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셀라 부부는 아이를 잃고도 오래 살았다.

오래 산 것이 아니라 오래 살았다고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아이를 잃고 일상을 살고 웃고 먹고 이웃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사고였고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도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다.

아이를 혼자 두지 말아야 했을까

뒷길에 난 거름구덩이를 이전에 메워야 했던 걸까

늙은 개를 묶어두었거나 데리고 나갔어야 했을까

그날 아이를 데리고 일을 나갔더라면 어땠을까

그러나 만약에 라는 말은 일어날 일이 절대 없는 가정일 뿐이다.

아이는 죽었고 부부는 남았다.

사람들이 수군댄다는 것도 안다. 아이가 죽은 부모에게 위로를 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 불행이 내것이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마음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아이의 죽음은 사회의 것이지만 죽은 아이는 오롯이 부모의 몫이다.

아이의 죽음으로 좀 더 내 주위를 살피고 안전을 다지고 조심하겠지만

죽은 아이는 돌아오지 않고 부모 마음에서 상처로 남을 뿐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말이 없는 소녀를 맡게 된다.

어떤 마음으로 소녀를 맡았을지 알 수 없다.

다만 가족들이 힘겨워하는 걸 도와 주고 싶었을 것이고 소녀 하나쯤 맡아 키우는 일에 대해 부담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부가 상상하는 소녀는 다정하고 얌전하고 집안 일도 잘 도울 수 있는 그래서 어쩌면 단조로운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주지 않을까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아이를 만나고 씻기고 함께 먹으면서 부부도 처음엔 어색하고 멋쩍었을 것이다.

남의 아이 그것도 여자 아이는 도자기 같아서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긴장감도 있고 행여 아이가 보는 것들을 어디 옮기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도 있어서 어디까지 다가가야 할까 고민을 했을 수도 있다.

다정한 부부는 그 적절한 경계를 조금씩 찾아가고 있었다.

낯선 곳에서 첫 날 밤 실수를 한 소녀를 아무렇지 않게 소녀의 잘못이 아닌 것처럼 받아주고 자연스럽게 처리를 했다.

소녀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함께하고 자연스럽게 농담을 하면서 조금씩 거리를 좁혀나갔다.

그럼에도 나는 이 아이의 부모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고 이 아이는 곧 떠날 아이고 정을 들이면 나중에 내가 힘들거라고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아이의 마음은 모르지만 우리는 그렇다고 생각을 했을 것이다.

적당히 잊힐만큼만 사랑하자

어쩌면 그런 마음으로 아이를 대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랑이 깊은 부부는 그 잊힐만큼의 거리가 때로 가까웠고 때로 다정해서 낯선 환대에 익숙하지 않은 아이를 혼란스럽고 두렵지만 계속 있고 싶은 복잡한 감정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아이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평범한 부부였으면 했을텐데

이웃의 수다로 아이도 부부의 상황을 알아차리게 된다.

입을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아이에게 가르친다. 말이 없는 소녀에게 그 말은 위로일 수 있고 삶의 방향등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비밀이 없는 집에서 비밀을 공유하면서 소녀와 부부는 가까워진다.

가까워진다는 표현이나 상황은 없지만 서로에 대해 알아간다는 것 이제 더 이상 감추지 않아도 된다는 건 친밀함으로 가는 과정이다.

어쩌면 부부가 정해놓은 경계가 조금씩 허물어지고 정말 내 아이가 된 것처럼 여름날을 보냈을 것이다. 아이의 달리기 기록을 재고 응원하고 함께 빵을 굽고 우물을 긷고 바느질을 하고 축사를 정리하면서 그들은 가족이 되었다.

늘 슬픈 예감은 어김없이 현실이 된다.

여름이 끝나고 소녀가 돌아가는 시간이 되었다.

올 거라는 걸 알았지만 오지 않기를 바라던 시간이다.

부부도 소녀도 이 시간이 영원할거라고 믿고 싶었을 것이고 이제 서로 잘 알게 되었고 비밀을 함께 가지면서 비로소 가족이 되었다고 믿었는데

 

부부는 현실을 안다.

소녀는 내 아이가 아니고 부모가 따로 있고 언제든 돌아가야 하는 사람이다.

아이의 짐을 정리하지만 작은 사고로 돌아가는 날이 미뤄진다.

부부에게 시원한 우물물을 길어주고 싶은 마음에서 생긴 작은 사고

이제 부부는 그만하길 다행이야를 경험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되었다는 마음

어쩌면 그 작은 사고가 부부의 마음에 오래 묵은 짐을 조금은 덜어주지 않았을까

 

소녀를 데려다 주고 부부는 서둘러 길을 나선다.

내 아이가 아니기에

그런 내 아이였기에 아이가 혼란스럽지 않게 자연스럽게 자기 가족으로 돌아갈 수 있게

우리는 조금씩 잊혀도 괜찮다고 마음을 다독이면서

한여름의 꿈처럼 좋은 시간이었음을 기억하면서

그런 부부에게 아이가 뛰어와서 안겼을 때 그 마음을 나는 모르겠다.

너무 벅차고 너무 사랑스럽고 그리고 너무 슬펐을 것이다.

너무 좋아서 슬픈 마음

너무 행복해서 불안하고 어색한 마음을 소녀에게 선사했던 부부는

소녀에게 그 마음을 되돌려 받는다.

그것이 얼마나 찬란하고 눈부신 시간이었는지를

 

소녀에게 부부는 좋은 애착경험을 주었던 만큼

부부도 소녀에게 건강한 애착경험을 받았다.

서로에게 다정하고 고마운 존재

사람이란 그런 존재이다.

그냥 다정하고 좋은..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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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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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마음속에 자라지 못한 아이가 있다. 그 아이를 마주보는 이도 있지만 대부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애써 모른 척 하거나 없다고 믿고 싶어한다. 

이 소녀를 만나면서 어쩌면 내가 맞부딪쳤던 이름을 붙일 수 없더 감정들 상황들을 떠올린다.

무어라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어 내가 이상하다고 여겼던 순간들이 있었다.

내가 아주 나빠졌거나 내가 많이 아파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둘러싸인 순간들

어찌어찌 그 사간들을 넘겨왔고 어른이 되었다

그러나 이 소녀를 만나면서 다시 그때 감각이 떠오른다.

좋지만 좋다고 할 수 없는 마음 좋다고 하면 누군가에게 많이 미안해질 것 같은 마음 

낯설어서 좋은지 싫은지 미처 알아차리리 수도 없었는데 그냥 계속 그 상황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럴ㄴ 마음들이 책 여기저기에서 보인다.


#다섯명의 자녀 그리고 곧 태어날 아기 

소녀는 어쩔 수 없이 얼굴도 모르는 엄마쪽 먼친척에게 맡겨진다.

소녀는 이름이 없었다. 소녀의 이름이 무엇이든 아무 상관없었을 것이다.

누구누구네 몇째 정도? 

그것조차 어쩌면 매번 질문을 받는 것일 수 있다? 니가 몇쨰였더라???

여름 더운 바람을 맞으며 아버지 차 뒷자속에 비스듬이 누워서 풍경을 보다.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지도 않고 설레거나 긴장되지도 않는다.

어쩌면 아무렇지 않은 그 마음은 상처받거나 속상해하지 않으려고 미리 준비하는 단단한 껍질같다.

낯선 부부집에 내리고 아버지와 아저씨는 하나마나한 대화들을 하고 아주머니 손에 이끌려 집안으로 들어간다. 아버지는 그저 말 잘들어라 라는 것밖에 남긴 게 없다. 

낯선 속에서의 생활 낯선 사람과의 식사 혼자 잠드는 밤

모든 것이 두려웠을 텐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한다.

어쩌면 이런 낯섦에 익숙했을 수 있따.

가까운 가족이라고 다정하거나 친숙한 건 아니다.

늘 새로운 낯섦을 느낄때가 있다.

저 사람이 내가 아는 아버지였던가? 내가 알던 어머니인가 라는 마음

내가 사랑했떠너 내 배우자였떤가 라는 낯섬들이 가까운 ㅇ들사이에서도 존재한다.

그 낯섦은 때로 갈등을 일으키고 다툼을 만들기도 하고 반대로 새로운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설레임을 안겨주기도 하겠지만

어린 소녀에게는 물어봐서는 안되는 일, 알아차리면 안되는 일들로 받아들여졌을 수도 있따.

무심하지만 다정한 부부는 소녀에게 관심과 애정을 보낸다.

함꼐 일을 하고 식사를 하고 아이가 할 수 있는 일거리를 주고 칭찬하는 것

아이의 장점을 찾아내고 편지통까지 달리기를 하게 하고 기록을 재는 일

우물을 길으러 가서 그 깊고 진한 맛을 느끼게 하는 것

함꼐 이웃의 장례식을 가고 바닷가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일

어쩌면 익숙한 일들이 낯설게 다가오는 건 같은 경험을 하더라도 어떤 관계에서 내가 그 경험을 해내는가는 다르기 때문이다.

이웃의 장례식에서 아이는 부부의 비밀을 알게 된다.

폭력처럼 느닷없이 알게 되는 붑의 비밀앞에서 소녀는 이 이야기는 입밖으로 꺼내면 안될 이야기라는 걸 직감적으로 안다. 어쩌면 그 말을 듣기 전에 어떤 짐작이 있었을 수도 있다. 

부부의 아픔을 아이 눈높이만큼 알게 된다.

그리고 아저씨와의 바닷가 산책에서 말하지 않아도 되는 기회를 잃어서 영영 돌이킬 ㅣ수 없는 상황을 알게 된다.

비밀이란 불안과 두려움을 말하기도 하지만

때로 비밀은 누군가를 다정하게 배려하는 마음이기도 핮다는 걸 소녀는 알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늘 했떤 일상에서 다른 공기의 흐름을 느끼고 이제는 돌아가야한다는 사실을 안다.

소녀가 마지막으로 우물을 깊으러 가고 우물에 빠진건  누구나 짐작하듯이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일 게다. 그러나 우물에 빠진 소녀를 본 부부는 철렁했을 것이다.

거름구덩이에 빠져 잃어버린 아들 

우물에 빠져버린 소녀 

괜찮아 무사히 돌아왔으면 됐어 라는 말이  다정한 위로이면서 동시에 나를 다독이는 말이기도할것이다. 

집으로 돌아간 소녀는 커버린 키만큼 이전의 소녀가 아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연거푸 묻는 엄마에게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하는 것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 일 부부를 향해 달려가는 일

그리고 자연스럽게 아저씨의 품에 안기는 일 그리고 아빠라는 말까지


#관심밖으로 밀려난 소녀가 생에 어떤 여름날 모든 관심과 애정을 받게 된다.

그림자 속에서 갑자기 빛으로 나온 것처럼 눈부시고 낯선 풍경들이 펼쳐진다.

낯섫고 두려움 그래서 다시 눈을 감거나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간질거리는 마음이 두려운 건 낯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마음이 싫지 않은 것은 그 마음이 사랑임을 알기 때문이다.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카나리아이니까

가족안에서 어던 문제가 있는지 본능적으로 안다.

모두를 아는 것도 아니고 전후맥락을 알아차리는 건 아니지만 

지금 내가 몸을 낯추고 모른 척해야하는 걸 안다.

애써 명랑해야 한다는 걸 알고 알아도 모른 척하고 들어도 듣지 않은 척 봐도 보지 않은 척을 해야할 때를 안다. 다만 아직 끈기가 약해서 압박을 견디기 힘들어서 물어보고 울어버리기는 하겠지만

감각에 예민한 아이는 입을 다물고 자신이 그 분위기에 눌리고 압도 당하고 있음을 모른다.

앙픈데가 없고 배고프지 않아서 괜찮다고 생각한다.

카나리아처럼 예민하게 감지하지만 정작 그 감각의 이름을 모른다. 

언어로 표현할 수가 없다. 표현되지 않으면 없는 것이고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아이가 처음 빛으로 걸어가 겨엄한 것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슬프고 좋으면서 두렵고 영원히 끛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동시에 꿈이라면 어서 꺠기를 바란다. 

아이가 느낀 사랑과 정성이 아름다우면서 두렵다.

아이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따.

예전과 다르... 그 다름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을 때  견딜 힘이 있을까

이야기는 끝이 났지만 어쩌면 현실은 시작이라는 생각

그리고 누군가의 댓가를 바라지 않은 그 순간에 몰두하는 사랑과 배려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새삼 알게 된다. 



넷플릭스에 본 영화 칠드런 인 트레인

전쟁이후 이탈리아 남부에서는 가난때문에 아이들이라도 잘 먹이기 위해 북부로 보내는 일이 많았따. 북부 공산당들이 아이들을 데령 ㅘ서 잘 먹이키워주었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일이 있었떤 듯하다.

주인공 아메리고의 엄마도 아메리고를 위해 북부로 보내게 되고 그 곳에서 아메리고는 자신이 바이올린에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되고 사랑받고 지내는 것이 어떤 것인지 경험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소년의 마음 변화와 함꼐 알고보니 모성이 깊었던 엄마이야기까지 나와서 조금은 한국적인 신파처럼 보이기도 하다.

아이가 집을 떠나서 비로소 사랑과 보살핌을 경험한다는 이야기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졌을 때 느끼는 혼란까지 .


이 영화를 봤기 때문일지 모르겠으나 

소녀의 이후 삶이 어떨지도 궁금하다.

이야기는 짧게 가장 절정에서 끝이 났고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끼지마 그 이후를 마냥 낭만적으로 기대해도 좋을지... 나는 너무 현실적인 사람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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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타인에게 내 고통이나 불안을 나누어 주고 싶지 않다.

나는 늘 안정적이고 편안하고 덤덤하게 보이고 싶다.

어느 정도 성공햇다.

불안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하니 불안이 없어졌다. 매사 감정적이고 싶지 않았더니 무덤덤한 사람이 되었고 조금은 재미가 없었다.

그냥 직선적으로 말하고 덜 상처입고 무심해지려고 했더니  나는 아무렇지 않은데 주변에서 상처받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생겼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건 그 사람의 감정이니까 내가 어쩔 수 있는 부분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고통을 드러내고 요란스럽게 아파하고 뒹구는 사람들을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그들이 용기있다는 생각도 했다

아무리 외치고  호소해도 해결되지 않을 것을 그리 애쓰고 가끔은 떼쓰고 울부짖는 일이 쉽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 저렇게 부질없는 짓을 하나 라고 생각을 한 적도 있지만 적어도 내 아픔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모습은 용기있어 보였다.


내 아픔을 내가 먼저 알고 타인에게 이야기 하는 것은 용기가 맞다.

나이 치부를 드러내는 것

어쩌면 그것밖에 방법이 없어서 마지막 최후의 보루로 던진 승부수일지 모르겠지만 

나같은 사람은 그 상황까지 가지도 못하고 지레 혼자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타인에게 닿지 않을 고통과 누구에게도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을 울부짖어서라도 드러내는 것을 나는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들켜서는 안되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어쩌면 드러내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을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음에도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무것도 아닌것으로 드러나는 것도 싫었고 행여나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어서 너무 큰 상처나 흉터를 드러낼까봐 더 두려웠고 싫었다.

그냥 숨기고 누르다 보면 무감해진다.

무감하다는 건 어찌 보면 무척 강해 보인다.

아무렇지 않고 덤덤하고 늘 안정적인 스텐스를 유지하는 것이 누군가가 보기에는 이성적이고 강해보일지 모르겠다. 가끔은 진짜 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런 감정이 없고 감각이 없는 것은 그만큼 나를 죽이고 버려서 얻어지는 것들이다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내가 바라보는 고통도 두렵고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도 두렵다.

나에게 무감하고 나에게 덤덤한  기질이 결국은 주변 사람을 외롭게 하거나 서운하게 할 때도 있었다.


누군가 물어본다.

엄마가 혼자 잘 지내시는지...

그럴 때 마다 똑같은 대답이다.

혼자 지내다 보니 자식이 있는 도시로 올라왔고 마침 언니 집 근처에 집을 구해 살고 있어요.

언니가 자주 들여다 보고 있어요

대답도 비슷하다.

그래 아무래도 딸이 낫지. 그래도 장녀구나 

언니가 엄마에게 잘 한다는 건 알고 있다.그리고 둘은 꿍짝도 잘 맞다.

취향도 비슷하고 성격도 비슷하고 종가집 며느리라는 위치도 비슷하고 남편의 직업도 비슷하고 그래서 서로 잘 아는 면이 많다. 

둘 사이에서 나는 조금 외로웠는데 사실 어느 정도는 그 외로움을 이용했다.

외로웠지만 외로워서 그들 눈에 띄지 않은 나의 위치를 적절하게 이용했다.

보이지 않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보이지 않으니 어떤 의무에서도 비껴날 수 있었고 보이지 않아서 심통을 부려도 그러려니 했다.

언니는 곰살맞은 성격은 아니지만 엄마랑 비슷해서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기 보다는 내가 해야할 일을 묵묵히 하는 사람이었다. 베푸는 걸 좋아했고 자기가 손해보는 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상대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퍼주고 받지 않음을 욕하고 서운해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언니에게 충분히 많이 받았고 나는 대부분 되돌려 주지 못했다.

나는 상대가 무얼 좋아하는지 모르면 줄 수 없었고 그런 베품이 어쩌면 상대에게 부담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먼저했고 행여 필요하지 않고 곤란한 시혜이거나 돌봄이라면 어쩌나 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어서 그냥 이기적이고 못된 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언니는 무조적 베풀고 나누었다.

가끔 필요없는 것들도 있어서 받고 버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앞에서 거절하기 어려웠다.

티나게 서운해하거나 왜 받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대부분 좋았고 필요했지만 또 한편 굳이 없어도 상관은 없었따.

필요한 것을 하나 더 쟁여주는 느낌. 뭔가 몰라도 그만인 신제품을 알게되는 것

그런것이 사는 정이고 작은 즐거움이고 선물이지만 가끔은  버거웠다.


암튼 

그런 언니는 엄마를 돌보는데도 정성이었을 것이다.

자주 들여다보고 필요한 것들을 미리미리 알아차려서 마련해주고 

좋은 곳을 데려가고 함꼐 나들이를 가고 

가끔 나도 끼어 함꼐 했지만 나는 그저 함꼐 끼는 사람이었고 늘 언니가 모든 것을 다 계획하고 준비했다. 

그래서 편하기도 했다.

어떤 선택이나 결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혼자 위안하기를  계획에 잘 따라주는 것도 도움이 될거라고 생각했다.

언니는 늘 그런 사람이니까 

그리고 언니는 나보다 평안해 보였으니까

가끔 엄마가 언니에 대해서 걱정하는 말을 들었지만 귀담아 두지는 않았다.

누구나 살면서 모퉁이가 있고 돌부리가 있는 걸 언니라고 없을까

언니가 결혼상대를 선택할 때도 그리고 삶을 살면서 순간순간 이건 힘들겠구나 라고 짐작했을 텐데 그만큼 잘 대비하고 있지 않을까 그냥 생각했다.

나는 늘 내 삶이 가장 중요했고 내 삶의 순간에 허덕이고 있었고 내 삶이 엿같은 순간들이 많았으므로 

언니는 늘 언니 역할을 하는 줄 알았다.

엄마는 누가 찾아가든 늘 똑같은 레파토리를 읆었고 이제 너무 오래 살았다고 말을 했고 (이제 팔순이다. ) 혼자 사는 것이 외롭고 무섭다는 이야기도 가끔 했지만 엄마의 성정은 여전히 죽지 않았고 지나친 걱정과 잔소리 그리고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흘려버리고 자기말을 하는 것 등은 여전했으므로 그냥 흘려들었다.

그리고 아무런 근거없이 엄마가 이렇게 더 살아계실거라고 믿었다.

그건 엄마에 대한 애정이라기 보다는 엄마가 없는 나 자신이 상상이 가지 않고 두려워셔였던 것 같다. 

그냥 세상은 변하지 않을꺼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냥 그대로 있을거야 라고 믿는 어린 아이같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언니도 여전히 언니일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 언니같은 언니였고 누구를 챙기고  계획하고 진행하고 명령하면 따르기만 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언니때문에 엄마가 힘들수도 있따고 가끔 생각을 했다.


나는 머리로만 돌봄을 이해했지 그걸 해 본 적이 없던 사람이었다.

내 가족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을 돌보는 것과 함께 있지 않지만 그래서 더 신경쓰이고 챙겨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이 더 힘들 수 있음을 나는 굳이 생각하지 않았다. 


언니가 화를 냈을 때 비로소 언니가 많이 힘들었음을 알았다.

그랬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들을 그때 현실로 받아들였다.

딱히 뭐가 힘드냐고 묻는다면 이거다 라고  말할 수 없지만 힘든 일이 돌봄이다.

같이 병원가고 산책가고 음식을 챙겨주고 씻는 것을 돕는 것 그건 사실 몸이 힘들지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외로움을 듣고 고통스러움을 듣는 일 

상대를 위해 하는 말들이 귀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도로 튕겨나오는 경험이 반복되고 내가 이 짓을 왜하나 싶은 마음이 드는 것들이 사람을 지치게 한다.

엄마도 나름 언니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니 매사 괜찮다고만 하고 참기만 하고

언니는 그대로 그 마음을 알지만 속상하고 화가 난다.

그런데 동생들은 손님처럼 엄마에게 왔다가 가기만 하는 것도 얼마나 꼴보기 싫었을까


나는 잘 모른다고 하면서 멀리 있다고 하면서 내 앞의 문제가 힘들다고 하면서 엄마를 잊었다.

잘 지낼거라고 믿었다.

언제나 똑같을 거라고만 생각했다.

내가 한해한해 나이 먹어가는 것에 대해 민갑해지면서도 엄마는 늘 똑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시간들을 헤아리지 못하고 나는 무심했다.


상대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폐를 끼지거나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내 식의 배려는 배려가 아니라 이기심이었다. 모르니까 안해도 그만이라고 짧게 정의되는 짓들이었다.

언니처럼 부담스러울지 몰라도 귀찮을지 몰라도 그를 위해서 무언가를 생각하고 챙기고 도와주는 것이 결국은 돌봄이었다.

사람은 참 간사해서 혼자만의 시간을 간절하게 외치다가도 누군가의 사소한 배려나 관심에 간쓸개 다 줄만큼 녹아내리기도 한다. 

귀찮게 찾아가고 챙기고 잔소리하는 것

돌봄이란 그런게 아니었을까

고통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귀를 막고 이해할 수 업으니 괜한 참견은 하지 않겠다는 깔끔함보다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고 함께 하고 싶어서 다가가고 만지고 뿌리쳐지는 것들이 반복되는 것

고통의 곁이 하는 진정한 역할은 그게 아닐까

엄마가 고통은 아니지만 언니는 혼자 지쳐가는 곁이 되었고 스스로 고통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엄마와 언니는 서로의 고통이고 서로의 곁이었고

이기적이고 못된 나는 아무것도 아닌 그저 지나가는 나그네 1따위였던 거다.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고 문장으로 만드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삶은 일단 몸을 쓰고 움직이고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서 가장 좋은 방법을 찾고 가장 최선을 찾기보다

일단 움직이면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할 때가 더 많다.

뭐라고 해야 잘하면 계속 하면 되고 못하면 다시 바꾸고 조절하며 해나가면 된다. 


책을 읽으며 고통에 대해 그리고 고통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과 그의 곁에 대해 생각하면서

나는 무엇보다

못되고 이기적이 나를 생각하고 부끄러웠고

오지랍이야  잔소리가 많아  왜 저렇게 살까 싶었던 언니와 엄마를 떠올리며 

한없이 쪼그라 든다.

전화 한번 더하고 한 번 더 찾아가서 잔소리하는 것

방이라도 치워주고 나가지는 않아도 창밖의 햇살을 함께 누리는 것

고통은 아니어도

돌봄은 그래야 하는게 아닐까 

거기다 돈까지 쓰면 더 좋고


속되지만 그런 것들이 더 필요한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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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 고통과 함께함에 대한 성찰
엄기호 지음 / 나무연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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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은 제 말이 무슨 뜻인지 다 아시죠

그건 됐고요. 그래서 어떻게 된 겁니까? (사회적 해결을 모색하며 제도의 언어에 기대는 경우)

다 필요없어요. 하지만 뭐든 붙잡고 싶어요. (고통을 말끔하게 설명할 수 있는 마법의 언어는 없다.)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말로만 고통을 설명할 때의 딜레마가 있다.

사회적으로 쓸모있는 말을 하는 사람은 이미 사회적으로 인정된 들릴 수 있는 말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의 말만 사회에서 들린다. 따라서 고통의 사회적 측면을 해결하는 데 집중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렇게 사회와 법의 언어로 말하는 사람들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이다. 이것이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권력이나 쫓아다니는 얄팍한 행위로 보이게 된다.

 

법은 법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사람의 말만 듣는다. 자기가 당한 고통과 피해를 아무리 길고 상세하게 이야기하더라도 변호사로부터 돌아오는 답은 똑같다. 법적으로 조각되지 않은 말은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말이다.

모든 제도가 자기의 언어라고 선언한 그 말만 알아듣는다. 나머지 말들은 쓸모없이 여기고 듣지 않는다. 병원을 갈수록 좌절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신체적 고통에 대해 될 수 있는 대로 상세하게 호소하지만 그럴 때마다 의사들은 듣는 척도 하지 않는다. 그의 고통은 의학적으로 무가치하기 때문이다. 귀담아 듣는다고 해도 해결해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마나 한 말이다. 제도는 이처럼 고통을 듣는데 무감하다.

때로 언어가 가진 사회적 효용이 자신의 문제를 대면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달을 때가 있다.

고통의 사회적 측면을 강조하더라도 실존적 측면이 제거되지 않는다. 고통의 문제를 다루는 전문가를 만나고 나름의 해결을 보더라도 이 문제는 말끔하게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가끔은 사회적 해결이 너무 빨리 진행되어 실존적 문제를 해결할 여지를 남겨놓지 않음으로서 고통의 당사자들을 더욱 힘들게 할 경우가 있다. 실존은 늘 사회의 잔여범주로서 존재에 달라붙어 있다. 여기에 고통의 딜레마가 있다.

 

모든 제도는 자기가 언어라고 선언한 그 말만을 알아듣는다. 나머지 말들은 쓸모없이 여기고 듣지 않는다.

 

 

고통을 심리학화하거나 사회학화 해서 다루는 언어사이에서 이를 다뤄내려는 또다른 시도가 있다.

( 지나치게 심리학이나 사회학적 관점에서 보다보면 문제의 다른 실존적 측면을 보지 못하고 지나치게 단순화해버릴 수 있다. 문제를 직면하지 않고 회피해버리는 것. 어떤 도식에 맞춰 문제를 보고 그 도식에 맞게 해결책을 맞춤해버릴 수 있다. 알지만 외면하기도 한다.)

 

수다를 통해서 내면의 고통을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들으며 그 사이에서 공감을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가려는 것이다.

전문가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당사자들이 수다를 통해 기존의 언어와는 다른 언어를 만들어보려는 것이다.

특히 피해 당사자들이 모여서 이야기 나누는 것은 각자의 사연을 개별적이고 고립적으로 간주하여 ;자기문제;로만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 게 하 는 중요한 효과가 있다. 또한 당사자로서 피해 경험을 말하는 것 자체를 꺼리고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그것을 뛰어넘는 용기를 줄 수 있다. 피해의 수치심, 즉 자신이 무능해서 당했따는 감정을 넘어설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감추는 게 아니라 다른 이에게 펼쳐놓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가 잘못했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 자신과의 화해를 시도할 수 있게 된다. 사회적 차원에서는 공동의 집을 재구축하고 심리적 측면에서는 무너진 내면을 복원할 수 있다.

(개별성은 하나의 사례이거나 사연이 아니라 그 자체로 중요한 요소이다. 각각이 겪는 고통의 무게를 쉽게평균을 내고 사회화하거나 심리학화 해버리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아무리 말해도 말할 수 없는 게 있어요. (말할 수 없는 그 불가능에 맞서야 한다.)

사람은 언어를 통해 타자와 함께 거할 수 있는 집을 짓는다.

 

사람은 언어를 통해 타자와 함께 거할 수 있는 집을 짓는다. 집은 홀로 머무는 공간이 아니다. 홀로 머물 때조차 나와 함께 머문다. 타자 혹은 나와 함께 머물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언어다. 언어를 통하지 않고 한곳에 있더라도 함께 머무는 게 아니라 각각 머무르는 고립된 둘이 있는 것이다.

말하지 못한다는 것, 말할 수 없다는 것은 거주할 집을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곁을 내어준다는 말이 있다. 곁은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친구로서 상대를 돌보고 환대하는 것이 곁이다. 그렇기에 내가 고통을 겪을 대 누구보다 먼저 내 이야기를 듣고 헤어려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자신의 고통을 말로 표현하지 못할 때조차 그 고통에 공감하고 같이 아파해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이것이 바로 곁이라는 친밀성의 세계가 갖는 특징이다.

그러나 가끔 고통은 이 곁이라는 세계를 파괴하기도 한다. 곁에게 죄책감을 몰아치기도 한다.

곁의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경청이다.

말을 하든 하지 않든 경청 역시 돌려주는 것이 있는 응답이어야 한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내가 그에게 돌려줄 게 없다는 것이다. 서로의 사이에 집을 짓기 위한 경청은 응답이어야 한다. 응답이 없는 경청은 경청이 아니다.

고통의 특징을 호소라고 한다면 고통이 곁을 파괴하는 이유는 호소의 일방성에서 비롯된다. 고통을 호소하는 말은 일방적으로 들을 수만 있을 뿐 응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나와 타자 사이에 집을 지을 수 있는 언어가 아니다. 듣기를 강요하는 말이다. 응답을 하더라고 호소는 일방적으로 말할 뿐 듣는 일이 없는 말이다.

타인의 경험을 들으며 자기의 고통과 피해의 보편성을 꺠우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것을 주장할 때 서로 모여 경험을 나누고 공감하려는 모임의 취약성이 드러난다. 자신은 듣지 않고 남이 들을 것만을 강조할 때 아무도 그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이야기는 듣는 이를 바라보며 응답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는 이는 자기의 이야기를 듣는 이가 듣기만 하고 응답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곁의 언어가가 망가지는 또다른 길은 곁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사회에 대한 인식이 너무 빨리 곁에 도달하는 때이다. 자신의 고통을 보편화하면서 고립에서 벗어났으므로 모든 문제를 하나의 마법의 단어 사회적인 언어로 설명하려면 타인의 고통을 꼼꼼하게 듣지 않게 된다. 다른 이들의 고통이 가진 개별성은 가치없는 것이 되며 사회적인 것에 대한 또하나의 사례나 증거로서만 의미를 가지게 된다.

 

고통은 명료하게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에 맞서 싸우는 과정은 말할 수 있다.

당사자가 고통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 다른 한편에서 고통은 말할 수 없기에 말할 필요가 없고 말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과도 맞서야 한다.

고통은 말할 수 없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말할 것이 남아 있다.

내가 겪고 있는 것인 고통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지만 내가 겪고 있음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그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는 과정, 말할 수 없는 것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 대한 것 말이다.

고통을 명료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우리는 고통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것과 싸울 수 있게 된다. 불가능에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불가능과 대면하고 싸음으로써 우리는 그 둘을 동시에 기록하고 나눌 수 있게 된다.

고통이 아니라 고통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는 그 과정을 말함으로써 우리는 서로가 고통받고 있음을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다. 말 할 수 있다.

 

나만 외로운 줄 알았는데 아픈 사람은 다 외롭더라 (고통이 가져온 외로움, 그 외로움이 통한다.)

 

명쾌하게 잘 설명된 책을 읽고 안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고통은 절대적이기에 소통할 수 없다. 그 절대성은 보편적이다. 그렇기에 고통은 사람을 나만의 세계로 밀어 넣는다. 그러나 그 절대성이 바로 나만을 나만의 세계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너도 그렇다는 것을 알게 한다. 내가 외로운 만큼 너도 외롭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사람은 서로에 대한 연민을 느낄 수 있다. 고통 자체는 절대적이라서 교감하고 소통할 수 없지만 바로 그 교감하고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이 공통의 것임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 그것은 교감하고말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고통의 절대성이 만드는 외로움에 대해, 그 외로움을 마주 대하고 넘어서려고 했던 자신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외로움이 사람을 파괴하고 고립시켰지만 바로 그 외로움이 보편적이라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외로움은 통하게 된다. 지금 몸부림치는 다른 이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고통이 외롭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서로 교감하고 소통하게 된다.

고통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고통이 무엇인지와 그 의미 자체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을 당한 사람이 그 고통과 거기서 비롯된 외로움에 의해 자신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그 고통에 어떻게 맞서며 넘어서려고 했는지 그 고군분투에 관한 이야기다. 자기의 겪음에 대한 기록이며 겪고 있는 자기에 대한 고백인 것이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내가 외롭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사람은 소리를 지르는 것을 넘어서 비로소 말을 하게 된다. 내 소리를 말로 들을 줄 아는 사람이 있을 때 사람은 그에게 말을 한다. 그가 내 말을 들어줄 것이라는 기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기대가 있었을 때 말하는 사람은 그가 응답할 수 있는 말을 하려고 한다. 응답을 요청하기에 응답 가능한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응답을 요청한다는 것은 응답하려는 상대를 인식하는 것이다. 고통으로 파괴된 세계가 재건되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세계는 이처럼 어떻게 해서든 말을 통해서만 재건될 수 있다.

 

 

성과, 관심, 성장이 있어야 사람은 살아갈 수 있다.

사회적인 인정, 주변인()으로 부터의 인정과 공감, 그리고 내적인 자존감 등

세 번째의 경우 혼자 완성될 수 없다. 사회적인 인정과 성과, 그리고 주변인들로 부터의 공감과 사랑이 없다면 내가 스스로 나를 채울 수 있는 마중물조차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적 영역에서 존재감을 가지기 힘들어지면서 고통에 호소하는 이야기가 사회적으로 터져나오고 반향되기 시작했다. 나약한 일부 사람들의이야기가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이 겪는 이야기로 받아지면서 사호적 관심사가 디고 주목받고 해결해야할 문제로 떠올랐다.

이런 고통에 대한 이야기는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주목하는 하나의 장사거리가 되기도 한다.

온갖 역경을 딛고 일어나는 성공이야기와 다른 대척점에서 절망속에서 고통받고, 더 이상 해도 안된다는 고통들이 사회문제를 가진 문화 상품으로 등장한다.

고통으로 관심을 끌려는 사람이 먼저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런 이야기가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 수 있다는 것을 존재감을 상실한 채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속삭이는 산업ㅂ과 시장이 먼저 나타났다.

고통에 관한 이야기를 팔 때는 공감이나 연맨 연대나 인류애 같은 말로 포장하기 쉬웠다.

 

고통을 파는 이야기의 포맷은 피해자의 피해자됨과 비참함을 강조하는 방식이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포르노처럼 보여줬고 이런 이야기가 시장의 주목을 받고 경쟁력이 높아지고 고통의 강도가 높을수록 더 환호하고 관심을 가졌다.

고통의 맥락이나 이유, 결과가 아니라 고통의 강도만 중요해졌다. 무엇보다 피해자는 모든 것을 다 드러내야 했다. 그래야 피해자였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부를 다 까발려서 보여줘야 했다. 그걸 용기ᄅᆞ고 부추겼다. 피해자에게 보호되어야 할 인격, 감추어져야만 보호될 수 있는 존엄은 없었다. 그것까지 드러내야지만 피해자로 인정되었다. 피해자는 자신의 존엄을 파괴할수록 용기있는 사람이 되었고 그렇지 않으면 인정은 고사하고 관심조차 받을 수 없었다.

피해자임을 증명하는 것

 

사랑과 우정이 있다면 그래도 삶은 버틸만 하다.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할 때 내가 느끼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대체불가능성이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나 자체이지 어떤 속성이 아니다. 그가 사랑하는 나라는 존재는 지구상에 딱 한 명 나로만 존재한다. 나는 별달리 한 게 없지만 나라는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때 사람은 존재감이 고양되는 큰 기쁨을 얻는다. 이 기쁨이 나에게 살아갈 힘이 되고 세상을 살아갈만 한 곳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나 자체로 존중받고 싶어하고 특히 그 누구도 아닌 사랑하는 이가 그렇게 대해주길 바란다. 사랑은 내가 다른 어떤 속성이 아니라 바로 인격으로서 존중받는 것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모욕당하고 손상된 존재감을 고양해준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하더라도 이 친밀성 영역이 잘 구축되어 있으면(애착관계) 존재감의 고양을 경험할 수 있고 삶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사회적 영역에서의 성과만큼 (사회적인 인정 관심 성취감) 친밀성 영역에서의 사랑과 우정은 사람이 존재감을 느끼게 하는 필수적이다.

 

연인으로서의 그녀, 어머니로서의 그녀, 아내로서의 그녀를 칭송하면 그것이 그녀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이 시대의 사랑은 여성을 역할이 아닌 개별적 인격체로 대하는 법에 관해 전적으로 무지하다. 그걸 사랑이라고 착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역할이 있고 역할 없이 살 수 없으며 인간이란 어쩌면 역할의 총합일 수 있다.

그러나 나라는 개체적 인격에는 역할롸 환원되거나 대체되지 않은 고유한 무언이 있으며 바로 그렇다는 것을 존중받을 때 비로소 진정한 나로 존중받는다고 할 수 있다.

역할로만 사람을 바라보는 순간 그의 대체 불가능성은 사라진다. 존재감의 고양이 아니라 위축고 모욕만을 경험하게 된다.

 

친밀성의 관계는 원래 기쁨에 기초해 구축된다. 이 기쁨은 행위가 아닌 현존으로부터 온다. 더 큰 기쁨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가 있어 기쁜 것이지 그 행위자체가 나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존하는 기쁨이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이때 가능한 것은 기쁨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기쁨과 유사하지만 의미와 가치가 다른 것, 현존이 아니라 행위로 가능하고 그렇게 존재하는 것, 재미다. 관심을 끌기위해, 그리고 관심을 지속하기 위해 우리는 재미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자신이 재미있다는 것을 필사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재미는 기쁨과 유사하지만 다르다. 재미는 현존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존재자체로 기쁜 것이 아니다. 재미를 위해서는 끊임없이 행위를 해야한다. 재미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된다. 상대가 나를 기뻐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렇지 않아도 괜찮다고 상대를 걱정하는 마음이지만 기쁨은 끊임없이 요구된다. 더 큰 재미를 요구하면서도 괜찮다고 하지 않고 미안하지 않다. 이 재미는 이전 내가 보여준 재미와 비교되고 타인의 재미와 비교되어 우위를 차지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대체된다.

이 재매는 내가 유익한 존재임을 끊임없이 증명하는 것일 뿐이다. 유익하지 않으면 대체되는 관계

친밀한 우정에서도 그런 관계가 존재한다. 나를 증명하고 친밀할 유용함이 있는 것

유용하고 유익한 나를 증명하여 얻는 친밀함이 나에게 존재감을 준다.

(요즘 친구관계가 그렇다.)

 

사회생활은 사회적 영역과 친밀성의 영역에 걸쳐 있지 딱 잘라 구분되지 않는다.

(직장, 학교, 공동체 나아가 가족까지)

 

 

친밀성의 공간을 제외한 곳에서는 근대적 개인은 익명으로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이 개인이 사회에서 가진 중요한 권리이며 이 권리가 있으므로 개인은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런데 신상을 터는 것은 곧 그의 사회적 자유 전체를 박탈하는 것이다.

근대적 개인은 익명으로 존재함으로써 가신의 인격과 존엄을 보존한다. 허락받지 않고서는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존중하는 것이 바로 그의 존엄을 존중하는 것이다.

물론 개인정보 자체는 인격이 아니다. 그러나 개인 정보가 공개됨으로써 그에게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남아있지 않게 되는 순간 파괴되는 것은 인격이다. 신상을 터는 것은 이런 점에서 그의 인격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다.

 

얼굴은 그 사람의 인격이며 얼굴이 보존됨으로써 그의 존엄도 보존된다.

 

당사자가 자신의 고통에 관해 말하기 위해서는 당사자의 위치에서 나와야 한다. 고통이 아니라 말을 하는 자리다. 따라서 고통의 당사자가 자신의 곁에 서는 것, 그것이 당사자가 자신의 고통에 관해 말을 할 수 있는 자리가 된다. 말은 곁의자리에서 만들어진다.

글을 쓰는 것을 통해 사람은 고통받는 타인의 곁뿐 아니라 고통을 겪고 있는 자기의 곁에 설 수 있게 된다. 글쓰기는 고통의 당사자가 고통의 절대성에 절규하는 당사자의 자리에 머무르며 외로움 때문에 세계를 파괴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했다. 자기자신의 곁에서 스스로에게 말을 걸어 세계를 구축하게 했다.

끌쓰기는 자신의 내면에 자기의 복수성을 구축하고 인식하게 만들었다. 고통의 소통 불가능성에 의해 외부에서 폭파된 세계를 내면에 구축할 수 있게 해주었다. 고통의 당사자에게 글쓰기의 목적은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것보다는 자기가 자기에 대해 해명하고 자기를 납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글쓰기가 근대적인 주체인 개인 즉 홀로 있으며 남과 소통할 수 있는 존재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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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된 일기장
알바 데 세스페데스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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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쓴다는 건 자신을 생각하고 들여다보는 일.자기의 욕망과 감정을 아는 것이 당황스럽고 불경하게 느껴진다.몰랐으면 더 좋았을까. 고통스러워도 알아야할까. 그 고민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작가사진이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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