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수는 ‘영웅’ 아닌 ‘빅토르’

 


  얼음을 지치는 선수를 두고 ‘황제’라고도 부르다가 ‘영웅’이라고도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황제’는 엉터리 같은 시설에서 훈련을 하다가 크게 다쳤다. ‘황제’가 엉터리 같은 시설에서 훈련을 하다가 크게 다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때부터 ‘소모품’이나 ‘1회용품’으로 여겨 내다 버리면 될까?


  군대로 끌려간 사내가 군대에서 의문사로 죽는다든지 훈련을 뛰다가 심장마비로 죽는다든지 최전방이나 비무장지대에서 지뢰를 밟고 죽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 아닌 ‘10종 보급품’으로 처리하면 될까?


  한쪽에서는 ‘황제’라고 부르더니, 황제를 골방에 여덟 시간 가두어 두들겨패는 일은 어떻게 여겨야 할까? 황제쯤 되니 여덟 시간쯤 가볍게 두들겨맞아도 될까?


  군대에서뿐 아니라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누군가한테 여덟 시간이 아닌 딱 팔 분쯤 두들겨맞는다고 하면 어떨까? 길을 가던 사람을 갑자기 붙잡아 두들겨패는 일은 무엇인가? 귀여워서 선물하는 꿀밤인가? 맞을 만한 짓을 했으니 맞는 셈인가?


  한국에서 태어나 ‘안현수’라는 이름으로 살던 운동선수는, 도무지 안현수라는 이름으로 더는 살 수가 없어서, 한국을 떠났다. 이제 이녁은 ‘빅토르 안’이다. 러시아에서 록음악을 하던 ‘빅토르 최’를 기리는 뜻으로 ‘현수’를 내려놓고 ‘빅토르’가 되었다. 빅토르 최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할 말은 없다. 다만, 최씨와 안씨는 서로 ‘빅토르’이기를 꿈꾼다. 파벌뿐 아니라 폭력과 뇌물과 부정부패와 비리와 강압이 날뛰지 않는 ‘빅토르’이기를 꿈꾼다. 빅토르 안이 러시아로 건너가서 메달을 목에 걸었기에 이녁한테 손뼉을 치지 않는다. 현수이든 빅토르이든, 아름답게 살아갈 길을 찾으려고 애쓰기 때문에 손뼉을 친다.


  메달을 따야 하는 올림픽인가? 메달을 따라고 만든 올림픽인가? 모든 사람이 1등이 되어야 한다면서 이 나라는 아이들을 입시지옥으로 내몬다. 입시지옥에서 허덕인 아이들은 죽어라 동무들을 밟고 올라서서 대학생이 된다. 애써 대학생이 되었지만 어른들이 만든 바보스러운 곳에서 끔찍하게 목숨을 빼앗기기도 한다. 어째 이럴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한국이라는 나라에 참다운 민주도 평등도 평화도 사랑도 꿈도 빛도 깃들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만 아픈 일이 터진다.


  ‘국가주의’ 도깨비를 내세워서 사람 하나를 물먹이는 짓을 저지르는 사람은 스스로 바보가 되는 셈이다. ‘애국주의’ 껍데기를 뒤집어씌워 사람 하나를 깔아뭉개는 짓을 일삼는 사람은 스스로 멍청이가 되는 셈이다.


  폭력에 시달리는 아이가 학교에서 꿋꿋하게 버텨야만 할까? 학교에서 폭력에 시달리는 아이는 학교를 그만두고 조용한 곳에서 살아가면 안 될까? 한국 사회에서 학교폭력이 끊이지 않으니, 핀란드나 스웨덴으로 떠나서 학교를 다니면 안 될까? 학교폭력을 버젓이 두면서, 이 사회는 아이들을 입시지옥으로 죽이는 짓을 해대면서, 어째 아이들더러 학교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 드는가? 한국에서는 폭력과 거짓 때문에 운동을 할 수 없다고 여겨 한국을 떠난다면, 폭력을 파헤쳐서 없애야 하지 않는가?


  대추리 사람이 대추리를 떠나야 하는 아픔을 생각할 노릇이다. 강정 사람이 강정을 떠나야 하는 생채기를 생각할 노릇이다. 밀양 사람이 밀양을 떠나야 하는 슬픔을 생각할 노릇이다. 영광이나 울진이나 고리에서 얼마나 많은 시골사람이 고향을 빼앗겼는가. 우주기지 있는 전남 고흥 나로섬에서도 적잖은 시골사람이 고향을 빼앗겼다. 지난날 거제섬에 전쟁포로 수용소를 만들면서 거제섬을 비롯해 수많은 섬마을 사람들이 고향을 빼앗겨야 했다. 폭력이 춤추는데 폭력을 말하지 않는 사람은 폭력하고 한통속일 뿐이다. 4347.2.19.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람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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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와 방송작가 (강경옥 님 《설희》 표절을 생각한다)

 


  만화가 강경옥 님 작품 가운데 하나인 《설희》와 얽힌 말썽거리를 이야기하면, 내 이야기를 듣는 이웃이 으레 한 마디를 한다. ‘방송작가를 낮추어 보느냐?’ 하고.


  그럴 까닭이 있나. 방송작가를 낮추어 보아야 할 까닭이 없다. 다만, 나는 집에 텔레비전을 들이지 않고 살아왔다. 스무 살에 제금내어 마흔 살에 이른 오늘까지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다. 텔레비전이 없으니 연속극이나 이런저런 방송을 하나도 안 본다. 방송에 나오는 배우나 연예인이나 가수 이름을 거의 다 모른다. 서태지와 정태춘과 안치환을 끝으로 음반을 더는 사지 않았고, 군대에서 S.E.S를 처음 보았고, 전역하고서 핑클을 보았다. 방송에서 흐르는 노래는 늘 모르는 채 살아간다.


  텔레비전이 없고 방송을 들여다보는 일이 없으니, 방송작가라는 사람을 하나도 모르는 채 살아왔을 뿐이다. 방송작가가 어떤 글을 쓰고 어떻게 글을 쓰는지 하나도 모른다. 다만, 방송작가도 똑같이 ‘글꾼’이요 ‘글쟁이’이며 ‘글빛’을 가꾸는 사람인 줄 안다.


  만화를 좋아하거나 즐겨읽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만화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다. 만화책을 손수 장만해서 읽는 사람이 아니라면 만화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다. 따지고 보면, 사진을 좋아하는 분이라 하더라도 사진 이야기를 잘 나누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사진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사진책을 사지 않는 사람’하고는 사진 이야기를 나누다가 지친다. ‘사진을 좋아한다’는 말은 ‘내가 찍는 사진만 좋아한다’인가, 아니면 ‘내가 찍는 사진뿐 아니라 이웃들이 찍는 사진을 함께 좋아한다’인가 궁금하다.


  ‘책을 좋아한다’는 말도 그렇지. ‘책을 좋아한다’는 말은 ‘내가 읽는 책만 좋아한다’인가, 아니면 ‘내가 읽는 책뿐 아니라 이웃들이 읽는 책을 함께 좋아한다’인가 궁금하다. 곧, 만화책을 안 읽더라도 만화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떤 마음인가를 함께 읽고 느끼면서 나눌 수 있는지 궁금하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 가운데 아이한테 만화책을 사서 읽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한국에서는 ‘대입시험을 바라며 입시교육 지식을 집어넣어 주는 학습만화’라고 하는 ‘만화라 할 수 없는 학습지’를 만화인 듯 잘못 알고 ‘학습만화’만 사 주는 어버이는 대단히 많다. 학습만화는 책마을에서 되게 크다. 돈벌이가 무척 쏠쏠하다. 지난날, 그러니까 내가 스무 살 밑이던 푸름이와 어린이일 적에는 학습만화가 거의 없었고, 그무렵에는 ‘그냥 만화’만 있었다. 이리하여, 그무렵 아이들은 ‘만화’를 즐겼고, 그무렵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만화를 그려서 베풀어 주었다. 이와 달리, 오늘날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만화를 그려서 베풀지 않고 ‘학습만화’를 그려서 돈벌이를 하는 한편, 아이들을 입시지옥으로 내모는 몫을 맡기까지 한다.


  한국 사회에서 만화 한길을 서른 해쯤 걷기란 참 팍팍하고 고달프다 할 만하다. 학습만화를 안 그리면서 만화로 밥벌이를 하기란 얼마나 벅찰는지 돌아볼 만하다. 게다가, 만화가로 이름을 제법 얻은 뒤 대학교수 노릇을 안 한다면, 만화 한길을 서른 해 씩씩하게 걸어가며 예나 이제나 즐겁게 ‘창작’을 한다면, 이러한 만화가는 만화가일 뿐 아니라 ‘장인’이라는 이름을 얻을 만하리라 생각한다.


  만화책 《설희》와 얽힌 일을 지켜보면서 생각한다. 이번 일은 ‘만화책 표절’로 그치지 않는다고 느낀다. 이 나라에서 만화가 문화요 예술이며 삶이고 사랑이 되도록 아름답게 한길을 걸어온 사람 뒷통수를 후려치는 일이라고 느낀다. 방송작가를 낮추어 보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다른 만화가가 《설희》를 표절했어도 나는 똑같이 말하리라. 다른 소설가가 《설희》를 표절했어도 나는 똑같이 말하리라.


  만화 작품을 함부로 표절해서 연속극을 찍는 일이란 얼마나 바보스러운가. 만화를 우습게 여기면서 만화 작품을 표절하는 짓이란 얼마나 스스로 바보가 되는 길인가. 그네들이 우습게 여기는 만화이면서, 왜 만화를 표절하지?


  우습게 여기니까 만화를 표절한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네들 스스로 우스운 사람이기 때문에 만화를 함부로 표절하는구나 싶다.


  사진가 마이클 케냐 님은 이녁 사진을 표절한 한국 사진작가를 보며 ‘무척 슬프다’고 말했다. 이녁 사진을 보면서 솔섬을 아름답게 찍으려고 애쓴 수많은 ‘사진 즐김이’를 볼 적에는 ‘무척 기쁘다’고 말했지만, 표절한 사진작가한테는 ‘무척 슬프다’고 말한다.


  나도 이런 마음이다. 표절한 사람을 볼 적에는 무척 슬프다. 나 또한 사진작가로 일하기에 느끼는데, 내 사진을 표절한 누군가를 보면 참 슬프다. 내 사진을 보면서 헌책방이라는 곳에서 아름다운 빛을 담아내는 사진을 찍는 이웃을 만나면 무척 기쁘다. 배움과 표절은 똑같거나 다르다. 배움과 표절은 똑같이 바라보면서도 다른 마음이다. 배움이란 즐거우면서 고맙게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 여기는 마음이다. 표절이란 이웃을 따돌리거나 괴롭히거나 못살게 굴거나 들볶거나 짓밟으면서 스스로 바보가 되는 마음이다.


  방송작가들이 만화가들을 괴롭히는 일이란, 방송작가 스스로 바보스러운 길로 접어드는 일이 될 뿐이다. 왜 손을 내밀어 어깨동무를 하지 못하는가? 왜 빙그레 웃음을 지으면서 얼싸안으려 하지 못하는가?


  나는 〈겨울왕국〉이라는 만화영화를 보지 못했지만(시골에는 극장이 없으니까), 이 영화를 본 어느 분이 말하기를, 영화 끝자락에 《눈의 여왕》에서 ‘모티브’를 얻어 새롭게 만든 작품이라고 밝히는 자막이 나온다고 한다. 그래, 만화책 《설희》에서 ‘클리셰’를 얻어 만든 연속극이라고 밝히는 일이 부끄러울까? 하나도 안 부끄럽다. 자랑이 되면 자랑이 되지, 부끄러울 까닭이 없다. 우리는 모두 배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광해군일기’에서 모티브를 얻었으면 부끄러운가? 안 부끄럽다. 스스로 새로운 작품으로 창조하겠다는 마음이 있으면 된다.


  이 땅에서 태어나는 모든 작품은 ‘배움’으로 태어난다. 배우면서 새로운 작품을 빚을 수 있다. 배우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을 훔친다면, 이는 ‘표절’이 될 뿐이고, 표절이란 도둑질이다. 표절을 하는 사람은 앞으로도 새롭게 ‘내 작품 만들기’를 하지 못한다.


  만화가도 방송작가도 모두 즐겁게 창작할 수 있기를 빈다. 만화가도 방송작가도 서로를 아끼고 섬길 뿐 아니라 사랑하고 보살피면서 새로운 작품을 아름답게 창작할 수 있기를 빈다.


  배우는 사람은 늘 ‘고맙다’고 말한다. 배운 사람은 늘 ‘사랑한다’고 말한다. 훔치는 사람은 언제나 아무 말이 없다. 훔친 사람은 언제나 아무 소리가 없다. 4347.2.7.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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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퍼 허드슨

 


  노래를 듣는다. 밤하늘을 밝히는 수많은 별들과 같은 노래를 듣는다. 커다란 별이 있고 조그마한 별이 있다. 다만, 지구에서 멀리 떨어졌으면 조그맣게 보이고, 지구와 조금 더 가까우면 크게 보인다. 나는 어느 별이든 좋다. 이 별빛이 그득하여 시골집이 한결 포근하고 사랑스러운걸.


  아이들과 함께 볼 영화를 미리 본다. 미리보기를 하고서 보면 재미가 덜하지만, 아이들과 보는데 갑자기 뚱딴지 같은 모습이 나오면 큰일이니까. 그런데 오늘 밤에 보는 〈드림 걸즈〉라는 영화는 퍽 남다르다. 그래서, 이 영화에 나오는 ‘에피’라고 하는 배우가 누구인가를 찾아본다. 이름은 ‘제니퍼 허드슨’이라고 하는데, 얼마 앞서 무척 아픈 일을 겪기도 했단다. 영화 〈드림 걸즈〉로 여우조연상을 받기도 했단다.


  아이들 자는 곁에서 나지막하게 노랫말을 곱씹는다. 〈I am changing〉과 〈and I am telling you I'm not going〉을 듣는다. 이 목소리는 무엇일는지, 이렇게 깊이 후벼파는 소리는 어떻게 나올 수 있는지 가만히 헤아린다. 영화에서 제니퍼 허드슨이라는 분은 뒤로 밀렸고, 삶에서도 그러했다 하는데,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다른 사람들 목소리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반짝이는 별빛 같은 목소리를 들으면서 생각에 잠긴다.


  삶도 글도 사진도 살림도 밥도, 여기에 나무 한 그루와 풀 한 포기와 꽃 한 송이도, 모두 사랑으로 이루어진다고. 4347.1.27.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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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4-01-27 08:09   좋아요 0 | URL
저는 두 노래를 이젠 고인이 된 Whithney Houston의 목소리로 들었었네요.
영화는 보지 않아서 어떤 대목에서 나왔는지 모르겠는데 노래 가사에서, 그리고 가수의 목소리에서, 다시 일어서고자 하는 굳은 의지를 느낄 수 있었어요.

숲노래 2014-01-27 08:42   좋아요 0 | URL
이 노래는 여러 사람 목소리로 나왔나 보군요.
휘트니 휘스턴 님 목소리도 궁금하네요.

노래에 우열을 가릴 수 없지만,
저는 비욘세 님보다는 제니퍼 허드슨 님 목소리가
훨씬 마음으로 스며들더라구요...
 

얼음판에서 날개 단 빅토르 안 (안현수)

 


  올해 2014년에 러시아에서 겨울올림픽을 연다고 한다. 그렇구나 하고 생각하다가, 며칠 앞서 독일에서 열렸다는 어느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빅토르 안’이라는 선수가 금메달을 넷 한꺼번에 목에 걸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러시아 국가대표라고 하는 ‘빅토르 안’인데, 얼마나 솜씨가 좋은지 누구도 이 선수를 따라잡거나 이기지 못한다고 한다. ‘빅토르 안’이라는 선수는 함께 경기에 나서는 선수들 가운데 나이가 너무 많다고 하는데에도 아주 잘 한다고 한다.


  얼마나 멋진 삶일까. 얼마나 즐겁게 경기를 뛸까. 얼마나 온힘 다해서 날마다 새롭게 맞이할까. 이녁은 ‘빅토르 안’이기에 ‘안현수’라는 이름으로는 만날 수 없다. 그렇지만, 예나 이제나 한결같은 넋과 빛으로 살아가겠지. 이곳에 있어도 저곳에 있어도 이녁은 언제나 똑같은 숨결이다. 서른에도 서른을 넘긴 뒤에도 멋지게 살아갈 수 있기를 빈다. 얼음판에서 날개를 단 ‘빅토르 안’한테 아름다운 사랑과 이야기가 그득 넘칠 수 있기를. 4347.1.20.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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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 작품’을 보는 독자는 ‘안녕들 하십니까’

 


  강경옥 님 만화책 《설희》를 표절한 연속극은 인기가 치솟는다고 한다. 이와 달리, 표절로 생채기를 입은 강경옥 님 만화책 《설희》는 인기가 치솟는지 알 길이 없다. 남한테 생채기를 입히는 쪽은 으레 돈과 이름을 얻고, 남한테서 생채기를 받는 쪽은 으레 마음이 너무 아파 새로운 창작을 하려는 뜻을 잃거나 꺾기 일쑤이다. 이 일 때문에 강경옥 님이 붓을 꺾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그동안 씩씩하게 만화 한길 걸어온 발걸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빌 뿐이다.


  해마다 이천 권쯤 되는 책을 읽는 사람으로서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내가 읽는 책 가운데 어쩌면 ‘다른 작가가 쓴 작품을 몰래 흉내내거나 베낀 작품’이 있을는지 모른다. 처음 읽을 적에는 ‘참 아름답구나’ 느끼며 읽었는데, 이 작품이 막상 ‘표절 작품’이었으면, 내 마음은 어떠할까. 작가를 믿고 읽은 책인데, 이 작가가 우리한테 눈속임과 거짓말을 했다면, 내 마음은 어떠할까.


  ‘표절 작가’는 아니지만 ‘변절 작가’라는 이름을 얻는 이들이 있다. 이를테면, 차윤정 같은 분들. ‘4대강본부 환경부본부장’이라는 이름을 얻으려고 이녁이 한 짓이란 무엇일까. 또한, ‘표절 작가’는 아니나 ‘대필 작가’라는 이름을 얻는 이들이 있다. 이른바, 한젬마 같은 분들. 스스로 쓴 글이 아니면서 스스로 전문가로 이름을 날리고 돈을 벌어들인 삶이란 얼마나 안쓰러운가.


  그러면, 독자들은 무엇인가. 《신갈나무 투쟁기》를 읽은 독자와 《그림 읽어 주는 여자》를 읽은 독자는 무엇인가. 이들 ‘작가 아닌 작가’는 독자를 어떻게 생각한 사람인가.


  요즈막에 강경옥 님 만화책을 표절한 연속극 말썽이 불거진 뒤, 《민트》와 《아란》과 《스팅》과 《주라기 공원으로 간 옴므파탈》 같은 소설을 쓴 ‘아게하’라는 분 작품도 방송작가가 표절을 해서 연속극으로 만든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조용히 털어놓는다. 아게하 님은 표절 연속극을 보면서 소름이 돋았을 텐데, 이녁한테 힘든 집안일이 있어 말없이 지나갔다고 한다. 그 뒤 오늘에 이르기까지 혼자서 얼마나 속울음을 울었을까. 이런 이야기도 모르는 채 ‘인기 연속극’을 하하호호 웃으며 본 사람들은 무엇을 보면서 하하호호 웃은 셈일까.


  무라카미 하루키 님 작품을 왜 선인세 몇 억씩 주면서 사들이는가? 그냥 무라카미 하루키 님 문학도 표절을 해서 ‘창작’이라는 껍데기 씌워 떡하니 내면 되지 않나?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흔한 소재’라고, ‘주인공이나 줄거리나 흐름이 조금 비슷한 모습이란 으레 있기 마련’이라고 둘러대면 되지 않는가? ‘지구별에 완전한 창작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발뺌하면 되지 않는가? ‘아주 독창스러운 소재란 없고, 모든 예술은 모방으로 창조한다’고 핑계를 붙이면 되지 않는가? ‘아름다운 노래도 자연이 들려주는 소리를 흉내내거나 베꼈다’고 큰소리 뻥뻥 치면 되지 않는가?


  한국 책마을은 1999년 12월 31일까지 저작권법을 안 지킨 채 외국책을 펴내곤 했다.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큰 인문출판사들은 모두 인세를 안 치른 채 외국책을 펴내며 돈을 벌거나 이름을 얻었다. 한국 책마을에서 외국책에 제대로 인세를 치르며 책을 낸 역사는 고작 열네 해밖에 안 된다. 이런 흐름이니, 방송작가들이 만화가나 소설가 작품을 몰래 베끼거나 훔치면서 방송대본을 써서 연속극 만드는 일이 버젓이 자꾸 일어나는구나 싶다. 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든, 사회에서든, 다른 사람 작품을 훔치거나 베끼는 일이 얼마나 이녁 스스로 갉아먹거나 좀먹는 짓인가를 안 가르치는구나 싶다. 창작이 아닌 표절을 하는 글쓰기란 스스로 죽음길로 가는 짓이다. 창작하려고 마음을 쓰지 않고 베끼거나 훔치려고 마음을 쓰는 사람은, 한두 차례 이름을 날리거나 돈을 벌는지 모르나, 앞으로 얼마나 즐겁게 창작을 할 수 있을까. 죽는 날까지 이녁 마음속에 자리잡을 ‘괴로운 짐’을 어떻게 짊어질 생각인가.


  요즈음 나오는 시를 보면, 다른 사람 작품을 빌려쓰는 작품이 꽤 많다. ‘각주를 붙이는 시’가 퍽 많다. ‘각주 붙인 시’는 부끄러운가? 아니다. 하나도 부끄러울 일 없다. ‘각주 붙인 논문’은 부끄러운가? 아니다. ‘원래 작품 출처’를 밝히는 방송대본은 하나도 안 부끄럽다. ‘원래 작품 출처’를 밝히고, 저작권 사용료 치르는 일은 부끄러울 일이 하나도 없을 뿐 아니라, 돈을 버리는 일도 아니다.


  그런데, 표절 작품을 보면서도 표절 작품을 감싸는 사람들이 꽤 많다. 어느 연속극을 아끼거나 사랑하는 일은 좋다. 그러나, 잘잘못은 옳게 가려야지. 내가 아끼거나 사랑하는 작가가 ‘표절 작가’라면 얼마나 부끄러운 노릇인가. 내가 아끼거나 사랑하는 작가는 ‘표절 작가’ 아닌 ‘아름다운 작가’여야 하지 않을까. ‘표절 작가’를 감싸면서 ‘원래 작품 쓴 작가’를 깎아내리거나 비아냥거리거나 거친 말을 일삼는 독자는 참말 독자라 할 수 있을까.


  잘못을 뉘우치는 일은 부끄럽지도 않고 힘들지도 않다. 잘못을 뉘우친대서 우리가 ‘표절 작가’를 몽둥이로 때려죽일 일도 없다. 잘못을 뉘우치면 누구라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괜찮아요. 다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하고 달래 주지 않겠는가. 4346.12.28.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람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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