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타인에게 내 고통이나 불안을 나누어 주고 싶지 않다.

나는 늘 안정적이고 편안하고 덤덤하게 보이고 싶다.

어느 정도 성공햇다.

불안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하니 불안이 없어졌다. 매사 감정적이고 싶지 않았더니 무덤덤한 사람이 되었고 조금은 재미가 없었다.

그냥 직선적으로 말하고 덜 상처입고 무심해지려고 했더니  나는 아무렇지 않은데 주변에서 상처받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생겼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건 그 사람의 감정이니까 내가 어쩔 수 있는 부분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고통을 드러내고 요란스럽게 아파하고 뒹구는 사람들을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그들이 용기있다는 생각도 했다

아무리 외치고  호소해도 해결되지 않을 것을 그리 애쓰고 가끔은 떼쓰고 울부짖는 일이 쉽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 저렇게 부질없는 짓을 하나 라고 생각을 한 적도 있지만 적어도 내 아픔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모습은 용기있어 보였다.


내 아픔을 내가 먼저 알고 타인에게 이야기 하는 것은 용기가 맞다.

나이 치부를 드러내는 것

어쩌면 그것밖에 방법이 없어서 마지막 최후의 보루로 던진 승부수일지 모르겠지만 

나같은 사람은 그 상황까지 가지도 못하고 지레 혼자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타인에게 닿지 않을 고통과 누구에게도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을 울부짖어서라도 드러내는 것을 나는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들켜서는 안되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어쩌면 드러내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을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음에도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무것도 아닌것으로 드러나는 것도 싫었고 행여나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어서 너무 큰 상처나 흉터를 드러낼까봐 더 두려웠고 싫었다.

그냥 숨기고 누르다 보면 무감해진다.

무감하다는 건 어찌 보면 무척 강해 보인다.

아무렇지 않고 덤덤하고 늘 안정적인 스텐스를 유지하는 것이 누군가가 보기에는 이성적이고 강해보일지 모르겠다. 가끔은 진짜 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런 감정이 없고 감각이 없는 것은 그만큼 나를 죽이고 버려서 얻어지는 것들이다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내가 바라보는 고통도 두렵고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도 두렵다.

나에게 무감하고 나에게 덤덤한  기질이 결국은 주변 사람을 외롭게 하거나 서운하게 할 때도 있었다.


누군가 물어본다.

엄마가 혼자 잘 지내시는지...

그럴 때 마다 똑같은 대답이다.

혼자 지내다 보니 자식이 있는 도시로 올라왔고 마침 언니 집 근처에 집을 구해 살고 있어요.

언니가 자주 들여다 보고 있어요

대답도 비슷하다.

그래 아무래도 딸이 낫지. 그래도 장녀구나 

언니가 엄마에게 잘 한다는 건 알고 있다.그리고 둘은 꿍짝도 잘 맞다.

취향도 비슷하고 성격도 비슷하고 종가집 며느리라는 위치도 비슷하고 남편의 직업도 비슷하고 그래서 서로 잘 아는 면이 많다. 

둘 사이에서 나는 조금 외로웠는데 사실 어느 정도는 그 외로움을 이용했다.

외로웠지만 외로워서 그들 눈에 띄지 않은 나의 위치를 적절하게 이용했다.

보이지 않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보이지 않으니 어떤 의무에서도 비껴날 수 있었고 보이지 않아서 심통을 부려도 그러려니 했다.

언니는 곰살맞은 성격은 아니지만 엄마랑 비슷해서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기 보다는 내가 해야할 일을 묵묵히 하는 사람이었다. 베푸는 걸 좋아했고 자기가 손해보는 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상대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퍼주고 받지 않음을 욕하고 서운해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언니에게 충분히 많이 받았고 나는 대부분 되돌려 주지 못했다.

나는 상대가 무얼 좋아하는지 모르면 줄 수 없었고 그런 베품이 어쩌면 상대에게 부담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먼저했고 행여 필요하지 않고 곤란한 시혜이거나 돌봄이라면 어쩌나 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어서 그냥 이기적이고 못된 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언니는 무조적 베풀고 나누었다.

가끔 필요없는 것들도 있어서 받고 버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앞에서 거절하기 어려웠다.

티나게 서운해하거나 왜 받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대부분 좋았고 필요했지만 또 한편 굳이 없어도 상관은 없었따.

필요한 것을 하나 더 쟁여주는 느낌. 뭔가 몰라도 그만인 신제품을 알게되는 것

그런것이 사는 정이고 작은 즐거움이고 선물이지만 가끔은  버거웠다.


암튼 

그런 언니는 엄마를 돌보는데도 정성이었을 것이다.

자주 들여다보고 필요한 것들을 미리미리 알아차려서 마련해주고 

좋은 곳을 데려가고 함꼐 나들이를 가고 

가끔 나도 끼어 함꼐 했지만 나는 그저 함꼐 끼는 사람이었고 늘 언니가 모든 것을 다 계획하고 준비했다. 

그래서 편하기도 했다.

어떤 선택이나 결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혼자 위안하기를  계획에 잘 따라주는 것도 도움이 될거라고 생각했다.

언니는 늘 그런 사람이니까 

그리고 언니는 나보다 평안해 보였으니까

가끔 엄마가 언니에 대해서 걱정하는 말을 들었지만 귀담아 두지는 않았다.

누구나 살면서 모퉁이가 있고 돌부리가 있는 걸 언니라고 없을까

언니가 결혼상대를 선택할 때도 그리고 삶을 살면서 순간순간 이건 힘들겠구나 라고 짐작했을 텐데 그만큼 잘 대비하고 있지 않을까 그냥 생각했다.

나는 늘 내 삶이 가장 중요했고 내 삶의 순간에 허덕이고 있었고 내 삶이 엿같은 순간들이 많았으므로 

언니는 늘 언니 역할을 하는 줄 알았다.

엄마는 누가 찾아가든 늘 똑같은 레파토리를 읆었고 이제 너무 오래 살았다고 말을 했고 (이제 팔순이다. ) 혼자 사는 것이 외롭고 무섭다는 이야기도 가끔 했지만 엄마의 성정은 여전히 죽지 않았고 지나친 걱정과 잔소리 그리고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흘려버리고 자기말을 하는 것 등은 여전했으므로 그냥 흘려들었다.

그리고 아무런 근거없이 엄마가 이렇게 더 살아계실거라고 믿었다.

그건 엄마에 대한 애정이라기 보다는 엄마가 없는 나 자신이 상상이 가지 않고 두려워셔였던 것 같다. 

그냥 세상은 변하지 않을꺼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냥 그대로 있을거야 라고 믿는 어린 아이같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언니도 여전히 언니일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 언니같은 언니였고 누구를 챙기고  계획하고 진행하고 명령하면 따르기만 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언니때문에 엄마가 힘들수도 있따고 가끔 생각을 했다.


나는 머리로만 돌봄을 이해했지 그걸 해 본 적이 없던 사람이었다.

내 가족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을 돌보는 것과 함께 있지 않지만 그래서 더 신경쓰이고 챙겨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이 더 힘들 수 있음을 나는 굳이 생각하지 않았다. 


언니가 화를 냈을 때 비로소 언니가 많이 힘들었음을 알았다.

그랬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들을 그때 현실로 받아들였다.

딱히 뭐가 힘드냐고 묻는다면 이거다 라고  말할 수 없지만 힘든 일이 돌봄이다.

같이 병원가고 산책가고 음식을 챙겨주고 씻는 것을 돕는 것 그건 사실 몸이 힘들지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외로움을 듣고 고통스러움을 듣는 일 

상대를 위해 하는 말들이 귀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도로 튕겨나오는 경험이 반복되고 내가 이 짓을 왜하나 싶은 마음이 드는 것들이 사람을 지치게 한다.

엄마도 나름 언니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니 매사 괜찮다고만 하고 참기만 하고

언니는 그대로 그 마음을 알지만 속상하고 화가 난다.

그런데 동생들은 손님처럼 엄마에게 왔다가 가기만 하는 것도 얼마나 꼴보기 싫었을까


나는 잘 모른다고 하면서 멀리 있다고 하면서 내 앞의 문제가 힘들다고 하면서 엄마를 잊었다.

잘 지낼거라고 믿었다.

언제나 똑같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내가 한해한해 나이 먹어가는 것에 대해 민갑해지면서도 엄마는 늘 똑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시간들을 헤아리지 못하고 나는 무심했다.


상대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폐를 끼지거나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내 식의 배려는 배려가 아니라 이기심이었다. 모르니까 안해도 그만이라고 짧게 정의되는 짓들이었다.

언니처럼 부담스러울지 몰라도 귀찮을지 몰라도 그를 위해서 무언가를 생각하고 챙기고 도와주는 것이 결국은 돌봄이었다.

사람은 참 간사해서 혼자만의 시간을 간절하게 외치다가도 누군가의 사소한 배려나 관심에 간쓸개 다 줄만큼 녹아내리기도 한다. 

귀찮게 찾아가고 챙기고 잔소리하는 것

돌봄이란 그런게 아니었을까

고통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귀를 막고 이해할 수 업으니 괜한 참견은 하지 않겠다는 깔끔함보다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고 함께 하고 싶어서 다가가고 만지고 뿌리쳐지는 것들이 반복되는 것

고통의 곁이 하는 진정한 역할은 그게 아닐까

엄마가 고통은 아니지만 언니는 혼자 지쳐가는 곁이 되었고 스스로 고통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엄마와 언니는 서로의 고통이고 서로의 곁이었고

이기적이고 못된 나는 아무것도 아닌 그저 지나가는 나그네 1따위였던 거다.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고 문장으로 만드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삶은 일단 몸을 쓰고 움직이고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서 가장 좋은 방법을 찾고 가장 최선을 찾기보다

일단 움직이면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할 때가 더 많다.

뭐라고 해야 잘하면 계속 하면 되고 못하면 다시 바꾸고 조절하며 해나가면 된다. 


책을 읽으며 고통에 대해 그리고 고통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과 그의 곁에 대해 생각하면서

나는 무엇보다

못되고 이기적이 나를 생각하고 부끄러웠고

오지랍이야  잔소리가 많아  왜 저렇게 살까 싶었던 언니와 엄마를 떠올리며 

한없이 쪼그라 든다.

전화 한번 더하고 한 번 더 찾아가서 잔소리하는 것

방이라도 치워주고 나가지는 않아도 창밖의 햇살을 함께 누리는 것

고통은 아니어도

돌봄은 그래야 하는게 아닐까 

거기다 돈까지 쓰면 더 좋고


속되지만 그런 것들이 더 필요한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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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 고통과 함께함에 대한 성찰
엄기호 지음 / 나무연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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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은 제 말이 무슨 뜻인지 다 아시죠

그건 됐고요. 그래서 어떻게 된 겁니까? (사회적 해결을 모색하며 제도의 언어에 기대는 경우)

다 필요없어요. 하지만 뭐든 붙잡고 싶어요. (고통을 말끔하게 설명할 수 있는 마법의 언어는 없다.)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말로만 고통을 설명할 때의 딜레마가 있다.

사회적으로 쓸모있는 말을 하는 사람은 이미 사회적으로 인정된 들릴 수 있는 말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의 말만 사회에서 들린다. 따라서 고통의 사회적 측면을 해결하는 데 집중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렇게 사회와 법의 언어로 말하는 사람들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이다. 이것이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권력이나 쫓아다니는 얄팍한 행위로 보이게 된다.

 

법은 법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사람의 말만 듣는다. 자기가 당한 고통과 피해를 아무리 길고 상세하게 이야기하더라도 변호사로부터 돌아오는 답은 똑같다. 법적으로 조각되지 않은 말은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말이다.

모든 제도가 자기의 언어라고 선언한 그 말만 알아듣는다. 나머지 말들은 쓸모없이 여기고 듣지 않는다. 병원을 갈수록 좌절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신체적 고통에 대해 될 수 있는 대로 상세하게 호소하지만 그럴 때마다 의사들은 듣는 척도 하지 않는다. 그의 고통은 의학적으로 무가치하기 때문이다. 귀담아 듣는다고 해도 해결해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마나 한 말이다. 제도는 이처럼 고통을 듣는데 무감하다.

때로 언어가 가진 사회적 효용이 자신의 문제를 대면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달을 때가 있다.

고통의 사회적 측면을 강조하더라도 실존적 측면이 제거되지 않는다. 고통의 문제를 다루는 전문가를 만나고 나름의 해결을 보더라도 이 문제는 말끔하게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가끔은 사회적 해결이 너무 빨리 진행되어 실존적 문제를 해결할 여지를 남겨놓지 않음으로서 고통의 당사자들을 더욱 힘들게 할 경우가 있다. 실존은 늘 사회의 잔여범주로서 존재에 달라붙어 있다. 여기에 고통의 딜레마가 있다.

 

모든 제도는 자기가 언어라고 선언한 그 말만을 알아듣는다. 나머지 말들은 쓸모없이 여기고 듣지 않는다.

 

 

고통을 심리학화하거나 사회학화 해서 다루는 언어사이에서 이를 다뤄내려는 또다른 시도가 있다.

( 지나치게 심리학이나 사회학적 관점에서 보다보면 문제의 다른 실존적 측면을 보지 못하고 지나치게 단순화해버릴 수 있다. 문제를 직면하지 않고 회피해버리는 것. 어떤 도식에 맞춰 문제를 보고 그 도식에 맞게 해결책을 맞춤해버릴 수 있다. 알지만 외면하기도 한다.)

 

수다를 통해서 내면의 고통을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들으며 그 사이에서 공감을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가려는 것이다.

전문가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당사자들이 수다를 통해 기존의 언어와는 다른 언어를 만들어보려는 것이다.

특히 피해 당사자들이 모여서 이야기 나누는 것은 각자의 사연을 개별적이고 고립적으로 간주하여 ;자기문제;로만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 게 하 는 중요한 효과가 있다. 또한 당사자로서 피해 경험을 말하는 것 자체를 꺼리고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그것을 뛰어넘는 용기를 줄 수 있다. 피해의 수치심, 즉 자신이 무능해서 당했따는 감정을 넘어설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감추는 게 아니라 다른 이에게 펼쳐놓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가 잘못했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 자신과의 화해를 시도할 수 있게 된다. 사회적 차원에서는 공동의 집을 재구축하고 심리적 측면에서는 무너진 내면을 복원할 수 있다.

(개별성은 하나의 사례이거나 사연이 아니라 그 자체로 중요한 요소이다. 각각이 겪는 고통의 무게를 쉽게평균을 내고 사회화하거나 심리학화 해버리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아무리 말해도 말할 수 없는 게 있어요. (말할 수 없는 그 불가능에 맞서야 한다.)

사람은 언어를 통해 타자와 함께 거할 수 있는 집을 짓는다.

 

사람은 언어를 통해 타자와 함께 거할 수 있는 집을 짓는다. 집은 홀로 머무는 공간이 아니다. 홀로 머물 때조차 나와 함께 머문다. 타자 혹은 나와 함께 머물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언어다. 언어를 통하지 않고 한곳에 있더라도 함께 머무는 게 아니라 각각 머무르는 고립된 둘이 있는 것이다.

말하지 못한다는 것, 말할 수 없다는 것은 거주할 집을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곁을 내어준다는 말이 있다. 곁은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친구로서 상대를 돌보고 환대하는 것이 곁이다. 그렇기에 내가 고통을 겪을 대 누구보다 먼저 내 이야기를 듣고 헤어려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자신의 고통을 말로 표현하지 못할 때조차 그 고통에 공감하고 같이 아파해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이것이 바로 곁이라는 친밀성의 세계가 갖는 특징이다.

그러나 가끔 고통은 이 곁이라는 세계를 파괴하기도 한다. 곁에게 죄책감을 몰아치기도 한다.

곁의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경청이다.

말을 하든 하지 않든 경청 역시 돌려주는 것이 있는 응답이어야 한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내가 그에게 돌려줄 게 없다는 것이다. 서로의 사이에 집을 짓기 위한 경청은 응답이어야 한다. 응답이 없는 경청은 경청이 아니다.

고통의 특징을 호소라고 한다면 고통이 곁을 파괴하는 이유는 호소의 일방성에서 비롯된다. 고통을 호소하는 말은 일방적으로 들을 수만 있을 뿐 응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나와 타자 사이에 집을 지을 수 있는 언어가 아니다. 듣기를 강요하는 말이다. 응답을 하더라고 호소는 일방적으로 말할 뿐 듣는 일이 없는 말이다.

타인의 경험을 들으며 자기의 고통과 피해의 보편성을 꺠우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것을 주장할 때 서로 모여 경험을 나누고 공감하려는 모임의 취약성이 드러난다. 자신은 듣지 않고 남이 들을 것만을 강조할 때 아무도 그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듣는 이를 바라보며 응답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는 이는 자기의 이야기를 듣는 이가 듣기만 하고 응답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곁의 언어가가 망가지는 또다른 길은 곁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사회에 대한 인식이 너무 빨리 곁에 도달하는 때이다. 자신의 고통을 보편화하면서 고립에서 벗어났으므로 모든 문제를 하나의 마법의 단어 사회적인 언어로 설명하려면 타인의 고통을 꼼꼼하게 듣지 않게 된다. 다른 이들의 고통이 가진 개별성은 가치없는 것이 되며 사회적인 것에 대한 또하나의 사례나 증거로서만 의미를 가지게 된다.

 

고통은 명료하게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에 맞서 싸우는 과정은 말할 수 있다.

당사자가 고통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 다른 한편에서 고통은 말할 수 없기에 말할 필요가 없고 말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과도 맞서야 한다.

고통은 말할 수 없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말할 것이 남아 있다.

내가 겪고 있는 것인 고통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지만 내가 겪고 있음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그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는 과정, 말할 수 없는 것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 대한 것 말이다.

고통을 명료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우리는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것과 싸울 수 있게 된다. 불가능에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불가능과 대면하고 싸음으로써 우리는 그 둘을 동시에 기록하고 나눌 수 있게 된다.

고통이 아니라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는 그 과정을 말함으로써 우리는 서로가 고통받고 있음을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다. 말 할 수 있다.

 

나만 외로운 줄 알았는데 아픈 사람은 다 외롭더라 (고통이 가져온 외로움, 그 외로움이 통한다.)

 

명쾌하게 잘 설명된 책을 읽고 안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고통은 절대적이기에 소통할 수 없다. 그 절대성은 보편적이다. 그렇기에 고통은 사람을 나만의 세계로 밀어 넣는다. 그러나 그 절대성이 바로 나만을 나만의 세계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너도 그렇다는 것을 알게 한다. 내가 외로운 만큼 너도 외롭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사람은 서로에 대한 연민을 느낄 수 있다. 고통 자체는 절대적이라서 교감하고 소통할 수 없지만 바로 그 교감하고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이 공통의 것임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 그것은 교감하고말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고통의 절대성이 만드는 외로움에 대해, 그 외로움을 마주 대하고 넘어서려고 했던 자신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외로움이 사람을 파괴하고 고립시켰지만 바로 그 외로움이 보편적이라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외로움은 통하게 된다. 지금 몸부림치는 다른 이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고통이 외롭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서로 교감하고 소통하게 된다.

고통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고통이 무엇인지와 그 의미 자체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을 당한 사람이 그 고통과 거기서 비롯된 외로움에 의해 자신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그 고통에 어떻게 맞서며 넘어서려고 했는지 그 고군분투에 관한 이야기다. 자기의 겪음에 대한 기록이며 겪고 있는 자기에 대한 고백인 것이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내가 외롭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사람은 소리를 지르는 것을 넘어서 비로소 말을 하게 된다. 내 소리를 말로 들을 줄 아는 사람이 있을 때 사람은 그에게 말을 한다. 그가 내 말을 들어줄 것이라는 기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기대가 있었을 때 말하는 사람은 그가 응답할 수 있는 말을 하려고 한다. 응답을 요청하기에 응답 가능한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응답을 요청한다는 것은 응답하려는 상대를 인식하는 것이다. 고통으로 파괴된 세계가 재건되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세계는 이처럼 어떻게 해서든 말을 통해서만 재건될 수 있다.

 

 

성과, 관심, 성장이 있어야 사람은 살아갈 수 있다.

사회적인 인정, 주변인()으로 부터의 인정과 공감, 그리고 내적인 자존감 등

세 번째의 경우 혼자 완성될 수 없다. 사회적인 인정과 성과, 그리고 주변인들로 부터의 공감과 사랑이 없다면 내가 스스로 나를 채울 수 있는 마중물조차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적 영역에서 존재감을 가지기 힘들어지면서 고통에 호소하는 이야기가 사회적으로 터져나오고 반향되기 시작했다. 나약한 일부 사람들의이야기가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이 겪는 이야기로 받아지면서 사호적 관심사가 디고 주목받고 해결해야할 문제로 떠올랐다.

이런 고통에 대한 이야기는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주목하는 하나의 장사거리가 되기도 한다.

온갖 역경을 딛고 일어나는 성공이야기와 다른 대척점에서 절망속에서 고통받고, 더 이상 해도 안된다는 고통들이 사회문제를 가진 문화 상품으로 등장한다.

고통으로 관심을 끌려는 사람이 먼저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런 이야기가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 수 있다는 것을 존재감을 상실한 채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속삭이는 산업ㅂ과 시장이 먼저 나타났다.

고통에 관한 이야기를 팔 때는 공감이나 연맨 연대나 인류애 같은 말로 포장하기 쉬웠다.

 

고통을 파는 이야기의 포맷은 피해자의 피해자됨과 비참함을 강조하는 방식이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포르노처럼 보여줬고 이런 이야기가 시장의 주목을 받고 경쟁력이 높아지고 고통의 강도가 높을수록 더 환호하고 관심을 가졌다.

고통의 맥락이나 이유, 결과가 아니라 고통의 강도만 중요해졌다. 무엇보다 피해자는 모든 것을 다 드러내야 했다. 그래야 피해자였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부를 다 까발려서 보여줘야 했다. 그걸 용기ᄅᆞ고 부추겼다. 피해자에게 보호되어야 할 인격, 감추어져야만 보호될 수 있는 존엄은 없었다. 그것까지 드러내야지만 피해자로 인정되었다. 피해자는 자신의 존엄을 파괴할수록 용기있는 사람이 되었고 그렇지 않으면 인정은 고사하고 관심조차 받을 수 없었다.

피해자임을 증명하는 것

 

사랑과 우정이 있다면 그래도 삶은 버틸만 하다.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할 때 내가 느끼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대체불가능성이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나 자체이지 어떤 속성이 아니다. 그가 사랑하는 나라는 존재는 지구상에 딱 한 명 나로만 존재한다. 나는 별달리 한 게 없지만 나라는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때 사람은 존재감이 고양되는 큰 기쁨을 얻는다. 이 기쁨이 나에게 살아갈 힘이 되고 세상을 살아갈만 한 곳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나 자체로 존중받고 싶어하고 특히 그 누구도 아닌 사랑하는 이가 그렇게 대해주길 바란다. 사랑은 내가 다른 어떤 속성이 아니라 바로 인격으로서 존중받는 것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모욕당하고 손상된 존재감을 고양해준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하더라도 이 친밀성 영역이 잘 구축되어 있으면(애착관계) 존재감의 고양을 경험할 수 있고 삶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사회적 영역에서의 성과만큼 (사회적인 인정 관심 성취감) 친밀성 영역에서의 사랑과 우정은 사람이 존재감을 느끼게 하는 필수적이다.

 

연인으로서의 그녀, 어머니로서의 그녀, 아내로서의 그녀를 칭송하면 그것이 그녀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이 시대의 사랑은 여성을 역할이 아닌 개별적 인격체로 대하는 법에 관해 전적으로 무지하다. 그걸 사랑이라고 착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역할이 있고 역할 없이 살 수 없으며 인간이란 어쩌면 역할의 총합일 수 있다.

그러나 나라는 개체적 인격에는 역할롸 환원되거나 대체되지 않은 고유한 무언이 있으며 바로 그렇다는 것을 존중받을 때 비로소 진정한 나로 존중받는다고 할 수 있다.

역할로만 사람을 바라보는 순간 그의 대체 불가능성은 사라진다. 존재감의 고양이 아니라 위축고 모욕만을 경험하게 된다.

 

친밀성의 관계는 원래 기쁨에 기초해 구축된다. 이 기쁨은 행위가 아닌 현존으로부터 온다. 더 큰 기쁨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가 있어 기쁜 것이지 그 행위자체가 나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존하는 기쁨이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이때 가능한 것은 기쁨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기쁨과 유사하지만 의미와 가치가 다른 것, 현존이 아니라 행위로 가능하고 그렇게 존재하는 것, 재미다. 관심을 끌기위해, 그리고 관심을 지속하기 위해 우리는 재미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자신이 재미있다는 것을 필사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재미는 기쁨과 유사하지만 다르다. 재미는 현존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존재자체로 기쁜 것이 아니다. 재미를 위해서는 끊임없이 행위를 해야한다. 재미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된다. 상대가 나를 기뻐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렇지 않아도 괜찮다고 상대를 걱정하는 마음이지만 기쁨은 끊임없이 요구된다. 더 큰 재미를 요구하면서도 괜찮다고 하지 않고 미안하지 않다. 이 재미는 이전 내가 보여준 재미와 비교되고 타인의 재미와 비교되어 우위를 차지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대체된다.

이 재매는 내가 유익한 존재임을 끊임없이 증명하는 것일 뿐이다. 유익하지 않으면 대체되는 관계

친밀한 우정에서도 그런 관계가 존재한다. 나를 증명하고 친밀할 유용함이 있는 것

유용하고 유익한 나를 증명하여 얻는 친밀함이 나에게 존재감을 준다.

(요즘 친구관계가 그렇다.)

 

사회생활은 사회적 영역과 친밀성의 영역에 걸쳐 있지 딱 잘라 구분되지 않는다.

(직장, 학교, 공동체 나아가 가족까지)

 

 

친밀성의 공간을 제외한 곳에서는 근대적 개인은 익명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이 개인이 사회에서 가진 중요한 권리이며 이 권리가 있으므로 개인은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런데 신상을 터는 것은 곧 그의 사회적 자유 전체를 박탈하는 것이다.

근대적 개인은 익명으로 존재함으로써 가신의 인격과 존엄을 보존한다. 허락받지 않고서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존중하는 것이 바로 그의 존엄을 존중하는 것이다.

물론 개인정보 자체는 인격이 아니다. 그러나 개인 정보가 공개됨으로써 그에게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남아있지 않게 되는 순간 파괴되는 것은 인격이다. 신상을 터는 것은 이런 점에서 그의 인격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다.

 

얼굴은 그 사람의 인격이며 얼굴이 보존됨으로써 그의 존엄도 보존된다.

 

당사자가 자신의 고통에 관해 말하기 위해서는 당사자의 위치에서 나와야 한다. 고통이 아니라 말을 하는 자리다. 따라서 고통의 당사자가 자신의 곁에 서는 것, 그것이 당사자가 자신의 고통에 관해 말을 할 수 있는 자리가 된다. 말은 곁의자리에서 만들어진다.

글을 쓰는 것을 통해 사람은 고통받는 타인의 곁뿐 아니라 고통을 겪고 있는 자기의 곁에 설 수 있게 된다. 글쓰기는 고통의 당사자가 고통의 절대성에 절규하는 당사자의 자리에 머무르며 외로움 때문에 세계를 파괴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했다. 자기자신의 곁에서 스스로에게 말을 걸어 세계를 구축하게 했다.

끌쓰기는 자신의 내면에 자기의 복수성을 구축하고 인식하게 만들었다. 고통의 소통 불가능성에 의해 외부에서 폭파된 세계를 내면에 구축할 수 있게 해주었다. 고통의 당사자에게 글쓰기의 목적은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것보다는 자기가 자기에 대해 해명하고 자기를 납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글쓰기가 근대적인 주체인 개인 즉 홀로 있으며 남과 소통할 수 있는 존재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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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된 일기장
알바 데 세스페데스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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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쓴다는 건 자신을 생각하고 들여다보는 일.자기의 욕망과 감정을 아는 것이 당황스럽고 불경하게 느껴진다.몰랐으면 더 좋았을까. 고통스러워도 알아야할까. 그 고민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작가사진이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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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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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기 입장에서 상황을 본다. 생각하고 받아들인다.

자기 생각이 전부는 아니다. 가까운 사람의 말들 의견들을 받아들이고 내것으로 만든다.

내 생각이나 주장이 순도 100퍼센트의 내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모든 상황이나 맥락들이 모여서 내 생각이 된다. 

아빠의 죽음에 대해 가오리는 자살이라는 경찰과 엄마의 말을 믿었다. 아빠가 왜 자살을 했을까? 엄마가 힘들게 했을까? 그럼 나는 아빠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그리고 힘든 순간 위로가 되었던 이웃은 누구였을까? 허무하게 살해당한 그 소녀였을까? 그 소녀를 죽이고 집에 불을 지른 우울하고 폐쇄적인 그 오빠였을까

엄마의 자랑이었고 희망이던 피아니스트가 꿈이던 언니가 사고로 죽었다. 그러나 아무도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가족은 모두 언니가 외국으로 연주여행을 떠났다고 믿기 시작했다. 엄마가 먼저 시작했으나 누구도 진실을 말하지 않고 동의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현실을 바로 바라보는 것부터 시작된다.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지 어떤 상황인지 똑바로 바라보는 것

그 마주치는 시선이 두렵고 나를 위협하는 것, 안전하지 않은 것일지라도 마주 보아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알지 못한다고 살아가는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보고 들은대로 믿으며 내가 아는 모든 것이 진실이라고 믿으며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오해하거나 다르게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사는동안 어디선가 삐걱거릴 수 밖에 없다.

갑자기 스나미처럼 몰아치는 것이 없더라도 자꾸 이상한 기시감이 들 수도 있고 불편한 감각이 남아 있을 수 있다.


어쩌면 모르고 살아가며 편안했을 미히로는 가오리를 만나면서 별 관심을 가지지 않은 고향의 살인사건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한다.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어쩌면 이 사건으로 괜찮은 시나리오를 쓰면 조금 유명해지고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막연함으로 시작했으나 사건에 다가갈 수록 나와 상관없는 일이 아니다. 

내가 들은 대로 알고 있는대로의 상황이 아닌 전혀 다른 모습의 사라를 보게 되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그동안 찾아해맸던 답이 툭 튀어나온다.

가오리는 사실을 바로 알아가고 싶다고 한다.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 정말 일어난 일 그리고 그 사실에 더해진 사람의 감정을 입은 진실을 알고 싶어한다.

알고 나면 이해되고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는 아는 것에 대해 안전함을 느낀다. 내가 아는 사람, 내가 아는 상황, 내가 아는 사실은 나를 지켜주는 보호막이 될 수 있지만 내가 모르는 사람 내가 알 수 없는 상황은 언제 나를 공격할지 알 수 없다. 

알고 있다고 믿었던 사실들이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을 때 어떻게 해야하나

한 발 더 나아가 진짜를 보고 싶을까 그럴리 없다고 덮어버리고 내가 아는 것만 붙잡고 살아야 할까

무엇이 더 좋다고 할 수도 없다. 좋고 나쁨보다 더 우선인 것이 내가 안전한가 불안한가의 문제일 수 있다.


살인사건에 대한 사실들이 하나하나 들어나면서 두 사람이 가졌던 과거 기억들 그리고 감정들의 큰 그림이 보이기 시작한다.

사실 모두가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서. 죽은 사람에 대해 나쁘게 말하고 싶지 않아서, 가만히 있었던 부분이 있다.


미히로는 사건에 다가가면서 언니의 사고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지만 중요한 건 언니 사고에 대한 것이 아니다.

언니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누구에게 마음이 있었고 어떤 진심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게 되면서 언니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내가 알던 언니, 부모님이 말했던 친척이나 이웃이 알던 언니가 아니라 언니그 자체에 다가간다. 

불안하고 감사하고 초조하고 행복했던 언니를 만나면서 언니를 이해하게 된다. 

들은대로 본대로가 아니라 다른 시각으로

어쩌면 객관적이라는 것은 그냥 나와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는 것일것이다.

모두에게 객관적인 어떤  합리적이 상황 하나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입장 나의 위치가 아는 다른 것들을 모두 각각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이 객관이고 객관 역시 다양하게 존재했다.

미히로는 언니를 이해했고  가오리는 내 기억을 정확하게 맞춰가면서 동시에 자살했던 아빠를 새롭게 만나게 된다.

자살이 아니었고 아름다운 일몰을 보려다 발을 헛디뎠다는 것

언제나 내일을 기다리고 새로운 계획을 하고 행복하려고 했던 아빠를 알게 된 것


알아간다는 건 용기가 필요하다.

몰라도 살아가는데 지장은 없다. 누구나 그렇게 알고 있고 누구나 그렇게 살아가는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쩌면 모두 알고 싶고 직면하고 싶어 애쓰고 있을 수 있다.

나의 노력이 타인에게 잘 보이지 않은 것처럼 타인의 노력도 나에게 잘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조금 성장하고 변화하는 건 결국 잘 보는 것이다.

내게 보여주는 것, 내가 보려는 것 뿐 아니라 다른 시선과 위치가 필요하다.

해가 지면 하루가 마감된다.

그러나 어제가 마무리 되어야 내일이 시작된다.

일몰이 다른 시작이라는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닐까


잘 마무리하는 것

잘 보는 것

그리고 잘 시작하는 것 

사는 건 그것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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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삼킨 이후 가지게 되는 편안함

이불킥을 만드는 것은 후회되는 내 말들과 행동들이다.

간혹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 어정쩡하고 용기없는 내 모습에서 이불킥을 하기도 한다.

그때 그런 말을 했어야 했는데, 그냥 넘어가지 말아야 했는데

물론 그런 후회도 있다.

어떤 정의앞에서 내가 비굴했던 기억, 그냥 좋은게 좋은거지 라는 말로 변명하며 애써 태연한척 했던 나를 후회한다.

그러나 때로는 그냥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지켜보고 기다리줘야 하는 순간이 있다.

굳이 꺼내 표현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갹했던 순간들이 있다.

내가 조금 참길 잘했지

그건 오래된 사이에서 가능한 것일까? 아니다 처음 본 사이에서도 사람과 사람사이에는 때로 침묵과 기다림과 그럴 수도 있겠지 라는 포용이 필요하다.

손해보는 거라고 여겨지기도 하고 나만 왜 맨날 맥아리없이 살까 하는 마음이 불쑥 쏟아나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그럴 때가 있다.

저맘도 내맘같아서 나처럼 견디고 있구나 라는 걸 말하지 않아도 전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그냥 가만히 있길 잘 했다는 마음이 들면서 내 머리를 스스로 쓰다듬어주고 싶다.

말을 하면 시원할 수는 있겠지만 그 뒤에 남는 묘한 찌꺼기가 있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 묘해서 내가 견디는 무게만큼 상대도 견디고 있고 참고 있었다.

(물론 서로 평등하고 다정한 사이가 더 그러하다.)

 

해진 작가의 책은 말하지 않음에 대한 이야기라면

은영 작가의 책은 말하지 못했음에 대한 이야기라고 읽힌다.

 

관계라는 것은 그 자체가 유기체라고 생각된다.

만나고 이어지고 유지되고 그리고 조금씩 멀어지기도 하고 다시 이제 끝인가 싶다가도 다시 이어지기도 한다. 오랫동안 익숙해서 잊기도 하고 다시 되살아나기도 하는 것

그러다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들

관계란 노력이 필요하지만 노력이 무용할 때가 있다.

 

가장 맛있는 케이크는 안도감에서 오는 것 같다.

내가 천천히 여유있게 맛을 볼 수 있는 순간

그건 내가 말이나 상황에 대해 잘 대처했구나, 내가 괜찮았구나 싶은 순간에 찾아온다.

 

누군가의 마음을 알게 되는 건 오랜 시간이 흐를 뒤 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시간이 결정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 시간동안 이리저리 흐르고 요동쳤던 내 마음이 이제 한풀 꺽이고 담담해진 순간 그때 그 순간의 마음이나 감정이 이해가 된다. 내가 올려다 보지 못할만큼이 아니라 나랑 다르지 않았다고 믿었던 홍콩친구의 변화들과 성장들이 나를 더 작아 보이게 했지만 결국 나도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나 자신을 인정하는 순간 나는 그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의 슬픔도 받아들이며 편안해진다.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은 것

나를 드러내는 것과 가만히 있는 것

어떤 것이 더 좋고 나쁨은 없다.

상황이 있을 뿐이고 관계가 있을 뿐이다.

말해도 후회하고 말하지 않아도 후회한다.

그러니 어쩌랴... 정말 중요한 건 후회한 그 이후가 아닐까

후회라는 것이 뒤에 생각하고 알아차리는 것이라면 우리는 누구나 그러하다.

미리 안다는 것, 당시 알아차리는 일보다 나중에 모든 것이 지난 후에 보이는 것이 더 많지 않을까

 

은영작가는 미묘한 폭력의 순간을 참 잘 묘사하고 잡아낸다.

상대가 싫어하는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이 배려이고 사랑이라고 한다면

상대가 싫어하고 힘들어하는 걸 뻔히 알면서 내가 옳다고 믿고 밀어붙이는 건 결국 폭력이다.

고기를 먹지 않은 아이에게 성장 때문에 건강 때문이라는 이유를 대며 억지로 들이미는 것

그리고 그것 봐라 다 할 수 있지 않으냐며 자기 행동에 합리화 하고 무엇이 잘못인지 모르는 것, 그리고 그런 행동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눈치보며 침묵하는 것

그 모든 것이 폭력이었다.

내가 그 자리에서 왜 그렇게 어렵고 힘들었는지

내가 버릇없고 예의없는 아이였을까 고민하게 만드는 일들

폭력은 그렇게 우리 일상에 스며들어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지만 누군가 조금씩 불편한 순간, 혼자만 즐겁고 만족하는 순간, 단 한사람이라도 다르다는 걸 인정하지 않은 순간,

모두가 고기를 좋아하고 모두가 먹어야 하는 건 아니다.

모두가 이성을 좋아하고 모두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는 것도 아니다.

모두가 함께 웃는 농담도 없고 모두가 함께 금기하는 조건도 없다.

세상은 그렇게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그래서 삐뚤어 보이고 일그러져 보이게 흘러가겠지만

그것이 일상이 아닐까

 

말을 하는 것과 하지 않은 것

어떤 쪽이 더 나은 건지 상황에 따라 늘 변한다.

자기를 표현하고 드러내야 상대가 알 수 있다.

알면 오해가 줄고 서로 조심할 수 있고 배려할 수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길 바라는 건 내 욕심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내가 조금 걸리더라도 한번 꿀꺽 삼켜진 말들 그 말들이 관계를 조금 더 매끄럽게 만들기도 한다.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그 미묘한 경계를 찾아내는 것

상황이나 상대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을 아는 것이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하고 함께 살아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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