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의지는 없다 -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자유 의지의 허구성
샘 해리스 지음, 배현 옮김 / 시공사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최근에 북다이제스터님과 댓글로 대화를 나누던 중, "자유의지는 없다" 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자유의지가 없다" 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라 생각했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을 내리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혼란스럽다. 아무리 답을 찾아봐도 자유의지가 있다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샘해리스의 주장을 논리를 깨뜨릴 방법이 현재의 내겐 없다.

 

 일단 저자와 책 이야기를 간단하게 하고 자유의지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보고 싶다. 샘해리스는 리처드 도킨스, 크리스토퍼 히친스를 잇는 세계적인 석학이라고 한다. 그가 철학의 해묵은 논쟁인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 라는 질문에 답을 하고 나섰다. 충격적이게도 그의 주장은 "자유의지란 없다." 이다.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자유 의지란 단연코 환상이다. 우리의 의지는 우리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사고와 의도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도 없는 배경 원인으로부터 발생한다. 우리는 스스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자유를 가지고 있지 않다.”

 

 
 아래의 글은 처음처럼님의 리뷰에서 인용한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자유 의지란 ‘앞으로 일어날 일련의 행동을 상상하고, 그 행동들을 선택한 자기 나름의 논리를 심사숙고하며, 이러한 심사숙고에 비추어 자신의 행동을 계획하고, 모순된 욕망들에 직면하여 행동을 통제하는 역량의 집합’이라고 보고 있습니다(53쪽). 이와 같은 자유 의지의 관념은 “1. 우리 모두는 과거에 자신이 했던 것과 달리 행동할 수도 있었다. 2. 지금 우리가 하는 사고와 행동의 의식적 원천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13쪽)”라는 두 가지 가정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는데, 저자는 이 두 가지 가정 역시 틀렸다고 보는 것입니다.
                  

 

 

 책은 100페이지 가량으로 굉장히 얇다. 하지만 거기에 담긴 논쟁은 굉장히 거대하다. 첫번째 가정부터 생각해보자. "우리 모두는 과거에 자신이 했던 것과 달리 행동할 수도 있었다." 과연 이 가정은 옳은 것일까?

 자 사고실험을 한 번 해보자. 만약에 우리가 과거여행을 한다고 하자. 하지만 현재의 기억은 보존되지 않은채 그냥 비디오 테이프를 뒤로 감듯이 과거로 이동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동하는 과거는 가장 최근에 카페에서 주문하기 전 상황이라고 해보자. 우리는 과연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예를들어 우리가 어제 오후에 카페라떼를 주문했고, 다시 어제 오후로 돌아간다면 분명 또다시 카페라떼를 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시점에서 모든 것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첫번째에 카페라떼를 시켰던 자신과 두번째에 카페라떼를 시키는 자신은 동일하고, 환경도 동일하다. 변한 것은 없다. 다른 선택은 불가능했다.

 

 과거를 돌이켜보자. 분명 수많은 선택이 있었다. 되돌리고 싶은 선택, 후회스러운 선택, 바보같은 선택, 아주 가끔 성공적인 선택이 있었다. 과연 우리가 그 선택말고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그것이 상당히 의심스럽다. 만약 과거로 되감기해서 그 선택을 하기 전으로 되돌아간다고 해도 분명히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은 원인에 의해서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우리는 DNA를 운반하는 생체기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든다. 우리가 하는 생각, 사고, 감정 등은 모두 DNA와 그동안 우리가 겪어온 모든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니깐 카페라떼를 선택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전혀 자유의지를 발휘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기호, 그 당시에 카페라떼를 선택한 이유 등은 모두 과거에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만약 다른 메뉴를 주문하려면 다른 과거가 있었어야 한다. (예를들면 오전에 카페라떼를 먹었다던가 아니면 그보다 더 오래전 과거에 카페라떼를 먹고 혀가 데어서 앞으로는 카페라떼는 안 마시겠다는 결심을 했다던가하는 변화가 있어야 한다) 즉 똑같은 자기자신이 아닌 다른 자기자신이어야만 다른 선택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글로 생각을 명확하게 표현하기가 너무 어렵다. 이 책을 읽고 난 후로 오랫동안 고심했다. 저자의 주장은 논박하고 싶어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자유의지는 점점 희미해져갔다. 이 책을 명확히 이해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한 번 더 읽어보고 싶다. 그리고 자유의지에 관한 다른 책들도 더 읽어보고 싶다.

 

 우리의 의식은 무의식에 지배를 받는다. 우리의 의식에 떠오르는 사고와 의지는 모두 무의식에서 떠오른 것들이다. 우리는 무의식을 컨트롤 할 수 없다. 무의식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면, 우리의 의식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도 의심해 볼 수 있다. 수많은 심리학자들이 무의식을 조작해서 그 사람의 의식을 조작하는 실험을 한다. 무의식이 먼저이고, 의식은 그 다음이다.

 

 내가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은 내 자유의지일까? 분명 나는 글을 쓰기로 선택을 했고, 그래서 쓰고 있다. 여기서 두번째 가정에 대해 생각해보자. 두번째 가정은 "지금 우리가 하는 사고와 행동의 의식적 원천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과연 그럴까? 사고와 행동의 의식적 원천은 바로 우리의 뇌이다. 우리 자신이 아니다.

 

그에 대한 설명은 또다시 처음처럼님의 리뷰를 인용하겠다.

 

그 이유로 저자가 인용하는 과학적 데이터는 “뇌파검사(EEG)와 기능성 자기공명영상장치(fMRI)를 통해 확인한 결과, 스스로 내린 결정을 인식하기도 전에 뇌의 운동피질이 활동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려고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우리의 뇌에 있는 신경세포는 이미 우리가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 신호를 내보내더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뇌 신경세포가 내보내는 신호를 파악하면 인간의 행동을 미리 예측할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가 우리 행동의 의식적 주인이라고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사실이 잘 못 알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깐 우리가 어떤 결정이나 생각을 하기 전에 뇌에서 먼저 결정이나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결정이나 생각을 발견, 인식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아까 카페라떼 예를 다시 들어보면, 우리가 카페라떼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유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사후에 설명은 가능할 것이다. 오늘은 왠지 카페라떼가 먹고 싶었어 라던가, 아니면 아침에 원빈이 카페라떼를 마시는 CF를 봤다던가) 뇌가 카페라떼를 선택하고 우리는 카페라떼를 인식하는 것이다.

 

 

 최근에 팟캐스트 "지대넓얕" 에서 악의 평범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범죄에서 개인의 자아와 사회적 환경 어떤 것이 중요한가 하는 내용이었다.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자유의지에 대한 생각을 했다. 유명한 심리학 실험이 있다. 영화로도 제작된 스탠포드 심리학 실험이다. 스팬포드실험이 머냐면,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을 무작위로 두 그룹으로 나눈다. 한 그룹은 간수, 다른 그룹은 죄수이다. 그리고 가상의 교도소 역활극을 시키는 것이다. 본래 계획은 2주짜리 계획이었는데, 5일만에 종료되었다. 이유는 간수의 폭행이 발행하고, 죄수의 심리적 스트레스가 너무 크다는 등의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만약에 당신이 간수의 역활을 맡았다면, 죄수를 함부로 대하고, 폭행하고 폭언을 할 가능성이 크다. 만약 죄수 역활을 맡았다면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 어디에 자유의지가 있단 말인가? 인간은 결국 환경에 반응하는 생물일 뿐이다. 어떤 환경이 주어졌느냐에 따라 선택도 달라진다.

 

 또다시 사고실험을 해보자. A는 아주 험악한 환경에서 자랐다. 어렸을 때 부모님께 사랑도 못 받고 학대받으며 자랐고, 굉장히 가난하고 굶주리며 자랐다. 교육도 못 받았고, 폭력과 범죄를 경험하며 자랐다. 그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여동생이었다. 그런데 그 여동생이 어떤 살인자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다. 그리고 그 살인자가 지금 그 어떤 사람 앞에 있다. 여기서 A의 선택에 자유의지가 있을까? 물론 A가 어떤 선택을 할 지는 모른다. 그 살인자에게 복수를 할수도 있고 용서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선택에 자유의지가 있을까? A가 어떤 선택을 하는가는 전적으로 그가 살아온 모든 과거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만약에 그에 대해서 모든 것(그의 유전자와 그가 겪어온 모든 것)을 아는 신과 같은 존재가 있다면, 그가 그 순간에 어떤 선택을 할지 명확하게 알 수 있지 않을까?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다. 인과율을 벗어날 순 없다. 어떤 선택이든지 분명이 원인이 있을 것이다. 선택을 원인에 의해서 발생한 결과라고 생각하면 역시나 자유의지는 성립하지 않는다. 내가 어떤 선택을 내리는 것은 어떤 원인에 의한 결과일 뿐이다. 자유의지란 없다.

 

 자유의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양자우연성이나, 카오스이론을 들고와야할까? 더이상 생각을 진행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졸리다. 졸려서 글을 마친다. 여기에도 자유의지는 없어보인다. 횡설수설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그래서 이 리뷰를 쓰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시간도 많이 걸릴 것 같고, 아직 내 생각이 명확한 것도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너무 길고 두서없는 글이 된 것 같아 읽으신 분께 죄송한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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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5-12-04 0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양이라디오님의 리뷰 읽다보니 저도 이 책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최근에 나온 책은 아니네요, 나중에 한번 읽어보고 싶어요,
잘 읽었습니다, 고양이라디오님 좋은밤되세요^^

고양이라디오 2015-12-04 08:56   좋아요 1 | URL
네 서니데이님도 좋은 하루 되시고요^^

혹시 읽으시면 제게 설명해주세요ㅠㅋ

maru 2015-12-04 05: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과거의 선택에서 동일한 선택을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오히려 자유의지를 확인시켜줍니다. 개인의 특이성에 따른 개인의 자유로운 의지적 선택이기에 동일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죠.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느 한 쪽이 자신의 의지나 욕망대로 선택하지 않았다는 뜻이됩니다.
선택의 자유가 ˝아무거나˝ 아닌 자신의 의지가 향하는 선택을 할 수 있느냐? 로 규정하는 것이 맞지 않나 하네요.

그리고 의지의 원천에 대해서 타자성을 주장하는 듯한데요. 타자성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구축되기에 개인은 특이성을 갖게 됩니다. 즉, 문법은 동일해도 발화가 달라지는 지점이 발생하죠. 따라서 개인의 의지의 원천은 밖에서 오지만 의지는 개별적으로 구축되며 선택은 개인에게서 오기에 자유의지는 있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합니다.
저자가 개념을 오해한 부분이 보이고 또 기계적으로 대입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고양이라디오 2015-12-04 09:13   좋아요 0 | URL
소중한 댓글 감사합니다^^

저자도 저도 개인의 특이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개인의 특이성이라는 것이 어디에서 왔냐고 따져보면, 결국은 DNA와 그 개인의 과거의 모든 경험들일 것입니다. 그 개인의 특이성이라는 것도 원인에 의한 결과물이며 때문에 그 원인들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지요. 저자는 자신의 의지와 욕망이 과연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한 의지와 욕망인지 묻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자의 주장은 아니라는 것이고요.

마루님께서 ˝타자성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구축되기에 개인은 특이성을 갖게 된다.˝ 라고 하셨는데 동의합니다. 하지만 `각자 다른 방식으로 구축되기에` 에서 그 각자 다른 방식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개인의 의지의 원천은 밖에서 오지만 의지는 개별적으로 구축되며` 에서도 의지가 개별적으로 어떻게 구축되는 걸까요? 우리가 의지를 구축하는데 자유의지를 발휘할 수 있을까요?

의지의 원천은 밖에서 오고, 의지의 구축은 우리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우리는 의지의 원천을 어느정도 선택할 수는 있겠죠. 좋은 음악을 듣는다던가, 좋은 책을 읽는다는 가, 좋은 사람을 만난다는가 하는 것으로요. 하지만 과연 그러한 것들도 자유의지로 선택하는가 생각해보면, 또다시 똑같은 문제로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 아니고, 또다른 의지의 원천들로 인해서 선택한 것이 되죠.

제 생각이 잘 전달되었나 모르겠습니다. 저도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싶진 않습니다. 하지만 저자의 논리대로 생각해보면 도저히 자유의지를 발견할 수 없어서 답답하네요ㅎ.

maru 2015-12-04 16:51   좋아요 1 | URL
음...

개별적 자아의 특이성이 나의 선택 불가능이기에 자유의지는 나의 의지가 아니라는 의미는 자유의지는 나의 자아를 내가 선택 가능해야 한다는 논리인데요.

타자성의 총체로 내가 만들어지는데 그 타자성이 구축되어 ˝어느 순간˝ 자아가 그리고 의지가 다른 층위에서 형성되죠.
존재와 존재자의 관계 처럼요.
그 순간부터 나인 것이니 그 이전에 타자성이 어디서 왔는지는 나와 나의 자유의지와는 무관합니다.
나는 타자성의 효과이고 타자성은 은폐되어 있죠.
타자성은 에너지같은 것으로 몸을 구성하지만 그 효과로 나라는 특이체가 만들어지니 에너지는 나에게 필요조건일 뿐 입니다.
설사 누군가 그것을 내게 주었다고 해도 말이죠.

고양이라디오 2015-12-04 16:57   좋아요 0 | URL
댓글 감사합니다^^
생각치못했던 부분이네요.

자아가 다른 층위에서 형성된다라던가 타자성은 은폐된다라던가요ㅎ

타자성의 총체로 내가 만들어진다고 하셨고 어느 순간 :의지가 다른 층위에 형성된다고 하셨는데, 일단 이 과정에서는 자유의지를 찾을 수 없어보입니다.

하지만 타자성이 나와 무관하고 타자성을 은폐되어 있다는 것은 납득이 될 것 같으면서도 조금 불충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타자성이 우리를 구성한다면 그 타자성이 우리와 무관하다고 할 수도 없고 그 타자성이 쉽게 은폐되지도 않는 것 아닐까요?

저는 뇌와 우리의 신체라는 입장에서 볼때 타자성은 우리와 굉장히 밀접하다고 생각합니다. 타자성이 은폐되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언제 어디서 불현듯 우리에게 영향을 끼칠지 알수없고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아닌지도 알수없죠. 거대한 무의식에 영역에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타자성을 외부요인, 세계에서 나를 제외한 것들 중 나에게 영향을 끼지는 모든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맞는지요?


maru 2015-12-04 17:45   좋아요 1 | URL
엄밀하게 자아도 타자성이니 세상은 타자성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차원에서의 논의는 타자성 자체도 사라지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논의는 저자가 설정한 범위 안인 타자성으로 구축된 실체들의 관계에서 진행되는 것이 맞다고 보여요.
저자는 타자성이자 타자성부재의 공간을 끌고 들어오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봅니다.
자아는 나와 타자의 공간에서 발생하니까요.
이 지점부터의 논의가 의지의 문제를 결정할 수 있죠.
자유의지의 선택의 자율성은 의지의 구성이 아니라 작동의 문제이니까요.

그리고 질문하신 부분은 좀 복잡한데요. 타자성으로서의 나(나의 타자로서의 나)와 타자는 서로가 동시적이고 재귀적으로 관계를 맺기에 내가 타자에게, 타자가 나에게, 내가 나에게, 타자가 타자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기에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은 자유의지가 없다와 동일하기에 자유의지는 실재와 부재로 작동하는 것이죠.

고양이라디오 2015-12-04 21:32   좋아요 0 | URL
너무 어렵습니다ㅠ 보충설명이 필요합니다.

저자는 타자성이자 타자성부재의 공간을 끌고 들어오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셨는데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고요ㅠ

자아는 나와 타자의 공간에서 발생한다는 의미도 조금 모르겠고요.

두번째 문장 마지막 문장도 잘 이해가 안되네요.

바쁘신데 죄송하지만
부연설명이 필요합니다ㅎ;;

maru 2015-12-04 23:43   좋아요 0 | URL
레비나스에 의하면 나의 세계에 타자는 없고 단지 얼굴로 현현하며 계시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타자를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따라서 타자는 다른 세계에 있기에 타자부재의 공간이자 타자로 내가 구축되기에 타자성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이 세계에서 자유의지가 존재하느냐는 무의미합니다. 따라서 자유의지와 타자성의 연결이 오류가 되는 것이죠.

그리고 자유의지는 자아에서 발현되기에 의미체계에 있습니다. 위의 타자부재의 공간이 아닌 같이 존재하는 공간이자 의미의 상호 전달이 가능한 장이죠. 여기서 자아는 의미의 자기 의미화를 통해 만들어집니다. 따라서 타자와 분리되기에 자유의지를 오염시키지는 않습니다. 또한 그 선택은 의지적 선택이기에 반복되더라도 같은 선택을 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신의 의지를 대신하는 것으로 설정되었기에 필연적일 수 밖에 없죠.

마지막 글은 타자성으로 결정되지만 나 역시 모든 것에도 영향을 미치기에 세계를 상사하게 됩니다. 이로인해 모든 것이 판타지에 속하게 됩니다. 따라서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의미였습니다. 자유의지의 부재인 공간에 자유의지를 설정하면 그렇게 작동되며, 불가능성의 가능성으로 즉, 자유의지는 자유의지의 부재로 작동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유의지는 없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결정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얘기였어요. 저자의 논지와는 다른 얘기를 적어서 혼란을 드린 듯하네요. ㅋ

고양이라디오 2015-12-05 12:41   좋아요 0 | URL
설명 감사드립니다^^ 어렵네요ㅠ 어렴풋이 이해는 가는 듯도 하지만,,,

뭔가 홀로그램 우주론이 생각나게 하는 듯하기도 하고(맞나요ㅎ;;?)
내가 타자를 직접적으로 대면할 수 없다라... 맞는 말이긴 하지만, 여기서 논지가 전혀 다르게 엇갈리는 것 같네요. 우리는 타자를 직접적으로 대면할 수 없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우리의 인식체계를 통해서만 인식하게 되죠. 저도 요즘 우리는 각자가 만든 가상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래도 너무 그러한 측면을 부각시키고 밀고나가면 모든 이론체계가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도 생기네요. 어찌되었든, 우리가 각자 인식하는 현실은 다르지만, 어느정도 보편성을 띄고 일치하는 것이라고 합의를 하고 생각을 해야될 듯 한데요.(근데 제가 maru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말하는 걸까요ㅎ;;?)

아무튼 좋은 말씀감사합니다^^

AgalmA 2015-12-04 02: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과거, 뇌 작동, 환경을 너무 일반화해서 생각하는 것 같아요. 종 개념으로 보면 인간은 비슷하겠지만, 개체적 경험과 선택성을 더 중요시해서 본다면 달라질 게 많습니다. 저도 <지대넓앝> 들었는데, 간수-죄수를 서로 바꿔도 또 그런 가혹행위가 나타날 것이란 건 일반화라면, 그런 행위 선택을 하지 않는 사람도 여전히 있다고 볼 때 개체적 특수성도 분명 있다는 것이죠.

고양이라디오 2015-12-04 09:28   좋아요 0 | URL
Agalma님 댓글 감사합니다^^ <지대넓얕> 들으시는군요ㅎ 더욱 반갑네요ㅎ

개체적 특수성을 중심으로 바라봐도 결론은 똑같습니다. 그 개체적 특수성이라는 것이 DNA와 그 개체의 경험에 달려있는 것이기 때문이죠. 스탠포드 감옥실험에서 가혹행위를 선택하지 않은 사람을 봐도 그 사람이 그런 선택을 한 것은 그 사람이 그런 선택을 하게끔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 사람은 분명 다른사람 보다 합리적인 사람일 가능성이 높고, 도덕성이나 주체성이 다른 사람보다 높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마치 그 사람은 자유의지로 그런 선택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사람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라는 것이지요.

이 경우도 비디오처럼 과거로 되감기하는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스탠포드 감옥실험에서 다른 사람에게 가혹행위를 하지 않은 사람은 무수히 반복적으로 과거로 되감기해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모든 것이 동일하다면 달라질 것이 없겠죠. 비디오테입을 감았는데, 갑자기 다른 장면이 나올 수가 있을까요?

저도 이러한 생각들에 먼가 중요한 오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만...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몇 주일째 틈틈히 고민중입니다ㅠ

물고기자리 2015-12-04 1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속상한 일이지만 저는 종종 제 생각이 과연 나의 생각인지를 의심하고 있어요. 어쩔 수 없이 주입된 생각이나 판단력에 의해 세상을 인식하고, 행동하고, 사고하며 저의 선택들이 그것에서 벗어난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거든요.

다양한 책을 읽지만 독서 역시 제 프레임을 통해 받아들이고 해석될 뿐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리뷰들을 읽다 보면 저뿐만이 아니라 결국은 독서란 것도 자신의 특질을 더더욱 강화시켜나가는 과정이란 생각도 들어요. 물론 태도엔 영향을 주겠지만 저는 태도마저도 기질이란 생각이 들곤 합니다. 매사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들, 공격적인 사람들, 회피하거나 방어하는 사람들, 의존적인 사람들, 회의적인 사람들 등등 그런 기질을 과연 자신이 선택했으며 바꿀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새로움을 배웠다고 하더라도 그건 완전히 다른 구역의 새로움이 아니라 같은 구역 안에서 데이터 하나를 더 가졌을 뿐이란 생각도 들어요. 그러니까 발견이란 것도 철저히 나에게 있는 데이터를 통한 재해석이란 생각입니다.

어릴 때부터 우린 다양한 사고를 배우고 학습하지만 실제 우리를 이루고 있는 기본적인 요소들은 타고난 유전자적 환경과 양육자의 반복되는 비언어적인 모든 신호들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특히 가장 가까이 접하는 양육자의 표정이나 몸짓을 통해 어떤 사람을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마저도 학습되는 것 같거든요. 그리고 양육자의 반응은 아기들의 행동을 통제하거나 강화시킴으로 아기들 스스로 어떤 행동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학습시킵니다. 자율이 아닌 학습인 거지요. 생존본능이 강하고 관찰 능력이 뛰어날수록 이런 선택을 빨리 학습할 거란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자녀가 부모를 닮는 건 비슷한 양육환경의 대물림과 유전자적으로 비슷한 감각통합의 시스템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특정 감각이 통합되지 않는 유전적 기질을 가지고 있는 가계에선 유난히 어떤 감각에 예민한 사람들이 있는데 대개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감각은 뇌에서 무시하라는 지시를 내리지만 그게 실행되지 않는 사람들은 그런 자신의 감각을 일반화해서 세상을 인식하게 되지요. 이미 감각적인 프레임에 갇혀있는 셈이라서 자유가 아닌 기질에 의해 사고하고 선택하게 된다는 거지요.

글을 읽을 때도 느끼는 것인데 어떤 글을 좋아하고, 하지 않고의 차이는 글 안의 생각이 문제가 아니라 글을 쓰는 사람의 기질에 반응하는 것일 뿐이란 생각도 들어요. 그러니까 그것도 유전적으로 기록된 편견이자 기호인 거지요. 나도 모르게 주입된 특정 성향의 기질에 대한 거부반응일 텐데 어쩌면 그 가계도에서 오랜 시간 동안 데이터화된 거부감일 거란 생각도 듭니다.

문제는 나의 기질이나 생각이 싫을 때인데, 전 제 자신을 부정하고 싶어 하면서도 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너무나 뼈저리게 느끼고 있어서 그런 점이 정말 슬픕니다. 깨달을 순 있지만 바뀔 순 없다는 점에서요ㅜㅜ 하지만 다행인 건 그나마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다는 것인데, 알 때와 모를 때와의 차이는 극명하다 생각해요. 선택을 바꿀 순 없더라고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할 순 있으니까요. 그것 하나의 차이가 상당히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독서 역시 타인을 판단하기 위함이 아닌 저를 읽는 행위라고 생각해요..

(제가 읽지도 않은 책인데 너무 진지하게, 열심히, 부족한 궤변을 늘어놓은 건 아닐까 싶어요ㅎ)

고양이라디오 2015-12-04 11:47   좋아요 1 | URL
댓글 감사합니다. 저랑 비슷한 견해와 생각을 갖고 계시네요ㅎ 물고기자리님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변화는 어렵습니다. 초기의 유전적 경향과 양육에 의해서 정말 많은 부분이 통제되고 강화된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때문에 예민한 사람은 대부분 죽을 때까지 예민할 것이고, 소심한 성격, 적극적인 성격, 호기심 등등 많은 부분이 우리의 선택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를 받아들이는 입장입니다. 이것도 진화에 빗대어 생각해볼 수 있겠죠. 물론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점진적으로 아주 조금씩 조금씩 변화해나간다면 10년, 20년, 50년 후에는 정말 깜짝 놀랄만큼 많이 변해있지 않을까요ㅎ? 물론 키라던가ㅠ 외모라던가ㅠ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바꿀 수 있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책을 읽는 이유도 많은 부분 이런 이유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떤 책들은 정말 도끼처럼 다가와서 저의 기존인식을 깨고 마치 제 뇌를 재편성, 재구성하는 듯한 책들이 있습니다. 또는 인식의 지평을 확장시켜주기도 하고요. 최근에 읽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라는 책만해도, 그 책을 읽기 전과 후의 저는 분명 달라진 것 같습니다. 아니 당연히 먼가 달라졌겠죠. 그것이 꼭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고 눈에 띄게 달라지는 면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먼가가 달라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경험이든지 그 경험은 그 경험을 겪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고 그 영향이 차츰차츰 우리를 바꾸고 새롭게 형성하고 규정해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들이 큰 틀을 벗어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또 다른 문제겠지만, 저는 큰 틀에 있어서의 변화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기질이나 특질적인 부분들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는 생각합니다. 소심한 사람이 갑자기 대범해질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소심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 보기에 대범해 보이게 될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분명 소심한데 대범한 판단을 하고 대범한 결정들을 내리는 것이지요. 아니면 인간에게는 누구나 소심함과 대범함이 있는데, 어떤 특질을 강화시켜나가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일지도 모르겠고요.

헤브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는데,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뉴런신경통로들은 강화된다는 것이지요.(당연한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무언가를 잘 하기 위해서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고, 그리고 나쁜 습관은 그토록 버리기 힘든 것이지요.) 우리가 계속 소심함 대신 대범함을 선택해 나간다면, 소심함은 줄어들고 대범함을 늘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저는 소심함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도 대범함이 좋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둘다 필요한 상황에 적절히 활용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적절한 예나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나폴레옹은 전략을 짤 때 굉장히 굉장히 꼼꼼했다고 합니다. 소심하게 보일 정도로요. 플랜 A를 짜고, 만약 플랜 A가 잘못되면 어쩔까 싶어, 플랜 B를 짜고, 또 플랜 C를 짜고하면서 고심했겠죠. 하지만 나폴레옹을 딱잘라서 소심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죠.

저도 저의 많은 부분에서 싫은 부분이 있습니다. 정말 바꾸기 힘들죠. 특히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습관은 부모님께 확인해보니깐, 어렸을 때부터 갓난 아기 때부터 늦게자고 늦게 일어났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밤잠은 없고 낮잠은 많습니다. 유전적으로도 아침형 인간과 올빼미형 인간이 있다고 합니다. 비율은 8대 2정도 였던 것 같은데요. 분명 밤잠이 없는 사람들도 진화적으로 집단에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늦은 밤에 맹수나 다른 집단의 습격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아무튼 저는 애초에 올빼미형인간이고 그리고 지난 30년간 그 특질을 강화시켜왔습니다. 정말 바꾸기 힘들지요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ㅠㅠ
조금씩 조금씩은 나아질 수 있겠죠ㅎ??

물고기자리 2015-12-04 13:31   좋아요 1 | URL
제 경험을 돌이켜봤을 때 제가 느낀 변화란 저의 노력이 아닌 외부의 환경이 급격히 변화되었을 때, 저를 담고 있던 틀이 지각변동을 일으켰던 때였던 것 같아요. 그때 시야가 달라졌단 생각이 들었는데 제가 달라졌다기보단 보이는 정경이 바뀌는 기분이었어요. 그만큼 평범치 않은 일들을 겪었었는데(전 고양이라디오님보다 나이가 훨씬 많습니다ㅜㅜ 아무래도 그래서 더 부정적인 면이 있는 것도 같아요ㅋ),

그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경험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그것도 제 안에서의 선택이었기에 오히려 어느 때보다도 나라는 고정성이나 존재감을 확실히 느끼게 되더라고요. 나는 어떤 사람이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에 대해서요.

어찌 보면 진화란 것도 이런 식의 물리적인 변동에 의해 진행되었던 것이 아닐까 싶어요. 이에 적응하는 과정이 변화인 것도 같은데 정작 중요한 건 제가 다른 사람이 된 건 아니라는 거였어요. 다만 볼 수 있는 시야가 달라진 건데 저는 그 점이 정말 감사한, 제 인생의 반전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굳이 다른 사람이 될 필요가 있을까란 생각도 들어요. 나 같은 사람에서 좀 더 깊고 넓은 사람이면 되지 않을까 싶거든요. 그러니까 독서역시 타인을 통해 나의 한계를 깨달아가는 과정이라 볼 수 있으니 어떻게 보면 고양이라디오님과 제가 하는 말은 같은 말인 것 같아요^^

전 연세가 지극하신 어르신들을 볼 때마다 생각하는 것이 있는데 대부분의 어른들은 연세가 드실수록 자신의 단점만을 부각시키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육신의 노화나 병을 갖게 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부정적인 면들만을 응축시키게 되는 것 같거든요. 그래서 전 삶의 부정적인 것을 거부하지 않음으로 오히려 담담하게 나이 들 수 있길 바라요. 실망만 거듭한 후에 괴팍하고 완고한 노인이 되는 것보단 인생과 삶을 관조할 수 있어서 덕분에 더없이 담담한 사람으로 생과 이별할 수 있기를요.. 고양이라디오님 덕분에 이런저런 생각을 해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요즘 댓글 알람이 오질 않아 이제야 봤어요~

고양이라디오 2015-12-04 17:03   좋아요 1 | URL
네. 저도 같은생각입니다^^

인간은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고 어떻게든 유지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 정체성은 자신의 기억에 의해서 일관성을 가지게 되고요. 만약에 우리의 기억을 조작할 수 있다면 정체성도 큰 변화를 겪게 될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무서운 일이군요ㅎ;;

저도 다른사람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은사람이 될 수는 있겠죠^^

소중한 말씀감사드립니다.


2015-12-04 2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04 2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