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1월, 새해를 여는 책으로 올리버 색스의 <환각>을 선택했다. 오래전에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재밌게 읽고 <화성의 인류학자> 까지 연이어 읽었다. 그 당시 뇌에 관심이 많았던 때라 재밌게 읽었다. 환자를 환자로만 보지 않고 한 명의 인간으로 따뜻하고 섬세하게 대하는 그의 휴머니즘에 감동받았다.
<환각>은 다양한 환각에 대한 책이다. 이 책은 15개의 장으로 다양한 환각에 대해 이야기한다. 풍부한 환자의 경험담은 다소 지루할 때도 있었지만 생생한 묘사 덕분에 상상하며 즐겁게 읽었다. 시각적으로 엄청난 묘사들이 많아서 이런 환각들을 영상으로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봤다. 환각을 겪는 주인공을 다룬 영화가 있으면 환상적일 거 같다.
환각은 샤를보네증후군부터 후각환각, 환청, 간질, 유체이탈, 그리고 도플갱어와 환상지(절단된 사지가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는 것)까지 다채로웠다. 특히나 도플갱어나 귀신 등은 참 흥미로웠다. 상실을 경험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환각을 경험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웨일스의 일반의인 W.D. 리스는 최근에 사별한 300명에 가까운 대상자를 인터뷰한 결과, 그들 중 절반이 죽은 배우자의 환영이나 완전한 환각을 보았음을 밝혀냈다. 환각은 시각적이거나, 청각적이거나, 혹은 둘다였다. 어떤 대상자들은 환각 속의 배우자와 즐겁게 대화했다. 환각은 결혼 기간에 비례해서 나타났고, 몇 달 혹은 몇 년이나 지속되기도 했다. 리스는 애도 과정에서 환각이 나타나는 것은 정상이며, 심지어 유족에게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p290
환각은 뇌에서 일어나는 신비로운 작용이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고 그리워하는 것을 현실로 보여주는 뇌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도플갱어가 전설이나 괴담이 아닌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도플갱어를 보면 죽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놀랍게도 일리가 있는 이야기였다. 도플갱어는 간질 외에 여러 뇌질환에 의해 발생한다. 신경매독, 뇌염, 정신분열병의 뇌증, 뇌의 초점 병변, 외상후증후군 등에서 발생한다. 분신 유령을 본다면 이런 질환의 발병을 심각하게 의심해야 한다. 도플갱어를 본다는 것은 심각한 질환이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에 예로부터 도플갱어를 보면 죽는다는 이야기가 있었던 거 같다.
약물에 의한 환각도 빼놓을 수 없다. 한 때 LSD에 의한 환각이 유행했다. 스티브 잡스나 여러 유명 예술인이 복용했다고 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올리버 색스도 한 때 약물에 중독 되고 환각을 경험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줘서 더욱 재밌었다. 시작은 마리화나였다. 그리고 암페타민 중독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는 다행히 약물 중독에서 벗어났다. 그 과정이 인상깊어서 아래에 소개해 보겠다. 암페타민 복용 후 그는 500쪽에 달하는 리빙의 <편두통, 두통 및 몇몇 유관 장애들>을 읽었다. 강렬한 집중 상태에서 자신이 마치 리빙이 된 것처럼 무려 10시간 동안 읽었다.
그러나 리빙이 런던에서 연구하고 저술한 때로부터 한 세기가 흘렀다. 리빙이 되거나 동시대인이 된 것 같은 환상에서 깨어난 순간, 나는 나 자신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1860년대가 아니라 1960년대다. 누가 우리 시대의 리빙이 될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는 이름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닥터 A, 닥터 B, 닥터 C, 닥터 D.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리빙처럼 과학과 휴머니즘을 확실히 겸비한 녀석은 없었다. 그때 아주 큰 내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바보 같은 녀석! 네가 바로 그 사람이야!" -p157
이튿날, 나는 리빙의 책을 도서관에 반납하기 전에 책을 모두 복사했다. 그런 뒤 조금씩 나 자신의 책을 쓰기 시작했다. 암페타민이 주는 김빠진 조증과는 달리, 책을 쓰면서 얻은 기쁨은 진짜였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실질적이었다. 나는 다시는 암페타민을 먹지 않았다. -p158
잠에서 막 깨어날 때 나타나는 환각을 출면 환각이라고 한다. <환각>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드는 생각은 환각은 우리 인간의 일부이고 이 환각이 다양한 종교와 문화, 문학에 우리 생각보다 훨씬 큰 영향을 미쳤을 거란 사실이다. 아래는 이런 관점에 대한 올리버 색스의 글이다.
출면 환영들의 기이한 성격, 즉 무서운 감정적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그 상태에서 피암시성(암시를 받아들이는 경향-옮긴이)을 높이는 성격을 감안할 때, 천사와 악마가 나오는 출면 환영이 경이감이나 공포감을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물리적으로 실재한다고 믿게 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사실 괴물, 귀신, 유령이라는 개념 자체가 환각에 어느 정도 기인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육체에서 분리된 영적인 세계를 잘 믿는 개인적, 문화적 성향과 환각이(실재하는 생리학적 기초에서 나오긴 하지만) 결합하면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강화시킬 수 있으리라고 쉽게 상상할 수 있다. -p265
유체이탈 환각에 대한 내용도 흥미로웠다. 예전에 임사체험, 유체이탈에 관심이 있어서 다치바나 다카시씨의 <임사체험> 상, 하를 읽었던 기억이 났다.
유체이탈을 체험할 수 있는 장치도 존재한다고 한다. 경험해보고 싶다. 만약 그런 장치가 존재한다면 사업화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경험하고 싶은 흥미로운 체험이 아닐까?
유체이탈 체험은 발작이나 편두통을 겪는 과정에서 뇌의 특정한 영역이 자극을 받으면 발생할 뿐 아니라, 피질에 전기 자극을 가해도 발생한다. 또한 약물 경험으로나 스스로 유발한 황홀경 상태에서도 발생한다. 유체이탈 체험은 심장마비나 부정맥, 다량의 출혈이나 쇼크로 뇌에 충분한 혈액이 공급되지 않을 때에도 발생할 수 있다. -p314
나는 아직 환각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환각을 경험해도 그렇게 두렵지 않을 거 같다. 많은 이들이 환각을 경험하면 자신이 미친 건 아닌지 걱정한다. 하지만 정상적인 환각도 있으니 무척대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올리버 색스의 <환각>을 즐겁게 읽었다. 올리버 색스의 다른 책들도 이어서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