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모 시전집 - 전2권
정한모 지음 / 포엠토피아 / 2001년 2월
평점 :
절판


<아가의 방>은 오래되어 안 뜨기에, 다른 책에 이 느낌글을 걸칩니다. 



 시를 읽는 사람은 시를 써요
 [헌책방에서 만난 책 10] 정한모, 《아가의 방》



- 책이름 : 아가의 방
- 글 : 정한모
- 펴낸곳 : 문원사 (1970.10.30.)



 시를 읽는 사람은 시를 써요. 사랑을 읽는 사람은 사랑을 나눠요. 꿈을 꾸는 사람은 꿈을 키워요. 돈을 버는 사람은 돈을 낳아요.

 묵은 시집 하나 꺼내어 읽습니다. 내가 태어나기 앞서 태어난 시집 하나 읽습니다. 350킬로미터 넘는 길을 짐차에 실리다가 일꾼들 등짐에 얹혀 새 터에 내려지던 책꾸러미 가운데 꼭 하나 풀려, 이 책꾸러미 책들이 바닥에 와르르 쏟아집니다. 이 책들을 추스르다가 묵은 시집 하나 눈여겨봅니다. 등짐을 나르느라 땀이 줄줄 흐르기에, 젖고 지저분한 손은 옷섶으로 슥슥 닦고는 묵은 시집 하나 창가에 세웁니다. 새벽녘 일을 끝마치고 이 시집 하나 살림집으로 가지고 돌아옵니다.


 문은 닫혀 있었다 //
 거울속에 우물울 / 우물속에 하늘을 / 하늘속에 아가를 //
 아가는 ‘아가’와 / 살고 있었다 / 풀잎 이슬 반짝이는 /
 아침의 들길을 / 노을비낀 저녁하늘 / 잠겨 있는 바다빛을 //
 아가는 ‘아가’와 / 살고 있었다 //
 메아리는 숨죽여 / 기다리고 있었다 //
 바람을 / 목소리를 / 몸을 떨며 / 산을 흔들 /
 산만큼한 보람을 / 쩌렁쩡 울어볼 / 눈이 부신 / 금빛을 //
 메아리는 귀를 세워 / 기다리고 있었다 //
 소리는 빛을 몰고 / 다가오고 있었다 ..  (서시)


 한 번 쓰고 버리는 물건을 장만하는 사람은 쓰레기를 낳습니다. 유기농 푸성귀를 유기농 물건 파는 가게에서 장만하더라도, 비닐봉지 쓰레기가 나옵니다. 물건 싸게 파는 가게에서 봉지라면 다섯 개들이를 사더라도 라면 다섯 봉지 비닐에다가, 다섯 봉지를 따로 묶은 큰 봉지 하나 쓰레기로 나옵니다. 이 라면꾸러미를 담은 까만 비닐봉지 또한 쓰레기가 됩니다. 라면공장에서는 어떤 쓰레기가 태어났을까요. 라면공장에서는 어떤 쓰레기물을 흙과 냇물에 흘렸을까요. 라면공장에서는 어떤 쓰레기바람을 바깥으로 내보냈을까요.

 사람들은 쓰레기를 만들고 쓰레기를 쓰며 쓰레기를 버립니다. 서울이든 부산이든 대구이든, 서울시장 부산시장 대구시장 없더라도 서울이며 부산이며 대구이며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서울과 부산과 대구에서 쓰레기를 치우는 일꾼이 하루라도, 아니 한 시간이라도 두 손 들며 일손을 멈추면, 이들 도시는 그만 꽝 하고 터집니다. 건물을 비질하거나 걸레질하는 청소 일꾼이 일손을 멈추든, 쓰레기차 몰며 쓰레기를 거두는 일꾼이 일손을 멈추든, 쓰레기터에 쓰레기를 묻는 일꾼이 일손을 멈추든, 쓰레기물을 걸러 바다로 버리는 일꾼이 일손을 멈추든, 누구 하나 ‘쓰레기 치우는 일꾼 일손’이 멈출 때에는 크고작은 모든 도시가 와르르 무너집니다.

 돈이 있으면 쓰레기봉투를 살 테지요. 그렇지만 돈으로는 맑은 바람을 살 수 없어요. 돈으로는 밝은 햇살을 살 수 없어요. 돈으로는 시원한 물을 살 수 없어요.

 돈으로는 사랑을 살 수 없어요. 돈으로는 꿈을 살 수 없어요. 돈으로는 이야기를 살 수 없어요. 오직 사랑으로 사랑을 빚어요. 오직 꿈으로 꿈을 일구어요. 오직 이야기로 이야기를 낳아요.


.. 굴 안에 퍼지는 / 햇살같은 마음소리 //
 울음은 가두었다 / 꿈길에나 터트리고 //
 한 줌 가슴 / 산을 안고 /
 발돋움 돋음하는 / 작은 새야 ..  (작은 새)


 묵은 시집 《아가의 방》(문원사,1970)을 읽습니다. 묵은 시집, 작은 시집, 조촐한 시집을 찬찬히 읽습니다. 이 시집은 어느덧 마흔 해 남짓 묵은 시집이 되는데, 이 시집을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요. 이 시집이 갓 태어나던 때 애틋이 사랑하던 손길은 얼마나 있을까요. 이 시집에 깃든 말보배를 하나하나 구슬로 엮어 목에 걸거나 마음에 심은 분은 얼마쯤 있는가요.

 오늘도 어김없이 동이 틉니다. 눈부신 햇살이 우리 마당으로 흘러듭니다. 따사로운 남녘 고운 햇살을 느낄 무렵, 네 살 첫째 아이는 크게 하품을 합니다. 이제 곧 일어나겠군요. 아이는 제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받으면 사랑을 먹으며 씩씩하게 자랍니다. 아이는 제 어버이한테서 꾸지람을 받으면 꾸지람을 먹으며 밉게 큽니다.

 시를 읽는 사람은 시를 쓰듯, 사랑을 먹는 아이는 사랑을 일굽니다. 책을 읽는 어버이는 책으로 마음밭을 꾸리듯, 믿음을 먹는 아이는 믿음을 예쁘게 보듬습니다.


 얼어붙은 노여움들이 /
 때묻은 겨울의 누더기를 걸치고 /
 저기 가고 있다 ..  (봄)



 빨래하는 소리 복복복, 온 집안을 울립니다. 손으로 빨래하는 소리 북북북, 부엌을 지나 마루를 건너 방으로 흘러듭니다. 아이들은 빨래소리를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아마 어버이 스스로 받아들이는 만큼 받아들일 테고, 어버이하고는 또 다르게 새로운 결과 무늬와 소리와 내음으로 맞아들이겠지요.

 파리 잡는 소리 탕탕탕, 온 집안에 퍼집니다. 날이 폭한 남녘땅에는 파리가 제법 많습니다. 이 녀석들, 이 집이 따뜻하니까 자꾸 집으로 들어오나. 잡혀 죽는 파리한테 미안하지만, 파리를 잡으며 미안하다고 여기지 못하고, 얼마나 빨리 이 녀석들 씨를 말리나 하고만 생각합니다.

 잠에서 깬 아이 볼을 부비면 저절로 노랫소리 흐릅니다. 잠에서 깬 어른들 볼을 부빌 때에도 시나브로 웃음소리 터질까요. 이제 아침햇살은 온 들판과 멧자락을 노랗게 물들입니다.


 지금쯤 / 흙 속에 묻혀 있는 /
 달래알만한 크기를 하고 /
 아가는 보얀 진주의 밝음으로 /
 아지랑이 같은 생명의 실에 매달려 /
 피어오르며 숨쉬며 하고 있을까 //
 개나리가 피고 / 이파리가 돋아나고 /
 환한 웃음으로 봄이 만개하듯이 /
 밤의 어둠을 가르며 /
 대낮의 밝음을 뒤흔들며 /
 커다랗게 터져나올 울음이여 ..  (목숨의 소리)


 정한모 님 시집 《아가의 방》은 어떤 시집일까 헤아립니다. 정한모 님 사랑을 담은 시집일까요. 정한모 님 꿈을 담은 시집일까요. 정한모 님 삶을 담은 시집일까요. 정한모 님 하루하루 살가운 이야기를 담은 시집일까요.

 이 시집 《아가의 방》을 읽는 사람들은 무엇을 읽을는지 곱씹습니다. 이 작은 시집을 읽으며 사랑을 읽을까요. 이 묵은 시집을 들추면서 꿈을 읽을까요. 이 낡은 시집을 읽으며 살가운 이야기를 읽을까요. 이 조촐한 시집을 읽으면서 내 삶을 되새길까요.


 무덤 속에서 울려나오는 / 지훈의 목소리가 /
 초록빛 바람에 나부낀다 //
 1년이 지났는데 / 아직도 숨찬 쉰 목소리 //
 “묻혀서 사는 이의 / 고운 마음을 //
 아는 이 있을까 / 저허허노니” //
 그래서 / 백금의 보자기에 / 싸가지고 갔겠지 //
 이제는 아무도 다치지 못하는 / 그 고운 마음을 ..  (그 고운 마음을)



 착하게 살아가고 싶기에 착하게 말을 하며 착하게 생각합니다. 아름다이 어깨동무하고 싶기에 아름다이 글을 쓰고 아름다이 생각합니다. 좋은 빛을 누리고 싶을 때에는 좋은 넋을 살찌워 좋은 무지개꽃을 키웁니다. 좋은 바람 나누고 싶을 때에는 좋은 얼을 일으켜 좋은 풀꽃을 돌봅니다.

 이 고운 마음을 아껴 주셔요. 이 고운 글줄을 보살펴 주셔요. 이 고운 이야기 하나 마음밭에 건사하는 아이들을 사랑해 주셔요. 이 고운 삶을 이어갈 어여쁜 사람들 오늘 하루를 살가이 어루만져 주셔요. (4344.11.15.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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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11-15 23:38   좋아요 0 | URL
네, 하고 대답하고 싶어지는 마지막 글귀였습니다.

인용하신 시가 너무 아름답네요, 입으로 가만가만 읽어봅니다.
즐거운 하루 되시고, 책은 쉬엄쉬엄 푸시구요.

숲노래 2011-11-16 05:20   좋아요 0 | URL
스스로 예쁘게 살아가고픈 꿈을
사람들 누구나 착하게 아낄 수 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