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스의 종말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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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재 발명되어야 하는데.....

안락한 자리만을 바라지.

그런 자리를 차지하고 나면

마음은,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말지.“

 

- 랭보, <지옥에서 보낸 한철>

 

강신주, 이상용의 <삼십금 쌍담의 인트로>는 랭보의 시로부터 시작한다. 이 책 <에로스의 종말>의 서문은 알랭 바디우가 썼다. 서문의 제목은 <사랑의 재 발명>이다. 알랭 바디우에 따르면 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사랑을 재 발명하기 위한 투쟁이다.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상품으로 전시하고 구경거리로 만듦으로써 사회의 포르노화 경향을 강화한다. 자본주의는 성애의 다른 용법을 알지 못한다. 에로스는 포르노로 비속화된다.”

 

한병철은 <피로사회>, <투명사회>, <심리정치>에 이어 <에로스의 종말>에서도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인간의 사물화 경향을 고발한다. 무엇이 에로틱한가? 감추어진 것, 베일에 싸인 것, 무언가 미지의 것,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 비밀스러운 것, 금기를 위반하는 것, 위험을 동반하는 것, 등이 아닐까.

 

보통의 포르노그래피는 질투를 미화해. 괴로움을 제거해버리지. 뭐가 미화할까 aestheticizing? 왜 마취하지 anesthetizing않을까?” 글쎄, 어쩌면 둘 다겠지. 그건 대신하는 거야. 보통의 포르노그래피는 타락한 예술 형식이야. 그것은 진짜인 체할 뿐 아니라 노골적으로 진실을 버려. 포르노 영화에 나오는 여자를 원하지만 누가 그 여자와 씹을 하든 그 사람이 자신의 대리가 되기 때문에 질투는 일어나지 않아. 아주 놀랍지만 그게 심지어 타락한 예술의 힘이야.

 

그 사람은 대역이 되어, 그렇게 보는 사람에게 봉사를 하는 거야. 그것이 가시를 제거해서 영화를 즐길 만한 것으로 바꾸는 거야. 보는 사람이 그 행위의 보이지 않는 공모자이기 때문에 보통의 포르노그래피에서는 괴로움이 제거되는 반면 내 포르노그래피에서는 괴로움이 그대로 유지돼. 나의 포르노그래피에서는 신물날 정도로 자신을 잔뜩 채운 사람이나 얻는 사람이 아니라, 얻지 못하는 사람, 잃는 사람, 잃어버린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니까.

 

- 필립 로스, <죽어가는 짐승>

 

반면 포르노에선 모든 것이 낱낱이 적나라하게 전시된다. 포르노에서 타자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다. 우리는 ‘구경거리를 단지 소비할 뿐이다. 신자유주의는 사회를, 인간을 포르노 화시킨다. 점점 더 나르시시트가 되어가는 성과주체는 사랑 (에로스)을 두려워한다. 상처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자아를 파괴하고 해체하는 부정성이다. 내가 사랑하는 타인은 동일자의 지옥에 끌려오지 않는다.

  

플라톤에 따르면 에로스는 영혼을 조정한다. 에로스는 영혼의 모든 부분, 즉 충동, 용기, 이성을 전반적으로 지배한다. 영혼의 모든 부분은 각자 자기 나름의 쾌락 경험을 지니며, 아름다움을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한다.

 

한병철이 사랑을 에로스로 표현한 것은 그것이 충동이자 용기이며 이성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타자는 소비되지 않는다. 타자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내 자아가 깨지고 무너지고 파편화하고 심지어 죽음에 이를지라도. 또한 에로스는 사유를 촉발한다. 에로스 없는 로고스는 공허할 뿐이다.

 

하이데거가 아내에게 보낸 한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타자, 즉 당신에 대한 사랑과도, 그리고 다른 면에서 나의 사유와도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이것이 무엇인지는 말하기 어렵소. 나는 그것을 에로스라고 부르는데, 파르메니데스의 말에 따르면 가장 오래된 신인 에로스의 날개짓은 내가 사유에서 중대한 일보를 내디디며 전인미답의 지대로의 모험을 감행할 때마다 나를 건드린다오.

 

에로스는 우리로 하여금 전인미답의 지대로의 모험을 감행케하는 것이다. <옆집의 나르시시스트>에 의하면, 오늘날 나르시시트들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 한병철에 따르면 그게 포르노다. 나르시시스트에게 타인은 그저 수단에 불과하다. 우리는 거울속의 자신의 얼굴(face)가 아니라 타인의 얼굴(visage)을 바라봐야 한다.

 

신자유주의는 특히 에로스를 성애와 포르노그래피로 대체함으로써 사회의 전반적인 탈정치화를 초래한다. 신자유주의의 토대는 충동이다. 각자 고립되어 있는 성과주체들로 이루어진 피로사회에서는 용기도 완전히 불구화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동의 행위는 불가능해진다. 집단적 주체로서의 우리는 성립할 수 없다.

 

바디우는 정치와 사랑의 직접적 결합을 부정하지만, 정치적 이념의 기치 아래 실천과 참여로 점철된 삶과 사랑 특유의 강렬함 사이에는 신비로운 공명같은 것이 있다고 본다. 이들은 마치 그 소리와 힘에서는 완전히 상이한 두 악기가 위대한 음악가에 의해 하나의 곡 속에 합쳐져서 신비로운 어울림을 만들어내는 것같다. 다른 삶의 형식, 다른 세계, 더 정의로운 세계에 대한 공동의 욕망에서 나오는 정치적 행위는 어떤 심층적 차원에서 에로스와 상관관계를 이룬다. 에로스는 정치적 저항의 에너지원이다.

 

신자유주의는 사랑을 포르노로 속화시킨다. 나르시시즘에 빠진 개인은 사랑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만을 소진시키고 소비하고, 포르노 화 할뿐이다. 에로스를 회복할 때에야 우리는 타인과 신비로운 공명을 이룰 수 있을 것이며, 타인과 연대를 통해 시스템에 저항할 수 있을 것이고, 신자유주의의 동일자의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상처받기 싫어 사랑하지 않겠다? 자신을 포르노 화시키는 짓이다.

바타이유에 따르면, 에로티즘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삶을 긍정하는 것이다.


죽어도 좋아야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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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당살롱 2016-05-27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몇 번이나 반복하며 읽었어요.
늘 그랬지만
감탄과 희열을 느낍니다.
질투날 정도로 이해가고 설득됩니다.
와....

시이소오 2016-05-27 15:16   좋아요 0 | URL
한병철 교수 책을 읽다보면
저 역시 희열을 느껴요^^

우민(愚民)ngs01 2016-05-27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다라는 말도 생각나네요

시이소오 2016-05-28 08:03   좋아요 0 | URL
아, 사랑은 머리로 계산하는 게 아니라 그냥 하는 것이죠. ^^

Classicolor 2016-06-08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 정말 읽어보고 싶네요! 좋은 리뷰 감사드립니다.

시이소오 2016-06-08 17:31   좋아요 0 | URL
오,리뷰쓴 보람이 있네요
감사합니다 ^^

초란공 2016-09-19 0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가만히 읽고 보니 카치아피카스가 <한국의 민중봉기>에서 20세기 파리코뮌이라고 평가한 광주민주항쟁에서 보인 사람들의 행동을 `에로스 효과`라고 명명한 것이 아무렇게나 지은 이름이 아니구나라는 엉뚱한 생각을 해봅니다.^^

시이소오 2016-09-19 12:39   좋아요 0 | URL
카치아피카스의책을 읽어보진 못했습니다만 에로스 효과란 명명은 충분히 적절하다고 보여지네요 ^^

아라치 2022-05-20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어려운 책이 정리가 되네요. 읽었는데 도대체 이해가 안되는 책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