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롤랜즈, <철학자와 늑대>

알베르 카뮈, 장그르니에, <카뮈 그르니에 서한집>

 















<철학자와 늑대>는 철학자와 늑대의 11년 동안 동거동락한 기록이라고. -늑대는 형제 관계로 철학자는 늑대를 형의 자리에 위치시켰다. 늑대는 형일 뿐만 아니라 스승이다. “그는 빛이었고 나는 그가 드리우는 그림자 속에서 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종교의 안티테제였다.”

 

<카뮈 그르니에 서한집>이 나온 줄 모르고 있었다. 카뮈가 112, 그르니에가 123통의 편지를 보냈다고. 카뮈가 시몬 베유에 우호적인 관점을 피력하자 그르니에는 그녀의 작품들을 읽고 카뮈에게 답신을 보낸다. “당신처럼 지극히 논리적인 정신의 소유자가그런 여자에게 사상적 친화력을 느낀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르니에와 카뮈, 세기의 만남이다.

 

강예린, 이치훈, <도서관 산책자>

김소연, <시옷의 세계>

신승철, <식탁위의 철학>













 


<도서관 산책자>는 숲 속 작은 시도서관에서 국립디지털 도서관까지 두 젊은 건축가의 다종다양한 도서관 탐방기라고. 제주도에 달리도서관이 있다는데 가보고 싶다.

 

<시옷의 세계>시옷으로 시작되는 말들에 관한 산문 모음집이다.

 

혼자서 떠나는 여행이 무섭지 않느냐고 묻는 친구의 물음에 지독하게 외롭다고, 무섭도록 외롭다고, 그런데 그게 참 좋다고말한다. 왜 혼자 떠나는 여행이 좋은가? “외로움의 끝자리엔 이 밤하늘만큼이나 텅 빈 생각이 홀연히 찾아오기 때문이란다.

 

<식탁위의 철학>은 온갖 음식들, 조미료들을 사유 대상으로 삼아 들뢰즈, 가타리, 스피노자, 프로이트, 푸코, 마르크스, 네그리, 비빌리오를 불러낸다. 잡채에서 라이프니츠를, 북어국에서 스피노자와 프로이트를 고춧가루에서 욕망의 미시정치에 대한 사유로, 마늘에서 라이히의 성정치로 등등. 이제 식탁은 온갖 현대 철학의 개념들이 출몰하는 공간이 된다.

 

서동욱, <일상의 모험>

서동욱, <철학연습>

줄리언 바지니, <빅 퀘스천>

이유선, <아이러니스트의 사적인 진리>

브랜드 포브스 외, <라디오헤드로 철학하기>


























 

<일상의 모험>을 읽고 철학자 서동욱을 주목했다. 시작도 끝도 없는 것, 지루하고 하찮은 것, 욕망의 유예와 행복의 지연으로 진부한 지옥의 얼굴을 하고 있는 바로 그것. 앙리 르페브르가 혁명의 장애물, , 난간이고 실패의 원인이자 결과라고 말한 그것. 진리와 구원이 없는 부재와 목마름의 자리. 서동욱은 바로 그 일상의 구체적인 맥락들, 즉 소통, , 자기기만, 유령, 관상술, 얼굴, 패션, 웰빙, 이름, 분열증의 문학, 애무의 글쓰기, 해방의 글쓰기, 노스탤지어, , 예언 따위에 철학의 빛을 비춰 그것들을 의미의 층위로 끌어낸다.

 

<철학연습>은 유용한 철학가이드라고 한다. 스피노자, 키에르케고르, 니체, 하이데거,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레비나스, 레비스트로스, 자크 라캉, 푸코, 질 들뢰즈, 자크 데리다 등.

 

질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서동욱, <들뢰즈의 철학>

우노 구니이치, <들뢰즈 유동의 철학>

제임스 윌리엄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해설과 비판>


 

























<천개의 고원>은 무수한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좌절시켰나 보다. 시인도 마찬가지고 나 역시 그러했다. 번역문을 믿을 수 없어 원문 스터디까지 했었지만 , 여전히 난 들뢰즈가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고원이란 역어는 멋있긴 하지만 적확한 번역은 이라고 생각한다. 쁠랑plan쁠랑 세캉스영어로는 몽타쥬의 뜻이다. 쁠랑의 복수형이 쁠라토다. 들뢰즈 철학은 다분히 영화적이다. 들뢰즈의 언어는 왜 그렇게 난삽할까. 지적 허영의 극치의 문장들.

 

수전 손택, 데이비드 리프 엮음, <다시 태어나다>

지그문트 바우만, <이것은 일기가 아니다>



 












손택과 바우만의 일기가 책으로 나왔다.

 

손택은 기나긴 누추함과 평범함에 지나지 않는삶에 대한 보상으로 책 읽기와 글쓰기, 강연들을 찾아가 듣기, 토론 같은 지적인 활동에 몰입하고, 몸의 신성함과 동시에 항상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치열한 탐색을 한다. 더 큰 존재로 도약하고자 하는 열망은 곧 자아를 둘러싼 무지와 평범의 껍질을 벗고 다시 태어나는것과 같은 뜻이리라. 일기는 고통이라는 날줄과 야심이라는 씨줄을 엮어 생이라는 피륙을 짜는 일이다.

 

바우만은 2010912일의 일기에서 초강대국의 파산에 관해 쓴다.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테러,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광신도들에 대한 징벌적 전쟁이던 이라크전은 미국의 무모함과 어리석음을 잘 드러낸 사건이다. 테러리즘에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한 그 전쟁에 미국은 75천억 달러를 퍼붓는다. 그 돈을 4,5000명의 미국 국민과 10만명 이상의 이라크인을 죽이는 데 쓴것이다! 이라크전에서 보인 미국의 불합리하고 경솔한 무책임에서 빚어진 사태는 엄청나다. 이 전쟁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집값의 거품 상승, 월가의 조작과 폐해들”, 미국인들의 삶에 끼친 부정적인 영향들, 이 밖에 또 다른 부수적 피해를 낳은 원인이다. 미국 연방 부채가 천문학적으로 늘고 이자도 덩달아 늘어난다. 채권자들이 미국 부채를 한꺼번에 팔아치운다면 세계 경제는 곧 아마겟돈을 맞을 것이다.

 

김훈, <흑산>

 

                 












아직 <흑산>을 읽지 못했다. 이번에도 밥을 먹어야 살 수 있는

우리네 삶의 비루함을 다루는 듯하다.

 

장 보드리야르, <아메리카>

 

보드리야르가 이런 책도 썼다니!











 

우리가 반문화, 의미의 전복, 이성의 파괴와 재현의 종언 등 급진적인 기호 아래 꿈꾸어온 모든 것, 결코 정말로 실현되어본 적은 없지만 유럽에서 그토록 많은 이론적, 정치적, 미학적, 사회적 격변들을 풀어놓아 왔던 이 모든 반유토피아(anti utopie), 이 모든 것들이 여기 아메리카에서는 가장 단순하고 가장 급진적인 방식으로 실현되었다.

 

- 장 보드리야르,<아메리카>

 

제임스 커스, 니얼 퍼거슨, <콜로서스 아메리카 제국 흥망사>

리처드 커니, <이방인, , 괴물>

마이클 만, <분별없는 제국 미국의 일방주의와 패권적 신군사주의>














 

오늘날 오직 하나의 제국만이 있다. 미국은 전 지구적 제국이다.” 미국은 군사력과 경제력과 같은 경성 권력외에 연성 권력도 있다. 영어, 할리우드 영화, 패스트푸트, 선교사, 미디어, 대중문화, 팝아트 등등. 미국은 착취적 제국주의의 추악한 얼굴을 슈퍼 히어로의 가면을 쓰고 자신의 본 모습을 감춘다. 소련이 붕괴된 오늘날 미국보다 추악한 국가는 없다. 미국은 악마다.

 

주한 미군으로 근무했던 스티브 하우스는 경북 칠곡군 왜관읍 미군 기지 캠프 캐럴에서 축구장만한 한 구덩이를 파고 맹독성 발암물질이 함유된 에이전트 오렌지가 든 드럼통을 묻었다고 까발렸다.

 

조르조 아감벤, <아우슈비츠의 남는 자들>

필립 카곰, <나체의 역사>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아감벤의 모든 개념들은 프리모 레비의 글을 읽으면 즉각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아우슈비츠에서 포로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 다른 사람들이 보는 와중에 벌거벗어야만 했다. 호모 사케르, 즉 벌거벗은 생명은 아우슈비츠로부터 연유한다.

 

아유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들은 살아남았기 때문에, 살아남음을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었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사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자는 살아남음과 관련하여 아무 죄가 없다. 그럼에도 무수한 사람들이 눈앞에서 죽어갈 때 , 그리고 어떤 행운으로 그 죽음의 대열에서 열외가 되어 살아남았을 때도 부끄러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김원일, <마당깊은 집>

송영, 조선작, 조해일, <선생과 황태자, 아메리카, 영자의 전성시대>

이청준, <눈길>

최인호, <타인의 방>














 

마당 깊은 집은 스물 두 명이 복닥거리며 사는 소사회를 이룬다. 송영의 단편 <미화 작업>에는 작은 집을 지으며 커다란 에 집착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청준의 <눈길>은 집이 실존에서 얼마나 큰 의미를 갖는가에 대한 숙고로 이끈다. 평생 살던 집을 팔어버린 어머니는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오는 아들을 위해 그 옛집을 하루 동안 빌린다. 그 집에서 따뜻한 밥을 먹고 하룻밤을 잔 아들은 떠난다. 아들을 배웅한 어머니는 눈길을 걸어 돌아온다.

 

최인호의 <타인의 방>은 주거공간이 아파트로 변해버린 뒤 사람들의 삶과 의식이 어떻게 바뀌고 소외와 물화를 껶는가를 날렵한 솜씨로 보여준다. 출장을 갔다 돌아온 남편은 아내가 없는 빈집으로 들어선다. 남자는 아내를 기다리다 점차 텅빈 아파트에서 석고상으로 변해간다. 아내는 석고상같이 딱딱하게 변해버린 남자를 다락의 잡동사니 속에 던져놓고 집을 나간다.

 

율리히 하세, 윌리엄 라지, <침묵에 다가가기>

에마뉘엘 레비나스, <모리스 블랑쇼에 대하여>

모리스 블랑쇼, <기다림 망각>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















 

시인도 젊은날 모리스 블랑쇼를 만났다. 나 역시. 절판된 <문학의 공간>을 구할 수 없어 국립도서관에서 읽었다. 그때의 감동이란. 아리송한 블랑쇼 글을 따라 빙글빙글 도는 재미가 만만찮다. ‘이거라는거야? 저거라는거야?’

 

블랑쇼가 썼다던 소설까지 찾아 읽었지만 도무지 읽을 수 없었다. 은둔자로만 알고 있었는데 젊은날의 블랑쇼는 꼬박꼬박 시위에 참여했었다니!

 

유승훈, <부산은 넓다>

류신,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

강상중, <도쿄 산책자>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나쓰메 소세키,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4



















 

2013년 그가 뽑은 올해의 책이다. 유승훈 <부산은 넓다>는 부산에 관한 인문학적 탐색기라고. ‘부산 아케이드 프로젝트라 할만하다. <서울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의 혼합이라고. <도쿄 산책자>는 거대 도시 도쿄의 탐색기록이다. 산책자 강상중은 아카사카, 롯폰기, 마루노우치 등 거품같은 도쿄의 중심지로 나갈 때마다 이상한 고양감과 서늘한 적막감이 뒤섞인 느낌에 당황했다고 실토한다.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이 이런 내용이었던가. 양녀 은희는 이미 살해당한 모녀 중의 한 사람이고, 살인마라고 믿었던 자는 형사였다니!

 

동네 서점에 가보면 출판사별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쌓여있다. 소세키 열풍이라도 분 것일까

올해의 책후보에서 아깝게 탈락한 책들의 목록을 살펴보자.

 

이수영, <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

한병철, <시간의 향기>

고은의 <무제 시편>

김연수 <사월의 미, 칠월의 솔>

<밀란 쿤데라 전집>

알랭 드 보통, <영혼의 미술관>

발타자르 토마스 <우울할 땐 니체>

문성원 <철학자 구보 씨의 세상 생각>

다카무라 토모야, <작은 집을 권하다>

도미니크 로로, <소식의 즐거움>

실비아 플라스, <실비아 플라스 시 전집>

박인석, <아파트 한국 사회>

시미즈 레이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자크 아탈리 <자크 아탈리, 등대>

 윌리엄 파워스, <속도에서 깊이로>

베르트랑 베르줄리, <내가 행복해야만 하는 이유>

마이클 폴리, <행복할 권리>

 

디지털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더 빠른 속도. 속도를 추구하다보니 우리는 깊이를 잃었다. “사고와 감정의 깊이, 인간관계의 깊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깊이가 사라지고 있다. 충만하고 의미있는 삶의 핵심이 깊이가 사라져간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윌리엄 파워스, <속도에서 깊이로>

 


행복은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돈, 물건, 쾌락, 성공, 명성, 지위 따위를 손에 쥠으로써 갖는 즐거움과 행복은 다르다. 행복은 행복의 가능성이 불러일으키는 파동이고 전율이다. 그 가능성의 파동과 전율 속에서 갑자기 세계가 다시 마법을 발휘하고 자아가 새롭게 태어난다. 모든 것이 더 풍부해지고 낯설어지고 더 흥미로워진다. 눈은 더 명료하게 보고, 마음은 더 예리하게 생각하며, 심장은 더 강하게 느낀다. 이 세 가지가 열광과 환희와 열정 속에서 통합된다.” 


-마이클 폴리, <행복할 권리>

 

최정호 외, <산과 한국인의 삶>

최상익 외 편역, <조선시대의 금강산유기>

최안수, <겸재를 따라가는 금강산 여행>




 












시인 소동파도 고려에서 태어나 금강산이나 직접 보았으면하는 시를 남겼다지. 목판화가 류연복은 금강산연작을 그렸다. 그의 금강산 연작은 겸재의 <금강전도>와 통하는 바가 있다고. 산을 하나의 정신적 실재로 본다는 점에서.

 

반납 일에 밀려 밤새 쓴 리뷰가 A4지 스무 장에 달할 줄이야. 이제 차분히 앉아 읽지 않은 책으로 만찬을 즐길 준비를 해야겠다. 신난다. (ㅋ, 아직도 읽지 않은 책이 무수하다.) 


 -2015.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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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리언 울프, <책 읽는 뇌>

로렌스, <제대로 된 혁명>

니체, <차라투스트라는이렇게 말했다.>

이윤, <굿바이 카뮈>














 

시지푸스의 형벌이 가혹한 것은 바위를 산꼭대기로 올려놓는 노동의 고단함보다는 그의 존재가 어떤 가치도 생산할 수 없는 노동의 무목적성에 갇힌 까닭이다. 사람은 의미를 향한 존재인데, 그런 본성에 반하여 의미를 낳을 수 없는 노동의 굴레에 갇힌다면 그보다 더 큰 비극은 없다.

 

나치는 수용소 포로들에게 무의미한 노동을 강제했다고 한다. 구덩이를 파고 그 흙을 도로 묻기

무의미함은 인간을 무력하게 만든다.

 

책을 읽다가 딴 생각을 한 적이 무릇 기하던가. 매리언 울프는 그것조차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추론과 생각에서 비롯된 예측불허의 간접적 에두름이라고.

 

책 읽기는 나날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혁명의 촉매제다. “혁명을 하려면 웃고 즐기며 하라. 소름끼치도록 심각하게 하지 마라. 너무 진지하게도 하지 마라. 그저 재미로 하라.


- 로렌스, <제대로 된 혁명> 


책 읽기는 산술적 평균을 깨는 결단이라. 책 읽기는 라는 존재지평을 넘어가야 한다. 넘어간다는 것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다른 사람의 의식에서 비롯된 전혀 다른 관점을 시도해보고 거기에 동화되어 결국 이입하는 프로세스를 가리킨다.

 

시인은 19살 때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통해 큰 힘을 얻었다고. 19살에 그 책을 이해하다니! 시인은 마음이 흐트러질 때 마다 니체의 책을 꺼내 읽는단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내 인생의 책이기도 하다. 요즘 심란한데, 나도 다시 읽어볼까.

 

피터 그레이, 커미트 앤더슨, <아버지의 탄생>

루이지 조야, <아버지란 무엇인가>

이병동, <우리들은 문득 아버지가 된다>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아버지의 권위가 흔들리는 시대다. 아빠로서 매일 절감하고 섭섭하기도 하지만 그리 나쁜 일은 아닌 것 같다

아니, 아버지의 권위가 약해지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가 아닐까.

 

현진건, <현진건 단편집>

최인호, <타인의 방>

은희경, <아내의 상자>

박현욱, <아내가 결혼했다>



 












아내는 진화한다라. 그래야겠지만 박현욱의 <아내가 결혼했다>의 아내는 글쎄. 그녀가 두 번 결혼하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럼 남편의 다른 사랑도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사사키 아타루, <이 치열한 무력을>

 














사사키 아타루, 금시초문이다. 73년 생이건만, ‘일본의 니체라고!? 그의 철학비판에 동감이다. 오늘날의 철학은 삶과 유리되어 현학적인 공부로 전락하고 말았다. 철학이란 더 좋은 삶을 살기위해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야 한다. 삶을 결락시킨 철학이 무슨 소용인가. 아타루는 20세기 최대 시인으로 파울 첼란을 꼽는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고 말했지만 (박근혜정권이 세월호 학살을 자행하고 있을 때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라는 시를 썼던 김문수가 떠오른다. 죽을때까지 잊지 않겠다.) 파울 첼란은 수용소에서 해방된 이후에도 꾸역꾸역 시를 썼다.

 

파울 첼란은 <죽음의 푸가>에서 더 달콤하게 죽음을 연주하라고 쓴다. “더 둔중하게 켜라 그러면 너희들은 연기가 되어 공중으로 올라간다라고! 이 시들은 무고한 유대인 살상 행위가 더러운 범죄이고, 그 범죄자들에게 명백하게 유죄라고 선고한다!

 

최종 승리를 거두는 것은 압도적인 현실이 아니라 문학이고 철학이다. 현실은 지나가지만, 시간을 넘어 남은 것은 말이고 시다. 우리가 살아남은 것은, 그리고 망각과 무력을 넘어서서,꿋꿋하게, 어제의 삶보다 나은 삶을 꾸리는 것은 결국 이것들을 읽고 말았기 때문이다.

 

사사키 아타루의 이름을 기억해 두어야. (오호 신간이 출간되었군요) 

 

스기우라 고헤이, <형태의 탄생>

 

책은 삼라만상을 감싸고 있다. 책 하나하나는 움직이고 서로 대립하며 유동하고 확장하는 역동적인 그릇이고 다양한 힘을 삼키고 내뱉는 커다란 그릇이다. 책이 감싸고 있는 삼라만상에 전 존재를 쿵, 하고 부딪치는 것, 그게 책을 읽는 행위다.

 

아타루는 세계를 바꾼 혁명들이 폭력이 아니라 읽고 쓰는 것’, 즉 문학에서 시작했다고 힘주어 말한다. 우선 그는 우리가 아는 문학의 범주가 얼마나 협애한 것인가를 지적하고 그 외연을 한껏 넓힌다. 문학은 문자로 쓰인 것만 아니라 춤, 음악, 노래, 종교, 철학 등을 다 포괄한다. 읽는다는 것은 최후의 고독한 싸움”(버지니아 울프)이고 기도이고, 명상이고, 시련” (마르틴 루터)이며, “자신의 무의식을, 그 욕망을 텍스트에 직접 접속하는 것이다.

 

아타루는 니체를 읽은 뒤 이렇게 쓴다.

 

읽고 만 이상, 거기에 그렇게 쓰여 있는 이상, 그 한 행이 아무래도 옳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은 이상, 그 문구가 하얀 표면에 반짝반짝 검게 빛나 보이고 만 이상, 그 말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 이거 대단한 꼴통임에 분명하다. 아타루의 책 얼른 읽고 싶다.

 

야니스 콩스탕티니데스, <유럽의 붓다, 니체>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오르한 파묵, <소설과 소설가>














 

나는 유럽의 붓다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인도에 붓다가 있다면 유럽에는

니체가 있다고 말이다.

 

- 니체, <유고 1882~1883/4>

 

역시 니체정도로 미쳐야 저런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다. <유럽의 붓다, 니체>에서 야니스 콩스탕티니데스는 니체와 불교의 접점을 모색한다. 니체는 삶이라는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너 자신을 저당 잡히고 너 자신을 잃어버려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나를 버려서 참 나에 도달한다! 선종에서도 나에 대한 부정은 깨달음의 전제조건이다.

 

소설, 혹은 문학 일반이 현실의 용도에서 아무짝에도 써먹을 데가 없고 역사적 즉효성따위도 없지만 그것이 유의미한 것은 이야기 속에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그 무언가가 인간 존재의 존엄의 핵을 희구하는 계속성이라고 말한다. 모든 소설가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기가 누구인가?’라는 물음과 싸운다.

 

소설에는 감춰진 중심부가 있다. 모든 이야기들은 이 감춰진 중심부의 먼 쪽에서부터 시작한다. 어느 결에 이야기는 이 감춰진 중심부를 꿰뚫는다. 파묵은 이렇게 쓴다. “중심부는 삶에 관한 심오한 관점, 일종의 통찰입니다. 깊은 곳에 있는 실재 또는 상상의 신비로운 어떤 지점입니다. ” 소설가는 이 중심부에 대해 말하려고 이야기를 쓰는 것이고, 독자 역시 이 중심부을 읽으려고 소설을 읽는 것이다.

 

중심부가 없는 소설이 태반이다.

이런 소설들은 그야말로 쓸모없다.

 

마이클 크로닌, <팽창하는 세계>

지그문트 바우만, <유행의 시대>



세계화는 세계를 평평하게 만든다. 지역의 고유한 차이와 다양한 차원이 사라지고 있다. ‘귀속의 순환고리도 깨진다. 크로닌은 스코틀랜드 이론가 앨러스테어 매킨토시가 제시한 귀속의 순환을 이렇게 요약한다.

 

그가 말하는 순환에는 네 가지 요소가 있는데,

이것들은 차례차례 다음 요소에 영향을 준다.

 

먼저 장소의 감각(기초)’정체성의 감각(자아/머리)’을 낳고, 정체성의 감각은 가치의 감각(영혼/가슴)‘, 그리고 가치의 감각은 책임의 감각(행동/)‘을 낳는다는 것이다.

 


대중은 달라지고자 하는 욕망과 군중에서

벗어나고 극심한 생존 경쟁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충동으로 최신 유행을 추구하고,

유행은 뛰어남의 상징을 금새 대중적이고, 저속하고, 사소한 것으로 만들며,

심지어 아주 잠깐 주의를 잃거나 한순간이라도

손놀림의 속도를 늦추면 의도와는 정반대로

개체성을 잃는 결과를 낳게 한다.

 

유행을 좇는 사냥하는 삶은 자본주의 사회에선 죽기 전까지 끝나지 않는다.

 

윤혜숙, <뽀이들이 온다>


 

<뽀이들이 온다>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이제는 사라진 전기수라는 이야기꾼들의 세계를 보여준다. <전기수>는 당시 사양산업이었다. ‘변사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당대 최고의 변사 최한기는 전기수였던 수한을 변사로 키우려고 한다. 그러나, 수한은 전기수의 길을 포기하지 않는다. 매혹적인 이야기다. 당장 읽고 싶다.

 







사마천, <사기>

노자, <도덕경>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시인에 따르면 교양인이라면 박경리의 <토지>를 통독하고, 고은의 <만인보>정도는 꿰고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교양인 되기 힘들다. 교양인 안 할까 보다. 교양인으로서 필독서로 그가 뽑은 책은 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사마천의 <사기>, 노자의 <도덕경>, 소로의 <월든>이다.

 

황현산, <잘 표현된 불행>


 , ‘감탄을 하며 빨려드는 책이라니! 한국 문학평론의 정수! 우뚝 솟은 말의 성채, 그 봉우리의 위엄을 보여준다고. 시인이 비판한 A 작가는 누굴까. 비평권력이 만들어 놓은 작가. 움베르트 에코의 <퇴짜 맞은 명작들>엔 오늘날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들에 대한 당대 비평가들의 실수들이 나열되어 있다. 예를 들면 토마스 만 :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이 소설은 작가가 시시한 사람들의 시시한 이야기를 시시한 문체로 이야기하는 두 권의 방대한 책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


시인에 따르면 좋은 비평가란 손꼽을 정도로 희귀한 반면에 허접한 비평가들은 차고 넘친단다. 허접한 비평가들은 패거리를 만들고 담합하고 음모를 꾸민다.

비평가들에게 감상을 미루지 말자.

 



폴 드 만, <독서의 알레고리>

가라타니 고진,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

자크 랑시에르, <감성의 분할>

 














시인은 교보문고를 추억한다. 어린아이들을 삶아 버리고 싶어 안달이 난 끔찍한 유모들에 둘러싸인 불길한 시대에 시인은 문학에서 위안을 구한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공지영의 <도가니>, 김훈의 <공무도하>

이승우의 <한낮의 시선>, 배수아의 <북쪽 거실>, 하일지의 <우주피스 공화국>, 김연수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경욱의 <위험한 독서>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투명인간>의 성석제, <오빠가 돌아왔다>, <살인자의 기억법>의 김영하.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태연한 인생>의 은희경, <달려라 아비>, <침이 고인다>의 김애란, <사육장 쪽으로>의 편혜영, <풀밭위의 대지>의 김태용 등등








































































 

 

마세도니오 페르난데스, <계속되는 무>

롤랑 바르트, <롤랑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모리스 블랑쇼, <도래할 책>















 

금시초문의 작가, 보르헤스와 닮은 소설? 그러나 페르난데스가 원조였다니!

 

오랜 세월 동안 그는 지방과 왕국, 산맥과

, 섬 앞에 떠 있는 배들과 다양한

물고기, 방들과 각종 도구들, 그리고 사람들의

이미지로 어떤 공간을 채우는 일에만 매달렸다.

죽기 얼마 전, 그는 선들이 복잡하게 얽힌

미로가 결국 자기의 얼굴 모습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 마세도니오 페르난데스, <계속되는 무>

 

누군가가 쓴 책들은 계획적, 건축적, 확정적, 위계적”(모리스 블랑쇼, <도래할 책>)이다. 책들은 만들어지고, 그리고 존재한다. 누군가는 그 책들을 횡단하는 모험 속에서 자신의 현전을 되찾는다. 블랑쇼는 이렇게 말한다.

 

책이 가진 명백함, 그 명백한 반짝임, 이것은

책과 관련해 그것은 존재하고 현전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책이 없다면 아무것도 결코 현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모리스 블랑쇼, <도래할 책>

 

블랑쇼는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 말라르메가 독자를 조작자라고 불렀음을 일러준다. 이때 조작이란 제거이며 지양이다. 블랑쇼는 그 점에 대해 이런 설명을 붙인다.

 

읽는다는 것은 제거이며 그것은 자신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을 성취하는 작동인 것이다.

자기 자신과 대결함으로써 자신을 증명하고,

자신을 확립하면서 자신을 중단시키는 작동인 것이다.

 

- 모리스 블랑쇼, <도래할 책>

 

서동욱, <일상의 모험>

호이징하, <호모 루덴스>

박영택, <얼굴이 말하다>














 

화가 문순우는 사진, 회화, 드로잉, 설치미술, 도예 등 전방위적으로 작업하는 예술가라고.

 

예술이 자발적 노동이라면, 이 노동을 관통하는 것은 리비도를 구성하는 충동들의 상당한 발산” (지그문트 프로이트)이다. 문순우의 작업에서 발견하는 것도 그와 같은 재료들을 갈고 닦고 자르며 그것들을 거머쥐고 분출하는 창조적 에토스의 힘이다....그것은 놀이- 즐거움이다. 호이징하가 명제화한 바로 그것. “모든 시는 놀이에서 태어난다.” 고 했을 때, 그 놀이하는 인간의 탄생이다. 문순우의 예술가적 정체성은 놀이하는 인간과 만드는 인간(호모 파베르)의 사이에 걸쳐져 있다


- 2015.7.27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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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6-05-04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월호에 `영감`을 받아 `시`를 쓴 정치인은 아직도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를 모른(를거)다는. `뭘? 뭘? 내가 뭘 어쨌다고들 그러는거야`

시이소오 2016-05-04 11:38   좋아요 0 | URL
시를 듣고 살의를 느낀 최초의 시네요 ^^;
 

메를로퐁티, <지각의 현상학>

강미라, <몸 주체 권력>

후쿠오카 신이치, <생물과 무생물 사이>

후쿠오카 신이치, <동적 평형>















 

시인은 여름을 원주 연세대 기숙사에서 보냈다.

 

사람은 몸-주체이고 몸은 사건들이 각인된 표면”(미셀 푸코)이다. 공간은 그냥 객체가 아니라 몸-주체에 의해 소유되고 거꾸로 몸 주체의 지각활동과 운동은 공간에 의해 제약된다. -주체와 그것이 놓인 공간은 상호 삼투하며 의미작용을 하는 관계에 있다.

 

낯선 공간속에서 시인은 불면의 밤을 보냈나 보다.

 

밤에, 불면속에 나의 깨어 있는 상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깨어 있는 것은 밤 자체이다.

그것은 깨어 있다.

이 익명적인 깨어 있음 속에서 나는 완전히 존재에 노출되어 잇다.

이 깨어 있음 속에서, 나의 불면을 채우는 모든 사유는 아무것에 대해서도

중지되지 않는다.

 

에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

 폴 오스터, <선셋파크>

마르탱 파주, <숨은 용을 보여주는 거울>
















 

나는 생각했다. 죽기전에 에게 해를 여행할 행운을 누리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 아직 그리스를 못 가보다니! 아고, 그리스 사람들 요즘 힘든데 이런 생각을 해도 될라나.

그리스가서 돈을 펑펑 쓰고 오면 좋을텐데.

 

마르탱 파주? ‘이토록 아름답고 짧고 슬픈 사랑이라니!’ , 파주!

읽어야겠다.

 

이나 거울은 현실의 이면에 숨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아름다움과 신비를 가리킨다. ‘은 숨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을 보여주는 거울이 필요한 것이다. 소년은 자신이 깨달은 그 사실을 용을 보여주는 거울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겠다. 우리는 그 거울을 찾아야 한다. 때로는 직접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불완전한 감각이 우리를 속이려 할 때 큰 도움일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마티아스 루, <축구화를 신은 소크라테스>

강신주,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

왕멍, <나는 장자다>














 

축구로 철학을 하다니! 11명의 상대방은 타인이면서 또한 또 다른 .

공동의 목적을 위한 협력, 승리하고자 하는 욕망! 게임의 흐름을 파악하려는 생각-의식.

 

축구가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돌아가는 삶이라면, 축구장은 승리하고자 하는 갈망 속에서 의식과 주체가 출현하는 장이다. 축구장은 규범들이 작동하는 사회이고, 갈등들을 해결하는 정치가 작동하는 세계 그 자체다. 그 안에서 철학의 여러 주제들을 끄집어낼 수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캐롤 스클레니카, <레이먼드 카버 어느 작가의 생>

폴 세르주 카콩,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 가쁜 사랑>















 

하루키의 산문들은 그야말로 술술 읽힌다. 역시 이 책도 그러한 듯. 하루키는 꿈을 좇지 않는 인생이란 채소와 다름없다라는 구절을 반추한다. 채소는 인간과는 달라서 꿈을 좇지 않고도 사는 데 지장이 없을 테지만, 인간이란 종자는 꿈이 없으면 마치 알맹이가 빠져버린 만두와 같이 자신을 무가치하다고 느낄 것이다.

 

레이먼드 카버, 알코올 중독자였지만 글쓰기는 그를 구원해 주었다. 정말 정말 두꺼운 책이었지만 읽다보면 얇게 느껴질 정도로 재밌다.

 

로맹가리가 여배우와 사귄 건 몰랐다. 진 세버그. 그녀는 스물 한 살 때 마흔 다섯 살의 로맹가리의 연인이 되었다고. 결혼을 파경을 맞는다. 이혼 후 로맹가리는 승승장구하지만 진 세버그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화가는 자기 그림이 제 나이이고, 시인은 자기 시가 제 나이이며, 시나리오 작가는 자기 영화가 제 나이다. 바보들만 자기 동맥이 제 나이다.”

 

기자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앙리 장송이 했다는 말.

그렇다면 내 나이는 한 살?

 

이때쯤 시인은 뭔가를 쓰는 대신에 시집과 소설을 줄기차게 읽었다.

여름은 쓰기보단 읽기에 적합한 계절인가 보다.

 

알랭 바디우, <사랑예찬>


 

바디우가 이런 책도.

 

사랑에 대해 말하는 책들은 많지만, 정작 사랑의 핵심을 보여주는 책은 드물다. 그저 주변을 긁적거리며 변죽만 울리다가 마는 책들이 부지기수다. 알랭 바디우의 <사랑 예찬>은 다르다. ”

 






최초의 장애물, 최초의 심각한 대립, 최초의 권태와 마주하여

사랑을 포기해버리는 것은

사랑에 대한 커다란 왜곡일 뿐입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공간과 세계와 시간이

사랑에 부과하는 장애물을 지속적으로, 간혹은

매몰차게 극복해나가는 그런 사랑일 것입니다.

 

대문호 셰익스피어는 사랑은 그저 미친 짓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설사 사랑이 미친 짓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 찬란하거나 쓸쓸한, 명랑하거나 우울한 하나하나의 생이란 바로 그 사랑의 부정할 수 없는 결과물들이기 때문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사랑은 미친 짓이라기보다는 위험한 모험이다.”

 

크리스토프 바우젠바인, <축구란 무엇인가>

이진경, <노마디즘>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















 

스포츠에 관한 책들도 은근 많구나.

 

축구를 한다는 것은 자기 영혼이 축구공의 영혼이 되고 심장과 살갗이 가죽이 되는 것이다.

 

무엇과도 접속될 수 있는 열림이 리좀의 핵심 원리다. 리좀은 어디서나 접속이 일어난다. 이 접속은 새로운 배치를 만들고, 어느 한 점으로 귀속되지 않는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새로운 배치를 만들되 이질적인 모든 것을 끌어와서 새로운 이질성으로 나아간다. 리좀의 사유체계안에서 이질성은 배척되는 대신에 다양성을 낳는 계기로 삼는다.”

 

로제 그르니에, <율리시즈의 눈물>

호이징하, <호모 루덴스>

크레이그 네켄, <중독의 심리학>

유승훈, <다산과 연암, 놀음에 빠지다>

문광훈, 김우창 <세 개의 동그라미>

 


























놀이는 자연스러운 것, 바로 자유이다. 또 이것에 깊이 연관 지어져 있는 두 번째 특징은

놀이가 일상적인혹은 실제의생활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실제의삶을 벗어나서 아주 자유스러운 일시적인 활동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호이징하, <호모 루덴스>

 

놀이만큼 좋은 것도 없다. 도박도 놀이다. 얼마나 재밌었으면 도박을 놀음(노름)’이라 했을까. 그러나 도박은 패가망신의 지름길.

 

낭만적으로 시 제목 같은 바다이야기가 도박판이라는 걸 누가 알았겠어요? 그것은 문화관광부에서 문화, 낭만주의 그리고 사행, 이 세 가지를 붙여서 한 거 아닙니까. 사람 사는 데마다 도박장이 있는 것은 세계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거지요. 도박은 도박처럼 보여야지요. 문화관광부에서 하는 것이면 문화행사처럼 보여야 되고, 시면 시 같아야지요. ‘바다이야기처럼 시와 문화와 도박이 합쳐 있는 한국의 혼란 상태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것 같아요.

 

문광훈, 김우창, <세 개의 동그라미>

 

바다 이야기가 참여정부의 작품이란 게 씁쓸하다. 1902년 서울 주재 이탈리아 대사이던 칼르로 로제티는 도박에 대한 열정은 모든 한국인이 천부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말했다는 데. 정약용이나 박지원같은 선비들도 예외가 아니었다니! 하긴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위대한 작가들도 노름꾼이었다. 한국에 도박 중독자만 300만명이란다. 이들에게 비난보다는 치료가 우선이다.

 

버트란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피에르 쌍소 외, <게으름의 즐거움>

톰 호지킨슨, <게으름을 떳떳하게 즐기는 법>














 

러셀에 따르면 게으름에 대해 비판할 수 있는 근거는 딱 한 가지다. 그는 게으름을 타인의 근면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 말했다. 러셀은 근로가 미덕이라는 허구성을 폭로하면서 행복해지려면 일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게으름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남이다. 그러나

정신까지도 물러나는 것은 아니다. 맞서는 것을

잠깐 멈추는 식의 물러남이다. 이 세상이 뭐가 되는지,

되어가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라고나 할까.

 

피에르 쌍소, <게으름의 즐거움>

 

나처럼 게으른 사람 입장에서는 반가운 책이긴 하나 자랑스럽진 않다. 톰 호지킨슨의 <게으름 떳떳하게 즐기는 법>을 읽어봐야 겠다.

 

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

시모무라 고진, <논어>













 

 

한 번 난민이면 영원히 난민이다. 잃어버린 고향의 천국으로 되돌아가는 길은 거의 완전히 끊겼고, 수용소의 연옥에서 나가는 출구는 모두 지옥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 당신은 현실이 지옥같고 수용소같다고 느끼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이미 잠재적 난민이다.

 

노숙자들을 마주치면 남일 같지가 않다. 나는 잠재적 난민이다. 바우만은 쓰레기로 전락하게 되리라는 두려움이 사람들의 욕망을 한층 더 탐욕스럽게 하고 변화를 한층 더 욕망하도록 만들게 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나는 쓰레기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에드가 모랭, <스타>

 


<명량>, 혹은 마블 코믹스의 슈퍼 히어로 영화의 흥행은 삶이 점점 더 고단해지고 있음을 반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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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는 시인인가? 서평가인가? 우매한 질문이다. 그는 시인이면서 서평가니까. <글쓰기는 스타일이다>를 채 읽지 못했는데 언제 또 서평집을 내신건지. 고즈넉한 시골에서 읽고 쓰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그가 좋아하면 반갑고 (, 당신도!) 모르는 작가의 책이 나오면 나의 무지를 들여다 볼 수 있어 좋다.

 

사계절 동안 그가 함께한 책들을 따라가 본다.

 


벤야민의 <일방통행로>로 시작된다. 도서관에 갔더니 이 책과 함께 <발터벤야민의 공부법><가면들의 병기창>이 새로 들어와 얼른 집어왔다. <일방통행로>는 읽었지만 <베를린의 어린 시절><아케이드 프로젝트1,2>를 아직 읽지 못했다.

벤야민 공부하라는 계시인걸까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

 

최근에 바르트의 <롤랑 바르트의 마지막 강의>를 봐도 바르트의 어머니 사랑은 절절하다. <애도일기>가 나온지는 몰랐다.


 













시인은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다시 읽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 나 역시 다시 읽고 싶다. 첫 문장에 홀딱 반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구나.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



 












김동규? 나로선 금시초문이다. 시인은 김동규의 <철학의 모비딕>, <하이데거의 사이예술론>, <멜랑콜리 미학>을 읽었다고 한다. 하이데거 전공자인 듯.





 











이어 한병철의 <피로사회><시간의 향기>

 

한병철은 프루스트의 소설에서 빌려 온 고요한, 맑은 울림과 향기를 지닌, 투명한” “수정의 시간에 대해 말하며, 그 시간이 지속의 감정이 온전하게 유지되도록 만들고, 마침내는 “향기가 지닌 시간적 연장성 덕택에 자아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말한다. 향기로운 시간의 수정의 경험은 해체의 위협에 직면한 자아를 하나의 동일성 속에, 하나의 자화상 속에 안착하게 해줌으로써행복한 느낌을 주는 자기 귀환에 이르게 한다.

 

고유하게 존재하는 자는, 말하자면 늘 시간이 있다. 그가 항상 시간이 있는 것은 시간이 곧 자기이기 때문이다.”

 

난 늘 시간이 있는데, 내가 시간이었던 거얌??



 













좋은 삶은, 하이데거의 용어를 빌리자면, “머뭇거림”, “느긋함”, “수줍음”, “기다림”, “자체가 온존하는 삶, “오직 일만 하는 어리석음에 맞서는 지혜로운 삶, 바로 느림과 지속성을 거머쥐는 사색적 삶이다.

 

임형남, 노은주의 <이야기로 집을 짓다>는 건축을 이야기로 푼 책이라고 한다. 재밌겠다

정지돈의 <건축이냐, 혁명이냐>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에 적당할 듯.


데리야마 슈지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

 

데리야마 슈지라는 미치광이가 있었다니! 그의 영화를 아직 보지 못했다. , 짧고 굵은 삶이다.

 









최근에 <파리 좌안의 피아노 공방>과 손열음의 <하노버에서 온 음악편지>를 재밌게 읽었다. 이런 류의 책들을 더 읽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리셀 셔면의 <피아노 이야기>가 그러한 책일 듯.

 

좋은 연주자란 벌레나 독사, 시와 철학, 소리의 현상학과 인체 공학에 두루 조예가 있어야 한다. “피아노를 아는 것은 우주를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건반위의 철학자라니. 확 끌린다.



 













권오운, <우리말 소반다듬이>

 

시인은 우리말을 굴려 먹고사는 작가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권혁웅, <몬스터 멜랑콜리아>

 

, 역시 권혁웅이다. 언제 또 온갖 괴물들을 모아 놓았단 말인가.



 



정수복, <파리를 생각한다>

 

, 파리를 생각하다니, 파리는 느껴야지.

 

정수복의 <파리를 생각한다>를 읽으며 파리의 골목들을 더듬고, 노상카페에서 한가롭게 차를 마신다. <파리를 여자였다>(안드레아 와이스). <셰익스피어 &컴퍼니>(실비아 비치), <시간이 멈춰선 파리의 고서점> (제레미 머서), <파리의 좌안 피아노 공방> (사드 카하트)를 함께 읽어도 좋다.



 












엘리자베스 토바 베일리, <달팽이 안단테>

 

달팽이와의 1년 동안 동거의 기록이라니, 재밌을 듯.

 

자크 랑시에르, <감성의 분할>

 

<감성의 분할>은 해묵은 과제, 즉 예술 일반 혹은 미학적인 것의 자율성을 정치 윤리성의 맥락에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따져 묻고 그 본질을 규명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강석경, <신성한 봄>

 

시인은 토지문학관 입소, 도서실에서 강석경의 신작 <신성한 봄>을 집어와 단숨에 읽었다고. 손이 데일 듯 뜨겁다는 강석경의 문장들.

 


태고의 욕정, 호모 사피엔스에서 인류가 대물림한 바람 소리 숭숭 나는 욕정, 끝없이 욕구해도 채워지지 않는 인류의 야성이며 기갈든 황무지. 네 배꼽을 어미 짐승처럼 핥아주고 정액을 연유처럼 들이켤게, 네 뱃가죽 위에서

죽어도 좋아.

 

이거, 무시무시하다.

 

니나 상코비치, <혼자 책 읽는 시간>


 

날마다 책 한권 일기를 실천하는 여자의 자전체 체험과 책 이야기를 섞은 흥미로운 책이라고. 사랑하는 언니의 죽음을 이겨내기 위해 그녀는 자기 치유의 수단으로 책을 읽었다. 1년 동안의 그녀의 독서 원칙을 따라가 보는 건 ?

 

어떤 저자의 책도 한 권 이상은 읽지 않는다.

이미 읽은 책은 읽지 않는다.

읽은 책에 대해서는 모두 서평을 쓴다.

새 책, 새 저자의 책을 읽는다.

좋아하는 작가의 옛날 책을 읽는다.

 

하루에 다섯 권도 읽을 순 있다. 1년 내내 하루에 한 권 씩 읽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네 아이를 돌보면서 가사 노동을 하는 중임에도 하루에 한 권 씩의 책을 읽었다니! 거기다 서평까지. 생계걱정만 없다면 평생 저렇게 살고 싶다.

 

매일 나는 모든 책과 저자와 등장인물들과 결론에 대해 읽고 삼키고 소화하고 생각했다. 나 자신을 저자가 창조한 세계에 푹 담그고, 삶의 변화와 전환을 다루는 새로운 방식들을 목격했고, 유머와 감정이입과 연결의 도구를 발견했다.

 

이브 파칼레, <걷는 행복>

크리스토프 라무르, <걷기의 철학>

조지프 A 아마토, <걷기, 인간과 세상의 대화>

레베카 솔닛, <걷기의 역사>

다비드 르 브르통, <걷기 예찬>















 

걷기에 관한 책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걷기사소한 움직임들이 한데 모여 전체가 된 것” (조지프 A 아마토, <걷기, 인간과 세상의 대화>)이고, “뼈와 힘줄, 근육, 신경충격의 일이다. 한마디로 에너지 이동의 문제”(이브 파칼레, <걷는 행복>)이다.

 









한스 페터 뒤르, <나체와 수치의 역사>

필립 카곰, <나체의 역사>

로저 트리그, <인간 본성과 사회생물학>


 














다 벗고 살순 없는 걸까. 안 되겠지.

 

나체일 때 사람들은 더 현재적이 됩니다.

과거(걱정)나 미래(계획)에 대해 생각하기보다는

현재의 순간에 의미를 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더 상처받기 쉽고 의식적으로 더 자주

더 많이 자각하게 되고 더 많이 느끼게 되고,

그래서 더 자유롭고 더 진실하게 움직이고 행동합니다.

 

- 필립 카곰, <나체의 역사>

 

나체가 음란한 게 아니다. 나체를 음란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관념, 위선적 도덕의식, 체면이 음란한 것이다.

 

한병철, <피로사회>

에밀 시오랑, <절망의 끝에서>

에밀 시오랑, <독설의 팡세>

 















더는 잃을 것도 없는 상태, 인생의 밑바닥, 그 절망의 나락에 빠졌을 때 거기서 나올 수 있는 힘은 다름 아닌 절망에서 나온다. 용기를 내서 말하자면, 지금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절망의 감수성’, 혹은 절망에 반향되어 나오는 부조리에 대한 정열따위가 아닐까? 바로 분노, 혹은 광기로 치달을 수 있는 요기에서 현실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동력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

 

에밀 시오랑, 루마니아 철학자. 처음 듣는 이름이다. 극작가 이오네스코, 신화학자 엘리아데와 더불어 루마니아 출신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란다. 인용된 문장만 보아도 그의 역설과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인간은 삶과 죽음에 유예되어 영원히 만족하지 못하는 동물의 비극을 살고 있다. 내가 인간이라는 것이 지긋지긋하다.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즉시 인간임을 포기하리라.

 

원할 때 죽을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살고 있다. 자살이라는 가능성이 없었다면 나는 이미 오래전에 자살했을 것이다.“

 

에밀 시오랑은 84세까지 살았다고.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 세상이 의미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모든 것은 결국 무로 귀착되며,

세상의 법칙은 고통이라고 생각하면서 끝없이 번민하는 인간의 불행 속에서

나는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겠는가?

나 같은 인간이 있다는 것은 삶이라는, 태양 위를 덮고 있는 어둠이 너무 커서

결국 빛을 가리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김현진, <뜨겁게 안녕>

 

<뜨겁게 안녕>은 거대도시에서 빈민으로, 혹은 비정규직 노동자로 뜨겁게 이 사회와 몸 비비며 사는 20대의 거침없는 서울 생활 사수기거나 분투기다.

 

서효진, <이게 다 야구때문이야>

 

비정규직 노동은 야구의 원포인트 릴리프와 닮아 있다. 투수가 한 타자만을 상대하고 투수판을 내려오는 때가 있는데, 이게 원포인트 릴리프. 서효인은 모든 투수의 꿈인 퍼펙트게임을 이렇게 적는다.

 

결국 실패하겠지만, 다음 등판이 남아 있다.

실패의 예정, 그리고 도전, 사는 것 자체가

퍼펙트게임이니까.

 

파울볼은 일시적 유예상태다. 파울볼을 쳐낸 타자는 아웃되지 않고 다시 타석에 들어설 수 있다. ‘파울 볼아직 죽지 않았어. 그러니 힘내의 줄임말이다.



 












다치바나 다카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 피도 살도 안 되는 100>

다치바나 다카시, 사토 마사루, <지의 정원>

폴 드 만 <독서의 알레고리>

요네하라 마리, <대단한 책>

 















시인이 시골로 내려간 건 2000년 여름이었다고 한다. 자신을 돌아보고 책을 읽기 위해. 시인 생애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부러울 따름이다.

 

세상에는 책을 많이 읽은 사람과 그보다 조금 덜 읽은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살아간다. 책을 더 읽었다고 더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책에 몰입하고 뭔가를 창조해낸 사람들 덕분에 이 세상은 보다 더 살 만한 세상이 된다는 건 사실이다. 밥을 먹듯이 날마다 책을 골라 읽어라. 세상의 혼란과 잡담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만의 척도로 온전히 살고 싶다면 지금 당장 그렇게 하라!

 

파리누쉬 사니이, <나의 몫>

 

저자는 현대 이란 여성 작가다.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중간에 읽기를 멈출 수 없을 만큼 이야기는 생동한다고.

 

윤구병,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윤구병, <흙을 밟으며 산다>

윤구병, <꿈이 있는 공동체 학교>

 

아 부끄럽다. 나는 윤구병이란 이름도 금시초문. 국립대 교수자리를 작파하고 변산에 내려가 농부가 되어 공동체를 이끄신 분이라고 한다. 윤구병은 화학비료, 제초제, 농약을 쓰지 않는 삼무농법에서 더 나아가 비닐 안 쓰고, 항생제, 방부제 섞인 사료로 빚어진 짐승 똥으로 만든 유기질 비료 안 쓰는 오무농법을 고집, 병들고 썩어가는 땅을 되살려냈다. 동네 노인들도 농사의 자도 모르는 젊은 것들이 땅심을 되돌려놓았구먼하며 찬사를 쏟아냈다고.



 












엘렌 디사나아케, <미학적 인간 호모 에스테티쿠스>

움베르토 에코, <미의 역사>

움베르토 에코 <추의 역사>

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출구>

문광훈, <숨은 조화 심미적 경험의 파장>

 













박항률, 누구지 싶었는데 글을 읽고 보니 얼마 전 읽은 정호승 시인의 산문집 표지 그림을 그리신 분이다.

 

박항률의 그림에는 소녀와 소년들이 등장하고 그 배경에는 주로 새와 나비와 꽃이 나온다. 이 작은 오브제들은 화폭 안에서 매우 정적으로 배치된다. 고요는 고요 그 자체로써 영원성이라는 의미를 얻고 이 생명들이 처한 근원적 현존의 장으로 바뀐다. 박항률은 만질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고요를 그려내는 화가다. 고요는 마음의 해탈을 가리키는 표상이다

















2015.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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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ra 2016-05-01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아노랑 벌레와 독사는 무슨 연관성이 있나요?

시이소오 2016-05-01 17:09   좋아요 1 | URL
피아노를 아는 것은 우주를 아는 것이다, 라네요 ㅎㅎ

:Dora 2016-05-01 20:24   좋아요 0 | URL
피아노를 아는 것과 연주하는 건 항상 이퀄=은 아닌 것 같아요^^

시이소오 2016-05-01 20:29   좋아요 0 | URL
피아노 연주할줄 몰라요 ^^;

:Dora 2016-05-01 21:52   좋아요 0 | URL
걱정마셔요 제가 쫌많이 앎 ㅋㅋ피아노와 우주라니 넘 비약이 큰 거같아서 책 내용이 궁금했네요 한번 읽어보고 싶어요 감사^^

시이소오 2016-05-01 21:58   좋아요 0 | URL
골프든 야구든 피아노든 대가들의 책을 보면 공통점 들이 느껴져요. 궁극의 도는 하나라고 할까요? 영성으로 가는 여러갈래의 길들이 있는것 같네요^^

기억의집 2016-05-01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미드를 많이 봐서 그런지 롤리타가 무진장 불편했어요. 나보코프의 다른 작품은 좋다란 생각이 드는데, 롤리타는 좀 그렇더라구요. 특히나 저는 첫문장이 좀.... 역시 불편해. 였어요.

시이소오 2016-05-01 17:15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롤리타를 일종의 익살극으로 해석하는 분들이 많더라구요. 분명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진지하게 바라보기보단 일종의 은유로 보심 어떨지요? ^^;

기억의집 2016-05-02 21:57   좋아요 0 | URL
어제 쓰려했는데 오늘 쓰네요. 나보코프를 다시 해석하기로 한 계기가 슈뢰딩거를 읽은 후였어요. 시이소오님도 책을많이 읽으시고 과학책도 많이 올리시잖아요. 저도 과학책을 주로 읽는데, 슈뢰딩거가 사생활은 난잡했는데, 그 중에서 지인의 딸둘을 수학 과외 해주다가 한명하고 관계를 맺기 시작했는데 그 나이가 십대였어요. 생각해보니 나보코프자 슈뢰딩거가 살던 시대는 여자가 일찍 결혼하던 시대라는 걸, 타임워프해서 21세기에서 나보코프의 직품을 바라보는 게 아니고 20세기 초의 관점에서 바라보니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겠더라구요~ 그래서 예전에 제가 나보코프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쓴 적이 있었는데..시이소오님 페이퍼에~

시이소오 2016-05-02 22:06   좋아요 0 | URL
기억의 집님 플픽을 바꾸신거죠? 예전에 호랑이가 아니셨는데 ㅋ 기억 못해서 죄송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5-01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놀라울 거 뭐 있씁니까. 제가 보기엔 시이소오 님은 하루에 한 권 읽고 한 서평 쓰기를 몸소 실천하시는 분인데요, 뭘..

시이소오 2016-05-01 17:44   좋아요 0 | URL
저 요즘 게을러져서요. 매일 예전에 써놓은 글로 알라딘 땜방하고 있잖아요. 그리고 서평 아니고 지극히 개인적인독후감이죠. 5월엔 이독일필의 원칙을 고수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

기억의집 2016-05-02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리스 센닥의 괴물들이 사는 나라의 괴물이 아니고 다른 거였어요. 뭐 였는지 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시이소오 2016-05-02 22:36   좋아요 0 | URL
슈뢰딩거 나빠요. 롤리타는 워낙에 말장난이 심해서 외국인이 해석하기엔 한계가 있는 소설인것 같습니다. 롤리타가 신세기 미국을 상징한다는 해석도 있거든요.

소설에선 어느 정도 도덕적 비판으로부터 자유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포르노가 인간의 자유에 기여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육체적 포르노보다 정신적 포르노의 해악이 더 크다고 생각해요.
신자유주의와 재벌들 앞에서 영혼을 파는 지식인들 책이 더 문제아닐까요?

기억의집 2016-05-02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긴 해요, 근데 롤리타를 은유가 아닌 소설 그 자체로 바라보면 여자의 입장에서 불편해요. 특히나 미영은 소아애자에 엄청 엄격해서. 로앤오더란 미드보면 소아애자 범죄자를 체포하면서 롤리타 까거든요. 사회학적 관점에서 포로노와 소아애자에 대한 해석은 완전 달라요. 포로노는 성인의 공간이기에 자유에 기여했지만 소아애자 대한 건 범죄라는 인식이 강하고 절대 용납 안하더라구요. 롤리타를 바라보는 시선이 포로노적 표현의 자유라기보다는 범죄의 시선으로 보는 경우도 있기에 포로노와 다른 것 같아요.

시이소오 2016-05-02 23:55   좋아요 0 | URL
소아성애는 포르노와 달리 말씀하신대로 범죄죠. 어려운 문제네요. 어느정도까지 ㅇ예술에서 표현의 자유를 인정할 것인가, 권력자들은 언제나 통제하고 싶어하죠. 테러방지법처럼요.
나보코프는 소아성애자를 두둔하기 위해 롤리타를 썼을까요? 작가의 의도에 대해 고민해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