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 한 줄, 웃으며 읽는 책

 


  오제 아키라 님이 그린 만화책 《우리 마을 이야기》(길찾기,2012) 셋째 권 144쪽부터 146쪽까지 여러 차례 되읽습니다. 일본 나리타시에 있는 자그마한 시골마을 ‘산리즈카’에서 1962년부터 오늘날까지 그치지 않는 ‘공항 건설’을 둘러싼 이야기를 다루는 만화책인데, 온삶을 들여 흙을 일구는 할아버지는 공항 건설 공무원을 앞에 두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공항 만드는 거야 좋은 일이지. 자네가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갖는 것도 당연하고. 그래서 첨에는 조금 신경이 쓰였어. 다짜고짜 반대를 외치는 게 말여. 그러니까 그게, 내 생각만 하는 것 같아서. 근디 생각해 보니 말여, 그러면 우리 농사꾼이 하는 일은 대체 뭔가 싶더구먼. 자네는 ‘농사는 나라의 근간’이라는 그럴듯한 구절을 아는가? 아이들 교과서에 써 있다네. 난 이 구절을 알고서는 괜시리 뿌듯해지더란 말이여. 농지는 농사꾼의 것이되 농사꾼의 것이 아니여. 많은 사람들을 배고픔으로부터 지켜 주는 생명의 원천이여. 그야 나도 농작물을 팔아서 먹고살고는 있지만. 근디 공항은 엄청난 돈을 벌지 않는가? 난 자네들 덕분에 농사꾼이란 것에 긍지를 갖게 됐어. 내 일이 공항에 뒤지지 않는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네.”


  만화책 《우리 마을 이야기》는 일본에서 1992년에 나왔습니다. 한국에는 2012년 봄에 일곱 권이 옮겨집니다. 나는 지난 2000년 여름에 꼭 한 번 일본에 다녀온 적 있고, 이때에 비행기를 타고 나리타에 내렸습니다. 그때에 공항에 내린 비행기가 참 오래 빙빙 도는구나 하고 느꼈고, 공항 둘레에 논밭이 길게 펼쳐졌는데, 시골집 분들이 참 시끄럽겠네 하고 생각했습니다. 공항을 둘러싼 시골마을 사람들이 ‘1962년부터 공항을 반대하며 고향마을을 꿋꿋하게 지키는’ 분들인 줄 몰랐어요.


  그러고 보면, 나는 인천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도시에서 태어나 자랐기에 내가 늘 먹는 밥이 어떻게 나오는 줄 몰랐고, 내가 먹는 푸성귀나 김치를 어떻게 얻는 줄 몰랐어요. 내가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살아가기까지 ‘밥이 되는 곡식과 푸성귀와 열매’를 곰곰이 살피거나 헤아린 적이 없다 할 만합니다. 아마, 오늘날 도시에서 살아가는 분들 누구나 엇비슷하겠지요. 저마다 회사나 학교에서 온갖 일로 바빠요. 모두들 집 안팎에서 이것저것 걱정하느라 힘들어요. 한 끼니만 굶어도 배고프다고 느끼면서, 정작 배고픔을 달래며 새힘을 북돋우는 밥을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일구는가를 생각하지 못해요.


  시인 김해화 님이 엮은 《당신을 사랑합니다》(삶이보이는창,2012)라는 책 38쪽을 읽으면, 시골에서 태어나 죽는 날까지 흙을 일구던 할머니 목소리가 생생하게 나옵니다. “그때는 시어머니가 산에 가라면 젤로 좋아. 산에 가서 도라지 캐고 고사리 꺾고 나무 함서 시엉도 꺾어 먹고 다래도 따 먹고……. 시어머니헌티 매도 안 맞고, 어쨌든 산에는 먹을 것이 있으니께.” 참말, 산에 가고 들에 가면 풀이랑 나무하고 벗삼으며 마음을 쉽니다. 풀이랑 나무는 잎사귀와 열매를 내어줍니다.


  김소월 님 시를 그러모은 《옷과 밥과 자유》(민음사,1977)라는 책에 담긴 시 〈깊고 깊은 언약〉을 읽습니다. “몹쓸 꿈을 깨어 돌아누울 때, / 봄이 와서 멧나물 돋아 나올 때, / 아름다운 젊은이 앞을 지날 때, / 잊어버렸던듯이 저도 모르게, / 얼결에 생각나는 ‘깊고 깊은 언약’.”


  김소월 님은 도시사람이었을까요, 시골사람이었을까요. 김소월 님은 흙을 일구며 살았을까요, 시내나 읍내 같은 데에서 흙하고 동떨어진 채 살았을까요. 김소월 님 싯말마다 ‘시골에서 흙을 일구며 느끼는 삶’ 이야기가 한 줄 두 줄 깃듭니다. 봄날 한철을 돌아보면서 “봄이 와서 멧나물 돋아 나올 때”를 노래합니다.


  나카가와 치히로 님 그림책 《작은 새가 좋아요》(크레용하우스,2002)를 다섯 살 아이하고 함께 읽습니다. 그림책 끝자락 29∼30쪽에 “새들의 말을 배울 테야, 그러면 새들이랑 이야기할 수 있잖아.”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래요, 새들이 노래하는 말을 배우면 새들이랑 이야기할 수 있어요. 흙이 속삭이는 말을 배우면 흙하고 이야기꽃 피울 수 있어요. 바람과 햇살과 지렁이와 개구리가 주고받는 말을 배우면 바람과 햇살과 지렁이와 개구리하고 이야기잔치 열 수 있겠지요.


  식구들 모두 발포 바닷가에 가서 바다하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여름에는 뒷산에 올라 멧딸을 따고 비탈논하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가을에는 누런 벼 가득한 논뙈기랑 이웃 할아버지 낫자루하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4345.7.19.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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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여름 책읽기

 


  한여름을 맞이하면서 이른새벽부터 이른아침까지 퍽 서늘하다 싶도록 시원하다. 이 시원한 한여름 새벽나절은 들일을 하기에 아주 좋다. 새벽 세 시 반 무렵부터 네 시 사이에 하루를 열어 아침 일곱 시 반이나 여덟 시 무렵 집으로 돌아와 밥술을 뜨면, 얼추 하루 동안 할 몫은 거의 마무리짓는다 할 만하다. 한여름은 들판 풀을 베거나 뜯으며 보내면 된다.


  가장 시원할 때에 가장 좋은 땀을 흘린다. 가장 따스하게 날이 새며 환할 때에 밥술을 뜬다. 차츰 더위가 찾아들 무렵 상큼하게 씻는다. 조금씩 더워질 무렵 느긋하게 두 다리 뻗고 한숨 돌린다.


  한 사람이 숲에서 삶자리 이루어 사랑을 짓는다 할 때에 한여름은 시원함과 더위와 상큼함과 따스함과 밝음과 뜨거움에 이어 촉촉함과 환함이 골고루 찾아드는 철이로구나 싶다. 뭉게구름을 올려다본다. 눈부시게 파란 빛깔이 춤추는 하늘 사이사이 하얗게 피어나는 꽃구름을 올려다본다. 하얀 꽃구름 옆으로 잿빛 꽃구름이 겹친다. 저녁이 되어 해가 기울기 앞서 빨래를 걷는다. 한여름에는 해가 꼴깍 넘어가기 앞서 옷가지에 후끈후끈한 기운이 배었을 때에 걷어야 한다. 한여름에는 해가 넘어간 뒤에 빨래를 걷으면 어쩐지 ‘잘 마른 빨래가 다시 축축해진’ 느낌이다.


  두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운다. 들길을 달린다. 잘 자란 벼포기로 가득한 들판 사이를 달린다. 잠자리가 얼굴에 와서 닿는다. 바람결을 느끼며 팔을 팔랑팔랑 젓는다. 아이들은 자전거수레에 앉아 노래를 부른다. 하루가 천천히 저문다. 물을 덥혀 아이들을 씻기고, 빨래를 하며, 나도 씻는다. 노을빛이 짙붉게 타오르면서 풀벌레 노랫소리가 펼쳐지고, 이제 한여름 개구리 노랫소리는 가물가물하다. 고즈넉한 소리가 내 몸과 옆지기 몸과 아이들 몸을 감돈다. (4345.7.23.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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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07-23 23:24   좋아요 0 | URL
아, 된장 님은 자연과 함께, 자연 속에서, 자연을 벗 삼아 사시는군요.
개구리 노랫소리가 듣고 싶네요. 개굴개굴... ㅋ

숲노래 2012-07-24 01:17   좋아요 0 | URL
개구리는 봄에 많이 울고
여름에는 잘 안 울어요.

아무튼 저희는 아주 깊은 시골마을에서 살아가니까요~ ^^
 


 무궁화 책읽기

 


  무궁화 꽃송이는 살몃 부는 바람에도 떨어지고, 살짝 듣는 빗방울에도 떨어진단다. 꼭 서른 해 앞서, 내 국민학교 적 교사는 무궁화를 우리들한테 가르치면서 ‘보랏빛 꽃송이’가 함초롬하다라든지 알록달록 소담스레 벌어지는 꽃잎이 어여쁘다라든지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다. 비와 바람에 쉬 떨어지며 길을 지저분하게 한다는 대목을 말했다.


  나라꽃을 가르치는 교사는 왜 나라꽃 무궁화한테서 찾아보는 얄궂거나 나쁘거나 모자라거나 아쉽다 여길 대목을 도드라지게 들려주었을까. 무궁화는 자르고 뽑아도 꿋꿋하게 새로 뿌리를 내리며 자란다고도 말했는데, 이런 모양새하고 한겨레를 어떻게 견줄 만할까.


  시골에서 살아가며 풀을 뜯어먹으며 생각한다. 정구지이든 다른 풀이든, 밑둥을 예쁘게 끊어서 먹으면, 이 조그마한 밑둥에서 새 줄기가 올라온다. 새 줄기가 올라오면 이 새 줄기를 또 끊어서 먹는다.


  시골에서 살아가며 집집마다 가득한 감나무와 매화나무와 석류나무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살살 부는 바람에도 감꽃은 잘 떨어진다. 살살 듣는 빗방울에도 매화꽃이든 석류꽃이든 톡톡 떨어진다.
  가만히 살피면, 어느 꽃이든 가벼운 바람에든 모진 바람에든 떨어진다. 어느 때에는 된바람 칼바람에도 안 떨어지는 꽃송이가 있다. 꽃송이마다 다르고, 꽃잎마다 다르다.


  서른 해 앞서 내가 도시 아닌 시골에서 살았다면 그 교사가 한 말을 어떻게 들었을까. 서른 해 앞서 그 교사가 도시사람 아닌 시골사람으로서 아이들 앞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려 했다면 어떠한 앎 어떠한 넋 어떠한 빛으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었을까. 길바닥에 예쁘게 떨어진 함초롬한 꽃송이에 맺힌 물방울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4345.7.20.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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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괭이밥꽃 책읽기

 


  들에 밭에 아주 조그마한 풀이 돋는다. 아주 조그마한 풀에는 아주 조그마한 꽃이 핀다. 꽃을 한참 바라보며 생각에 젖는다. 이 조그마한 꽃이 피지 않았을 때에도 이 조그마한 풀포기를 가만히 바라볼 수 있을까. 이 조그마한 꽃이 아직 안 피었을 적에 이 조그마한 풀포기가 어떤 풀포기인지 헤아릴 수 있을가. 이 조그마한 꽃을 알아보면서 풀이름을 깨달은 뒤, 꽃이 피도록 힘쓴 줄기와 잎과 뿌리가 어떠한 얼굴이요 빛이며 그림인가를 살필 수 있을까.


  높다랗게 줄기를 올리는 굵다란 풀포기에 가리기 마련인 괭이밥풀에 핀 괭이밥꽃을 읽는다. (4345.7.19.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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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는 손

 


  책을 읽는 손으로는 내 어떤 삶을 읽을 수 있을까. 책 또는 글을 쓰는 손으로는 내 어떤 삶을 일굴 수 있을까.


  새벽에 일어난다. 아침에 풀물 짤 생각을 하며 멧풀을 헹군다. 집 둘레에서 자라는 풀을 살핀다. 한 잎씩 뜯어서 씹는다. 씹는 맛이 좋다고 느끼는 풀을 한 대접 뜯는다. 두 손가락을 써서 똑똑 끊을 수 있는 보드라운 풀을 골라서 뜯는다. 마당 한켠에 있는 물꼭지를 틀어 들풀을 헹군다.


  빨래를 한다. 집식구 옷가지를 만지작거린다. 내가 어떤 손길로 만지작거리는가에 따라 이 옷에 깃드는 넋이나 사랑이 달라질 테지. 나 스스로 가장 좋은 손길이 되고, 나 스스로 가장 따순 손품이 되어야지 하고 생각한다.


  내가 쓰는 삶은 내가 좋아하며 걸어가는 삶이리라. 내가 읽는 삶은 내가 사랑하며 어깨동무하는 삶이리라. 내가 좋아하는 길을 가만히 생각한다. 큰 비바람을 몰고 온다는 하늘이 아직 파랗다. 어릴 적부터 큰 비바람에 앞서 바람이 잔잔하기도 하고 고요하기도 한 때를 지나, 하늘이 새파란 때를 지나면, 이윽고 온통 새까만 하늘에 무시무시하게 퍼붓는 빗줄기가 온 땅과 지붕을 내리꽂곤 했다. 해가 있는 동안 집안일을 하고, 모기그물을 찾아 끝방 창문에 붙이자. (4345.7.18.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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