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윤

 


  중학교 다닐 무렵 《홀로서기》라는 시집이 무척 널리 사랑받았다. 나도 동인천 〈대한서림〉에 가서 줄을 서서 기다리며 이 시집을 들여다보았고, 1권과 2권을 사서 읽었다. 그런데, 막상 읽기는 읽지만 마음으로 시가 스며들지는 않았다. 무엇일까. 왜 그럴까. 이래저래 생각해 보고 여러 차례 다시 읽지만 그리 사랑스럽지 못하다고 느꼈다. 이즈음 다른 ‘사랑 시’들도 여러모로 살피고 읽는데, 어느 시도 내 마음속에서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내가 사랑을 아직 모르던 때라 할 만하고, 철이 제대로 들지 않아 이 시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할 만하리라.


  고등학교를 마치고 열 해 지나 헌책방에서 《홀로서기》를 만난다. 어느 헌책방에나 《홀로서기》는 잔뜩 쌓인다. 열 몇 해 지나 다시 읽어도 그리 가슴이 안 움직인다. 고등학교를 마친 지 스무 해 지나 헌책방에서 《홀로서기》를 구경한다. 어느 헌책방에나 《홀로서기》는 많이 쌓인다. 스무 해 지나 새로 읽어도 그리 가슴이 설레지 않는다.


  지난날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홀로서기》라는 시집을 읽었을까. 그 많은 사람들은 이 시집을 읽으며 무엇을 느끼거나 얻거나 배울 수 있었을까. 다만, 나는 이 시집 《홀로서기》를 만나며 ‘홀로서기’처럼 한국말을 살려서 쓸 수 있구나 하고 깨달았다. 이 이름을 바탕으로 ‘홀로사랑’이나 ‘홀로살기’나 ‘홀로죽기’나 ‘홀로먹기’나 ‘홀로읽기’ 같은 낱말을 지어 보았다. ‘같이서기’나 ‘함께서기’ 같은 낱말을 지어 보고, ‘같이살기’와 ‘함께살기’ 같은 낱말도 지어 보았다.

 

  오늘 나는 ‘함께살기’라는 글이름을 쓴다. 서정윤 님 시집에서 도움말을 얻어서 지은 이름은 아니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적 이웃집에 살던 분한테서 얻은 웃옷에 “함께 가는 길”이라는 글이 적혔다. 나는 이무렵에 ‘한글만 적은 옷’을 처음 보았다. 이렇게 옷에 한글을 새길 수 있구나 싶어 놀랐고, 한글로 무늬를 새긴 옷이 이토록 고운 줄 처음 느꼈다. 옷 만드는 회사에서 왜 한국말을 한국글로 새기지 못하는지 참 얄궂다고 생각했다.


  나 스스로 좋은 날이라 여길 적이면 으레 “함께 가는 길”이라는 글씨 큼지막하게 적힌 옷을 입었다. 하도 많이 입은 탓에 이 옷은 너무 낡아서 어머니가 버리셨는데, 이 옷에 적힌 글을 간추려 ‘함께가기’를 떠올렸고, 다시 ‘함께살기’로 살짝 고쳐서 내 글이름으로 삼았다. 앞으로 내가 걸어갈 길은 ‘함께살기’라고 느꼈다.


  대구에서 국어 교사로 일하던 서정윤 님이 사표를 냈으나 학교에서 안 받아들인다는 이야기를 얼핏 듣는다. 그렇구나. 그렇겠구나. 서정윤 님이 시를 쓰고 책을 팔아 얻은 돈과 이름으로 시골에 땅을 사고 숲을 일구어 조용히 흙을 만졌으면, 더없이 아름다운 ‘홀로서기’ 되었으리라 느낀다. 부디 앞으로는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길을 걸어가며 즐거운 ‘바로서기’를 하실 수 있기를 빈다. 4346.11.14.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람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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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모노로그 2013-11-14 11:13   좋아요 0 | URL
중학생때 서정윤님의 시를 항상 책받침으로 가지고 다녔던 기억이 나네요 ㅎㅎ
그리고 책갈피로도 ...
이쁜 소녀 그림이었죠... 함께 살기, 닉네임이 참 좋습니다. ^^

숲노래 2013-11-15 04:28   좋아요 0 | URL
깨끗하게 고개를 숙이시면 아름다울 텐데
이모저모 아쉽기도 합니다...

Grace 2013-11-14 14:59   좋아요 0 | URL
"부디 앞으로는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길을 걸어가며
즐거운 ‘바로서기’를 하실 수 있기를 빈다."

저도 신문기사를 보고 무척 언짢았었는데...
'바로서기'란 말이 아주 적절해서 고개가 끄덕여져요.
학교에서 사표수리를 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요?
어쩐지 욱!!! 해지는걸요!

숲노래 2013-11-15 04:27   좋아요 0 | URL
학교에서는 '엄중 징계'를 할 뜻으로 사표를 안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사표만 쓰고 발뺌을 못 하게 할 뜻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