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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 구멍 ㅣ 비룡소의 그림동화 176
하세가와 요시후미 글.그림, 고향옥 옮김 / 비룡소 / 2011년 3월
평점 :
우리 서로 예쁘게 만나요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80] 하세가와 요시후미, 《배꼽 구멍》(비룡소,2011)
사람이 살아가면서 느끼거나 맛보거나 마주할 놀라운 일은 오직 두 가지가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아기로 태어나는 일입니다. 둘째는, 늙어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되어 죽는 일입니다. 온누리 다른 어떠한 일이라 하더라도 이 두 가지보다 놀랍거나 거룩하거나 아름답거나 즐거울 일은 없다고 느낍니다.
늙어서 죽을 때면 으레 눈물을 흘리며 슬퍼합니다. 이제 두 번 다시 만날 길이 없다 하니까 눈물을 흘릴 테지요. 그러나,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아기가 태어날 수 없습니다. 고맙게 숨을 거두는 사람이 있어, 고맙게 목숨을 얻는 사람이 있습니다. 볍씨가 벼알이 되어 밥그릇에 놓이듯, 목숨씨는 스스로 몸을 바쳐 새로운 목숨빛을 이룹니다. 한 해를 고맙게 살다 떠나는 들풀은 들풀씨를 남기며 이듬해에 새로운 들풀이 자라도록 합니다.
생각해 보면, 온누리에는 제법 놀랄 만한 일이 참으로 수두룩합니다. 끔찍한 전쟁부터 끔찍한 토목개발을 거쳐 끔찍한 범죄와 사기꾼 짓이 넘칩니다. 참으로 끔찍하다 싶은 일이 넘치니까, 사람들은 그만 놀라야 할 일에 놀라지 못하는 무딘 바보처럼 되기도 합니다. 괴롭거나 힘겹거나 아픈 일이 자꾸 잇따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만 놀라며 반겨야 할 일을 놀라며 반기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무뚝뚝한 멍청이처럼 굴고 말아요.
.. 작고 작은 아기가
엄마 배 속에서
엄마 배꼽 구멍을
보고 있어 .. (2쪽)
그림책 《배꼽 구멍》(비룡소,2011)을 아이와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조그마한 집에서 오빠와 언니와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곧 태어날 셋째 아이를 기다리면서 즐겁게 집을 꾸미고 돌보며 건사합니다. 누구보다 어머니한테 맞추어 밥을 차리는 자리에 오빠도 언니도 아버지도 밥차림을 함께 합니다. 에헴 하고 재채기를 하면서 밥상 앞에 앉기만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벽에는 아이 어머니를 헤아리는 밥차림이 무언가를 붙여놓습니다. 어머니가 먹는 밥이란 뱃속 아기가 먹는 밥이요, 어머니가 먹는 밥을 다른 두 아이와 아버지가 함께 먹습니다. 어머니와 뱃속 아기를 생각하며 밥을 차리는 일이란, 다른 집식구 모두를 생각하며 밥을 차리는 일입니다. 어머니와 뱃속 아기를 비롯해, 모든 집식구가 옳고 바르며 사랑스럽고 기쁜 밥상을 맞이해야 아름답습니다.
아기를 기다리는 일 빼고는 다른 일을 하기 벅찬 어머니는 뜨개질을 합니다. 뜨개질을 해서 배냇저고리를 지을 수 있고, 아기한테 신길 양말을 뜰 수 있습니다. 아이한테 선물할 이름을 놓고 여러 사람이 머리를 굴립니다. 마땅한 노릇입니다. 아이한테 아무 밥이나 먹일 수 없고, 아무 이름이나 줄 수 없습니다. 아이한테 아무 약이나 주사나 놓을 수 없으며, 아이한테 아무 집에서나 살라 할 수 없습니다. 이리하여, 머리가 벗겨지고 눈썹이 하얀 할아버지는 ‘우리 아이를 생각해서 담배를 끊자!’고 다짐합니다.
그래요, 우리 귀여운 손주를 생각한다면 담배를 끊어야겠지요. 우리 손주 앞에서 담배를 어찌 태울 수 있겠어요.
우리 귀여운 손주처럼 다른 집 아이들은 다 다른 집에서 귀여운 손주입니다. 내가 피우는 담배에서 나오는 연기는 내 아이와 손주뿐 아니라 이웃 아이와 손주한테도 나쁩니다. 온누리 온 목숨을 아끼거나 사랑하는 마음씨를 이제라도 느끼거나 깨닫도록 이끌어, 늙은 나이에도 담배를 끊자고 하니까, 새롭게 태어나는 목숨이란 대단히 거룩하며 아름답습니다.
.. 우아!
들린다, 들려.
쏴쏴, 바람 소리
철썩철썩 파도 소리.
지지배배, 새 소리.
살랑살랑 꽃잎이 흩날리는 소리 .. (27쪽)
두 아이를 맞아들여 함께 살아가는 아버지로서 생각합니다. 옆지기 몸이 좋았다면 집에서 즐거이 맞아들였을 테지만, 옆지기 몸이 몹시 나쁜 나머지, 두 아이 모두 병원에서 받아야 했습니다. 병원에서 아기를 받을 때에, 병원은 늘 ‘아기 어머니’가 아닌 ‘환자’로 다루었습니다. 두 목숨을 거룩히 여기기보다는 ‘약물 처방 대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아기가 어머니 숨소리를 듣고 어머니 살결을 부벼야 하는 줄 헤아리지 않습니다. 곰곰이 따지면, 병원 건물과 시설과 병실 어느 곳에서도 아기와 어머니한테 마음쓴 모습을 찾아보지 못합니다. 그저 ‘입원 환자 처리’하는 곳일 뿐입니다.
늘 느낍니다만, 병원 입원실에는 텔레비전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병원이란 시내 한복판 시끄러운 차소리 가득한 데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자연스러운 햇볕이 자연스레 들어오고, 자연스러운 바람이 자연스레 스며드는 곳에 있어야 합니다. 나무가 서고 새가 우짖으며 풀과 꽃이 흙 기운을 듬뿍 머금는 데에 병원이 서야 합니다.
사람이 살 만한 터에 일터이든 병원이든 다른 무슨 시설이든 학교이든 있을 노릇입니다. 사람이 사람다이 목숨을 아끼며 사랑할 수 있는 보금자리가 살림집이요 일터요 병원이어야 합니다.
.. 그날 밤, 아기가
아무한테도
들리지 않게
조용히 속삭였어.
우리 내일 만나요! .. (31∼32쪽)
아기는 조용히 속삭입니다. 아무한테도 들리지 않게 속삭인다지만, 어머니는 말소리 아닌 마음소리로 알아듣습니다. 어머니와 매한가지로 말소리 아닌 마음소리를 귀기울여 듣는 아버지라면, 아기가 조용히 속삭이는 이야기를 알아챕니다.
우리 서로 예쁘게 만나요. (4344.7.27.물.ㅎㄲㅅㄱ)
― 배꼽 구멍 (하세가와 요시후미 글·그림,고향옥 옮김,비룡소 펴냄,2011.3.20./8500원)
(최종규 . 산들보라 /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