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1. 그는 누구보다 안토니오 그람시로부터 이론을 배웠고 가장 큰 영향을 받았으며 나중에는 주로 게오르그 짐멜로부터, 특히 그의 갈등 이론보다는 ‘정신적 삶Geistesleben’에 대한 개념과 그의 생철학Lebensphliolsophie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독일인의 이 생철학 – 니체보다는 루트비히 클라게스와 에두아르트 슈프랑거의 생철학 – 특히 그의 ‘삶의 형식Lebesformen’ 개념은 바우만에게 많은 이론적 주제와 이론화의 형식들을 제공했다.
p12. 바우만이 그려내는 사고의 지도 위에서 우리는 그람시와 짐멜의 철학 또는 사회학적 견해들뿐만 아니라 그가 경애하는 철학자인 엠마뉘엘 레비나스의 윤리적 통찰들을 발견할 수 있다. 리투아니아 카우나스에서 태어나 성장했으며, 바우만에 따르면 20세기 최고의 윤리학자인 레비나스의 통찰들은 타자의 인격과 존엄을 인정하고 나아가 그의 생명을 구하기까지 하는 기적에 관련되어 있다.
나아가 그는 사회학이 소설과 마찬가지로 인간 경험에 대한 이야기이며,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소설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라고 말했다.
p13. 비타우타스 카볼리스는 사회학과 사회과학 전반이 ‘멜로디를 잃은 분야’라고 생각하지만, 바우만은 이와는 반대 사례이다. 그의 사회학은 음향을 방출하고, 당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기도 한다. 이것은 윤리적인 응시이다. 당신은 눈을 돌리며 응답을 회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심리적으로 탐색하는 시선이나 주위의 물체들을 흡수하는 – 소비하는 – 시선과 달리 바우만의 시선은 윤리적 거울의 원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p14. 바우만은 보는 자를 보고 생각하는 자를 생각하며 말하는 자에게 말한다.
바우만 이론의 핵심 개념인 ‘유동적 근대 liquid modernity’에 대해 그는 <액체 근대> 2012년판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특징짓는다. “한때 ‘탈근대’라고 (그릇되게) 일컬어진 그리고 내가 더 명료하게 ‘유동적 근대’라고 부르기로 선택한 것은 변화만이 불변한다는, 불확실만이 확실하다는 점에 대한 점증하는 확신이다. 백 년 전에 ‘근대적이다’라는 말은 ‘완벽의 최종 상태’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제 이것은 ‘최종 상태’가 보이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은 향상의 무한성을 의미한다.
p15. 이들의 일대기는 근대 경제 구조의 – 굳이 이름 붙이자면 자본주의의 – 개척자들, 기업가들, 초기 근대 미술의 천재들 등의 일대기가 아니라 화형에 처해진 이단자이자 이탈리아 역사학자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 – 16세기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메노키오 같은 사람들의 일대기이다. 역사의 드라마에 등장하는 이런 말 없는 단역배우들은 우리 자신이 경험하는 불안, 애매함, 불확실, 불안정 등에 실체와 형태를 부여하고 있다.
p18. 기술은 당신이 방관자로 있는 것을 허용치 않을 것이다. “나는 할 수 있다.”는 “나는 해야만 한다.”로 변질된다. 나는 할 수 있다. 고로 나는 해야만 한다. 딜레마는 허용되지 않는다.
p19. 한편으로 인간의 고통에 대한 불감증과 다른 한편으로 개인의 비밀을, 즉 이야기하거나 공표하지 말아야 할 것을 없앰으로써 사생활을 식민지화하려는 욕망은 새로운 악의 두 가지 표현 형태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일대기, 내밀한 이야기, 삶과 경험 등이 전 세계적으로 이용되는 것은 무감각과 무의미의 한 증상이다.
p21. 악의 상징적 지리학은 정치체제의 경계선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것은 심리 상태, 문화, 민족성, 사고방식, 의식의 경향 등에 스며들어 있다.
악은 평범한 이웃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악은 전쟁이나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오늘날 악은 누군가의 고통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할 때, 타인에 대한 이해를 거부할 때, 말 없는 윤리적 시선을 외면하는 눈길과 무감각 속에서 더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
P24. 이것은 자신이 의무를 이행하는 도덕적 인간이라는 점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으면서 어느 낯선 사람의 삶을 파괴하는 것은 새로운 형태의 악, 유동적 근대에 존재하는 눈에 띄지 않는 모습의 사악함이다.
...... 이런 자에게는 통계가 실제 인간의 삶보다 더 중요하며, 설령 그가 인류를 위해 발언한다 해도 그에게는 한 국가의 크기와 정치, 경제적 권력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개인적인 것은 없으며 그저 사업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유동적 근대의 새로운 사탄이다.
...이 유동적 근대가 평범함으로 변모시킨 것은 무력한 선이 아니라 악 자체이다. 오늘날 가장 불쾌하고 충격적인 진실은 악이 연약하고 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이것은 우리가 철학자, 문학가의 저작을 통해 알던 악마나 악령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악은 강력하지 않으며 널리 흩어져 있다. 불행하게도, 슬픈 진실은 이것이 정상적이고 건강한 모든 인간에게 잠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가장 심각한 것은 우리 모두에게 내재하는 악의 잠재력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 문화, 인간관계 등으로도 이런 상황과 사정을 멈출 수 없다는 점이다. 악은 허약함의 가면을 쓰고 있으며 동시에 허약함이기도 하다.
악이 분명한 형태를 띠고 있던 시대는 운이 좋았다. 오늘날 우리는 악이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지 더 이상 알지 못한다. 사람들이 기억하고 보고 느끼는 능력을 상실할 때 이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타자를 일부러 잊는 것, 우리 곁에서 살아 있고 실재하며 무언가 옳은 것을 하거나 말하는 사람을 물리침으로써 우리와 다른 종류의 인간을 인지하고 인정하기를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우리의 새로운 정신적 장벽이다.
P26. 검열의 새로운 형태들은 인터넷에서 발견되는 가학적이고 서로를 잡아먹을 듯한 언어와 아주 기묘하게 공존하고 있는데, 이런 언어는 특히 익명 댓글에서 언어적으로 난무하는 얼굴 없는 증오심, 가상 변소에서 태연하게 싸지르는 배설물, 비할 데 없이 노골적으로 표출되는 인간적 무감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어두운 시대에 우리의 예민한 지각 능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세계의 위인들뿐 아니라 다수의 단역배우, 통계적 개인, 통계적 단위, 군중, 유권자, 보통 사람, 여러분 등에게도, 즉 기술관료들이 구성한 그 모든 자기 기만적 관념에게도 인간이 존엄하고 본질적으로 불가해하다는 인식을 돌려주어야 한다.
인간에게서 얼굴과 개성을 빼앗는 것은 이민자들이나 상이한 종교적 신념을 지닌 사람들의 존엄성을 짓밟고 주로 그들 안에서 위협을 찾아내려 하는 것만큼이나 사악한 짓이다. 이 악은 ‘정치적 올바름’과 (실제 상황의 희화로 전락하곤 하는) 관료화되고 강제적인 ‘관용’을 통해 극복될 수 없다.
P27. 이 책은 파편화, 원자화, 그리고 그에 따른 감수성의 상실에 대한 실행 가능한 대안으로서 귀속감의 재발견 가능성에 관한 대화이다. 또한 이것은 현재 인류와 인류의 도덕적 상상력의 ‘탈도덕화’가 놓은 덫과 많은 위협에서 탈출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서 새로운 윤리적 전망에 관한 대화이기도 하다.
세계화는 우리가 피신하여 행복을 찾을 수 있는 땅이 아직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마지막 좌절된 희망이다. 또는 무의미, 기준의 상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도덕적 불감증과 감수성의 상실에 맞설 수 있다는 점에서 당신의 세계와 다른 세계가 아직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마지막 좌절된 희망이다.
개인화라는 무감각, 도덕적 고통을 마취하는 소비의 굴레
그러나 고통의 이런 경계, 경고, 예방 기능은 유기적이고 신체적인 현상에서 인간관계의 영역으로 옮겨온 ‘불감증’이라는 관념에 ‘도덕적’이라는 한정사가 붙으면 거의 잊히는 경향이 있다. 만약 인간의 공동생활과 공동체의 생존력에 무슨 문제가 생기려 한다거나 이미 생겼다는, 그래서 무슨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사태가 더 악화될 것이라는 조기 신호를 제때에 탐지하지 못한다면, 위험은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지거나 너무 오랫동안 경시될 것이며 마침내는 공동체의 자기방어를 위한 토대로 작용할 사람들의 상호작용이 피상적이고 형식적이며 허약하고 분열적으로 변하여 못쓰게 되는 사태로 이어질 것이다.
공동체와 달리 네트워크는 개인적으로 조합되고 개편되거나 해체되며, 네트워크의 유일한, 그러나 매우 변덕스러운 기초는 이것을 지속하려는 개인의 의지이다. 그러나 관계는 두 개인이 만나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불감증’해진 개인은 – 즉 어느 타자의 안녕에 대한 책임을 내팽개칠 권한이 있고 또 그러길 원하는 개인은 – 좋든 싫든 동시에 자신의 도덕적 불감증의 대상이 지닌 도덕적 불감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 ‘순수한 관계’는 해방의 상호성보다는 도덕적 불감증의 상호성을 예고한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둘의 모임’은 더 이상 도덕의 온상이 아니다.
유동적 근대사회에서 탈도덕화는 소비자와 상품의 관계를 모범으로 삼아 전개되며, 이것의 효과는 이 관계를 인간 사이의 관계에 얼마나 잘 이식할 수 있는가에 따라 좌우된다.
우리의 모습을 닮은 평범한 악에 관하여
그러나 만약 동유럽에서 근대성의 어두운 면이 합리성과 문명의 허약안 덮개를 파괴하는 절대적으로 비합리적인 힘으로서 관철된다면, 20세기 서유럽 문학에서는 전혀 다른 유형의 근대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즉 그것은 합리적이고 모든 것을 자신에게 복종시키며 익명적이고 비인격화되었으며 인간의 책임과 합리성을 별개의 영역으로 확실하게 분할하고 사회를 원자들로 파편화하며 자신의 초합리성을 통해 자신을 보통 사람들에게 불가해하게 만드는 근대성이다.
요컨대 동유럽에서 근대성의 종말론적 예언자가 미하일 불가코프라면, 중유럽에서 이에 상응하는 인물은 의심의 여지없이 카프카와 로베르트 무질일 것이다.
유동적 시대에 평범한 악은 어떤 모습인가
어떤 면에서 이것은 밀란 쿤데라가 그의 소설 <만남>에서 아나톨 프랑스의 소설 <신들은 목마르다>의 주인공에 관해 이야기 함녀서 강조한 것과 비슷하다. 즉 젊은 화가 가믈랭은 프랑스 대혁명의 열광적 지지자가 되지만, 그는 혁명이나 혁명의 발기자인 자코뱅 당원들과 무관한 상황이나 관계 속에는 전혀 괴물이 아니다. 쿤데라는 가믈랭의 이런 정신세계를 ‘진지함의 사막’ 또는 ‘유머가 없는 사막’으로 멋지게 비유하면서 가믈랭이 단두대로 보낸 그의 이웃이자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인 브로토를 그와 대비시킴으로써 자신의 요점을 분명히 한다. 그것은 예의 바른 사람 안에 괴물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눈과 눈, 얼굴과 얼굴이 마주하는 실존적 상황 대신에 인간의 삶과 인격이 경험적 데이터와 증거 또는 통계로서 소비되는 포괄적 분류 체계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프랑스 대혁명부터 조지 오웰의 소설까지 악은 늘 존재했다, 다른 모습으로
오웰의 비전은 서구보다 동구의 역사적 경험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그 비전은 무엇보다 동구 유형의 전제정치가 서구로 쇄도하여 서구를 지배, 정복, 노예화한 이후에 서구가 띠게 될 모습의 예상이었다. 그것의 핵심 이미지는 한 인간의 얼굴을 땅바닥에 짓이기는 한 군인의 가죽 장화와 같았다. 반면에 헉슬리의 비전은 명백히 서구적 창조물인 임박한 소비주의 사회에 대한 선제 반응이었다. 그것의 중심 주제는 힘을 빼앗긴 인간들의 농노 신분에 관한 것이기도 했지만, 이 경우에 그것은 – 몽테뉴의 주장이 맞다면 에티엔 드 라 보에티가 300년 전에 만들어낸 용어인 - ‘자발적 복종’이었다. 즉 채찍보다 당근을 더 상요하고 폭력, 노골적 명령, 가혹한 강제 대신에 유혹과 매혹을 일처리의 주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두 유토피아 전에 예브게니 자먀찐의 소설 <우리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알베르 카뮈는 더 큰 선 등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범죄가 인간의 범죄 가운데 가장 극악하다고 말한 바 있다.
1912년에 처음 발표된 아나톨 프랑스의 <신들은 목마르다>를 읽는 21세기의 독자들은 아마도 당혹감과 황홀감을 동시에 느낄 것이다. 십중팔구 그들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 작가에 대해 감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는 밀란 쿤데라가 말한 것처럼 “세계 앞에 걸린 커튼을”, 즉 “이전 해석들의 커튼을 찢어발겨” - 쿤데라의 견해에 따르면 소설가의 사명이자 모든 소설 쓰기의 소망인 - “위대한 인간적 갈등들을 선과 악 사이의 투쟁으로 순진하게 해석하는 데서 벗어나 그것들을 비극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독자들을 위해 아직 엮이지도 않은, ....“세계 앞에” 걸리기 시작할 것이 틀림없는 커튼을 자르고 찢는 데 사용할 도구를 고안하고 시험하는 데도 성공했다.
아나톨 프랑스가 펜을 내려놓고 완성된 소설을 마지막으로 훑어보던 순간에 ‘볼셰비즘’, “파시즘‘ 심지어 ’전체주의‘같은 단어들은 프랑스어든 다른 언어든 사전에 실리지도 않았으며 스탈린이나 히틀러 같은 이름들은 어떤 역사책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에밀 시오랑은 스탈린과 히틀러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로베스피에르와 마라의 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젊은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불운이 그들의 운명이다. 불관용의 교리를 선언하는 것은 그들이며 그 교리를 실행에 옮기는 것도 그들이다.” 그러나 과연 모든 젊은이가 그럴까? 그리고 오직 젊은이들만이 그럴까? 그리고 오직 로베스피에르나 스탈린의 시대를 살았던 자들만이 그럴까? 이 세 가정은 모두 명백히 틀린 듯하다.
사생활에서 마주친 악을 알아볼 수 있을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착하고 평범하며 호감이 가는 미국의 처녀 총각들은 괴물도 아니었고 변태도 아니었다. 만약 그들이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의 수감자들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지에 대해 영원히 알지 못했거나 추측, 억측, 상상, 공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 고향에 사는 이웃들은 그들이 어릴 적부터 알고 지냈던 그 매력적인 처녀 총각들이 아부 그라이브 고문실의 스냅사진에 찍힌 괴물들과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오늘날까지도 믿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그들은 동일인이다.
한나 아렌트의 관찰에 따르면 나치 유혹자들 가운데 진짜 천재는 히믈러였다. 왜냐하면 그는 괴벨스처럼 보헤미아 출신도 아니었고 슈트라이허처럼 성도착자도 아니었으며 괴링 같은 모험가, 히틀러 같은 광신자,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같은 미치광이도 아니었지만, 대중의 절대다수가 흡혈귀나 가학성 변태성욕자가 아니라 일정한 직업에 종사하며 가족을 부양하는 사람들이라는 가정을 바탕으로 “대중을 조직해 총체적인 지배 체제를 형성” 했기 때문이다.
돈스키스 . 이것은 집들의 내부 사정을 폭로할 힘을 지닌 악마가 등장하는 17세기 소설인 루이스 벨레스 데 게바라의 <절름발이 악마>나 동일한 주제의 변형인 알랭 르네 르사주의 소설 <절름발이 악마>를 머릿속에 떠올려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근대 초기의 작가들에게 사람들의 사생활과 비밀을 빼앗으려는 악마 같은 힘으로 여겨졌던 것은 이제 우리의 자기폭로 시대에 고의로 흔쾌히 자신을 노출하는 리얼리티 쇼나 그 밖의 유사 행위와 뗄 수 없게 되었다.
종교와 정치와 문학적 상상이 어우려 있는, 악마에 대한 이런 관념은 근대 유럽 예술의 배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컨대 <토비트서>에 나오는 여자 악마 아스모데아를 묘사한 고야의 그림 <아스모데아>가 그렇다.
우리는 새로운 악마를 어떻게 환영하고 있나?
내가 보기에 자네는 한마디로 말해 사생활이 죽었다고 선언한 듯하다. 우리는 미셸 푸코와 위르겐 하버마스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파놉티콘 기획부터 사생활의 식민지화에 이르기까지 일어난 일들을 우리 시대에 자율적 개인이라는 관념이 당한 패배로 간주할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정치적 자유는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위협에 대해 항의조차 하지 않는 듯하다. 그 대신에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리얼리티 쇼와 마찬가지로 마치 이것이 새롭게 획득된 우리의 안정이자 기회인 것처럼 이것을 찬양하고 있다.
이것은 악마를 찬양하는 우리의 새로운 형태인가? 이것은 악마에 대한 유동적 찬양인가?
바우만. 이것은 오래되고 우리에게 익숙한 괴테의 메피스토나 그것의 갱신된 형태인 이스트반 자보의 메피스토가 아니라 일종의 ‘DIY’, 즉 ‘우리가 손수 만든’ 악마이다. 이것은 널리 흩어져 있고 처음부터 규제와 인격에서 자유로우며 우리 같은 개인들로 민영화되고 ‘자회사로 분할될’ 운명의 무수한 ‘국지적 행위자들’을 낳는 인간 무리 전체에 가루처럼 흩뿌려져 있다.
우리의 악마는 이케아, 페이스북의 모습을 한 DIY다
그리고 이런 것들의 전체적인 귀결은 고백실 내부에 마이크가 설치되고 광장에 확성기가 내걸린 ‘고백 사회’다. 고백 사회의 성원 자격은 모두에게 솔깃하게 열려 있다. 그러나 밖에 머무르려면 중벌이 따른다. 가입을 망설이는 자들에게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의 최신판인 “나는 관찰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교훈이, 나아가 나를 보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나는 더 많이 존재한다는 식의 교훈이 뒤따른다.
돈스키스. 우리는 동유럽 작가들로부터 치명적인 망각이 동유럽과 중유럽의 저주라는 사실을 배운다.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소설 중 하나이고 천재의 작품이자 경고의 작품이며 한 여성이 정신병원에 갇혀 괴로워하는 일생의 연인인 한 소설가를 구하기 위해 악마와 거래한다는 파우스트식 이야기이기도 한 <거장과 마르가리타>에서 미하일 불가코프는 악마의 힘에 어쩌면 결정적인 한 측면을 추가로 부여한다.
이 악마는 비인격체 또는 보잘것없는 존재로 위축될 운명에 처한 인간에게서 그의 기억을 빼앗을 수 있다. 기억을 잃은 사람들은 자신과 주위 세계에 대해 어떤 비판적인 물음도 던질 수 없게된다. 그들은 개성과 교제의 힘을 잃음으로써 기본적인 도덕적 감수성과 정치적 감수성을 잃게 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다른 인간에 대한 감수성을 잃게 된다. 근대의 가장 파괴적인 형태들 안에 안전하게 숨어 있는 이 악마는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장소, 집, 기억, 소속에 대한 감각을 빼앗는다.
이 위대한 소설에 등장하는 시인 이반 베즈돔니는 악마와 신의 존재, 우리가 보게 될 것처럼 어둠과 빛의 존재를 모두 부정하는 바람에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게 역사와 보편적 인간성까지 부정하게 되어 결국 정신병원에 갇히게 되는데, ‘집 없는 자’를 뜻하는 러시아이기도 한, 베즈돔니가 존재론적 의미에서 집 없는 자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그의 성이 집없는 자를 뜻한다는 사실은 불가코프가 장소의 상실, 집 없음, 망각을 급진적이거나 전체주의적 형태의 근대가 지닌 악마 같은 측면으로 간주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베즈돔니는 완전한 분열, 기억의 상실, 삶과 역사의 통일적 원리들을 해독할 수 없는 상태를 경험함으로써 자신의 인격의 토대 자체를 상실하고 만다. 정신분열증이라는 진단을 받은 그의 정신병은 기억 및 감수성의 상실과 마찬가지로 악마가 내린 처벌의 일부이다.
기억 – 역사의 권리는 어디까지인가
유대계 리투아니아 작가인 그리고리 카노비치는 기억과 감수성의 상실을 악마가 사회적 대변동, 재난, 전쟁과 참사 동안에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는 방식의 불가피한 한 측면으로 기술한다. 소설 <악마의 주문>에서 그는 서사시적인 화법을 사용해 리투아니아에서 유대인 대학살 동안에 자행된 범죄들을 고의로 잊는 것을 악마가 행한 작업의 한 측면으로 묘사한다.
텅 빈 양심, 망각, 잊으려는 의지는 자산들에게 자행된 범죄에 대한 책임을 뒤집어쓰는 피해자들에게 가해지는 결정타이며 인간의 기억과 감수성을 박탈하는 악마 같은 행위이다.
근대는 사람들을 물리적으로 몰살시키지 않으면서 인간의 신체와 영혼을 최대한 통제할 방법을 찾는 데 몰두해왔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러하다. 사회의 기억과 집합 정서도 마찬가지다. 오웰의 <1984>에서 보듯이 역사는 오로지 기록과 문서를 통제하는 자들에 의해 좌우된다.
개인들이 당이 허락한 방식대로만 존재해 하는 상황에서 개인의 기억은 역사를 창조하거나 복구할 수 있는 힘을 잃게 된다. 그러나 만약 기억이 일상적으로 통제되거나 가공되고 갱신된다면, 역사는 권력과 통제를 정당화하고 합법화하려는 기도로 전락할 것이다.
역사는 민주주의 정치가든 권위주의 정치가든 정치가들에게만 맡겨서는 안 된다. 역사는 어떤 정치적 신조나 그것에 봉사하는 정권의 소유물이 아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역사는 우리 존재의 상징적 설계이자 우리가 매일 행하는 도덕적 선택이다. 인간의 사생활과 마찬가지로 역사를 연구하고 비판적으로 물을 수 있는 우리의 권리는 자유의 한 초석이다.
바우만. 다시 말하지만 내 생각에 악마는 온갖 종류로 나타난다. 그리고 ‘마왕이 하는 일들’은 보통 모호하고 양면적인 경향이 있다. 이것은 일종의 교환 행위, 거래, 대가, 보복이며, 우리가 무언가를 얻으면 동시에 다른 무언가를 잃게 되는 식이다. 마왕의 힘은 그의 뛰어난 위조술에 기초한다. 악마의 모습은 협잡꾼, 사기꾼, 돌팔이이며, 한마디로 말해 평균 22미터 × 16.1 미터의 압도적인 크기를 자랑하는, 아이맥스 스크린 같은 곳에 투영된 사기꾼이다.
에마뉘엘 레비나스가 제기한 주장에 따르면 유혹이 발휘하는 정말로 저항하기 힘든 견인력은 그 유혹에 굴복할 때 생긴다고 약속되거나 우리가 그렇게 믿고 기대하는 상태의 매력에서 비롯하기 보다 ‘유혹받음’의 상태 자체에서 비롯한다. 유혹이 제공하는 것에는 희열에 대한 욕망과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이 뒤섞여 있을 수밖에 없다. 유혹받은 상태에서 미지의 것에 대한, 경계선을 잘못 그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아직 연필을 손에 쥐고 있다는, 즉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는 기쁨에 의해 압도된다. 레비나스는 이런 상태를 가르켜 ‘유혹의 유혹’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그 순간의 ‘미결정됨’, ‘결말이 확실치 않음’, ‘불완전함’에 매료된 상태이다.
손에 쥐기 어렵고 고통스러울 만큼 짧은 이 자유의 순간은 우리가 이미 선택의 자유를 얻었지만 아직 선택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우리의 자유를 온전히 아무 탈 없이 간직하고 있는 순간이다. 우리는 이것이 일종의 신성한 상태라고, 죽을 운명의 우리 인간에게는 허용되지 않은, 신의 한 속성인 무한한 권능을 힐끗 엿보는 순간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유혹을 악마와 그의 작업과 관련짓는 경향이 있다. 우리 자신을 전능한 자로 상상하는 것이 신성 모독이라고 한다면, 유혹의 상태는 불경한 것이다. 자신이 유혹받로고 놔두는 것은 신성을 모독하는 행위이며, 유혹에 굴복하는 것은 법에 명시된 형벌이다.
결정의 자유를 가졌다는 것은 악마가 사는 복마전의 현관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악은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대체되는 것이다.
자네 말대로 기억은 조작될 수 있다. 이것은 사악한 위조의 의도와 야망을 지닌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주도해서 이루어지지만, 그들에게 고용된 열렬하거나 미적지근하거나 망설이는, 그러나 언제나 순종하는 수많은 일꾼과 때때로 부주의하지만 자발적인 공범들의 도움과 노고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1984>에서 ‘진리부’가 윈스턴 스미스를 고용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억은 말살될 수 없다. 사건 X가 제거된 기억은 텅 빈 장소가 아니다. 이것은 여전히 역사적 기억이며, 다만 다른 역사의 사건 X를 포함하지 않은 어떤 역사의 기억이 될 뿐이다.
덧붙이자면 동유럽 출신이지만 나중엔 프랑스의 위대한 철학자가 된 레오니드 셰스토프는 신이 미래를 바꿀 수 있는 만큼이나 과거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예를 들면 아테네인이 소크라테스에게 독살의 범행을 없던 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이렇게 능수능란하게 이미 만들어진 것을 다시 만들면서 ‘뒤로 행하기’, ‘이미 한 것을 되돌리기’, 그래서 ‘과거를 바꾸기’를 신의 결정적이고 독점적인 능력으로 간주했다.
만약 그렇다면 악마가 과거를 가지고 장난치는 것은 자신을 ‘신의 대안’으로 내세우고 신의 게임에서, 마땅히 신에게 속하는 게임에서 신을 이기려는 악마의 무한히 오만하고 필사적인 시도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베즈돔니가 신을 부정하지 않고는 악마를 부정할 수 없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역사는 악과 선이 연쇄적으로 분열 생성한다.
최근에 한 인터뷰에서 나와 대화를 나눈 폴란드 저널리스트 아르투르 도모스와프스키가 지적하길 올바른 태도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스라엘군이 저지른 전쟁 범죄와 팔레스타인이 겪은 박해를 묵과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사명이 잠재적으로 유사한 성격과 규모를 지닌 또 다른 대참사로부터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이 세계를 구원하는데 힘을 보태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 목적을 위해 그들은 우리의 공존 양식의 토대 자체에 – 비록 감춰져 있지만 매우 생동적이고 강고하게 – 내장된 섬뜩하고 잔인한 경향들을 증언할 필요가 있다.
홀로코스트 역사가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인 라울 힐베르크도 이 사명을 이렇게 이해했는데, 이 점은 나치의 집단 학살 기계가 독일 사회의 ‘정상적인 ’ 조직과 구조적으로 다르지 않았다는 점을,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역할 중의 하나를 수행하던 바로 그 사회였다는 점을 몇 번이나 강조한 데서 엿볼 수 있다.
그(리처드 루빈스타인)의 결론에 따르면 유대인 대학살은 “타락의 증거가 아니라 문명 진보의 증거였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것은 사람들이 홀로코스트에서 도출해낸 유일한 교훈이 아니었다. 또 다른 교훈은 먼저 공격하는 자가 정상에 선다는, 그리고 그런 자가 계속 정상에 있으면 처벌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그러나 이런 일이 유대인 운명의 합법적 계승자를 자처하는 국가인 이스라엘에서 일어난다면, 이것은 가능한 다른 경우들보다 더 심대한 충격을 안겨준다. 왜냐하면 이것은 결국 우리 모두가 소중히 품고 있는 또 다른 신화를, 즉 고통이 고상하게 만든다는, 그래소 고통을 당한 피해자들이 시련에서 벗어나 찬란하게 정화되고 도덕적으로 고양된다는 신화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슬픈 진실은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는 행위가 가해자를 타락시키고 추락시키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통의 피해자들이 도덕적으로 아무 상처도 없이 그들의 시련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잔혹함과 박해의 진정한 귀결은 – 작용과 반작용이 잇따라 일어나 단계마다 양쪽의 집요함과 호전성이 심화되고 양쪽을 갈라놓는 심연이 확장되는 과정을 가리키기 위해 그레고리 베이트슨이 만든 용어를 사용하자면 – 또 다른 ‘연쇄적 분열 생성’이 작동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연쇄 작용의 무한한 확장에서 빠져나오려면 상당한 의지와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자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무 많은 기억은 우리의 유머 감각뿐 아니라 우리 자신까지도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기억을 포기할 수 없다.”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망각은 그저 부재와 결여가 아니라 니체가 보여준 것처럼 정신적 삶의 한 가지 기본 조건이다. 오직 망각 덕분에 마음은 완전한 갱신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돈스키스. 악은 비정상 사례, 병리, 탈선 같은 것에 숨어 있기보다 오히려 우리가 흔히 정상으로, 심지어 평범한 삶의 사소함과 진부함으로 간주하는 것에 숨어 있다.
그리서어 아이다포론 adiaphoron 또는 그것의 복수형 아디아포라 adiaphora는 ‘중요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이 용어는 그리스의 스토아 철학자들이 사용했으며 후에는 마틴 루터의 동료 종교개혁가인 필리프 멜란히톤이 사용했는데, 그는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존재하는 예배의 차이를 가리켜 아리아포라라고, 즉 굳이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