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읽는 책 : 이반 일리치


.. 독서를 잘 하는 사람은 대개는 상술한 바와 같은 비정규 교육 활동의 결과인 수가 많다. 그러나 폭넓은 독서를 즐겁게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러한 습관을 학교에서 배웠다고 간단히 믿어 버린다 ..  《민중교육론》(한길사,1979) 89쪽


 책은 스스로 읽습니다. 누가 책을 읽도록 가르쳐 주지 못합니다.

 책은 스스로 삭입니다. 누가 책을 어찌저찌 삭이라고 이끌지 못합니다.

 책을 고를 사람은 나요, 책을 펼칠 사람 또한 나이며, 책을 받아들일 사람도 나입니다. 누가 읽어 주지 않는 책입니다. 누가 내 몫을 살아 주지 않고, 누가 내 밥을 먹어 주지 않듯, 누가 내 책을 읽어 주지 않습니다.

 줄거리를 간추린 책이란 내 책이 될 수 없습니다. 영양소만 간추린 주사를 핏속으로 집어넣으면 밥먹기를 했다 할 만한가요. 내 한삶을 다 보내기에는 너무 길거나 아까우니까 사이사이 몽땅 건너뛰어 알짜만 챙겨야 하나요.

 책읽기는 알짜 줄거리만 살피는 훑기가 아닙니다. 서울에서 부산을 가든, 인천에서 신의주를 가든, 거쳐서 가는 길이 있습니다. 빠른기차를 타고 아무리 짧은 길을 질러 간달지라도 1분이든 10분이든 한 시간이든 길에서 보내야 합니다. 길에서 보내는 품을 모두 없애면서 어디로 움직일 수 있지 않아요. 시간이동이나 공간이동이 있어 갑자기 건너뛴다 하더라도 서울과 부산 사이에는 수많은 도시와 시골, 곧 숱한 삶자락과 자연이 있어요. 이 모두를 가로지르거나 거쳐야 비로소 서울에서 부산을 오갑니다.

 사랑하는 한 사람을 마주할 때에 이이 한 사람이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또는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또는 스물다섯이나 서른다섯 살이 될 때까지 보내온 나날이란 아랑곳하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다. 열다섯 살에 만난 첫사랑이라면, 이이가 열다섯 살까지 살아내도록 보내고 지낸 나날이 있고, 이동안 마주하거나 부대낀 살붙이랑 동무랑 이웃이 있어요. 이 모두를 아우르며 껴안아야 비로소 ‘내 사랑’을 오롯이 껴안습니다.

 그러니까, 책은 학교에서 가르치지 못합니다. 온삶을 들여 읽고, 온삶을 바쳐 삭이는 책이니까, 책은 내 보금자리에서 내 깜냥껏 스스로 조금씩 배우면서 읽습니다. 내 삶을 내 손으로 갈고닦고 익히면서 읽는 책입니다. (4344.1.30.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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