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채 살아가기


 나하고 살아가는 옆지기는 내 몸이 얼마나 안 튼튼한지를 어느 만큼 안다. 옆지기 말고 내 몸이 얼마나 안 튼튼한지를 아는 사람은 아마 내 어머니하고 우리 형에다가 오랜 내 술동무 두엇이 있으리라. 몸이 워낙 여리기는 한데, 코와 이 때문에 병원을 오래도록 드나들어야 했던 일을 빼고는 따로 병원 문턱을 드나들지 않았다. 어찌 보면 용하다 할 만하고, 어찌 보면 고마운 노릇이라 여길 만하다. 여린 몸이지만 사나흘 앓아눕거나 너덧새 끙끙 앓은 일은 없다. 어쩌면 여린 몸으로 타고났기 때문에 내 몸속에서는 늘 나를 지키려 애쓰고, 늘 애쓰다 보니 때때로 크게 앓을 때에 그리 오래 앓아눕지 않고 탈탈 털며 일어날 수 있는지 모른다.

 서른일곱인 오늘, 어제를 돌아본다. 앞으로 내가 꾸릴 수 있는 삶은 얼마나 될까. 나는 내 몸뚱이가 얼마나 오래도록 살아숨쉬도록 이끌 수 있을까. 누구처럼 병원 문턱을 드나들거나 자리에 앓아누운 몸은 아니나, 참 오랜 옛날부터 내 목숨이 얼마나 이어갈까 하고 생각하며 살았다. 스물을 살 수 있을는지, 스물다섯을 넘길 수 있을는지, 서른을 지날 수 있을는지, 서른셋이나 서른다섯을 보낼 수 있을는지 모르는 채 하루하루 살았다. 두 아이를 돌보며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 삶을 꾸리는 오늘, 머잖아 마흔이 되고 쉰도 된다지만, 내가 이 아이들하고 마흔을 맞이하거나 쉰을 맞이할 수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내 몸이 버틴다 하더라도 내가 살아가는 이 나라 자연 터전이 못 버티고 왕창 무너질는지 모른다. 나는 일본 후쿠시마 일이 이웃나라 일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이 나라 웬만한 사람들은 축구 경기에서 한국이 일본한테 진 일을 놓고 서운해 하거나 슬퍼 하거나 짜증스레 여기거나 안타깝게 생각할는지 모르나, 나는 후쿠시마 일을 어제나 그제 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 일처럼 돌이킨다. 후쿠시마 마을 사람들은 삶인지 죽음인지 모르면서 하루아침에 없던 사람들처럼 깡그리 사라졌다.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거나 않으면서 송두리째 없어졌다.

 아이를 수레에 앉혀 자전거를 끌며 읍내를 다녀올 때마다 길바닥에 널린 수많은 주검을 바라본다. 차마 아이한테 이 많은 주검을 보여주지 못한다. 여기에도 주검 저기에도 주검이다. 뱀이 깔려 죽고 사마귀가 밟혀 죽으며 나비가 치여 죽는다. 그러나, 까만 길바닥이 놓이는 동안 아주 많다 할 목숨이 소리도 못 내고 죽어 사라졌겠지.

 사람 목숨하고 지렁이 목숨이 무엇이 다를까. 사람 목숨값하고 강아지풀 목숨값하고 무엇이 다르려나.

 우리 옆지기 나이가 서른둘이라고 생각할 때마다 놀란다. 참 오래도록 아픈 채 살아온 옆지기는 어느새 서른둘이라는 나이까지 살아냈다. 옆지기는 이녁이 서른둘까지 살아낼 줄을 알았을까. 앞으로 서른다섯이나 마흔을 살아낼 수 있을까. 나는 앞으로 얼마까지 살아낼 만할까. 옆지기가 먼저 흙으로 가든, 내가 먼저 흙으로 가든, 둘 가운데 한 사람이 먼저 흙으로 가면, 남은 살붙이 세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좋을까.

 돈을 남기는 삶만큼 덧없는 삶이 없다고 몸과 마음으로 느껴, 나는 내 삶을 글을 써서 남기는 삶으로 보내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글을 써서 남기는 삶이란, 돈을 벌어 남기는 삶하고 어느 하나 다르지 않다. 왜 남기려 하는가. 무엇을 남길 수 있는가. 산 사람은 옛이야기(추억)로 먹고살 수 없다. 산 사람은 돈(재산)으로 살림을 일구지 않는다. 가멸차건 가난하건, 서로 얼굴을 마주하면서 웃거나 웃는 낯으로 먹고살며 살림을 일군다.

 둘째가 태어난 뒤로 아파도 아픈 줄 잊거나 넘기면서 두 달을 살았다. 새 보금자리를 찾아야 한다고 깨달아, 둘째가 태어나고 두 달이 지난 다음 첫째를 데리고 며칠 동안 남도를 돌아다녔다.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몸이 무너졌다. 무너진 몸은 좀처럼 제자리를 찾지 못한다. 골이 너무 아프다. 잠이 자꾸 쏟아진다. 이러면서도 글 한 조각 더 끄적이고 싶다며 애를 쓰지만, 글을 쓸 틈이 나지 않는다.

 아픈 채 살아가는 사람들 나날을 헤아린다. 아픈 채 살아가는 사람들한테 돈 몇 푼 더 벌어 남기는 일이라든지, 글 몇 조각 더 끄적여 남기는 일이란 얼마나 뜻있거나 보람이 있을까. 나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휘둘리며 힘들게 지낼까.

 책으로 살아왔다면, 아이를 무릎에 앉히든 같이 드러눕든 하면서 책을 읽으면 된다. 너른 종이를 펼쳐 함께 그림을 그리면 된다. 나중에 더 남겨 줄 만한 무언가를 찾기 앞서, 오늘 함께 복닥일 무언가를 바라보아야 할 텐데.

 잠자리에서 아이는 소근소근 어여쁜 목소리로 어머니를 부르고 아버지를 부른다. 얼른 잠들고 아침에 새롭게 일어나 놀면 좋으련만, 깊어 가는 밤에도 아이는 더 놀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아이는 더 놀려고 한달 수 있으나, 오늘을 더 좋아한달 수 있겠지.

 몸이 무겁고 머리가 지끈거리며 마음이 짓눌린 나머지, 이레 동안 밥을 못 차리고 빨래를 거의 옆지기한테 맡기면서 보냈다. 한숨을 쉬며 모로 드러누운 채 책을 몇 권 읽기도 한다. 아파서 마냥 지켜보기만 하는 삶이란, 아파서 내 몸을 쓰지 못하고 옆에 있는 사람들이 몸을 쓰는 모습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삶이란, 아파서 아픈 채 살아가는 사람들 삶이란, 아프기에 숨죽이면서 조용히 숨어드는 사람들 삶이란, 사랑스럽다. 아프게 사랑스럽다. (4344.8.12.쇠.ㅎㄲㅅㄱ)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sslmo 2011-08-12 15:43   좋아요 0 | URL
아프다는 것은, 아픈 걸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살아있음의 또 다른 증거라고들 하지만...
그래도 아프지 않고 살아가는 거랑 삶의 질은 달라지지 않을까요?

어서 나으세요~
아니, 많이 아프진 마세요~^^

파란놀 2011-08-13 05:13   좋아요 0 | URL
아프지 않고 살아가기란 참 어려운 일이에요.
낫기를 바랄 수 없어요.
아픔을 잘 받아들이면서 살아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