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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의 운동화
김숨 지음 / 민음사 / 2016년 5월
평점 :
김숨의 소설은 발로 쓴 듯해서 좋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머리로만 글을 쓰는 작가들이 한 트럭이다. (이 트럭이 쓰레기 매립장으로 갔으면) 소설의 제재, 혹은 소설의 오브제는 이한열의 운동화다. 잭 하트의 <소설보다 더 재밌는 논픽션 쓰기>의 영향 탓일까? 이 소설은 픽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논픽션처럼 느껴진다. 소설은 이한열의 운동화 복원 과정을 담은 이야기다. 이한열의 운동화를 복원하는 복원가와 주변 동료 복원가들이 주된 등장인물이다.
복원가에게 이한열의 운동화는 물질이다. 그리고 비물질이다.
물질로서 ‘L의 운동화’ 브랜드는 타이거였다. 대한민국 사람치고 ‘타이거’ 안 신은 사람도 있던가? 타이거를 생산했던 삼화고무는 1992년 망했다.
한편 이한열의 운동화는 물질 그 이상이다. 그렇다고 이한열의 운동화가 이한열을 뛰어 넘어서도 안 된다.
여러모로 아쉬운 소설이다. 어떤 퍼즐 판에 엉뚱한 퍼즐을 맞추려는 느낌? 하고 싶은 말들은 많은데 유기적으로 통합되었다거나 통일되었다는 느낌은 없다. 주인공 복원가의 동료인 여성 복원가는 그야말로 ‘폭망’ 캐릭터다. 청승맞고, 처량하고, 짜증나고, 주먹을 부른다. 작가가 왜 ‘미친 년’을 넣었는지가 눈에 고스란히 훤히 드러나, 마치 작가의 알몸을 본 듯하여 민망할 정도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읽을 가치가 있다.
“돌토는 죄가 ‘어느 순간 마비되는 것’이라고 했어요.”
“마비요?”
“마비요. 죄가 어느 순간 마비되는 것이라고......”
마비시키는 문학이 있고, 각성시키는 문학이 있다. 분명 김숨의 <L의 운동화>는 후자에 속한다. 일단 작은 불이라도 불을 밝히는 게 중요하다. <L의 운동화>는 횃불 같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촛불과도 같은 소설이다. 작은 촛불일지언정 여럿이 드는 촛불은 결코 작지 않다. 여럿이 드는 촛불, '그 속에는 타다가 또 타는 우리의 삶이 계속될' 것이다.
메모한 문장들
마크 퀸은 자화상들을 자신의 피로 만들었다. 그는 5년 동안 꾸준히 피를 뽑아 인간의 총 혈액량인 4.5 리터가 모아지면 그것으로 자화상 <셸프(Self>를 제작했다. 자신의 두상을 모형으로 한 석고 거푸집에 피를 부은 뒤 응고시켜 완성한 그 작품들은, 영하 9도 내외의 특수 냉동고 안에서만 형태 유지가 가능한 운명을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다. 1996년 제작한 두 번째 <셸프>는 영국의 유명한 수집가 찰스 사치가 소장했는데, 청소부가 그만 실수로 냉동고의 전원 코드를 뽑는 바람에 피가 녹아내려 훼손되었다. (그 작품은 녹았다가 응고된 흔적들을 아물지 않은 흉터처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작품은 어이없는 실수로 인한 훼손을 통해 작가가 의도한 주제인 생명의 나약함과 유한성을 확실히 증명해 보였다. (11)
탯줄, 코끼리의 배설물, 남자의 정액, 타액, 죽은 나비, 살아 있는 파리와 피를 흘리는 소의 머리가 미술 작품의 재료로 쓰이는 시대가 아닌가.
이탈리아 작가 피에로 만초니는 자신의 똥을 재료로, <예술가의 똥>이란 작품 90개를 만들었다. ‘예술가의 똥, 정량 30g, 원상태로 보존. 1961년 5월에 생산 포장’이라는 문구가 인쇄된 라벨을 4개 국어로 써서 붙이고 납땜으로 밀폐시킨 작품으로, 그는 의미 부여를 중요시하는 사회를 향해 “의미 없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이 의미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로 그 작품을 만들었다고 했다. (17)
“재료는 그만한 생이 있다”고 말한 루이스 부르주아는 내가 개인적으로 흠모하는 작가다. 1997년 이후 칩거를 선택한 95세의 그녀를 <지큐 코리아>에서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예술이 자신에게는 자기만의 정신분석학이라고 말하면서 정작 자화상 작업을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기자가 묻자, 그녀가 대답했다.
“나는 나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 ‘I, me, myself‘라는 말은 소름 끼친다.”
‘모든 사람은 예술가다’라는 문구로 유명한 보이스는, 1965년 11월 26일 사설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갖기 전 이색 퍼포먼스를 펼쳤다. 꿀과 금을 얼굴에 칠하고, 품에 안은 죽은 토끼에게 그림을 설명하는 파격적인 퍼포먼스로, 그의 예술 세계를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완고한 이성주의로 무장한 인간보다 토끼가 더 잘 이해한다. 나는 토끼에게 그림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림을 그저 훑어보는 일이라고 말했다.” (33)
상징 기능의 오브제는 살바도르 달리가 발명한 것으로, 현실이 아니라 꿈에 등장하거나 정신 착란의 산물과도 같은 사물처럼 인간의 무의식에 호소하는 오브제다.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자리에 버젓이 놓여 있는 사물처럼.
융의 저서 <무의식에 대한 접근>에서 읽었던 내용이 떠오른다. 남아메리카 인디언 부족은 날개도, 부리도 없으면서 자신들이 붉은 아라라 앵무새라고 주장한다고 했다. 황당한 주장을 두고 융은, 미개인 세계에서는 ‘합리적’인 세계와 다르게 사물과 사물 사이에 분명한 한계가 없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거의 기량에 탄복한 로댕이 조수 자리를 제안했지만 거절했다는 일화로 유명한 루마니아 출신 조각가 브랑쿠시. 그는 몬드리안과 마찬가지로 모든 생명은 그 본질로 축소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축소를 통해 진정한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고. 티베트 최고의 성자로 불리는 밀라레파와 노자 사상에 매료된 그는 절제와 생략을 통해 추상 조각의 세계를 열었다. 인체 일부 중에서도 특히 머리를 단순화한 그의 미학은 ‘사물 – 조각’이라는 새로운 공식을 낳았다.
“브랑쿠시의 <잠이 든 뮤즈>가 그 안에 있는 것 같았어요. L의 운동화 속에요.” (78)
가장 근래의 복원 작업은 복원 전문가인 피닌브라빌라 바르칠론 박사가 진행했는데, 그는 문제점을 파악하기 위해 3년 동안 <최후의 만찬>을 관찰하고, 현미경을 이용해 40배로 확대 조사했다. 그는 가장 먼저 500년 동안 켜켜이 낀 때와 이전의 복원 흔적을 제거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는 특수 제조한 용제를 그림에 바른 뒤, 그 용제가 애초의 다빈치가 칠한 물감에까지 도달하기 전에 재빨리 닦아 냈다. 그 작업을 수차례 반복하자 마침내 다빈치가 사용한 밝은 색채가 살아났다. 흐릿해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던 사물들이 선명해지면서 백랍 접시에 반사된 레몬 조작인 것으로 밝혀졌다.
“선은 절대 분노로부터 오지 않는다. 호의는 언제나 분노를 이긴다.” 그로닝의 공판에 참석한 증인 다섯 명 중 한 명인, 81세의 아우슈비츠 생존자는 그렇게 말했다. 아우슈비츠에서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인체 실험을 겪은 그 생존자는 자신이 증인으로 참석한 법정에서 돌연 피고인인 그로닝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그로닝은 자신에게 다가온 생존자의 뺨에 키스를 하고, 두 팔을 벌려 끌어안았다. (165)
“질량 보존의 법칙처럼, 죗값 보존의 법칙이 있는 것 같아.”
“죗값 보존의 법칙이요?”
최가 샌드위치를 입으로 가져가며 강 선배에게 묻는다.
“아침에 그 신문기사를 읽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 치러야 하는 죗값이 100그램일 경우, 100그램에서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는 생각이 말이야. 단지 죗값을 치러야 하는 기간이 연장되는 것뿐이지, 줄어들지는 않는 것 같거든......당장은 아니더라도 죗값을 치러야 하는 때가 언젠가는 오는 것 같아. 죗값이 100그램일 경우 20그램밖에 치르지 않았다면 언제가 80그램을 치러야 하는 때가 반드시 오는 게 아닌가 싶어.”
“최소 6개월.........삼계탕 용으로 쓰이는 영계의 경우 최소 100일은 자라야 하는 닭들을 49일 만에 도축하기 위해 속성으로 키운다지요. A4 용지보다 면적이 작아 날갯짓조차 할 수 없는 우리 속에 가두고 24시간 조명 불빛을 쏘아 댄대요. 그래야 인간이 더 많은 닭을 먹을 수 있으니까요. 인간은 그렇게 키운 닭으로 몸보신을 하겠다고 인삼과 한약재를 넣고 삼계탕을 끓여 먹고요.”
“소크라고....SOC요. 북유럽이라든가......맹수가 공격을 하면, 암소와 송아지들을 보호하기 위해 튼튼한 뿔을 가진 젊은 소 떼가 뿔을 바깥 방향으로 하고 울타리처럼 빙 둘러싸는 것을 소크라고 한다네요. 시위 현장에서 젊은 소 떼 역할을 하는 남학생들을 소크라고 불렀어요. 학교마다 지칭하는 단어가 달랐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저도 얼마전에야 알았어요. 독일에서 가장 먼저 시행하고, 그 후 유럽의 여러 나라가 서머타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하더군요. .....우리나라에서는 87년과 88년 2년 동안 실시되었다가 89년에 페지되었고요.,”
그때를 생각하면 나는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작품 <무제 – 완벽한 여인들>이 떠오른다. 토레스는 대량 생산된, 쌍둥이처럼 똑같은 두 개의 벽 시계를 벽에 나란히 걸어 놓았다. 두 시계는 처음에는 똑같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차이가 난다. 시계에 내장된 부품들 또한 똑같지만, 미세한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두 시계의 시간은 점점 더 어긋나, 마침내 어느 날 한 시계가 다른 시계보다 먼저 멋는다. 아무리 사랑하는 연인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시간이 동일하게, 단 1초의 어긋남 없이 흐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주제처럼. (186)
“이제 촛불을 켜야 할 때입니다.”
“그것도 L의 일기에 있는 문장인가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게 느껴진다.
“촛불은 우리를 조용히 의자에 앉게 합니다. 그곳에는 타다가 또 타는 우리의 삶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신발이 발에 맞지 않아 아프면 저녁에 신발을 바꾸어 신는 의식에 참가해야 한다. 이런 대목에서 개인의 능력이 시험대에 오른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 속에서 단 한 번에 자기 발에 맞는 신발 한 짝을 골라야 한다. 한 번 고르면 더 이상 교환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수용소 생활에서 신발이 대수롭지 않은 요소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죽음은 신발에서 시작된다.
-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누보레알리즘의 중심인물이자, 잇 아트(eat art)의 창시자인 다니엘 스포에리는, 파리의 한 갤러리에서 재미있는 전시를 기획합니다. 전시장을 레스토랑으로 바꾸어 버리는 기획으로, 자신이 요리한 음식을 평론가들에게 서빙을 하게 합니다. 만찬에 초대받은 이들이 식사를 마친 뒤, 먹다 남긴 음식이 담겨 있거나, 음식물 흔적이 묻어 있는 식기류들을 식탁 위에 고정해 작품을 완성시킵니다.“ (228)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작품의 제목은 유명한 <헝가리식 식사>로, 평론가 장 자크 레베크가 1963년 3월 9일에 한 식사의 기록입니다. .......식사가 끝나고 남은 음식들과 접시, 술잔 등이 널려 있는 식탁의 풍경은 우리가 직면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덫으로 잡듯이 포착해 보여 줍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우연한 것들, 계획에도 없던 것들, 지나가는 것들, 지나가지만 일상에서 반복되는 것들이 우리의 삼을 결정짓고는 합니다. ”
“나는 그 책에 간음하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돌토는 죄가 ‘어느 순간 마비되는 것’이라고 했어요.”
“마비요?”
“마비요. 죄가 어느 순간 마비되는 것이라고......”
하루는 할머니하고 막걸리를 마시다가 불쑥 4.3 사건에 대해 여쭈어 보았어요. 4.3 사건을 실제로 겪은 분으로부터 생생한 증언을 듣고 싶었거든요. .....운동장 같은 곳에 마을 사람들을 죄다 모아 놓고는 이등분하듯 선을 하나 긋더니, 그 선을 중심으로, 서고 싶은 곳으로 가서 서라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선 이쪽으로 가서 선 사람들은 살고 저쪽으로 가서 선 사람들은 죽었다네요. .....친정 언니가 오라니까 멋모르고 건너갔다가요. 친정 언니의 손짓이 저승에 함께 가자고 부르는 손짓인 줄도 모르고 건너갔다가요.
아직까지는 쉰한 분이 살아 계시지만 다들 연세가 있으시니까 한 분 한 분 세상을 떠나시겠지요? 한 분, 한 분 그렇게 세상을 떠나, 한 분밖에 살아 계시지 않은 날이 오겠지요? 단 한 분 밖에 살아 계시지 않는 날이....그리고 결국 단 한 분도 살아 계시지 않는 날이 오겠지요? 그분들이 돌아가시면 누가 증언을 할까요? “
젖가슴, 똥, 시선, 목소리 같은 충동의 대상들의 공통점은 다 떨어져 나간 대상들이라던 이야기도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애초에 엄마의 젖가슴은 아이의 것이지만, 어느 순간 떨어져 나간 것이다. 아이에게서 떨어져 나가면서 젖가슴은 구멍이 된다. 누군가의 시선이 떨어져 나갔을 때 그 시선은 떨어져 나간 시선으로, 구멍이 된다. 프로이트는 잃어버린 대상은 영원히 잃어버린 대상으로 보았다. 떨어져 나간 대상은 영원히 떨어져 나간 대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