를 감정적으로 느끼게 하려는 연출입니다. 북한이 저질렀다는 일본인 납치 문제도 ‘헌법 개정 캠페인’과 연계해서 이용하고 ..  (12, 31, 118쪽)


  봄을 맞이한 들판을 바라보거나 쓰다듬으면서 생각합니다. 예전 사람들은 풀죽을 먹었다고도 하는데, 조금 억센 풀은 데쳐서 먹고, 여린 풀은 날것으로 먹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갓 돋은 잎은 여리니 그냥 먹을 만하지만, 날이 흐르고 흘러 차츰 억세지면 데치거나 삶아서 먹겠지요. 곡식가루 조금 쓸 수 있다거나 얻을 수 있으면 풀떡을 해서 먹겠지요.


  옆지기가 가루 반죽을 합니다. 풀물(녹즙)을 짜고 난 찌끼를 잔뜩 넣어 빵처럼 굽습니다. 마당가에서 뜯은 쑥으로도 빵을 굽습니다. 퍽 적은 곡식가루로 한두 끼니 넉넉히 먹을 만큼 됩니다. 아마 옛날 옛적에는 곡식가루보다 풀을 훨씬 많이 넣으며 떡을 하거나 빵처럼 구웠으리라 생각합니다. 지붕에 기와를 얹는 제법 살림이 있다 하는 집이라면 쌀밥을 먹었겠지만, 지붕에 풀짚을 얹는 여느 흙일꾼 집이라면 으레 풀을 많이 먹었으리라 생각해요.


  들을 다니고 멧줄기를 드나들면 여러 가지 먹을거리를 얻어요. 다만, 1950∼60년대는 한국전쟁 뒤끝이라 민둥산이 많고 숱한 나무들이 타죽거나 말라죽었을 테니, 들나물이나 멧열매 얻기는 퍽 어려웠으리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땔감에 쓸 나무를 찾아야 해요.


.. 아름답지만 자세히 보면 대도시 빌딩 뒤는 쓰레기 산, 공장 굴뚝에서는 뭉게뭉게 가스가 피어오르고, 수많은 자동차가 달리고 있고 비행기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 이렇게 아름다운 별에서 서로 부를 차지하느라 싸움이 끊이지 않는다니 … 세계의 많은 도시와 시민 생활은 거의 모든 것이 환경에서 뺏어 온 것들로 이루어져 있어, 산업이나 경제가 발달했다는 오늘날 자연이 받는 타격은 어마어마할 겁니다. 숲을 파괴해 마을을 만들고 사막을 낳고 … “침략하겠습니다” 하고 전쟁을 시작하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들 “자위를 위해”라는 명분으로 전쟁을 시작합니다 ..  (17, 64, 99쪽)


  예부터 이 나라 사람들은 누구나 흙을 일구었습니다. 임금이나 신하나 사대부나 권력자나 이런저런 몇몇 사람은 흙을 안 일구며 살았을 텐데, 100으로 치면 98에 이르는 여느 사람들은 아주 마땅히 흙을 일구며 밥과 옷과 집을 얻었으리라 생각해요. 땅을 넓게 차지하는 땅임자라면 쌀밥을 배불리 먹었을는지 모릅니다. 여느 흙일꾼이라면 쌀밥 먹기는 벅차고, 으레 나물죽이나 나물밥, 아니면 풀을 뜯어다 먹는 삶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예부터 내려오는 ‘밥풀(먹는 풀)’과 ‘약풀’ 이야기란 여느 흙일꾼이 여느 삶에서 늘 찾아서 먹던 풀 이야기라고 느껴요.


  못 먹거나 안 먹는 풀은 없었겠지요. 다섯 가지 넘는 풀을 골고루 섞어 먹으면 아주 드센 풀도 잘 먹을 수 있다 하는데, 이런 앎이나 슬기란 옛 흙일꾼이 스스로 풀을 뜯어먹으며 몸으로 깨달은 이야기라고 느껴요. 백 가지나 이백 가지 풀을 알던 옛사람이 아니라, 천 가지 만 가지 풀을 알던 옛사람이리라 생각해요. 나무 또한 열 가지 스무 가지 아닌 천 가지 만 가지 나무를 알았겠지요. 따로 나무도감 풀도감 꽃도감은 없지만, 스스로 ‘나무·풀·꽃 도감’이 되어 들판이랑 멧줄기를 누비는 흙사람이었으리라 봅니다.


  흙은 참말만 합니다. 흙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흙은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흙은 제 속살을 훤히 보여줍니다. 겨울을 난 봄들과 봄메에 푸른 옷을 입히는 흙입니다. 봄들과 봄메는 사람뿐 아니라 수많은 목숨이 살아갈 수 있게끔 푸른 밥을 내놓는 흙입니다.

  쉰 살 일흔 살 백 살을 살아야 기쁜 삶은 아닙니다. 스무 살 마흔 살 예순 살을 살더라도 하루하루 아름답다고 느끼며 웃음을 누릴 때에 기쁜 삶입니다.


  오늘날은 사람들이 더 오래 살 수 있다고 하는데, 목숨이 늘어났다는 삶이 정작 즐겁거나 좋게 누리는 삶인지 알쏭달쏭합니다. 밥과 옷과 집을 즐겁게 얻는지 아리송합니다. 밥과 옷과 집을 아름답게 누리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밥과 옷과 집을 서로서로 예쁘게 여미는지 모르겠습니다.


.. 물고기가 바다에 안겨 있는 것처럼 인간은 자연의 품에 안겨 살아갑니다. 물고기의 생활이 바닷물에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의 생활은 자연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 산에 나무를 심으면 산 어머니뿐 아니라 바다 어머니도 크게 기뻐해, 사랑을 샤워처럼 쏟아냅니다 … 쿠니의 평화란 도대체 무엇에 의해 지켜지는 것일까요? 군대일까요? 꽃이나 새일까요? 군대가 만들어낸 평화가 진짜 평화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 오키나와가 전쟁터가 되기 전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상이 있고, 인생이 있고, 노래도 꽃도 과거도 미래도 있었을 겁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가운데 죽음을 맞이했을까요 ..  (35, 37, 121, 124쪽)


  한삶 즐겁게 누리던 누군가는 나무로 다시 태어납니다. 한삶 곱게 누리던 누군가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도 합니다. 한삶 예쁘게 누리던 누군가는 굳이 어떤 모습을 껍데기로 쓰지 않고 아지랑이나 무지개나 물방울이나 햇살이 되어 온누리를 살랑살랑 누비기도 합니다.


  풀 한 포기가 너른 목숨입니다. 빗망울 또한 너른 목숨입니다. 산들바람이나 한들바람도 너른 목숨이요, 뭉게구름이나 소낙비도 너른 목숨이에요. 목숨이 목숨을 북돋웁니다. 목숨이 목숨을 살찌웁니다.


  지구별은 송두리째 너른 목숨입니다. 다 다른 목숨이면서 다 같은 목숨입니다. 서로 돌고 도는 목숨입니다. 내 몸에 여우 넋이 깃듭니다. 비둘기 몸에 들쥐 넋이 깃듭니다. 제비꽃 몸에 지렁이 넋이 깃듭니다. 서로 사랑하며 어우러지는 목숨입니다. 서로 아끼며 한덩어리를 이루는 지구별입니다.


  다툼이나 싸움이 벌어지면 사람만 죽지 않습니다. 전쟁무기는 사람부터 죽이지만, 사람을 비롯해 참새와 박새와 할미꽃과 진달래와 느릅나무와 뽕나무를 나란히 죽입니다. 정치다툼은 사람만 줄세우기를 시켜 들볶을 뿐 아니라, 땅과 냇물과 멧등성이마저 금을 죽죽 갈라 들볶습니다. 자격증이나 졸업증으로 내세우는 학력 또한 우리 삶을 통째로 흔들며 뒤죽박죽이 되게 합니다.


  오직 사랑이 아니라면 흔들리는 삶입니다. 오로지 사랑이 아니라면 무너지는 지구별 삶입니다. 그예 사랑이 아니라면 자꾸자꾸 미움과 시샘과 따돌림과 악다구니가 판치고 마는 지구별 살림살이입니다.


..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거부하고 있는 오바마 시에는 보상금이 내려오지 않아서 이런저런 공사가 거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곳의 자연이 파괴되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 원자력발전소에서 방사능이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고 할 때, 그것은 아무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곳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뭇 생명들 위로 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 생태는 말뿐이고, 현대 문명의 속셈은 역시 돈을 좇고 있습니다 … 대도시의 고층빌딩도 대지가 받치고 있습니다. 사람은 숲에서 나온 물로 살아갑니다. 카펫보다 대지를 더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카펫의 번영을 위해 대지가 더럽혀지고 파괴되어서는 안 됩니다 ..  (51, 53, 87, 168쪽)


  마사키 다카시 님이 빚은 《나비 문명》(책세상,2010)을 읽습니다. 나비 한 마리가 큰물결 일으킨다는 얘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듯한 오늘날입니다만, 막상 스스로 나비 물결 일으키는 줄 깨닫는 사람마저 없을 듯한 오늘날이 아니랴 싶습니다.


  아름다운 사랑도 나비 물결입니다. 슬픈 전쟁무기도 나비 물결입니다. 고운 속삭임과 눈맞춤도 나비 물결입니다. 차갑거나 메마른 돈벌이도 나비 물결이에요.


  좋은 생각은 나비 물결로 퍼집니다. 궂거나 슬프거나 미운 생각 또한 나비 물결로 퍼집니다. 나 스스로 오늘 하루 따사롭게 살아갈 때에, 나 스스로 따사로운 사랑 기운을 내 둘레에 퍼뜨립니다. 나 스스로 얄궂게 오늘 하루 내동댕이칠 때에, 나 스스로 모질거나 미운 기운을 내 둘레에 퍼뜨려요.


.. 어느 날 긴 여행에서 농장으로 돌아와 아, 집으로 돌아왔구나 싶었던 게 책상 앞에 앉아 창밖에 선 삼나무에게 “다녀왔습니다.” 하고 인사를 할 때였습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밖으로 나가 한 번 더 “다녀왔습니다, 이제야 왔어요.” 하고는 나무를 부둥켜안았습니다. 그랬더니 나무도 기쁜 듯 “오오.” 하고 답해 줬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20년이나 서로 마주보고 살았는데 지금까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니, 원래 삼나무 숲이었던 곳에 집을 지었는데 똑 부러지게 인사도 하지 않았다니 … “나도 병들어 있어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한 그루 벚나무였습니다. 깜짝 놀라 가까이 다가가 봤습니다. 굵은 가지 몇 개가 잘려 있고, 나무껍질은 바짝 말라 바삭거리고 있었습니다. 껍질이 벗겨진 뿌리 근처에는 회색약이 두껍게 칠해져 있었습니다. 나무 둥치에 손을 갖다 대니 나무의 아픔이 그대로 전해 왔습니다 ..  (14∼15, 28쪽)


  나무한테 말을 걸면 나무가 대꾸를 합니다. 쑥풀한테 말을 걸면 쑥풀이 대꾸를 합니다. 종달새한테 말을 걸면 종달새가 대꾸를 합니다. 개구리한테 말을 걸면 개구리가 대꾸를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한테 말을 거나요. 서울이나 부산 같은 커다란 도시에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으로 지내는 사람들은 누구한테 말을 거나요.


  어떤 말을 거는 삶인가요. 어떤 꿈을 마음속으로 일구면서 말을 거는 삶인가요. 어떤 사랑을 이루고픈 꿈을 마음속으로 가만히 보듬으면서 말을 거는 삶인가요.


.. 우리 몸은 온전히 우리가 먹은 것들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먹은 건 무엇일까요 ..  (70쪽)


  하루하루 새 아침이 밝습니다. 날마다 새 새벽이 찾아듭니다. 나날이 새 햇살과 새 어스름과 새 달과 새 바람을 맞이합니다. 어제를 즐거이 누리면서 오늘을 즐거이 맞아들입니다. 오늘을 즐거이 누리고 나서 이듬날을 새롭게 꿈꿉니다.


  어떤 보배를 얼마나 내 손아귀에 쥐느냐는 하나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어떤 꿈을 어떤 사랑으로 키우면서 어떤 삶을 어떤 하루로 누리느냐가 가장 대수롭습니다.


  살아가는 나날 언제나 배웁니다. 학교에 들어가야 배우지 않습니다. 졸업장이나 자격증을 땄기에 다 배우거나 많이 배웠다 할 수 없습니다. 배움이란 삶이거든요. 살아가는 나날이 모두 배움이거든요.


  햇볕을 먹습니다. 햇볕 담은 풀을 먹습니다. 햇볕 담은 풀에 맺힌 사랑을 먹습니다. 내가 먹고 옆지기가 먹으며 아이들이 먹습니다. 사람은 돈이나 학력이나 아파트나 은행계좌를 먹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햇볕을 먹습니다. 사람은 물을 먹고, 바람을 먹습니다. 사람은 흙을 먹지, 아스팔트나 자동차를 먹지 못합니다. 사람은 햇살이 실린 무지개를 먹지, 원자력발전소나 전기를 먹지 못해요.


  내가 먹는 밥이 내 몸을 돌고 돌아 똥오줌 되어 흙으로 돌아갑니다. 내가 먹은 밥 그대로 우리 지구별 모습이 달라집니다. 내가 누리는 밥삶이 지구별이 앞으로 나아갈 모습입니다. 머리에 지식으로 가두는 이야기로는 지구별이 아름답게 이어갈 수 없습니다. 몸으로 즐겁게 누리는 이야기가 되어야 비로소 지구별이 한껏 푸른 빛깔로 온누리에 맑게 빛납니다. (4345.4.15.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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