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에서 그 이름, 안도현을 익혔네.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라는 제목에 현혹이 되어 보니 익히 익혀두었던 오호라, 그 안도현 이다.
제목이 너무나 시스러워 몇번이나 되뇌어 보게 된다.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반갑고 기쁘게, 기대에 차 시들을 읽어 나간다.
이런, 낭패다...
뭔말이지?
뭔말이야?
두 번, 세 번 거듭 읽어보다가 에라, 모르겠다, 내쳐 그냥 읽어나가 버리기로 한다.
대체로 우울스럽고 무겁다. 그러다,
"고모"에서 트였다, "임홍교여사 약전"에서 확 열렸다, "식물도감"에서 모든 경계가 허물어졌다.
-귀띔
길가에 핀 꽃을 꺾지 마라
꽃을 꺾었거든 손에서 버리지 마라
누가 꽃을 버렸다 해도 손가락질하지 마라
-장마
창턱으로 뛰어든 빗방울의 발자국 몇개나 되나 헤아려 보자
천둥 번개 치면 소나기를 한 천오백근 끊어 와 볶는 중이라고 하자
침묵은 입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비명이거나 울음 같은 것
가끔은 시누대숲의 습도를 재며 밥 먹는 직업이 없나 궁리해보고
저녁에 저어새 무리가 기착지를 묻거든 줄포만 가는 이정표를 보여주자
-식물도감
*
사무치자
막막하게 사무치자
매화꽃 피는 것처럼 내리는 눈같이
*
녹색 머플러 두르고 등교했구나
부안시장 가서 샀니?
중학교 1학년
변산바람꽃
*
노루귀만큼만 물을 마시고
노루귀만큼만 똥을 싸고
노루귀만큼만 돈을 벌자
*
편두통으로 뒤척이다가
알약 몇개로 버틴 게 틀림없다
으아리꽃 향기 한숨 뱉듯
*
내내 엎드려 있었다지
꽃다지
평생 곷다지처럼 납작
살았다 어머니
*
호박씨 한알 묻었다
나는 대지의 곳간을 열기 위해
가까스로 땅에 열쇠를 꽂았다
*
두 눈이 있느냐
개불알풀꽃 들여다보아라
*
3월 말쯤 오너라
어머니가 나락나물이라 부르는
전주 근방에서는 벌금자리라 부르는
벼룩나물 비빔밥 해 먹자
*
산괴불주머니꽃이 지지직거린다
마당에 전기가 들어온 거다
*
김일성종합대학 캠퍼스에 살구꽃이 피었다
평양 주재 중국대사관 가는 길에 살구꽃이 피었다
보통강 강둑에도 살구꽃이 피었다
*
살구꽃 한잎
천지를 들었다가 놓는 밤이다
상상력이 봄밤을 통치하는 마을이다
*
시멘트 브로꾸 담장 안에서
진달래가 서서 울고 있다
*
봄을 떼메고 가는
송홧가루
송홧가루
*
나는 앵두꽃에 입을 맞추었다
여자가 몸을 떨었다
*
아들아,
여자 친구에게 혹여 점수 따고 싶거든
제비꽃 꽃반지 만드는 법 배워두거라
*
할아버지 무덤에서 걸어나오시었다
휜민들레 피어나시었다
*
자운영, 그 이름이 간지러워
오랫동안 곁에 두지 않았다
*
당신 잇몸에
껍질 벗긴 찔레 새순 닿으면
당신 치아에 찔레가 길어 올린 연둣빛 물줄기가 감기면 참 좋겠다
*
화살나무 새잎 따고 찔레나무 새순 꺾고 버들개지 몇 손가락 얹고 더덕 잎사귀 두엇 제비꽃 서넛 민들레 잎 대여섯장 보태고 골담초 꽃망울 몇 뿌리고 조물조물 기름소금에 무쳐 먹었다
*
산수유 가지에 개가 앉았다가
골똘히 무슨 생각 하더니 날아간다
꽃 이름을 몰라서 갸웃거렸을까
새야,
다음에 올 때는 식물도감 들고 오너라
*
벚꽃 진다고 아쉬워하지 말자
벚꽃 지면 아까시꽃 피니 괜찮다
*
벚꽃이 매달렸던 그 자리에
벚꽃을 잊지 않으려고
버찌가 열렸다
*
작년에 죽은 친구야,
벚나무 아래 놀던 사진 속에서는 빠져나가지 말아라
*
연두가 초록으로 넘어가기 전에,
연두의 눈에 푸르게 불이 들어오기 전에,
연두가 연두일 때,
연두가 연두였다는 것을 잊어버리기 전에,
모과꽃이 핀다
*
귀룰나무 꽃 질 때
나무 아래 몰통을 갖다 놓으리
지는 꽃을 받아서
지는 꽃의 향기를 츠랑츠랑 엮으리
*
모란 잎에 편지를 써서 보내면
죽은 누나 살아와서
설거지하느라 바쁠까
*
오동꽃 핀 줄 모르고
5월이 간다
*
얼레,
발랑 까진 딸이거나
속 뒤집어진 엄마거나
산비탈 얼레지
*
둥글레 겨드랑이에
둥글레꽃 피었다
겨드랑이에 털 나면
너도 꽃이 된 줄 알아라
*
이층 창가에 인동초 덩굴 오를 때까지
가지 말아라
꽃 피어 내 귀를 간질일 때까지
울지 말아라
*
펼친 꽃잎
접기 아까워
작약은 종일 작약작약 비를 맞네
*
천안에서 전주를 가려면
차령터널을 통과하면서부터
밤꽃냄새군대의 저지선을 돌파해야 한다
*
함박꽃 열리기 세시간 전쯤의
꽃봉오리 주워 와서
빈 참이슬 병에 꽂아두었네
*
지리산 노고단 가서
물매화 보지 못했다면
하산하지 마시게
*
꽝꽝나무
그 작은 이파리마다
찰랑찰랑 자지러지는
붉은 달 뜬다
*
찔레꽃 피면
찔레꽃 발등에
보나 마나 뱀이 산다
*
6월에 제주 여행 가서
멀구슬나무 꽃 핀 것 보지 못했다면
김포공항으로 돌아오지 말 일이다
*
북에 피면 목란꽃
남에 피면 함박꽃
*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
철둑길 강아지풀
기차 타러 나왔다
박용래 시인의 마을까지 가는
기차가 끊겼다
*
갯메꽃처럼 바닷가에 살자
바닷물에 발은 담그지 말고
바닷물이 모래알 만지는 소리나 들으며 살자
*
참새떼가 찔레 덤불로 스며든다
*
수크렁 묶어놓고
네 발목 걸리기를
기다린 적 있었지
나 열몇살 때
*
이층 치과 창가에
능소화 입 냄새
*
길가 도랑 풀숲에 처박힌 트럭 바퀴 하나
물봉선이 귀를 대고
엿듣고 있다
*
당신은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온다고 썼지
나는 갯메꽃과 갯마을은 멀다고 쓴다
*
백지동맹 주도하다가 들킨 옛날 고등학생처럼
은사시나무들이 엎드려뻗쳐 자세로 단체 기합 받고 있다
*
잔디 깎다가
방아깨비 두어마리 허리도 잘랐다
그러고도 나 저녁밥 잘 먹었다
*
채송화 연립주택 입구에
점방을 차리려고
나비들이 분주하게 드나들고 있다
*
봉숭아 꽃씨는
꽃이 떠나온 집,
꽃이 돌아가야 할 무덤,
꽃의 화력발전소
*
아버지 한여름에 돌아가셔서
해마다 참비름나물에
밥을 비벼 드시게 되었다
*
왼쪽으로 감고 오르는지
오른쪽으로 감고 오르는지
다투다가 능소화는 폭염을 맞닥뜨렸다
*
후박나무 잎사귀 반짝거린다
곧 바다에 닿는다
*
까마중 익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간다
*
인동 꽃잎 노랗게 변하면
신혼여행 다녀왔다는 거다
*
물봉선 피는 곳에
모기 많아요
*
마타리꽃 피었다
곧 개강이다
나는 망했다
*
붉나무 잎사귀에 비가 내린다
빗소리로 조기를 굽고
빗소리로 누에를 키우고
빗소리로 쌀을 씻는다
*
고수꽃이 지고 나서
꽃자리 동그랗게 배가 부풀어 오르고 있다
요놈들 첫날밤을 다들 잘 보낸 모양이다
*
시누대 잎사귀는 빗방울 튕겨내는 솜씨가 다들 달라서 어스름이면 그리하여 잎사귀 아래로 다스리는 어둠의 농도도 제각각 달라서
*
산수국 헛꽃 들여다보면
누군가 남기고 싶지 않은 발자국 남겨놓은 거 같아서 발소리 가벼워질 때까지 가는 것 같아서
*
튀기 위해 끈질기게 붙어 있다
강아지풀
*
참새 한마리 발톱으로 흔들리는 강아지풀 줄기를 잡아누르고
또 한마리가 부리로 강아지풀 끝자락을 거머잡으니까
참새떼가 우르르 날아왔다
강아지풀 씨앗들 부리나케 참새의 입속으로 뛰어들어갔다
*
전주 향교 은행나무 밑둥치에
은행나무도 보습학원을 차렸다
*
오동나무가 던져주니 감나무가 받는다
감나무가 던져주니 가죽나무가 받는다
가죽나무가 던져주니 또 살구나무가 받는다
까치 한마리를
받는다
*
화엄사 뒷산 단풍 나 혼자 못 보겠다
당신도 여기 와서 같이 죽자
*
바랭이풀은 몸에서 씨앗들 다 떼어 낼 때까지 버텼다
서리 내리자 과감하게
무릎 꿇었다
*
백두산 천지 갔다가 구절초 씨앗 몇 받아 왔다
박성우 시인에게 주었더니
기어이 모종판에 묻었다 한다
*
눈이 내리기 시작하자
일제히 고개 돌려 눈 내리는 걸 바라보는 억새들
*
꽃무릇 이파리 저마다 푸른 치마를 펼치고
내리는 눈을 받는다
*
먹쿠슬낭 열매
자랑자랑
*
더이상 시큰거리지 않게
미나리는 발목을 얼음장 속에 넣었다
*
나무의 정부에서는
금강소나무가 대통령이다
*
두릅 새순 위에 진눈깨비, 진눈깨비
맨발로 다니다가
가시에 찔릴라
*
복수초에게도
설산이 있었지
*
이름에 매달릴 거 없다
알아도 꽃이고 몰라도 꽃이다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