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e’는 ‘生방송’인가
[말사랑·글꽃·삶빛 4] 바로바로 생각하는 말
오늘날 초등학교가 아직 국민학교라는 이름이던 1980년대 첫무렵, 어린 나는 동네 구멍가게에서 ‘해피라면’을 90원 치르고 사다 먹었습니다. 이무렵 라면은 오늘날처럼 ‘엠에스지’를 안 쓴다고 밝히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라면도 화학조미료와 화학성분이 많이 깃들지만, 이무렵에는 어떤 화학조미료와 화학성분을 쓰는지 따로 밝히지 않았어요. 이와 같은 라면을 거의 생각 없이 사다 먹었기에, 이제 어른이 된 내가 아이를 낳으면, 우리 아이들한테 아토피가 여러모로 나타날밖에 없다고 뒤늦게 깨닫습니다.
내 어릴 적을 떠올리면 나와 동무들은 ‘두드러기’가 곧잘 나타났습니다. 이를테면 꽃가루라든지 닭고기라든지 마늘이라든지 어떤 먹을거리에 두드러기를 보이는 아이가 있었어요. 내가 국민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들어가고 고등학생으로 지낼 무렵, ‘두드러기’라는 말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이무렵 사람들은 이즈음 더 도드라지게 나타나거나 더 모질게 드러나는 두드러기는 여느 ‘두드러기’라 할 수 없고 ‘알레르기(Allergie)’나 ‘알러지’라고 따로 가리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아마 두 가지는 똑같다 할 수 없겠지요. 그렇지만, 지난날이나 오늘날이나 국어사전을 뒤적여 두 낱말을 찾아보았을 때에는, 두 낱말을 굳이 달리 써야 할 까닭을 느끼지 못해요. 왜냐하면, ‘두드러기’를 영어로 옮기거나 독일말로 옮기면 어떻게 적어야 하느냐를 떠올린다면, 궁금함은 쉽게 풀려요.
서양사람은 ‘수레’를 가리키는 영어 ‘car’를 오늘날 싱싱 내달리는 자동차한테도 똑같이 붙여요. 한국사람이 ‘자동차’라 할 때에는 1930년대에 처음 들어온 탈거리한테뿐 아니라 1960년대 탈거리나 2010년대 탈거리한테도 똑같이 ‘자동차’예요. 더 맵시나거나 더 빠르다 해서 ‘자동차’라는 이름을 바꾸지 않아요. 기름 먹는 자동차가 아니라 물이나 햇볕을 먹는 자동차가 나오더라도 똑같이 ‘자동차’예요. 곧, 낱말 하나를 고스란히 살리면서 새로운 모습과 구실과 쓰임새를 더 넓고 깊게 담아내는 셈입니다.
한국말 ‘두드러기’는 새 모습과 구실과 쓰임새를 나타내는 자리에 쓸 수 있습니다. 한국사람 스스로 생각을 기울여 낱말뜻을 넓히면 됩니다. 한국사람 스스로 생각을 기울이지 않으면 ‘두드러기’ 같은 낱말은 오늘날 아이들 병치레를 가리키기에 걸맞을 만한 낱말이 될 수 없어요. 시나브로 사라지다가는 국어사전에 자그마한 자국으로 남는 낱말로 머물겠지요.
나는 어릴 적에 ‘해피라면’에서 ‘해피’가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둘레 어른 가운데 이 라면 이름을 따지거나 나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분이 없었습니다. 둘레 어른이 따지는 이야기는 딱 하나, ‘소고기라면’이 맞느냐 ‘쇠고기라면’이 맞느냐였어요.
어른들이 두 가지 이름을 나란히 쓰니 아이인 나로서는 헷갈리기만 합니다. 참말 어느 쪽이 맞을까요?
어른들 스스로 옳고 바르게 이름을 붙이지 않으며 툭탁거리셨는데, ‘소고기’이든 ‘쇠고기’이든 둘 모두 틀리다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소의 고기”라 해서 “소 + 의 + 고기” 꼴로 ‘쇠고기’로 적을 수 있습니다. 한국말은 ‘-의’를 애써 안 붙이며 새말을 빚기도 하는 만큼 “소 + (-의) + 고기” 꼴로 ‘소고기’로 적어도 돼요. 말이든 돼지이든 양이든 그냥 말고기, 돼지고기, 양고기라고만 가리켜요.
더 생각해 보면, 염소를 잡아서 삶는 고기라 하면 ‘염소고기’라 합니다. ‘염쇠고기’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다시금 생각합니다. ‘닭고기’라고 말하지 ‘닭의고기’라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달걀(북녘은 닭알)’이라 하지 ‘닭의알’이라 말하는 사람은 없어요. ‘오리알’ 아닌 ‘오리의알’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들풀 가운데 ‘닭의장풀’이 있어요. 흔히 ‘달개비’라 일컫는 풀인데, 닭장 밑에서도 잘 자란다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하더군요. 가만히 보면 올바르지 않다 싶은 ‘닭의장풀’ 꼴이에요. 왜냐하면 닭장 밑에서 잘 자라는 풀이라 하면 ‘닭의 장(에서 자라는) 풀’이 아닌 ‘닭장(에서 자라는) 풀’이라 이름을 붙여야 올바르거든요. 시골 흙일꾼이든 도시내기이든 ‘닭장’이라고 말하지 ‘닭의장’이나 ‘닭의 장’처럼 말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여러 가지 말씀씀이를 헤아리면,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옳게 살피거나 바르게 쓰지 못한다 할 만합니다. 띄어쓰기나 맞춤법을 높이 여기거나 꼼꼼히 따진다지만, 막상 띄어쓰기나 맞춤법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할 수 있어요.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한국말 문법’을 가르치기는 하지만, 아이들이 한국말 씀씀이를 옳고 바르며 알맞게 배운다 하기 힘들다고 느껴요. 사랑스레 쓰는 말이 못 되고 슬프게 깎아내리는 말입니다. 아름다이 쓰는 글이 못 되고 아무렇게나 쓰는 글입니다.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 생각합니다. 왜 라면공장 어른들은 ‘행복(幸福)라면’이라 이름을 못 붙이고 ‘해피(happy)라면’이라 이름을 붙였을까요. 아니, 왜 라면공장 어른들은 ‘즐거운라면’처럼 처음부터 한국말로 곱게 이름을 붙이는 길을 걷지 못했을까요. 누런쌀로 빚는 기름을 만드는 어느 공장에서는 ‘라온현미유’를 내놓습니다. ‘현미(玄米)’는 쌀겨 가운데 겉껍질만 벗겨 누렇게 보이는 쌀을 가리킵니다. 곧 ‘누런쌀’입니다. 속껍질까지 벗겨 하얗게 보이는 쌀은 흰쌀, 이른바 ‘백미(白米)’입니다. ‘현미유(-油)’란 현미로 짠 기름, 그러니까 누런쌀로 짠 기름인 셈입니다. 한국말로 이름을 붙이자면 ‘누런쌀기름’입니다. 포도씨로 기름을 짜면 ‘포도씨기름’이에요. 누런쌀로 기름을 짜 마련한 물건에 ‘라온’이라는 이름은 붙이지만, 뒤따르는 낱말은 더 살뜰히 보듬지 못해요.
‘라온’은 ‘즐거운’을 뜻하는 한겨레 옛말입니다. 곧, ‘라온현미유’란 “즐거운누런쌀기름”을 뜻하는 셈입니다. 예전에 ‘참나무통맑은소주’라는 술이름이 한 번 태어난 적 있으니, 이처럼 말뜻과 말결을 고이 살리며 이름을 붙이면 대단히 어여쁘지만, 이렇게 이름을 붙이며 말빛과 말삶을 살찌우자고 생각하는 어른이 아주 적습니다.
길을 걷다가 어느 빵집에서 길가에 내놓고 팔던 ‘바로빵’을 본 일이 있습니다. 그날그날 바로바로 구워서 팔기에 ‘바로빵’이라 했어요. 이와 비슷한 꼴이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끓여 먹는다는 ‘즉석(卽席) 라면’이 있어요. 이른바 ‘즉석 식품’입니다. 어느 은행에서는 현금인출기를 ‘바로바로 코너’라고 일컫습니다. 그 자리에서 ‘바로바로’ 돈을 뽑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어릴 적 동네 동무들이 “야 지금 바로 나와!” 하면서 부른 적 있습니다. 1980년대 일인데, 동무들과 한창 골목에서 노는데, 만화영화라든지 프로야구라든지 사내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무언가 텔레비전에서 나오면 “바로 나와!” 하고 외치면서 다 같이 집으로 돌아가서 보자고 했어요. 어른들도 으레 이런 말을 했어요. 텔레비전을 보면서 “어, 저기 바로 나오네!” 하고.
나는 그때에나 요즈음에나 제대로 깨닫지 못했지만, 예전 동무들이나 어른들이 으레 톡톡 내뱉던 ‘바로’가 바로 ‘live’나 ‘生방송’을 일컫는 한 마디였습니다.
일본사람은 영어 ‘live’를 한자를 빌어 ‘生放送’으로 번역했습니다. 한국사람은 일본사람이 영어를 번역한 낱말을 글꼴만 한글로 적어 ‘생방송’이라 말합니다. 처음에는 ‘생방송’이라 하는 일본 한자말이 아무렇지 않게 쓰였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이 일본 한자말을 그대로 쓰면 나쁘다 하여 ‘현장 방송’으로 고쳐써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국립국어원 국어사전 풀이를 살펴도 ‘생방송’은 바로잡아야 할 낱말로 다룹니다. 그렇지만,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방송에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 ‘생방송’을 ‘현장 방송’으로 고쳐쓰거나 바로잡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마 ‘현장 방송’이라는 낱말이 썩 안 어울린다고 여겨 안 쓰거나 아예 눈길을 안 두기 때문일 텐데, 이러하다면 한국 방송국에 알맞을 만한 새 한국말을 지어야 하겠으나, 새 낱말을 지으려고 생각을 기울이는 사람 또한 없습니다.
곰곰이 헤아린다면, 방송국 일꾼도 스스로 모르게 “자, 이제 바로 찍겠습니다.” 하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말마디에서 ‘바로’는 ‘현장(現場)’을 가리킵니다. ‘바로’는 ‘이곳’과 ‘이때’를 아울러 가리키는 낱말입니다. 곧, 일본 한자말 ‘생방송’을 한국말답게 적바림하려 했다면 ‘현장 방송’보다는 ‘바로 방송’이라 적바림했어야 한결 걸맞았으리라 느껴요. 텔레비전 화면 한쪽에 ‘生’이나 ‘생’이나 ‘live’라는 낱말을 넣기보다는 ‘바로’라는 낱말을 넣으면 참 잘 어울립니다.
다만, ‘바로’가 아무리 잘 어울린다 하더라도 이 낱말을 스스로 써 버릇하지 않으면 익숙하게 쓰기 어렵습니다. 여느 때에 제대로 이 낱말을 쓰지 않으면, 이 낱말 쓰임새가 얼마나 넓은지 헤아리지 못할 뿐 아니라, 알맞게 쓰지도 못합니다.
생각을 할 때에 사랑스럽게 쓰는 말입니다. 생각을 기울일 때에 아름답게 빚는 말입니다. 생각을 펼칠 때에 슬기롭게 가다듬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한국사람은 한국말로 생각하는 꿈이 없습니다. (4345.4.8.해.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