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머지 학교 나의 학급문고 6
이가을 지음, 임소연 그림 / 재미마주 / 200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이들을 왜 학교에 보내는가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96] 임소연·이가을, 《나머지 학교》(재미마주,2002)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다면, 아이들이 학교에서 무엇인가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집에서 지내며 배울 수 없는 무엇인가를 학교에서 배울 수 있다고 여기니, 학교에 아이들을 보낸다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예나 이제나,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면서 ‘학교가 무엇을 가르치는가’를 미리 찬찬히 헤아리는 어버이는 퍽 드물지 않느냐 하고 느낍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맡는 교사 또한, 아이들이 집에서 배울 수 없고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무엇인가가 ‘참말 무엇인지’를 옳게 살피거나 느끼지 못하는구나 싶어요.

 학교는 교과서를 가르치거나 배우는 데가 아닙니다. 오늘날 학교는 교과서에다가 갖가지 특기적성과 외국어를 앎조각으로 집어넣는 곳이 되고 말았지만, 학교는 지식이나 정보나 특기나 직업훈련으로 뒤엉킨 곳일 수 없습니다. 학교는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마주할 이웃을 배우고 삶을 느끼며 사랑을 깨닫는 가슴을 북돋우는 곳입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만나는 교사는 집에서 함께 지내는 어버이와 같아야 합니다. 어버이 노릇을 하라는 교사가 아닙니다. 어버이가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몸으로 보여주고 마음으로 나누는 넋’이 무엇인가를 옳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곧, 교사는 어버이다움을 알아야 하고, 어버이는 교사다움을 알아야 합니다.

 먼 옛날부터, 그러니까 학교라는 틀이 없던 먼 옛날부터, 이 땅이건 이웃 땅이건 교사라는 사람은 따로 없었습니다. 양반집 아이들이 다니던 서당이 있었다 하고, 더 옛날에는 권력자 집안 아이들을 가르치는 시설이 있었다 하지만, 이 땅 95%가 넘는 아이들은 배움터라는 데에 발을 들이지 않았습니다. 모두 작은 집에서 작은 어버이들하고 복닥이면서 살았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와 할머니와 할아버지, 때로는 4촌과 6촌과 8촌으로 퍼지는 살붙이하고 함께 살았습니다. 어버이는 언제나 몸으로 보여주면서 가르쳤습니다. 따로 가르친다고 말할 구석 없이 몸으로 보여주며 살아냈습니다.

 집안에서 집안일을 합니다. 집밖에서 집밖일을 합니다. 지게를 만들어 멧자락으로 들어선 다음 나무를 하고 나서 즐거이 짊어지고 돌아옵니다. 장작에 불을 지펴 아궁이를 땝니다. 우물이나 냇가에서 물을 길어 밥을 하고 국을 끓이며 여물을 쑵니다. 비질을 하고 걸레질을 합니다. 빨래를 하고 바느질을 합니다. 누에를 치고 실을 자으며 물레를 돌리고 베틀을 밟습니다. 설거지를 하고 장과 반찬을 담그며 메주를 띄웁니다.

 사람이 살아가자면 밥·옷·집이 있어야 합니다. 예부터 여느 사람들은 배움터라는 데를 다니지 않아도 스스로 밥과 옷과 집을 마련했습니다. 예부터 여느 사람들 여느 집안에서 아이를 낳은 다음에는 누구나 ‘어버이가 아이들하고 함께 일하고 놀면서’ 삶을 가르치거나 물려주었습니다.


.. ‘골말로 오지 말고 논두렁길로 바로 올 걸 그랬나?’ 채옥이는 뛰며 생각합니다. 그러나 삼 년을 하루같이 지름길로 오지 않고 도는 골말로 다닌 건, 골말 사는 동무들과 같이 오기 위해서입니다. 채옥이가 사는 마지라오에는 초등학생이 채옥이 한 명뿐입니다 ..  (11쪽)


 오늘날 어버이 가운데 밥·옷·집을 스스로 마련할 줄 아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아예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집에서 아이들하고 함께 살아갈 수 없습니다. 아이들을 학교로 보내서 ‘직업 적성’이나 ‘특기 적성’을 알아야 합니다. 어른이나 아이나 한결같습니다. 어른은 오늘 돈을 벌어야 하고, 아이는 앞으로 돈을 벌어야 합니다. 오늘날 어른이나 아이나 내 삶을 내 손으로 일구지 못합니다. 내 삶에서 마련해야 하는 밥·옷·집을 스스로 마련할 길을 찾지 못합니다. 돈만 벌어 돈만 쓰는 삶이기 때문에, 밥·옷·집을 옳게 깨닫거나 들여다보거나 살피지 않습니다. 돈이 없으면 밥·옷·집을 어찌하지 못합니다.


.. 채옥이는 창문을 모두 활짝활짝 열었습니다. 그리고 먼저 먼지털이로 구석구석 먼지를 털고 나서 비로 쓸었습니다. 그리고 걸레를 빨아 책상과 교탁을 닦았습니다. 그렇게 한참 청소를 하고 나니 땀이 났습니다. 교실을 둘러보니 아주 깨끗했습니다. 선생님이 보셨으면 칭찬을 해 주시고 번쩍 들어안아 줬을 것입니다 ..  (26쪽)


 그림책 《나머지 학교》(재미마주,2002)를 읽습니다. 《나머지 학교》에 나오는 작은 학교 무대가 된 영월책박물관은 이제 영월에 없습니다만, 《나머지 학교》는 영월 작은 학교에 책박물관이 들어선 때이든 들어서지 않던 때이든 늘 자그마한 배움터였습니다. 이 자그마한 배움터로 다니던 아이들은 이 자그마한 배움터를 굳이 다니지 않아도 ‘살아가며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살아가는 작은 멧자락 작은 집에서 작은 어버이들하고 부대끼면서 밥·옷·집을 고스란히 물려받으니까요.

 《나머지 학교》에 나오는 ‘채옥이’는 텅 빈 학교를 홀로 치웁니다. 혼자서 깔끔하게 쓸고닦습니다. 작은 몸뚱이 작은 힘으로 학교를 건사합니다. 아이가 도시락을 싸서 먹는지까지 나오지 않습니다만, 아마 아이는 쌀이랑 된장만 집에서 가져오면, 나머지 반찬거리는 멧자락이나 들판에서 뜯어서 얻을 테니까, 혼자 즐거이 낮밥을 먹으리라 봅니다. 오늘날은 집에서 누에를 치고 실을 자아 물레를 돌리며 베틀을 밟는 일이 없으니 ‘옷짓기’를 따로 하지는 못한다지만, 채옥이만 한 아이라면 바느질을 잘 하리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 아이는 뜨개질도 잘 할는지 모릅니다.

 읍내 학교에 굳이 갈 까닭이 없습니다. ‘교과서 진도’를 나가야 한다면, 이 그림책에 나오듯 아이 혼자서 ‘교과서 진도’를 나가면 됩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만큼 날마다 알맞게 익히면 됩니다.

 모든 배움은 《나머지 학교》에 나오는 채옥이가 하는 배움과 같습니다. 스스로 날마다 제때에 알맞게 익히지 못한다면, 가정교사가 붙든 손꼽히는 학교에 다니든 하나도 배울 수 없습니다. 스스로 익히려 할 때에 찬찬히 받아들이는 앎입니다.


.. 채옥이는 또 제자리로 돌아가 앉습니다. “그럼, 우리 학교는 이제 나머지 학교도 못 돼요?” 모기만 한 소리로 이렇게 말하고는 잠시 침묵이 흐릅니다. “선생님, 읍내 학교에 가고 나서는 한 번도 샛강에 못 갔어요. 혼자 공부해도 전보다 더 잘하잖아요.” ..  (39쪽)


 멧골마을이나 바다마을에 자그마한 학교가 참 많이 섰다가 사라졌습니다. 이제 시골 ‘면내’ 학교는 송두리째 사라질 판입니다. 큰도시하고 가까운 시골 읍내나 면내라면 이곳 학교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 테지만, 큰도시는커녕 작은도시하고도 먼 시골 읍내와 면내에서는 중학교나 고등학교마저 문을 닫을 판입니다.

 그러면, 생각해야 합니다. 시골 읍내나 면내에서 학교가 문을 닫는 일은 슬플까요. 시골 읍내와 면내에 학교가 남아야 할까요. 학교가 남아야 한다면 어떤 학교가 남아야 할까요. 멧골자락 멧골학교에서는 무엇을 가르쳐야 하나요. 멧골자락 멧골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앞으로 어디에서 무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멧골자락을 떠나 도시로 가야 하나요, 멧골자락에 예쁘게 남아서 예쁘게 살아야 하나요. 바다마을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앞으로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다에서 고기를 잡거나 밭을 일구는 아이로 살아야 하나요, 읍내나 시내로 나가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어야 하나요. 오늘날 시골학교에서조차 흙일이나 바다일을 다문 한 가지라도 가르치기는 하는지요. 도시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밥하기·옷짓기·빨래하기·쓸고닦기·집돌보기·아이보기 같은 집일 가운데 무엇을 얼마나 가르치는지요.

 그림책 《나머지 학교》를 덮습니다. 나머지 학교인 시골마을 작은 학교들은 “나머지 학교도 못 되”는 길을 걷습니다. 이 길이 슬픈 길인지 슬프지 않은 길인지는 모릅니다. 우리 집 두 아이가 조금 더 자라면 우리 시골마을 작은 학교는 아예 사라지고 없을 테니까, 퍽 먼 읍내까지 학교를 다녀야 할 텐데, 구태여 시골마을에서 읍내까지 먼길을 나서도록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읍내에 있는 조금 큰, 그러니까 시골에서는 조금 크고 도시로 치면 아주 작은 학교를 우리 집 두 시골아이가 다녀야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시골아이가 읍내나 시내 학교를 다니며 무엇을 배우거나 보거나 느낄까 궁금합니다. 밭을 돌보고 나무를 아끼며 바다와 멧자락과 흙을 사랑하는 길을 읍내나 시내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웃을 아끼거나 동무를 사랑할 줄 아는 마음결을 읍내나 시내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이들을 왜 학교에 보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4344.9.19.달.ㅎㄲㅅㄱ)


― 나머지 학교 (임소연 그림,이가을 글,재미마주 펴냄,2002.5.6./7000원)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고양이 2011-09-19 15:28   좋아요 0 | URL
네, 교사가 부모님 같아야 하죠.
하지만 우리 사회의 교육 제도나 학사 행정을 보면
교사가 부모님같을 수 없는 압박감(또는 스트레스)이 절로 들게 되어 있어 안타까와요.

정말 세상이 핑핑 돌아가네요. ㅠ

숲노래 2011-09-19 16:13   좋아요 0 | URL
이 그림책에서는 '작은 시골학교' 아이는 '굳이 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스스로 잘 배우는 착한 아이'로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꼭 학교에 다녀야 하는 틀'에 아이를 끼워맞추는 줄거리로 마무리를 짓고 말아요.

시골 아이 삶을 헤아리면서 마무리라든지 줄거리를 더 잘 짰다면, 더없이 좋았으리라 생각했어요.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제 여느 사람들은 '기계 아닌 손으로 빨래하기'를 생각하지 못해요. 이런 만큼, 예방주사가 왜 몸을 병원균한테서 예방해 주지 못하는가를 생각하지 못하고, 학교가 아이들한테 아무것도 가르치지 못하는 줄을 생각하지 못하고 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