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비 이야기
송진헌 글 그림 / 창비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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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마음을 주고받고 싶어요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44] 송진헌, 《삐비 이야기》(창작과비평사,2003)

 


  아이를 데리고 어디를 다니면 둘레 어른들이 아이한테 으레 사탕을 내밉니다. 어느 어른은 껌을 내밉니다. 아이한테 무언가 준다는 마음은 고맙지만, 사탕이나 껌을 주는 모습은 그리 반갑지 않습니다. 아이 몸에 사탕이나 껌이 좋다고 여기는가 싶어 슬프기도 하고, 힘겹습니다.


  주는 마음은 고맙기에 언제나 마음을 받고 싶습니다. 따로 사탕이나 껌이라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먹을거리를 받고 싶지 않습니다. 좋은 마음을 받고 싶어요. 좋은 사랑을 받고 싶어요. 나도 좋은 마음을 나누고 싶고, 좋은 사랑을 펼치고 싶어요.


.. 삐비는 겨울 내내 집 안에 갇혀 있었지 ..  (7쪽)

 


  이제껏 사탕이나 껌을 내민 어른들 가운데 먼저 아이 어버이한테 한 마디 물은 어른을 본 적 없습니다. 아이 곁에서 어버이가 “사탕 안 주셔도 돼요.” 하고 말하면 그제야 “아, 사탕을 주면 안 되었구나.” 하면서 잘못했다 말하는 분이 있고, 이런 말을 해도 “그래도 괜찮아.” 하면서 억지로 아이 손에 사탕을 쥐여 주거나 아예 봉지를 까서 입에 넣으려는 분이 있습니다.


  다 다른 사람이 다 다르게 살아가니 다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할 수 있습니다만, 서로서로 다 다르게 살아가는 다 다른 사람인 줄 모르거나 생각하지 않으니, ‘주는 마음’이 ‘받는 마음’하고 똑같으리라 여기곤 합니다.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내 몸에 안 받는 무언가를 누군가 먹으라고 준다면 마음속으로 확 거스르고 싶다는 생각이 피어납니다. 내가 딱히 읽고 싶지 않은 책을 읽으라며 한 권 열 권 백 권 선물해 준다 하면, 이 책더미는 너무 무거운 짐이 됩니다.


  좋다 하는 밥이라서 좋은 밥이 되지 않아요. 좋다 하는 책이기에 좋은 책이 되지 않아요. 좋은 마음을 나누며 좋은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좋은 삶이 될 때에 즐겁습니다.

 

 


.. 삐비는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 말고는 아무것도 손에 대지 않았어. 봄이 다 갈 때까지 타박타박 숲속을 돌아다녔지 ..  (15쪽)


  아이를 마주 바라보면서 눈빛을 그윽하게 들여다보며 빙긋 웃는 어른이 반갑습니다. 아이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따스히 말 한 마디 들려주는 어른이 반갑습니다.


  그러고 보면, 나부터 내 아이와 옆지기한테 따스한 말마디를 들려주는 내 모습일 때에 내 삶이 좋습니다. 나 스스로 내 아이와 옆지기를 그윽하게 바라보며 빙긋 웃는 매무새일 때에 내 하루가 빛납니다.


  다른 무엇이란 있을까요. 다른 더 좋은 삶이나 다른 더 빛나는 하루가 있을까요.

 

 


.. 이제는 나도 삐비를 피해 다녔어. 집에 가는 길에 삐비를 보아도 모르는 척 지나쳤지. 학교에 다니는 것은 무척 바쁜 일이거든. 친구들과 할 일도 많고 ..  (28∼29쪽)


  말없이 빙긋 웃기만 해도 즐겁습니다. 아직 걷지 못하는 작은 아이를 품에 안고 동네 한 바퀴 마실을 해도 즐겁습니다. 집 앞 논둑에서 줄줄이 피어나는 온갖 들꽃을 찬찬히 내려다보아도 즐겁습니다. 마당에 서서 밤하늘 뭇별을 잔뜩 올려다보아도 즐겁습니다.


  밥 한 끼니 함께 먹는 살붙이가 고맙습니다. 물 한 모금 길어서 마실 수 있어 고맙습니다. 아이들 옷가지를 따순 햇살이 보송보송 말려 주니 고맙습니다. 내가 뿌리거나 심지 않은 풀과 나무가 봄을 맞이해 새롭게 기운을 차리며 푸른 내음 나누어 주는 일이 고맙습니다.


.. 어느 여름, 소나기가 쏟아지던 날, 나는 숲속에서 비를 맞고 있는 삐비를 보았어. 나도 모르게 도망쳤지 ..  (32쪽)

 


  송진헌 님 그림책 《삐비 이야기》(창작과비평사,2003)를 읽습니다. 보드라우며 푸근하게 느낄 만한 그림결이 좋습니다. 그런데, 나무랑 풀이랑 모두 똑같이 생긴 모습으로 그리니 어딘가 걸맞지 않구나 싶어요. 그림책에 나오는 아이들 얼굴을 모두 똑같이 그리지 않듯, 나무는 모두 다른 나무일 텐데요. 들과 멧자락에 자라는 풀은 모두 다른 풀일 텐데요. 다 다른 나무가 얼기설기 섞일 텐데요. 같은 갈래 나무라 하더라도 크기와 잎사귀와 가지가 다를 텐데요. ‘풀’이라 하더라도 숱한 풀이 한 곳에서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자랄 텐데요.


  문득 느낍니다. 어쩌면, 이 그림책에 나오듯이 ‘어린 동무 삐비’하고 눈을 마주치지 않던 모습이, ‘마을 동무 삐비’하고 한동안 함께 놀다가 그만 ‘학교 동무’들 말에 이끌려 삐비하고 등지던 삶이, 그림결에 시나브로 물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가만히 바라볼 때에는 보드라우며 푸근하지만, 곰곰이 들여다볼 때에는 ‘왜 꼭 다 다른 나무를 다 똑같이 틀에 박힌 모습으로 그려야 하는가’ 하고 생각하도록 이끄는구나 싶어요. 다 다른 나무와 다 다른 풀을 다 다른 결과 무늬로 그리면서도 얼마든지 보드라우며 푸근하게 느끼도록 보여줄 수 있거든요. 언제나 나 스스로 포근한 마음이 될 수 있고, 늘 나부터 보드라운 사랑이 될 수 있어요.


  어린 동무요 마을 동무 삐비는 아직 숲속에서 비를 맞으며 누군가를 기다리리라 생각해요. 어릴 적 숲이 고속도로로 밀리거나 댐으로 잠기거나 공장으로 파헤쳐지거나 아파트로 바뀌었을지라도, 어린 동무요 마을 동무 삐비는 이 아이가 기다리는 동무가 찾아올 수 있도록 조그마한 풀숲 한 귀퉁이를 찾아 가만히 지켜보며 기다리리라 믿어요. (4345.3.24.흙.ㅎㄲㅅㄱ)


― 삐비 이야기 (송진헌 글·그림,창작과비평사 펴냄,2003.4.30./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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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2-03-25 08:17   좋아요 0 | URL
저는 처음 듣는 작가, 처음 보는 책인데, 마음이 뭉클뭉클 해지는군요. 그림도 좋고 내용도 좋고요. 나무가 다 비슷해보이는 것, 저는 그래서 그냥 눈감아 주고 싶어요 ^^

숲노래 2012-03-25 09:22   좋아요 0 | URL
그렇게 눈감아 줄 수 있기도 해요.
그런데, 그렇게 눈감다가는, 이분 그림밭이
더 즐겁고 넓게 뻗어 나갈 수 없겠구나 싶어
한 마디 붙였어요.

그저 이 그림책 하나로 끝낼 송진헌 님은 아니라고 느끼거든요.
저는 이분 그림을 <휠체어를 타는 친구>라는 동화책 사잇그림으로
처음 만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