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6.















서리북 17호 읽기.


 

25.5.7.















사랑과 결함읽기 시작. 우리 철봉 하자를 읽었고, 한동안 젊은 작가의 작품을 읽어보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두 여성의 우정을 다루는 방식이 신선하다고 생각했다. 마음 먹은 대로 풀리지 않는 삶(직장에서도 연애에서도)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진솔함, 사랑으로 인해 화자가 받은 상처를 세상을 향해 드러내는 방식의 새로움, 그리고 간혹 드러나는 유머들. 젊은 여성이 사회에서 받는 부당한 대우와 시선은 소설의 주제가 아니라 배경으로 항시 놓여 있다(자기 일을 하면서 상사에게 자기가 페미 같냐고 물어보(아야 하)는 화자, 두 여성이 보는 앞에서 시선을 한껏 의식하며 묘기를 부리는 철봉 아저씨 등).


사장은 내가 그런 부분에서 예리하다며 좋아했다. 요즘은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시대라서 이런 것들은 기민하게 캐치해 사전에 전부 편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부분들을 초 단위로 표시해둔 뒤 맥락 전부를 문서에 기록하고 특히 문제 될 여지가 있는 대사를 빨간색으로 표시해 두었다.

허대리님. 이거 나 페미 같아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이 부분은요?

팀장님께 물어봐야 할 듯.

그즈음 내가 상사와 나눈 카톡 대화는 거의 이랬다. 특정 강사들은 성차별적 언사가 유독 두드러졌다. 특히 정신분석이 가볍게 다뤄지는 강의에서 그런 태도가 많이 나타났다. 나는 일을 하면서 문득 내가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는데, 분명 문제인 것 같지만 문제라고 말하는 게 더 문제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13)


내가 일으킨 문제에 대해 먼저 귀띔을 해준 이는 허대리였다. 강사 하나가 컴플레인을 제기했다나봐. 담당자가 너무 예민하다고. 페미 같다나 뭐라나. 나는 억울했다. 허대리님. 페미 같은 게 도대체 뭔데요? 이번에도 허대리는 고개를 저었지만, 조그맣게 속삭였다. 몰라요. 근데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어쩌면 손쓸 수 없는 상황을 일부러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문제가 될 걸 아예 모르진 않았으니까. 그러나 왜? 내가 왜 나에게 손쓸 수 없는 상황을? 그건 늘 손쓸 수 있는 선까지만 일을 저질러버리는 나의 졸렬함에 대한 일종의 반항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회사에서 잘렸다. 이번에 검수를 맡은 경영학 강좌 중 생산운영관리 및 조직관리 파트 삼분의 일 가량을 삭제해야 한다고 강사에게 메일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나는 문제되는 발언에 일일이 메모를 작성해서 상세한 피드백을 전달했다. 성별에 따라 의사 결정 과정이 명확하게 달라지기는 어렵습니다. 성별의 차이가 육십오 세 이후부터 사라진다는 것은 비논리적입니다. 문제를 과도하게 심사숙고하는 성향은 상황과 개인적 맥락에 따라 다른 것일 수 있습니다. (17-18)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삶이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내 삶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몇몇 남자와 원나잇을 했고 늘 그랬듯 전혀 만족스럽지 않았는데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제일 견딜 수 없었다. 나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을 또다른 못 견딜 마음으로 돌려 막고 있었다. 나는 살기 위해 내 삶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25)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맹지가 덧붙였다. 너는 너를 돌봐야 해. 좀처럼 항변할 수 없었다.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나를 돌보려면 나를 돌아보아야 하는데, 나는 나를 돌아보는 데 미숙했다. 일은 졸렬하게 하지만, 누군가를 좋아할 때는 손쓸 수 없을 만큼 좋아했다. 사랑에 있어서는 늘 나를 함부로 대하고 선을 넘어버렸다. (33)



25.5.8.















사랑과 결함읽기. 아주 사소한 시절우리는 계절마다를 읽음. 우리는 계절마다를 예전에 소설 보다 겨울 2023에서 읽은 적이 있었는데 어떤 단편의 후속작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에 읽을 때는 보편 교양혼모노가 강한 인상을 남겨서 이 작품은 기억에 남지 않았었는데 이번에 아주 사소한 시절과 같이 읽으니 희조의 모습이 강렬하고도 아프게 다가왔다. 미정과의 관계, 그리고 그것에 영향을 받는 듯하면서도 무관한 것처럼 흘러가는(혹은 망가져 가는) 희조의 삶. 온갖 괴롭힘과 답답한 가정이 빚어내는 삶을 담담하게 서술하는 문체 때문인지, 눈앞에서 목격한 죽음에 대해 거짓을 섞어가며 떠들고 은총이라는 단어까지 발화하는 희조의 모습 때문인지 두 작품을 읽는 내내 섬뜩한 느낌이 자주 들었다. 언뜻 보았을 때는 다음 작품까지 3부작으로 마무리가 되는 것 같은데, 마지막 은총이 세 번째 작품에서 실현이 될 것인지, 희조는 시궁창 같은 삶에서 희망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주 사소한 시절

나는 망연히 언니가 한입 먹은 아이스크림과 숟가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언니의 침이 묻은 숟가락을 연못에 담가 닦았다. 한참을 닦았다. 나는 더러운 침이 묻은 그 숟가락을 신성한 물로 닦으면서 내 안 깊은 곳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느꼈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간 살면서 줄곧 느껴온 감정의 실체를 깨달은 순간이었다. 이전에는 단지 그 감정의 실체를 몰랐을 뿐이었다. 나는 누가 들을까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씨발. 그러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38-39)


나는 살면서 누구도 나를 기꺼워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니까, 가족에게 얻어터지며 사는 사람은 평생 예쁨 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엄마의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엄마도 나름 힘들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엄마는 무엇을 위해 나를 낳은 것일까. 결론은 이거였다. 엄마는 아이를 원했지만, 나를 원하진 않았다. 나는 엄마를 사랑하고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끔찍하게 여긴다. 엄마는 나를 낳음으로써 가난해졌다. 원래 엄마는 기업에서 일하던 사람이었다. 나를 낳느라 직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아빠는 입사와 퇴사를 반복한다고 했다. 나는 끈덕진 사람이지만, 그이는 아니야. 그런데 회사를 그만둔 건 나야. 왜일까? 그이는 사회의 일원이 되지 못하면 낙오자가 된다고 생각하거든. 엄마는 '낙오자'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리고 깔깔 웃었다. 쥐뿔도 모르는 거지. 우리는 결혼한 순간부터 낙오되고 있었던 거야. (56-57)


결국, 내가 만든 죽음과 은총에 관한 이미지는 허구에 불과했고 그랬기 때문에 더 성스럽게도 느껴졌던 것이다. 그리고 곰곰 생각해보면 나는 '낙오''낙하'라는 두 단어의 의미가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엄마에게 '낙오자'라는 단어를 들은 이후로 '낙하'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64-65)


죽음에 대한 내 태도와 그로 인해 일어난 일들로 인해 아이들은 나를 애써 없는 사람 취급했다. 애들은 나와 가까운 친구들이 어떤 식으로든 모종의 불행을 겪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영성이도, 미정이 아빠도 그랬으니까. 나는 사람들과 오랜 시간 동떨어지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아이스크림을 연못에 버리고 느꼈던 그 감정은 혐오보다는 공포에 가까운 것이었다. 내가 가진 모든 게 아주 작은 것으로 말미암아 망가지고 무너질 거라는 공포. 애들은 나를 미워하는 게 아니다. 두려워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가진 것들,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은 어리기에 무르디 무른 무언가를 내가 망가뜨리고 무너뜨릴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어른들 따위는 어느 시점부터 자신이 지니고 있던 무언가를 너무도 쉽게 잊은 채로, 마치 그저 주어진 것인 양 생을 살아간다. 다 망가져가는 것과 다름없는 생을. 나는 그것이 세계가 나를 '외부인'으로 만드는 교묘한 방식이라는 걸 깨우쳤다. (71-72)


우리는 계절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언제나 그런 행동에 쉽게 화가 났다. 서로의 사이에 부려놓아진 것이 몹시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른 척하는 사람들 특유의 행동. 그러니까 우리는 최대한 여러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도, 끊을 수도, 이어갈 수도 있는데 꼭 자신에게 주어진 방식은 하나뿐인 것처럼 구는 사람들에게 화가 났다. 왜냐하면, 그 상황에서 가장 배제되고 소외되는 존재는 나 자신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에. (85)


나는 인생이 적당한 시점에 최악의 결말로 끝나버릴 거라는 염세적인 기분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최악의 결말은 존재하지 않고, 늘 최악의 순간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건대, 그 감각은 세계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불가해한 상황으로 구성되고, 나는 속절없이 휘말릴 뿐이라는 것을 그 시절에 이미 알아차렸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었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걸레가 되고 그 짓거리 하는 년이 되고 씨발년이 된다. 그건 내 의도도 누구의 의도도 아니다. 세계가 그렇게 나를 그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86)


누군가 내게 가족이라는 존재를 언제 처음 실감했냐고 물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바로 그 순간에 대해서 말할 것이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동생이 생긴다는 것의 의미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가족이 하나 더 생긴다는 건 식구가 는다는 거고, 식구가 는다는 건 더 깊고 깊은 가난의 늪에 빠지게 된다는 거다. 나의 부모는 무슨 생각으로 내가 기뻐하기를 기대했던 걸까? (92)


초등학교 시절의 나는 마트에 있는 햄스터를 훔쳐서 아파트 화단에 풀어주는 것을 해방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것이 결코 해방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내던져짐 그 자체였다. (95)


나는 그 말을 하고야 말았다. 우리가 짧은 키스를 나눈 이후로, 미정의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로, 내가 그것을 미정의 '은총'이라고 생각하게 된 이후로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음침한 청소년이 되고야 말았다. 세상은 죽음에 대한 열망을 지닌 청소년을 그런 식으로 판단했으니까. 하지만 도대체 그렇지 않은 아이들이 존재하기나 한단 말인가? (104-105)


우리가 공유했던 내밀한 무언가가 전부 거짓일 수는 없었다. 나는 단 한 번도 은총이라는 단어가 거룩한 무언가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아는 은총은…… 우리가 지닌 열띤 욕망. 그것이었다. 미정과 나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무언가를 너도 생각하지 않니. 나는 미정이 그럴 거라고 확신했다. (105)


미정 엄마가 더 큰 소리로 우리에게 말했다. 나는 걸레가, 아니다. 나와 윤다혜는 조그만 목소리로 미정 엄마의 말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나는…… 걸레가…… 아니다……

"우리는 시궁창에 살고 있다."

"우리는…… 시궁창에…… 살고 있다."

"시궁창에는 더러운 쥐들뿐이다.”

"시궁창에는…… 더러운…… 쥐들뿐이다."

나와 윤다혜는 그 말들을 천천히 따라 했다.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내가 훌쩍거리자 윤다혜도 훌쩍거렸다. 미정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셋은 그렇게 이상한 주문을 외며 기묘한 슬픔에 사로잡혔다. 미정 엄마가 침대를 빙 둘러 와서 나와 윤다혜를 뒤에서 안아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는 더럽고 지저분한 곳에 살아. 그렇지만 결코 그들과 같아질 필요는 없단다. 나는 남편이 죽고 나서 활력을 되찾았어. 그건 내 탓이 아니지 않니? (108)



25.5.9.

사랑과 결함읽기. 그 얼굴을 마주하고와 표제작 사랑과 결함을 읽음. 희조는 왜 미정에게 그렇게까지 집착했을까. 어린 시절 부모님도 주지 못했던 친밀함을 처음으로 주었던 친구였기 때문일까.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도 미정은 희조를 밀어내고 희조는 미정과의 관계를 현수 언니와의 관계로 대체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아주 사소한 시절」부터 「그 얼굴을 마주하고」까지 희조의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더 깊어지고 얼마나 자기파괴적인 삶으로 나아가는지를 보여주는 거라면, 3부작을 반-성장소설이라고 보아도 될까. 문득 내가 보지 못하는 10대들의 삶이란 이것이 일반화된 삶인가(희조만큼은 아니어도 미정이나 혁주, 태규 같은)라는 생각이 들자,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도 얼른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PC방 컴퓨터로 싸이월드에 접속한 뒤 주위를 둘러보고 조심스럽게 담배를 꺼내 피웠다. 키보드에 재가 떨어지는 게 신경 쓰였지만, 신경 쓰이지 않는 척했다. 그것이 중요했다. 내가 내보이는 모든 모양새에 무심함이 묻어나야 한다. 그게 어른들의 세계에 잠입하는 방식이다. (113)


그때 미정 엄마에게서는 절대로 누군가에게 함부로 휘둘리지 않으려는 결기가 느껴졌고, 나는 미정 엄마의 삶을 닮고 싶어했다. 그러니까, 내가 누군가를 이용하더라도 그것이 그 누군가에게 절대로 해를 끼치지 않는 삶. 어떤 사건에 휘말리더라도 그 속에서 꼿꼿이 허리를 편 채 눈을 부릅뜨는 삶. 그때 나는 미정 엄마가 그런 삶을 살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삶이라는 게 정말 누군가에게 해가 되지 않는 방식으로 이뤄질 수 있는 건가? 기어코 해가 되고 마는 것이 삶 아닌가. (118)


내가 겪어왔던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엄마도 당신이 겪은 일련의 사건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게 문제라고 생각했다. 빤히 보이는데 보이지 않는 척하는 것. 서로가 떠안은 일들에 지쳐 상대의 상처에는 그저 눈을 감아버리는 태도. 우리가 그런데도 서로를 친밀한 사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는 것인가? (125)


나는 나를 싫어하는 애들보다 나처럼 되기 싫어하는 애들을 증오했지만, 결국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전부 나처럼 되기 싫어하는 사람뿐이었다. (126)


여태껏 나는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되고 우리가 이 모양이 꼴이 된 게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린 시절부터 나는 늘 이런 식이었구나. 이게 나였구나. 나는 사는 동안 내 이야기의 완벽한 '외부인' 흉내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흉내. 그것은 흉내뿐이었다. 사실, 나는 이 이야기에서 완벽한 '내부인'이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내 서사에 완벽하게 가담한 인물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온전한 슬픔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133)


이혁주를 만나고 되돌아오는 길에 내 삶의 전반을 곰곰 돌이켜보며 재구성해봤다. 미정은 나에게 어떤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내게 접근했고 나는 미끼를 문 것이었다. 지독한 괴롭힘에 시달렸지만, 나는 미정을 끝까지 의심하지 않았다. 미정이 나를 그렇게 생각한다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미정의 존재가 내게 은총과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 그냥 그렇고 그런 애들 중 하나일 수도 있었는데. 나는 또 내가 의아해졌다. 하지만 최근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나는 사람을 한번 믿으면 걷잡을 수 없이 좋아하게 된다는 것. 현수 언니를 좋아하게 되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134)


문득 할머니가 죽기 전날, 내가 할머니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희미해진 할머니의 몸냄새를 맡으려 애쓰며 속삭였던 그 말, 할머니, 나는 존나 못 사는 방식으로 잘 살 거예요.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지껄였던 그 말이 내 가슴팍에 박혔다. 아주 사소한 시절 우리는 계절마다 서로를 혐오하고 끔찍한 생활을 반복했지만 결국, 그때의 나도 나일 뿐이었다. 나는 작게 코를 골며 잠든 현수 언니를 보며 우리가 무슨 사이인지 생각해보다가, 비밀 친구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오늘만큼은 참으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살고 죽는 것. 그게 내가 가진 유일한 열망이다. (145-146)


사랑과 결함은 화자와 화자의 고모에 대한 이야기. 고모란 어떤 존재일까. 화자의 친구이자 보호자였고, 화자의 어머니의 적이었던 부계 여성 친척? 로봇 청소기를 통해서 전해 듣는 화자가 몰랐던 고모의 모습, 그리고 화자가 기억하는 고모의 모습이 엄마의 모습과 겹쳐진다. 고모의 눈총을 받으며 시집살이를 했던 엄마, 시간이 흘러 홀로 남겨졌다 여기며 살았던 고모. 그 둘 밑에서 자란 화자의 모습에서 보이는 건 두 사람을 보고 배웠던 사랑과 결함, 혹은 사랑이자 결함이라고 해야 할까? 남들이 보기엔 결함(주로 여기선 정신병으로 표상되는)인 것도 어떻게든 사랑의 형태로 화자의 마음에 새겨졌다는 것. 끊임없이 벽을 들이받는 로봇 청소기의 모습에서 고모와 화자가 모두 떠오르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잠을 오래 자다보면 고즈넉하게 늙는 기분이 들었다. 남몰래 시간이 흘러가는 그 느낌이 치열하지 않아서 좋았다. (149)


그 어린 나이에도 순정 앞에서 절대로 엄마의 편을 들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그 시절의 나에게 사랑이란 그런 식으로 모종의 불안을 동반하며 아슬아슬한 선을 넘나드는 무엇이었다. (163)


나는 수가 언제나 착한 척을 한다고 생각했다. 엄밀히 말하면 척은 아니었지만 달리 정확하게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수는 늘 자신의 마음이 진심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나는 그게 진심이 아니란 것을 알았고 그걸 제발 수가 깨닫길 바랐다. 하지만 수는 내가 자신의 의도를 왜곡하고 곡해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나는 그야말로 자기 자신을 왜곡하고 곡해하며 삶을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정립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즘 들어서는 수야말로 최선의 태도를 고민하며 사는 사람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쨌든 그 태도란 건 내가 평생 시달릴 고통과 우울, 그리움과도 맞닿아 있는 문제였다. (180-181)


유전이라고 말한다면 내가 겪어온 모든 고통이 엄마의 유전자적 결함으로 치환되고 고모의 인생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조울증은 할머니의 유전자적 결함으로 치환되는 거겠지.

하지만 내가 아는 것은 고모나 엄마가 그저 나에게 끔찍한 사랑을 흠뻑 물려주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아직도 그 사랑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 사랑과 결함이 나를 어떻게 구성했는지도. 나는 실제로 고등학교 때 정신병이 유전되었을까봐 몹시 두려워했으며 내가 이상한 상태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기 위해 친구들의 상태에 대해 끊임없이 물었다. 그러면서도 정신과는 절대 가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고모의 영향으로 향정신성 약물에 대한 크나큰 불신을 안고 있었으니까. (183)


잠들려는 그 순간, 저 멀리서부터 쿵, , 쿵 벽을 찧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비로소 이 순간이 잠이 드는 바로 그 순간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희미한 정신으로 눈을 떴을 때 순정의 로봇 청소기가 빈 벽에 제 몸을 부술 듯이 처박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이지 전원을 켜고 끄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어쩔줄 몰라하다가 달려가서 끝내 전원을 끄지도 못하고 청소기를 끌어안았다. 작은 바퀴들이 헛돌고 헛돌았다.

고모는 자주 물건을 부수기도 했고 아버지를 때리기도 했다. 그런 것들을 나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암이 재발하고 나서 고모는 빠르게 힘을 잃어갔다. 비쩍 말랐고 입냄새가 심하게 났다. 병원에 입원한 후로는 오롯이 누워만 있었다. 모든 힘을 소진한 사람처럼. 임종을 앞두고 고모는 숨 쉬는 것조차 힘에 부치는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아버지도 나도 아닌 엄마를 아주 오랫동안,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간신히 신음처럼 말을 뱉었다. 민애야. 그런 다음 눈을 감았다. 우리 중 아무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다만 나는 그 순간 우리 가족이 가진 축축하고 퀴퀴한 기억들이 전부 엉켜버렸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저도요.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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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21.~27.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읽기. 하루에 3-40분 정도 한 챕터씩 최대한 맞춰 읽고자 노력함. 읽을 때마다 그때의 감상을 바로 쓰는 것이 일기에 좋을 텐데 보통은 직장에서 읽느라 적을 틈까지는 안 나기도 하고 점점 나태해진 탓에 감상을 적지 못했다. 미술관의 경비원(미술에 대한 식견을 어머니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쌓게 된)이 되어 작품들을 오랫동안 바라보는 느낌은 어떤 걸까 생각하게 되는 글들. 여행하는 입장에선 오래 보고 싶은 마음과 이후의 (보통은 촉박한) 일정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마지막엔 체력에 져서 후다닥 나오는 경우가 잦은데, 그랬던 나 자신도 돌아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교양에 대한 목마름이 오랜만에 다시 찾아오기도 했고.



25.4.28.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완독.

 


25.4.29.















어떤 어른읽기. 길에서 잘 읽진 않지만 그래도 꼭 한 권은 가방에 넣고 다니려고 하는 편인데 출근이 촉박했음에도 오래 고민하다 고른 책.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을 때도 많은 감동을 받으며 글을 읽었지만 이번 책도 들어가는 글부터 눈길을 끄는 문장들이 많이 있었다. 책 속에서 만나는 어린이들의 천진함과 글이 주는 따뜻함을 느끼며 읽는 중. 그나저나 책은 그렇게 두껍지 않은데 왜 이리 무겁냐...

 

인간을 사랑합니까를 읽다가 어떻게든 글쓴이의 의견에 어깃장을 놓고 싶은 그 청중의 태도에서 종종 마주하는 청소년들의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오며가며 보고 듣게 되는 어린이들의 순수하면서도 악한 모습이 떠오르기도 해서 마음이 심란해졌다. 차별 문제에 의견이 나뉘지 않냐고 당당하게 말하는 어른에 대한 답답함과, 어린이의 말과 행동이 모두 어른의 반영임을 알고 있어도 이해되지 않는 말과 행동에 답답함을 느끼던 나를 돌아볼 때의 마음이 뒤엉켜서 그런 듯했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의 일화도 생각이 났다. 경비원을 깔보는 태도를 당당하게 아이 앞에서 드러내던 아버지의 모습. 그런 어른들에게서 배운 모습이 어린이 나름의 방식으로 발현되어 나타난 거겠지. 세상에는 비난과 비아냥이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하는 줄 모르는 어른들이 참 많구나 탄식하며 마저 읽기로 한다.

 


25.5.1.

어떤 어른읽기.



25.5.2.

어떤 어른읽기. 어린이가 미워질 때라는 글을 읽다가 생각한 것. 내가 생각하는 좋은 어른이란, 항상 자신의 말과 행동을 돌아보고 반성하면서 거기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그때 왜 그랬는지를 곰곰이 따져보고 새롭게 다짐하는 사람이다. 한때 어떤 어린이를 미워했던 자신을 반성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이 품고 있던 어린이에 대한 편견까지 생각해보는 글쓴이처럼.


그런데 나는 왜 그때 '못된 어린이 때문에 힘들다'도 아니고, '못된 어린이는 정말 못됐다'라고 적었을까? 아마도 '어린이는 원래 착하다'라는 전제를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되게 구는 어린이니까 그건 정말로 못된 것이라고, 내가 이해해줄 여지가 없다고, 미워하는 나를 정당화하며 그렇게 쓴 것이다. 같은 말을 어머니한테 들었을 때보다 어린이한테 들었을 때 더 큰 타격을 입은 것도 어린이에 대한 그런 편견 때문이었던 것 같다. 순진무구해야 할 어린이한테 그런 대접을 받았다는 생각에 배신감도 들고 자존심도 상했던 것이다. (283-284)


어린이에 대한 어른들의 편견은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될 때가 많다. '나는 어렸을 때 이랬다'는 기억을 근거로 '어린이는 이렇다' 또는 '어린이는 이래야 한다'는 정의가 내려지는 식이다. 그렇게 각자 착한, 활달한, 얌전한, 공부잘하는, 어른 말씀을 잘 듣는 어린이를 떠올리고 주변의 어린이에게 그런 모습을 기대한다. 어린이가 기대와 다르면 실망하고 비난하기도 한다. '나는 어렸을 때 식당에서 안 울었는데 저 아이는 왜 울지?' 하는 식이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어린이는 자기 자신, 딱 한 명이다. 그것도 자의적으로 정리된 기억이다. 그것만으로 어린이를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어린이를 이해하려면 눈앞의 어린이를 보아야 한다. (285-286)



25.5.5.

북눅 순라점에 방문해서 어떤 어른완독.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을 때도 느꼈지만 김소영 작가의 글에는 (날이 갈수록 감정이 메마르고 냉소적으로 변하는 것 같은 나조차도)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드는 어떤 힘이 있다. 작가가 가지고 있는 따뜻함과 다정함에 대한 믿음 때문일까. 못난 어린이(유엔아동권리협약에 따르면 만 18세까지는 모두 어린이다)를 많이 만나다보면 닳고닳는 마음을 내려 놓으며 살게 되는데, 그럼에도 어린이와 어른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는 작가의 마음에 감탄하며 읽었다. 오늘 읽은 뒷부분에서는 동심이란어른의 어른이 인상적이었다. 동심이란을 읽을 때는 내가 동심이라는 단어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에 대해 생각해보았고(많은 사람들이 어린이라면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결이겠지), 어른의 어른을 읽을 때는 작가가 찔렸던 부분에 나도 같이 찔리는 느낌이었다. 내가 어른이 될 생각은 않고 본받을 어른이 없다며 한탄하던 시간들이 나를 응시하는 느낌.


동심에 대한 오해는 결국 어린이를 어른의 세계와 떼어놓는다. 어린이가 옳은 마음이나 천진한 낙관을 보여줄 때 단지 어려서, 순진해서, 잘 몰라서 그런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동심은 찬미되는 만큼이나 무지하고 현실 감각이 없는 것, 철없는 생각으로 치부될 때가 많다. 어른이 되면서 잃어버릴 수밖에 없고, 잃어버려야 성숙해지는 무언가로. (292)


그런데 어쩌면 내가 '좋은 어른'을 바라는 마음에 조금 불순한 구석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어느 자리에서 들은 이야기 때문이다.

저는 세월호에서 희생된 학생들과 동갑이에요. 그때 소식을 알면서도 선생님들이 하래서 그냥 공부를 한 게 두고두고 마음에 남아요. 이제 저는 어른이 되었는데 그 친구들은 아니잖아요. 과연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할지 생각을 많이 해요. 그 뒤로 세상이 달라진 것 같지도 않고, 저도 그때 공부하라고 하던 선생님들이랑 똑같은 어른이 된 것 같아요."

그분은 내게 어떤 어른이 좋은 어른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어린이와 관련된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사람이다 보니 사실 자주 듣는 질문이다. 전에는 내가 존경하는 어른들을 소개하기도 하고, "어린이를 존중하는 어른"이라거나 "책임을 다하는 어른" 등으로 답하곤 했는데, 그날은 갑자기 너무 부끄러워서 답을 찾지 못했다. 결국 뭐라고 얼버무렸는지 기억도 안 난다. 아마 횡설수설했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를 '어른'으로서 목격한 나에게는 그 질문이 마치 여태 어른들은 무얼 하고 있었느냐는 질책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302-303)


혹시 나는 나에게도 어른이 필요하다'는 말 뒤로 숨었던 게 아닐까? 나 자신도 어른이면서 아닌 척하느라고, 겸손한 외양을 하고 존경하는 어른의 이름을 읊어온 것 아닐까? 그분들을 마음으로부터 공경하는 것과 별개로, 그렇게 '좋은 어른'이 되는 건 먼 훗날의 일로 미룬 것 같다. 어른이 된 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그 말은 '훌륭한 어른'한테 여러 책임을 떠넘겼다는 뜻도 된다. 내 생각이 지나친 걸까?

내 마음을 파고들어 본다. 내 마음은 내 것이기 때문에 내가 제일 잘 안다. 나는 존경하는 어른들이 있으면서도 툭하면 '이 시대는 진정한 어른이 부족하다' '본받을 사람이 없다'는 식으로 아쉬움을 부풀렸다. 내가 어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게 참조할 세대가 없기 때문이라고,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변명거리를 미리 만들어둔 것 같다. (303)


정확하게 근거를 댈 수는 없지만 어린이들은 대체로 어른들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나는 그것이 어른의 권위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어린이를 돌보고 책임지는 권위다. 그리고 내게는 그런 모습이 어린이가 어른에 속해 있는게 아니라 어른에게 기대어 있는 장면으로 보인다. 나는 어른이니까 어린이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게 옳다. 내가 먼저 '좋은 어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른 어른 뒤에 숨지 말고, 그분들한테 기대어서. (304)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이런 일을 할 때조차 용기가 필요하다. 남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기로 순식간에 판단하고 행동하는 분도 있지만 나는 어린이한테 화장실 순서를 양보할 때조차 용기를 내야 한다. 그래도 계속 손톱만한 용기라도 내보려고 한다. 보상도 보상이지만, 내 생각에는 '친절'만큼 구체적으로 세상에 윤기를 더하는 행동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친절하게 대한 것을 후회하게 만드는 사람도 있다. 나의 친절을 이용하거나 나를 얕잡아 보는 사람들 말이다. 그럴 테면 그러라지. 그런 사람들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줄 친절이 줄어들면 안 된다. 그러면 내가 지는 게 되니까. (325)

날마다 보는 험악한 뉴스만큼, 험악한 뉴스에 무감해지는 나 자신에게 겁이 난다. 그럴 때 친절해지기로 한 번 더 마음을 다진다. 누군가에게 친절을 주려면 상황 파악도 잘해야 되고, 용기도 내야 한다.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낼 수 있는 용기는 여기까지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소중히 여기려고 한다.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는 게 '친절함'이라면 나는 그에 걸맞은 판단력도, 용기도 갖고 있을 테니까. 언제까지나 다정하고 용감한 어른이 되고 싶다. 그게 나의 장래희망이다. (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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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31.















서리북 17호 읽기. 작별하지 않는다를 아직 읽지 않아서 그 부분을 빼고 읽는 중.

 


25.4.1.














작별하지 않는다읽기 시작. 소년이 온다의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화자임이 짐작되고, 제목과 다르게 작별인사를 다시 쓰려는 화자의 이야기로 시작. 분위기는 소년이 온다와 비슷하기도 하고, 드문드문희랍어 시간의 분위기와 문장이 떠오르기도 한다. 아직 1장밖에 못 읽었지만.

 


25.4.4.

탄핵심판 방송을 보고 작별하지 않는다마저 읽기. 이런 시기에 이 책을 읽고 있는 것도 의미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인선이 등장하면서 사건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고, 인선의 집을 찾아가는 경하의 모습을 보며 세상으로부터 고립되겠구나, 스스로 찾아간 듯 유폐되어 인선의 작업을 바라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년이 온다에서 시작되어 꿈으로 촉발된 인선의 작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었을지.

 


25.4.11.~12.

작별하지 않는다읽기. 이때는 정말 잠깐잠깐 짬을 내며 읽어서 기록을 남길 새도 없었다.

 


25.4.18.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를 읽었고, 작별하지 않는다완독. 소년이 온다에서는 현장의 생생함을 증언의 형태로 소환했다면,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는 증언과 자료를 수집된 형태로 제시하며 거리를 둔다. 그 시기를 겪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영향을 받고 사는 이들의 모습에 초점을 둔 것, 꿈과 환상이 혼재된 서술, 비현실적으로 내리며 세계와 격리시키는 눈. 소년이 온다와 다른 방식을 선택한 것은 같은 방법론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작가의 다짐일까. 아니면 여전히 사건이 아득하게 쌓이는 눈에 둘러싸여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의 반영일까. 다시 한번 집중해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이 드는 독서였다. 이제 서리북에 실린 리뷰를 읽어봐도 되겠다...

 


25.4.20.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읽기 시작. 처음엔 몰랐는데 뒤에 실린 작품 목록에 나온 작품 번호를 미술관 홈페이지에서 입력하면 해당 작품들을 바로 찾을 수 있어 편리하다. 가장 좋은 건 페이지에 qr코드가 있어 바로 스캔해서 볼 수 있게 하는 것이겠지만, 그것은 돈이 많이 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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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26.










이중 하나는 거짓말읽기. 새로 나온 니트 에디션의 디자인이 셋 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 구입을 미루고 있다가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다. 채운과 소리와 지우의 이야기가 처음에는 따로 진행되는 듯하다가 조금씩 엮이기 시작. 문득 청소년문학과 성인 문학(?)의 차이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풀어낸다면 청소년문학일까? 그렇다면 이 책은 청소년문학일까? 나에게 청소년문학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것은 보통 결말 처리 방식인데, 그렇다면 죽이고 싶은 아이당연하게도 나는 너를은 그런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 같고


 

25.3.29.

이중 하나는 거짓말완독. 인물들의 섬세한 심리 묘사나 문장의 세공력, 인물에게 몰입하게 만드는 스토리에는 감탄하며 읽었으나, 하나씩 드러나는 진실을 보며 거짓말’, ‘비밀이라는 소재가 하나의 테마로 모이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하나의 비밀이 다른 비밀을 돕는다는 말이 잘 와닿지 않는 이유이기도. 알면서 외면했거나 미처 알지 못했던 진실을 하나씩 마주하면서 마음의 상처를 극복해나가는 세 인물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느꼈던 처연함은 잔잔하게 오래 남았다.


아버지는 자신이 빈말 못하고 솔직하다는 사실을 늘 자랑스러워했다. 실은 그게 어떤 무능을 뜻하는지 잘 알지 못하면서. (75)


지우가 잠시 숨을 가눈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난이란……

지우는 문득 교실 안이 조용해지는 걸 느꼈다.

-가난이란 하늘에서 떨어지는 작은 눈송이 하나에도 머리통이 깨지는 것.

지우는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지만 조금 의연해진 투로 다음 문장을 읽어나갔다.

-작은 사건이 큰 재난이 되는 것. 복구가 잘 안 되는 것…… (85)


지우는 방과후 청소를 하다 미술 선생님 책상에서 낡은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아동'이니 '치료'니 하는 말이 적힌 학술 도서였다. 지우는 별생각 없이 그 책의 책장을 스르륵 넘겼다. 그러곤 익명의 아동들이 그린 어둡고 기이한 그림을 보다 문득 어떤 문장 앞에 멈췄다.

 

미술은 자기 정화 효과가 있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문제를 설명해주지만 쉽게 고통을 덜어주지는 않는다.

 

지우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그 문장을 한번 더 훑었다. '쉽게 고통을 덜어주지 않는다'는 말, 믿을 만한 말이라 생각했다. (119)


'이야기가 가장 무서워질 때는 언제인가?'

소리가 슬픈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이야기가 끝나지 않을 때.'

그런데 채운은 지금 무서운 이야기 속에 갇혀 있는 모양이라고, 거기서 잘 빠져나오도록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소리는 곧 채운과 만날 예정이었고, 그건 하나의 비밀이 다른 비밀을 돕는다는 뜻이었다. (134-135)


눈앞에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온 힘을 다해 다른 선택지를 찾는 건 도망이 아니라 기도니까. (182)


지우가 이해하기로 지우개는 뭔가를 없앨 뿐 아니라 '있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대상에 빛을 드리우고 그림자를 입힐때 꼭 필요했다. 그 대상이 사물이거나 인물, 심지어 신일 때조차 그랬다. 누구든 신의 얼굴을 그리기 위해서는 신의 얼굴을 조금 지워야 했다. '광원', 즉 빛이 출발한 곳을 먼저 파악해 빛이 닿는 곳은 어둡게, 그렇지 않은 데는 밝게 표현하는 게 기본이었다. (200)


이 게임의 목적은 얼핏 '거짓 가려내기' 같지만 실제로 이 게임에서 중요한 건 '누구나 들어도 좋을' '아무에게나 말해도 되는' 진실만 말하는 거였다. 당연했다. 누구도 초면에 무거운 비밀을 털어놓지는 않으니까. (226)


지우는 그보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자신이 그렇게 특별한 사람이 아님을 깨닫는 이야기, 그래도 괜찮음을 알려주는 이야기에 더 마음이 기울었다. 떠나기, 변하기, 돌아오기, 그리고 그사이 벌어지는 여러 성장들. 하지만 실제 우리는 그냥 돌아갈 뿐이라고, 그러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당시 자기 안의 무언가가 미세히 변했음을 깨닫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 삶의 나침반 속 바늘 이미지의 자성을 향해 약하게 떨릴 때가 있는 것 같다고. 그런데 그런 것도 성장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리는데다 거의 표도 안 나는 그 정도의 변화도? 혹은 변화 없음? 지우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다만 거기에는 조금 다른 이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고. 지우는 그 과정에서 겪을 실망과 모욕을 포함해 이 모든 걸 어딘가 남겨둬야겠다 생각했다. (233)

















서리북 17호 읽기. 여전히 지지부진한 헌법의 시간에 통탄을 금치 못하며 서평들을 읽는다. 제헌 헌법이 만들어지던 순간을 다룬 헌법의 순간도 흥미로웠지만 내 눈길을 더 끌었던 것은 히틀러의 법률가들이었다. 나치나 홀로코스트를 떠올릴 때면 끔찍하고 잔혹한 행위들의 이미지 때문에 행위자/세력들을 악마화하거나 단순화, 또는 추상화하여 떠올리는 경향이 있는 듯하지만, 책과 서평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그들은 갑자기 대뜸 등장해서 학살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것. 하나하나 차근차근 절차를 밟아가며 학살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것.



유정훈_헌법을 공부하는 슬픔과 기쁨














미국에는 헌법 해석에 관한 원전주의(originalism)라는 흐름이 있다. 법철학적 논의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보수 진영의 대법관들이 연방대법원 판결에 적용하는 법리다. 헌법은 헌법 기초자가 의도했던 바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인데, 헌법은 제정 당시 기초자에 의해 확정된 문서로서 후대의 해석자에 의한 변경은 허용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헌법을 '죽은 문서'라 칭하는 경우마저 있다. 법원의 헌법 해석 원칙이 이렇다면, 헌법 제정 당시 회의록은 역사에 그치지 않고 법 실무의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된다. (17-18)


대부분의 개헌은 권력자의 집권 연장을 위한 수단으로 혹은 쿠데타와 계엄 같은 비정상적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정치권의 합의와 통상적 절차에 따른 개헌은 1960년의 3차 개헌 그리고 1987년의 9차 개헌 정도인데, 그 역시도 4.19 혁명과 19876월 민주화운동이라는 정치적 격변의 결과였다. 우리에게 '개헌'은 제헌헌법을 토대로 부족한 부분이나 시대 상황에 맞지 않는 조항을 고쳐 나가는 것이 아니라 기존 헌법을 '갈아엎는 작업'이었다. 제정 당시 조문은 그대로 둔 채 수정헌법 조항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미국의 개헌과는 사뭇 다르다. (18)


적어도 초등교육은 의무적이며 무상으로 한다라고 규정한 제헌헌법 제16조에 '적어도'라는 문구가 들어간 과정, 무상의 범위에 관한 의원들의 논쟁 역시 인상적이다.(137-140) 이 부분을 읽으며 현행 헌법 제31조를 찾아보니, 의무교육은 무상으로 한다는 내용 외에도 모든 국민은 그 보호하는 자녀에게 적어도 초등교육과 법률이 정하는 교육을 받게 할 의무를 진다"라는 조항이 있다. 치열한 논쟁을 거쳐 제헌헌법에 들어간 '적어도'라는 세 글자는 지금도 우리 헌법의 일부이다.

헌법을 처음 배울 때 접했던, 무상교육은 왜 수업료에 국한되지 않고 의무교육에 필요한 일체의 비용을 포괄해야 하는지에 관한 논변은 헌법 공부에 흥미를 느끼게 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헌법 조문을 놓고 직접 다툰 것은 아니지만 한국 사회는 무상급식 이슈 때문에 이 문제를 실천적으로 경험하기도 했다. 그런데 무상교육 범위에 관한 대부분의 쟁점에 관한 논의는 제헌헌법 당시 이미 치열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무상·의무교육이라는 원칙과 신생 국가의 국력이라는 제약 사이에서, 헌법의 기초자들은 '적어도'라는 문구를 넣음으로써 무상·의무교육에 관하여는 앞으로 나아갈 일만 있어야지 후퇴나 축소는 없어야 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했다. (21)


이용우_탄핵의 딜레마 














탄핵은 14세기 영국에서 군주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시작되었으며, 고위 공직자의 책임성을 강화하는 제도로 발전했다. 미국은 이를 차용하여, 공화정과 권력 분립 체제를 유지하는 핵심 장치로 탄핵을 활용했다. 이철희는 탄핵을 '헌정 질서를 유지하면서 나쁜 권력을 축출하는 절차적 장치'로 정의하며, 권력 남용과 헌법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탄핵이 정치적 도구로 악용될 가능성과 당파성이 개입되는 본질적 한계를 지적한다. (28-29)


탄핵 제도가 도입된 이유는 첫째, 권력을 통제하고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탄핵은 권력이 집중되고 남용될 위험이 있는 상황에서 이를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장치로 설계되었다. 특히, 권력자가 법 위에 군림하지 않도록 하고, 공직자가 공익과 국민 신뢰를 저버릴 경우 이를 바로잡는 헌법적 조치이다. 둘째, 헌정체제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영국과 미국에서 모두 탄핵은 체제 자체를 붕괴시키기보다는, 체제 내에서 권력 남용을 바로잡아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도입되었다. 이철희는 이를 두고 탄핵은 '헌정 질서를 유지하면서 나쁜 권력을 축출하는 절차적 장치'라고 설명한다.

다른 한편 탄핵은 정치적 도구로 당파성을 지닌다. 탄핵은 본래 법적이고 헌법적인 절차지만, 그 도입 배경에는 강력한 정치적 동기가 자리 잡고 있다. 권력 간 균형을 잡기 위한 제도적 수단이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악용될 가능성이 있다. , 탄핵은 정치적 이해관계가 필연적으로 개입되는 것으로 의회에서의 탄핵 소추 의결은 정당 간의 권력 균형과 정치적 계산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다수당이 정치적 우위를 확보하거나 반대 세력을 제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 이는 탄핵이 민주적 책임성을 높이는 장치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도구로 오용될 수 있다는 의미다. (29)


탄핵은 정당 간의 극심한 갈등을 초래하고, 입법부와 행정부 간의 협력적 관계를 파괴할 수 있다. 대통령이나 고위공직자가 탄핵 위기에 처할 경우, 국가 운영이 마비되거나 중요한 정책 추진이 중단될 위험이 생긴다. 또한 탄핵은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는 대신, 문제를 법적 영역으로 넘기며 정치권의 책임 회피를 초래할 수 있다. 정치적 논의와 타협 대신 탄핵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에 의존하면, 대의 민주주의의 본질적인 기능이 위축될 수 있는 것이다. 국민 여론을 둘로 나누고, 정치적 분열과 대립을 심화하고, 특히 탄핵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추진되었을 경우 결과적으로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신뢰를 약화할 위험이 증폭되고 사회적 분열을 가속화한다. (33)


12·3 비상계엄 사태로 촉발된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 절차의 진행 과정에서 우리는 민주공화국을 지탱하는 서로 다른 이해를 갖는 집단의 사회적 합의 절차로서 정치를 없애고 극단적 대립과 헌법 기구 자체를 부정하는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다. 대통령이 사적인 목적을 위해 국가의 무력으로 헌법 기관의 작동을 멈추려한 데 이어 대중 동원을 통해 이 행위의 정당성을 찾으려 하고, 민주주의의 근간인 선거 제도를 부정하고 법원에 난입하는 극단적 대립이 나타나고 있다. 사실 이는 탄핵 제도가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불완전성에 기인한다. 이 불완전성은 법적 정당성뿐만 아니라 사회적 합의를 통해 보완되어야 한다. 따라서 작금의 탄핵 정국이 단순히 한 권력자의 축출 여부를 넘어, 민주적 헌정 질서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한 사회적 합의를 형성하는 계기가 될 것인지 주목해야 한다. (35)


이황희_법은 어떻게 정의와 멀어지는가














근대 입헌주의는 18세기 말 미국과 프랑스에서 발생한 시민혁명의 결과로 탄생했는데, 이 새로운 이념은 신분이 아닌 개인을 사회 질서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여기서 개인은 과거에 사회를 하나의 질서로 묶어 주었던 종교나 인습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평등한 자유의 주체로서 각자가 자신의 도덕적 세계의 중심으로 간주되었다. 평등한 자유의 사적·공적 실현이라는 규범적 이상은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지속적인 요구를 생성했고, 이는 그에 적합한 정치적 질서를 만들어 나가는 동력이 되었다. 이로써 국가 권력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수단으로 자리매김했다. 이제 권력은 분할되어야 하고, 상호 견제되어야 하며, 법에 구속되어야 한다.

파시즘의 영향에 따라 개인에 대한 집단의 우위를 관철하고자 한 나치는 이러한 근대 입헌주의의 역사적 기획과 대결을 피할 수 없었다. 우선, 근대 입헌주의의 자장 안에 놓여 있는 바이마르 헌법의 규범적 영향력을 극복해야 했다. 이 극복은 특히 '수권법'이라 불리는 '민족과 제국의 비상사태 해결을 위한 법'(1933.3.24.)'제국 재건에 관한 법'(1934.1.30.)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전자는 "정부가 의회의 감시 없이도 법을 제정하고 헌법을 수정할 수 있도록 승인"(69)한 법이고, 후자는 각 주의회를 중단시키고 그 주권을 제국에 넘김으로써 독일의 연방 구조를 뒤엎어"(70) 버린 법이다. 두 법은 모두 형식적으로는 바이마르 헌법으로부터 탄생했으나, 내용적으로는 자신을 잉태한 헌법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역설을 남겼다. (41-43) 


그들은 먼저 근대 입헌주의의 주축을 이루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편적인 것'이 아닌 '맥락적인 것'으로 재규정했다. 이러한 자유와 권리는 “19세기 군주국가를 겨냥했던 종류의 운동에서나 성립한다"(78)는 것이다. 개인의 주관적 공권을 강조하는 생각은 '통치자와 시민이 대립하는 체제'와 같은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서나 유의미하므로, 나치 국가처럼 개인이 민족공동체의 구성원이 된 새로운 질서에서는 이러한 권리가 필요하지 않다고도 했다. 여기서 개인은 민족공동체의 질서에 따르는 범위에서만 법적 지위를 누리게 된다. 법은 개인의 이익을 보호하는 대신 공동체를 육성"(21)하는 역할을 맡아야 했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의식이 약화되면, 국가 권력의 남용에 대한 경계심도 함께 사라질 수밖에 없다. 나치 법률가들이 권력 분립, 견제와 균형 같은 근대 입헌주의의 요소와 손쉽게 결별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그들은 권력의 집중을 정당화하고, "한 사람의 손에 최고의 정치적 리더십이 온전히 주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98)라고 주장했다. 권한의 남용 문제는 정치적 지도자의 개인적 자질을 통해 방지할 수 있다고도 보았다. (43)


그간 주류적인 설명은 나치 정권이 법을 이용해 무도한 행태를 보일 수 있었던 책임을 법실증주의에서 찾아왔다. 법실증주의는 법과 도덕을 분리하여 사고하는 탓에, 나치의 부정의한 법을 유효하게 통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나치 법률가들이 법실증주의에 매우 비판적이었음을 지적한다. 오히려 그들은 "법과 도덕의 통합”(244)을 옹호했고, 저자는 이것을 나치 법이론의 가장 큰 특징으로 규정한다. (45)


그러나 나치 법이론의 문제는, 법과 도덕의 연관성 그 자체가 아니라, 법이 어떤 도덕과 연관되어 있는가에 있었다. 도덕이란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행동과 그 조정에 관한 규범 체계를 말하는데, 우리는 통상 정직, 성실, 타인에 대한 존중 등을 떠올린다. 그 반면에, 나치는 다른 방향의 도덕을 추구했다. 그들은 민족공동체나 인종적 동질성 개념을 법의 도덕화를 위한 토대로 삼고, 명예, 충성, 품위 같은 윤리적 개념을 법적 개념으로 변형시켰다. 인종적 균등 같은 "동질적 민족공동체 신화"(251)의 요소들도 법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45)


한편, 나치 법률가들이 추구한 법의 도덕화는 국가 권력이 개인의 내적 영역에 더 깊이 개입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법 규범과 윤리 규범의 차이를 지운다면 국가는 행위에 관한 외적 자유의 영역만이 아니라, 내심(신념, 가치, 동기 등)에 관한 내적 자유의 영역에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게 된다. 원래 윤리에 관한 내심의 문제는 사적 자율의 대상일 뿐 국가 입법의 대상이 아니었다. 내면의 윤리적 헌신은 개인의 고결함에 관한 문제이지 국가의 강제력이 미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이 도덕을 자신의 내용으로 동원한다면, 단순한 규범의 준수만이 아니라 윤리적 동기까지 요구할 수 있게 된다. 정권의 권력 강화라는 결과는 불가피했다. (46)


그렇다면, 나치 법이론의 재생을 막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그릇된 도덕에 매몰되어 있었던 나치와 달리, 올바른 도덕을 법에 새기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저자는 법과 도덕의 분리라는 법실증주의의 핵심 주장을 옹호하면서 "도덕과 법을 별개의 규범 영역으로 다루어야" (276) 함을 강조한다. 그와 동시에 공표성, 투명성, 이해 가능성, 신뢰성, 예측 가능성, 일관성, 소급 입법 금지 같은 조건들을 법체계의 규범적 요건으로 설정함으로써 자의적인 권한 행사를 억제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에 공정성, 법 앞의 평등, 적법 절차, 공정 절차 등을 포괄하는 정의 개념을 추가함으로써 법체계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로 치면 이들은 헌법의 실정 규범과 기본 원리로 포섭할 수 있는 내용이다. 우리가 헌법을 제대로 실현한다면, 충분히 달성할 수 있는 과제들이다. (47)


법의 정당성을 내재적으로 산출해야 하는 근대 입헌주의에서 법은 민주적으로 제정된 실정법이며 헌법이 정한 요건에 따라 비로소 확정된다. 그러나 헌법이 정한 요건 자체만으로 법의 타락가능성이 차단되는 것은 아니다. 법의 타락을 막는 최후의 방벽은 정의로운 법에 의해 통치되기를 원하는 국민의 요구와 이를 위한 실천이다. 법에 대한 최종적인 감독자는 법의 궁극적인 작성자인 국민이기 때문이다.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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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5-04-02 0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른씨(청소년)하고 마주앉아서,
푸른씨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함께 소리내어 읽을 수 있다면 ‘청소년문학‘입니다.
여러모로 보면, 우리나라는 아직 푸른글(청소년문학)이 한참 멀었습니다.
푸른씨가 눈앞에서 목소리를 들으면서 느끼기에 창피한 글(표현)이 많더군요.

철들어 가면서 스스로 새롭게 ‘어른‘으로 어질게 피어나는 때인 푸른날이기에,
이러한 푸른날에 푸른씨한테 푸른숲으로 나아가는 푸른씨앗을 심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푸른글이라고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집 두 푸른씨하고 으레 소리를 내어 책을 함께 읽으면서
느낀 바를 적어 보았습니다.

아무 2025-04-21 22:08   좋아요 0 | URL
소중한 말씀과 의견 감사 드립니다.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계기가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오랫동안 청소년문학을 읽으면서 성인문학과 청소년문학을 구분할 필요에 대해 의문을 가진 적도 있고 지금도 그 물음은 제가 답을 내리지 못한 고민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구분을 지어버리면서 제가 생각한 ‘청소년문학스러움‘이 나타나는 것 같고, 이야기가 확장될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죠. 한동안 잘 읽지 않았던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나라가 한참 멀었다고 하시는 말씀을 보니, 외국 문학 중에 훌륭하다고 생각하신 청소년문학이 있었는지도 궁금해지네요..
 

25.3.17.














시녀 이야기를 다 읽음. 디스토피아적인 설정을 마련한 뒤 이 세계의 부조리함에 대한 완전한 각성을 하지 않은 인물을 화자로 둔 것이 탁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이라가 화자였다면 지금과 같은 작품이 되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에필로그에서 기록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거리를 만들어낸 것도 인상적이었고, 에필로그의 세미나에서 길리어드를 다루는 방식에서 역사가 되풀이될 것 같은 실낱 같은 불안함이 엄습하게 만드는 것도 오래 기억이 남는다. 『증언들』도 조만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는 아직 『눈먼 암살자』도 있고 『그레이스』도 있지만...

 


25.3.19.















겨울의 언어2부 읽기. 책에 대한 이야기여서 그런지 1부에 비해 호흡이 짧다. 책은 다른 그 어떤 곳에서도 배울 수 없는 가장 깊은 수준의 경청을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113)는 문장에 잠시 오래 머물렀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경청을 하지 못했었는지 생각하며.



25.3.21.














이만큼 가까이읽기. 책을 멀리하다가 다시 돌아올 때 정세랑의 책에 손이 가는 일이 종종 있다. 몇 년 전 앞부분만 읽고 오랫동안 덮어두었다가 처음부터 읽기. 정세랑표 청춘소설로 볼 수도 있겠지만 화자의 목소리는 굉장히 덤덤해서 분위기가 달라 보이기도. 3분의 2가 지났을 때 큰 사건이 이미 발생했는데 이후에 어떻게 내용이 이어질지..


남의 돈 처먹고 잘살 줄 알았냐는 말 나올 줄 알았는데, 막상 보니 남의 돈 처먹고도 못살면 쓰냐는 말이 나오더라. (80)

  └내가 아는 정세랑 소설의 따뜻한 매력은 이런 것.

 


25.3.23.

이만큼 가까이완독. 무척이나 힘들었을 시기를 화자가 잘 극복할 수 있었던 건 다른 친구들과의 느슨한 연결 때문일지도. 자주 만나지도 마음 속 깊은 얘기를 항상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무심하게 호신용품을 툭 던져주는 그런 연대. 소설처럼 큰 사건이 아니어도 저마다의 상처를 남기는 시기를 어떻게 지나고 기록으로 남길 것인가를 생각해보게 된다.


서로의 결점에 대해 너그러워졌다. 민웅이의 무기력에 대해, 찬겸이의 엘리트주의에 대해, 주연이의 쓰디쓴 부분에 대해, 송이의 방랑벽에 대해…… 아마 친구들도 나의 어떤 부분을 참아주고 있을 것이다. 일단 복합성 애도라 해야 할지 뭐라 해야 할지 그 시기를 참아준 것만 해도 고맙다. 변화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변화를 요구하지도 직언을 하지도 않았다. 서로의 얕은 수와 비굴한 계산까지도 웃음으로 넘겼다. 못나면 못난 대로 살아 있어달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한껏 멀어졌다가 다시 가까워지고 나서, 우리는 늘 서로의 안위를 걱정했다. (226)


내 생각에, 별로 좋은 나이라는 건 없는 것 같아. 어릴 때는 언제 어디에 있고 싶어도 결정권이 없고, 나이가 들면 지금이 언제인지 어디에 있는지 파악을 못하니까."

"언제, 어디에."

내가 반복했다.

"시공이야. 그게 무엇보다 중요한 정보야." (284)

















멀고도 가까운읽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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