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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에 대하여 - 다니자키 준이치로 산문선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고운기 옮김 / 눌와 / 2005년 12월
평점 :
만일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1968년까지 살아 있었다면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제치고 노벨상을 받았을 거라는데, 그 정도의 작가였단 말인가?
원제는 ‘음예예찬’인데 옮긴이는 한국인들의 무지를 걱정하셔 ‘그늘에 대하여’로 옮기셨다. ‘교토 문학’이라 불리는 장르가 있을까마는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다분히 ‘교토적’이다. 고풍스럽고도 고즈넉한 풍미를 띤다고 해야 할까. 번역 역시 그런 맛을 잘 살린 듯싶다. 그것이 물리적이든 심리적이든 어둠을 다루는 일본 소설가들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음예예찬>을 가이드로 삼는 걸까. 최근에 읽은 히라노 게이치로의 <형태뿐인 사랑>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에서도 이 작품을 언급했다.
‘음예’란 ‘그늘인 듯한데 그늘도 아니고 그림자인 듯한데 그림자도 아닌 거무스름한 모습’이라고 한다. 한자로는 ‘현(玄)’, 한글로는 ‘가물거리는 것’에 가까운 것일까.
준이치로가 보기에 어둠은 무서운 정서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반면 온화함을 느끼게도 해준다. ‘반짝반짝 광택이 나는 것’이 서양의 미라면 반면 동양의 미는 ‘그을음이나 비바람의 더러움이 붙어 있는 것’을 중시한다.
영화판에서 번쩍번쩍 하는 미술을 하기는 쉽다. 그냥 돈 주고 사서 갖다 놓기만 하면 된다. 반면 사물에 세월을 담으려면 많은 시간과 아티스트의 내공이 쌓여야만 가능하다. 서양에서도 어둠을 온화함과 연결시키기도 할까? 한마디로 ‘간지’는 그저 돈 주고 살 수 없다. 카라바조 회화속의 어둠에도 여러 어둠이 있다고는 하지만 온화함의 정서가 느껴지지는 않는 듯싶다. 음예란 일종의 ‘양갱의 빛깔 같은 것’?
“소세키 선생은 <풀베개>에서 양갱의 빛을 찬미한 적이 있는데, 말하자면 양갱의 빛깔 역시 명상적이 아닐까. 옥처럼 반투명의 흐린 표면이 속까지 햇빛을 빨아들여서 꿈꾸듯 발그스레함을 머금고 있는 느낌, 그 색조의 깊음, 복잡함은 서양의 과자에서 절대로 볼 수 없다. 크림 따위는 그것에 비하면 천박하고 단순한 것이다. p29”
(피츠제럴드 흉내를 내기위해 크림색을 남발하는 하루키가 다니자키 준이치로를 읽다니!
여기서 퀴즈. 그렇다면 하루키는 어두운 색은 어떻게 표현했을까요??
.....
정답 : 초콜릿 무스.
아, 오글거려. 잠시 자판에서 두 손 띄고 있었다는)
후대의 일본 작가들이 <음예예찬>에서 배우고자 한 어둠은 아마도 ‘눈에 보이는 어둠’이 아니었을까
“그런 어둠 가운데 특히 실내의 ‘눈에 보이는 어둠’은, 무엇인가 아물아물 아지랑이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환상을 일으키기 쉽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집 밖의 어둠보다 더한 맛이 있다. 도깨비나 요괴가 날뛰는 것은 아마도 이런 어둠이겠지만, 그 안에 깊을 장막을 드리우고, 병풍이나 맹장지를 몇 겹이나 에워싸고 살고 있는 여자라는 것도 역시 그 도깨비의 무리가 아니었을까. 어둠은 그 여자들을 열 겹 열두 겹으로 둘러싸고, 옷깃이나 소맷부리나 옷단의 맞춤선이 다다르는 곳의 빈틈을 메우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거꾸로 그녀들의 몸에서, 그 이를 색칠한 입속이나 검은 머리끝에서, 땅거미가 뱉는 거미줄처럼 어둠이 내뱉어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p57
이 책에는 ‘음예예찬’외에도 다섯 편의 준이치로의 산문이 실려 있는데, <손님을 싫어함>이란 글에서 예상외로 포복절도하고 말았다. 과학자 데라다 도라히코는 고양이에게 꼬리가 왜 있는지 모르겠고 전혀 쓸모없는 물건이어서 인간에게 꼬리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반면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자신에게도 고양이 꼬리같은 ‘편리한 물건’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꼬리가 편리하다고?? 주인이 부르면 잠든 것처럼 보이는 고양이는 꼬리 끝만 살랑 흔든다. 한 번 더 부르면 또 살랑 흔든다. 그러나, 집요하게 계속 부르면 더 이상 흔들지 않는다.
“.....꼬리를 가지고 하는 대답의 방법으로는 일종의 미묘한 표현이 깃들어 있어서, 소리를 내는 것은 귀찮지만 묵묵히 있는 것도 너무 무정하므로, 슬쩍 이런 방법으로 인사해 두자는 듯한, 그리고 또 불러주는 것은 고맙지만 실은 자기는 자고 있으므로 참아 주지 않으시려오, 하는 듯한, 뺀들거리는 듯하나 붙임성 있는 복잡한 기분을 그 간단한 동작으로 매우 교묘하게 나타내는 것인데....”
그렇다면 준이치로는 언제 꼬리를 흔들고 싶은 것일까. 예를 들어 펜을 쥐고 창작이나 사색을 하려하는데 돌연 와이프가 들어와 자질구레한 하소연을 할 때. 이럴 때 꼬리 두 세 번 흔들어 주고 계속 글을 쓰고 싶다고.
공감 백만배. 울 와이프가 "책 좀 그만 읽고 좀 자라 자. "
이럴 때 꼬리한 번 살랑 흔들어주고 계속 책을 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혹은 이런 경우. 그런 사람들 꼭 있다. 분명 얘기 한 말 인데 또 다시 반복하는 사람. 그럴 때마다 참 난감하다.
“저기 지난번에 한 말인데, 그만 하면 안 될까? 재미도 없고 지루하거든”
이럴 순 없지 않은가. 아, 이럴 때 꼬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꼬리 끝만 두세 번 살랑살랑 흔들어주고 싶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원치 않은 손님을 상대해야 할 경우에 ‘상상의 꼬리’를 흔들기도 한단다.
“그래서 ”예“라거나 ”음“이라거나 말하는 대신에, 상상의 꼬리를 흔들어 그것만으로 넘어가 버리는 적도 있다. 고양이 꼬리와 달리 상상의 꼬리는 상대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유감이지만, 그래도 내 마음에서는 그것을 흔드는 것이 흔들지 않는 것과 얼마만큼 다르다. 상대방으로서는 알지 못해도, 나로서는 이것을 흔듦으로써 응답만은 하고 있는 셈인 것이다.” p147
아, 상대방이 알지도 못하는데 상상의 꼬리를 천만번 흔들면 뭐할 것인가?
나는 그저 호감 가는 이성을 만났을 때 상상의 꼬리를 천만번 흔들어줘야지.
(그 사람은 모르겠지만, 혹은 알아도 안 되지만) 상상의 꼬리를 흔드는 것과 흔들지 않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고 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