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리언 울프, <책 읽는 뇌>
로렌스, <제대로 된 혁명>
니체, <차라투스트라는이렇게 말했다.>
이윤, <굿바이 카뮈>
시지푸스의 형벌이 가혹한 것은 바위를 산꼭대기로 올려놓는 노동의 고단함보다는 그의 존재가 어떤 가치도 생산할 수 없는 노동의 무목적성에 갇힌 까닭이다. 사람은 의미를 향한 존재인데, 그런 본성에 반하여 의미를 낳을 수 없는 노동의 굴레에 갇힌다면 그보다 더 큰 비극은 없다.
나치는 수용소 포로들에게 무의미한 노동을 강제했다고 한다. 구덩이를 파고 그 흙을 도로 묻기.
‘무의미함’은 인간을 무력하게 만든다.
책을 읽다가 딴 생각을 한 적이 무릇 기하던가. 매리언 울프는 그것조차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추론과 생각에서 비롯된 예측불허의 간접적 에두름”이라고.
책 읽기는 나날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혁명’의 촉매제다. “혁명을 하려면 웃고 즐기며 하라. 소름끼치도록 심각하게 하지 마라. 너무 진지하게도 하지 마라. 그저 재미로 하라.
- 로렌스, <제대로 된 혁명>
책 읽기는 “산술적 평균을 깨는 결단”이라. 책 읽기는 ‘나’라는 존재지평을 넘어가야 한다. 넘어간다는 것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다른 사람의 의식에서 비롯된 전혀 다른 관점을 시도해보고 거기에 동화되어 결국 이입하는 프로세스”를 가리킨다.
시인은 19살 때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통해 큰 힘을 얻었다고. 19살에 그 책을 이해하다니! 시인은 마음이 흐트러질 때 마다 니체의 책을 꺼내 읽는단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내 인생의 책이기도 하다. 요즘 심란한데, 나도 다시 읽어볼까.
피터 그레이, 커미트 앤더슨, <아버지의 탄생>
루이지 조야, <아버지란 무엇인가>
이병동, <우리들은 문득 아버지가 된다>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아버지의 권위가 흔들리는 시대다. 아빠로서 매일 절감하고 섭섭하기도 하지만 그리 나쁜 일은 아닌 것 같다.
아니, 아버지의 권위가 약해지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가 아닐까.
현진건, <현진건 단편집>
최인호, <타인의 방>
은희경, <아내의 상자>
박현욱, <아내가 결혼했다>
아내는 진화한다라. 그래야겠지만 박현욱의 <아내가 결혼했다>의 아내는 글쎄. 그녀가 두 번 결혼하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럼 남편의 다른 사랑도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사사키 아타루, <이 치열한 무력을>
사사키 아타루, 금시초문이다. 73년 생이건만, ‘일본의 니체’라고!? 그의 철학비판에 동감이다. 오늘날의 철학은 삶과 유리되어 현학적인 ‘공부’로 전락하고 말았다. 철학이란 ‘더 좋은 삶을 살기위해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야 한다. 삶을 결락시킨 철학이 무슨 소용인가. 아타루는 20세기 최대 시인으로 파울 첼란을 꼽는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고 말했지만 (박근혜정권이 세월호 학살을 자행하고 있을 때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라는 시를 썼던 김문수가 떠오른다. 죽을때까지 잊지 않겠다.) 파울 첼란은 수용소에서 해방된 이후에도 꾸역꾸역 시를 썼다.
파울 첼란은 <죽음의 푸가>에서 “더 달콤하게 죽음을 연주하라”고 쓴다. “더 둔중하게 켜라 그러면 너희들은 연기가 되어 공중으로 올라간다”라고! 이 시들은 무고한 유대인 살상 행위가 더러운 범죄이고, 그 범죄자들에게 명백하게 유죄라고 선고한다!
최종 승리를 거두는 것은 ‘압도적인 현실’이 아니라 문학이고 철학이다. 현실은 지나가지만, 시간을 넘어 남은 것은 말이고 시다. 우리가 살아남은 것은, 그리고 망각과 무력을 넘어서서,꿋꿋하게, 어제의 삶보다 나은 삶을 꾸리는 것은 결국 이것들을 읽고 말았기 때문이다.
사사키 아타루의 이름을 기억해 두어야. (오호 신간이 출간되었군요)
스기우라 고헤이, <형태의 탄생>
책은 삼라만상을 감싸고 있다. 책 하나하나는 “움직이고 서로 대립하며 유동하고 확장하는 역동적인 그릇”이고 “다양한 힘을 삼키고 내뱉는 커다란 그릇”이다. 책이 감싸고 있는 삼라만상에 전 존재를 쿵, 하고 부딪치는 것, 그게 책을 읽는 행위다.
아타루는 세계를 바꾼 혁명들이 ‘폭력’이 아니라 ‘읽고 쓰는 것’, 즉 문학에서 시작했다고 힘주어 말한다. 우선 그는 우리가 아는 문학의 범주가 얼마나 협애한 것인가를 지적하고 그 외연을 한껏 넓힌다. 문학은 문자로 쓰인 것만 아니라 춤, 음악, 노래, 종교, 철학 등을 다 포괄한다. 읽는다는 것은 “최후의 고독한 싸움”(버지니아 울프)이고 “기도이고, 명상이고, 시련” (마르틴 루터)이며, “자신의 무의식을, 그 욕망을 텍스트에 직접 접속하는 것”이다.
아타루는 니체를 읽은 뒤 이렇게 쓴다.
“읽고 만 이상, 거기에 그렇게 쓰여 있는 이상, 그 한 행이 아무래도 옳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은 이상, 그 문구가 하얀 표면에 반짝반짝 검게 빛나 보이고 만 이상, 그 말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휴, 이거 대단한 꼴통임에 분명하다. 아타루의 책 얼른 읽고 싶다.
야니스 콩스탕티니데스, <유럽의 붓다, 니체>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오르한 파묵, <소설과 소설가>
나는 유럽의 붓다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인도에 붓다가 있다면 유럽에는
니체가 있다고 말이다.
- 니체, <유고 1882~1883/4>
역시 니체정도로 미쳐야 저런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다. <유럽의 붓다, 니체>에서 야니스 콩스탕티니데스는 니체와 불교의 접점을 모색한다. 니체는 삶이라는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너 자신을 저당 잡히고 너 자신을 잃어버려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나를 버려서 참 나에 도달한다! 선종에서도 나에 대한 부정은 깨달음의 전제조건이다.
소설, 혹은 문학 일반이 현실의 용도에서 아무짝에도 써먹을 데가 없고 “역사적 즉효성” 따위도 없지만 그것이 유의미한 것은 이야기 속에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그 무언가가 “인간 존재의 존엄의 핵”을 희구하는 ‘계속성’이라고 말한다. 모든 소설가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기가 누구인가?’라는 물음과 싸운다.
소설에는 ‘감춰진 중심부’가 있다. 모든 이야기들은 이 ‘감춰진 중심부’의 먼 쪽에서부터 시작한다. 어느 결에 이야기는 이 ‘감춰진 중심부’를 꿰뚫는다. 파묵은 이렇게 쓴다. “중심부는 삶에 관한 심오한 관점, 일종의 통찰입니다. 깊은 곳에 있는 실재 또는 상상의 신비로운 어떤 지점입니다. ” 소설가는 이 ‘중심부’에 대해 말하려고 이야기를 쓰는 것이고, 독자 역시 이 ‘중심부’을 읽으려고 소설을 읽는 것이다.
‘중심부’가 없는 소설이 태반이다.
이런 소설들은 그야말로 쓸모없다.
마이클 크로닌, <팽창하는 세계>
지그문트 바우만, <유행의 시대>
세계화는 세계를 평평하게 만든다. 지역의 고유한 차이와 다양한 차원이 사라지고 있다. ‘귀속의 순환’ 고리도 깨진다. 크로닌은 스코틀랜드 이론가 앨러스테어 매킨토시가 제시한 ‘귀속의 순환’을 이렇게 요약한다.
그가 말하는 순환에는 네 가지 요소가 있는데,
이것들은 차례차례 다음 요소에 영향을 준다.
먼저 ‘장소의 감각(기초)’은 ‘정체성의 감각(자아/머리)’을 낳고, 정체성의 감각은 ’가치의 감각(영혼/가슴)‘을, 그리고 가치의 감각은 ’책임의 감각(행동/손)‘을 낳는다는 것이다.
대중은 달라지고자 하는 욕망과 군중에서
벗어나고 극심한 생존 경쟁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충동으로 최신 유행을 추구하고,
유행은 뛰어남의 상징을 금새 대중적이고, 저속하고, 사소한 것으로 만들며,
심지어 아주 잠깐 주의를 잃거나 한순간이라도
손놀림의 속도를 늦추면 의도와는 정반대로
개체성을 잃는 결과를 낳게 한다.
유행을 좇는 ‘사냥하는 삶’은 자본주의 사회에선 죽기 전까지 끝나지 않는다.
윤혜숙, <뽀이들이 온다>
<뽀이들이 온다>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이제는 사라진 ‘전기수’라는 이야기꾼들의 세계를 보여준다. <전기수>는 당시 사양산업이었다. ‘변사’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당대 최고의 변사 최한기는 전기수였던 수한을 변사로 키우려고 한다. 그러나, 수한은 전기수의 길을 포기하지 않는다. 매혹적인 이야기다. 당장 읽고 싶다.
사마천, <사기>
노자, <도덕경>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시인에 따르면 교양인이라면 박경리의 <토지>를 통독하고, 고은의 <만인보>정도는 꿰고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교양인 되기 힘들다. 교양인 안 할까 보다. 교양인으로서 필독서로 그가 뽑은 책은 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사마천의 <사기>, 노자의 <도덕경>, 소로의 <월든>이다.
황현산, <잘 표현된 불행>
오, ‘감탄을 하며 빨려드는 책’이라니! 한국 문학평론의 정수! 우뚝 솟은 말의 성채, 그 봉우리의 위엄을 보여준다고. 시인이 비판한 A 작가는 누굴까. 비평권력이 만들어 놓은 작가. 움베르트 에코의 <퇴짜 맞은 명작들>엔 오늘날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들에 대한 당대 비평가들의 실수들이 나열되어 있다. 예를 들면 토마스 만 :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이 소설은 작가가 시시한 사람들의 시시한 이야기를 시시한 문체로 이야기하는 두 권의 방대한 책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
시인에 따르면 좋은 비평가란 손꼽을 정도로 희귀한 반면에 허접한 비평가들은 차고 넘친단다. 허접한 비평가들은 패거리를 만들고 담합하고 음모를 꾸민다.
비평가들에게 감상을 미루지 말자.
폴 드 만, <독서의 알레고리>
가라타니 고진,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
자크 랑시에르, <감성의 분할>
시인은 교보문고를 추억한다. 어린아이들을 삶아 버리고 싶어 안달이 난 ‘끔찍한 유모들’에 둘러싸인 불길한 시대에 시인은 문학에서 위안을 구한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공지영의 <도가니>, 김훈의 <공무도하>
이승우의 <한낮의 시선>, 배수아의 <북쪽 거실>, 하일지의 <우주피스 공화국>, 김연수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경욱의 <위험한 독서>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투명인간>의 성석제, <오빠가 돌아왔다>, <살인자의 기억법>의 김영하.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태연한 인생>의 은희경, <달려라 아비>, <침이 고인다>의 김애란, <사육장 쪽으로>의 편혜영, <풀밭위의 대지>의 김태용 등등
마세도니오 페르난데스, <계속되는 무>
롤랑 바르트, <롤랑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모리스 블랑쇼, <도래할 책>
금시초문의 작가, 보르헤스와 닮은 소설? 그러나 페르난데스가 원조였다니!
오랜 세월 동안 그는 지방과 왕국, 산맥과
만, 섬 앞에 떠 있는 배들과 다양한
물고기, 방들과 각종 도구들, 그리고 사람들의
이미지로 어떤 공간을 채우는 일에만 매달렸다.
죽기 얼마 전, 그는 선들이 복잡하게 얽힌
미로가 결국 자기의 얼굴 모습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 마세도니오 페르난데스, <계속되는 무>
누군가가 쓴 책들은 “계획적, 건축적, 확정적, 위계적”(모리스 블랑쇼, <도래할 책>)이다. 책들은 만들어지고, 그리고 존재한다. 누군가는 그 책들을 횡단하는 모험 속에서 자신의 현전을 되찾는다. 블랑쇼는 이렇게 말한다.
책이 가진 명백함, 그 명백한 반짝임, 이것은
책과 관련해 그것은 존재하고 현전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책이 없다면 아무것도 결코 현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 모리스 블랑쇼, <도래할 책>
블랑쇼는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인 말라르메가 독자를 ‘조작자’라고 불렀음을 일러준다. 이때 조작이란 제거이며 지양이다. 블랑쇼는 그 점에 대해 이런 설명을 붙인다.
읽는다는 것은 제거이며 그것은 자신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을 성취하는 작동인 것이다.
자기 자신과 대결함으로써 자신을 증명하고,
자신을 확립하면서 자신을 중단시키는 작동인 것이다.
- 모리스 블랑쇼, <도래할 책>
서동욱, <일상의 모험>
호이징하, <호모 루덴스>
박영택, <얼굴이 말하다>
화가 문순우는 사진, 회화, 드로잉, 설치미술, 도예 등 전방위적으로 작업하는 예술가라고.
예술이 자발적 노동이라면, 이 노동을 관통하는 것은 “리비도를 구성하는 충동들의 상당한 발산” (지그문트 프로이트)이다. 문순우의 작업에서 발견하는 것도 그와 같은 재료들을 갈고 닦고 자르며 그것들을 거머쥐고 분출하는 창조적 에토스의 힘이다....그것은 놀이- 즐거움이다. 호이징하가 명제화한 바로 그것. “모든 시는 놀이에서 태어난다.” 고 했을 때, 그 놀이하는 인간의 탄생이다. 문순우의 예술가적 정체성은 놀이하는 인간과 만드는 인간(호모 파베르)의 사이에 걸쳐져 있다.
- 2015.7.27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