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26.










이중 하나는 거짓말읽기. 새로 나온 니트 에디션의 디자인이 셋 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 구입을 미루고 있다가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다. 채운과 소리와 지우의 이야기가 처음에는 따로 진행되는 듯하다가 조금씩 엮이기 시작. 문득 청소년문학과 성인 문학(?)의 차이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풀어낸다면 청소년문학일까? 그렇다면 이 책은 청소년문학일까? 나에게 청소년문학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것은 보통 결말 처리 방식인데, 그렇다면 죽이고 싶은 아이당연하게도 나는 너를은 그런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 같고


 

25.3.29.

이중 하나는 거짓말완독. 인물들의 섬세한 심리 묘사나 문장의 세공력, 인물에게 몰입하게 만드는 스토리에는 감탄하며 읽었으나, 하나씩 드러나는 진실을 보며 거짓말’, ‘비밀이라는 소재가 하나의 테마로 모이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하나의 비밀이 다른 비밀을 돕는다는 말이 잘 와닿지 않는 이유이기도. 알면서 외면했거나 미처 알지 못했던 진실을 하나씩 마주하면서 마음의 상처를 극복해나가는 세 인물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느꼈던 처연함은 잔잔하게 오래 남았다.


아버지는 자신이 빈말 못하고 솔직하다는 사실을 늘 자랑스러워했다. 실은 그게 어떤 무능을 뜻하는지 잘 알지 못하면서. (75)


지우가 잠시 숨을 가눈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난이란……

지우는 문득 교실 안이 조용해지는 걸 느꼈다.

-가난이란 하늘에서 떨어지는 작은 눈송이 하나에도 머리통이 깨지는 것.

지우는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지만 조금 의연해진 투로 다음 문장을 읽어나갔다.

-작은 사건이 큰 재난이 되는 것. 복구가 잘 안 되는 것…… (85)


지우는 방과후 청소를 하다 미술 선생님 책상에서 낡은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아동'이니 '치료'니 하는 말이 적힌 학술 도서였다. 지우는 별생각 없이 그 책의 책장을 스르륵 넘겼다. 그러곤 익명의 아동들이 그린 어둡고 기이한 그림을 보다 문득 어떤 문장 앞에 멈췄다.

 

미술은 자기 정화 효과가 있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문제를 설명해주지만 쉽게 고통을 덜어주지는 않는다.

 

지우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그 문장을 한번 더 훑었다. '쉽게 고통을 덜어주지 않는다'는 말, 믿을 만한 말이라 생각했다. (119)


'이야기가 가장 무서워질 때는 언제인가?'

소리가 슬픈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이야기가 끝나지 않을 때.'

그런데 채운은 지금 무서운 이야기 속에 갇혀 있는 모양이라고, 거기서 잘 빠져나오도록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소리는 곧 채운과 만날 예정이었고, 그건 하나의 비밀이 다른 비밀을 돕는다는 뜻이었다. (134-135)


눈앞에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온 힘을 다해 다른 선택지를 찾는 건 도망이 아니라 기도니까. (182)


지우가 이해하기로 지우개는 뭔가를 없앨 뿐 아니라 '있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대상에 빛을 드리우고 그림자를 입힐때 꼭 필요했다. 그 대상이 사물이거나 인물, 심지어 신일 때조차 그랬다. 누구든 신의 얼굴을 그리기 위해서는 신의 얼굴을 조금 지워야 했다. '광원', 즉 빛이 출발한 곳을 먼저 파악해 빛이 닿는 곳은 어둡게, 그렇지 않은 데는 밝게 표현하는 게 기본이었다. (200)


이 게임의 목적은 얼핏 '거짓 가려내기' 같지만 실제로 이 게임에서 중요한 건 '누구나 들어도 좋을' '아무에게나 말해도 되는' 진실만 말하는 거였다. 당연했다. 누구도 초면에 무거운 비밀을 털어놓지는 않으니까. (226)


지우는 그보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자신이 그렇게 특별한 사람이 아님을 깨닫는 이야기, 그래도 괜찮음을 알려주는 이야기에 더 마음이 기울었다. 떠나기, 변하기, 돌아오기, 그리고 그사이 벌어지는 여러 성장들. 하지만 실제 우리는 그냥 돌아갈 뿐이라고, 그러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당시 자기 안의 무언가가 미세히 변했음을 깨닫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 삶의 나침반 속 바늘 이미지의 자성을 향해 약하게 떨릴 때가 있는 것 같다고. 그런데 그런 것도 성장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리는데다 거의 표도 안 나는 그 정도의 변화도? 혹은 변화 없음? 지우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다만 거기에는 조금 다른 이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고. 지우는 그 과정에서 겪을 실망과 모욕을 포함해 이 모든 걸 어딘가 남겨둬야겠다 생각했다. (233)

















서리북 17호 읽기. 여전히 지지부진한 헌법의 시간에 통탄을 금치 못하며 서평들을 읽는다. 제헌 헌법이 만들어지던 순간을 다룬 헌법의 순간도 흥미로웠지만 내 눈길을 더 끌었던 것은 히틀러의 법률가들이었다. 나치나 홀로코스트를 떠올릴 때면 끔찍하고 잔혹한 행위들의 이미지 때문에 행위자/세력들을 악마화하거나 단순화, 또는 추상화하여 떠올리는 경향이 있는 듯하지만, 책과 서평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그들은 갑자기 대뜸 등장해서 학살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것. 하나하나 차근차근 절차를 밟아가며 학살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것.



유정훈_헌법을 공부하는 슬픔과 기쁨














미국에는 헌법 해석에 관한 원전주의(originalism)라는 흐름이 있다. 법철학적 논의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보수 진영의 대법관들이 연방대법원 판결에 적용하는 법리다. 헌법은 헌법 기초자가 의도했던 바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인데, 헌법은 제정 당시 기초자에 의해 확정된 문서로서 후대의 해석자에 의한 변경은 허용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헌법을 '죽은 문서'라 칭하는 경우마저 있다. 법원의 헌법 해석 원칙이 이렇다면, 헌법 제정 당시 회의록은 역사에 그치지 않고 법 실무의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된다. (17-18)


대부분의 개헌은 권력자의 집권 연장을 위한 수단으로 혹은 쿠데타와 계엄 같은 비정상적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정치권의 합의와 통상적 절차에 따른 개헌은 1960년의 3차 개헌 그리고 1987년의 9차 개헌 정도인데, 그 역시도 4.19 혁명과 19876월 민주화운동이라는 정치적 격변의 결과였다. 우리에게 '개헌'은 제헌헌법을 토대로 부족한 부분이나 시대 상황에 맞지 않는 조항을 고쳐 나가는 것이 아니라 기존 헌법을 '갈아엎는 작업'이었다. 제정 당시 조문은 그대로 둔 채 수정헌법 조항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미국의 개헌과는 사뭇 다르다. (18)


적어도 초등교육은 의무적이며 무상으로 한다라고 규정한 제헌헌법 제16조에 '적어도'라는 문구가 들어간 과정, 무상의 범위에 관한 의원들의 논쟁 역시 인상적이다.(137-140) 이 부분을 읽으며 현행 헌법 제31조를 찾아보니, 의무교육은 무상으로 한다는 내용 외에도 모든 국민은 그 보호하는 자녀에게 적어도 초등교육과 법률이 정하는 교육을 받게 할 의무를 진다"라는 조항이 있다. 치열한 논쟁을 거쳐 제헌헌법에 들어간 '적어도'라는 세 글자는 지금도 우리 헌법의 일부이다.

헌법을 처음 배울 때 접했던, 무상교육은 왜 수업료에 국한되지 않고 의무교육에 필요한 일체의 비용을 포괄해야 하는지에 관한 논변은 헌법 공부에 흥미를 느끼게 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헌법 조문을 놓고 직접 다툰 것은 아니지만 한국 사회는 무상급식 이슈 때문에 이 문제를 실천적으로 경험하기도 했다. 그런데 무상교육 범위에 관한 대부분의 쟁점에 관한 논의는 제헌헌법 당시 이미 치열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무상·의무교육이라는 원칙과 신생 국가의 국력이라는 제약 사이에서, 헌법의 기초자들은 '적어도'라는 문구를 넣음으로써 무상·의무교육에 관하여는 앞으로 나아갈 일만 있어야지 후퇴나 축소는 없어야 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했다. (21)


이용우_탄핵의 딜레마 














탄핵은 14세기 영국에서 군주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시작되었으며, 고위 공직자의 책임성을 강화하는 제도로 발전했다. 미국은 이를 차용하여, 공화정과 권력 분립 체제를 유지하는 핵심 장치로 탄핵을 활용했다. 이철희는 탄핵을 '헌정 질서를 유지하면서 나쁜 권력을 축출하는 절차적 장치'로 정의하며, 권력 남용과 헌법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탄핵이 정치적 도구로 악용될 가능성과 당파성이 개입되는 본질적 한계를 지적한다. (28-29)


탄핵 제도가 도입된 이유는 첫째, 권력을 통제하고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탄핵은 권력이 집중되고 남용될 위험이 있는 상황에서 이를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장치로 설계되었다. 특히, 권력자가 법 위에 군림하지 않도록 하고, 공직자가 공익과 국민 신뢰를 저버릴 경우 이를 바로잡는 헌법적 조치이다. 둘째, 헌정체제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영국과 미국에서 모두 탄핵은 체제 자체를 붕괴시키기보다는, 체제 내에서 권력 남용을 바로잡아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도입되었다. 이철희는 이를 두고 탄핵은 '헌정 질서를 유지하면서 나쁜 권력을 축출하는 절차적 장치'라고 설명한다.

다른 한편 탄핵은 정치적 도구로 당파성을 지닌다. 탄핵은 본래 법적이고 헌법적인 절차지만, 그 도입 배경에는 강력한 정치적 동기가 자리 잡고 있다. 권력 간 균형을 잡기 위한 제도적 수단이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악용될 가능성이 있다. , 탄핵은 정치적 이해관계가 필연적으로 개입되는 것으로 의회에서의 탄핵 소추 의결은 정당 간의 권력 균형과 정치적 계산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다수당이 정치적 우위를 확보하거나 반대 세력을 제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 이는 탄핵이 민주적 책임성을 높이는 장치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도구로 오용될 수 있다는 의미다. (29)


탄핵은 정당 간의 극심한 갈등을 초래하고, 입법부와 행정부 간의 협력적 관계를 파괴할 수 있다. 대통령이나 고위공직자가 탄핵 위기에 처할 경우, 국가 운영이 마비되거나 중요한 정책 추진이 중단될 위험이 생긴다. 또한 탄핵은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는 대신, 문제를 법적 영역으로 넘기며 정치권의 책임 회피를 초래할 수 있다. 정치적 논의와 타협 대신 탄핵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에 의존하면, 대의 민주주의의 본질적인 기능이 위축될 수 있는 것이다. 국민 여론을 둘로 나누고, 정치적 분열과 대립을 심화하고, 특히 탄핵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추진되었을 경우 결과적으로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신뢰를 약화할 위험이 증폭되고 사회적 분열을 가속화한다. (33)


12·3 비상계엄 사태로 촉발된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 절차의 진행 과정에서 우리는 민주공화국을 지탱하는 서로 다른 이해를 갖는 집단의 사회적 합의 절차로서 정치를 없애고 극단적 대립과 헌법 기구 자체를 부정하는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다. 대통령이 사적인 목적을 위해 국가의 무력으로 헌법 기관의 작동을 멈추려한 데 이어 대중 동원을 통해 이 행위의 정당성을 찾으려 하고, 민주주의의 근간인 선거 제도를 부정하고 법원에 난입하는 극단적 대립이 나타나고 있다. 사실 이는 탄핵 제도가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불완전성에 기인한다. 이 불완전성은 법적 정당성뿐만 아니라 사회적 합의를 통해 보완되어야 한다. 따라서 작금의 탄핵 정국이 단순히 한 권력자의 축출 여부를 넘어, 민주적 헌정 질서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한 사회적 합의를 형성하는 계기가 될 것인지 주목해야 한다. (35)


이황희_법은 어떻게 정의와 멀어지는가














근대 입헌주의는 18세기 말 미국과 프랑스에서 발생한 시민혁명의 결과로 탄생했는데, 이 새로운 이념은 신분이 아닌 개인을 사회 질서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여기서 개인은 과거에 사회를 하나의 질서로 묶어 주었던 종교나 인습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평등한 자유의 주체로서 각자가 자신의 도덕적 세계의 중심으로 간주되었다. 평등한 자유의 사적·공적 실현이라는 규범적 이상은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지속적인 요구를 생성했고, 이는 그에 적합한 정치적 질서를 만들어 나가는 동력이 되었다. 이로써 국가 권력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수단으로 자리매김했다. 이제 권력은 분할되어야 하고, 상호 견제되어야 하며, 법에 구속되어야 한다.

파시즘의 영향에 따라 개인에 대한 집단의 우위를 관철하고자 한 나치는 이러한 근대 입헌주의의 역사적 기획과 대결을 피할 수 없었다. 우선, 근대 입헌주의의 자장 안에 놓여 있는 바이마르 헌법의 규범적 영향력을 극복해야 했다. 이 극복은 특히 '수권법'이라 불리는 '민족과 제국의 비상사태 해결을 위한 법'(1933.3.24.)'제국 재건에 관한 법'(1934.1.30.)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전자는 "정부가 의회의 감시 없이도 법을 제정하고 헌법을 수정할 수 있도록 승인"(69)한 법이고, 후자는 각 주의회를 중단시키고 그 주권을 제국에 넘김으로써 독일의 연방 구조를 뒤엎어"(70) 버린 법이다. 두 법은 모두 형식적으로는 바이마르 헌법으로부터 탄생했으나, 내용적으로는 자신을 잉태한 헌법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역설을 남겼다. (41-43) 


그들은 먼저 근대 입헌주의의 주축을 이루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편적인 것'이 아닌 '맥락적인 것'으로 재규정했다. 이러한 자유와 권리는 “19세기 군주국가를 겨냥했던 종류의 운동에서나 성립한다"(78)는 것이다. 개인의 주관적 공권을 강조하는 생각은 '통치자와 시민이 대립하는 체제'와 같은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서나 유의미하므로, 나치 국가처럼 개인이 민족공동체의 구성원이 된 새로운 질서에서는 이러한 권리가 필요하지 않다고도 했다. 여기서 개인은 민족공동체의 질서에 따르는 범위에서만 법적 지위를 누리게 된다. 법은 개인의 이익을 보호하는 대신 공동체를 육성"(21)하는 역할을 맡아야 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의식이 약화되면, 국가 권력의 남용에 대한 경계심도 함께 사라질 수밖에 없다. 나치 법률가들이 권력 분립, 견제와 균형 같은 근대 입헌주의의 요소와 손쉽게 결별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그들은 권력의 집중을 정당화하고, "한 사람의 손에 최고의 정치적 리더십이 온전히 주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98)라고 주장했다. 권한의 남용 문제는 정치적 지도자의 개인적 자질을 통해 방지할 수 있다고도 보았다. (43)


그간 주류적인 설명은 나치 정권이 법을 이용해 무도한 행태를 보일 수 있었던 책임을 법실증주의에서 찾아왔다. 법실증주의는 법과 도덕을 분리하여 사고하는 탓에, 나치의 부정의한 법을 유효하게 통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나치 법률가들이 법실증주의에 매우 비판적이었음을 지적한다. 오히려 그들은 "법과 도덕의 통합”(244)을 옹호했고, 저자는 이것을 나치 법이론의 가장 큰 특징으로 규정한다. (45)


그러나 나치 법이론의 문제는, 법과 도덕의 연관성 그 자체가 아니라, 법이 어떤 도덕과 연관되어 있는가에 있었다. 도덕이란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행동과 그 조정에 관한 규범 체계를 말하는데, 우리는 통상 정직, 성실, 타인에 대한 존중 등을 떠올린다. 그 반면에, 나치는 다른 방향의 도덕을 추구했다. 그들은 민족공동체나 인종적 동질성 개념을 법의 도덕화를 위한 토대로 삼고, 명예, 충성, 품위 같은 윤리적 개념을 법적 개념으로 변형시켰다. 인종적 균등 같은 "동질적 민족공동체 신화"(251)의 요소들도 법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45)


한편, 나치 법률가들이 추구한 법의 도덕화는 국가 권력이 개인의 내적 영역에 더 깊이 개입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법 규범과 윤리 규범의 차이를 지운다면 국가는 행위에 관한 외적 자유의 영역만이 아니라, 내심(신념, 가치, 동기 등)에 관한 내적 자유의 영역에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게 된다. 원래 윤리에 관한 내심의 문제는 사적 자율의 대상일 뿐 국가 입법의 대상이 아니었다. 내면의 윤리적 헌신은 개인의 고결함에 관한 문제이지 국가의 강제력이 미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이 도덕을 자신의 내용으로 동원한다면, 단순한 규범의 준수만이 아니라 윤리적 동기까지 요구할 수 있게 된다. 정권의 권력 강화라는 결과는 불가피했다. (46)


그렇다면, 나치 법이론의 재생을 막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그릇된 도덕에 매몰되어 있었던 나치와 달리, 올바른 도덕을 법에 새기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저자는 법과 도덕의 분리라는 법실증주의의 핵심 주장을 옹호하면서 "도덕과 법을 별개의 규범 영역으로 다루어야" (276) 함을 강조한다. 그와 동시에 공표성, 투명성, 이해 가능성, 신뢰성, 예측 가능성, 일관성, 소급 입법 금지 같은 조건들을 법체계의 규범적 요건으로 설정함으로써 자의적인 권한 행사를 억제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에 공정성, 법 앞의 평등, 적법 절차, 공정 절차 등을 포괄하는 정의 개념을 추가함으로써 법체계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로 치면 이들은 헌법의 실정 규범과 기본 원리로 포섭할 수 있는 내용이다. 우리가 헌법을 제대로 실현한다면, 충분히 달성할 수 있는 과제들이다. (47)


법의 정당성을 내재적으로 산출해야 하는 근대 입헌주의에서 법은 민주적으로 제정된 실정법이며 헌법이 정한 요건에 따라 비로소 확정된다. 그러나 헌법이 정한 요건 자체만으로 법의 타락가능성이 차단되는 것은 아니다. 법의 타락을 막는 최후의 방벽은 정의로운 법에 의해 통치되기를 원하는 국민의 요구와 이를 위한 실천이다. 법에 대한 최종적인 감독자는 법의 궁극적인 작성자인 국민이기 때문이다.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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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5-04-02 0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른씨(청소년)하고 마주앉아서,
푸른씨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함께 소리내어 읽을 수 있다면 ‘청소년문학‘입니다.
여러모로 보면, 우리나라는 아직 푸른글(청소년문학)이 한참 멀었습니다.
푸른씨가 눈앞에서 목소리를 들으면서 느끼기에 창피한 글(표현)이 많더군요.

철들어 가면서 스스로 새롭게 ‘어른‘으로 어질게 피어나는 때인 푸른날이기에,
이러한 푸른날에 푸른씨한테 푸른숲으로 나아가는 푸른씨앗을 심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푸른글이라고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집 두 푸른씨하고 으레 소리를 내어 책을 함께 읽으면서
느낀 바를 적어 보았습니다.
 

25.3.17.














시녀 이야기를 다 읽음. 디스토피아적인 설정을 마련한 뒤 이 세계의 부조리함에 대한 완전한 각성을 하지 않은 인물을 화자로 둔 것이 탁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이라가 화자였다면 지금과 같은 작품이 되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에필로그에서 기록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거리를 만들어낸 것도 인상적이었고, 에필로그의 세미나에서 길리어드를 다루는 방식에서 역사가 되풀이될 것 같은 실낱 같은 불안함이 엄습하게 만드는 것도 오래 기억이 남는다. 『증언들』도 조만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는 아직 『눈먼 암살자』도 있고 『그레이스』도 있지만...

 


25.3.19.















겨울의 언어2부 읽기. 책에 대한 이야기여서 그런지 1부에 비해 호흡이 짧다. 책은 다른 그 어떤 곳에서도 배울 수 없는 가장 깊은 수준의 경청을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113)는 문장에 잠시 오래 머물렀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경청을 하지 못했었는지 생각하며.



25.3.21.














이만큼 가까이읽기. 책을 멀리하다가 다시 돌아올 때 정세랑의 책에 손이 가는 일이 종종 있다. 몇 년 전 앞부분만 읽고 오랫동안 덮어두었다가 처음부터 읽기. 정세랑표 청춘소설로 볼 수도 있겠지만 화자의 목소리는 굉장히 덤덤해서 분위기가 달라 보이기도. 3분의 2가 지났을 때 큰 사건이 이미 발생했는데 이후에 어떻게 내용이 이어질지..


남의 돈 처먹고 잘살 줄 알았냐는 말 나올 줄 알았는데, 막상 보니 남의 돈 처먹고도 못살면 쓰냐는 말이 나오더라. (80)

  └내가 아는 정세랑 소설의 따뜻한 매력은 이런 것.

 


25.3.23.

이만큼 가까이완독. 무척이나 힘들었을 시기를 화자가 잘 극복할 수 있었던 건 다른 친구들과의 느슨한 연결 때문일지도. 자주 만나지도 마음 속 깊은 얘기를 항상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무심하게 호신용품을 툭 던져주는 그런 연대. 소설처럼 큰 사건이 아니어도 저마다의 상처를 남기는 시기를 어떻게 지나고 기록으로 남길 것인가를 생각해보게 된다.


서로의 결점에 대해 너그러워졌다. 민웅이의 무기력에 대해, 찬겸이의 엘리트주의에 대해, 주연이의 쓰디쓴 부분에 대해, 송이의 방랑벽에 대해…… 아마 친구들도 나의 어떤 부분을 참아주고 있을 것이다. 일단 복합성 애도라 해야 할지 뭐라 해야 할지 그 시기를 참아준 것만 해도 고맙다. 변화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변화를 요구하지도 직언을 하지도 않았다. 서로의 얕은 수와 비굴한 계산까지도 웃음으로 넘겼다. 못나면 못난 대로 살아 있어달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한껏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지고 나서, 우리는 늘 서로의 안위를 걱정했다. (226)


내 생각에, 별로 좋은 나이라는 건 없는 것 같아. 어릴 때는 언제 어디에 있고 싶어도 결정권이 없고, 나이가 들면 지금이 언제인지 어디에 있는지 파악을 못하니까."

"언제, 어디에."

내가 반복했다.

"시공이야. 그게 무엇보다 중요한 정보야." (284)

















멀고도 가까운읽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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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10.















모래 사나이마저 읽기. 장자 상속이 마지막 작품이었고 해설까지 마무리함. 세 편 중에는 장자 상속이 재미가 떨어진다고 생각되었다. 세 편 모두 대체로 초현실적인 현상을 경험하고 혼란에 빠져 주변에 도움을 청하지만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건 너의 의지/의식의 발현이니 이성으로 환상을 물리쳐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신비로운 여인과 사랑에 빠졌다가 다시금 초현실적 현상(또는 환상)과 마주하여 추락/극복/탈출하며 현상에 얽힌 비밀이 밝혀지는 구조를 가지는 듯하다. 당시 낭만주의자들이 중세 독일의 전설과 민담의 세계를 동경했다고 하니 기이하면서도 몽환적인 작품의 분위기가 어디서 온 것인지 짐작이 되기도.



25.2.11.















서리북 16호 완독보건의료에 대한 서평과 기후 위기에 대한 서평이 인상적이었고, ‘고전의 강’ 코너는 스펜서에 대해 몰랐던 부분을 새롭게 아는 계기가 되었다그렇다고 해서 스펜서에 대한 평가가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지만.



이동진_기자의 눈으로 본 K-의료의 정치경제학














적어도 "2010년 이후 수행된 연구들은 어떤 데이터를 활용하든, 어떤 분석 방법을 택하든 대부분 [의사 수가] '부족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23) 대한의사협회 산하 의료정책연구원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예방의학교실 교수 홍윤철에게 의뢰하여 제출받은 미래사회 준비를 위한 의사 인력 적정성 연구조차 시뮬레이션한 시나리오 중 최대 규모인 1,500명 증원으로도 2043년까지는 계속 의사 수 부족이 심화되고, 그보다 작은 규모의 증원으로는 더 오랫동안 더 큰 규모의 의사 수 부족을 감수해야 한다고 예측한다. 2003년 의대 정원이 10퍼센트 감축된 이래 20년째 정원이 동결된 사이 의사의 평균 소득이 다른 직군에 비하여 가파르게 올라가고 한국이 평균 임금 대비 의사 소득이 가장 높은 국가가 된 사정도, 같은 기간 의대 입학 성적이 한없이 치솟은 사정도, 같은 결론을 가리킨다.(25, 27) 부족한 건 '과학적' 사실이다. (155)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원인은 여럿이지만, 그중 중요한 것이, 다시 저수가이다. 국민의 생명과 건강은 현대 국가가 어떻게든 보장해야 하는 가치에 속한다. 가난하든 부유하든 말이다. 그러자면 받는 서비스는 같은데 돈은 부자가 더 내게 해야 한다. 건강 보험이 그 역할을 한다. 서비스는 의료인이 하고 환자가 받는데 돈은 제3자인 건강보험공단이 내므로, 기준이 필요하다. 우리의 기준은 '행위별 수가(酬價)'이다. 특정 행위를 하면 그때마다 얼마씩 주기로 정한다. 이 수가가 '낮다'는 것이다. 박정희 정부 때 건강보험 제도를 처음 도입하면서 시장 가격보다 꽤 낮은 가격을 수가로 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반세기도 더 지난 일이다. 지금은 시장이 없어진 지 한참인데, '낮다/높다'는 어떻게 정할까? 건강보험공단이 직접 운영하는 유일한 병원인 '국민건강보험 일산병원'이 일종의 테스트 베드로 쓰인다. '적정 진료'를 정하고 그렇게 할 때 수가가 얼마나 커버하는지 본다. 물론, 의료진의 '적정' 인건비가 원가에 포함되어 있다. 민간 의료 기관이 저런 의미의 '적정 진료'를 하는 것도 아니다. '원가보상률'100퍼센트가 안 된다는 게 의사의 통장 잔고가 줄고 있다는 뜻은 아닌 것이다. 의사는 고소득 직종이다. 그러나 '원가보상률'70-80퍼센트밖에 안 되고 수가가 다른 나라보다 제법 낮다는 건, 기준을 무엇으로 잡든 낮기는 낮음을 시사한다. (157)


문제는 보건의료 정치의 가장 중요한 행위자들인 "정부와 의사의 관계"가 우리나라에서는 "미정립" 상태라는 데 있다.(51, 226-227) 동의할 수밖에 없는 지적이다. 그러나 그 해결책이 막막한 지적이기도 하다. 기존 인력의 재배치만으로 문제를 풀 수는 없다. '과학'적으로 그렇다. 일단 재배치부터 해보고 안 되면 증원을 논의하자는 건 하지 말자는 말과 다르지 않다(애초에 의사 수가 전혀 부족하지 않다는 입장에서라면 그럴 의도로 한 말일 테다). 반면 증원만 하고 그 뒤의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효과가 없거나 오히려 더 나빠질 수도 있다. 수가만 올리고 행위량을 통제하지 못하면 돈만 더 나간다. 수가는 그대로 두고 행위량만 통제하면 의사의 소득이 줄거나 줄어든 소득을 벌충하기 위한 또 다른 왜곡이 나타난다. (159)



조천호_불타는 폭염에서 불타는 야망으로














우리말의 '무더위' 또는 '찌는 듯한 더위'는 기온이 높을 뿐만 이 아니라 습도도 높아 견디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기가 습할수록 땀이 수증기로 증발하기 어려워져 몸에서 열을 빼내기 힘들어진다. 습한 폭염이 마른 폭염보다 더 위험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아울러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그렇듯 우리 몸에도 한계 온도가 있다. 습구온도 35도가 습한 폭염에 적응할 수 있는 인간의 최대 한계이다. 이 한계를 넘으면, 우리 몸은 스스로 없앨 수 있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열을 발생시켜 결국 죽음에 이른다. (168) 


무더위에 에어컨을 틀기만 하면 된다고 여기는 것은 위험한 삶의 방식이다. 에어컨은 우리가 진보라고 생각하는 것의 모든 광기와 역설을 상징하며, 개인의 안락함을 위한 기술이자 망각의 기술이기도 하다. 수 세기 전부터 시도되어 검증된 비기술적 기후 대응은 이로 인한 망각 때문에 대부분 무시되거나 잊혀져 왔다. 그 결과 공기 흐름, 하얀 지붕, 두꺼운 벽 등 폭염을 염두에 둔 건축 방법을 잊은 사회가 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에어컨은 복잡한 문제를 기술만으로 해결하려는 발상이며, 폭염의 불평등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격차를 상징한다. 더워질수록 이 격차는 더 커진다. (170)


우리는 살아 있는 모든 존재와 깊이 연결돼 있다. "인간은 앞으로 세상이 얼마나 더워질지, 나아가 [앞으로 닥칠] 역경과 소란을 헤치고 서로를 얼마나 많이 보호해줄 수 있을지를 통제할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457, 재인용) 인간이 일으키는 폭염은 결국 인간의 손길만이 해결할 수 있다. 폭염 대응은 우리가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 대해 얼마나 감수성이 있는가의 척도이기도 하다. 즉 폭염이 우리 수준을 드러낼 것이다. (174)



김도형_이상적인 사회로의 진화, 아니 진보에 대한 지적 탐색














그러나 스펜서의 이름이 다시 본격적으로 소환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후반 이후의 일로, 이것은 제국주의와 그 유산인 냉전이 끝나면서 신자유주의적인 정치, 경제사상이 다시 대두하기 시작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사실 스펜서 이론의 궁극적 목표가 개인과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주장은 신자유주의적 논의에 어떠한 근거를 제공하는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또 같은 시기 동아시아 담론의 부상과 함께 동아시아의 근대에 영향을 끼친 서구 사상 가운데 유력한 것으로 주목받은 사회진화론 의 영향 관계를 다룬 많은 연구들에서 그의 이름은 거의 항상 다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시에 그는 인간과 사회를 철저한 과학적 관찰과 논증에 입각해 논의함으로써, 거기에 전통적으로 가정되어 왔던 '특별함'을 부정하고 인간과 사회를 철저하게 자연의 일부로서 다루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방식은 신경생물학의 입장을 반영하여 인간의 전통적 가치, 문화, 종교, 이데올로기 등을 설명하고자 시도하는 현재의 인문사회학 트렌드와 잘 부합하는 측면이 있다. (198-199) 


잘 알려진 것처럼, 당대 생물계에 대한 관찰을 통해 자연선택을 중심으로 하는 진화론을 주창했던 다윈은 진화로부터 목적론적 지향을 배제함으로써 기존의 학설, 특히 라마르크의 설명과 차이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스펜서는 동시대인으로서 다윈의 논의 역시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보'의 법칙에 어떤 목적성을 전제하는 듯이 보이는데, 이것은 스펜서가 인간과 사회의 문제를 일 체의 자연 현상생물과 사회는 물론 무기물까지를 포함하는의 변화 법칙과 일치하는 방식으로의 설명을 시도하는 데에 더 큰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212-213)


기존의 많은 연구들에서 언급하는 '다윈의 탈을 쓴 스펜서'라는 식의 표현은 문제가 있다. 이 말은 스펜서에 의해 오해받는(다윈은 사회진화를 말한 적이 없는데 그것을 스펜서가 무리하게 적용해 해석했다는 식의) 다윈이라는 전제 위에서 나온 표현인데, 정작 오해받는 쪽은 스펜서로 보이기 때문이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 판된 것은 185911월의 일로 도리어 스펜서의 진보의 법칙과 원인보다도 뒤의 일이었다. 살펴본 것처럼 이미 이 시기의 스펜서는 다윈의 생물학 논의 이전부터 자기 나름의 진보관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유기체와 무기체의 구별마저 없는 '만물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한 논의였다. 스펜서는 자서전에서 "다윈 씨의 견해와 나 자신의 견해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를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생물진화론에 대해서 용불용설과 이 법칙 및 환경의 영향에 의해서 생겨난 변이의 유전적 전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골자로 하는 라마르크주의를 계속 고집했는데, 왜냐하면 환경에 의해서 만들어진 특색이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는 주장이 사회문화 의 영역에서는 자명한 것으로 보인다고 하더라도, 만일 생물학에서 부정된다면 유기체와 자연 현상을 동일한 법칙으로부터 파악 하는 데에서 도출되는 사회진화의 필연성의 논거를 부정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다윈은 자연과학자로서 자기의 연구 영역인 생물진화론을 사회로까지 확대 적용하려고는 하지 않았으나, 스펜서는 물리적·유기적·사회적 일체의 현상을 종합하여 설명하는 단일 원리로서 진화론을 제시하려고 했고, 이때 획득형질의 유전은 결국 사회의 진보를 설명하기 위한 필수적 요소였던 것이다. (213-214)



백수린_단 한 권의 책


 출간된 텍스트는 살아 있는 생명체나 다름없고 번역은 제2의 창작이란 걸 알고 있지만 번역할 때 나는 원저자의 의도대로 충실히 연주하는 음악가, 토씨 하나 놓치지 않고 대사를 정확하게 외우는 배우가 되고 싶다. 작가로서 나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텍스트를 쓰면서 의도한 바를 내 마음처럼 온전히 알아줄 단 한 명의 이상적인 독자의 존재를 꿈꾸는 사람이고, 번역을 할 때마다 나는 내가 그 역할을 수행해 낼 수 있기를 은밀히 욕망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당연히 그런 나의 바람은 매번 미끄러지고, 작가의 말을 정확하게 옮기는 일은 번번이 실패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언어적·문화적 간극 때문일 테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타자를 완벽히 이해한다는 것이 필연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고,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나는 언제나 실패가 예정되어 있는 숙명을 지닌 셈이다. 하지만 나는 실패가 자명하더라도 자꾸 무언가를 하려는 가련한 사람들에게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니까 또다시…….(234-235)
















겨울의 언어1부까지 읽음. 1부는 자신의 내면에 대하여 쓴 글이 주를 이룬다. 자신의 일상과 여행에서 찾는 자신의 지향하는 삶의 태도라고 정리할 수 있으려나. 물론 다양한 글들이 묶여 있어 하나로 일반화하기는 어렵겠지만. 2부는 책에 대한 글들이 묶여있는 듯하여 더 기대가 된다.

 















시녀 이야기읽기 시작.

 


25.2.14.

시녀 이야기읽기. 100쪽이 넘어가면서 화자가 조금씩 던져주는 단서를 따라가며 소설의 배경이 어떤 설정인지 흐릿하게 그리기 시작했다. 중간에 소위 의식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행위들을 보면서 이런 식으로 의식을 치르다니라며 뜨악하기도.















어바웃더챕터라는 곳에 방문. 여러 부분에서 블루도어북스가 연상되는 분위기와 배치다. 가지고 온 책을 읽을까 하다가 서가를 둘러보기로 하고 보는데 아주 나의 취향은 아닌 편. 꽂힌 책들을 둘러보다가 고른 책은 모드 쥘리앵의 완벽한 아이. 20세기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끔찍한 아버지의 압제가 담담하면서도 서글프게 펼쳐진다.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은 아버지의 오만함이 소녀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줄 수 있는지. 120쪽 정도까지 읽다가 시간이 다 되어서 덮어두고 나왔다. 다음에 더 읽기를 기약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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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6.

겨울의 언어읽기. 여행지에서 잠시라도 펼쳐본 유일한 책이었다. 그 후 쭉 덮어두었다가 다시 읽기. 라디오에서 이어지는 유행과 동시성에 대한 글, 예술 경험과 경청에 대한 이야기와 자기계발서에서 이어지는 책의 세계에 대한 글에 눈이 오래 머물렀다. 여행지를 산책하면서 나도 이렇게 깊이 생각해보았으면(마냥 활보만 하지 않고), 활자에 대한 사유를 나도 이렇게 글로 펼쳐낼 수 있었으면 하고.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은 동시성의 감각이다. 같은 시간에 같은 이야기를 나누는 일. 같은 세상을 공유하는 일. 더 이상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50%의 시청률을 기록할 수 없다. 100만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버도 누군가에게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트위터에서 하루 종일 회자되는 사건이 페이스북에서는 잠잠하고 지상파 방송에 나오는 사람이라고 해서 유명세를 보장받을 수 없다. 현재의 '유행'이란 주류로 분류되는 몇 개의 매체에 동시에 노출될 때에만 간신히 성립하는 종류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대 자본이 필요하기에 기업이 유행을 주도하기는 더욱 용이해진다. 벤야민은 자본주의를 하나의 새로운 종교로 해석하며 유행이란 이 종교를 유지시키는 제의와도 같다고 보는데, 이 새로운 종교의 화신과도 같은 거대 자본은 자기 입맛에 맞는 제의를 계속해서 규정할 수 있다. 말하자면 현재의 유행이란 동시성의 감각이 존재하는 것처럼 속이는, 만들어진 감각일 수도 있다. (41-42)


물론 모든 사람이 같은 프로그램을 보고 같은 연예인을 좋아하고 같은 옷을 입고 다니는 것만큼 섬뜩한 일은 없을 것이다. 이런 세상 속에서는 반대로 모두가 획일화의 틀에 갇힐 것임을, 결국 그 틀을 깨야 할 것임을 줄줄이 부연할 필요가 있을까. 다만 바라건대 그리운 것은 서로 다른 우리가 같은 시간에 같은 세상에서 존재한다는 감각이다. 매일 같은 시간에 DJ들이 그 자리에 있었기에 나는 또 한 번 돌아오는 하루의 짐을 조금 나눠 질 수 있었다. 혹은 적어도 그렇게 믿을 수가 있었다. (42)


향유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예술로 얻고 싶다면 그만한 시간을 기울여야 한다. 책으로 진입하는 머리글을 읽을 인내심과 스크린 앞에 꼼짝 않고 앉아 있는 두 시간을 내놓아야 한다. 그래서 어색한 분위기와 초조함과 마법 같은 이끌림과 불현듯 다가오는 슬픔 같은 것들이 몸을 통과하도록 두어야 한다. 우리가 아무것도 내놓지 않는다면 작품 역시 아무것도 내놓지 않을 것이다. 요약된 소설과 압축된 영화와 후렴만 있는 음악은 심장에 도달할 힘을 잃을 것이다. 예술의 경험이란 작가와 향유자가 시간을 함께 견디는 경험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하게 삶의 경험이다. (50-51)


시간을 견디는 경험이란 삶의 모든 순간을 받아들이고 의미 없는 삶에 의미를 부여해보려는 노력이며, 흘러가는 감정에 집중하고 타인의 경험에 귀를 기울이는 시도다. 그 모든 시도와 노력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데에 기여한다고 나는 믿는다. 인간은 다른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속에서만 자신의 몸 밖으로 나가볼 수 있다. 누구든지 태어나서 해볼 수 있는 경험보다 해보지 못하는 경험이 까마득하게 많기에 우리는 함께 있을 때만 서로를 보완할 수 있다. 그래서 함께 시간을 견디는 사람들, 혹은 예술만이 서로의 연장(延長)이 된다. (51)


수전 손택의 그 유명한 말대로 사진을 찍는shoot 일은 총을 쏘는shoot 일과 같고, "누군가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그 사람을 범한다는 것이다. 사진은 피사체가 된 그 사람이 자신에게서 전혀 본 적이 없는 모습을 보며, 자신에 대해 절대 가질 수 없는 생각을 갖기 때문이다. 즉 사진은 피사체가 된 사람을 상징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사물로 만들어버린다. 카메라가 총의 승화이듯이, 누군가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살인의 승화이다. 그것도 슬프고 두려운 이 세상에 어울리는 부드러운 살인."* 어떤 의미에서 나는 타인의 삶을 내 마음대로 사각형의 모습으로 재단하는 일을 멈춘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내 삶에 집중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가? 세상을 나의 시선으로 담아두고 싶다는 큰 욕망보다 내 삶만을 복기하겠다는 소박한 욕망이 차라리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뒷모습을 바라보며 상상한 타인의 삶은 어디까지나 나의 소망이 반영된 것은 아니었던가? (56-57)

수전 손택, 이재원 옮김, 사진에 관하여, 이후, 2005.


우리에게 인과가 중요치 않다면, 우리는 서로의 불완전한 여러 모습을 기어코 연결하여 하나의 진실로 만들려 들지 않을 수 있을까. 사진에 박제된 단면에게 삶의 진실을 담보하는 부담을 안기지 않을 수 있을까. 타인에게 나를 낱낱이 이해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어떤 것도 기워내거나 요청하지 않는 채로, 사건과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통과해보낼 수 있을까. 판단을 멈추고 잠시간 세상을 고요히 둘 수 있을까. 이것은 일종의 결벽일까. (60)


모든 여행지에서의 산책은 현실을 비현실로 체험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기망 행위다. 사람들은 그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비현실에 자신을 내맡기고, 순간순간 들이켜 마시게 되는 현실의 순간들습하고 뜨거운 공기, 잃어버린 지갑, 정리되지 않은 가방, 길을 찾느라 다 쓴 시간을 급하게 낭만이라는 포장지로 둘러싼다. 자신의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그곳의 현실은 곧 비현실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곳은 나의 터전이 아니기에 나는 손쉽게 그곳을 비현실로 만들 수 있다. (68)


우리가 서로의 엽서인 만큼이나 우리는 어디에선가 좌절해야 한다. 삶은 이어지고 현실은 포장되지 않는다. 여행지에서의 산책, 혹은 여행 같은 산책, 혹은 여행이기를 바라는 산책에는 모두 잠깐의 자기중심적 환상이 있다물론 환상 없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겠냐마는. 나는 광화문의 길쭉한 건물들을 올려다보면서, 지금 저 안에서 움직이고 있을 사람들, 동물들,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그런 것들을 구체적으로 떠올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나의 상상력을 탓하면서, 머쓱한 마음으로 엽서의 일부가 되곤 하는 것이다. (71)


자기계발서는 어디로도 가지 않는다. 땅에 단단히 뿌리를 박고,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서 성취할 것을 주문한다. 이곳은 변하지 않는 너의 세계라고 확신시킨다. 바로 이곳에서 살아남아 적응할 것.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해서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를 것. 땅을 바꿀 생각을 하기 전에 나무를 크게 키워낼 것. 그러나 그러한 요구는 때로 다음과 같은 말들로 들리기도 한다. 노래하지 말 것. 부정하지 말 것. 속삭이지 말 것. 땅에 붙은 것들을 무시하고, 뛸 수 있을 때 걷지 말 것. (74-75)


'고향 없는 인간'. 『책의 말들』의 에필로그에도 썼듯 나는 땅에 발붙이지 않은 모든 이를 스승으로 섬긴다. 고향 이 없기에 미련을 가지지 않는다. 지금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 우리가 처한 세계를 뒤집어보는 사람, 그래서 오로지 인간과 지구에게 더 나은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를 궁구하는 사람들의 뒤를 한 걸음 뒤에서 따를 수 있다면 나의 삶은 그것으로 족하다. 그러므로 지금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라고 말하는 책보다 나를 멀리 데려가는 책을 원한다. 내가 아닌 사람, 여기가 아닌 곳, 지금이 아닌 때로 나를 데려가주기를. 그래서 나의 오래된 시야도 생각도 감각도 재편해주기를. 만나본 적 없는 사람과 겪어본 적 없는 일을 하게 허락해주기를, 이곳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해주기를. (76)


한 책에서 다른 책으로 이행해가는 그 모든 과정에서 '읽는 사람'으로 존재하는, 그 연속적인 열린 과정만이 책의 경이를 담보한다. 그는 책과 책을 거치며 계속해서 다른 사람이, 더 넓은 사람이 되어간다. 이것은 단순한 '갈아타기'가 아니라 인간의 애석한 운명을 넘어 다른 이의 몸을 입어가는 '확장하기'의 과정이다. 그리고 '확장'은 필연적으로 홀로 성공하기보다 여러 삶을 끌어안기를 요청한다. 그렇기에 동일하게 맞부딪히는 주문 속에서 "인간이라면 모두를 제치고 성공하라"라는 주문은 유일하게 힘을 잃는 주문이 된다. (78)



25.2.7.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2를 다 읽음. 1권만큼의 재미를 찾기는 힘들었다. 책에 대한 이야기들도 1권보다는 적은 것 같기도 하고.

















25.2.8.

서리북 16호 읽기. 정년이는 단행본의 출간으로 알라딘에 노출되었을 때부터 흥미로운 소재라고 생각했었는데 아직 읽어보지 못했고, 드라마가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반가웠지만 챙겨보진 못했다(드라마를 본방으로 챙겨보는 일은 거의 없다. 나중에 챙겨보는 일도...). 그런 점에서 다루고 있는 여성 서사에 대한 내용들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선우훈_「재밌지 않니? 세상은 거대한 여성국극 무대 같아」












여성 서사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여성이 주인공이거나, 여성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의미한다. 남성 중심의 사회 구조 속에서 소외되어 왔던 여성의 목소리가 하나의 카테고리로 구분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의 출발점 중 하나로 꼽히는 것이 바로 '벡델 테스트(Bechdel Test)'이다. 이 테스트는 미국의 유명 그래픽노블 작가인 엘리슨 벡델이 1985년에 그린 주목할 만한 레즈비언들(Dykes to Watch Out For)의 한 에피소드에서 등장인물이 영화를 고르는 기준으로 처음 제시되었다. 그 기준은 세 가지로 매우 간단하다. 첫째, 영화에 이름을 가진 여성이 둘 이상 등장할 것. 둘째, 그 여성들이 서로 대화를 주고받을 것. 셋째, 그 대화의 주제가 남성에 관한 것이 아닐 것. 하지만 이 기준을 충족하는 작품이 흔치 않았기에 단순히 영화 속 여성 캐릭터의 부재를 강조하기 위한 농담으로 시작되었던 벡델 테스트는 큰 반향을 일으키며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한국영화성평등센터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8년까지 한국에서 흥행 50위 내에 든 작품들을 조사한 결과 벡델 테스트를 통과하는 작품은 고작 절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15-16)


''을 소재로 삼은 만큼, 1976년부터 아직까지 연재 중인 미우치 스즈에의 전설적인 순정만화 유리가면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주인공이 동경하는 멋진 세계, 실력 있는 라이벌과의 경쟁, 작중 등장하는 다양한 연극과 소재, 엇갈리는 로맨스 등 두 작품은 비슷한 점이 많다. 유리가면이 연극 세계에서 주인공의 성장과 라이벌 간의 경쟁을 중심으로 전개되듯이, 정년이도 여성국극이라는 독특한 배경 속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다룬다. 정년이만의 특색은 보다 사회적인 관점에서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이다. 등장인물들의 고뇌는 과거가 아닌 오늘날의 여성들이 겪었을 법한 고충들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20)


백합물이란 여성 간의 성애를 그린 작품을 지칭하는 용어다. 이 용어는 일본의 남성 동성애물 잡지 장미족(薔薇族)의 편집장 이토 분가쿠가 남성 동성애물의 독자들을 '장미족'이라고 불렀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여성 동성애물을 향유하는 독자들을 '백합족'이라고 부르며, 그러한 성향의 작품들은 '장미물''백합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남성 동성애물은 이후 대표작의 제목에서 유래한 '야오이(やおい)'로 통칭되다가, 최근에는 'Boys Love'의 약어인 'BL'로 불리며, 여성 동성애물 역시 이에 대응하여 'Girls Love'의 약어인 'GL'로 불리기도 한다. (22)


그런데 이렇게 굴절된 판타지를 어떻게 볼 것인가? 최근에는 간극이 많이 좁혀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GL이나 BL은 실제 성소수자의 현실과는 괴리가 있다. 성소수자의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이 드물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동시에 이 장르들은 성소수자를 대상화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는 한계도 있다. 해외에서는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제도가 개선되면서, 동성애를 다룬 작품들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특히 동성혼이 법제화된 이후에는 '금지된 사랑'이라는 비극적 서사보다는, 동성 커플의 일상적인 모습을 그리는 작품이 많아졌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동성애물이 동성애를 있는 그대로 담아내기보다는 이성애자들에게 대상으로서 소비되면서, 막상 실제 성소수자는 사회적으로 혐오의 대상이 되는 모순이 존재한다. (24)


안타깝게도, 정년이에게도 결국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작품이 드라마화되면서 권부용이라는 캐릭터가 삭제된 것이다. 권부용은 정년이의 첫 무대 이후 '백합'으로 만든 꽃다발을 들고 등장하고, 클라이맥스에서 정년이와 키스하는 내용까지 암시된다. 그는 퀴어물로서 정년이의 닻 같은 역할을 하는 인물로, 작품의 핵심 재미를 발생시키는 인물이기도 하다. 정년이는 여성 서사이면서 유리가면같은 순정만화이며, GL이면서 권부용을 통해 대상화된 존재가 아니라 주체적인 성소수자의 이야기가 된다. 어쩌면 서이레 작가가 이 모든 것을 그리고자 했기에 여성국극이라는 소재를 발굴해 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상상해 보게 될 정도로, 정년이의 요소들은 권부용이라는 인물을 통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성 규범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작품의 가장 핵심적인 측면이 지워지고 말았다. (26)


'존재의 삭제'는 소수자들이 흔히 겪는 문제라는 점에서 이는 매우 상징적이다. 드라마에서 삭제된 캐릭터는 권부용뿐만이 아니다. 비록 주연급은 아니지만, 앞서 언급된 남장여자 고 사장 또한 드라마에 등장하지 않는다. 고 사장은 작품 내적으로 정년이가 여성 국극에서 남성 역할을 연기할 수 있도록 성장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근대 초 한국에 존재했으나 지금껏 조명되지 않았던 다양한 성적 실천을 형상화했다는 의의를 가진다. 이처럼 드라마 정년이에서는 핵심적인 퀴어 인물들이 모두 삭제되면서, 여성국극이라는 소재와 주제 의식 간의 긴밀한 연결고리가 크게 훼손되고 말았다. (27)



리뷰 공모전 당선작들을 읽으며 서평을 통해 독법과 자신의 사유를 풀어내는 방식에 감탄하기도 했는데, 특히 최우수작이 다루는 전장연 시위에 대한 글을 읽으며 나도 장애운동의 역사성을 무시한 채 단편적인 뉴스로만 이해했던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되었다. 내가 겪었던 불편함이 사건의 징후일 수도 있으며, 불편함에서 머무르지 않고 이 균열이 가리키는 사회 구조의 부당함을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김도형_「전장연 시위라는 사건」
















이처럼 전장연 시위를 둘러싼 담론이 단지 그 수단이 초래한 일상의 불편함 수준만으로 축소된다는 것은, 사회 내 대다수가 포체투지라는 행위와 시위 전반에 내포된 다층적인 의미에 굳이 주목하거나 이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 주는 일종의 징후다. 사건이란 본디 일상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절대적 독특성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사건만이 지니는 독특하기에 충만한 의미는 기존 의미 지평과는 통약 불가능하며, 이것이 사건을 우발적이고 예측 불가능하게 만든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건은 사건이 발생한 시점에는 사건으로 인식될 수 없다. 사건 이후에 촉발된 일련의 변화들로 인해 우리의 인식 지평이 이를 이해할 수 있도록 재편된 후에야 뒤늦게 사건은 사건이었다고 회고될 뿐이다. 해당 시점에는 단지 이해 불가능성에 동반되는 증상만이 나타난다. 출근하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있던 비장애인이 예측할 수 있는 범위를 한참 벗어나 지하철 바닥을 기어가고 있는 중증장애인의 신체와 마주했을 때의 당혹감과 어찌할 줄 모름처럼 말이다. (91) 


사실 장애운동 역사에서의 이동권 투쟁은 20년을 넘게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전사들의 노래에서 인터뷰 대상자 중 한 명인 활동가 이규식은 사람들이 매일 아침 지하철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모습을 보면서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그 엘리베이터가 우리가 이렇게 욕을 먹어가면서 만든 건 줄도 모르고 우리한테 병신이 집에 있지 왜 아침부터 나와서 남의 출근길을 막느냐고, 자기들 늦은 걸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고래고래 소리 질러요."(전사들의 노래, 236) 혜화역에 현재 설치되어 있는 엘리베이터는 1999년 혜화역에서 이규식 씨 본인이 리프트를 타다 추락한 사고 이후에 설치되었다. 당시 서울지하철공사는 이를 개인의 과실로 무마하려 했지만, 이규식 씨가 소속되었던 교육 공간인 노들장애인야학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시위와 법적 손해배상 청구를 통해 법원은 이를 기관의 책임으로 인정했고 추후 엘리베이터의 설치로 이어졌다.(전사들의 노래, 211) 이후 200114호선 오이도역에서 장애인 부부가 타던 리프트가 추락해 사망한 사건을 기점으로 장애운동에서는 장애인이동권연대를 설립하여 국가 기관에 맞선 투쟁을 이어 나갔고 결국 2005'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을 통해 이동권을 법률화하는 성과를 일궈 냈다. (93)


공론화된 담론 내에서 전장연의 지하철 행동을 비롯한 장애 운동 전반을 '전장연 시위'라는 표현으로 쉽게 일괄하는 현상은 결국 이들의 지하철 승하차 시위 이전의 역사성을 박탈하고, 나아가 관심이 돌아선 이후에도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투쟁의 현행성을 박탈한다. 이들은 2021123일부터 현재까지 매일 아침 지하철 선전전을 진행하고 있으며 지난 202463일부터는 포체투지를 100일 동안 서울 곳곳에서 진행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역사를 부여받지 못한 사건은 한 사회 내의 서사로부터 배제되며, 이는 우리가 지하철 행동을 단지 단발적이고 예외적인 사건이었다고 사고하게끔 한다. (95-96)


두 책의 저자인 활동가들이 공통으로 지적하는 것은 장애인들이 겪는 기본권 침해가 결코 법률이나 정책을 하나하나 시정한다고 해서 완전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은 더욱 근본적으로는 사회 전반이 비장애인을 중심으로 짜였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거시적으로는 사회적 제도와 관계를 구성함에 있어서, 미시적으로는 한 식당의 입구를 설계함에 있어 휠체어의 접근성을 고려에서 배제하는 것과 같은 문제가 드러내 보이는 비장애중심주의는 우리가 굳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숨 쉬듯 반복된다.

이러한 비장애중심주의는 나아가 한국이 이윤 생산을 멈추지 않으려는 자본주의 사회이며 따라서 생산성 있는 유용한 신체를 우선시한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이에 박경석은 출근길 지하철 행동이 사회적으로는 컨베이어 벨트가 열심히 굴러가고 있는데, 그 톱니바퀴에 이쑤시개가 하나 끼어버린" 상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해석한다.(출근길 지하철, 35) 매일 아침 지하철이라는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정시 출근해야 하는 사람들이 마치 '볼모'로 잡힌 것처럼 표현되고 서울교통공사는 한발 나아가 지하철 행동이 끼친 사회적 손실을 돈 액수로 환산해서 발표하지만, 정작 장애인들이 일상조차 누리지 못하면서 고통받아 온 "평생의 시간은 비장애인들 1분의 시간만큼도 가치가 없는" 것처럼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출근길 지하철, 32) 생산성 있는 신체의 효율적인 노동 시간은 항시 보장되어야 하고 국가는 이를 위해 사회 기반 시설과 새 산업 분야에 적극적으로 제때 투자하지만, 장애인의 기본권 보장을 위한 사회 구조 마련에는 속도가 더딘 이유로 언제나 국가 예산과 사회적 비용이 거론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98-99)


애초부터 포체투지와 전장연의 지하철 행동, 나아가 장애운동 전반의 목적이 대중들의 공감과 동정을 유발하는 것에 있다는 것은 우리의 안일한 착각일 수 있다. 분명 기어가는 행위는 활동 당사자들에게도 수치스러운 행위이지만 이들은 "생존을 위해 최후의 보루"로 남아 있는 자기 몸을 내던지면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다.(전사들의 노래, 108) 이 권리 주장은 나아가 단지 기존의 권리 목록을 단순히 답습하면서 정부에 이를 반영할 것을 행정적으로 요구하는 차원의 주장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이는 한 사회 내에서 권리를 생각하는 기존 방식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며, 이를 국가와 동료 시민들 앞에서 정당화하려는 주장이다. 이들은 이동권과 활동지원서비스 보장 등의 요구들이 단지 복지 정책의 일환으로 채택되는 것을 넘어서서, 자신들의 인간다운 삶과 존엄성을 보장받기 위한 기본권이자 사회가 모두를 위해 의무적으로 마련해야만 하는 기본 구조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비장애인 중심으로 권리를 생각해 온 우리의 일상적 사고 방식의 변혁을 요구하는, 따라서 새로운 권리의 목록을 생산하고 자 하는 급진적 주장이며 자신들의 주장이 사회가 정당히 받아들여야 하는 요구라는 것을 이들은 온몸으로 상연하고 있다. 자신들이 시혜의 대상이 아닌 권리의 주체라는 사실을 말이다. (101)


결국 이들은 스스로 신체적 존엄성을 내던지는 바로 그 행위를 통해 역설적으로 자신 또한 동료 시민에게 기존의 권리 체계가 정당한지 논의해 보자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 자율적 존재라는 사실을, 인간이자 같은 정치 공동체에 소속된 시민으로서 지닌 존엄성을 증명해 보인다. 기어가는 몸짓에 권리 주장이 체현된 이러한 장면 앞에서 우리가 느껴야 할 것은 동정이 아니라 숭고다.

우리가 포체투지 장면을 바라보며 일차적으로 느낄 수 있는 두려우면서도 낯선 당혹감은 이들 또한 권리의 정치적 주체라는 점을 인식하면서 느끼는 숭고함으로 지양되어야 한다. 이렇게 포체투지는 기어가는 행위의 의미가 단지 동정의 몸짓에만 국한되던 기존 시선을 깨트리고 정치적 주체의 숭고한 몸짓으로 이를 전용하는 전복적 행위가 된다. (101-102)



25.2.9.

모래 사나이읽기. 문지 스펙트럼 시리즈에는 세 편의 작품이 실려 있고, 그 중 모래 사나이적막한 집을 읽었다. 두 편 모두 분위기나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에서 고딕 소설의 느낌이 전해진다는 점, 초현실적인 현상이나 설정을 사용한다는 점이 독특했다. 특히 모래 사나이의 막바지에 밝혀진 사실들을 읽을 때는 깜짝 놀랐을 정도. 시인이나 몽상가로 대변되는 낭만주의와 그의 대립항으로 이성이 언급되는 것도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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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7.















소년이 온다를 다 읽음. 읽으면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이미지를 안긴 것은 5장이었고, 가장 감정적인 에너지가 넘실거리던 부분은 6장이었다. 3장을 제외한 나머지 챕터는 2인칭이거나 화자의 직접적인 목소리가 담기는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독백 역시 작품을 읽는 독자를 향한다는 점에서 모두 2인칭으로 서술할 때의 효과를 가리키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작품을 읽는 당신에게 이 모든 목소리가 닿길 바라는 마음. 작가 후기와 같이 읽히는 에필로그를 마지막으로 읽으면서 여전히 광주는 되풀이되고 있다는 사실에 김서린 안경으로 비치는 세상을 볼 때처럼 마음이 산란해졌다.


전구 속 필라멘트처럼 가느다란 신경의 각성을 따라 당신은 눈을 뜬다. 아직 졸음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불빛이 침침한 복도와 어두운 응급실 유리문 밖을 둘러본다. 썰물처럼 잠이 밀려나가며 고통의 윤곽이 뚜렷해지는 순간, 어떤 악몽보다 차가운 순간이 다시 왔다. 당신이 겪은 모든 게 꿈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기억해달라고 윤은 말했다. 직면하고 증언해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삼십 센티 나무 자가 자궁 끝까지 수십번 후벼들어왔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소총 개머리판이 자궁 입구를 찢고 짓이겼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하혈이 멈추지 않아 쇼크를 일으킨 당신을 그들이 통합병원에 데려가 수혈받게 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이년 동안 그 하혈이 계속되었다고, 혈전이 나팔관을 막아 영구히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타인과, 특히 남자와 접촉하는 일을 견딜 수 없게 됐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짧은 입맞춤,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 여름에 팔과 종아리를 내놓아 누군가의 시선이 머무는 일조차 고통스러웠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몸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모든 따뜻함과 지극한 사랑을 스스로 부숴뜨리며 도망쳤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더 추운 곳, 더 안전한 곳으로. 오직 살아남기 위하여. (166-167)


오래전 동호와 은숙이 조그만 소리로 나누던 대화를 당신은 기억한다. 왜 태극기로 시신을 감싸느냐고, 애국가는 왜 부르는 거냐고 동호는 물었다. 은숙이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이라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까. 태극기로, 고작 그걸로 감싸보려던 거야. 우린 도륙된 고깃덩어리들이 아니어야 하니까, 필사적으로 묵념을 하고 애국가를 부른 거야. (173)


2009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207)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그 도시의 열흘을 생각하면, 죽음에 가까운 린치를 당하던 사람이 힘을 다해 눈을 뜨는 순간이 떠오른다. 입안에 가득 찬 피와 이빨 조각들을 뱉으며,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밀어올려 상대를 마주 보는 순간.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를, 전생의 것 같은 존엄을 기억해내는 순간. 그 순간을 짓부수며 학살이 온다, 고문이 온다, 강제진압이 온다. 밀어붙인다, 짓이긴다, 쓸어버린다. 하지만 지금, 눈을 뜨고 있는 한, 응시하고 있는 한 끝끝내 우리는······ (213)


나는 가방을 열었다. 가지고 온 초들을 소년들의 무덤 앞에 차례로 놓았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쪼그려앉아 불을 붙었다. 기도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묵념하지도 않았다. 초들은 느리게 탔다. 소리 없이 일렁이며 주황빛 불꽃 속으로 빨려들어 차츰 우묵해졌다. 한 쪽 발목이 차가워진 것을 나는 문득 깨달았다. 그의 무덤 앞에 쌓 인 눈 더미 속을 여태 디디고 있었던 것이다. 젖은 양말 속 살갗으로 눈은 천천히 스며들어왔다. 반투명한 날개처럼 파닥이는 불꽃의 가장자리를 나는 묵묵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215)
















어비를 다 읽음. 남은 단편 4편을 한 번에 쭉 읽었다.


광장 근처_현대 사회에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중적인 심리와 그 모순을 포착해내는 김혜진 작가의 날카로운 시선이 군데군데 보여서 흥미롭게 보았던 작품. 이후의 작품들과 비교하면 훨씬 더 직접적이다. 온갖 운동을 하고 서명을 받으면서도, “듣고 따라하는 동안엔 모두가 괜찮다고 믿을 법한 말들”(162)을 선창하고 복창하면서도, 가판대도 없이 노점을 열며 그 자리에서 버티고 있는 이들에겐 조그마한 틈도 내어주지 않으려고”(163) 하는 사람들. 오히려 매일 같이 아이를 맡기고 어딘가 일 같지도 않은 듯한 일을 하러 떠나는 남자와 투덜거리면서도 아이를 맡아주는 화자가 더 인간적으로 보인다. 물론 이들에게도 연대는 없고 어떻게든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고자 애쓰는 모습만 남아있지만, 그래서 더 씁쓸한 작품. 해설을 인용하자면, “’연대의 가치가 아니라 자기 삶의 최소한의 안위가 보장될 가능성에 투신하는 모습이야말로 이 세대의 자화상”(253).


줄넘기_헤어지고 난 뒤의 상처와 헛헛함을 이기지 못하고 어떻게든 이유를 찾으려고 애쓰고, 심지어 여자의 집에 찾아가 우편물을 뜯어보는 화자의 모습은 전혀 마음이 가지 않았지만, 노인의 숨소리처럼 고요하고 유일한 리듬”(177) 같은 줄넘기에서 세계를 마주한 인간의 어떤 태도를 본다. 나에게 어둠과 슬픔을 주는 세계에 완강히 저항하진 않더라도, 나만의 박자를 만들어가며 지구에서 잠깐 벗어났다가 금세 되돌아오는 것”(183)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 어떻게든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 되지 않을까 하는 그런 태도.


와와의 문_우리가 얼마나 타인의 고통이나 아픔을 쉽게 생각하고 소비하는지, 그 깊이는 생각해보지도 않고 어쭙잖게 도움을 주려고 하는지 돌아보게 되는 작품. 화자는 와와가 겪은 일들을 들어주고 재해에 대해 질문하고, 당신이 지금 부당한 대우를 당했다며 저항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실상 그는 와와가 겪은 재해를 글감으로 소비하고 싶었을 뿐이고 와와가 겪었을 어려움과 아픔을 깊게 생각해보려 하지도 않는다. 다큐를 보면서 그들의 처지를 안쓰러워하지만 때때로 너무 무능해 보여서 화가 났다”(197)는 그의 말처럼.


비눗방울맨_김혜진 작가의 작품에서 광장이 자주 등장하는 공간이긴 하지만, 유독 광화문 일대가 이 작품집에서 자주 보인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람들이 너도나도 시위를 하고 경찰들은 시위를 통제하고 역을 막아버리지만, 화자는 이런 온갖 목소리들에 담긴 메시지보다 자신에게 짐이 되어버린 철수를 어떻게든 너에게 돌려주는 일에만 관심이 있다. 광장에서 어떻게든 달라붙어 살아왔을 비눗방울맨의 사연에는 관심도 두지 않은 채. 한가로울 때는 그저 호기심의 대상이었고, 철수를 잃어버린 뒤에는 짜증을 유발하는 대상이 되어버렸을 뿐.















『지구의 짧은 역사』 1장 읽기.

 















『서양철학사』 다시 읽기 시작. 지난번(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오래되었다)에는 고대 그리스까지만 읽고 끝났고 이미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지 오래. 



덧) 이후 여행을 떠나면서 비행기 안에서든 여행 중이든 책을 꾸준히 조금씩이라도 읽어보리라 다짐했던 나의 욕심은 이미 가득찬 짐짝 속에 세 권의 책과 크레마를 집어넣게 만들었다. 그리고 2주가 넘는 기간 동안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그 책들은 돌덩어리처럼 나의 어깨를 짓눌렀으니... 새벽에 일어나 해가 질 때까지 뽈뽈거리며 쏘다니는 하루하루를 보내며 잠시나마 시간이 있을 때는 뻗어버리기 바빴고, 비행기 안에서는 여행기를 쓰거나 잠들거나 둘 중 하나였다. 결국 그 책들은 딱 한 번 펼쳐져본 채 나와 함께 돌아왔고... 다시 일상에 적응하는 동안 책들엔 다시 먼지가 쌓이기 시작했다. 밀렸던 기록을 남기며 마음을 다잡아 보기로 하고, 지금은 일단 마무리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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