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밤. 그리고 380만 년의 영원


p256. 960년에는 은자 베르나르라 하는 수도사가 이제 곧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설교하며 돌아다녀 또 소동이 일어납니다. 960년에는 프랑스 로렌 지방에서 이 세상의 종말이 바야흐로 가까워졌다는 소문이 민중들 사이에서 삽시간에 퍼져나가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이번에야말로 1009년에 세계가 멸망한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었습니다. 갈릴리 사람도 독자적으로 계산하여 1033년에 인류가 망한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p257. 문학이 끝났다는 말도 고래부터 한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위대한 극작가이자 시인인 실러조차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습니다. 신인작가도 새로운 문학작품도 완전히 엉터리다, 모방이나 속악한 것뿐이다, 이제 문학은 죽었다, 고 말이지요. 괴테도 똑같은 말을 하는데, 하지만 뉘앙스가 약간 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이 세계는 속악함으로 흘러가버렸다, 나는 이제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 시대의 마지막 한 사람일 것이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문학이 끝났다, 순문학은 끝났다, 근대문학이 끝났다, 하는 이야기는 수백 년, 수십 년이나 반복해서 말해오는 것입니다.

 

그 후 독일 문학이나 독일 철학에서 누가 나왔는지 아시죠, 횔덜린, 헤겔, 셸링, 클라이스트, 노발리스, 하이네, 슈티프터, 니체, 릴케, 첼란......끝이 없습니다. 경탄할 만한 재능이 무수히 나왔습니다.


p259. 그런데 그리스인들이 쓴 책 중에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정도일까요? 천 권 중 한 권입니다. 많이 잡아도 두 권을 넘지 않습니다. 99.9퍼센트는 사라졌습니다. 사멸한 것입니다. 남은 것은 단 0.1퍼센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 문학은 패배했을까요? 괴멸한 것일까요? ....0.1 퍼센트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해도 99.9퍼센트의 사멸을 넘어 그리스 문화는 이슬람 문화를 키우고 유럽을 창출했으며, 우리 세계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p260. 다만 확실히 알아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문자가 탄생한 지 아직 겨우 5000년밖에 안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5000년 동안 90퍼센트의 사람들이 완전한 문맹이었습니다.

 

p268. 그 후 19세기가 되면 출판 종수가 급락하는데, 그것은 또 왜일까요? 1805년에는 유럽에서 4081종이었던 서적의 출판 종수가 1813년까지 2233종으로 뚝뚝 떨어집니다. 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혁명 때문입니다. 프랑스 혁명 전야, 독서에 대한 열광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변절, 프랑스 황제에 대한 대관으로 프랑스혁명이 어떤 의미에서 좌절합니다.

 

p269. 17세기라고 하면 코르네유나 라신, 라파예트 부인의 시대입니다. 프랑스 문학의 한 융성기라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1672년 파리의 식자율은 25퍼센트였습니다. 게다가 이 식자율이라는 게 사인을 할 수 있는가의 여부로 판정된 것이었습니다.

 

p272. 1850년대의 잉글랜드는 어땠을까요?가장 선진국이었습니다. 성인 문맹률은 30퍼센트였습니다. 1850년이라고 하면 디킨스가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출판한 해입니다. 그렇다면 프랑스는 어떨까요? 40~45퍼센트였습니다. 어떤 책이 출판되었을까요? 우선 이해에는 발자크가 죽은 해입니다. <골짜기의 백합>1835년에 나왔습니다. 스탕달의 <파르므의 수도원>1839, 플로베르의 <보봐리 부인>1857, 보들레르의 <악의 꽃>의 초판도 1857년에 나왔습니다. 이탈리아의 문맹률은 70~75퍼센트였습니다. 에스파냐의 문맹률은 75퍼센트였습니다.

 

좀 더 근사한 것은 러시아입니다. 1850, 러시아제국의 문맹률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90퍼센트였습니다. 최신 연구에는 95퍼센트라고 하는 문헌도 있습니다.

 

p273. 그렇다면 1850년 전후에 누가 무엇을 출판했을까요? 푸시킨이 1836년에 <대위의 딸>을 냈습니다. 고골 리가 1846년에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 톨스토이가 1852년에 <유년 시대>, 투르게네프가 1852년에 <사냥꾼의 수기>를 냅니다.

 

그 당시 러시아 인구는 4000만 명이었습니다. 대충 양보하여 10퍼센트인 400만 명이 도스토엡스키를 읽을 수 있었다....., ,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400만 명 밖에 자산의 사인을 할 수 없었다는 무리한 상황에서 <죄와 벌>같은 작품들을 차례로 쓴 것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단적으로 90퍼센트 이상의 사람들이 읽을 수 없었습니다. 러시아어로 문학 같은 걸 해봤자 소용없었던 것이지요. 이런 파멸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쓸 수 있었을까요?

 

p275.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당연합니다. 문학이 살아남고, 예술이 살아남고, 혁명이 살아남는 것이 인류가 살아남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외에는 없습니다. 왜 쓸까요? 왜 계속 쓰는 걸까요? 계속 쓸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달리 할 일이라도 있습니까?

 

p276. 그리스인들이 99.9 퍼센트 소멸한 가운데 0.1 퍼센트에 승부를 걸어 승리한 것처럼 러시아인들도 이겼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0.1 퍼센트가 살아남는다면 이기는 싸움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적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0.1 퍼센트라도 놓치면 지는 겁니다.

 

p278. 우리 인류는 생겨난 지 20만 년이나 되었습니다. 문자를 발명한 지는 5000년이 되었습니다.

 

p279. 요컨대 대체로 75천년 전부터 35천년 전까지 넓은 의미에서 예술이라 불리는 행위가 거의 다 나왔습니다. 농경, 목축, 부의 축적에서 오는 경제활동이라는, 이른바 정주에 의한 문명은 12000년 전부터 9000년 전, 대체로 1만년의 역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술의 역사에 비하면 7분의 1의 역사밖에 안됩니다.

 

p282. 우리의 문학은 이 세상에 생을 얻은 지 고작 5000년밖에 안 된 젊은 예술이고, 아직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인 것입니다. 5000년은 20만 년의 40분의 1입니다. 여든 살 노인의 입장에서 보면 두 살배기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

 

p283. 전대미문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전대미문이지만 과학적인 사실입니다. 세계의 종말은 이미 있었습니다. 나중에 말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은오지 않지만 말이지요. ‘대대적인 절멸이 있었습니다. 다섯 번이나요. 어떤 고생물학자에게 물어도 이것은 반론의 여지가 없이 전원이 일치하는 것입니다. 오르도비스기, 데본기, 페름기(이첩기), 트라이아스기(삼첩기), 백악기. 이를 빅 파이브라고 합니다.

 

p284. 생물 의 평균연령은 대체로 400만 년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1년간 자연사하는 종은 400만 종에 한 종 꼴입니다.

 

p287 전쟁 전이 발레리라면 전후 프랑스 최대의 비평가라 불리는 모리스 블랑쇼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단적으로 “‘는 죽을 줄을 모른다라고 말했습니다. 왜일까요? 행동이라는 것은 뭔가를 계획하고 실행하며, 그리고 그것이 끝났다는 것을 확인해야 비로소 끝납니다. 결말을 지켜봐야 끝납니다. 그런데 죽는다는 행위는 그 결말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p2188. 블랑쇼는 사람은 죽을 수 없다라는 이 사고를 더욱 확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류는 멸망한다. 하지만 인류는 멸망하지 않는다.”

 

p291. 우리들 호모사피엔스가 400만 년 산다고 하면, 우리가 탄생한 지 20만 년이 되었으니 앞으로 380만 년 정도는 남아 있습니다. 400만 년에 20만 년이니까 20분의 1이네요. 여든 살 노인이라고 보면 네 살에 불과합니다. 네 살치고는 상당히 잘하고 있습니다. 흔히 농담으로 말합니다만, 네 살 짜리 남자아이가 찾아와. “우리 세계는 끝났다. 역사는 끝났다. 이제 우리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우리는 바로 파멸의 위기 한복판에 있다.”라고 우쭐하여 빙글거리며 말했다면, 물론 물리적인 징계는 몹시 좋지 않은 일이겠지만, 웃으며 엉덩이를 살짝 꼬집어주지 않으면 교육상 좋지 않을 겁니다.

 

p291. 379만년 양보한다고 해도 앞으로 1만 년은 남은 셈이네요.....그렇다면 1만년 간 우리의 루터, 무함마드, 하디자, 아우구스티누스, 테레지아, 도스토엡스키, 조이스, 베케트, 버지니아 울프, ()들 같은 사람들이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이유가 있을까요? 어차피 1만 년이나 있으니까 예술도 부처도 다시 올지도 모릅니다.

 

들뢰즈처럼 쾌할하게 철학이 끝났다고? 그건 첫 번째 황금시대가 끝났다는 것에 지나지 않아. 앞으로 두 번째 황금시대가 찾아올 거야라고 단언해도 되지 않을까요?

 

p293. 당신은 뭔가를 하고 그것이 의미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행해지는 것이다. “당신은 행해진다! 어떤 때라도!”라고 노래하듯이 그는 말합니다. 즉 우리는 우주의 거대한 생성의 일부이고 그 의미인것입니다. 이 방대한 우주의 생성 안에서 이리하여 우리가 말을 얻을 수 있고, 그리고 그것을 자아내가는 것은 절대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의미를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자체가 의미입니다.

 

p295. 자신이 한 일을 왜 발표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모르겠다고요? 그건 그 말 그대로입니다. 예술가에게 예술은 본질적으로 그 과정만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제작하고 lT을 때, 자신의 몸도 마음도 함께 부서지고 변용해가는 과정만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세상에 내놓고 평가를 받는다느니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다느니 하는 것은 그다음 문제입니다.

 

p296. 명예욕을 위해서도 아니고 금전욕을 위해서도 아니라고 한다면, 왜 발표하지 않으면 안 되는걸까요? 그것은......읽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좀 더 말해볼까요? 베케트나 첼란이나 헨리 밀러나 조이스나 버지니아 울프나 ....발레리가 없었다면 저는 여기에 없을 겁니다. 니체나 푸코나 르장드르나 들뢰즈나 라캉이 있어주어 다행입니다. 그들이 말해주지 않았다면 저는 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을 겁니다.....무엇을 쓰면 좋을지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좋을지 몰랐을 겁니다.

 

발터 벤야민이 말했습니다. “밤중에 계속 걸을 때 도움이 되는 것은 다리도 날개도 아닌 친구의 발소리다.”라고요. 발소리를 들어버렸던 것입니다. 도움을 받아버린 것이지요. 그렇다면 누구의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어쩌면 아무한테도 들리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발소리를 내는 것조차 거부당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도 발소리를 내지 않고는 배겨나지 못할 터입니다. 들려주려고 하지 않으면 안 될 터입니다. 한 발짝이라도 좋으니까요.


p297.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초판으로 몇 부나 인쇄되었는지 아십니까? 700부입니다. 350부가 반품되어 태워졌습니다. 2판에서 대폭 증보 개정합니다만, 그 또한 비슷비슷합니다. 그중 한 권을 헌책방에서 우연히 산 사람이 바로 스물한 살의 프리드리히 니체였습니다. 그는 깊은 충격을 받아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를 쓰게 됩니다. 그것으로 충분하겠지요.

 

p298. 그렇다면 철학사상 견줄 것이 없는 걸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최종부인 제4부가 몇 권이나 배포되었는지 아십니까? 출판사의 버림을 받아 자비로 40부를 찍었고 7부만 지인들에게 보냈습니다. 세계에서 단 7부입니다.

 

니체는 이런 의미의 말을 했습니다. 언젠가 이 세계에 변혁을 초래할 인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 인간에게도 방황하는 밤이 있을 것이다. 그 밤에 문득 펼쳐본 책 한 줄의 미미한 도움으로 변혁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그 하룻밤, 그 책 한 권, 그 한 줄로 혁명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는 일은 무의미하지 않다.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그 극소의, 그러나 절대 제로가 되지 않는 가능성에 계속 거는 것. 그것이 우리 문헌학자의 긍지고 싸움이다, 라고요. 이것이 미래의 문헉학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미래의 문헌학이란 대천사의 문헌학이다, 라고요.

 

말은 그것을 빠져 나옵니다. 발소리가 들려옵니다. 그것이 들려옵니다. 낮게, 알아듣기 힘들지만, 그러나 확고한울림으로, 한밤중에. 그래요, 들려오고 말았으니까요.

 

p301. 그래도 패배가 두렵습니까? 내기에 지는 것이 두렵습니까? 그렇다면 역시 최후에는 그를 등장시키지요.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제 4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보다 높은 인간들이란 니힐리즘에 도달하기까지 철저히 높은 인식 수준에 있어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기대하는 사람들을 말한다고 설명해두기로 합시다. “그대들, 창조하는 자들이여,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잉태한다는 것은 자신의 아이를 잉태한다는 뜻이다라고 말한 조금 뒤입니다.

 

그리고 그대들이 비록 큰 일에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그대들 자신이 실패했다는 것일까? 그리고 그대들 자신이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인간이 실패했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좋다! 가자!

 

높은 종족에 속할수록, 완성하는 일은 드물다. 여기 있는 그대들,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그대들 모두가 충분히 완성되지 않은 게 아닐까?

 

용기를 잃어서는 안 된다.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많은 것이 아직 가능하다. 그대들 자신에게 웃음을 퍼붓는 것을 배워라. 웃어야 마땅한 것처럼 웃는 것을 배워라!

 

인간이 도달할 수 있어야 할 가장 먼 것, 가장 깊은 것, 별처럼 높은 것, 거대한 힘, 그 모든 것이 그대들 항아리 안에서 서로 부딪치며 부글거리고 있지 않은가.

 

때로 항아리가 부서지는 일이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 그대들 자신에게 웃음을 퍼붓는 것을 배어라. 웃어야 마땅한 것처럼 웃는 것을 배워라.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실로 많은 것이 아직 가능하다.

 

p303 그렇습니다. 지금은 전야입니다. 이 전야가 깊어지는 가운데 우리도 사라지기로 합시다. 우리의 밤 속으로. 우리의 싸움 속으로. 우리의 승리하고 패배하는 환히 속으로.

 

p306. <야전과 영원>에 반응해준 이가 사상이나 비평 주변에서 말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현장에서 뭔가를 창조하고 끊임없이 운동하는 작가, 음악가, 미술가, 디자이너, 활동가들이었다는 역력한 사실은 어느 위대한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의 등뼈에 철심을 넣고 내 피에 유황을 부어넣었다.” ()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론하는 것은 감히 피하기로 한다. 본문에서 은밀하지만 명백한 경애와 연대의 신호를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책 제목은 파울 첼란의 <빛의 강박>에 실린 한 시구를 인용한 것이다.

 

p309 옮긴이의 말

 

혁명이란 폭력이 아니라 문학이다. 읽는 것과 쓰는 것, 그 자체가 혁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난다고 이 책에서 저자는 거듭 말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문학은 소설 같은 것이 아니라 더욱 넓은 의미다. 이때의 문학은 문자로 쓰인 모든 텍스트에다 춤이나 음악 등까지 포함한 것.

 

이 책은 책을 읽는 것에 대한 책인데,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고쳐 읽는다는 것이고, 책을 고쳐 읽는다는 것은 고쳐 쓴다는 것이며, 책을 고쳐 쓴다는 것은 법을 고쳐 쓴다는 것이고, 법을 고쳐 쓴다는 것은 곧 혁명이다. 그리고 읽고 쓰는대상이 종이에 쓰인 것에 한정된 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극히 한정된 시공에서고 춤, 음악, 노래, 복식, , 회화, 영화 등 온갖 예술도 그 대상에 포함된다.

 

p316. 저자에 따르면 책은 본래 읽을 수가 없다. 읽으면 미쳐버리기 때문이다. 알면 미쳐버릴지도 모르는 정도가 아니면 일류의 책이라고 부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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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밤. 우리에게는 보인다. 중세 해석자 혁명을 넘어

 

p191. 12세기 중세 해석자 혁명에 참가한 법학자, 신학자 들이 이미 자신과 자신의 시대를 근대라 불렀습니다. 나중에 말하겠지만 확실히 그들은 근대적인 법 시스템의 창시자이므로 꼭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르장드르가 만약 지금 뭔가가 끝나려 하고 있다면 그것은 중세다라고, 다소 미소 섞인, 그러나 충분히 신랄한 아이러니를 담아 말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요?

 

p192. 사람이 하는 일은 어디까지나 베케트가 말하는 낡은 나사의 새로운 회전이라는 것이지요. 그것은 뭔가의 계속이고, 뭔가를 계속하는 일입니다. 그걸로 충분하겠지요.

 

p193. 우리가 통상 근대라 부르는 시대의 모든 것, 근대법이나 근대 정치제도뿐만이 아니라 근대국가, 근대 철학 그리고 근대의 대학, 근대과학, 문학을 포함한 학문은 여기에 연원을 갖습니다. 여기에 혁명이 있습니다. 이를 교황 혁명 또는 중세 해석자 혁명이라 부릅니다. 무엇보다 먼저 이는 최초의 근대 법’, 당시의 호칭으로 하면 새로운 법jus novum’을 낳는 운동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르장드르가 단순한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다고 한 부분과 그 에피소드에 머무르지 않은 혁명의 본질부분을 나눠서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여기서 지금까지 사용해온 두 가지 호칭을 억지로 각각에 할당하겠습니다. 전자를 교황혁명’, 후자를 중세해석자 혁명이라 부르기로 합니다.

 

p195. 보름스협약으로 교황이 성직자를 서임할 권리를 되찾았다는 표면적인 의의밖에 보지 않는다면, 왜 이것이 혁명인지는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사실 일반적인 고등학교 세계사 자료집에도 실려 있는, 힌트가 되는 게 하나 있습니다. 보름스협약을 승인하기 위해 250년이 넘은 세월을 거쳐 공의회가 부활했습니다. 새롭게 소집된 제 1차 라테라노 공의회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근대 의회의 기원이었습니다.

 

p196. 11세기 말 피사의 도서관 구석에서 한 무더기의 책이 발견됩니다.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입니다. 즉 동로마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명령에 따라 법학자 트리보니아누스가 편찬한 <로마법>대전 전 50권이 발견된 것입니다. ...6세기부터 11세기 말까지 600년 가까이 완전한 망각에 묻혀 있었습니다. 사라졌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찾아내 들고 읽었습니다. 아주 긴 시간에 걸쳐 믿기 힘든 노력을 아낌없이 투입하였지요.

 

그들은 읽었습니다. 읽어버린 이상 고쳐 읽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고쳐 읽은 이상 고쳐 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읽은 것은 굽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쓰기 시작해야만 합니다. 반복합니다. 그것이, 그것만이 혁명의 본체입니다.

 

p197. 앞에서 말한대로 여기서 새로운 법이 성립합니다. 그것은 쓰였습니다. 물론 교회법뿐만 아니라 이 혁명에 자극받아 세속법, 예컨대 군주법이나 제국법, 봉건법, 장원법, 도시법, 상법 등도 차례로 고쳐 쓰입니다. 그리고 12세기 중반 교회법학자 그라티아누스의 교회법 모순 조항의 해류집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그라티아누스 교령집>에 그 성과가 집성됩니다. 이리하여 르장드르의 말을 빌리면 혁명은 <그라티아누스 교령집>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습니다.

 

로마법을 주입받아 고쳐 쓰인 교회법의 텍스트는 절대적으로 자기를 갱신하고, 대사되고, 체계를 이루고, 다른 법의 집성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이를 중세 해석자 혁명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이 혁명의 과실인 새로운 법을 추축으로 한 유럽 전체를 통일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 교회가 성립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근대국가의 원형이 되는 겁니다.

 

p202. 피에르 르장드르의 독창적인 사고의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즉 그는 국가의 본질을 폭력이나 경제적 이익으로 줄여버리지 않습니다. 국가의 본질이란 재생산 =번식을 보증하는것이라고 말합니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물질적, 제도적, 상징적 준비를 갖추고 대비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입니다.

 

일단 그런 말을 듣고 보니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당연하지 않나요. 왜냐하면 아이를 낳아 기르지 않으면 단적으로 말해 절멸할 테니까요 이런 것을 저출산 문제라 부르는 것은 문제를 하찮게 만들어 가장 중요한 문제에서 눈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자면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없는 국가의 형식이야 말로 가장 먼저 없어져야 하고, 우리가 오랫동안 말해온 의미에서 문학의 혁명에 의해 전복되어야 할 것입니다.

 

p205. 말하자면 재생산하는 원리, 아이를 낳고 기르는 원리, 계보 원리를 맡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유엔은 계속해서 공중에 붕 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계정부라는 구상은 늘 벽에 부딪치게 됩니다.

 

p207 근대 국가의 원형은 이 중세 해석자 혁명에서 성립한 중세 그리스드교 공동체에 있습니다. 교황이 바로 최초의 주권자입니다.

 

<로마법 대전> 칙법휘찬에 있는 유명한 조문에는 분명히 황제의 권력은 법에서 유래하는 것이고 황제는 법의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고 쓰여 있습니다. 망각되고 있던 이 법전의 조문은 오랫동안 중세의 위대한 법학자나 신학자에게 전통으로 계승되어 교황[게 해당하는 것으로 논의되어왔습니다. 12세기부터 교황이나 왕이라도 권리상 법을 무시할 수 없고, 사실상 무시하기 힘들어진 것도 이 혁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p211. 12세기 혁명으로 가능해진 실증주의의 영향은 역사학에만 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컨대 이때 다른 분야에서 구별되어 전문적으로 체계화되고 정련되어 강철처럼 강인해진 법학이야말로 유럽의 첫 과학이었습니다. 이는 모든 과학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p212. 중세 해석자 혁명은 혁명의 본체를 드러낸 혁명입니다. 다시 말해 법학자의 텍스트 고쳐 쓰기의 혁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척 담담하고 전혀 극적이지 않습니다. 수많은 신학자, 법학자가 밤낮으로 홀로 책장을 넘기고 사전을 찾고 판례를 조사하여 법문을 고쳐 씁니다. 정말 수수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담담하고 수수한 작업에서 엄청난 변혁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줄기차게 이어지는 작업 자체가 바로 혁명입니다. 이것이 바로 12세기 혁명의 위대함이니까요.

 

p213. 이리하여 근대법, 근대국가, 근대주권, 회사, 신탁, 계약, 조합 등 근대자본제의 원형도 이 혁명이 창출해냈습니다. 근대 의회나 선거를 비롯한 근대 정치제도도 말이지요. 어이가 없을 만큼 단순한 것조차 이 혁명의 발명품입니다.

 

p218. 혁명의 담당자는 법학자로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철저하게 읽습니다. 읽고, 다시 읽고, 고쳐 쓰고, 씁니다. 하지만 그 전에 어학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식자율이 매우 낮은 세계였습니다. 사전도 제대로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라틴어도, 그리스어도 공부해야 합니다. 게다가 상대해야 하는 것은 법문입니다. 앞으로 적용될 법입니다. 한 자 한 구절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상하게 오역하면 사람이 죽습니다. 르장드르는 이것은 문법학자의 혁명이다라고 말합니다.

 

철저하게, 문법적으로 정확하게 합니다. 절대 오역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이 시점에서 이미 미쳐버릴 것만 같은 일이라는 걸 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인쇄술 같은 것도 없으니까 사본을 만듭니다. 손으로 베껴씁니다. 거기서 또 틀렸다가는 큰 소동이 벌어지니까 이보다 더 철저한 독서가 있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의미가 잘 통하지 않는 부분, 읽기 어려운 부분에 주석을 붙입니다. 직역하면 다소 의미가 통하지 않는 부분을 의역하거나 하여 수정합니다. 해석을 조금씩 갱신해갑니다. 현행법으로 적용하는 판례가 쌓여갑니다. 법문과 판례를 대조하여 모순이 없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 또한 철저하게, 문법적으로 정확하게 해야 합니다. 점점 두꺼워져 재판 현장에서 도움이 되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면 발췌하여 요약본을 만들어야 합니다. 법 격언이나 법문, 판례의 발췌 요약본을, 또 이상한 누락이나 날림이 있으면 큰일이니까 다시 자세히 읽으면서 한 번 정리하여 가필하고 편찬하고 제본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련의 페이지 수를 적는 것도 자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손으로 매기지 않으면 안 되고, 또 누락이 있으면 큰일이니까요.

 

이것만으로도 발광할 것 같은 이야기입니다. 읽고 쓰고 번역하여 책을 만든다는 것이 대체 얼마나 무리한 일인가에 대해 말해온 우리가 보면 말이지요.

 

그리고 또 색인을 만들어야 합니다.....그것이 바로 12세기 해석자 혁명의 혁명가들이 최초로 한 일입니다. 데이터베이스로서 법문을 검색할 수 있게 한 것이지요.

 

이 작업은 짧게 잡아도 거의 100년 가까이 이어집니다. 1세기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실증주의의 탄생, 그 이상의 것이 일어났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을 통치하는 도구가 정보뿐이게 된 것입니다.

 

르장드르는 얼핏 아주 기묘한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텍스트문서라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라고 말이지요.

 

보통 텍스트라고 하면 쓰인 문서를 말합니다. 문서라는 것은 보통 정보가 쓰여 있습니다. 정보를 입수하기 위한 도구, 정보를 실어 나르는 운반 도구입니다. 하지만 애초에 텍스트란 무엇일까요? 이는 라틴어의 동사 ‘texere’의 수동완료분사 ‘textus’를 어원으로 합니다. 즉 원래 직물 또는 뒤얽힌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고대부터 순서대로 문명, 이야기, 신의 말, 복음서, 본문이라는 의미는 거기에서 나왔습니다.

 

좀 더 확실히 말하자면, 르장드르에게 텍스트라는 것은, 예컨대 흑인의 춤입니다.......그렇다면 이들 액세서리, 각양각색의 복장, 문신, 악기, 음악, 멜로디, 리듬, 가사, 춤의 안무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그들의 신화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신화를 좀 더 말하자면 을 춤추고 있는 셈입니다.


모리스 블랑쇼가 독서란 묘석과의 열광적인 춤이다라고 말했는데, 그것을 받아들였을 르장드르는 이렇게 하여 그들은 법과 춤추러 찾아오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독서란 춤이고, 사람은 법과 춤춥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몸에 두르고 있는 모든 것, 호흡법이나 발성법, 옷이나 장식품이나 소리나 리듬이나 노래, 춤의 안무는 그 자체가 법전이고 성전이며 신화이고 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신체에 법과 신화를 걸친 그들의 행동거지, 힘껏 내밟는 일보는 무엇일까요? 자신의 심신에 새기게 한 규칙, , 문장을 소리 내고, 흔들고, 그리고 거기에 새로운 창의를 덧붙이는 것은 무엇일가요? 액세서리의 디자인을 조금씩 바꾸고, 리듬을 개량하고, 춤의 안무를 바꾸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말로 하면, 바로 읽고, 고쳐 일고, 쓰고, 고쳐 쓰는, ‘문학행위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은 그대로 그들에게 법적, 규범적, 철학적, 문학적인 사고인 것입니다. 그들은 사고하고, 그들은 읽고, 그들은 쓰고 있습니다. - 깊게, 깊게, 춤을 추면서.

 

p223. 또 한 가지. 르장드르가 들고 있는 예입니다. 전전까지 - 유대인 게토에서 이루어졌던 의례가 있었습니다. 즉 아이들을 모아 눈가리개를 하고 토라, 즉 유대교의 율법 문장에 꿀을 발라놓고 핥게 했습니다. 그런 바보 같은, 문서에 꿀을 바르고 핥는다고 문서의 내용을 알 턱이 없잖아, 라고 말하는 사람은 상당히 소견이 좁은 사람이 됩니다.....이게 효과가 없느냐 하면 굉장히 효과가 있습니다. 당연히 효과가 있지요. 효과가 있을 게 뻔합니다. 왜냐하면 먹어버린 것은 되돌릴 수 없으니까요.

 

르장드르에게는 이 모든 것이 텍스트인 것입니다. 시도 노래도 춤도 악기도 리듬도 꿀맛도. 또는 아무렇지 않은 일상의 인사라든가 행동거지라든가 표정이라든가. 이런 것이 모두 을 의미하고, ‘을 읽는 것이며, 고쳐 읽는 것이며, 고쳐 쓰는 것이며, 쓰는 것일 수 있습니다.

 

p224. 자신의 신체라는 종이에 신의 행위를 나타내는 춤으로 써도 됩니다. 자신의 혀라는 종이에 신의 말이 스며든 꿀로 써도 됩니다. 무엇에 무엇을 썼다면 그것은 규칙일까요? 이것은 방대한 비전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을 다시 문학이라 부르는 것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무엇에 무엇을 써도 그것은 문학인 것입니다.

 

p225. 텍스트는 문서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문학은 종이에 쓴 것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지블릴이 무함마드의 심장을 꺼내 씻어도 그것은 문학입니다. 우리의 텍스트는 넓습니다. 우리의 규칙은 넓습니다. 우리의 우리의 예술은 더욱 넓고 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법은 춤추지 않으면 안 됩니다.

 

p233. 정보로서의 법’, ‘폭력’, ‘주권의 삼위일체를 객관적, 중립적, 보편적인 것으로서 전 세계에 수출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했을까요? 그렇습니다. 그것을 위한 편의야말로 세속화였던 것입니다. 이 삼위일체는 비종교적인 것이고 근대적인 것이고 과학적인 것이고, 따라서 객관적이고 중립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므로 만인에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이지요. 이렇게 하여 전 세계에 수출되었습니다. 그것 자체가 식민지화라는 폭력에 의해.

 

르장드르는 세속화를 유럽의 전략 병기’, ‘개종, 정복을 위한 병기라고 말합니다. 신은 죽었다. 우리는 종교에서 이탈했다, 우리 세계는 세속화되어 근본적으로 비종교적이 되었다. - 이런 사고는 타자들의 삶을 짓밟기 위한 무기였던 것입니다.

 

p236. 한 행을 쓸 때 자신은 그것을 정말 믿는 것일까요? 한 행을 지울 때 자신은 그것이 정말로 믿을 수 없는 것일까요? 믿지 않는다면 고쳐 쓸 수 없지만, 고쳐 쓸 수 있다는 것은 믿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신과 불신의 이분법은 다 같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거기에 무한한 회색의 투쟁 공간이 출현합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습니다. “최후에는 고독한 전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쓰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혁명의 장소입니다. 혁명의 시간입니다. 이 시공은 끝나지 않습니다. 정의상, 끝날 수 없는 것입니다.

 

p238. , , 연극, 노래, 음악, 회화 등 예술의 놀랄 만한 힘을 억압하기 때문에 그것은 외부에서 회귀하여 우리를 강습합니다. 그 힘은 파시즘 또는 스탈린 주의라는 형태로 놀랄 만큼 무참한 죽음을 강요하게 되었습니다.

 

p241. 이는 푸코가 자기 통치의 문제로 논한 것과 겹칩니다. 시장 안에서 우리는 매일 자신을 훈련하고 있습니다. 생산성을 위해, 효율을 위해, 그것도 하나의 인간을 훈련한다예술 =기예인 것입니다. 푸코는 인간의 제조란 하나의 예술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행동거지, 우리의 언어, 우리의 예의범절,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일종의 훈련의 효과고, 그 잔혹한 훈련의 모든 것은 역시 예술에 속하는 뭔가입니다. 우리는 사회에 의해 안무되고있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니체가 <도덕의 계보학>에서 결정적으로 논하고 있는 것입니다.

 

p243. 대체로 예술이란 수태의 예술입니다. ‘잉태된 것concept’을 위한 기예입니다.

p246. 읽어버렸다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된다면,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줄 알고 있다니요, 알고 있는 게 아닙니다. 사실은 모르고 있으니까 그렇게 살 수 없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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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밤. 읽어라 어머니인 문맹의 고아여. 무함마드와 하디자의 혁명

 

p121. 그러는 사이에 서른두 살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의 일입니다. 아주 낙담하여 뜰의 무화과나무 그늘에 앉아 신음하듯 읊습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주여, 언제까지입니까? 아무리 지나도 내일인 겁니까? 왜 저의 더러움이 바로 지금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까?” 그러자 그곳에 아이들이 흥얼거리는 노랫소리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소리는 흘러왔습니다.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 그 소리에 이끌려, 또 친어머니가 갖고 있던 신앙에 이끌려 그는 성서에 있는, 사도 바울이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인 로마서를 읽기 시작합니다. 그는 집어 들고 읽었습니다. 역시 여기도 읽습니다.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읽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멸망을 향해 조용히, 그러나 착실히 쇠망의 길을 걷고 있는 제국의 유일한 신앙의 거점이며 서방 교회를 인도하는 빛이며 사도 바울 이래 최대의 신학자가 되리라고는 그 자신도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성 아우구스티누스라고 합니다.

 

p124. 들뢰즈=가타리는 그들의 저작에서 국가장치에 대한 전쟁기계라는 아주 신선한 개념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국가장치는 악이며 전쟁기계는 선이라고까지는 못하겠지만, 전쟁기계야말로 근본적이고 좋은 것이라고 산만하게 이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주 냉철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전쟁기계가 옳은 것이다, 라고 생각하지 말았으면 한다. 왜냐하면 나치라는 것은 분명히 전쟁기계였기 때문이다, 라고 말입니다.

 

물론 전쟁기계라는 개념에 포함되어 있는 투쟁력 없이는 어떤 변혁도 불가능합니다. 그런 것으로 제기된 것이니까요. 그러나 이쪽은 좋고 저쪽은 나빠라는 단순한 사고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그런 유치한 사고에 굴복한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p126. 하지만 그렇게 협애한 라캉상을 라캉 스스로 극복하게 된 계기는 이 에스파냐 신비주의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테레지아와 그 오른팔인 십자가의 성 요한을 필두에 두는 운동입니다.

 

20세기 최대의 시인이라고 하면 T.S 엘리엇과 폴 발레리, 라이너 마리아 릴케, 에즈라 파운드와 더불어 역시 파울 첼란이라고 생각합니다. 엘리엇이 그의 대표작 <네 개의 사중주>에서 십자가의 요한을 많이 인용했고, 파운도도 <캔토스>에서 그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폴 발레리도 성 요한의 <영적 찬가>를 완벽한 시의 한 예로 절찬하고 있습니다.

 

P127.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에 대해 배운 적이 한 번이라도 있는 걸까요? 지금 예로 든 것만 해도 이미 라캉도, 푸코도, 20세기의 위대한 시인들도 그()들을 예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들은 아무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항상 그()들은 죽임을 당하는 쪽이었으니까요.

 

P128. 읽고 쓰는 것 때문에 목숨을 걸지 않을 수 있었던 날들 그것은 역사상 실로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아시아에서 다소라도 언론의 자유가 지켜지고 있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습니다.

 

P129. 신비가라는 것은 제일 먼저 그녀에게 읽고 쓴다는 것이 처음부터 광기에 가까운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목숨을 택할지, 읽는 것의 광기를 택할지 하는 일이 됩니다. 죽임을 당하거나 아니면 광기를 무릅쓰고 읽거나, 읽는 내가 옳은지, 읽는 나를 압살하려는 세계가 옳은지 어쩐지 앞에서도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리고 그녀는 환각을 봅니다.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예수는 그녀에게 알립니다.

 

-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에게 마치 펼쳐진 책처럼 될 것이다.”

 

P132. 자신이 하는 일을 종교라고 생각하는 종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종교 법인인 것에 안심하고 인가를 받아 세제상의 우대 조치라는 은혜에 만족하며 기뻐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슬람 이전의 시대를 자힐리야라고 합니다. 무명 시대라고 번역됩니다. 무지의 시대라는 것이지요.

 

P134. 무함마드는 야팀입니다. 고아지요. 아버지 없는 아이입니다. 어머니도 그가 여섯 살 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성전 <코란>은 분노의 책이기도 하기 때문에 고아, 빈민을 학대하는 사회에 대한 격렬한 의분의 말이 나옵니다.

 

P135. 당연히 상인 계층이므로 시리아로의 대상 무역에 종사했다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요. <코란>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말 가운데 하나는 나는 시장을 헤매고 다니며 먹고사는 평범한 남자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생각합니다. 말 그대로였겠지요. 그는 기적을 거부합니다.

 

P138. 대천사 지브릴이 출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천사 가브리엘입니다. 하얀 백합꽃을 손에 쥐고 마리아에게 수태고지를 한 그 천사입니다. 무함마드는 그때 그 자리에서 기뻐하거나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미쳐버리지 않았나 생각하며 도망칩니다.

 

P139. 무함마드는 하디자의 격려를 받고 용기를 되찾아 다시 동굴로 갑니다. 그러나 역시 지브릴이 있습니다. 여기서부터가 굉장히 훌륭합니다. 감동적이고 또 희극적인 장면이 시작됩니다. 전거에 따라 다릅니다만, 대체로 세 가지 설이 있습니다. 지브릴이 자루를 갖고 있어 그것을 무함마드의 머리에 씌워 목을 졸랐다는 설. 아무것도 갖지 않고 무함마드에게 덤벼들어 뒤에서 목을 죄어 꼼짝하지 못하게 했다는 설.

 

책 같은 것이 든 자루를 가지고 있어 그것으로 때렸다는 설. 이를 다섯 번 정도 합니다. “내 이야기를 듣겠느냐?” “싫습니다.” 그러면 때리고 세게 조릅니다. 그리고 다시 묻습니다. 거부합니다. 다시 뒤에서 목을 죄어 꼼짝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를 다섯 번 정도 반복합니다.

 

P140. 그러나 무함마드가 왜 이렇게까지 거부했을까요? 그 이유를 생각하면 정말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브릴은 무함마드에게 읽으라고 하니까요. 읽어라, 라고 말이지요. 그러나 무함마드는 무엇을 읽어야 좋을지 모릅니다. 도대체 뭘 읽으라는 겁니까, 하는 말대답까지 했습니다. 그러자 일단 천사가 사라졌다는 전승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계시는 내려집니다. 대천사가 전한 신의 계시, 전 이슬람 세계를 정초하는 최초의 계시는 이렇습니다.

 

읽어라. 창조주이신 주의 이름으로,

아주 작은 응혈에서 사람을 만드셨다.

읽어라. 너의 주는 더없이 고마우신 분이라,

붓을 드는 법을 가르쳐주신다.

사람에게 미지의 것을 가르쳐 주신다.

 

P142. 벨기에의 역사가 앙리 피렌은 무함마드없이는 샤를마뉴도 없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무함마드가 등장하고 이슬람이 지중해 세계를 정복합니다. 그에 대항하고 그에 대해 닫음으로써 비로소 유럽은 고대에서 벗어나 통일체로 조직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디자가 없었다면 무함마드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디자가 없었다면 유럽도 없었습니다. 즉 유럽에 의한 세계의 근대화도 없었습니다. 하디자가 없었다면 세계화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고, 게다가 그 세계화 안에서 다양한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저항하는 유일한 세력도 그녀가 선택한 남편이 창출해낸 이슬람 공동체였으니까요.

 

P143. 너희들의 아내, 누이, 딸들은 신으로부터 위탁받은 자이므로 소홀히 대하지 말라,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슬람이 왜 아직도 여성 차별적인 사회의 존립을 허용하고 있는지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P144. 무함마드는 문맹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문맹은 아랍어로 움미ummi’라고 합니다. 사실 이는 아랍어로 어머니인이라는 모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어느 전승에 따르면, 지브릴은 책을 갖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코란>에는 인간일 읽을 수 없는 신의 말로 쓰인 원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원본을 이슬람에서는 책의 어머니라고 합니다. 따라서 <코란>은 책의 어머니의 사본인 셈입니다.

 

p145. 무함마드는 최후의 예언자입니다. 이제 예언자는 나타나지 않고 계시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의 어머니는 두 번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구히 사라져 잊히고 맙니다. 무함마드가 읽는 다는 것, 이는 책의 어머니에 대한 접근을 소진시키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읽는다는 것은 읽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책 같은 걸 읽을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책의 소실, 읽는 것의 좌절,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빛나는 책이라 불리는 <코란> (‘읽는다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놀랄만한 역설일까요? 그렇지도 않겠지요. 우리는 처음부터 말했습니다. 책은 읽을 수 없습니다. 읽을 수 있다면 미쳐버립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그것만이 읽는다는 것입니다.

 

벤슬라마는 이를 정확히 ‘le concept du liver’라 불렀습니다. 영어로 말하면 ‘the concept of the book’입니다. 책의 개념이라고 번역한다고 해도 의미는 알 수 없습니다. 당연히 이는 책을 잉태하는 것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책의 어머니가 잉태하게 하는, 어머니인 고아의 읽는다는 것’. 그것이 <코란>이고 이슬람 공동체의 근원입니다.

 

p146. 그가 추구하는 궁극의 대상, 그것은 책의 어머니입니다. ‘책의 어머니에 도달하는 것을 추구합니다. ‘책의 어머니는 신이 아닙니다. 그는 신도, 신인 것도 추구하지 않습니다. 책을, 바로 책을 추구합니다. 읽을 수 없는 그가 읽을 수 없는 책을. 어머니인 그가 어머니인 책을.

 

p147. 읽을 수 없는 것이 읽을 수 있는 것으로 전화하고, 읽을 수 있는 것이 갑자기 읽을 수 없는 것으로 흐려지는 이 절대적인 순간. 이 자체가 천사천사적인 것입니다. 읽을 수 없을 터인 것을 읽는 것, ‘읽는다는 기회를 주는 것, 이것이야말로 천사적인 일입니다.

 

p148. 대천사 지브릴은 무함마드의 목구멍을 찢고 심장을 꺼내 씻었습니다. 그것을 무함마드의 신체에 돌려놓았을 때 그의 마음은 신앙과 지혜로 가득 찼습니다. 마음이 정화된 무함마드는 천마를 타고 한달음에 천리를 날아갔습니다. 목구멍을 찢고 심장을 꺼내 씻었다, 그러자 천리를 갔다- 읽는다는 것은 이 정도의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반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몇 번이라도.

 

p149. <하디스>라는 무함마드의 언행록이 있습니다. 거기에 그 자신이 말하는 훌륭한 문구가 있습니다. 이르길, 신이 최초로 창조한 것은 무엇인가? 붓입니다. 갈대를 꺽어 만든 붓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쓰는 판 점토판일까요?-을 창조하고, 신은 이렇게 말합니다.

 

써라.”

 

p150. 완벽합니다. 이 문맹인 고아에게 내린 읽어라’, ‘붓을 들어라라는 명령이 그 위대한 이슬람의 서예 문화를 만들어냈습니다.

 

p151. 카바 신전에서 시를 낭송하는 대회가 열렸습니다. 이 대회를 무파카라라고 합니다. 운을 맞춘 시를 읊는 대회로 토너먼트 방식으로 우승자를 가립니다. 무함마드는 웬일인지 이를 자주 보러 간 모양입니다. 래퍼들의 배틀 같은 것입니다. 우승한 시는 무알라카트라고 합니다. 이는 걸어놓은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천에 금빛 글자로 쓰인 그 시를, 우승자를 칭송하기 위해 1년간 카바 신전에 걸어두는 것입니다.

 

무함마드는 시를 무척 좋아하여 <코란>에도 시의 언어는 황금보다 훌륭하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나중에 그는 아이샤라는 아내를 맞이합니다. 아이샤는 그 미모가 칭송받을 정도로 뛰어나고 무엇보다 재원이었습니다. 모든 아랍 시를 암기하고 있어 무함마드가 그것 좀 해주게하면 아름다운 목소리로 술술 읊었고, 자신도 시를 쓰고 연설가지 했던 여성이었습니다.

 

p152. 몇 번이나 반복합니다.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힘이고,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납니다. 읽고 쓰고 노래하는 것. 혁명은 거기에서만 일어납니다.

 

p153. 그래도 거기에는 한순간이라도 빛이 있었고, 가능성이 있었고, 혁명이 있었습니다. 구원받은 목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말은 역시 읽어라였습니다. “붓을 드는 법을 가르쳐주신다.”그리고 꽃을 피운 것이 확실히 있었습니다. 그것은 거기에 있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슬람의 가르침에서는 세계의 종말이 올 때 확실한 징조가 있다고 합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시나요? <코란>의 텍스트가 분실되고 그것이 잊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교도인 처지에 건방진 말이지만 그런 일은 없습니다. 있을 수 없습니다.

 

p158. ‘폭력의 선행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국가나 사회를 정초하기 위해서는 우선 법을 모르는 강대한 힘을 가진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그러한 정초자의 근원적인 폭력이 우선 존재하지 않았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이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에게 다시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비로소 법이, 그리고 법에 의한 평화가 성립합니다. 즉 법의 텍스트가 성립하고, 그에 준거하는 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p161. 그러므로 이슬람은 근본적으로 정신분석적, 민족학적 사고의 틀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국가나 공동체나 법의 기원에서 폭력을 찾는 사고와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에드워드 사이드는 중동 문화를 미적으로만 뛰어난 것으로 칭송하는 대신 지적으로는 열등한 것으로 차별하는 태도를 오리엔탈리즘이라 부르며 비판했습니다.

 

p162. 폭력이 반드시 선행하고 폭력이야말로 국가나 법의 기원이고 근원이라는 사고는 완전히 시야 협착에 빠져 있습니다. 그 반대입니다.

 

p165. 불교는 광대한 교양을 포함하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원시불전에 의거하는 한 이런 말은 할 수 있습니다. 부처조차 최종적인 해탈, 즉 열반(니르바나)에 달한 것은 죽을 때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최종적인 해탈 같은 건 있을 수 없습니다.

 

또 티베트 불교의 게룩파에서 최종 해탈자를 자처하지 마라는 규칙은 4대 계율 중 하나입니다. 즉 죽이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간음하지 마라에 버금가는 계율인 것이지요.

 

p166. 마르코의 복음서 1332~34절입니다. 예수의 종말의 그날과 그 시간의 도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그때가 언제 올는지 모르니 조심해서 항상 깨어 있어라.

그것은 마치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이 종들에게 자기 권한을 주며 각각 일을 맡기고, 특히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분부하는 것과 같다.

 

p168. 루터 또는 무함마드에게 읽다라는 것은 무엇을 전제로 한 것이었을까요? 세계와 자신과 책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생생한 이물로서 타자성으로 분리되고 구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을 읽는 자신이 미쳤는가, 아니면 세상이 미쳤는가 하는 물음이 가능해집니다. 이렇게 당연한 일이 원리주의자들에게는 알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런 원리주의적 사고의 함정은 얼마든지 널려 있습니다. 지금도.

 

p172. 죽음에 대한 선동, 죽음의 공포라는 선동을 받고 오히려 죽음으로, 그리고 자신의 죽음과 세계의 멸망이 일치하는 절대적 순간의 향락으로. 이는 사실 나치적인 담론입니다. 소설가 토마스 만은 일찌감치 자료도 다 나오지 않을 때부터 명민하게 지적했습니다. 나치의 본질은 전쟁을 위한 전쟁이고 자신의 죽음과 멸망을 위한 전쟁이라고 말이지요.

 

나치가 목표로 했던 것, 그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것도 사실 잘 모르지 않나요? 그건 자살입니다. 게다가 자신과 셰계를 일격에 동시에 죽이는 것. 종말의 절대적 향락의 순간이 도래하는 것을 불러오는 것이빈다.

 

미셀 푸코도 강의에서 극명하게 지적하고 있고, 피에르 르장드르도 분명히 독일 국가의 절대적 자살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실제로 히틀러는 총통명령 전문 71호에서 이 세상의 다른 모든 민족을 멸망시키라는 명령을 내리는 동시에 독일인의 생존 조건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역시 자신의 죽음의 순간과 모든 타자, 모든 세계의 죽음의 순간과 일치시키는 것을 절대적 향락으로 꿈꾸었던 것입니다.

 

p174. 왜냐하면 현대사상은 그 후 압도적으로 병든 방향으로 향하고 말았으니까요. 누구나 역사의 종말이니 우리는 잠재적으로 아우슈비츠에 있는 것이다느니 인간의 역사는 끝났고 이미 종말이 찾아왔으며 이제 우리는 인간이 아니다느니 하는 쓸데없는 잡담을 늘어놓을 뿐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현실에 대한, ‘현재에 대한 굴종을 선전하며 돌아다니려고 합니다.

 

175. 어떻게든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 역사의 종말이 오지 않으면 곤란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지요. 조르조 아감벤이나 코제브처럼요. 시시합니다.

 

p176. 아감벤이 어떤 저작에서 굉장히 어리석은 말을 합니다. 일렉산드리아가 어딘가에서 세계의 끝, 종말을 그린 그림이 나옵니다. 즉 천국이 도래한 그림이지요. 거기에는 동물의 얼굴을 한 사람들이 식사를 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아감벤은 흥분하여 역시 세계의 종말, 역사의 종언은 동물의 세계다, 동물화인 것이다, 하며 기고만장한 어조로 주장합니다. 실소를 금할 수 없습니다. 왜일까요?

 

물론 일신교에서 세계의 종말을 천국의 도래기도 합니다. 하지만 천국은 원래 그리스어로 파라데이소스paradeisos’라고 하는데,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페르시아어인 파이리다에자가 어원입니다. 그런데 파이리다에자란 무슨 뜻일까요? 원래 여기에는 천국이라는 의미가 없었습니다. ‘둘러싸다는 의미고, 나아가서는 왕의 즐거움을 위한 광활한 동물원이나 식물원을 의미했습니다.

 

이 말은 헤브라이 문화로 전해져 인간의 종말에 약속되는 구제의 장소인 천국으로 전화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사자와 양이 함께 어울리며 평화롭게 사는 곳이다라고 정의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계의 종말에 오는 천국도 원래는 동물원이라는 의미입니다.

 

p177. 아감벤처럼 남이 하는 대로 덩달아 끝이다, 종말이다, 동물이다, 하고 떠드는 사람은 전 세계에 우글우글합니다. 그러데 조금은 자신이 얼마나 저열하고 무참하며 조악한 사고의 형태에 알랑거리고 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p179.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 이 책의 제목은 무슨 뜻일까요? 물론 아일랜드의 속요 <피네간의 경야>에서 온 것입니다. 아일랜드의 신화적 영웅 핀이 돌아온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우선 피네간의 ‘Wake’, 경야’, ‘깨어남그리고 삶의 영위인 항적을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피네간에 함의되어 있는 ‘Finn-Again’, 다시라는 의미기도 하기 때문에, 또 끝이 왔지만 다시 깨어난다는 것입니다. 또다시 찾아온 종말, 하지만 끝날 것 같아도 끝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p180. 제임스 조이스의 제자인 사무엘 베케트도 <>이라는 소설, 그리고 <승부의 끝>이라는 희곡을 썼습니다. 그러나 <>은 잡지에 게재될 때 계속이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역시 끝날 것 같지만 전혀 끝나지 않는, 길게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소설을 썼습니다.

 

괜찮겠지. 이건 말이야, 결코 끝나지 않아. 난 말이야 절대 나가지 않는다.”라고 중얼거리는 클로브가 주인공 함의 얼굴에 손수건을 덮어주는 데서 끝납니다. 함은 죽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베케트 자신이 베를린에서 이 작품을 연출했을 때 분명히 말했습니다. 이 손수건은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침묵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라고. 그리고 또 손수건은 막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에 무뚝뚝하게 그렇고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p181. 20세기 최대 걸작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우선 저녁이라는 지문이 쓰여 있습니다. ‘저녁이 찾아온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에스트라공이 어쩔 도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직접적으로 이는 단지 구두를 벗을 수 없다는 것인데, 사실은 이중 의미로, 이제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 어쩔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제 끝났다, 라고 말이지요. 거기에 어슬렁어슬렁 블라디미르가 등장하고, 에스트라공의 첫 대사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그렇게 믿을 뻔했어. 하지만 난 오랫동안 그런 생각에 거슬러왔어. 자신에게 이렇게 훈계하면서 블라디미르, 잘 생각해봐. 넌 아직 모든 걸 시도해본 건 아냐, 라고 말이야. 그리고 다시 싸우기 시작했어.

 

p182. 그러자 포조가 돌연 격노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이젠 지긋지긋해, 그만둬. 시간 이야기를 이러쿵저러쿵 얘기 하는 건, 바보 같아! 언제야! 언제야! 어느 날이면 안 되는 거야? 다른 날들과 마찬가지인 어느 날, 놈은 벙어리가 되었어. 어느날 나는 맹인이 되었어. 어느 날 우리는 귀머거리가 될지도 모르지. 어느 날 태어났어. 어느 날 죽겠지. 같은 어느 날, 같은 어느 시간에. 그것으로 충분하잖아. 여자들은 묘석 위에 걸터앉아 출산을 하지. 그 순간 해가 빛나는 거야. 그리고 또 새로운 밤이 찾아오지. 앞으로!

 

p183. 이런 베케트주의자로서의 푸코라는 시점 없이 어떻게 푸코에 대해 논할 수 있는지 저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현대문학은 자신이 살고 있는 동안 뭔가 결정적인 몰락이나 종언이 일어나주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유치한 사고에 대한 투쟁으로 조직되어 왔습니다.

 

이 희곡은 지금도 부조리나 난해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 이 희곡은 뭘 의미하고 있는 겁니까? 하는 젊은 배우의 소박한 질문에 베케트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십니까? 웃으면서 베케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공생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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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밤. 루터, 문학자이기에 혁명가

 

저번에는 비평가와 전문가라는 두 가지 지의 나쁜 형상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도움을 받아 그가 말한 변질하여 가치판단의 힘을 잃어버린 철학자칼리오스트로 같은 철학자라는, 역시 긍정하지 않을 수 없는 두 가지 형상과 반향하면서 말이지요.

 

p67. 사람들은 거기서 적어도 여섯 혁명을 경험했습니다. 호칭이야 논자마다 다르지만 일단 열거하기로 합시다. 중세 해석자 혁명, 대혁명, 영국혁명, 프랑스혁명, 미국혁명, 러시아혁명,

 

p68. 혁명은 보통 영어로 ‘revolution’이라고 합니다. 이 말이 일반적인 된 것은 프랑스 혁명의 어느 유명한 에피소드에서 입니다. 1789년 바스티유 감옥이 습격을 받았을 때 당시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가 반란이다라고 말하자 측근인 라 로슈포코 리앙쿠르 공작이 아닙니다, 폐하. 이건 반란이 아니라 혁명이옵니다.”라고 했다는 극적인 장면입니다.

 

p69. 12세기 중세 해석자 혁명, 별칭으로 교황 혁명은 유럽에서 최초의 혁명 이념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것은 혁명의 슬로건”, “상징적인 기도 문구이고 은유”(르장드르)였습니다. 그 슬로건, 기도, 은유란 어떤 것이었을까요? ‘Reformatio totius orbis’라고 합니다. 번역하면 세계 전체에 형태를 다시 주는 것이 됩니다. 요컨대 세계혁명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Reformatio’를 혁명이라고 번역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버먼이 이를 독일혁명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앞에서 말했습니다만, 역시 원어를 보면 독일이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를 대혁명이라고 번역하지 못할 이유도 없습니다.

 

p73. 우리가 혁명이라는 말을 듣고 떠올리는 것은 무엇일가요? 폭력이고 유혈이며 참극입니다. 영국혁명의 일부를 이루는 명예혁명은 영어로 ‘Glorious Revolution’이라고 합니다. ...‘빛나는 혁명’, ‘영광스러운 혁명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불리는 걸까요? 무혈혁명이었기 때문입니다.

 

p75. 마르틴 루터가 일으킨 대혁명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하지요. 대혁명이란 성서를 읽는 운동입니다. 루터는 무엇을 했을까요? 성서를 읽었습니다. 그는 성서를 읽고, 성서를 번역하고, 그리고 수없이 많은 책을 썼습니다. 이렇게 하여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책을 읽는 것, 그것이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p79. 수도원은 원래 학문과 노동과 금욕과 명상의 장소입니다. 그러나 부패한 수도원은 이제 귀족들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소굴, 패셔너블한 사교장으로 전락해갔던 것입니다.

 

p81.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죄인을 벌하는 정의의 신을 사랑하지 않았다. 아니, 증오했다. 그리고 모독이라고는 말하지 않아도 신에 대해 분노를 안고 있었다. 가련한, 영원히 상실된 죄인을, 죄 때문에, 십계명에 의해 온갖 종류의 재앙으로 우리를 압박하는 것만으로 신은 만족하시지 않는 걸까 ?

 

p83. 그는 알았던 것입니다. 이 세계에는, 이 세계의 질서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다는 것을. 성서에는 교황이 높은 사람이라는 따위의 이야기는 쓰여 있지 않습니다. 추기경을, 대주교 자리를, 주교 자리를 마련하라고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황제가 높은 사람이라고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교회법을 지키라고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십계명을 지켜라라고 쓰여 있을 뿐입니다. 수도원을 지으라고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공의회를 열라고도, 그 결정에 따르라고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성직자는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쓰여 있지 않습니다. 면죄부는 논할 계제도 못 됩니다.

 

p84. 이 세계의 질서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습니다. 게다가 그 질서는 완전히 썩어빠졌습니다. 다른 사람은 모두 이 질서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고, 따라서 이 세계의 질서는 옳고 거기에는 근거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루터를 제외하고, 교황이 있고 추기경이 있고 대주교가 있고 주교가 있고 수도원이 있고, 모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지만 아무리 읽어도 성서에는 그런 것이 쓰여 있지 않습니다.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일까,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일까?

 

p85. 반복합니다. 책은 읽을 수 없습니다. 읽을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으로 만들자마자 몇 번 읽어도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런 책만이 책입니다.

 

p86.루터가 말했습니다.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기도이고 명상이고 시련이다.”

 

루터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되풀이해서 읽으라고 충고하고 나서 그는 이렇게 말을 잇습니다.

 

그러나 이에 질려 한 번도, 두 번도 이미 충분히 읽었고 들었고 말했다. 뭐든지 근저에서부터 알고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런 생각을 갖는 자는, 때 아닌 때에 열매를 맺는 과일 같은 것으로, 절반도 익지 않은 채 떨어져버릴 것이다.

 

자신이 틀렸을지도 모릅니다. 주위 사람들은 다들 이 세계에는 준거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만 미쳤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륀베델처럼요. 저는 이를 준거의 공포라고 부른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읽어도 정말 그런 것이 그 책에 쓰여 있었는지 완전한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책이란 그런 것입니다. 책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다, 정확한 근거를 보여준다,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그저 자신의 망상일지도 모릅니다. 책이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망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준거의 공포에 사로잡히면서, 그래도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되지 않는다면 추궁해야 합니다. - 반복하겠습니까?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인가,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반복합니다. 책을 일고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그런 정도의 일입니다. 자신의 무의식을 쥐어뜯는 일입니다. 자신의 꿈도 마음도 신체도,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 일체를, 지금 여기에 있는 하얗게 빛나는 종이에 비치는 글자의 검은 줄에 내던지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이것은 성전입니다. 성전을 바꿔 읽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바꿔 쓰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고독한 싸움밖에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시 루터는 아무래도 자신이 미쳤다고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눈을 비벼도 거기에는 그렇게 쓰여 있고, 또는 그렇게 쓰여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있지 않으므로 몇 번이고 말합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정면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쓰여 있다고밖에 믿을 수 없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p91. 루터는 설사 보름스 시내 지붕의 기와가 모두 적이 되어 습격해온다고 해도 나는 간다.”라고 말하며 합스부르크 제국의 전성기를 창출한 황제 카를 5세가 기다리는 보름스 국회의 소환에 응합니다. 거기서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거절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성서의 증언이나 명백한 이유를 가지고 따르게 하지 못한다면, 나는 계속 내가 든 성구를 따르겠다. 나의 양심은 신의 말에 사로잡혀 있다. 왜냐하면 나는 교황도 공의회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교황이나 공의회는 자주 잘못을 저질렀고, 서로 모순된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주장을 철회할 수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양심에 반하는 일을 하는 것은, 확실하기는 해도 득책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이시여, 저를 도와주소서. 아멘.

, 여기에 선다. 나에게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p93. 사실 1519년 루터 책의 출판 부수는 독일 전체 출판물의 3분의 1, 1523년에는 5분의 2에 달했습니다. 좀 더 넓게 잡아도 1500년부터 1540년까지 독일의 전체 서적의 3분의 1을 차지합니다. 참고로 말하자면 <9월성서>1534년까지 85쇄를 찍어 냈고 10만 부가 팔렸습니다.

 

p97. 루터는 1520년 비텐베르크 빈민 구제법이라는 법률을 공포하고 이렇게 선언합니다. “지금부터 이 도시에 가난한 자는 한 사람도 없다. 구걸을 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 실제로 이 법률은 효력을 발휘합니다.

 

p102. 어쨌든 법을 어떻게 적용할지, 그때의 기준이 되는 것은 무엇인지 하는 물음에 루터파 법학은 양심이라고 대답한 겁니다. 재판관의 양심적인 판단이지요. 서구의 현행법이 루터파에 가장 많이 빚지고 있는 것이 이 부분입니다. 법을 구체적인 사례에 공정하게적용한다는 것은 양심에 따라판단한다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p104. 멜라 출신 농민의 아들이 책을 읽습니다. 성서 박사가 됩니다. 그리고 책을 씁니다. 그래서 교황의 방해자가 되고 그리하여 예술, 문학, 정치, , 신앙, 종교, 그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대혁명은 성취되었습니다.

 

반복합니다. 그는 무엇을 했을까요? 책을 읽었습니다. 성서에 그렇게 쓰여 있었으니까, 그것을 부정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해도 그런 건 알 바 아니었던 것이지요. 책을, 텍스트를 읽는 것은 광기의 도박을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읽어버린 이상 그것에 목숨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고, 따르지 않으면 안됩니다. , 여기에 선다. 나에게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작가 고토 메이세이가 왜 소설을 쓰는가?”라고 자문하고는 소설을 읽어버렸으니까라고, 사람을 무시하는 듯한 그 사람 특유의 넉살 좋고 이상한 느낌으로 답했습니다. 이는 사실 똑같은 일입니다. 읽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쓰는 것입니다.

 

아무리 읽어도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달리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쓸 수밖에 없습니다. 고독한 싸움일지라도, 그륀베델 같은 광기의 위험이 있더라도, 책을 읽는다는 것을 그 정도까지 예민하게 생각하면, 책을 읽고 다시 읽는 것만으로 혁명은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p106. 연설은 이렇습니다.

 

남자들은 술과 여자로 몸을 망칠 염려가 있다.

그렇다면 술을 금지하고 여자를 죽이라고 할 것인가?

태양과 별이 우리를 속인다고 한다면,

그것을 하늘에서 떼어내야 하는가?

그런 성급함이나 폭력은 신에 대한 신뢰의 결여를 드러내는 것이다.

나는 기도하고 설교하는 것밖에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이 나를 통해 얼마나 많은 것을 성취하셨는지를 생각해보라.

말이 그 모든 것을 이루었던 것이다.

 

여기서 루터가 읽은 것기도이고 명상이며 시련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을 떠올립시다. 의미는 분명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는 성급함이나 폭력을 부정하고 말의 힘을 믿고 있습니다.

 

p109. 당연하고 정당한 요구들뿐입니다. 부당하게도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므로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명문화된 텍스트가 선행합니다. 95개조의 의견서가 있었던 것처럼 12개조의 요구가 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정당하고, 전적으로 루터적인 방식으로 성서에서 합법적인 근거를 찾으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전쟁에서 흘린 피는 무익했을까요?

 

아닙니다. 전쟁이 종결된 이듬해인 1526년 슈바이엘에서 제국의회가 개최됩니다. 거기에서 농민의 요구에 대한 대위원회가 설립되었고, 논의 끝에 황제에게 보고서가 제출되었습니다. 이 보고서가 12개조의 요구를 원안으로 삼은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수많은 부당한 징세가 폐지되었고, 농노제도 폐지되었으며, 이동의 자유나 토지의 반환이 제기되었습니다.

 

p111.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사상의 힘을 모욕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대학교수의 조용한 서재 안에서 나온 철학적 개념이 한 문명을 파괴해버리는 일도 있다고 말이지요. 하이네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유럽의 이신론의 목을 잘라버렸고, 루소의 책은 로베스피에르를 매개로 앙시앵레짐을 파멸시킨 피투성이의 무기라고 했습니다.

 

p112.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이 대혁명에서 집중해야 하는 것은 혁명의 과정에서 폭력에 의해 권력을 탈취하는 것이 선행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텍스트를 읽고, 다시 읽고, 쓰고 ,다시 쓰고, 번역하고, 천명하는 것. 그 과정에서 폭력적인 것이 나타나는 일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혁명에서는 텍스트가 선행합니다.

 

p113. 됐나요? 텍스트를, 책을, 읽고, 다시 읽고, 쓰고, 다시 쓰고, 그리고 어쩌면 말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 이것이 혁명의 근원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래도 이렇게 됩니다.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근원이다, 라고. 루터는 문학자였습니다. 말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상 최대의 혁명가였습니다.

 

p114. 혁명이 문학적 몽상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혁명은 문학적인 것이 아닙니다. 다릅니다. 결코 다릅니다.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본질입니다.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나고, 문학을 잃어버린 순간 혁명은 죽습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문학을 폄하하고 문학부를 대학에서 추방하려고 할까요? 왜 문학자 스스로가 문학을 이렇게 업신여길까요?

 

그것은 바로 문학이 혁명의 잠재력을 아직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그것에 겁을 먹고 있는 겁니다. 왜 우리가 이토록 정보의 틈새에서 괴로워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자신을 통치하는 텍스트라는 것이 무미건조한 정보이자 서류인 어느 시공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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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6-03-11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사키의 주장에 따르면 `책을 불태운 사람들`은 `책의 놀라운 힘`을 제대로 직시했던 게 틀림없었던 듯합니다. 정성들여 옮겨주신 덕분에 `책 속에 담긴 저자의 생생한 목소리`를 일부나마 엿들을 수 있어서 참 좋네요. 혁명가 루터에 대한 이야기는 `독서의 역사`를 쓴 알베르토 망겔도 여러 곳에서 `그의 영향력`을 거듭 강조하더군요. 다른 한편으로, 니체는 `르네상스 혁명`으로 거의 다 죽어가던 `기독교`를 `루터`가 기어이 다시 살려냈다면서 ˝르네상스가 ㅡ 의미없는 사건으로, 엄청난 헛수고가 되어버리고 말았다니!`라고 탄식하면서, `우리가 그리스도교를 끝장내버리지 못한다면, 독일인들이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까지 말할 정도로 그를 몰아세웠더군요.

* * *

책을 불태우는 사람들

책을 불태우는 사람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역사를 지우고 과거를 파기할 수 있다는 환상을 품는다. 1933년 5월 10일 베를린, 카메라가 돌아가는 가운데 서적 2만여 권이 불태워지는 동안 선전 부장이던 파울 요셉 괴벨스가 환성을 지르는 10만여 명의 군중 앞에서 일장 연설을 하고 있었다. ˝오늘 밤 여러분들이 과거로부터 내려온 이 왜설스런 것들을 불길로 집어던지는 건 너무도 당연합니다. 이거야말로 전세계를 향해 낡은 정신은 죽었다고 선포하는 막강하고 상징적인 행위가 될 것입니다. 이 잿더미 속에서 새로운 정신의 불사조가 일어날 것입니다.˝

당시 열두 살 소년으로 훗날 런던의 유대학을 위한 레오 백 연구소 소장이 된 한스 파우커도 그 현장을 지켜보았으며 화염 속으로 책을 집어던질 때는 엄숙함을 더하기 위해 이런저런 연설이 이어졌다고 그때를 회고하고 있다. 프로이트의 책들을 던지기 전에는 검열관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비난을 퍼부었다. ˝정신의 파괴적 분석에 기초를 둔 무의식적 충동이라는 허풍에 맞서서, 나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저작들을 기꺼이 불길에 맡기겠노라.˝ 스타인벡, 마르크스, 졸라, 헤밍웨이, 아인슈타인, 프루스트, H.G. 웰스, 하인리히 만과 토마스 만, 잭 런던,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포함한 수백 명의 저자들이 이와 비슷한 묘비명으로 경의를 받았다.

* * *

피노체트의 판단

예를 들면 1981년에 피노체트 장군이 이끄는 군사 정권은 칠레에서 『돈키호테』를 금지시켰는데, 그 이유는 이 작품에 개인의 자유에 대한 호소와 전통적인 권위에 대한 공격이 담겨 있다는 판단에서였다(피노체트의 판단은 꽤 정확했다).

- 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

시이소오 2016-03-11 23:33   좋아요 1 | URL
이토록 장문의 댓글을. ㅋ 감사합니다. 책을 제대로 읽으면 미쳐버리니까요. 지배자들 입장에선 다루기가 어려워지겠죠. ^^
 

첫째 밤. 문학의 승리

 

p15. 프란츠 카프카는 초조해하는 것은 죄다라고 말했습니다.

 

p17. 이제 막 시단에 새로이 등장한 폴 발레리가 스승을 우러러보던 스테판 말라르메에게 시작의 충고를 구하는 편지를 쓴 적이 있습니다. 말라르메는 어떻게 답장을 썼을까요? “유일한 참된 충고자, 고독이 하는 말을 듣도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일화입니다. 자신이 하는 말도 듣지 말라는 얘깁니다. 누구의 부하도 되어서는 안 되고, 누구의 명령도 들어서는 안 됩니다.

 

p23. 질 들뢰즈의 강력한 말이 있습니다. “타락한 정보가 있는 게 아니라 정보 자체가 타락한 것이다라는.

 

p24. 현재 대부분의 사회과학이나 심리학적인 지식을, 그것도 위에서 강림한 것 같은 그런 지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비평가들은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또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제 무엇에 대해서도 재치 있는 코멘트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초조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전문가들은 한 가지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환상에 매달립니다. 결국은 둘 다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 환상에 대한 신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벗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p25. 라캉은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그리고 하나에 대해 모든 것을이라는 욕망은 결국 팔루스적 향락으로 귀착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p31. 재현과 미. 그대는 아름다운 교양을 가진 인간을 찾는가. 그렇다면 그대는 마치 아름다운 지방을 찾을 때처럼 역시 제한된 전망과 광경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분명히 전경적 인간들도 있다. 확실히 그들은 전경적인 지방처럼 교훈적이고 훌륭하다. 그러나 아름답지 않다.

 

비트겐슈타인은 현재를 좇는 자는 언젠가 현재에 따라잡힌다라고 말했습니다만, 바로 현재를 좇으려고 하는 이런 초조함에서 절대적으로 잃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자기 아래로 조망하려고 하면 반드시 손끝에서 달아나는 것이 있습니다.

 

p32. 니체는 온갖 책에서 회임, ’임신이라는 은유를 사용합니다. 실제로 확인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거의 모든 책에 나오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임신 상태보다 장중한 상태가 있을 수 있을까?”, “이 장중함 안에서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기대되는 것이 사상이든 행위든 우리는 모든 본질적인 완성에 대해 임신이라는 관계 이외의 관계를 갖지 않는다라고.

 

임신, 회태, 수태. 이런 은유를 그는 반드시 침묵’, ‘과묵과 연결시켜 말합니다. 또는 휴식이 양생이라든가, 어쨌든 소요는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과 함께.

 

들뢰즈는 철학이란 개념concept의 창조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개념이란 무엇일가요? 그것은 애초에 잉태된 것conceptus’이라는 뜻입니다. ‘개념으로 한다, 개념화한다.conception’라는 말도 임신conceptio’이라는 말에서 유래합니다. ‘마리아의 수태‘conceptio Mariae’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개념화conceptio에 의해 산출된 개념인 것입니다.

 

p33. 질 들뢰즈가 쓰는 것여성이 되는 것의 연결을 강조하며 쓰는 이유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남자라는 것의 부끄러움이 아닐까라고 묻는 건 이치에 맞는 것입니다.

 

p34. 그렇습니다. 철학이란, 그리고 쓰는 것이란 여성이 되는 것입니다.

 

p35. 그의 책을 읽었다기 보다 읽고 말았습니다. 읽고 만 이상, 거기에 그렇게 쓰여 있는 이상, 그 한 행이 아무래도 옳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은 이상, 그 문구가 하얀 표면에 반짝반짝 검게 빛나 보이고 만 이상, 그 말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한 행의 검은 글자, 그 빛에. 그러므로 저는 정보를 차단했습니다. 무지를 택하고, 어리석음을 택하고, 양자택일의 거부를 택하고, 안테나를 부러뜨리는 것을 택하고, 제한을 택했습니다.

 

p39. 그러나 그 벌것벗은 형태의 읽기라는 게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그렇습니다. 그륀베델 자신의 무의식을, 그 욕망을 텍스트에 직접 접속하는 것이었습니다. 찌르듯이. 어쩌면 찔리는 듯이. 그는 아마 그 텍스트를, 어렸을 때부터 품어온 동경과 사랑을 모조리 털어놓는 거울처럼 보고 말았을 겁니다. 거기에 비친 자신의 무의식을 그대로 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미쳐버리고 말았겠지요. 아마도.

 

그러므로 이런 것입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칫하면 정신이 이상해질 정도의 일입니다.

왜 사람은 책을 성실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왜 책에 쓰여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걸까요? 왜 읽고서 옳다고 생각했는데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채 정보라는 필터를 꽂아 무해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일까요? 아시겠지요. 미쳐버리기 때문입니다.

 

p40. 카프카나 횔덜린이나 아르토의 책을 읽고 그들이 생각하는 것을 완전히 알아버렸다면, 우리는 아마 제 정신으로는 있을 수 없을 겁니다. 서점이나 도서관이라는 얼핏 평온해 보이는 곳이 바로 어설프게 읽으면 발광해버리는 사람들이 빽빽 들어찬, 거의 화약고나 탄약고 같은 끔찍한 장소라고 느낄 수 있는 감성을 단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니체의 나는 일개 다이너마트다라는 대사를, 뭔가 과장되고 멋이나 부린 농담이나 그 비슷한 것쯤으로 흘려듣는 만만한 태도에 우리는 아무래도 너무 익숙해져버린 것 같습니다.

 

p42. 읽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쓴 것은 읽을 수가 없는 겁니다.

읽어버리면 미쳐버리고 맙니다.

 

p42. 읽는다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접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카프카의 소설을 읽는 다는 것은 거지반 카프카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기에서 자연스러운 자기 방어가 작동하는 것도 당연하겠지요. 그것은 본질적인 난해함이나 무료함이지, 결코 난해한 체하는 것도 아니고 번역이 나쁜 것도 아니며 재미있게 읽을 수 없는 자신이 열등한 것도 아닙니다. 알아버리면 미쳐버립니다.

 

p43. 니체 왈, “자신이나 자신의 작품을 지루하다고 느끼게 할 용기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예술가든 학자든 하여튼 일류는 아니다.” , 우리는 이미 여기까지 왔으므로 이 한마디는 이해할 수 있겠지요. 알아버리면 미쳐버릴지도 모르는 정도의 것이 아니면 일류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방어기제를 가동시키고, 따라서 기묘한 무료함이나 난해함을, ‘기분 나쁜 느낌을 느끼게 하지 못하는 것은 책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사람을 몰아넣지 않고 안이하게 진행된 책이 과연 읽을 가치가 있는 것인지 어떤지. 그런 책을 읽는 것보다는 카프카의 무의식에 자신의 무의식을 비춰보고 자신의 무의식과 함께 변혁시키는 위험한 모험을 시작하는 것이 훨씬 더 즐겁지 않을까요.

 

p44. 바로 앞에서 후루이 요시키치도 말했습니다만 니체도, 쇼펜하우어도, 나쓰메 소세키도, 스탕달도, 롤랑 바르트도, 헨리 밀러도, 그리고 마르틴 루터도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책은 적게 읽어라. 많이 읽을 게 아니다.”라고요.

 

다시 말해 책이란 되풀이해서 읽는 것이라는 겁니다. 싫은 느낌이 들어서, 방어 반응이 있어서, 잊어버리니까, 자신의 무의식에 문득 닿는 그 청명한 징조만을 인연으로 삼아 선택한 책을 반복해서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왕왕 대량으로 책을 읽고 그 독서량을 자랑하는 사람은, 똑같은 것이 쓰여 있는 책을 많이 읽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즉 자신은 지를 착취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착취당하는 측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읽은 책의 수를 헤아리는 시점에서 이미 끝입니다.

 

p47. 프로이트가 10대 때부터 애독했던 작가에 루트비히 뵈르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수필에 <사흘 만에 독창적인 작가가 되는 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요컨대 사흘간 방에 틀어박혀 생각한 것을 뭐든지 종이에 적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얼핏 보는 것보다 꽤 어려운 일입니다. 뭐든지, 라는 것은 아무리 부끄럽고 보기 흉한 일이라도, 불쾌한 일이라도, 무의하게 느껴지는 일이라도, 쓰기에 괴로운 일이라도 써야 하는 일이니까요. 무의식의 검열과 억압을 떨쳐내어 쓰고, 또 쓰고 마구 써대고 있으면 뭔가가 보이게 됩니다. 마치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 같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반대입니다. 자동기술이 정신분석의 영향 하에 있고 그 정신분석이 뵈르네의 방법에 기반하고 있으니까요.

 

p48. 리처드 엘먼의 방대한 전기에 확실히 쓰여 있는데, 제임스 조이스는 자신이 프로이트와 이름이 같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환희또는 향락이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 두 남자가, 과장해서 말하자면 세계를 바꾼 것입니다. 아니, 과장이 아닙니다.

 

p50. 그런데 모더니즘 작가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사람은 버지니아 울프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프로이트의 영어 표준판을 낸 제임스 스트레이치는 버지니아 울프에게 구혼한 적이 있는 작가이자 비평가인 리튼 스트레이치의 동생입니다. 또 표준판을 출판한 호가스 출판사는 울프 부부가 세운 출판사입니다.

 

p52. 최후에는 고독한 싸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 정도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 수필의 제목이 뭐일 것 같습니까? ‘그 책이란 무슨 책이라고 생각합니까? <로빈슨 크루소>입니다. ‘로빈슨 크루소라는 제목의 책에 대해 쓴 수필입니다. 여기서 그런 소년소녀용의 낡아빠진 책에 대해 뭘 그렇게 정색을 하느냐고 버지니아 울프에게 반문하는 사람이 있다면 반성해야 합니다.

 

p53. 로빈슨은 해변에서 발자국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놀랍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는 건가? 아니, 내 발자국인지도 모른다. 나는 우스꽝스럽게 자신의 발자국에 겁먹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음 날 또 그 장소에 가봤더니 발자국은 말끔히 지워져 있습니다. 무슨 일일까요?

이것은 혼자 본 것은 사실 본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p55. 다시 한 번 버지니아 울프의 말을 인용해보겠습니다. 그녀는 무서운 사람입니다. 시원시원하게 이런 말을 써버리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바람직하다 하더라도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독서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것(독서) 자체가 즐거워서 그것(독서)을 하는 즐거움은 세상에 없는 걸까요? 목적 자체인 즐거움이라는 건 없는 걸까요? 독서는 그런 것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요?

 

적어도 나는 때로 다음과 같은 꿈을 꿉니다. 최후 심판의 날 아침, 위대한 정복자, 법률가, 정치가 들이 그들의 보답 보석으로 꾸민 관, 월계관, 불멸의 대리석에 영원히 새겨진 이름 등-을 받으러 왔을 때 신은 우리가 옆구리에 책을 끼고 오는 것을 보시고 사도 베드로에게 얼굴을 돌리고 선망의 마음을 담아 이렇게 말하시겠지요. “, 이 사람들은 보답이 필요 없어. 그들에게 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사람들은 책 읽는 걸 좋아하니까.”

 

p57. 애초에 문학이란 무엇인가. ......프랑스어로 되었던, 당초에 이것은 먼저 쓰는 것, 쓰는 방법 그리고 읽고 쓰는 데 필요한 문학적 학식 일반을 의미했습니다. 다음으로 어떤 문제에 대해 공간된 저작의 총체를 의미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문헌이나 서지에 가깝겠지요.

 

예컨대 페스트에 대해서는 방대한 문학이 있다라는 용례가 보입니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의미에서의 문학’, 즉 아름답다거나 오락을 위한 언어예술 작품으로서의 문학이라는 의미는 18세기가 되어야 나타납니다. 17세기에 출현한 미적인 문학이라는 의미를 갖는 벨 레트르라는 어휘도 있습니다.

 

p57. 좀 더 분명하게 말하지요. ‘문학이란 읽고 쓰는 기법 일반을 말했습니다.

 

p59. 라틴어의 용례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다음과 같은 것이 밝혀집니다. 즉 문학이란 성전을 읽고, 성전을 편찬하고, 또 그것에 대한 주석을, 신학서를 쓰는 기법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아주 초기의 그리스도교에서 라틴어의 문학이라는 어휘가 사용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원칙적으로 성전을 읽고 쓰고 번역하고 편찬하는 기법을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법이나 규범, 제도와 관련된 텍스트를 둘러싼 기예도 문학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문학이라 부르는 것이 현실에서 얼마나 협애한 것인지,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문학이라 부르는 것이 실제로는 얼마나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지 아시겠지요.

 

p61. 그러나 역시 글을 쓴다는 것은 일종의 광기를 내포하고 있고, 따라서 기묘한 방황과 열광과 열락을 내포하며, 그리고 신도 선망하게 하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녀가 말하는 대로 말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아직도 문학이라 불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더 넓은 의미에서. = 정보로서의 문학, 회태로서의 문학, 그리고 세계를 변혁하는 것으로서의 문학. 따라서 끝을 모르는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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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3-11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들 ㅡ잘 읽고 갑니다.^^

시이소오 2016-03-11 10:34   좋아요 1 | URL
방문해주셔 감사합니다^^

[그장소] 2016-03-11 10:36   좋아요 0 | URL
흐흣~^^
별 말씀을 요!^^
저만 썰렁하게 느끼는 중일까요? 안보이는 분들 많은것 같은건 ㅡ (있는 분들도 못챙기면서 !^^;)


시이소오 2016-03-11 10:38   좋아요 1 | URL
그런가요? 아직 저는 북플 새내기라 잘 모르겠어요 ㅋ^^;

[그장소] 2016-03-11 10:39   좋아요 0 | URL
아..핡 ㅡ저...저도..새내기입니다~일년 버틴!새내기!^^

시이소오 2016-03-11 10:41   좋아요 1 | URL
저는 이제 2개월 정도요^*;

[그장소] 2016-03-11 10:50   좋아요 0 | URL
일년 ㅡ금방 갑니다~!뭐했나 ㅡ싶으면 지나간 시간이네요...!2개월 ..시작이 반 ㅡㅎㅎㅎ
응원 놓고 갑니다!^^

시이소오 2016-03-11 11:10   좋아요 1 | URL
아, 그런가요?
1년 후에 `그장소`님 얼마나 따라잡을지 궁금하네요. ㅋ^^

[그장소] 2016-03-11 11:12   좋아요 0 | URL
음 ㅡ얼마든지 ㅡ내공이 있으실테니..원체 많이 읽으시기도 하잖아요!^^

시이소오 2016-03-11 11:15   좋아요 1 | URL
이거 왠지 제논의 역설과 비슷해지는건 아닐지 ㅋ
죽어도 못 따라잡는 ^^;

[그장소] 2016-03-11 11:31   좋아요 0 | URL
아ㅡ별 ...별 ㅡ말씀을 ..
제가 미칠듯한 연애에 빠져 책을 놓지 않는한 ㅡ아니면 영혼의 책이다 싶은 단 한권을 찾았어ㅡ하는 경우가 아니면..놓을일은 없겠지만 ㅡ그래도 갈지자 다이아모드 스텝이라 ㅡ잘 꼬이고 넘어져서 ..충분히 따라오실걸로..!!!

시이소오 2016-03-11 11:41   좋아요 1 | URL
10년 후를 내다보고 갑니다^^

[그장소] 2016-03-11 12:31   좋아요 0 | URL
음 ㅡ지금도 그때도 ㅡ저는 살아있다면! (응?~사람일은 모르는 것이므로)
엉뚱한 놀이에 빠져 있길 ㅡ바라는 중입니다.
책에서 빠져 나가야 ..사람노릇을 할테니..저의 경우 !^^;
응원은 공짜니..많이 놓고 갑니다.^^

시이소오 2016-03-11 12:38   좋아요 1 | URL
저도 책에서 빠져나가야 사람노릇을 할텐데... 응원 감사합니다^^

[그장소] 2016-03-11 12:45   좋아요 1 | URL
좀전에 읽은 토픽 ㅡ글
짧은 한줄로 심금울리기 ㅡ에...
사람들이 넘 감동하길래 뭔가 하고 봤더니..경기대 헤밍웨이 ㅡ라는 ...
그 문제의 한 줄은..

크리스마스에 (경기대 도서관)열람실여나요?
.
.
.
왕~왕~왕~~~( BGM은 자동)~
ㅋㅋㅋ
우리 크리스마쓰에도 책읽어요..쭉~~~~!!^^

시이소오 2016-03-11 13:28   좋아요 1 | URL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 놀아야죠 ㅋ^^

[그장소] 2016-03-11 13:54   좋아요 1 | URL
그러니 ㅡ오죽하면 ㅡ이래저래 눈물 빼는 글로 등극을 했겠어요...저는 혼자도 별 개의치 않는 주의 입니다만~^^

oren 2016-03-11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까, 몇십 분 전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다뉴브강의 잔물결》을 들으면서, 문득 작년 봄에 가봤던 프라하와 블타바 강과 프라하 성과, 그리고 (그의 흔적조차 전혀 발견하지 못했던) 카프카를 잠시 떠올렸었답니다. 그토록 아름다운 도시에 살았으면서도 왜 카프카는 <성>이나 <소송> 혹은 <굴>과 같은 어둡고도 답답한 소설들만 썼을까 싶은 의문도 다시금 떠올려보면서 말이지요. 그런데 카프카가 ˝초조해 하는 것은 죄다˝라는 말을 했다니 그 말의 진의가 도대체 무엇이었는지도 궁금합니다. 그가 자신의 소설 속에서 보여줬던 온갖 `아득한 미해결 상태`와 `압박`과 `불안`과 `초조` 조차도 결국 모두 다 `탈출`에 실패했기 때문에 결국 (저 말에 따르면) `유죄`로 귀결되고 마는가 싶은, 어설픈 비약까지도 해보게 되구요.

그리고, 전혀 뜻밖에도, `버지니아 울프가 학교에서 낭독했던 과제물 이야기`를 여기서 다시 마주친 것도 반갑습니다. 비록 그녀가 쓴 소설은 단 한 권도 읽어보지 못했지만 말이지요.^^

* * *

드 베리는 아주 열정적으로 책을 수집했다. 그가 소장한 책은 영국의 다른 주교들의 책을 다 합한 것보다 더 많았다. 그 책들을 침대 주변에 쌓아 두었기 때문에 책을 밟지 않고 그의 방으로 들어가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 행운을 감사하게 여겼던 드 베리는 학자는 아니었다.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읽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이 아닌 것을 그의 것이라 이야기했고 형편없는 시구를 인용하면서도 마치 오비디우스의 시구인 양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책에서는 죽은 사람들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책에서 나는 앞으로 다가올 일들을 예견한다. 책에는 전쟁을 암시하는 전조들이 설명되며 평화의 법도 나온다. 모든 존재들은 결국에는 부패하고 썩게 마련이다. 농경의 신 사투르누스는 자신이 낳은 아이들을 삼키는 일을 그만두지 않으며, 신이 인간에게 책이라는 치유법을 내리지 않았다면 이 세상의 모든 영광은 망각 속으로 파묻혀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버지니아 울프도 학교에서 낭독한 한 과제물에서 드 베리의 주장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간혹 이런 꿈을 꿀 때가 있다. 최후의 심판일이 동터 오고 위대한 정복자들과 변호사들과 정치인들이 각자의 대가-불멸의 대리석에 지워지지 않게 새겨진 그들의 왕관과 월계수와 이름-를 받게 된다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은 베드로 쪽으로 몸을 돌리고는, 우리가 겨드랑이에 책을 끼고 오는 모습을 지켜볼 때의 그런 질투심으로 `이봐, 이들에게는 포상이 필요없어. 그들에겐 줄 것이 없어. 그들은 책 읽기를 사랑하잖아` 라고 말할 것이다.˝)

- 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

시이소오 2016-03-11 11:58   좋아요 2 | URL
책 읽기를 사랑하시는 오렌님껜 아무것도 드릴께없네요^^

니페딘1T 2018-04-04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이미 리뷰가 다 되어 있었네요!!! 역시!!!

이 책 너무 잼나지 않나요? ㅎㅎㅎ

이 책보고 똑같이 따라하면.... 출판사는 다 문 닫겠죠? ㅋㅋ

시이소오 2018-04-04 09:56   좋아요 0 | URL
말씀대로 넘 재밌게 읽었어요. 이건 리뷰라기보단 필사??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