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아인슈타인

 


  무기를 손에 쥐면 누구나 전쟁일 뿐입니다. 무기를 손에 쥐어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무기를 쥐는 사람은 누구나 전쟁을 일으킵니다. 전쟁을 벌여 평화를 얻는다고 하더라도 ‘전쟁을 해야’ 합니다.


  호미를 손에 쥐면 누구나 흙일입니다. 호미를 쥐어 전쟁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호미를 쥐면 밭으로 가서 흙을 만집니다. 흙을 만지며 먹을거리를 얻습니다. 흙을 만져 먹을거리를 얻는 이는 식구들 몫만 거두지 않습니다. 이웃하고 넉넉히 나눌 만큼 거둡니다. 서로 배부를 수 있고, 서로 배부르고 보면 다투거나 싸우거나 겨루거나 따지거나 괴롭히거나 등돌리거나 할 까닭도 일도 구실도 없습니다.


  연필을 쥐면 누구나 문학이 됩니다. 돈을 쥐면 누구나 재벌이 됩니다. 부엌칼을 쥐면 누구나 살림꾼, 또는 요리사가 됩니다. 아이들 손을 쥐면 누구나 사랑스러운 어버이가 됩니다.


  어느 길을 가려 하나요. 어떤 길을 가려 하나요. 혁명이란 어떤 길이라고 생각하나요. 혁명을 어떻게 이루려 하나요. 사람들이 도시에 우글우글 모인대서 정치혁명도 문화혁명도 경제혁명도 일으키지 못해요. 사람들이 도시를 떠나고 도시를 버리며 도시를 잊어야 비로소 정치혁명도 문화혁명도 경제혁명도 일으킬 수 있어요. 왜냐하면, 혁명이란 ‘깡그리 부수어 없애는’ 일이 아니라 ‘아름답고 새롭게 짓는’ 일이거든요. 혁명이란 ‘너한테서 빼앗아 다 함께 나누는’ 일이 아니라 ‘나 스스로 새롭게 일구어 서로서로 나누는’ 일이거든요.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님도 ‘혁명’이 무엇인지 똑똑히 깨우친 한 사람입니다. 《나는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한겨레,1990)라는 책 31쪽을 읽습니다. “이런 악에 대항해서 소수의 지식인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가 아는 한 가능한 길은 하나밖에 없다. 혁명적인 방법으로써 복종하지 않고 협력하기를 거부하는 길, 즉 간디가 걸어간 길뿐이다.” (4345.11.9.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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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보기
― 사라진 사진들

 


  디지털파일로 찍은 사진이 사라집니다. 틀림없이 즐겁게 찍은 사진인데 온데간데없이 사라집니다. 메모리카드가 잘못되었나? 아니면 메모리카드에 담긴 사진을 셈틀로 옮기지 않고 그만 메모리카드 씻기(포맷)를 하는 바람에 봄눈 녹듯 아무런 자취를 안 남기고 사라졌나?


  필름으로 찍은 사진이 사라집니다. 파노라마사진기를 즐거이 장만해서 낑낑거리고 들고 다니며 우리 아이들이며 우리 마을이며 신나게 찍었는데, 아무 사진이 나오지 않습니다. 어, 필름을 거꾸로 끼웠나? 빛을 제대로 못 맞추었나? 때로는 현상소에서 깜빡 하고 한 통쯤 잃어버렸나?


  내가 언제 어디에서 무언가 찍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이 사진을 찾아보면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어느 날 불쑥 어느 방(폴더)에서 사진이 ‘나 여기 있네!’ 하고 나타날는지 모릅니다. 현상한 필름이 어느 책더미나 짐 사이에 찡긴 채 몇 해를 묵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 여기 있었는데 몰랐니?’ 하고 고개를 내민 적도 있습니다.


  이렇게 찍든 저렇게 찍든 종이에 앉히지 않으면 내 앞에서 안 보이는 사진일까 하고 헤아려 보곤 합니다. 종이에 앉힌 사진을 벽에 붙이고는 날마다 곰곰이 들여다보지 않고서야 ‘사진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노릇 아닌가 생각해 보곤 합니다. 그런데, 사진기 단추를 눌러야 사진이 ‘태어난다’고 할까요. 사진기 단추를 누르지 않고도 사진을 ‘빚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맨 먼저 내 눈으로 바라보고, 내 눈을 거쳐 내 마음에 담으며, 내 눈을 거쳐 내 마음에 담은 모습을 내 가슴속 깊은 데에서 샘솟는 사랑으로 살며시 어루만질 때에, 비로소 ‘사진찍기’를 이루지 않나 싶어요. 사랑 어린 마음으로 찬찬히 아로새기는 사진찍기를 하고 나서야, 시나브로 ‘디지털파일이나 필름이라는 이름으로 사진기를 써서’ 어떤 이야기를 꾸릴 수 있지 싶어요.


  마음속에 있으면 언제나 사진이요, 마음속에 없으면 내 눈앞에 ‘종이에 앉힌 어떤 모습’이 있다 하더라도 사진이라 할 수 없는 셈 아닐까 싶어요. 마음에 와닿지 않을 때에는 제아무리 이름난 아무개가 찍어 길거리에 큼지막하게 내걸었어도 내 눈에는 안 보여요. 그저 스쳐 지나가며 느끼지도 못해요. 마음에 와닿을 때에는 환하게 떠올리고 활짝 웃으며 이야기꽃 피우는 밑바탕이 되어 주는구나 싶어요.


  삶이 있으며 사진이 있고, 스스로 삶을 잃으며 사진을 잃어요. 마음이 있으며 사진이 있고, 스스로 마음을 놓거나 버리면서 사진 또한 놓거나 버리고 말아요. (4345.11.4.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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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2-11-09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디지털 사진의 경우 한 3개쯤 백업을 해놔야 안심이 되는데 요즘은 워낙 사진들 파일이 커서 백업 기기 사는 것도 만만치 않더군요ㅡ.ㅡ

숲노래 2012-11-10 07:42   좋아요 0 | URL
그래도 외장하드가 예전 생각하면 참 싼값인데요, 뭐~
 


 읍내 초등학교 책읽기

 


  다섯 살 큰아이와 둘이서 읍내 저자를 다녀오는 길에 군내버스에서 초등학교 어린이를 만난다. 시골마을에서 읍내까지 군내버스를 타고 다니던데, 읍내에는 동무가 더 많고 볼거리나 즐길거리가 한결 많다 할 만할까 궁금하다. 이 아이는 학교를 마치고 나면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맞춰 타야 하니 동무들과 더 어울리기 힘든데, 어차피 다닐 초등학교라면 면내 초등학교보다 읍내 초등학교가 나을는지 궁금하다. 2012년 읍내 초등학교는 39학급에 1034명이라 하고, 면내(포두면) 초등학교는 7학급에 114명이라 한다. 원장수마을에서는 읍내나 면내나 어슷비슷한 길인데 이 아이는 읍내로 다닌다. 따지고 보면, 면내 학교로 가고 ‘면소재지보다 시골’ 아이요, 읍내 학교로 가도 ‘읍소재지보다 시골’ 아이라 하리라.


  읍내에서 살며 읍내 초등학교를 다닌다는 아이들이 중학교나 고등학교를 이웃 순천시로 나아가서 다니면 어찌 될까. 이때에 이 아이들은 ‘시골’ 아이가 될 테지. 읍내 중·고등학교를 다니더라도 전라도 순천이나 여수나 광주 같은 데에서 온 교사들은 이 아이들더러 ‘시골’ 아이라고 부른다. 나중에 대학교를 가든 도시에 있는 공장에 일거리를 얻어 도시로 떠나든, 이 아이들은 언제나 ‘시골’ 사람 소리를 듣는다.


  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무엇을 가르칠까. 학교는 아이들한테 무엇을 가르쳐야 아름다울까. 도시 학교는 아이들한테 무엇을 가르칠 때에 제몫을 다 하는 셈일까. 시골 학교는 아이들한테 어떤 넋을 북돋울 때에 제구실을 다 하는 셈일까. 더 커다랗게 세우는 건물에 시골 아이를 뭉뚱그리며 교육이 이루어지는지 궁금하다. 더 작은 마을에 조그맣게 꾸리는 분교를 두어 시골 아이들이 오래오래 시골 어른 되어 살아가도록 이끌고 사랑하며 보듬을 수 있을 때에 교육이라는 이름이 걸맞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죄 도시로 보내기만 해서는, 죄 읍내나 면내로 보내기만 해서는, 죄 시골을 떠나도록 내몰기만 해서는 무슨 교육 어떤 삶을 나누거나 펼칠 수 있을까. (4345.11.8.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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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책읽기

 


  책은 책을 부른다. 이 책 하나 읽으니 저 책이 눈에 밟힌다. 저 책 하나 살피며 그 책이 보인다. 얼마나 많은 책을 살펴야 책이 눈에 안 밟힐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책을 건사해야 책을 안다 말할 만할까.


  옆을 돌아보면 책을 얼마 안 읽고도 책을 말하는 사람이 많다. 책을 얼마 건사하지 않고도 책을 내세우는 사람이 많다. 책을 깊이 사귀지 않고도 책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책을 널리 헤아리지 않고도 책을 안다고 말해도 될까.


  그런데, 몇 권쯤 읽어야 책읽기를 했다 말할 만할까. 몇 가지쯤 건사해야 책을 갖추었다 보여줄 만할까.


  동무를 몇 사람쯤 사귀면 동무가 많다고 말하려나. 이웃을 몇 사람쯤 알고 지내면 사람들과 많이 알고 지낸다고 말하려나.


  도시 한켠에 마련한 작은 공원을 드나들면서도 나무를 느낄 수 있고 나무를 알 만하며 나무를 말할 수 있겠지. 가끔 자가용 몰아 시골길 지나가며 나무를 더 많이 보거나 숲도 조금쯤 들여다볼 수 있겠지. 두멧자락 깊디깊은 숲이라든지 러시아 타이가숲이라든지 안데스나 알프스 같은 곳 숲을 느끼지 않고도, 아마존이나 열대우림 같은 숲을 살피지 않고도, 얼마든지 숲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 숲은 크고작은 크기로 나누지 않으니까. 숲은 숲 그대로 숲이니까.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도시에서 자라는 나무를 바라보며 나무를 말하리라.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시골에서 자라는 나무를 마주하며 나무를 말하리라. 별을 못 보는 도시에서는 별이 없는 밤하늘을 안고 밤이나 별을 말하겠지. 별을 흐드러지게 보는 시골에서는 별이 흐드러지는 밤하늘을 보듬으며 밤이나 별을 말하겠지. 누군가는 도시를 벗어나 비행기 타고 먼먼 나라로 가서 별을 본 다음 별을 말할 테고, 누군가는 시골에서 오래오래 살면서 늘 바라보는 별을 말할 테지.


  누구나 삶을 말한다. 누구나 스스로 꾸리는 삶을 말한다. 누구나 책을 말한다. 누구나 스스로 읽는 책을 말한다. ‘모든 삶을 말하’는 사람은 아직 거의 없다. ‘모든 책을 말하’는 사람도 아직 거의 없다. 곰곰이 돌아보면, 모든 나무와 모든 숲과 모든 별을 말하는 사람도 아직 거의 없다.


  누구나 사랑을 말하고 꿈을 말한다. 다만, 아직 모든 사랑과 모든 꿈을 아낌없이 말하거나 스스럼없이 말하거나 환하게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온갖 말이 수없이 떠돈다. 온갖 책이 숱하게 나온다. 그림책도 만화책도 어마어마하게 새로 나온다. 다만, 삶을 밝히는 빛줄기 같은 책은 좀처럼 구경하기 어렵다. 책을 더 읽는대서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4345.11.7.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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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책과 사탕과 손과

 


  면소재지 가게에 들러 큰아이는 사탕 하나를 집습니다. 작은아이는 이래저래 뛰고 달리며 좋아합니다. 서재도서관에 들러 그림책 하나를 여럿이 둘러서서 읽습니다. 큰아이는 한손에 사탕을 쥐고 다른 한손으로 책장을 넘깁니다. 작은아이는 곁에 서서 손을 뻗지만 손에 채 안 닿습니다. 작은아이는 키도 작아 누나가 보는 그림책을 곁에 서서 함께 보지 못합니다. 옆지기는 그림책을 읽어 줍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재미나게 읽었다 싶은 그림책을 열 번 백 번 천 번 되풀이해 읽으면서도 재미를 느낍니다. 그러고 보면, 재미가 있을 때에는 한 번도 보고 두 번도 봅니다. 재미가 없을 때에는 한 번 보기조차 어렵습니다. 살아가는 재미를 담아 그림책을 그립니다. 살아가는 재미를 느껴 그림책을 빚습니다. 살아가는 재미를 실어 그림책을 읽어 줍니다. 살아가는 재미를 누리며 그림책 이야기를 듣습니다. (4345.11.6.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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