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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 고통과 함께함에 대한 성찰
엄기호 지음 / 나무연필 / 2018년 12월
평점 :
주님은 제 말이 무슨 뜻인지 다 아시죠
그건 됐고요. 그래서 어떻게 된 겁니까? (사회적 해결을 모색하며 제도의 언어에 기대는 경우)
다 필요없어요. 하지만 뭐든 붙잡고 싶어요. (고통을 말끔하게 설명할 수 있는 마법의 언어는 없다.)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말로만 고통을 설명할 때의 딜레마가 있다.
사회적으로 쓸모있는 말을 하는 사람은 이미 사회적으로 인정된 들릴 수 있는 말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의 말만 사회에서 들린다. 따라서 고통의 사회적 측면을 해결하는 데 집중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렇게 사회와 법의 언어로 말하는 사람들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이다. 이것이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권력이나 쫓아다니는 얄팍한 행위로 보이게 된다.
법은 법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사람의 말만 듣는다. 자기가 당한 고통과 피해를 아무리 길고 상세하게 이야기하더라도 변호사로부터 돌아오는 답은 똑같다. 법적으로 조각되지 않은 말은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말이다.
모든 제도가 자기의 언어라고 선언한 그 말만 알아듣는다. 나머지 말들은 쓸모없이 여기고 듣지 않는다. 병원을 갈수록 좌절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신체적 고통에 대해 될 수 있는 대로 상세하게 호소하지만 그럴 때마다 의사들은 듣는 척도 하지 않는다. 그의 고통은 의학적으로 무가치하기 때문이다. 귀담아 듣는다고 해도 해결해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마나 한 말이다. 제도는 이처럼 고통을 듣는데 무감하다.
때로 언어가 가진 사회적 효용이 자신의 문제를 대면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달을 때가 있다.
고통의 사회적 측면을 강조하더라도 실존적 측면이 제거되지 않는다. 고통의 문제를 다루는 전문가를 만나고 나름의 해결을 보더라도 이 문제는 말끔하게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가끔은 사회적 해결이 너무 빨리 진행되어 실존적 문제를 해결할 여지를 남겨놓지 않음으로서 고통의 당사자들을 더욱 힘들게 할 경우가 있다. 실존은 늘 사회의 잔여범주로서 존재에 달라붙어 있다. 여기에 고통의 딜레마가 있다.
모든 제도는 자기가 언어라고 선언한 그 말만을 알아듣는다. 나머지 말들은 쓸모없이 여기고 듣지 않는다.
고통을 심리학화하거나 사회학화 해서 다루는 언어사이에서 이를 다뤄내려는 또다른 시도가 있다.
( 지나치게 심리학이나 사회학적 관점에서 보다보면 문제의 다른 실존적 측면을 보지 못하고 지나치게 단순화해버릴 수 있다. 문제를 직면하지 않고 회피해버리는 것. 어떤 도식에 맞춰 문제를 보고 그 도식에 맞게 해결책을 맞춤해버릴 수 있다. 알지만 외면하기도 한다.)
수다를 통해서 내면의 고통을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들으며 그 사이에서 공감을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가려는 것이다.
전문가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당사자들이 수다를 통해 기존의 언어와는 다른 언어를 만들어보려는 것이다.
특히 피해 당사자들이 모여서 이야기 나누는 것은 각자의 사연을 개별적이고 고립적으로 간주하여 ;자기문제;로만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 게 하 는 중요한 효과가 있다. 또한 당사자로서 피해 경험을 말하는 것 자체를 꺼리고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그것을 뛰어넘는 용기를 줄 수 있다. 피해의 수치심, 즉 자신이 무능해서 당했따는 감정을 넘어설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감추는 게 아니라 다른 이에게 펼쳐놓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가 잘못했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 자신과의 화해를 시도할 수 있게 된다. 사회적 차원에서는 공동의 집을 재구축하고 심리적 측면에서는 무너진 내면을 복원할 수 있다.
(개별성은 하나의 사례이거나 사연이 아니라 그 자체로 중요한 요소이다. 각각이 겪는 고통의 무게를 쉽게평균을 내고 사회화하거나 심리학화 해버리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아무리 말해도 말할 수 없는 게 있어요. (말할 수 없는 그 불가능에 맞서야 한다.)
사람은 언어를 통해 타자와 함께 거할 수 있는 집을 짓는다.
사람은 언어를 통해 타자와 함께 거할 수 있는 집을 짓는다. 집은 홀로 머무는 공간이 아니다. 홀로 머물 때조차 나와 함께 머문다. 타자 혹은 나와 함께 머물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언어다. 언어를 통하지 않고 한곳에 있더라도 함께 머무는 게 아니라 각각 머무르는 고립된 둘이 있는 것이다.
말하지 못한다는 것, 말할 수 없다는 것은 거주할 집을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곁을 내어준다는 말이 있다. 곁은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친구로서 상대를 돌보고 환대하는 것이 곁이다. 그렇기에 내가 고통을 겪을 대 누구보다 먼저 내 이야기를 듣고 헤어려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자신의 고통을 말로 표현하지 못할 때조차 그 고통에 공감하고 같이 아파해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이것이 바로 곁이라는 친밀성의 세계가 갖는 특징이다.
그러나 가끔 고통은 이 곁이라는 세계를 파괴하기도 한다. 곁에게 죄책감을 몰아치기도 한다.
곁의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경청이다.
말을 하든 하지 않든 경청 역시 돌려주는 것이 있는 응답이어야 한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내가 그에게 돌려줄 게 없다는 것이다. 서로의 사이에 집을 짓기 위한 경청은 응답이어야 한다. 응답이 없는 경청은 경청이 아니다.
고통의 특징을 호소라고 한다면 고통이 곁을 파괴하는 이유는 호소의 일방성에서 비롯된다. 고통을 호소하는 말은 일방적으로 들을 수만 있을 뿐 응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나와 타자 사이에 집을 지을 수 있는 언어가 아니다. 듣기를 강요하는 말이다. 응답을 하더라고 호소는 일방적으로 말할 뿐 듣는 일이 없는 말이다.
타인의 경험을 들으며 자기의 고통과 피해의 보편성을 꺠우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것을 주장할 때 서로 모여 경험을 나누고 공감하려는 모임의 취약성이 드러난다. 자신은 듣지 않고 남이 들을 것만을 강조할 때 아무도 그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듣는 이를 바라보며 응답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는 이는 자기의 이야기를 듣는 이가 듣기만 하고 응답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곁의 언어가가 망가지는 또다른 길은 곁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사회에 대한 인식이 너무 빨리 곁에 도달하는 때이다. 자신의 고통을 보편화하면서 고립에서 벗어났으므로 모든 문제를 하나의 마법의 단어 ‘사회적인 언어’로 설명하려면 타인의 고통을 꼼꼼하게 듣지 않게 된다. 다른 이들의 고통이 가진 개별성은 가치없는 것이 되며 사회적인 것에 대한 또하나의 사례나 증거로서만 의미를 가지게 된다.
고통은 명료하게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에 맞서 싸우는 과정은 말할 수 있다.
당사자가 고통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 다른 한편에서 고통은 말할 수 없기에 말할 필요가 없고 말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과도 맞서야 한다.
고통은 말할 수 없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말할 것이 남아 있다.
내가 겪고 있는 것인 고통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지만 내가 겪고 있음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그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는 과정, 말할 수 없는 것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 대한 것 말이다.
고통을 명료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우리는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것과 싸울 수 있게 된다. 불가능에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불가능과 대면하고 싸음으로써 우리는 그 둘을 동시에 기록하고 나눌 수 있게 된다.
고통이 아니라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는 그 과정을 말함으로써 우리는 서로가 고통받고 있음을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다. 말 할 수 있다.
나만 외로운 줄 알았는데 아픈 사람은 다 외롭더라 (고통이 가져온 외로움, 그 외로움이 통한다.)
명쾌하게 잘 설명된 책을 읽고 안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고통은 절대적이기에 소통할 수 없다. 그 절대성은 보편적이다. 그렇기에 고통은 사람을 나만의 세계로 밀어 넣는다. 그러나 그 절대성이 바로 나만을 나만의 세계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너도 그렇다는 것을 알게 한다. 내가 외로운 만큼 너도 외롭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사람은 서로에 대한 연민을 느낄 수 있다. 고통 자체는 절대적이라서 교감하고 소통할 수 없지만 바로 그 교감하고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이 공통의 것임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 그것은 교감하고말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고통의 절대성이 만드는 외로움에 대해, 그 외로움을 마주 대하고 넘어서려고 했던 자신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외로움이 사람을 파괴하고 고립시켰지만 바로 그 외로움이 보편적이라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외로움은 통하게 된다. 지금 몸부림치는 다른 이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고통이 외롭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서로 교감하고 소통하게 된다.
고통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고통이 무엇인지와 그 의미 자체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을 당한 사람이 그 고통과 거기서 비롯된 외로움에 의해 자신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그 고통에 어떻게 맞서며 넘어서려고 했는지 그 고군분투에 관한 이야기다. 자기의 겪음에 대한 기록이며 겪고 있는 자기에 대한 고백인 것이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내가 외롭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사람은 소리를 지르는 것을 넘어서 비로소 말을 하게 된다. 내 소리를 말로 들을 줄 아는 사람이 있을 때 사람은 그에게 말을 한다. 그가 내 말을 들어줄 것이라는 기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기대가 있었을 때 말하는 사람은 그가 응답할 수 있는 말을 하려고 한다. 응답을 요청하기에 응답 가능한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응답을 요청한다는 것은 응답하려는 상대를 인식하는 것이다. 고통으로 파괴된 세계가 재건되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세계는 이처럼 어떻게 해서든 말을 통해서만 재건될 수 있다.
성과, 관심, 성장이 있어야 사람은 살아갈 수 있다.
사회적인 인정, 주변인(곁)으로 부터의 인정과 공감, 그리고 내적인 자존감 등
세 번째의 경우 혼자 완성될 수 없다. 사회적인 인정과 성과, 그리고 주변인들로 부터의 공감과 사랑이 없다면 내가 스스로 나를 채울 수 있는 마중물조차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적 영역에서 존재감을 가지기 힘들어지면서 고통에 호소하는 이야기가 사회적으로 터져나오고 반향되기 시작했다. 나약한 일부 사람들의이야기가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이 겪는 이야기로 받아지면서 사호적 관심사가 디고 주목받고 해결해야할 문제로 떠올랐다.
이런 고통에 대한 이야기는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주목하는 하나의 장사거리가 되기도 한다.
온갖 역경을 딛고 일어나는 성공이야기와 다른 대척점에서 절망속에서 고통받고, 더 이상 해도 안된다는 고통들이 사회문제를 가진 문화 상품으로 등장한다.
고통으로 관심을 끌려는 사람이 먼저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런 이야기가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 수 있다는 것을 존재감을 상실한 채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속삭이는 산업ㅂ과 시장이 먼저 나타났다.
고통에 관한 이야기를 팔 때는 공감이나 연맨 연대나 인류애 같은 말로 포장하기 쉬웠다.
고통을 파는 이야기의 포맷은 피해자의 피해자됨과 비참함을 강조하는 방식이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포르노처럼 보여줬고 이런 이야기가 시장의 주목을 받고 경쟁력이 높아지고 고통의 강도가 높을수록 더 환호하고 관심을 가졌다.
고통의 맥락이나 이유, 결과가 아니라 고통의 강도만 중요해졌다. 무엇보다 피해자는 모든 것을 다 드러내야 했다. 그래야 피해자였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부를 다 까발려서 보여줘야 했다. 그걸 용기ᄅᆞ고 부추겼다. 피해자에게 보호되어야 할 인격, 감추어져야만 보호될 수 있는 존엄은 없었다. 그것까지 드러내야지만 피해자로 인정되었다. 피해자는 자신의 존엄을 파괴할수록 용기있는 사람이 되었고 그렇지 않으면 인정은 고사하고 관심조차 받을 수 없었다.
피해자임을 증명하는 것
사랑과 우정이 있다면 그래도 삶은 버틸만 하다.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할 때 내가 느끼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대체불가능성이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나 자체이지 어떤 속성이 아니다. 그가 사랑하는 나라는 존재는 지구상에 딱 한 명 나로만 존재한다. 나는 별달리 한 게 없지만 나라는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때 사람은 존재감이 고양되는 큰 기쁨을 얻는다. 이 기쁨이 나에게 살아갈 힘이 되고 세상을 살아갈만 한 곳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나 자체로 존중받고 싶어하고 특히 그 누구도 아닌 사랑하는 이가 그렇게 대해주길 바란다. 사랑은 내가 다른 어떤 속성이 아니라 바로 인격으로서 존중받는 것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모욕당하고 손상된 존재감을 고양해준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하더라도 이 친밀성 영역이 잘 구축되어 있으면(애착관계) 존재감의 고양을 경험할 수 있고 삶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사회적 영역에서의 성과만큼 (사회적인 인정 관심 성취감) 친밀성 영역에서의 사랑과 우정은 사람이 존재감을 느끼게 하는 필수적이다.
연인으로서의 그녀, 어머니로서의 그녀, 아내로서의 그녀를 칭송하면 그것이 그녀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이 시대의 사랑은 여성을 역할이 아닌 개별적 인격체로 대하는 법에 관해 전적으로 무지하다. 그걸 사랑이라고 착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역할이 있고 역할 없이 살 수 없으며 인간이란 어쩌면 역할의 총합일 수 있다.
그러나 나라는 개체적 인격에는 역할롸 환원되거나 대체되지 않은 고유한 무언이 있으며 바로 그렇다는 것을 존중받을 때 비로소 진정한 나로 존중받는다고 할 수 있다.
역할로만 사람을 바라보는 순간 그의 대체 불가능성은 사라진다. 존재감의 고양이 아니라 위축고 모욕만을 경험하게 된다.
친밀성의 관계는 원래 기쁨에 기초해 구축된다. 이 기쁨은 행위가 아닌 현존으로부터 온다. 더 큰 기쁨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가 있어 기쁜 것이지 그 행위자체가 나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존하는 기쁨이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이때 가능한 것은 기쁨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기쁨과 유사하지만 의미와 가치가 다른 것, 현존이 아니라 행위로 가능하고 그렇게 존재하는 것, 재미다. 관심을 끌기위해, 그리고 관심을 지속하기 위해 우리는 재미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자신이 재미있다는 것을 필사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재미는 기쁨과 유사하지만 다르다. 재미는 현존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존재자체로 기쁜 것이 아니다. 재미를 위해서는 끊임없이 행위를 해야한다. 재미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된다. 상대가 나를 기뻐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렇지 않아도 괜찮다고 상대를 걱정하는 마음이지만 기쁨은 끊임없이 요구된다. 더 큰 재미를 요구하면서도 괜찮다고 하지 않고 미안하지 않다. 이 재미는 이전 내가 보여준 재미와 비교되고 타인의 재미와 비교되어 우위를 차지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대체된다.
이 재매는 내가 유익한 존재임을 끊임없이 증명하는 것일 뿐이다. 유익하지 않으면 대체되는 관계
친밀한 우정에서도 그런 관계가 존재한다. 나를 증명하고 친밀할 유용함이 있는 것
유용하고 유익한 나를 증명하여 얻는 친밀함이 나에게 존재감을 준다.
(요즘 친구관계가 그렇다.)
사회생활은 사회적 영역과 친밀성의 영역에 걸쳐 있지 딱 잘라 구분되지 않는다.
(직장, 학교, 공동체 나아가 가족까지)
친밀성의 공간을 제외한 곳에서는 근대적 개인은 익명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이 개인이 사회에서 가진 중요한 권리이며 이 권리가 있으므로 개인은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런데 신상을 터는 것은 곧 그의 사회적 자유 전체를 박탈하는 것이다.
근대적 개인은 익명으로 존재함으로써 가신의 인격과 존엄을 보존한다. 허락받지 않고서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존중하는 것이 바로 그의 존엄을 존중하는 것이다.
물론 개인정보 자체는 인격이 아니다. 그러나 개인 정보가 공개됨으로써 그에게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남아있지 않게 되는 순간 파괴되는 것은 인격이다. 신상을 터는 것은 이런 점에서 그의 인격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다.
얼굴은 그 사람의 인격이며 얼굴이 보존됨으로써 그의 존엄도 보존된다.
당사자가 자신의 고통에 관해 말하기 위해서는 당사자의 위치에서 나와야 한다. 고통이 아니라 말을 하는 자리다. 따라서 고통의 당사자가 자신의 곁에 서는 것, 그것이 당사자가 자신의 고통에 관해 말을 할 수 있는 자리가 된다. 말은 곁의자리에서 만들어진다.
글을 쓰는 것을 통해 사람은 고통받는 타인의 곁뿐 아니라 고통을 겪고 있는 자기의 곁에 설 수 있게 된다. 글쓰기는 고통의 당사자가 고통의 절대성에 절규하는 당사자의 자리에 머무르며 외로움 때문에 세계를 파괴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했다. 자기자신의 곁에서 스스로에게 말을 걸어 세계를 구축하게 했다.
끌쓰기는 자신의 내면에 ‘자기의 복수성’을 구축하고 인식하게 만들었다. 고통의 소통 불가능성에 의해 외부에서 폭파된 세계를 내면에 구축할 수 있게 해주었다. 고통의 당사자에게 글쓰기의 목적은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것보다는 자기가 자기에 대해 해명하고 자기를 납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글쓰기가 근대적인 주체인 개인 즉 홀로 있으며 남과 소통할 수 있는 존재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