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9권은 이릉대전으로 시작한다. 관우의 복수를 위해 오를 치는 유비. 초반 기세는 매섭다. 계속 승리를 거두며 진격해나간다. 이에 손권은 육손을 대도독으로 임명하고 유비를 막게 한다. 군을 총괄하는 육손은 장수들에게 각 처를 굳게 지키라 할 뿐 싸움에 나서려하지 않는다. 손환이 유비군에 의해 성에 고립되어 있는 상황에서도 지원군을 보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손환이 알아서 지킬 것이며 지키지 못한다고 해도 대세에는 영향이 없다는 판단이다. 장수들은 새파랗게 어린 육손이 대장인 것도 불만인데 그 명령도 불만이다. 적에 맞서 싸우고 싶은데 지키라고만 하다니.
요즘 드는 생각인데 명장은 다들 수성의 달인이다. 이기는 싸움이 아니면 하지 않는다. 확실한 기회가 오면 총력을 다하지만 불리하거나 기회가 보이지 않으면 그저 지킬 뿐이다. 하지만 이런 명장의 마음을 모두가 이해하는 건 아니다. 부하 장수들은 싸우지 않는 모습이 답답하고 군주는 혹시 딴 마음을 품은 것은 아닌가 의심한다. 이런 상황에서 이간계를 펼쳐서 그 장수를 교체할 수 있다면 적군으로서는 최고의 기회다.
장평대전에서 염파는 백기의 공세에 오직 수비만 할 뿐이었다. 백기는 자신의 조정에 염파를 끌어내려달라 요청한다. 진나라는 뇌물을 써서 조나라 신하들을 매수한다. 왕이 염파에 대해 의심을 사게끔 한다. 이에 왕은 염파를 조괄장군으로 교체한다. 조괄의 아버지는 명장이었다. 하지만 그 아들은 경험이 부족한 기대주일 뿐이었다. 조괄의 어머니는 아들을 대장군으로 임명하지 말아달라고 사정하지만 이미 날아간 화살이었다. 조괄은 결국 얼마 안가 대패하게 되고 40만 명의 조나라 군사는 항복하지만 백기에 의해 생매장 당한다.
조나라 이목도 마찬가지다. 진나라의 공세를 막아내고 있었지만 이간계에 의해 오히려 역적으로 내몰려 참수 당한다. 이후 조나라는 진나라에 의해 멸망한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도 같은 운명을 겪은 바 있다. 해전에서 연전연승을 거둬 일본군은 틀어박혀서 나오질 않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순신과 싸우지 말라고 명령을 내린 탓이다. 이순신이 섣불리 싸우지 못하고 있자 선조와 원균이 트롤짓을 시전한다. 이순신이 싸우지 않자 왕명을 어겼다는 구실로 장군직을 박탈하고 감옥에 가둔다. 원균이 이순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일본군을 치러 갔다가 한 번에 전멸한다.
이런 예들은 역사 속에서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손권은 육손을 믿었다. 그래서 승리할 수 있었다. 아래는 육손이 손권에게 며칠 안으로 촉을 깨뜨릴 수 있으리라는 글을 올린 후 손권의 반응이다.
"강동에 이렇듯 뛰어난 인재가 있으니 내가 걱정할 게 무엇이 있겠는가? 다른 장수들이 모두 글을 올려 육손이 겁많음을 일러바쳤으나 나는 믿지 않았는데, 이제 그의 글을 보니 실로 그는 겁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p20
손권이 트롤짓 좀 해줬으면 좋았을텐데. 유비 입장에서는 아쉬운 대목이다.
오나라와 위나라의 전투 중 손소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을지언정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게 참으로 호기롭다.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는데 역시 젊음의 혈기란 무섭다.
"내가 말한 것은 다만 군사를 이끌고 가서 조비를 쳐부수자는 것 뿐이었소. 나는 잘못이 없으니 여기서 죽을지언정 당신의 생각은 따를 수가 없소이다!" -p93
공명은 하후무를 속이기 위해 가짜로 피난 가는 백성들까지 만들어냈다. 이정도면 시라노 연애 조작단이다.
공명은 연의에서 말로만 사람을 죽인다. 무시무시하다. 아래는 위나라의 왕랑에게 하는 말이다. 오늘날 공명이 랩퍼였으면 어떤 디스랩을 들려줬을지 궁금하다.
"(중략)이 머리터럭 흰 하찮은 것, 수염 푸른 늙은 역적아! 너는 오늘이라도 죽어 구천으로 들게 되면 무슨 낯짝으로 스물네 분 천자를 뵙겠느냐? 늙은 역적은 어서 물러가고, 천자를 내친 못된 신하 놈이나 소리쳐 불러내 나와 승부를 결판짓게 하라!"
그 말을 듣자 왕랑은 분함과 부끄러움이 가득 차 올라 가슴이 터지는 듯했다. 문득 한 소리 알아듣지도 못할 고함과 함께 말에서 떨어져 죽어버렸다. -p296
다시 읽어보니 죽을 정도로 독한 거 같진 않다.
어느덧 9권을 다 읽고 10권을 읽고 있다. 삼국지에 푹 빠졌다가 서서히 나오고 있는 느낌이다. <정사 삼국지> 샀는데, 이를 어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