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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평점 :
읽어야 했으나 읽지 못한 한국 소설이 있다면? 여러 대하소설들이 머릿속을 스쳐가지만 장편 소설 한권을 뽑으라면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역시나 재밌군. 역시 박민규야’, 하고 읽어 갔다. 책을 덮고 나서는 만족감보다는 위화감이 들었다. 왜일까? 위가 꼬이는 듯한 느낌의 이유는 뭘까?
작가로서의 톨스토이는 경배하지만 인간으로서의 톨스토이는 경멸한다. 톨스토이는 ‘인류에 대한 사랑’
을 외치지만 자신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았다. 박민규 역시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을까? 박민규는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면서 ‘못생긴 여자에 대한 사랑’을 그린다. 그렇다면 작가는 못 생긴 여자를 사랑했었나? 혹은 사랑할 것인가?
“세상의 모든 남자와 마찬가지로 저는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 또 결코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을 한다 해도 잔인한 진실은 변하지 않는 법이니까요.”
- p415. 작가 후기.
작가의 고백대로 박민규는 못 생긴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작가가 그린 소설속의 주인공은 왜 못 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걸까. 못 생긴 여자를 사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조차 진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야기를 소설로 형상화하는 게 과연 작가로서 할 짓인가? 작가는 자신의 주인공에 눈곱만큼도 감정이입하지 않는다. 그런데 독자인 우리(특히나 남성 독자)가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할 수 있을까.
‘나’가 못 생긴 여자를 사랑하게 된 동기가 있나?
.....없다. 물론 박민규는 잘생긴 아빠에게 버림받은 못생긴 엄마라는 밑밥을 깔긴 하지만, 그렇다고 “못 생긴 여자들을 봐왔지만 나는 그녀처럼 못 생긴 여자를 본 적이 없었다”고 말할 만큼의 ‘국가대표급 못 생긴 여자’를 사랑할 수 있을까?
핍진성이 없다. 전혀 그럴듯하지 않다, 는 말이다. 아무리 판타지라도 작가가 창조한 세계 안에서 이야기는 납득 가능해야 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판타지도 아니다.
영리하다고 해야할지, 비열하다고 해야할지.
“눈을 맞으며 그녀는 서 있었다”
소설의 첫 문장이다. 나는 첫눈이 오는 날 그녀를 만난다.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을 듯 포근히 내리는 눈, 반짝이는 <산토리니>의 크리스마스 조명 불빛, 벽난로에서 장작은 타닥타닥 타오르고, 빙 크로스비의 캐롤 송, 미술에 해박한 가느다란 목소리의 그녀......
독자에게 청순하고 지적인 그녀의 이미지를 각인시켜 놓고, 박민규는 3장에서야 ‘그녀는 못 생겼다’고 말한다. 어떻게 못 생겼는데? 알 수 없다. 독자인 우리는 ‘못 생긴 그녀’를 상상할 수 없다.
못 생긴 여자를 호의로 만날 수도, 동정으로 만날 수도, 연민으로 만날 수는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사랑으로 만날 수는 없다. 그건 작가가 말했듯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잔인한 진실’이다.
“이 포크를 봐. 앞에 세 개의 창이 있어 하나는 동정이고 하나는 호의, 나머지 하나는 연민이야. 지금 너의 마음은 포크의 손잡이를 쥔 손과 같은 거지. 봐, 이렇게 찔렀을 때 그래서 모호해지는 거야. 과연 어떤 창이 맨 먼저 대상을 파고 들었는지.....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하나의 창을 더듬어보게 돼. 손잡이를 쥔 손은 여전히 그 무엇도 알 수가 없는 거지. 알아? 적어도 세 개의 창 중에서 하나는 사랑이어야 해. ”
p122.
여성 독자의 절대적 지지를 얻은 박민규의 이 소설을 까는 건 짚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짓이라는걸 나도 안다. (여성 이웃분들의 반응이 두려워라.) 그러나, 아닌 건 아닌 것이다. 여성 독자의 호감을 사기위해, 작가조차 진실이라 생각하지 않는 이야기를 진실인 듯 위장했다면 그건 위로기는커녕 경멸이고 능욕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온통 거짓이다. 위선이고 위악이다. 따라서 주인공 ‘나’와 ‘나’가 사랑하는 이름도 없는 ‘못 생긴 여자’의 캐릭터는 흐릿하거나 전형적이다. 이 소설을 유일하게 지탱해준 인물은 요한이다. 요한 빼고 이 소설을 끝까지 읽을 수 있겠는가? 그런 요한이 중반부터 중언부언한다. 전반부의 재기넘치던 요한은 온데간데없고 잔소리만 늘어놓는 노땅 요한이 등장한다. 그러자 박민규는 요한을 빼는 결정을 내린다. 그 결과 요한이 증발한 중반부터 이 소설은 급격히 무너지고 만다.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더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러워하지 않는
당신 <자신>의 얼굴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 p 418
작가가 생략한 문장을 되살리면,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못생긴 여자를, 나는 못하지만“이 아닐까.
아무리 아름다운 문체로 씌여졌다한들 거짓된 작품이 감동을 줄 순 없다. 다나베 세이코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감동적이다. 장애를 지닌 조제에게서 도망치는 츠네오. 이런 츠네오를 욕할 자 누구인가? 조제를 떠날 수밖에 없는 츠네오의 심리에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 조제와 츠네오의 이별은 그래서 더 더욱 안타까운 게 아니었을까.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애초에 늪 위에 박은 말뚝이었다.
중반부터 무너져 내린 소설은 결론에서 완전히 붕괴하고 만다.
“이 글은 독립된 이야기로도, 서로 연결된 하나의 이야기로 볼 수 있는 두 개의 결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두 개, 혹은 세 개의 이야기를 저는 겨우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당신의 이야기입니다.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당신이, 스스로의 이야기에서 성공한 작가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 p 418
.....장난, 지금, 하는 거냐, 나랑!
정말로 박민규는 독자를 ‘성공한 작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따위 결론을 내민 걸까?
거짓말이다.
박민규는 작가로서의 책임을 방기한 채
결론을 독자에게 떠넘겨 놓고 구차하게 핑계를 댄 것뿐이다.
이 소설을 수식으로 정리해볼까?
<노르웨이의 숲> + <러브 레터> + 못 생긴 여자 - 섹스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사랑하라고?
너나 사랑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