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가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저 산꼭대기에서 되돌아 내려올 때, 그 잠시의 휴지의 순간이다. (...) 나는 이 사람이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뇌를 향해 다시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본다. 마치 호흡과도 같은 이 시간, 또한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오는 이 시간은 바로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제신의 소굴을 향해 조금씩 더 깊숙이 내려가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강하다. " (p182)

 

 

 

알베르 카뮈「시지프 신화」를 읽는 내내 나는 카뮈를 생각했다. 그가 말하는 부조리의 감성과 추론, 그에 따르는 결론을 생각하기보단 한 사람의 존재에 대해 말이다. "당신은 강한 사람이니 솔직하게 말하겠소. 당신은 이제 곧 죽게 됩니다. "라는 말을 17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접했던 카뮈는 이제 막 삶을 시작하려고 할 때 죽음을 대면해야 했다. 그에게 주어진 세상은 마치 그의 태양처럼 희고도 검은빛의 세상, 아름답지만 무심한 세계였으리라 짐작된다. 다소 비장한 어조로 부조리에 대해, 어떤 정신으로 살아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 말하고는 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그 안의 번민들이 느껴졌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내 머릿속엔 그동안 읽었던 카뮈의 글들이 웅웅 거리는 느낌이었다. 어느 페이지를 읽을 땐 부랴부랴 「이방인」을 펼쳐 보기도 했고, 어떤 문장은 「결혼·여름」으로 달려가게 했으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안과 겉」을 다시 읽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카뮈는 늘 한결같은 말들을 했다. 그 아름답고 단단한 문장으로 서로를 조명해주며 말이다.

 

 

 

카뮈에게 '희망'은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어떤 비약이나 도피, 체념을 의미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바위의 무게에서 고개를 돌리고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감당해야 할 몫이라면 그에 반항하고, 자유를 획득하며, 열정을 다해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카뮈가 말하는 반항이나 자유는 부조리에서 벗어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체념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 마지막엔 죽음이 존재하기에, 인생에 의미가 없으면 없을수록 더 훌륭히 살아야 할 가치가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 이상한 사막은 자신의 목마름을 기만하지 않은 채 사막 속에서 살아갈 능력이 있는 사람들만이 아는 사막이다. 그때서야, 오직 그때서야 비로소 사막에서는 서늘한 행복의 물이 여기저기 솟아나게 될 것이다. "결혼·여름 (p69)

 

 

 

카뮈가 다른 산문에서도 종종 언급하는 '사막'이란 단어는 어떤 정신적인 장소를 말하는 것으로, 사유가 극한에 도달하는 물 한 모금 없이 황량한 장소를 뜻한다. 아마도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알고, 주어진 운명을 직시하며 명철한 의식을 유지하는 정신을 말하는 듯싶다. 짊어지고 있는 삶의 무게는 회피하려 하면 할수록 더 무겁게 짓누르기 마련이다. 이 세계는 부조리하다는 것이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진실이라면 그 부조리를 정면으로 인식함으로, 오히려 자유와 열정을 찾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어차피 시지프의 바위는 그의 것이기에, 산에서 내려오는 행복한 시지프를 그려볼 수도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세상에는 자기의 운명을 똑바로 마주 바라보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 - 「안과 겉」 (p63)

 

 

 

카뮈의 고향은 태양과 바다가 있는 곳, 자연의 사치와 정신의 사막이 공존하는 곳이다. 매일의 아침은 처음인 듯 다시 태어나며, 어둡고 광막한 밤은 가차없는 고독이다. 자신의 운명을 똑바로 마주 볼 수밖에 없는 곳, 그곳에서 삶에 대한 그의 사랑이 솟아난다. 물리적인 환경은 다르지만 어쩌면 내 정신의 고향 역시 카뮈와 같은 곳인가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인지 카뮈를 읽을 땐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진짜 이야기들이 마구 쏟아져 나올 것 같아 한동안 마음을 추스르게 된다. 나에게 들려주는 나의 이야기는, 아니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는 아직은 너무 아프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뮈의 글은 그 단단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나를 울린다.

 

 

 

카뮈가 말하는 세계엔 내세가(종교적인) 포함되어 있지 않다. 오직 우리가 몸으로 증명할 수 있는 이 세계에 대해서만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세나 어떤 관념으로 도피하는 것을 그는 희망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가끔 그런 희망을 꿈꾼다. 다행히 아직은 체념하는 법은 모르지만, 어떤 두려움, 극단의 공포 앞에선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으고 어떤 신을 향해서든 간절히 기도하게 되니 말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행복을 주고 싶은 단 하나의 열망, 그것이 희망이든 도피이든 회피이든 무엇에든 매달려보고 싶은 그런 감정,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나는 오히려 사랑을 배운다.

 

 

 

"삶에 대한 절망 없이는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 " - 「안과 겉」 (p91)

 

 

 

지금껏 살아오면서 배운 단 하나의 진실은 사랑과 고통은 하나라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에서 고통이 생겨나고, 그 고통이 있는 곳에 나의 사랑이 있다. 이 부조리한 진실을 나는 이제야 명확히 쓰고 있다. 하지만 카뮈는 「안과 겉」을 쓰던 당시인 22살 무렵 이미 이 말을 하고 있다. 카뮈는 1958안과 겉을 재출간하며 다시 쓴 서문에서 "인생 자체에 관해서는 지금도 <안과 겉>에서 서툴게 말한 것보다 더 많이 알지는 못한다. "라고 말한다. 카뮈의 저작을 더러 읽고 난 후 다시 읽는 「안과 겉」의 서문은 이상할 만큼 뭉클한 감동을 주었다. 자신이 판단하기엔 서툰 그 글들을 다시 읽으며 카뮈는 '그래, 바로 그거야'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가난하고 고독했지만 충만한 사랑, 쏟아지는 햇빛, 그 안에 이미 자신이 찾고 있던 진실이 있었다고 말이다.

 

 

 

카뮈의 원천은 안과 겉」에 묘사한 가난과 빛의 세계이고, 그곳엔 사랑하는 어머니의 침묵이 있다. 장애를 지니고 있어 생각도, 말도 서툰 그의 어머니는 그녀 앞에 놓인 세계의 무심함과 고독 앞에 그저 무거운 침묵을 드리울 뿐이다. 그리고 카뮈는 그 침묵에 어울릴 수 있는 정의, 사랑을 찾겠다고 다짐한다. 그 결과물이 되었을 「최초의 인간」은 카뮈의 죽음으로 미완에 머물렀지만 다듬지 못한 진솔한 목소리가 묻어있어 더 빛이 난다. 단순히 완성을 시키지 못한 것이 아니라 쓰다 만 초고일 뿐인데도 묵직한 감동이 있다.

 

 

 

"맞아요. 난 인생을 사랑했어요. 탐욕스러울 정도로. 그리고 동시에 인생이 끔찍스럽고 접근 불가능한 그 무엇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그게 바로 내가 인생을 믿는 이유예요. 회의주의 때문에. 그래요, 나는 믿고 싶어요. 살고 싶어요, 항상. " - 「최초의 인간」 (p44)

 

 

 

카뮈의 반항, 자유, 열정은 '사랑'과도 일맥상통한다. 더 많이 살고 사랑하며 자신의 삶을 소진하는 것, 인간을 포기하지 않는 것, 개개인을 소중히 여기며, 동시에 함께 가자고 외치는 것이다. 그것만큼 더 강한 반항과 자유, 열정은 없지 않을까.. 내가 알고 있는 답도 오직 한 가지뿐이다.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것, 남김없이 사랑하고, 부족한 만큼 더 넓은 가슴을 만들어 또 사랑할 것.. 이 부조리한 삶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반항은 그것밖엔 없다고, 나는 행복한 시지프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행복이 구태여 낙관론과 불가분의 관계여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행복은 사랑과 관계있는 것일 뿐 ― " - 「결혼·여름」 (p65)

 

 

 

"우리는 찢어진 것을 다시 꿰매야 하고 이토록 명백하게 부당한 세계 속에서 정의가 상상 가능한 것이 되도록 해야 하며 이 세기의 불행에 중독된 민중들에게 행복이 의미 있는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 " - 결혼·여름」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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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6-09-12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을 굴리고 터벅터벅 언덕을 내려오는 시시푸스를 상상행봅니다. 그의 입가에 걸린 웃음도요. 저는 시시푸스가 행복했다고 상상하긴 어렵지만 신들을 비웃는 시시푸스를 상상하면 왠지 통쾌해지더라구요.

`무의미를 강요한다고 무의미해지나`

반항에서 사랑으로 나아가시다니
감동적인 리뷰입니다. 저도 요즘 사랑에 관심이 많거든요^^

물고기자리 2016-09-12 13:47   좋아요 0 | URL
그런 장면이 영상처럼 보이네요. 비웃는 시시포스 멋집니다! 시이소오 님껜 그런 게 어울리죠 ㅎ 제가 그래서 시이소오 님의 글을 좋아하고요^^

`무의미를 강요한다고 무의미해지나`
곱씹어 볼수록 참 좋습니다.

시이소오 님이 사랑을 품고 계셔서 좋게 봐주신 것 같아요 ㅎ

AgalmA 2016-09-12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과 겉> 서문 저도 물고기자리님처럼 뭉클했어요. 지금 이 글도 그렇고요.
어떤 앎은 표현의 미숙은 있겠지만 성숙한 채 태어나죠. 까뮈는 그걸 보았고 말하고 있었죠.
˝진실은 거짓의 맨언굴˝이라고 한 이성복 시인의 표현이 사실을 담고 있지만, 물고기자리님 이 글을 읽으면 그 표현은 더 넓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언어의 폭이란 참....

물고기자리 2016-09-12 13:51   좋아요 0 | URL
이번에 다시 읽으며 <안과 겉>이 새삼 인상적이었어요. 제가 원석 같은 글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인간 카뮈에 대한, 살아가는 것의 비슷비슷한 감정에 대한 슬픔이 느껴졌던 것 같아요.

저는 요즘 A 님 글에 위로를 많이 받아요. 어딘지 모르게 광물적인 느낌인데 거기에 따뜻함이 느껴지거든요. 꼭 카뮈의 글처럼 말이죠 ㅎ (예전처럼 글을 읽을 수 있어 좋지만 잠은 좀 주무시는지 걱정도 됩니다^^)

AgalmA 2016-09-12 17:48   좋아요 1 | URL
따뜻한 광물ㅎㅎ; 재밌으면서 멋진데요~ 광물만큼 제가 단단한가 하면...그래서 따뜻한을 붙이신 걸테죠? 그래서 까뮈 글을 얘기하신 걸 테고.....까뮈에 빠져 계셔서 모두에게서 까뮈다운 것을 캐치해 내신 걸 수도ㅎ; 물고기자리님이 그리 보신 것이 터무니없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겠습니다;;;

제 일상사에 대해선 할 말이;;;

물고기자리님 글이 제게도 많은 위안이 됩니다. 강이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는 기분.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물고기자리 2016-09-13 10:22   좋아요 0 | URL
제가 가끔 뜬금없이 (읽는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제 맘대로 느낌을 표현하곤 하는데 A 님이 잘 받아주셔서 감사하죠 ㅎ

근데 정말로 따뜻한 광물질의 느낌이에요. 음악으로 치면 금속성의 음색을 내는 현악기가 의외로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듯이요.

물은 무심히 흘러가지만 돌은 어떤 것을 지탱해주기도, 이리저리 차이기도, 햇볕에 뜨겁게 달궈지기도, 도르륵 굴러가기도, 그저 묵묵히 견디다가 보석이 되기도 하잖아요^^ 단단하게 표현하지만 여리고 따뜻한 가슴을 지닌 분이라 생각해요! ㅎ

지진이다 뭐다 세상이 어수선하네요.. 우리 모두 잘 견뎌봅시다^^

AgalmA 2016-09-14 01:07   좋아요 0 | URL
물고기자리님은 언어치료사 같아요ㅎ 돗자리 깔면 문전성시! 그래서 제가 계속 물고기자리님 언어 마술에 홀릭 상태지요ㅎㅎ

문득 현악기 같은 작가라면 키냐르가 아닐까 싶어요. 혀끝애서 맴도는 그것은 현! ㅎㅎ

물고기자리님에겐 어떤 지진의 울림이 스쳐갔을까 궁금해하며... 추석 연휴 맛난 거 먹으며 물고기자리님이ㅡ[-_-] 네모난 저를 떠올리셔도 되고ㅋㅡ싱긋 웃으실 일 있으면 좋겠다 바라며 총총...

cyrus 2016-09-13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거운 추석 명절 보내세요. ^^

물고기자리 2016-09-13 21:51   좋아요 0 | URL
일부러 찾아와 인사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즐겁게 잘 보낼 것 같습니다 ㅎ
cyrus 님도 연휴 내내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서니데이 2016-09-13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님 즐거운 추석연휴 보내세요.^^

물고기자리 2016-09-13 21:53   좋아요 1 | URL
cyrus 님과 약속이라도 하신 듯 나란히 오셨네요 ㅎ

아무래도 제가 이웃 복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서니데이 님도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랄게요!

초딩 2016-09-14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포스트 이메일로 보내뒀어요~ 나중에 꼭 읽게요~ ㅎㅎㅎ
추석 잘 보내세요~~~

물고기자리 2016-09-14 13:37   좋아요 1 | URL
나중에 읽으신다니 어쩐지 긴장됩니다!^^

좀 더 잘 생각하고 썼어야 했는데..ㅋ

늘 부족한 제게 다정한 이웃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초딩 님도 명절 잘 보내세요 ㅎ

초딩 2016-09-14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의 천성은 그렇게 선했다˝
로 맺음합니다.
너무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ㅜㅜ 그냥 뭉클하네요.
이 낮에 ㅎㅎㅎ

물고기자리 2016-09-14 16:27   좋아요 1 | URL
낮에 뭉클하셨다니 고맙기도, 어쩐지 부끄럽기도 합니다^^;;

2016-10-14 08: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11 1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6-12-03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며칠 물고기자리님 생각 많이 나서 보고 싶어 찾아 왔다가 이 글을 다시 읽고 물고기자리님도 지금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는 고뇌를 바라보며 휴지의 순간이실까 하며 문장마다 물고기자리님이 공감하며 님이 이입했을 생각과 감정들을 고스란히 전해 받은 듯했습니다. 어찌 보면 참 단순한 삶인 것을 인간은 왜이리 복잡하고 고통스럽게 살게 된 운명인 것일까요. 삶이 너무도 어지러워 무언갈 잡는다는 게 대개 사람이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궁상맞은 이 댓글 안부인사에 물고기자리님은 상냥하고 부드럽게 인사를 전해 주실테죠. 물고기자리님과의 대화는 늘 그랬죠 :)
아프지 않게, 춥지 않게 잘 지내고 계신 거지요.

이 겨울 다 가기 전에 프루스트 또 꺼내 읽다가 물고기자리님 생각이 난 건지도 몰라요. 님도 프루스트 읽으실 때 제 생각하셔야 합니다. 빙긋.

물고기자리 2016-12-04 15:12   좋아요 2 | URL
저도 빙긋^^

요즘 읽기는 읽는데(아주 천천히요) 쓰는 건 잠시 멈춤 상태에 있어요. 어쩌면 생각도요 ㅎ

최근 어떤 일을 계기로 더 이상 생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었거든요. 그러다가 문득 제 의식이 가장 풍요롭던 시절은 오히려 생각을 내려놓고 삶 그 자체가 되었을 때란 걸 깨달았어요. (최근까지는 생각할 수 있는 상태가 행복이었는데 말이죠 ㅎ)

지금까지 책을 거울삼아 제 자신을 밑 바닥까지 두루 파헤쳐 보는 작업을 했다면, 지금은 나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하나씩 흘려보내는 중이에요.

그동안 좀 시끄럽다, 소음이 많다고 느낄 때가 많았는데 그게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제 내면의 소리더라고요 ㅎ

어쩌면 나를 알고자 했던 집요함은 나를 비우기 위한, 가볍고 투명해지기 위한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었나도 싶어요.

제가 글을 썼던 이유도 일정 기간 동안 마음의 둑 안에 쌓인 것들을 비우기 위해서였는데 지금은 수문을 열어둔 채 잠시 좀 흐르게 두려고요. 어쩌면 이것 역시 이런저런 것들을 견디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일 테죠..

삶의 고비를 만날 때마다 제가 본능적으로 택했던 것은 힘을 빼는 거였는데, 글을 쓰면 쓸수록 제 자신의 에고가 더 강화되는 것 같았어요. 아마도 흘러가는 순간을 투명하게 포착하고 싶어질 때 다시 쓰게 되겠죠.

이런 대화를 일상의 관계에서, 사회적인 언어로 한다면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곤욕스러울 텐데;;^^ 마음의 소리들을 대화로 나누던 A 님이라 편하게 할 수 있네요 ㅎ

프루스트가 아니어도 종종 떠오를 거예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좋은 에너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글 친구가 있어서 참 좋아요. 지금 낮술을 몇 잔 한 채로 끄적이는 거라 너무 수다스러울지 몰라요;;^^

AgalmA 2016-12-04 22:04   좋아요 0 | URL
가장 아팠을 때 나는 가장 살아있는 상태 아니었던가 했던 역설과 비슷하네요.
물고기자리님이 불행한 상태는 아니구나 안심되는 말씀이셔서 한숨 놓입니다.
오랜만에 물고기자리님 뵈니 반가웠어요. 역시 물고기를 보려면 물가로 가야지 한다는ㅎ
연말 잘 보내시고 또 종종 찾아 뵐께요 :)
낮술이라니...저도 다음 주말엔 낮술 시도해봐야 겠어요^^

물고기자리 2016-12-05 10:56   좋아요 1 | URL
다음부턴 취중 댓글은 자중하겠습니다 ㅎ 무슨 말인지;; A 님의 댓글을 읽으며 제 글을 이해해봅니다 ㅎ

아마 적당한 말을 건져올리기가 어려웠나 봐요. 살면서 만나는 어떤 고통은 생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더라는 말, 결국 제가 찾은 답은 기꺼이 끌어안고 흘러가는 것이더란 말이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내면을 확장시키는 공사를 하는 것으로요^^ (쉽지 않아요;;)

연말이라는 말에 새삼 놀랐어요. 이번 가을은 하루하루가 참 길었는데 어느새 지나갔네요. 표지판도 걸지 않고 잠수를 하는 바람에 걱정을 끼쳤던 것 같아요 ㅎ 반가웠고, 따뜻했고, 덕분에 저를 돌아보게도 됐어요. 우리의 촛불도, 나라를 밝히는 촛불도 꺼지지 않게 잘 지켜야죠..

A 님도 연말 잘 보내세요!! ㅎ

한수철 2016-12-04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 님.

근황을 적어주셨구먼요.

왜 페이퍼를 안 올리시지? 의문했을 뿐 Agalma 님처럼 댓글을 달 생각은 전혀 못했네요. 바보네요.

건강하세요.


물고기자리 2016-12-05 11:01   좋아요 1 | URL
어이쿠 반가워요!^^

그러고 보니 위에 A 님부터 차례대로 잠수를 했던, 하고 있는 친구들이 만났네요 ㅎ

‘바보네요‘

뭔가 한수철 님 식의 힘내라는 위로 같아서 묘하게 따뜻합니다^^

제가 수철 님 특유의 힘 빼게 만드는(어깨를 툭 떨어트리게 되는 ㅋ) 편안함을 좋아하거든요 ㅎ

시간 되는 대로 (몰래몰래) 친구들 글을 읽고 힘을 내서 잠수 생활도 잘 하겠습니다!! 수철 님도 건강하세요^^

2016-12-14 2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16 1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16 15: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16 15: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01 1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01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01 1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01 17: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17-01-01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님 새해인사 드립니다.
좋은 일 가득한 정유년 한 해 되시길 기원합니다.
새해복많이 받으세요.^^

물고기자리 2017-01-01 20:03   좋아요 1 | URL
안 그래도 잠깐 서친 님들 글을 읽고 있었는데 반갑네요 ㅎ

서니데이 님도 새해 복 아주아주 많이 받으세요!
늘 챙겨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서니데이 2017-01-26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고기자리님, 즐거운 설연휴 보내세요.
새해엔 소망하시는 일 이루는 한 해 되시길 기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선생, 네덜란드는 한갓 꿈이에요. 황금과 연기로 된 꿈이에요. 낮에는 연기같이 더욱 칙칙하고 밤이면 더욱 금빛으로 빛나지요. 그리고 밤이나 낮이나 그 꿈속에선 로엔그린이 살고 있지요. 마치 핸들이 높직한 검은 자전거를 타고 꿈꾸듯이 가는 저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마치 불길한 흑조떼처럼 바다 주위로, 운하들을 따라, 온 나라를 쉼 없이 빙글빙글 돌아다니는 거예요. (...) 그들은 더이상 여기 있는 게 아닙니다. 수천 킬로나 떨어진 자바로, 그 머나먼 섬으로 떠나고 없는 겁니다. " (p23)

 

 

 

몇 달 전, 알베르 카뮈의 여정을 담은 「나눔의 세계」를 읽을 때 카뮈의 「전락」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54년 10월 네덜란드와 벨기에에 잠시 체류했던 카뮈는 암스테르담에서 보낸 며칠 동안 「전락」의 무대에 관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그 페이지에 실린 사진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책 속에서 인용된 문장들을 읽는 동안 이상할 만큼 쓸쓸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강렬한 태양빛으로 가득하던, 그동안 읽었던 카뮈의 작품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도처에 싸늘한 물이 흐르고 있는, '물과 안개의 수도' 암스테르담을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을 읽기로 마음먹은 순간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나는 변호사였답니다. 그런데 지금은 재판관 겸 참회자지요. " (p18)

 

  

 

알베르 카뮈의 「전락」은 온통 말로 가득한 감옥이다. 주인공 클라망스의 집요한 독백은 뛰어가듯 단숨에 읽히지만 달리고 난 후의 개운함 같은 건 느낄 수 없다. 전력질주하여 도착한 곳은 클라망스가 용의주도하게 놓은 덫 한가운데이기 때문이다. 마치 중세시대 사람들이 '말콩포르'라 부르던 땅 속의 독방처럼 눕지도 서지도 못 한 채 자신이 유죄라는 걸 깨닫게 된다. 겸손한 이든, 오만한 이든 우리는 모두 유죄라는 걸 말이다.

 

 

 

가도 가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물컹물컹한 지옥과도 같은 곳, 아니 지옥으로 들어서기 직전의 대기실이라 말할 수 있는 곳이다. 타인을 심판하려 할수록 자신의 더 큰 잘못을 발견하게 되는 그곳은 고상한 방법으로 남 위에 군림하기를 좋아하는 지식인들이라면 절대로 가고 싶지 않은 곳일 것이다. 다른 이들을 심판하려면 먼저 자신을 고발해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등 뒤에서 자신을 조롱하는 웃음소리를 듣게 되는 곳이며, 자신이 방관한 익사자의 마지막 비명이 숨통을 죄어오는 곳이다.

 

 

 

"왜 우리가 언제나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 정당하고 관대한지 아십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제 더 이상 지킬 의무가 없기 때문이죠. 그들은 우리를 자유롭게 가만 놔둡니다. (...) 그들이 우리에게 의무를 지우는 게 있다면 그것은 잊지 말고 기억하는 의무이겠는데, 우리의 기억력은 짧아요. 정말이지, 친구들에게서 우리가 좋아하는 건 이제 금방 죽은 친구, 그래서 고통이 아직 생생한 그 주검, 즉 우리 자신의 감동, 요컨대 우리들 자신이라구요! " (p41)

 

 

 

겸손과 겸양, 덕망을 갖춘 사람의 가면을 벗기고 나면 실은 그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는 걸, 익사하는 사람의 비명소리보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걸 알게 된다. 감추고 싶은 것이 많을수록 타인을 심판하려 들고, 관계가 멀수록 그에게 더 관대해진다. 하지만 이런 것도 그나마 좀 숨 쉬고 살 수 있을 때의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지금의 우리들은 저마다 비명을 지르고, 동시에 그 비명을 못 들은 체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아니, 들을만한 여력이 없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인 것 같다. 익사하는 사람의 비명을 들으려면 누군가는 다리 위에 있어야 하지만 고고하게 서 있는 사람들은 들어야 할 귀가 닫혀 있고, 같이 추락하고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심판하고 혐오하고 있으니 말이다. 정작 참회를 해야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만족감에 취해 있고, 양심을 돌아보려는 사람들은 비교적 작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다.

 

 

 

"혹시 동심원을 그리며 배치된 암스테르담의 운하들이 지옥의 둥근 테두리들과 흡사하다는 사실에 착안해보셨는지요? " (p24)

 

 

 

"인간이 맛보는 최대의 고통은 율법도 없는 가운데 심판받는 일입니다. 그런데 글쎄 우리는 바로 그런 고통 속에 빠져 있는 겁니다. " (p120)

 

 

 

카뮈가 묘사한 그때의 그곳뿐만 아니라 지금 이곳 역시 암스테르담의 '멕시코 시티'인  것 같다. 홀로 말하는, 독백하는 인간 클라망스처럼 우린 모두가 서로의 거울이며 초상화다. 바다와 운하와 안개로 둘러싸인, 사방이 온통 물컹물컹한 지옥을 향해 흘러든 사람들로 가득하다. 권력자들에게 멸시당하고 강제당하는 데 익숙해진 우리들은 이젠 이곳에서 당연한 듯 서로를 멸시한다. 그러니 우리들 모두는 저마다 피해자이며 가해자이고 동시에 방관자이며 재판관이다.

 

 

 

"나는 끝이요 시작입니다. 내가 율법을 선포합니다. 요컨대 나는 재판관 겸 참회자다 이겁니다. " (p121) 

 

 

 

혐오와 수치심을 동시에 느끼는 사회, 그들 중 한 사람이 지금의 내 모습인 듯싶다. 저마다의 피난처로 숨어들어 오직 입만 존재하는 사람들처럼 말과 글의 홍수를 만들며 그 안에서 속절없이 떠밀려 가고 있는 건 아닌지, 어떻게 보면 인류 전체가 모두 공범자이자 조난자인 것 같다. 도처에 흐르고 있는 분노와 혐오의 강물에서 서로를 구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마침내 이 요상한 입심에 도취해버린 나는 행복합니다. 행복하다니까요. 내가 행복하다는 걸 믿어주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죽도록 행복하다 이겁니다! 오오! 태양이여, 바다여, 그리고 무역풍에 씻기는 섬들이여, 생각만 해도 가슴 질리는 청춘이여! 다시 좀 눕겠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너무 흥분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우는 건 아닙니다. 누구나 때로는 혼란에 빠지는 때가 있고 (...) " (p145)

 

 

 

행복하다는 말이 울음처럼 느껴지는 건 나의 착각인 걸까? 마치 클라망스의 쉼 없는 독백이 눈물이 되어 흐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알베르 카뮈의 「전락」은 무거운 안개 속, 겹겹이 조여드는 운하의 한가운데에 갇힌 듯한 느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에서 한 줄기 빛이 흘러드는 것 같다. 카뮈의 글답게 어떤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쩌면 그건 지옥의 마지막 테두리에서 들려오는 경각의 외침이 아니었을까?

 

 

 

무더위와 이런저런 일들 속에서 한없이 추락하듯 읽었지만 한편으론 적절했던 독서였다. 책을 읽는다는 것의 경이로움은 그동안 읽었던 글들이 나의 무의식 속에서 서로 대화를 나눈다는 데 있는 것 같다. 카뮈의 작품 중엔 가장 난해하다는 평을 듣는다는 「전락」을 읽는 동안 문득 카프카의 「성」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가도 가도 도착할 수 없었던 성으로의 여행, 미로를 헤매는 기분, 그때의 무력감이 말이다. 더 이상 카프카는 읽지 않겠다던 다짐이 무색해질 정도로 다른 관점에서의 '성'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카프카의 글이 그렇듯, 카뮈의 '전락'이 그랬듯, 출구가 없는 곳에서 낙오될 것이 아니라 명철한 의식으로 직시하며 어떻게든 다른 길을 찾아야 맞지 않겠냐는 생각을 했다. 체념하지 않는 것, 카뮈가 말하는 '반항'이란 그런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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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16-09-09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읽은 `시지프 신화`를 통해 이 포스트로 회귀합니다 ^^
카뮈의 작품들을 읽을 때마다, 어떤 것들이 그를 이렇게 쓰게 했는지 궁금했었는데, `시지프 신화`의 해설을 읽고 조금은 고개가 끄덕끄덕거려졌습니다.
그와 동이세 그에게 영향을 준 작가들과 책들을 `시지프 신화` 뒷장에 빼곡히 포스트잇으로 붙였구요.
`전락`도 즐겁게 추가해봅니다.
카뮈의 다른 작품들에서는 (이방인, 시지스 신화) 인간 존재에 관해서 많은 생각을 했었는데, 전락은 `심판`에 대해서 다루는 것 같군요.
`자아`에서 `타인과의 관계`로 확장될 것 같은 막연한 느낌도 듭니다.
카뮈가 열심히 연구한 카프카의 `성`도 조심스럽게 추가해봅니다. ^^

모쪼록 즐겁고 담백한 금요일 되세요!

물고기자리 2016-09-09 11:09   좋아요 0 | URL
저는 지금 <시지프 신화>를 다 읽고 <이방인>, <결혼. 여름>, <안과 겉>을 다시 읽고 있는데 이 역주행이 어디까지 가게 될지 모르겠어요 ㅎ

마침 현실의 고민들과 겹쳐서 진도는 시원찮지만 그래도 카뮈는 한두 페이지라도 계속 읽게 하는 어떤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카뮈는 결국 사랑을 말하는 작가라고 생각해요. 부조리의 극한까지 사유하고,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반항은 사랑이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 싶은요.

<전락>은 카뮈의 작품 중 가장 난해하다고는 하지만 저는 어떤 면에선 가장 선명한 작품이란 생각이 들어요. 출구 없는 막다른 길이 어딘지를 정확히 가리켜 보인다는 점에서요.

그래서 이 작품 이후에 미완성 작인 <최초의 인간>을 집필하며, 사랑에 대해 말하려고 했던 건 아닐까 싶었어요.

(초딩 님 말씀처럼 타인에게로 향해야 한다고요 ㅎ)

제가 카뮈의 저작을 읽은 순서가 뒤죽박죽이라 생각이 이리 섞이고, 저리 섞이는 중이지만,

처음 읽었을 때의 막연한 감상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걸 보면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위로가 되는 부분들도 있고요..

물론 즐겁고 담백한 하루가 되길 응원해주시는 초딩 님 덕분에도 힘이 납니다!!^^

 
신비한 결속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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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에 몰두하게 하는 소설이 있는가 하면, 작가의 내면으로 빠져들게 하는 소설이 있다. 한 사람의 정신 속 세계가 궁금해지는 순간들.., 파스칼 키냐르「신비한 결속」이 내겐 그랬다. 키냐르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호흡이 점점 고요해지며 내가 어딘가로 스며드는 것 같다. 나라는 존재감이 점점 옅어지는 듯싶다가 주변으로 서서히 흩어지는 느낌, 명상을 하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다. 파도가 되고, 바위가 되고, 길이 되며, 바람이 되고, 나무가 되며, 새가 되는 것 같다. 계속해서 이동하고, 멈추어 지그시 바라보고, 무한히 자유로워지는 느낌이다. 

 

 

 

" '여기로 가야지. 저기로 가야지. 여기서 생각 좀 해보자. 저기서 생각 좀 해보자. 이곳의 아름다움을 좀 누려야 해. 저곳의 아름다움도 좀 누려야 해.' 이 모든 아름다움은 생생하게 살아남을 것이다. 아름다운 모든 것은 살아 있으므로. 그녀는 이렇게 혼자 중얼거렸다. '살아 있는 것들은 언제나 추억이다. 우리는 누구나 아름다웠던 것의 살아 있는 추억이다. 삶은 이 세계를 만들어낸 시간의 가장 감동적인 추억이다.' " (p191)

 

 

 

어떤 '곳'엘 가면 본능적으로 이곳은 나에게 좋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유를 설명할 순 없지만 몸과 마음이 바로 여기라고 이야기해주는 장소 말이다. 나라는 존재의 근원이 마치 그 장소와 탯줄로 연결된 것만 같은 곳이다. 그런 곳에선 저절로 침묵하게 되고, 기척을 지워 조용히 조용히 그곳의 풍경으로 스며들게 된다. 내가 무한히 작아지고, 동시에 커지는 느낌이다. 더 높이, 더 깊이.., 아주 짧은 순간일 뿐일지라도 한 번 부풀어 올랐던 마음의 경계는 그 느낌을 쉽게 잊지 못하게 된다.

 

 

 

키냐르의 글도 그런 풍경과 닮았다. 알 듯, 모를 듯한 내용을 만나도 피로감이 느껴지질 않는다. 잠깐 멈칫 바라보다가도 이내 다시금 걷고, 또 걷는 사색의 과정과 비슷하다. 주인공 클레르를 따라 걷고, 또 걷다 보면 몸과 마음이 점점 가벼워지는 것 같다. 나에게도 잠깐의 희열을 주는 장소가 아닌, 항구적으로 '결속' 관계를 이룰 수 있는 '곳'을 열망하게 된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아파트 숲과, 잘 포장된 아스팔트가 눈에 들어온다. 나무도 꽃도 너무 반듯하게 다듬어져 있다. 나에게 맞는 곳엘 가려면 어쩔 수 없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콘크리트와 '결속'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만큼 무던한 성향은 못되니 말이다. 하지만 키냐르의 글은 그런 장소를 대신해준다.

 

 

 

"엄마는 날 사랑하지 않았어. " (p161)

 

 

 

키냐르의 주인공에겐 어떤 '결핍'이 존재한다. 그것도 근원적인 결핍이다. 살아가면서 잃은 것이 아닌, 이미 잃으면서 시작된 삶이다. 그 결핍은 키냐르 자신의 것과 비슷한 듯싶다. 바로 모정의 결핍,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데서 오는 오랜 결핍이다. 키냐르는 어느 강연에서 "어머니는 나를 거의 사랑하지 않았다. "라고 고백했다 한다. 실제로 두 차례에 걸쳐 자폐증을 앓았던 키냐르에겐 그런 정서가 확연히 느껴진다. 그의 글에선 결핍을 채워 온전한 존재로 나아가기 위한 여정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솔직하고, 간결하고, 진지하다.

 

 

 

"불안은 오랜 동반자다. 아마 이 세상에서 가장 편한 친구는 아닐지라도 좋은 조언자이다. 조여오는 목구멍은 고통스럽고 가혹하지만 시간이 분배하는 패들을 기막히게 읽어내는 요정이다. " (p34)

 

 

 

어머니와 연결되지 못한 채 성장한 자아는 뿌리내릴 곳을 찾지 못해 불안하다. 하지만 어느새 삶의 동반자가 된 불안은 내면의 등대가 되어주기도 한다. 스스로가 자신의 기원이 되기 위해 가야 할 곳으로, 사람들의 곁으로 찾아가게 만든다. 이 소설엔 사랑보다 더 깊은 '결속'들이 존재한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장소가 그 주인공이다. 키냐르 못지않게 늘 어떤 '곳'에 대한 근원을 알 수 없는 열망을 지닌 채 살아가는 내겐 그의 글도 일종의 '곳'이 된다. 그곳엔 살아오며 느꼈던 온갖 감정들이 뒤섞여 있지만 그 어느 것도 해를 끼치거나 조여오지 않는다. 기쁨도 슬픔도 초월한 내면의 장소에 다다른 느낌이다. 이야기의 힘이란 그런 역할을 해준다. 작가 자신에게도, 독자에게도 말이다.

 

 

 

"여전히 두려웠지만, 더 이상 두려움이 두렵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의지가 되었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었고, 추위를 사랑하고, 억수 같은 비가 내려도 외출을 즐기고, 낮게 뜬 구름을 사랑하고, 체념을 사랑하고, 고독을 사랑하고, 불면을 가상하게 여기며, 밤을 좋아하고, 한밤중의 정처 없는 보행을 열렬히 사랑하게 되었다. 일단 세계가 광대무변한 존재로, 마구 쳐들어오는 불가해한 존재로, 완전히 초연한 존재로 별안간 바뀌게 되면, 우리 앞에 펼쳐지는 해변은 얼마나 놀라운가! 그때 세계는 출생과도 흡사해진다. " (p117)

 

 

 

'라클라르테'는 파스칼 키냐르가 이 소설에 만들어 넣은 가공의 항구도시다. 바다에서 수직으로 솟아 있는 작은 도시, 절벽에 붙어 있는 마을, 절벽 위의 황야, 개암나무숲에 가려진 소박한 집, 아주 작은 골짜기의 틈새로 이어진 내포, 이러한 곳들이 주인공 클레르를 결속시켜 주는 '곳'이다. 마치 조난당한 것처럼 뿌리내리지 못하고 살던 클레르는 이곳에서 항구적이며 믿음을 주는 관계에 속하게 된다. 마치 자신이 기원 내의 시초인 양, 근원적인 평화를 얻는다. 키냐르는 노장사상에 관심이 많아 1996년 장자의 고향을 여행했는데, 이후의 작품들에 그 경험을 꾸준히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이 소설 역시 언뜻 사랑 이야기인 듯싶지만 철학에 가까운 내용이라 사색하듯 읽어야 했다.

 

 

 

두 어번을 반복해 읽다 보니 이보다 먼저 읽었던 키냐르의 「빌라 아말리아」가 떠올랐다. 그래서 두 달만에 그 책을 다시 펼쳐 읽었다. 두 소설 모두 '곳'에 대한 결속을 주제로 하고 있어서 비슷한 길을 다른 정경으로 걷는 느낌이었다. 나는 사실 '빌라 아말리아'의 안 이덴에 더 가깝다. '신비한 결속'의 클레르는 안 이덴의 완성형인 것 같은데, 어느 순간 클레르는 도약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키냐르 역시 "클레르가 무척 부럽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자신이 쓴 작품 중에 가장 애착을 느끼는 소설이라는 그의 언급이 없었더라도,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저자인 키냐르가 주인공 클레르에게 상당한 애정을 지니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어떻게 보면 클레르를 통해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 같기도 했다.

 

 

 

"걷기는 '곳' 안에서 무엇의 길을 트고, 시간 안에서 무엇을 구멍 낸다. " (p219)

 

 

 

"그녀라면 '자신을 괴롭히는 것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아마도 우리가 '존재한다'고 부르는 것이 그런 것이리라. 나중에 그녀는 자신을 괴롭히는 것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지 않게 되었다. 점차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p220)

 

 

 

많은 작가들이 그렇겠지만, 소설을 쓰는 것이 키냐르에겐 치유 그 자체인 듯싶다. 글을 읽는 동안 이 소설은 저자 자신을 위한 것일 거란 생각이 그저 이유 없이 들었다. 자신이 닿고자 하는 곳에 클레르를 가게 함으로, 그의 은밀한 내적 소망을 이룬 듯 보였으니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침묵이 좋아진다. 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넓고, 깊고, 가슴 저미는' 침묵에 휩싸일 때, 나의 내면이 가장 활력적이란 걸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동안 담고 있다 보면 저절로 빠져나가야 할 것들이 빠져나가고, 나에게 필요한 것들만 수면 위로 떠오르는 느낌이 든다. 그렇게 좀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침묵이 필요할 때, 파스칼 키냐르의 글은 꽤 좋다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최소한의 인물과, 대화랄 게 거의 없는 내면의 묘사, 축약과 도약이 있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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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6-07-07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이군요. 신비한결속. 박연준, 장석주 에세이를 읽다 마주쳤어요. 걷기는 곳안에서 무엇의 길을트고, 시간안에서 무엇을 구멍낸다, 소설속 그녀처럼 하염없이 걷고싶네요. 키냐르도 읽고 싶은데 말이죠. 책이 너무 많아요 ㅎ

이번에도 잘 읽었습니다
저는 물고기자리님 팬이에요 ^^

물고기자리 2016-07-07 14:28   좋아요 0 | URL
신기한 게 키냐르의 글에선 실제로 걷는 것 같은 속도감이 느껴져요. 황야와 고원을 하루 종일 걸은 것 같고, 제게서 바다 냄새가 나는 것도 같고요ㅎ

조용히 사색하고 싶은 어떤 장소가 필요할 때도 키냐르의 글이 그런 역할을 해주는 것 같아요. `자, 입장하셨으면 문은 닫겠습니다. 잘 쉬었다 가십시오..` 이런 느낌이요^^

읽고 싶은 책이 많지만 저는 시이소오 님의 독서를 통해 대리만족을 하겠습니다^^ 지금 제 시기는 뭔가 `느림`의 시기인 것 같거든요;;

팬이라면, 혹시 안티팬은 아니겠지요?ㅋㅋ
뭔가 부끄럽지만 기분이 좋아지네요ㅎ

저도 시이소오 님의 팬이라고 하면 너무 접대용 멘트 같으니까 원래 팬이었다고 말할게요^^

AgalmA 2016-08-23 0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을 읽다보면 특히 ˝결핍˝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돼요.
그걸 주로 말하는 게 아니 잘 말하는 방법이 소설이라서 그런 지도 모르죠.
하루키가 보여주는 ˝결핍˝, 파묵이 보여주는 ˝결핍˝, 키냐르가 보여주는 ˝결핍˝, 까뮈가 보여주는 ˝결핍˝....
비슷한 듯하면서도 작가들의 개성만큼 다양한 ˝결핍˝들을 느낄 수 있죠.
하루키의 주인공들이 비밀의 세계나 우물 속으로 들어가 치유하는 걸 보거나,
키냐르의 주인공들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끝으로 가 치유하는 걸 보거나,
헤세의 주인공들이 마을을 떠돌다 산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걸 보면서
저도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는 공간을 생각해보게 되죠.
이곳 서재도 많은 사람들에게 그러할 테죠. 침묵할 장소는 아니라는 게 가장 큰 단점? ㅎ
공간과 시간을 같이 생각해야 된다고 한 아인슈타인의 말은 그저 과학적인 생각만은 아닌 거죠.
치유는 공간만 있어도 안 되고 시간만 있어도 안 되죠.
공간과 시간이 모여 만들어진 존재가 나이기 때문에.


물고기자리님의 키냐르에 대한 감상처럼 저도 비슷한 만족감을 얻는데요.
키냐르의 문장은 톡 하고 파문을 만들고 동심원을 그리며 잦아들면서 미묘한 위안을 줘요
썰의 재미보다 이쪽이 제 취향이라서 더 그럴 테죠.

말과 침묵이 잘 배합된 인간이길, 키냐르를 읽을 땐 그런 겸손을 바라게 됩니다.
마음이 사나울 때 좋은 치유약 같은 작가, 키냐르. :)

물고기자리 2016-08-23 12:02   좋아요 0 | URL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을 이렇게 콕! 집어 말해주시는 센스^^

사람들은 저마다 결핍된 존재들이고, 채우길 갈망하며 살아가는 것 같아요.

독서가 좋은 건 처음엔 무엇이 결여된 지도 모른 채 허기를 채우듯 읽고 또 읽게 만든다면,

어느 순간부턴 그 결핍을 가만히 들여다볼 수 있는 내공을 만들어 주는 데 있는 것 같아요.

그 힘을 유지시켜 주는 건 다름 아닌 `쓰기`인 것 같고요.

사실 결핍이란 채워도 채워도 공허하기 마련이지만 그걸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있으면 그 자체가 어떤 면에선 제 균형추란 걸 깨닫게 되는 것 같거든요.

살게 만들고, 생각하게 만드는 힘인 거죠. 그래서 집요하게 파고들며 각자의 방식으로 그 과정을 언어화하는 작가들이 참 좋아요.

이 서재도 제겐 그 과정 중에 있는 저만의 치유 장소이죠. 치유라고 말하긴 하지만 영원한 회복을 바란다기보단 계속해서 생각하길 바라는 장소에요. 하지만 그 과정이 공유되는 장소이기도 하기에 배설 같은 글이 되지 않도록 되돌아보긴 해요 ㅎ

(언젠가 제가 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제 글들이 마치 길 잃은 아이들처럼 이 공간을 맴돈다 생각하면 아찔하기도 하거든요. 사실 너무 개인적인 몇몇 글들은 비공개로 돌려 놓기도 했어요;;)

어떻게 보면 침묵하면서도 말하고, 말하면서도 침묵할 수 있는 게 글인 것 같아요. 집요하게 말하고 또 말해도 배설처럼 느껴지지 않는 글이 제가 읽고 싶은 글이고, 쓰고 싶은 글인 것 같고요.

또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서로에게 영감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어떤 이의 과거는 누군가의 현재와 만나기도 하겠죠^^) 서로의 시간이 만나는 신비로운 장소인 것 같아요.

동시간은 아니지만 서로의 파동이 각자의 현재에 울림을 주는,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난 A 님이 무척 반갑고 좋습니다^^

AgalmA 2016-08-23 14:14   좋아요 0 | URL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을 물고기자리님이 더 애정하고 관심을 기울이셔서 가끔 질투가 날 때도 있는데ㅎ 그 작가들을 저보다 더 잘 말해 주셔서 고마울 때가 더 많아요. 저만 그런 건 아닐걸요~
작가는 우리 모두의 스승이면서 자식이면서 독자들을 이어주는 중매쟁이? ㅎㅎ
물고기자리님이 다음엔 어떤 작가와 소통하며 말씀하실까 늘 궁금해하고 있어요. 이곳이 물고기자리님께 그런 자리라는 게 잘 느껴져요. 알라딘은 땡 잡았다! 아, 나 정말 주책;

제가 댓글 달아서 물고기자리님 침묵에 방해가 되지 않길 바라니 대댓글에 신경쓰시지 말고 여유롭게 생각 나아가시길^^ 제 경우는 댓글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나중엔 놓칠 거 같아 안 달 수 없긴 하더라는;;
아무튼, 아무튼 전 물고기자리님 말도 좋고 침묵의 결도 좋고 그래요^^
 
체실 비치에서
이언 매큐언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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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그들은 너무 예의발랐고, 너무 경직됐고, 너무 소심했고, 까치발을 든 채 서로의 주위를 빙빙 돌며 중얼거리고 속삭이고 부탁하고 동의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고 그럴 수도 없었다. 침묵에 가까운, 사교적인 배려라는 담요가 그들을 결속하는 만큼이나 그들의 차이를 덮어버리고 그들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이었다. " (p174)

 

 

 

스물두 살 에드워드와 플로렌스는 결혼 첫날밤에 파경에 이른다. 1960년대 초반이었던 그들이 결혼할 당시는 성문제를 화제에 올리는 것조차 불가능했고, 둘 다 순결을 지키고 있었다. 연애 기간부터 이미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 있던 에드워드는 어떻게 하면 민망하지 않게, 성공적으로 해낼 것인가에 만 몰두해 있었고, 플로렌스에겐 보다 근원적인 문제가 있는 듯했다. 바로 성행위에 대한 불가항력적인 혐오의 감정인데, 이언 매큐언「체실 비치에서」를 통해 그들이 소통할 수 없었던 이 민감한 문제를 적나라하게 묘사해 나간다.

 

 

 

"그들은 어떻게 만났고, 왜 이다지도 소심하고 순진했을까?" (p48)

 

 

 

정신착란을 겪는 어머니를 보호하느라 부조리한 판타지 속에서 자란 에드워드는 자존심 강하고, 자기방어적인 청년이다. 그는 결혼과 함께 자신의 인생이 어서 시작되기를 바라며 그저 앞으로 내달리고 싶어 한다. 그런가 하면 플로렌스에겐 아버지와 관련하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치부해버린 어떤 기억들이 있다. 에드워드를 사랑하며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면서도, 스스로 유폐시켜 놓았던 어린 시절의 수치스러운 기억은 그와의 관계가 진전될수록 성행위에 대한 혐오와 공포의 감정이 되어 그녀를 위협한다. 에드워드는 자신의 열망 외엔 무엇이든 제대로 볼 수 없었고, 플로렌스는 사랑에 따른 의무감을 앞세워 자신의 두려움을 회피하고 있었다. 에드워드의 서툰 열망과 플로렌스의 공포는 그들의 첫날밤이란 긴장감 속에서 급기야 폭발하고만 것이다.

 

 

 

"그녀는 늘 서툰 대답만 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가지고 있는 간단한 심리적 반응, 너무나 평범한 것이라서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던, 감각을 통해 사람과 사건, 그리고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즉시 인지하는 능력이 자신에겐 결핍되어 있음을 발견하는 데 이렇게나 오래 걸렸던 것이다. " (p77)

 

 

 

이 소설의 뛰어난 점은 두 사람의 첫날밤에 일어난 일은 생략 없이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반면, 간간이 반추하는 그들의 성장과정은 적당한 생략을 통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이 공백으로 남겨둔 것들은, 특히 플로렌스가 애써 덮어두었던 기억은 글로 설명하는 것 이상의 암시를 주어 그녀의 혐오와 수치심을 헤아리게 한다. 스스로 정확히 바라보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미 문제가 아닐 테지만, 무거운 침묵으로 남겨진 것은 한 사람의 평생을 지배하기 마련이다. 쉽게 말할 수 없는 사회적인 분위기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 대상이 그녀의 아버지였기에, 스스로의 기억을 더더욱 깊고 어두운 곳에 봉인해 두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인생의 어느 한 부분을 유폐시켜 놓았다면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그녀에겐 시간이 더 필요했다. " (p167)

 

 

 

그들이 머물던 호텔의 해안가엔 수 천 년 동안의 폭풍으로, 마치 체로 쳐서 골라낸 듯한 조약돌이 십팔 마일에 걸쳐 크기별로 깔려 있었다. 동쪽으로 갈수록 큰 돌들이 놓여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이 지역 어부들은 한밤중에 육지로 올라와도 조약돌의 크기를 더듬어 그들의 위치가 어디인지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이다. 에드워드와 플로렌스는 사실 진작부터 이 해변에 나가고 싶었다. 같이 걸으며 돌들을 주워모아 그 크기를 비교해보고, 폭풍이 정말로 해변에 질서를 가져다주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나 순진하고 소심한 그들은 각자의 불안에 휩싸인 채, 비공식적인 관습에 매여 남편과 아내로서의 의식에 집중해야 했다.

 

 

 

달그락 거리는 조약돌을 밟으며 발끝에서 전해지는 느낌에 몰두할 수 있었다면 플로렌스는 자신의 두려움을 털어놓았을지도 모른다. 에드워드 역시 그녀의 몸짓과 반응을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지 않고 좀 더 기다려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그들이 해변에 나온 건 두 사람의 사이를 되돌리기엔 이미 너무 늦은 때였지만 플로렌스는 어떤 면에서 해방된 것 같았다. 지나친 예의로 경직된 그들의 관계에서 벗어나 비록 그를 향한 진심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오랜 분노를 배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전설 속의 어부들처럼 폭풍이 만들어 놓은 해변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소통하지 못 했던 그와 그녀의 차이를 말이다.

 

 

 

"그녀에게 필요했던 건 그의 확실한 사랑과,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으니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다는 그의 다독거림뿐이었다. 사랑과 인내가, 그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기만 했어도, 두 사람 모두를 마지막까지 도왔을 것이다. " (p197)

 

 

 

좋은 방법을 찾지 못 했을 땐 지나치게 열심히 하는 것보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더 좋은 결과를 얻기도 한다. 오랜 세월이 지나 에드워드가 깨달은 것도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막 자신의 인생을 시작하려는 스물두 살의 나이엔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기도 하다. 소설의 결말은 뒤늦게 깨달은 에드워드의 회한으로 마무리되지만 사실 나는 그들의 결말이 나쁘지 않았다. 바이올린을 전공한 플로렌스는 일상생활에선 서툴렀지만 음악과 관계된 일이라면 언제나 자신 있고 유연했다. 그들이 헤어진 이후로 급변하는 사회의 분위기를 타고 개방적으로 살아가던 에드워드는 그가 결심했던 일에서 멀어졌지만, 플로렌스는 그녀의 꿈을 이루었다.

 

 

 

"평론가는 리뷰 끝부분에 사중주단의 리더인 제1바이올린 주자를 부각시켰다. (...) 이렇게 표현해도 좋다면, 그녀는 비단 모차르트나 음악뿐만이 아니라 마치 삶 자체와 사랑에 빠진 여인 같았다. " (p193)

 

 

 

어차피 인생이란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수 없다. 상처를 주기만 하는 사람도, 받기만 하는 사람도 없으며, 어떤 인생이든 이야기의 끝에는 회한이 남기 마련이다. 자신의 두려움은 그 존재 자체를 회피하려 할 때는 문제가 되지만 스스로 바라볼 수 있고, 설명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미 플로렌스는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기 시작했고, 이후의 선택은 에드워드와 상관없이 그녀의 몫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결혼이란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도, 가장 큰 행복을 주지도 않는다.

 

 

 

그래서인지 나는 남편의 사랑을 받으며 혐오와 공포를 극복해나가는 플로렌스의 이야기보단 그녀 자신의 꿈을 이룬 결말이 더 좋았다. 그 시간으로 되돌아간다 하더라도 서툰 사랑은 갑자기 성숙해지기 어렵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는 건 성숙한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다. 상처는 또 다른 상처를 낳는다. 타인과의 소통 이전에 자기 자신과의 소통이 먼저이고,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개인이 많아질 때 더불어 행복한 우리들도 많아질 거라 생각한다. 이 책의 미덕은 에드워드와 플로렌스가 서로를 '사랑'으로 기억한다는 데 있는 것 같다. 서로 함께 했더라면 장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이언 매큐언의 글이 매력적인 건, 어느 한 쪽으로 둥글리지 않는 이런 예리함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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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07 02: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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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07 16: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위화「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와는 달리 소소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는 산문집이다. 책을 읽고, 쓰고, 여행하는 이야기랄까, 꽤 진지한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어딘가 모르게 소박한 일기를 읽는 것 같았다.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니 위화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어서 어떤 스토리가 없는 짧은 글을 쓰는 데는 그의 장점이 드러나지 않는 것 같았다. 반면 또 다른 산문집인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에선 풍부한 이야기와 함께 그의 삶과 성찰들이 펼쳐지니 말이다.

 

 

 

여행에 관한 산문으로 예를 들자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경우엔 스스로가 섬세한 관찰 렌즈가 되어 어떤 결론이나 생각이 아닌 독자를 위해 주변 모든 것들을 스케치하듯 묘사해준다. 나로선 가장 선호하는 유형의 글인데, 자신의 생각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도 이런저런 묘사들을 통해 오히려 저자의 생각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다른 사람들은 관심 갖지 않을만한 사소한 것들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인데, 예민한 수신기와 같은 하루키의 시선은 내가 궁금해하는 바로 그 지점을 정확히 포착해줄 때가 많다. 그래서 하루키의 여행기를 읽다 보면 떠나고 싶다는 생각보단 계속해서 읽고 싶단 생각이 든다. '좀 더 이야기해주세요..' 이런 기분으로 말이다.

 

 

 

또 다른 유형의 예로는 번역가 김화영의 경우인데, 그의 여행기에선 장소에 대한 여행이라기보단 생각 속으로의 또 다른 여행을 하는 느낌이다. 특유의 유려한 문체로 자신이 사랑하는 문학을 장소에 녹여내는데, 가끔은 저자 스스로 도취되어 독자를 배려하지 않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런 생각에서 저런 생각으로 펼치고 나열하는 방식이어서 그 독특함과 아득함에 매료되기도, 또 그 때문에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위화의 경우엔 다짜고짜 본론으로 들어간다. 주변을 포착하는 렌즈보단 직접적인 자신의 경험을 통해 서술하는 방식이어서, 이야기가 풍부할 땐 마치 그의 소설을 읽는 것 같은 몰입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짤막한 글을 쓸 땐 그저 평범한 누군가의 일기를 읽는 것 같다. 중후반부로 갈수록 그런 느낌의 글들이 많아졌는데, 위화를 알아가는 즐거움이 없지는 않았지만 비슷비슷한 내용을 연이어 읽다 보니 지나친 소박함에 아쉬움이 생기기도 했다. '뭐지?' 싶은 마음에 먼저 출간되었던 위화의 산문집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를 읽었다.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는 이 책은 보다 힘 있고, 충실했다. 하지만 또 '뭐지?' 싶어졌다. 두 책을 연달아 읽다 보니 더 쉽게 눈에 들어왔는데 내용 중 겹치는 부분들이 꽤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인, 위화가 말하는 그 '거대한 차이' 역시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에서 언급한 내용이었다. 어쩐지 속은 것 같다는 느낌에 책날개를 읽어 보니 어느 정도는 그럴 수밖에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는 검열로 인해 중국에서 출간할 수 없었고, 「우리는 거대한 차이 속에 살고 있다」는 중국에서도 출간한 내용으로 두 책의 내용이 일정 부분 반복될 수밖에 없었을 거란 걸 말이다. 그럼에도 나처럼 연이어 읽은 독자들에겐 뭔가 허무한 부분이 있는데 한 권씩 따로 읽었으면 저마다 나름으로 좋았을 테지만 연달아 읽다 보니 재방송을 보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기보다는 차라리 치료법을 찾는 사람이라 하겠다. 나는 한 사람의 환자이기 때문이다. " (p13)

 

 

 

그럼에도 위화의 산문을 읽으며 느꼈던 건 그는 소박한 독자이자, 타고난 이야기꾼이며, 시대를 통찰하는 예리한 시선을 지닌 작가라는 것이다. 한편으론 그 자신이 급변하는 이야기 속의 주인공으로 살아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중국 문혁 시기에 성장했고, 이후 급격한 사회, 경제적 변화를 겪은 세대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투쟁과 폭력들을 목도했고, 수많은 사형 장면을 목격했으며, 의사이신 부모님과 함께 병원의 숙소에서 살았던 위화는 삶과 죽음을 동시에 경험하며 자랐다. 그가 늘 불면에 시달리는 이유는 숙소 가까이에 있던 영안실에서 들려오는 갖은 곡소리들 때문인 것 같다고 말하는데 수없이 많은 곡소리, 갖가지 곡소리를 다 들었고, 한밤의 곡소리는 저마다 그를 불러 깨웠다는 것이다.

 

 

 

"밤의 곡소리는 공허했다. 이는 내 유년 잠자리의 친구가 되어 내가 생의 변경에 누워 죽음의 잠꼬대를 듣게끔 했다. 삶의 뜨거움 속에서 죽음의 서늘함을 찾았지만 죽음의 서늘함은 다시 더 많은 뜨거움을 발산하기 마련이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삶과 죽음이다. " (p82)

 

 

 

도처에서 죽음을 목격하고, 죽음을 회피하지 않음으로 오히려 삶을 말하는 작가들이 많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위화는 유년 시절의 경험이 한 사람 일생의 방향을 결정한다고 여겨왔다. 세상의 처음 모습이 그때 우리 인상에 들어오고, 우리가 크고 나서하는 모든 일들은 그저 그 유년 시절에 지녔던 기본 모습의 부분적인 수정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의 생각을 하는 편인데, 내가 무엇을 수정해야 할지를 알기 위해서라도 나를 좀 더 잘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 말하자면 내가 가진 프레임의 모양과 크기를 알아야만 다른 곳을 보려는 노력도 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저 밖을 바라보는 시선만을 가지곤 늘 제자리로 돌아오는 공허함 뿐이지만 나의 모양과 크기를 알면 내가 보는 세상이 왜 동그란지, 네모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깨우쳐 주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문학이라는 생각이다.

 

 

 

"나는 글만 쓰면 집으로 돌아간다. " (p83)

 

 

 

위화의 창작은 그를 심리적 암시이자, 상상의 귀착점인 그곳으로 인도하고, 독자인 나는 글을 읽으며 나 자신을 바라본다. 나의 이야기가 부족하던 어린 시절엔 알 수 없는 공허함을 수많은 이야기들이 채워주었고, 세월이 흘러 나의 이야기가 풍성해졌을 땐 타인의 이야기로 나의 이야기를 다시 읽었다. 나와 내가 너무 멀었거나, 너무 가까워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을 문학을 통해 더욱 풍부한 이야기로 읽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나의 발견이 없었을 땐 진정한 의미에서의 타인에 대한 발견도 없었던 것 같다. 나를 읽게 되면 타인을 좀 더 이해하게 되고 스스로의 치료법을 찾게 된다. 아니, 찾는 과정 자체가 치료라고 생각한다.

 

 

 

"지나간 삶은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않지만 지나간 독서는 세월이 지나면 더욱 새롭다. 20여 년 동안 위대한 작품들을 읽을 때면 늘 다른 시대, 다른 국가, 다른 언어의 작가들에게서 나 자신의 감성을 읽었고, 심지어 나 자신의 삶도 읽었다. 문학에 어떤 신비한 힘이 진정으로 존재한다면 아마도 이런 것이리라 생각한다. " (p112)

 

 

 

위대한 작가는 다들 자기만의 독특한 자세로 자신만의 독특한 문학의 길을 가고, 그런 뒤 인류 공통의 주제로 모인다고 말한다. 문학의 존재는 서로를 낯설게 함이 아니라 잘 알게 하기 위한 것이며, 최종적으로 독자는 끝없이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위화의 독서 경험은 나의 경험과도 비슷하다. 어떤 작가의 정거장을 거치든 문학의 신비함이란 나의 자화상을 찾게 됨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힘을 만들어 준다. 그리고 어쨌든 살아가게 만들어 준다. 삶의 본질을 깨닫게 됨으로, 비교적 단단하게 말이다. 개인적으로 책에 관한 책, 독서에 관한 책엔 관심이 없는 편이다. 책이란 어떤 방법론, 기술로 읽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읽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간절함이 생길 땐 간절함으로, 담담할 땐 담담하게 읽으며,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삶과 함께 흘러가는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작가가 독자로서의 경험을 말하거나 자신의 삶을 말하는 책엔 관심이 간다. 그 고독한 시간을 견디면서도 쓸 수밖에 없는 사람의 내면이란 어떤 것일지 늘 궁금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책을 어떤 느낌으로 읽었으며, 어떤 작가의 글을 좋아하는지도 알고 싶다. 그래서 작가로서 자신의 책에 대해 말하는 것보단 독서 경험을 말해주는 것이 더 좋다. 글을 쓰는 과정이나 어떤 시기에, 어떤 필요에 의해 글을 썼는지에 대해서 말해주는 건 고맙지만 자신의 책을 스스로 해설하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출간된 책은 그 글을 읽은 독자의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로서 억울하거나 답답한 때는 있겠지만 그래도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한해선 과묵한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내 스승이라고 할 수 있을 사람은 내 생각에는 오직 윌리엄 포크너뿐이다. " (p95)

 

 

 

이 책을 통해 위화의 독서 경험을 다소나마 알 수 있었는데 윌리엄 포크너를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에게 절묘한 한 수를 배웠기 때문이다. 바로 심리묘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인데 포크너를 통해 진정한 심리묘사에, 실은 심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도스토옙스키와 스탕달을 읽을 때에도, 두 사람은 심리 묘사의 대가이지만 심리묘사 차원의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는 걸 발견했다고 한다. 이언 매큐언을 읽은 후유증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매큐언의 단편 소설은 '예리한 칼날' 같고, 읽는 과정은 '칼날을 만지는 과정'과도 같다고 말한다. 그밖에 잘 알려진 작가들, 또는 내가 접해보지 못 했던 작가들에 대해서도 조금씩 언급하고 있다.

 

 

 

"「형제」의 서사 언어를 두고 일부 비평은, 당신의 생각과 마찬가지로, 우선 단숨에 잘 읽힌다고 말하고, 이어서 언어가 간결하지 않다고 말한다. 여기서 해명하겠다. 간결하지 않은 언어가 어떻게 단숨에 읽힐 수 있는가? 이것은 언어의 역할에 대한 이해의 차이라고 본다. " (p228)

 

 

 

그리고 이 책의 부록엔 위화가 스스로 말하는 자신의 작품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그는 「형제」의 출간으로 자신의 창작 인생에서 가장 거센 조롱을 당했다고 말한다. 사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직접 설명하는 걸 좋아하지 않기에 썩 달갑진 않았었다. 하지만 재차 읽다 보니 부조리한 세상을 주시하며, '왜 작가의 상상력은 현실 앞에서 늘 창백하고 무력한가'를 고민하는 위화 자신에게 필요한 과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이란 신기한 게 인간관계와 비슷해서, 처음엔 조금 짜증스럽게 읽혔던 부분도 재차 읽을 땐 이해하는 시선이 생기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내가 정말 좋았던 책은 감상도 짧게 남기는 편인데, 아무래도 책의 내용에 저항하는 부분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런데 어딘가 만족스럽지 않았던 책은 그 이유를 생각해보느라 좀 더 읽어보게 되고, 감상 역시 비교적 세세하게 쓰게 된다. 어쩌면 이런 과정 역시 내가 하는 독서의 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불편하게 하는 것들을 좀 더 바라보게 된달까, 나의 관점이 아닌 저자의 관점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고, 그래서 읽다가 정이 들어 별점이 높아질 때가 있다. 사실 이 책도 마찬가지여서 처음엔 빠르게 별 세 개를 눌러 두었었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와 중복되는 부분들이 꽤 있고, 위화에 대한 관심도와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굳이 몰라도 될 것 같은 일기 같은 글들도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중에서 한 권만 읽는 경우와, 좀 더 가볍게 읽고 싶은 독자들에겐 나름으로 좋은 책일 수도 있기에 별 네 개로 변경했다. 뭘 이렇게까지 고민하나 싶기도 하지만, 아마도 그동안 읽었던 위화의 소설이 좋았던 게 이유가 아닐까..

 

 

 

"인간 세상의 두려움은 갖가지 치가 떨리게 하는 폭행만이 아니라 운명의 가차 없는 냉혹함에서도 비롯된다. 운명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 (p139)

 

 

 

"지난 한 달 동안 나는, 오늘을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삶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고, 특히 전혀 모르는 사람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이는 다른 사람의 삶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자신의 삶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여러 번 말했다. " (p233)

 

 

 

"내가 쓴 것은 우리의 삶이다.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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