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와 개발업자는 `보통 길을 놓는다'는 말로 주민들을 속인 채 `50미터 산업도로' 계획을 밀어붙여 왔습니다. 이 산업도로로 동네가 두 동강이 날 뿐 아니라, 엄청난 재개발이 잇따르며 그동안 고유하게 지켜 온 삶터가 무너질 수 있음을 깨닫고, 퍽 늦기는 했지만 주민들이 힘을 뭉쳐서 막개발에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인천시와 개발업자는 `보통 길을 놓는다'는 말로 주민들을 속인 채 `50미터 산업도로' 계획을 밀어붙여 왔습니다. 이 산업도로로 동네가 두 동강이 날 뿐 아니라, 엄청난 재개발이 잇따르며 그동안 고유하게 지켜 온 삶터가 무너질 수 있음을 깨닫고, 퍽 늦기는 했지만 주민들이 힘을 뭉쳐서 막개발에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돈과 힘과 이름 없는 사람들 삶터를 지키고자
 - 인천 금곡동과 송림동을 가로지를 산업도로를 반대하며

 


 그제와 글피, 비 그친 뒤 바람이 거세게 불었습니다. 매섭지 않은 겨울을 아쉬워하는 추위였는지 모릅니다. 퍽 센 바람이 조금 잦아드니, 뿌옇던 하늘이 대단히 파란 하늘로 바뀌었습니다. 아침햇살이 눈부셨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데, 눈물 날 만큼 싱그러운 빛살이었습니다. 이 빛살은 서울에도 충주에도 광주에도 원주에도 인천에도 내리쬐었겠지요. 누구한테나 고른 빛살이며 따뜻한 햇살입니다. 하지만 어제 만난 사람 가운데 어느 누구도 햇볕과 하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어요. 참 고운 햇볕인 줄 몰라서일까요. 하늘 올려다볼 틈이 없어서일까요. 그깟 햇볕이야 돈이 안 되어서일까요. 하늘 올려다볼 열린 마당이 없어서일까요.

 인천 금곡동에 자리한 ‘배다리 헌책방거리’에는 아침부터 곱고 부드러운 햇볕이 내려앉았습니다. 참고서를 찾는 부모와 학교옷 입은 아이들부터, 마음을 살찌울 만한 낱권책 하나 찾는 책나그네까지, 이곳을 찾는 누구나 좋은 햇볕과 싱그러운 바람과 살뜰한 책 하나 즐겼습니다. 가까운 동네에서 이곳을 찾은 이들이 있고, 저으기 먼 곳에서 다리품 판 이들이 있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은 차소리 적어 조용하고, 수런수런 사람들 목소리가 들려오는 골목길을 거쳐서 옵니다. 동인천역에서 오는 길에는 한복ㆍ누비집 골목을 지나고 전통문화거리로 탈바꿈한 지하상가를 지나게 되며, 구석구석까지 깃든 옛 저잣거리를 만나게 됩니다. 가게 간판을 보면 좀 낡아 보이는 것이 많은데, 이 간판은 가게 빛깔을 알려주는 데에 아무 걱정이 없고, 한편으로는 가게 역사를 헤아리게 합니다. 돈 몇 푼 들이면 번들번들 큼직한 간판으로 고쳐올릴 수 있으나, 지금 이대로도 좋습니다. 아니, 지금 이 모습이 한결 좋습니다. 수십 해를 묵은 빛바랜 간판은 이 한 자리를 오래오래 지키며 고이 살림을 꾸린 분들 숨결을 느끼게 하며, 우리가 하루하루 잊고 있는 푸근함을 돌아보게 하거든요. 빛바랜 간판은 이 골목과 저잣거리에 뿌리내려 동네사람이 오순도순 지내 온 발자취를 가만히 보여주는 나이테구나 싶어요.


 

손수 텃밭을 일구며 살아온 이곳 송림동, 금곡동 사람들은, 요즈음 우리들이 `쿠바 아바나 생태도시'를 배우려고 법석을 떠는 바로 그 `생태 지킴이' 삶을 진작부터 수수하게 꾸려오지 않았을까요.
손수 텃밭을 일구며 살아온 이곳 송림동, 금곡동 사람들은, 요즈음 우리들이 `쿠바 아바나 생태도시'를 배우려고 법석을 떠는 바로 그 `생태 지킴이' 삶을 진작부터 수수하게 꾸려오지 않았을까요. 다만, 이분들은 책을 읽은 적이 없고 쿠바사람들 이야기는 까맣게 모르지만, 그저 당신들이 살던 그대로 살 뿐입니다.

 


 도원역쯤에서 쇠뿔거리(우각로) 옛길을 걸어 헌책방으로 오는 동안에는, 손바닥 만한 텃밭에 파며 양파며 콩이며 고추며 배추며 상추며 알뜰히 심어 가꾸는, 집크기도 손바닥 만하고 지붕 낮은 작은 살림집, 곧 골목집을 스쳐 지나갑니다. 일제강점기 때 억지로 항구 문을 연 세 곳 가운데 하나인 인천입니다. 이곳 쇠뿔거리는 옛 조선이 처음 개화라는 물결을 타야 할 때 서울로 온갖 문물이 들어가던 첫 길이었습니다. 서울로 가는 큰길 둘레 좋은 목에는 선교사며 장사꾼이며 권력자며 일본사람이며 집을 우뚝우뚝 세웠고(지금도 이런 건물이 꽤 많이 남아 있습니다), 큰길 건너편 산비탈에는 뱃사람으로 일하고 짐꾼으로 일하던 가난한 보통사람들 지붕 낮은 집이 다닥다닥 붙었습니다. 이제는 아파트에 밀려 거의 모두 사라진 지붕 낮은 집이지만, 이곳 쇠뿔거리와 함께 여태껏 잘 살아남은 골목집이 적잖이 있습니다. 이 쇠뿔거리를 걷다가 눈길을 잠깐 안쪽으로 돌리면, 근대 교육 첫 터전이 된 학교인 영화학교, 창영학교 오래된 건물이 눈에 들어옵니다. 한편, 세무서 붉은벽돌 담벽에는 “자수간첩 도와주자”라는 페인트 글씨가 그대로 남아 있어, 지난날 ‘반공’을 앞세워 독재정권을 휘두르던 가슴아픈 역사를 고이 보여줍니다. 서울에는 현저동에 서대문형무소가 그 무시무시한 뼈대를 고스란히 남긴 채 일제강점기 아픔을 온몸으로 드러내 보입니다. 인천 금곡동에는 나라밖 제국주의 물결에 휩쓸려 눈물로 항구를 열어야 하면서 세운 학교, 관공서, 철길, 적산가옥 들이 곳곳에 조용히 남아서 우리들 보통사람이 어떤 슬픔과 눈물을 부대껴야 했는지 넌지시 말을 건넵니다.

"자수간첩 도와주자"는 글귀. 이 글씨를 안 지운 까닭이 궁금하지만, 이렇게 안 지우고 두었기 때문에, 외려 지난날 반공독재 문화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자수간첩 도와주자"는 글귀. 이 글씨를 안 지운 까닭이 궁금하지만, 이렇게 안 지우고 두었기 때문에, 외려 지난날 반공독재 문화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이 벽돌담과 글씨는, 앞으로도 고이 간직해 `지난날 우리 삶이 어떠했는가를 돌아보도록 하는 문화재'로 삼으면 더 좋으리라 믿습니다.

 


 1961년에 신호등이 처음 들어온 인천입니다. 도시화나 지역개발이 더뎠다고 하겠지만, 신호등 없이도 사고나 큰탈이 없어서 사람과 차가 평화롭게 오가던 고즈넉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인천은, 동인천과 용산을 오가는 직통열차가 뚫리고, 제2경인고속도로며, 연수동 새도시며, 영종도 국제공항이며, 송도 새도시며, 청도 재개발구역이며, …… 무언가 포크레인 삽날로 파헤쳐 새 콘크리트 집을 짓거나 확 뜯어고치거나 갈아엎으며 모든 것을 다 바꿔야 할 곳처럼 되고 있습니다. 몇 조 또는 수십 조에 이르는 돈을 들여 철거를 하고, 재개발을 하고, 수십 층 아파트와 쇼핑몰을 들이고(또는 들이려 하고), 길을 널찍하게 새로 또 냅니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논리에 보통사람들 삶터는 밀려나고, 돈으로만 굴러가는 시멘트 소굴이 들어섭니다.

 문득 궁금해집니다. 우리는 얼마만한 돈이 있어야 할까요. 돈을 얼마나 벌어서 어디에 쓰려 하나요. 우리가 발딛고 사는 이곳 대한민국, 그리고 조용하고 평화로운 동네 한켠에는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와야 즐겁거나 재미난 삶이 될까요. 흐르는 냇물이나 땅속 우물을 길어 먹는 일보다 정수기 물을 마셔야 즐거움일까요. 유기농 곡식을 많은 돈 들여서 사서 먹는 편이, 집앞 텃밭이나 스티로폼 농사보다 몸에 더 좋을까요. 돈버는 일을 하느라 운동할 틈이 없어 뱃살 늘고 비계가 느니, 헬스클럽에 자가용 타고 찾아가 런닝머신을 타야 할까요. 이런 운동이 두 다리로 걸어서 저잣거리에서 물건을 사거나, 자전거를 타고 일터를 오가는 일보다 몸을 더 튼튼히 하거나 앞선나라 일등시민으로 사는 길인가요. 인터넷으로 채팅하는 일이, 담 없는 이웃사람과 수다를 떨 때보다 웃음이 묻어나는가요.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택배로 받아 보는 물건이, 버스를 타거나 걸어서 장보고 에누리하며 사서 쓰는 물건보다 쓸모 많거나 더 좋은가요.

50미터짜리 산업도로는 송림동 언덕길을 싹 밀어붙이고 뚫은 이 굴과 이어집니다.
 
50미터짜리 산업도로는 송림동 언덕길을 싹 밀어붙이고 뚫은 이 굴과 이어지게 됩니다. 이 굴로 들어서자면, 또 이 굴을 지나 새로운 길을 놓자면, 어쩔 수 없이 `고가도로'를 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마어마한 새 길이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송림동 야산에 ‘달동네 박물관’이 들어섰습니다. 그곳 ‘달동네’ 집을 싸그리 밀어붙여 없앤 뒤 수십 층 아파트를 무더기로 세웠고, ‘덤’으로 근린공원 하나 지어 주면서 퍽 많은 돈으로 지은 박물관입니다. ‘가난한 시절 이야기’를 잊지 않도록 마음을 썼는지 모릅니다만, 왜 “달동네 집 = 가난+슬픔+지저분함 = 나쁜 것 = 없어져야 하는 것”으로 여길까요. 가난하게 사는 일은 불쌍하거나 슬프기만 할까요. 한 달 30만 원으로도 알콩달콩 지내는 삶은 ‘가난하기 때문에 행복과는 동떨어진’ 삶인가요. 달동네 박물관 둘레를 보면, 송림동 ‘달동네 집’은 아직도 여러 열 채 남아 있습니다. 가까운 금곡동이나 화수동이나 만석동, 또 서울 중림동이나 평동이나 누하동이나 사직동이나 숭인동 들에도 ‘달동네 집’, 그러니까 ‘지붕 낮은 집’은 참 많이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가난하게 사니까, ‘가난을 없애 주고’자 재개발을 해서 높직높직한 아파트를 스무 해마다 새로 올려서 돈을 벌어 주어야 하는가요. 아니면 이곳 사람들은 사람들 눈에 안 뜨이는 곳으로 몰아내어 ‘도시 미관 정화’를 해야 하나요.

 관공서나 정부 공무원이 보기에는 구질구질한 가난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곳 사람들로서는 여태껏 즐겁고 조촐하게 꾸려 온 삶입니다. ‘즐거운 우리 집’입니다. 다 함께 모여서 어울려 살아가는 기쁨을 맛본 터전입니다. 굴이나 조개를 까고 마늘을 벗기거나 감자를 깎으며 살아도, 버는 만큼 쓰고 버리는 물건 없습니다. 차곡차곡 모으는 재미에 들뜨고, 손으로 북북 비벼 빤 빨래를 탁탁 털어 싱그럽고 따순 햇볕에 말리는 시원함을 맛보며 지냅니다. 배다리 헌책방거리에서는 값싼 책 하나 구경하는 재미, 교과서와 참고서를 찾는 수험생들, 인문사회과학 책과 교양책 들을 만나려는 책나그네까지, 누구나 껍데기 아닌 조촐한 알맹이를 부대끼며 지냈습니다.

가난하지만, 돈이 적다뿐, 돈 빼고 다른 나머지는 모두 넉넉한 골목집, 산비탈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가난하지만, 돈이 적다뿐, 돈 빼고 다른 나머지는 모두 넉넉한 골목집, 산비탈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이 골목집은 30년, 40년, 50년,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고이 이어갈 수 있지만, 뒤쪽에 새로 들어선 아파트는 20년도 채 못 되어 허물고 재개발을 한다고 법석을 떨겠지요.

 


 그러나 이와 같이 조용하고 조촐하던 보통사람 삶터가, 50미터에 이르는 산업도로를 동네 한복판을 가로질러 뚫으려는 시와 개발업자 손길에 깡그리 무너지려 합니다. 사람 사는 이곳에서 사람이 아닌 돈만 보고 있기에, 나무와 꽃을 돈으로 사서 심는 돈길이 아니라 씨앗이 땅에 떨어져 뿌리내리고 자라가는 살림길을 생각하지 않는 돈바라기 마음만이 떠돌기에.

 묻고 싶습니다. 지금 있는 길로도 공단으로 물류를 실어나르는 데에 걱정이 없고, 집과 일터를 오가는 데에 막힘이 많지 않습니다. 길을 새로 뚫는다면 누구한테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는지요. 사람이 다니는 데에 좋자고 뚫는 길이 ‘사람 삶터를 죄 밀어내고 지을 만큼 중요’한지 알고 싶습니다. 또한, 새로 내는 길은 왜 ‘즐거운 우리 집을 이루며 살아온 가난한 사람들 삶터’만을 가로질러야 하는지요. 돈 많은 사람들 동네는 보상금이 많이 드니까, 그런 데에는 높으신 분들이 사니까 에돌아가야 하는지요. 가난한 사람들 집터는 ‘돈 많고 이름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이 차막힘 덜하게 다닐 수 있는 길’을 닦도록 무너뜨리고 몰아내야 하는지요.

조그마한 빈터에도 씨앗을 심는 이곳 골목집 사람들 마음이 사랑스럽고 좋습니다.
 
조그마한 빈터에도 씨앗을 심는 이곳 골목집 사람들 마음이 사랑스럽고 좋습니다.

 


 태어나서 여태껏 이웃사람을 해꼬지한 적 없고, 남을 등처먹은 일 없고, 늘 조용하게 제 몫을 다하면서 낮은 자리에서 허리 숙여 일해 온 이곳, 인천 금곡동과 송림동 사람들은 앞으로도 자기 보금자리를, 고향을, 조그마한 텃밭을, 골목집을 살가이 간직하면서 햇볕과 바람과 물과 사람을 부대끼고 싶습니다. 이웃과 어깨동무하며 지내 온 지금 같은 이음고리가 끊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초중고등학교 아이들이 시끄러운 차소리나 무시무시하게 골목을 내달리는 자동차에 벌벌 떨지 않으며 안전하게 다닐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수십 수백 억을 들여서 짓는 박물관이나 문화시설보다는, 수십 수백 해를 고이 간직하며 살아온 보통사람 보금자리야말로 참다운 문화요 생활사라고 느낍니다. 청계천에는 고가도로를 뜯어내어 자동차 흐름을 줄이고 맑은 물과 바람이 소중함을 일깨우고 있는데, 인천 금곡동과 송림동에는 마을을 두 동강 내고 맑은 물과 바람마저 싸그리 밀어 버리는 산업도로를 놓아야 하는지요. 돈과 이름과 힘이 없어도 사랑과 믿음과 나눔으로 살아온 골목집 사람들 삶터를 앞으로도 꿋꿋하고 즐겁게 가꾸며 살고 싶습니다.

아이들이 조용한 헌책방 한켠에서 마음을 살찌울 수 있다면, 이것 하나만으로도, 헌책방거리가 깃든 이곳 금곡동과 송림동을 고이 간직할 만한 값어치가 있지 않을까요.
 
아이들이 조용한 헌책방 한켠에서 마음을 살찌울 수 있다면, 이것 하나만으로도, 헌책방거리가 깃든 이곳 금곡동과 송림동을 고이 간직할 만한 값어치가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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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7-03-16 09:56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된장님. 글을 읽으면서 퍼가고 싶은 욕심이 생겨 이리 말씀드립니다.
제 고향, 인천이야기와 헌책방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지라 제 서재에 모셔놓고
천천히 읽고 싶습니다. 글도 자료도 진솔함에 짠합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2007-03-16 1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07-03-17 12:26   좋아요 0 | URL
얼마든지 옮겨 가셔도 됩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제가 쓴 글이 파란여우 님한테 즐겁게 읽을 만한 글이라면 옮겨 가셔요. ^^;;;;

개발업자들이 현장에서 물러날 나이가 되지 않고서야 깨닫지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들은 죽음 앞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기가 누울 땅조차 없음을 느끼고, 그동안 한 짓을 조금이나마 생각할 수 있을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