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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 - 발도르프 선생님이 들려주는 진짜 독일 동화 이야기 2
이양호 지음 / 글숲산책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엉뚱한 번역과 바보스런 문화가 빚은 ‘신데렐라’
[책읽기 삶읽기 80] 이양호,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글숲산책,2009)
사진책 《다카페 일기》(북스코프)를 보면, 사진을 찍은 사람과 이이 옆지기와 이이하고 함께 사는 개 이름은 ‘일본말’로 적지만, 이이 두 아이 이름은 ‘한국말’로 옮겨서 적습니다. 참으로 뚱딴지 같다 할 노릇이지만, 2010년대에도 이러한 일이 벌어집니다. 《다카페 일기》를 쓴 일본사람은 당신 아이한테 일본말로 ‘바다’와 ‘하늘’이라는 뜻으로 이름을 붙였는데, 이를 한국말로 옮겨서 적으면 어찌 되나요. 거꾸로, 한국사람 이름인 ‘최바다’와 ‘최하늘’을 일본책에서 일본말로 옮겨서 적으면 얼마나 엉뚱하게 되고 말까요.
북중미 토박이 이름을 일컬을 때에 ‘레드 크라우드’처럼 적는 일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이때에는 북중미 토박이들이 쓰는 ‘북중미 토박이 이름’을 써야 합니다. 이 소리값이 남지 않았다면, 영어를 쓰는 미국사람이 붙인 ‘레드 크라우드’가 아닌 한국말로 옮긴 ‘붉은 구름’처럼 적어야 올바릅니다.
어린이나 어른이나 두루 잘 아는 ‘삐삐’라는 말괄량이가 있습니다. 어린이책과 영화에 나온 ‘삐삐’는 요즈음 번역에서는 ‘삐삐 롱스타킹’이라는 이름으로 적습니다. 그러나, 이 이름 또한 올바르지 않습니다. 삐삐는 미국사람이나 영국사람이 아닌 스웨덴사람이니까요. 삐삐 이름은 ‘스웨덴말’로 적어야지 ‘영어’로 적어서는 안 됩니다. 스웨덴말로 어떻게 적는지를 잘 모른다면, 영어 ‘롱스타킹’이 아닌 한국말 ‘긴양말’로 적어야 마땅합니다. 삐삐는 ‘삐삐 긴양말’입니다.
이양호 님이 쓴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글숲산책,2009)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신데렐라’는 영어를 쓰는 나라 사람들이 새로 지어서 붙인 이름입니다. 정작 독일에서 ‘옛날 작은 이야기’를 갈무리하며 내놓은 책에는 ‘신데렐라’라는 이름이 없다고 합니다. 한국말로 옮긴다면 ‘재투성이’나 ‘부엌데기’가 될 독일 이름만 있다고 합니다. 곧, 한국에서 이야기하는 ‘신데렐라’란 엉터리로 옮겨서 터무니없이 퍼진 잘못된 이름이요 책인 셈입니다.
.. 우리 발음 체계에서 나오는 ‘신데렐라’란 소리는 아름답고 가볍다. 여기에 쌍드리옹과 아센푸틀의 뜻인 재투성이, 부엌데기가 가지고 있는 슬픔과 무거움이 자리할 곳은 없다. ‘신데렐라’라고 소리를 내는 순간, 슬픔에 젖어 축 가라앉아 있는 인간은 사라져 버린다 .. (11∼12쪽)
가만히 생각하면, 이 나라에서는 ‘신데렐라’라는 이름을 비롯해서 ‘신데렐라 얼굴’까지 제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땡볕에서 밭일을 하고 집안일을 도맡을 뿐 아니라 노예처럼 시달리고 들볶이던 찬밥덩어리 일꾼이 ‘재투성이’입니다. 그러면, 이 아이 재투성이는 어떤 낯빛일까요. 팔뚝과 손마디와 허벅지는 어떤 모습일까요. 하루 내내 고단하게 온갖 일을 떠안아야 하던 괴로운 아이는 살빛이 어떠할까요.
다시금 돌이키면, 나 또한 어릴 적부터 ‘참다운 신데렐라 모습’을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예나 이제나 ‘신데렐라라는 이름은 거짓’이요 ‘재투성이라는 이름이 참’인 줄을 깨달아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이 이야기 속살이나 알맹이를 옳게 들려준 어른은 없었어요.
.. “발뒤꿈치를 조금 잘라내 버려라. 왕비가 되면 걸어다닐 일이 없을 테니까.” .. (72쪽/재투성이 번역)
나이를 제법 먹어 곧 마흔 줄에 접어듭니다. 두 아이는 무럭무럭 자랍니다. 이즈음 비로소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야기 번역보다 이야기 비평(또는 풀이)으로 이루어진 책이라 할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를 만나지 않았다면, 퍽 예전부터 잘못 퍼지고 엉뚱하게 알려진 이야기 한 자락에 그대로 휘둘렸으리라 봅니다.
하기는, 이 나라에 잘못 알려지거나 엉뚱하게 퍼진 이야기는 한둘이 아닙니다. 신데렐라만 이와 같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옛이야기가 오늘날 한국에서 ‘뚱딴지 살’이 붙고 ‘바보스러운 손질’로 얼룩졌을는지요. 나라밖 문학을 제대로 옮기는 분이 몇이나 될는지 아리송합니다.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를 내놓은 이양호 님도 ‘재투성이’ 번역은 영 어설픕니다. 학문으로 파헤치거나 전문지식을 다루는 데에서는 훌륭하다 여길 수 있습니다만, 문학을 문학다이 맞이하면서 살가이 나누는 자리에서는 좀 젬병입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번역하는 분들 발자취를 살피거나, 번역하는 분들을 소개하는 책날개 글을 읽어 보면, 무슨무슨 대학교를 나왔다거나 나라밖 어디로 배우러 다녀왔다는 이야기는 적힙니다. 그렇지만 막상 ‘한국말을 어디에서 누구한테서 배웠’으며 한국말을 얼마나 잘 할 줄 안다든지, 한국말을 옳고 바르게 쓰려고 어느 만큼 힘쓰는가 하는 이야기는 한 줄이나 한 마디로도 적히지 않습니다.
굳이 안 적어도 될는지 모르지요. 한국사람이니 한국말을 못 하겠느냐 여길는지 모르지요.
그러면, 한국사람 가운데 한국말을 옳고 바르게 깨달아 옳고 바르게 쓰는 사람은 참말 있기나 있나 알쏭달쏭합니다. 대학교 국문과 교수는 한국말을 옳고 바르게 쓰나요. 중·고등학교 국어 교사는 한국말을 참답고 알맞게 쓰나요.
.. 거죽도 그 대상의 한 부분이기에, 거죽을 핥은 사람이 느낀 맛을 깡그리 틀렸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제대로 맛본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이 이야기의 겉만 만진 데는 여러 까닭이 있겠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깔끔하지 못한 번역과 옛이야기를 어린애만을 위한 것으로 여기는 데에 그 탓이 있는 듯하다 … ‘재투성이’ 이야기를 두고 일반 사람들은 동화라 하고 학자들은 민담이라고 한다. 이러한 문학 장르를 최초로 갈무리한 독일에선 메르헨이라 하는데, 그 뜻은 ‘작은 이야기’일 뿐이다. 거기엔 동화에 있는 아이 동童도 없고, 민담에 있는 백성 민民도 없다 .. (13, 16쪽)
어린이문학 평론을 하는 분들은 ‘메르헨’이라는 낱말을 붙잡고 늘어집니다. 그저 ‘작은 이야기’일 뿐인 ‘메르헨’이라지만, 아예 ‘메르헨 장르’까지 만들곤 합니다. ‘판타지’라는 낱말을 붙잡고 늘어지는 모습하고 비슷한 셈인데요, 이양호 님 말마따나 거죽핥기로 그치는 노릇입니다. 알맹이를 건드리지 않고, 속살을 다루지 않으며, 껍데기에 매달리는 모양새입니다.
곰곰이 따지면, 재투성이 이야기가 신데렐라 이야기로 바뀐 까닭 가운데 하나는, 예부터 ‘한국 어린이 번역 문학’은 으레 ‘일본 다이제스트 판을 살짝 베낀 문학’에서 싹텄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한국땅 어른들은 한국땅 아이들이 한겨레 넋을 아끼며 살아가는 길을 좀처럼 열지 못한 탓이라고 느낍니다. 한국땅 어른들 스스로 한국땅 아이들이 한겨레 얼을 빛내며 자라는 길을 도무지 열지 않은 탓이라고 느껴요.
삐삐 이야기를 쓴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은 스웨덴사람이지만, 린드그렌 님 스웨덴문학을 스웨덴말을 익혀서 한국말로 옮기는 번역쟁이는 아주 드물거나 아예 없습니다. 으레 독일말로 옮겨진 책을 한국말로 옮깁니다. 네덜란드문학을 네덜란드말을 배워서 한국말로 옮기는 문화가 있을까요. 으레 독일말이나 영어로 옮겨진 네덜란드문학을 한국말로 옮기기만 합니다. 《안네의 일기》가 수없이 많은 판으로 떠돌지만, 시중에 나온 《안네의 일기》 가운데 네덜란드말로 된 책에서 한국말로 옮긴 판은 아예 없습니다.
끝으로 덧말을 하나 붙이면,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라는 책은 편집을 하며 빈자리를 너무 많이 만들고 판을 아래로 길쭉하게 만드는 바람에 책값이 좀 뻥튀기가 되었습니다. 재투성이 독일말과 영어 자리는 글자를 작게 해도 되고, 한글 밑에 작게 붙여도 됩니다. 쪽수와 부피와 크기를 훨씬 줄여 값싼 책으로 엮을 수 있던 책입니다. (4344.9.20.불.ㅎㄲㅅㄱ)
―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 (이양호 글,글숲산책 옮김,2009.10.31./14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