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강경옥 님

 


  어느 해였는지 가물가물해졌는데, 1999년이었는지 2000년이었는지, 《작은책》이라는 참 자그마한 잡지에 실리던 만화 〈천하무적 홍대리〉를 표절한 연속극이 나온 적 있다. 연속극 작가와 피디는 ‘구독자 얼마 안 되는 잡지’ 줄거리를 누가 표절하느냐 하면서 배짱을 부렸지만, 변호사를 불러 저작권법으로 이야기를 하니 ‘부분 사과’를 했다. 뒤늦게야 이 작은 잡지에 실린 만화에 나오는 여러 이야기(에피소드)를 따서 연속극을 만들었다고 털어놓고는 손해배상을 했다. 그런데, ‘정식 사과’도 아닌 ‘부분 사과’를 받기까지 여러 달 걸렸고, 방송국 작가와 피디는 그동안 온갖 드센 말과 설레발을 퍼부었다.


  요즈음, 만화가 강경옥 님 작품 《설희》를 표절했다고 하는 연속극이 도마에 오른다. 만화책 《설희》를 즐겨읽고 만화가 강경옥 님을 좋아하는 이들이 연속극을 보고는 ‘아니 어떻게 버젓이 만화 원작이 있는데 이렇게 표절을 해서 방송에 선보일 수 있는가?’ 하고 따지면서, 만화가 강경옥 님도 이를 알았고, 강경옥 님은 이녁 누리사랑방에 이 일을 놓고 글을 남겼다(http://blog.naver.com/kko314/10182176974).


  만화 원작이 있는데 이 만화에 나온 이야기(에피스드)를 슬쩍 따서 몇 가지 상황을 고쳐서 ‘원작과 다르다’라 핑계를 댄다든지 ‘그런 작품 본 적이 없다’고 발뺌을 하는 한국 방송사 작가와 피디를 자꾸 만난다. 참말, 이들은 왜 이렇게 어리숙하고 어처구니없을까. 만화가한테 원작료를 내기가 그렇게 아까울까. 원작이 있어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작품을 쓴다고 밝히는 일이 부끄러운가. 요즘 사람들이 ‘표절인지 아닌지’ 모르겠는가. 법정에 가기 앞서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할 노릇 아니겠는가.


  이웃나라 일본을 생각하고 싶지 않다. 일본에서는 만화 원작을 연속극이나 영화로 흔히 만든다. 아주 떳떳하게 밝힐 뿐 아니라, 크게 내세우기까지 한다. ‘인기 만화 ○○를 원작으로 연속극!’이라든지 ‘인기 만화 ○○를 원작으로 영화!’라고 큼지막하게 알린다. 이를테면, 〈노다메 칸타빌레〉는 만화책 《노다메 칸타빌레》를 그대로 옮긴 연속극(2006)이고, 영화(2011)도 따로 만들었다. 연속극과 영화도 살고 만화도 함께 산다. 이와 달리,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방송국 작가와 피디는 만화가를 뭘로 아는지 모르겠으나, 연속극 스스로 죽으려는 길로 치닫는다.


  방송작가 아무개 씨는 이녁이 쓰는 글이 제대로 대접받고 싶으리라 본다. 그런데, 이녁이 쓰는 방송대본이 제대로 대접받거나 사랑받고 싶다면, 이녁이 쓴 작품이 나오도록 밑바탕이 된 원작을 고맙게 여기고 알뜰히 섬길 줄 알아야 한다. 한국 문화에서 만화가 강경옥 님이 걸어온 길을 고맙게 여기면서 이분이 처음 작가로 뛴 날부터 오늘까지 꾸준히 새로운 만화를 빚으면서 이야기밭 넓히는 땀방울을 알뜰히 섬길 줄 알아야 한다.


  방송국 작가와 피디는 부디 강경옥 님 만화책을 하나하나 장만해서 읽어 보기를 바란다. 1980년대와 1990년대와 2000년대뿐 아니라 2010년대까지 씩씩하게 만화 한길을 걸어가면서 만화라는 틀에 새로운 빛과 꿈과 사랑을 담는 고운 손길을 하나하나 느끼기를 바란다.


  가만히 생각해 본다. 《태백산맥》이나 《혼불》이나 《토지》 같은 책을 ‘안 읽었다’고 하면서 이 작품에 나오는 이야기(에피소드)를 슬그머니 따서 소재와 상황과 주인공과 설정을 조금씩 바꾸어 방송대본으로 만들어도 틀림없이 ‘창작’이 되리라. 그런데, “나는 태백산맥도 혼불도 토지도 안 읽었습니다!” 하고 읊는 쓸쓸하고 메마른 말이란 얼마나 슬픈 거울이 될까. ‘강경옥을 읽은 적 없다’고 말하는 가난하며 차가운 말이란 얼마나 아픈 거울이 될까. ‘강경옥을 읽은 적 없다’고 말하는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운 소리인 줄 모르는 사람은, 우리들한테 어떤 글빛을 드리우려는 생각일까. 4346.12.25.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람과 함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진 찍는 손승현 님과

 


  사진 찍는 손승현 님이 《밝은 그늘》이라는 사진책을 대구에 있는 조그마한 출판사 ‘사월의눈’에서 펴냈다. 이 사진책은 여느 새책방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인터넷책방에서도 다루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이 사진책을 만날 수 있을까? 글쎄, 길을 찾고 책을 찾는 분이라면 틀림없이 이 사진책 만나는 책길을 찾으리라 느낀다. 나는 이 사진책을 장만하려고 고흥에서 대구까지 마실을 하며 하룻밤을 묵는다.


  2013년 11월 14일 목요일 저녁, 대구 삼덕동에 있는 ‘사월의눈’ 일터에서 조촐하게 책잔치 연다. 이 자리에 함께한다. 사진 찍는 손승현 님이 들려주는 말 가운데 세 가지를 간추려 내 공책에 적바림한다.  하나, “해가 뜨는 아침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저절로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다.” 둘, “사진을 찍어서 선물로 주면 서로 친구가 된다.” 셋, “삶은 밝지 않은데 밝게 보고 싶어 밝게 사진을 찍는다.”


  날마다 새 아침이 찾아온다. 새 아침이면 새로 뜨는 해를 바라본다. 새로 뜨는 해에는 지구별 골골샅샅 따사롭게 쓰다듬는 고운 볕과 빛이 있다. 이 볕과 빛을 가슴으로 듬뿍 담으면 글도 사진도 저절로 샘솟기 마련이다. 글을 한 줄 썼으면 깨끗한 종이에 옮겨적어 선물로 건넨다. 사진을 한 장 찍었으면 예쁜 종이에 뽑아 선물로 건넨다. 사랑 한 줄기 솟았으면 마음으로 곱게 안아 살며시 내민다. 그리고, 이녁 삶이 밝기에 사진을 밝게 찍지, 이녁 삶이 어둡대서 사진을 밝게 찍지는 않는다. 겉으로 드러나기에는 안 밝다 하지만 속내는 아주 밝고 환하기에 언제나 밝은 빛 흘러넘치는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사진을 찍는 내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즐거운 벗님들하고도 이 세 가지 말을 가슴으로 담아 함께 누리고 싶다. 4346.11.15.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람과 책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서정윤

 


  중학교 다닐 무렵 《홀로서기》라는 시집이 무척 널리 사랑받았다. 나도 동인천 〈대한서림〉에 가서 줄을 서서 기다리며 이 시집을 들여다보았고, 1권과 2권을 사서 읽었다. 그런데, 막상 읽기는 읽지만 마음으로 시가 스며들지는 않았다. 무엇일까. 왜 그럴까. 이래저래 생각해 보고 여러 차례 다시 읽지만 그리 사랑스럽지 못하다고 느꼈다. 이즈음 다른 ‘사랑 시’들도 여러모로 살피고 읽는데, 어느 시도 내 마음속에서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내가 사랑을 아직 모르던 때라 할 만하고, 철이 제대로 들지 않아 이 시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할 만하리라.


  고등학교를 마치고 열 해 지나 헌책방에서 《홀로서기》를 만난다. 어느 헌책방에나 《홀로서기》는 잔뜩 쌓인다. 열 몇 해 지나 다시 읽어도 그리 가슴이 안 움직인다. 고등학교를 마친 지 스무 해 지나 헌책방에서 《홀로서기》를 구경한다. 어느 헌책방에나 《홀로서기》는 많이 쌓인다. 스무 해 지나 새로 읽어도 그리 가슴이 설레지 않는다.


  지난날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홀로서기》라는 시집을 읽었을까. 그 많은 사람들은 이 시집을 읽으며 무엇을 느끼거나 얻거나 배울 수 있었을까. 다만, 나는 이 시집 《홀로서기》를 만나며 ‘홀로서기’처럼 한국말을 살려서 쓸 수 있구나 하고 깨달았다. 이 이름을 바탕으로 ‘홀로사랑’이나 ‘홀로살기’나 ‘홀로죽기’나 ‘홀로먹기’나 ‘홀로읽기’ 같은 낱말을 지어 보았다. ‘같이서기’나 ‘함께서기’ 같은 낱말을 지어 보고, ‘같이살기’와 ‘함께살기’ 같은 낱말도 지어 보았다.

 

  오늘 나는 ‘함께살기’라는 글이름을 쓴다. 서정윤 님 시집에서 도움말을 얻어서 지은 이름은 아니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적 이웃집에 살던 분한테서 얻은 웃옷에 “함께 가는 길”이라는 글이 적혔다. 나는 이무렵에 ‘한글만 적은 옷’을 처음 보았다. 이렇게 옷에 한글을 새길 수 있구나 싶어 놀랐고, 한글로 무늬를 새긴 옷이 이토록 고운 줄 처음 느꼈다. 옷 만드는 회사에서 왜 한국말을 한국글로 새기지 못하는지 참 얄궂다고 생각했다.


  나 스스로 좋은 날이라 여길 적이면 으레 “함께 가는 길”이라는 글씨 큼지막하게 적힌 옷을 입었다. 하도 많이 입은 탓에 이 옷은 너무 낡아서 어머니가 버리셨는데, 이 옷에 적힌 글을 간추려 ‘함께가기’를 떠올렸고, 다시 ‘함께살기’로 살짝 고쳐서 내 글이름으로 삼았다. 앞으로 내가 걸어갈 길은 ‘함께살기’라고 느꼈다.


  대구에서 국어 교사로 일하던 서정윤 님이 사표를 냈으나 학교에서 안 받아들인다는 이야기를 얼핏 듣는다. 그렇구나. 그렇겠구나. 서정윤 님이 시를 쓰고 책을 팔아 얻은 돈과 이름으로 시골에 땅을 사고 숲을 일구어 조용히 흙을 만졌으면, 더없이 아름다운 ‘홀로서기’ 되었으리라 느낀다. 부디 앞으로는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길을 걸어가며 즐거운 ‘바로서기’를 하실 수 있기를 빈다. 4346.11.14.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람과 책읽기)


댓글(4)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드림모노로그 2013-11-14 11:13   좋아요 0 | URL
중학생때 서정윤님의 시를 항상 책받침으로 가지고 다녔던 기억이 나네요 ㅎㅎ
그리고 책갈피로도 ...
이쁜 소녀 그림이었죠... 함께 살기, 닉네임이 참 좋습니다. ^^

숲노래 2013-11-15 04:28   좋아요 0 | URL
깨끗하게 고개를 숙이시면 아름다울 텐데
이모저모 아쉽기도 합니다...

Grace 2013-11-14 14:59   좋아요 0 | URL
"부디 앞으로는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길을 걸어가며
즐거운 ‘바로서기’를 하실 수 있기를 빈다."

저도 신문기사를 보고 무척 언짢았었는데...
'바로서기'란 말이 아주 적절해서 고개가 끄덕여져요.
학교에서 사표수리를 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요?
어쩐지 욱!!! 해지는걸요!

숲노래 2013-11-15 04:27   좋아요 0 | URL
학교에서는 '엄중 징계'를 할 뜻으로 사표를 안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사표만 쓰고 발뺌을 못 하게 할 뜻이지요...
 

손아섭과 어떤 사람

 


  야구선수 손아섭은 무척 젊다 할 만하다. 그러나 마흔 줄을 코앞에 둔 내가 보기로 젊다 싶은 나이일 테지만, 내가 열아홉 살이나 스무 살 나이라 한다면, ‘꽤 나이든 사람’으로 여길 수 있다. 군대에 들어가기 앞서 ‘군대를 마친 사내’를 보면 고작 스물세 살이나 스물다섯 살밖에 안 되었더라도 ‘아저씨’로만 보였다. 그런데, 마흔 줄을 코앞에 놓고 스물너덧 사내를 보면, 또 서른을 조금 넘긴 사람들을 보면, ‘참 젊은 나이네’ 하고 생각한다. 거꾸로, 내가 쉰이나 예순 줄에 접어들면, 마흔 줄 나이인 사람을 바라보면서 ‘젊고 한창인 나이로군’ 하고 생각할 수 있으리라 느낀다.


  야구선수 손아섭을 만난 적 없기에 이녁이 어떻게 살아가며 야구선수 삶을 잇는지 알 길이 없다. 다만, 야구선수 손아섭이 언젠가 어느 신문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이녁보다 어린 야구선수를 보면서 많이 배운다’고 말한 적 있다. 나는 이 말을 듣고서 많이 놀랐다. 그래, 이런 마음으로 씩씩하게 뛰는 야구선수가 있구나, 이런 넋으로 즐겁게 삶을 짓는 사람이 내 둘레에 있구나, 하고 생각하며 반갑더라.


  나는 늘 내 둘레 사람들한테서 배운다. 나이든 사람한테서는 그 나이든 사람 모습에서 배우고, 나어린 사람한테서는 그 나어린 사람 모습에서 배운다. 나이가 많이 든 사람이라서 많이 배울 만하지 않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라서 적게 배울 만하거나 못 배울 만하지 않다.


  아이를 낳아 돌보아 보라. 갓난쟁이를 어르고 달래며 사랑하는 동안 얼마나 깊고 너른 삶과 꿈을 배우는가.


  그런데, 사람들은, 한국사람들은, 나이값을 놓고 다툼질을 벌인다. 이녁 나이가 한 살이라도 더 많으면 이녁보다 한 살이라도 어리거나 젊은 사람을 깎아내리거나 함부로 말 놓는 이들이 너무 많다. 이녁보다 한 살이라도 많거나 늙은 사람이라면 오히려 ‘나이값 못한다’고 비아냥거리기까지 한다. 어쩌라고? 이녁보다 나이가 적어도 안 되고, 나이가 많아도 안 되네? 어쩌라고?


  더 생각해 보면, 나이값을 따지는 사람은 가방끈을 놓고도 따진다. 어느 대학교를 나왔는지, 서울에 있는 대학교를 나왔는지, 이름까지 ‘서울’인 대학교를 나왔는지, 이것저것 놓고 가방끈을 따지고 재기 일쑤이다. 더 나아가면, 은행계좌를 놓고도 사람을 재고 따지는 이 나라요 이 사회이다. 게다가, 이런 짓을 바보스러운 권력자만 저지르지 않는다. 지식인이라는 사람조차, 문학인이라는 사람마저, 예술인이요 문화인이며 ‘어른’이라고 스스로 내세우는 사람까지 잘못을 저지른다.


  배우지 못하는 사람은 몸뚱이는 밥을 먹더라도 산 목숨이 아니라고 느낀다. 배우는 사람일 때에는 몸이 아파 자리에 드러누운 채 지내더라도 그야말로 참답게 산 목숨이라고 느낀다. 배워야 산다. 배울 때에 산다. 배워야 사랑한다. 배울 때에 사랑한다. 삶을 읽어야 사랑을 읽을 수 있고, 삶과 사랑을 읽을 때에 사람을 읽을 수 있으며, 삶과 사랑과 사람을 읽으면서 시나브로 책을 읽을 수 있다. 4346.10.9.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람과 책읽기)

 

..

 

내 글방 가운데 하나인 네이버블로그에서 어떤 분이 '내 나이'를 들먹이며 비아냥거리고 해코지하는 댓글을 여러 차례 썼다. 나이 마흔(올해 서른아홉)에도 '나이가 어리다'는 말을 들어야 한다니, 내 나이가 여든 살쯤 되어야, 한국 사회에서 걱정없이 글을 쓸 만할까 무척 궁금하다. 그러나, 이런 분이 갑작스레 나타나서 비아냥과 해코지를 일삼아 준 탓에, 이 글을 쓸 수 있었다. 여러모로 고마우면서 쓸쓸한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헨리 데이빗 소로우

 


  나는 문을 열고 살기를 즐긴다. 도시에서 살던 지난날이나 시골에서 사는 오늘날이나 문을 걸어 잠그지 않을 뿐 아니라, 유리문으로 늘 바깥을 내다볼 수 있는 곳에서 지내기를 즐긴다. 서울에서 혼자 살던 지난날에는 나무로 지은 적산가옥 2층에서 툇마루 문 활짝 연 채 지내기 일쑤였고, 인천에서 짝을 이루어 살던 지난날에도 옥탑집 마당에서 동네와 먼 하늘을 내다보며 지내기 일쑤였다.


  시월 오일 저녁해 기울 무렵, 마루문을 거쳐 바깥 하늘에 발그스름한 빛이 서리는 모습을 본다. 아이들한테 만화영화를 보여주다가 부리나케 멈추고는 두 아이를 부른다. “얘들아, 마당으로 나가자!” 마당에 서서 두 팔을 번쩍 치켜들고는 하늘바라기를 한다. “벼리야, 보라야, 저기 봐. 저 하늘빛이 바로 노을빛이야.” 발그스름하다가 노르스름하다가 이내 짙붉게 물드는 하늘빛 된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들에서 일하던 할매 할배 모두 저 하늘빛 보셨을까. 등이 굽은 탓에 못 보실까. 경운기 모느라 옆에 눈을 팔 수 없어 못 보시려나. 풀벌레 노랫소리 감겨드는 마당에서 노을빛을 누리는 아버지 곁에서 아이들은 맨발로 뛰어논다. 아이들 노랫소리는 풀벌레한테 스며들고, 풀벌레 노랫소리는 아이들한테 젖어든다.


  1991년에 이현주 님이 한국말로 옮긴 《소로우 평전 : 자유를 생의 목적으로 삼은 사람》을 떠올린다. 이현주 님은 《소로우 평전》을 누가 썼는지 안 밝힌다. 왜 안 밝힐까. 아무튼, 《소로우 평전》을 읽으면, 소로우는 어릴 적부터 ‘나는 나다’ 하고 깨달은 사람이다. 젊은 날에 씩씩하게 냇물 따라 나들이를 다니고 숲속에서 오두막을 짓고 산 까닭 또한, ‘나는 나다’가 무엇인가를 더 깊이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다움’이란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 말뜻은 ‘나다움’이라고 한다. 곧, 내가 나인 줄 느낄 때에 아름다움이 무엇인가 알기 마련이고, 아름다움이 무엇인가 알 때에 사랑과 꿈을 짓는 삶을 누리려 하기 마련이다.


  문득 김지하 님을 생각한다. 김지하 님은 왜 이녁 삶을 사랑하고 꿈꾸는 길을 아직도 못 걸어갈까. 박경리 님이 이녁 삶을 사랑하고 꿈꾸는 길을 걸었던 모습을 아직도 못 알아챘을까. 글보다 흙을 만지고, 글을 만지고 싶으면 흙과 함께 글을 만지면 될 텐데, 헨리 데이빗 소로우 님 글을 읽으며 흙빛과 흙내음과 흙숨과 흙바람을 누릴 수 있는 삶벗을 만나고 싶다. 4346.10.6.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람과 책읽기)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oren 2013-10-12 12:43   좋아요 0 | URL
가끔씩 시골에 내려가서 사는 모습을 꿈꿀 때마다 저도 생각합니다.

맑은 바람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도록 마루가 넓고 또 마당까지 넓은 집이었으면 좋겠다.
높다란 내 방에서 한 발짝만 걸어 나오면 휘영청 밝은 달을 마음껏 볼 수 있는 집이었으면 좋겠다.
창문 하나만 열어젖히면 풀벌레 소리와 귀뚜라미 소리를 실컷 들을 수 있는 그런 집이었으면 좋겠다, 하고 말입니다.

『소로우 평전』은 참 귀한 책이 된 듯한데, 나중에라도 혹시 새 책으로 나오게 된다면 꼭 놓치지 말고 읽어야 겠다 싶습니다.

숲노래 2013-10-12 14:57   좋아요 0 | URL
소로우 평전을 누군가 썼을 텐데, 제대로 잘 쓴 책은
찾기 만만하지 않을 듯해요.
어쩌면 저작권이 걸려서 번역 안 할는지 모르겠고요 ^^;;

oren 마음으로 바라는 그 고운 시골집
머잖아 누리실 수 있기를 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