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1.
『2025 제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읽기 시작. 백온유 작가의 「반의반의 반」, 강보라 작가의 「바우어의 정원」을 읽음.
「반의반의 반」_돈의 행방으로 시작되어 드러나는 영실-윤미-현진의 관계와 민낯들. 차가움, 강인함, 기품으로 보였던 영실의 면모를 오천만원의 비밀이 드러났을 때 추함으로 달리 보는 윤미와 현진도, 사람에 대한 믿음 없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곁을 내어주지 않았다가 품위 있는 죽음을 위해 이제야 누군가에게 의지하며 자기기만에 빠진 영실도 찌푸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인생의 굴곡진 순간에 오천만원이 어떻게 자신을 구했을지 가늠해보는 윤미와 현진의 생각에서 느껴지는 모성에 대한 고정 관념─왜 엄마/할머니는 내가 그토록 힘들 때 나를 도울 수 있으면서 돕지 않았나와 같은 질문─도, 누구에게도 다정하지 않았으면서 타인에게 자신에 대한 존중을 바라는 영실의 마음도 훤히 드러나는 것 같았달까.
오천만원은 현진의 꿈에서 자꾸만 어떤 가능성이 되었다. 스무살 현진의 대학 등록금이 되기도 했다가, 스물두 살 때 사정이 어려워 포기해버린 교환학생 프로그램의 유학비가 되기도 했다. 그돈을 보태 작은 원룸 전세를 얻어 독립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도둑맞은 금액의 반의반만 있어도 지금보다는 행복할 텐데. 대학생 때 열 시간씩 아르바이트를 했던 일이나 취준생 시절 용돈벌이를 위해 갔던 물류 창고에서 박스가 떨어져 발등에 금이 갔던 일이 차례로 떠올랐다. 산재 처리가 되어 보상금으로 이백만원을 받았을 때, 현진은 공돈이 생긴 것처럼 기뻤다. 그 돈으로 할머니와 엄마를 데리고 외식을 하면서 뿌듯함을 느꼈던 기억이 자꾸만 소환되었다.
왜 나의 필요를 채워주려 할머니는 희생하지 않았을까. 궁극적으로 현진이 궁금해진 부분은 그것이었다. 할머니는 마땅히 그런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존재가 아닌가. 그러기 위해 지금껏 부지한 목숨이라고 해도 그리 어색하지 않은, 그런 존재. 현진은 억지를 써가며 영실을 열렬히 원망해보았다. (34-35)
「바우어의 정원」_고통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배우라는 직업에 투영시킨 메타소설처럼 읽혔다. 파란색을 수집하는 새틴 바우어, 사람들 앞에서 고통을 제시하는 역할극의 내담자들, 자신의 고통을 극화하여 제시해 배역을 따낸 은화 모두 ’어떻게‘보단 ’보여주기’에 초점을 둔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든 고통의 근원을 찾아 그것을 품고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시작이 오디션 이후 차 안에서 이루어지는 은화와 정림의 역할극인 것처럼 읽혔다. 정림과의 대화 이후 고통의 시작점으로 나타난 구더기가 들끓는 우유팩이 남기는 강렬한 이미지. 그리고 그때의 불씨에서 다시 시작하겠다는 마음. 이를 표현하는 문장에 담긴 감정의 진함이 인상적이었던 작품.
파란색 사물로 사랑을 표현하는 새가 있다는 거 아세요? 은화는 운전대를 잡은 손을 풀었다가 다시 쥐었다. 오랜만에 하는 운전이라 그런지 손의 감각이 어색했다. 호주 동부에 사는 수컷 새틴 바우어 새가 그 주인공인데요. 꽃잎이나 열매, 심지어 플라스틱 병뚜껑까지, 땅에 떨어진 모든 사물 중 파란 것만을 모아 둥지를 꾸미고 암컷을 초대하는 독특한 구애 방식 때문에 '정원사 새'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해요. 새틴 바우어. 이름도 참 예쁘지 않나요? 은화는 손가락으로 운전대를 톡톡 두드렸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새였다. 그래, 병원 대기실 책장에 꽂혀 있던 정사각형 판형의 아동용 그림책. 그 책의 맨 첫번째 장에 새틴 바우어가 있었다. 암컷을 유혹하기 위해 자신의 깃털 색과 비슷한 파란 물건을 강박적으로 수집하는…… 저기요. 술 드신 거 아니죠? 뒤따라오던 여성 운전자가 은화의 차를 추월하며 창문을 내리고 소리쳤다. 위험하니까 졸리면 어디 가서 눈 좀 붙이세요! 퍼뜩 놀라 중심을 잡는 은화의 등을 후려치듯, 옆 차선에서 쇠파이프를 실은 화물차가 날카로운 경적을 울리며 지나갔다. (56)
새틴 바우어가 파랗고 쓸모없는 물건들로 공들여 정원을 장식하듯, 사람들 앞에서 고통의 파편을 훈장처럼 늘어놓던 내담자들. 그들은 오직 그 순간에만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삶에서 상처를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사람들처럼. (64)
주위의 모든 것이 그녀가 조금 전에 행한 작은 복수와 대비되어 무정한 아름다움을 드러냈다. 가로등 아래 춤추는 눈송이들. 창문을 장식한 색색의 전구들. 구세군의 맑은 종소리. 노점에서 풍기는 어묵 냄새. 사람들의 웃음소리…… 눈 내리는 연말의 밤거리를 통과하면서 은화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하나하나 감각했고, 그러는 동안 천천히 비참해졌다. 어린 은화는 배우로서 그 비참함을 잘 간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만큼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그녀 자신만의 것이었으므로, 작고 파란 불씨 하나가 그녀의 정원 안에서 고요히 타올랐다. (81)
25.9.2.
『2025 제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계속 읽기. 서장원 작가의 「리틀 프라이드」를 읽음.
「리틀 프라이드」_자신과 비슷한 처지이면서 자신이 편입되고 싶은 집단의 일원이 내 생각과 달리 말종과 같은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혼란한 마음을 잘 잡아낸 단편이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해설에서도 이야기하는 부분이지만, 내가 동의할 수 없는 생각을 가졌으나 내가 원하는 사회/집단의 공식적인 인정을 이끌어내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인물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망설임의 과정이 끝내 “전우”가 되기를 거절하는 행동까지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다만 앞의 두 작품과 비교했을 땐 여러 인간 군상과의 마주침과 부딪힘이 깊게 다뤄지지 않고 ‘나‘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밀도가 낮다고 느껴졌다.
오스틴이 골라준 풍미 가득한 커피를 마시던 오후, 나는 언젠가 혜령과 퀴어 퍼레이드를 따라 걷던 날을 떠올렸다. 무척 더운 날이었는데 퍼레이드 행렬은 그늘 한 점 없는 아스팔트 도로로 나아갔다. 우리 앞의 트럭에는 상의를 입지 않은 몸 여기저기에 무지개 모양이나 'QUEER' 혹은 'PRIDE'라고 보디페인팅을 한 남자 여럿이 타고 있었다. 원래는 그 위에서 간단한 공연을 하거나 구호를 외치려던 것 같았는데, 더위 탓인지 그들은 그저 트럭 난간을 짚고 한 번씩 손을 흔들어주며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땀으로 번들거리는, 잘 다듬어진 예쁜 몸을 나는 조금 서글픈 심정으로 지켜봤다. 그때 나는 이미 탑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였지만, 그들처럼 웃통을 벗고 싶지는 않았다. (112)
병원을 나서서 건물 뒤편의 작은 부지, 사실상 흡연 공간이나 다름없는 조촐한 공원에 이르렀을 때 나는 그 쇼가 과거의 우리가 얘기했던 것처럼 정말 혁신적이고 대안적이었는지 생각에 빠졌다. 기꺼이 옷을 벗는 사람들과 그들을 향해 따뜻한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을 떠올리자 걷잡을 수 없이 기분이 나빠졌다. 혜령이 말하곤 했던 '너무나 집요한 생각'을 다시 시작한 것 같았다. 그러다 문워크 춤을 췄다는 트랜스맨을 두고 혜령이 한 말을 되새기는 데 이르렀다. 혜령은 그가 아주 멋졌다고 말했지만, 그렇지만, 그에게 매혹되었던 건 아니었다. 그리고 아마 내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그 사실을 아주 천천히 받아들였다. 환자복을 입고 담배를 피우고 거리낌없이 침과 가래를 뱉는 남자들 사이에서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123-124)
25.9.3.
『2025 제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계속 읽기. 성해나 작가의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 성혜령 작가의 「원경」, 이희주 작가의 「최애의 아이」를 읽음.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_읽는 동안 지젤 샤피로의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가 계속 떠올랐던 작품(『괴물들』만 ‘구입’했을 뿐 아직 이 책은 가지고 있지 않다). 시의성 있는 글감을 던지고 생생한 인물의 고뇌와 있을 법한 핍진한 사건들을 펼쳐놓아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하는 서술 방식은 「혼모노」를 읽고 느꼈을 때와 비슷했다. 물론 작품 속 감독의 윤리적 문제는 현실에 비하면 약과였지만… 다만 ‘길티 플레저’를 감각하고 원하면서도 계속 고뇌하던 화자가 그 시기를 통과한 이후의 마무리는 소소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내가 자극에 길들여져서 그런 걸까. 그렇지만 수미상관의 구성과 결말의 감각이 연상시키는 ‘모럴’은 제목과 잘 어울렸다.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고 가끔은 징그럽기도 했다. 어떻게 작품을 본 적도 없으면서 '안 봐도 비디오' 따위의 평을 내리는 걸까. 어째서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을 나락으로 보내려 안간힘 쓰는 걸까. 도대체 왜 사실관계도 명확하지 않은 사건을 멋대로 공론화하고 거짓말까지 얼기설기 덧붙여 온갖 데로 퍼 나르는 걸까. (144-145)
난 누가 듣는 음악, 좋아하는 영화 리스트만 봐도 어떤 유형인지 예측 가능하거든? 근데 너는 뭐랄까. 난감하달까…… 아니 지루하다고 해야 하나. 모럴이 없으니까.
그 사람과 헤어지고 돌아가던 길에 모럴의 뜻을 검색해보았다.
'인생이나 사회에 대한 정신적 태도.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의 구분에 관한 태도'
뜻도 모르고 지껄인 게 분명했지만, 내게 적용해보면 완전히 잘못 쓴 것도 아니었다. 그때까지 나는 무엇이 좋고 싫은지, 옳고 그른지 깊게 따지고 들지 못했으니까.
나에게는 태도랄 게 없었다.
그 사람의 허울뿐인 고상함이 지긋지긋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 사람과 있을 때 체감되는 나의 무지와 단순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147)
나는 내심 오영이 항변해주길 바랐다. 무슨 말이라도 당당히 해주었으면 했다. 하지만 오영은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만 볼 뿐이었다. 총대 옆에 앉은 학생도, 프리랜서 둘도 마찬가지였다. 스크린 속에서 상을 받은 누군가가 이야기하는 소리가 웅얼웅얼 들려왔다. 불편한 고요가 흐르는 와중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 걸까. 왜 모두가 제일 아닌 양 좌시하는 걸까. 사랑하면…… 사랑하면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171)
김곤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죄송합니다. 거듭 말하며 정수리가 보일 정도로 깊이 수그렸다. 그리고 그 순간……
펑.
내 안에서 무언가 터졌다. 매캐한 연기가 사방을 감싸듯 눈앞이 뿌예졌다. 땅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왜 이러지. 생각을 정리할 겨를도 없이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박수가 잦아들 때까지 허리를 굽히고 있던 김곤, 암전과 퇴장. GV는 단정히 마무리되었다. 통속적이고 보편적이어서 누구나 수긍할 수밖에 없는 영화의 엔딩처럼. (177-178)
방금 전의 일들이 다 허구 같았다. 펑, 무언가 터지던 순간도 그 순간의 감정도 이상하리만치 현실감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정말 허구 아닐까 하는, 내가 실패한 영화를 한 편 본 게 아닐까 하는. 별 반 개도 아까울 만큼의 너절한 서사. 치덕치덕 처바른 클리셰. 질문도 남지 않고 더할 말도 없는 싸구려 엔딩. 감독이 지고 만 영화. 아무도 보고 싶어하지 않는 영화. 그렇게 지독히도 못 만든 영화를 본 게 아닐까 하는 생각.
그런데 왜 생각할수록 더…… 허무해질까. 모든 게 흠 없이 온전한데 왜 나만 팔다리가 떨어져나간 것처럼, 살점이 다 뜯겨 너덜너덜해진 것처럼 괴로운가. 왜 이리 지독히도 헛헛한가. (178-179)
망설이다 반석 위에 앉아 포즈를 취했다. 호랑이의 등에 손도 얹어보았다. 상황에 익숙해지자 골을 뒤흔들던 악취도 서서히 사그라드는 것 같았다. 호랑이가 불편한 듯 근육을 움찔댈 때마다 척추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어쩐지 죄를 저지르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흥분되었다.
그건 언젠가 느껴본 적 있는 감각이었다. 죄의식을 동반한 저릿한 쾌감. 그 기시감의 정체를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독하고 뜨겁고 불온하며 그래서 더더욱 허무한, 어떤 모럴.
떨쳐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제는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의 말처럼, 이미 일어난 일은 없던 일이 될 수 없으니까. (183-184)
「원경」_인생에서 갑작스레 다가온 죽음의 그림자를 감지한 이가 과거의 옛 사랑에 기대려 하지만 결국 소외되는 이야기.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는 신오를, 유방암 가족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혼자만의 상상 끝에 원경과 헤어지기로 결심한 신오를 보며 한숨을 푹푹 쉬며 읽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것을 통제하려 했던 신오가 암에 걸렸다는 것이 아이러니.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여러 문제들과 그 사람이 가지고 올 불확실한 미래까지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는 일”(201쪽)을 받아들일 수 없는데 옛 사랑이 어떻게 두려움의 탈출구가 될 수 있을까. 있지도 않을 것 같은 금괴를 찾는 세 여성의 모습에선 삶이 보이고 신오에겐 보이지 않는 것도 삶에 대한 태도 때문이 아닐지.
원경을 떠올리면 물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채워진 컵이 생각났다. 처음 만난 식당에서 원경이 컵에 물을 따라줬을 때 신오는 속으로 작게 감탄했다. 어떻게 물을 저렇게 깔끔하고 적당하게 따를 수 있지. 원경은 그 물컵처럼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신오는 원경처럼 적당한 사람을 만나본 적 없었다. 전에 만났던 여자들 중에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전화해주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사람도 있었고, 신오와 절대 같은 화장실을 쓰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었다. 신오는 자신이 매우 평균적이고 상식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과 잘 맞는 사람을 찾기가 그토록 어렵다는 것에 매번 놀랐다. 원경은 달랐다. 원경의 상식 수준과 감수성의 정도는 신오의 신경에 거슬린 적이 없었다. 잔인한 범죄, 특히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 뉴스에 과하게 방어적으로 반응하지도 않았고, 어떤 드라마나 특정 배우에 지나치게 몰입해 신오를 당황하게 하지도 않았다. 이런 사람이라면 함께 살아도 좋겠다고 신오는 생각했다. 누구를 만나면서 처음 해본 생각이었다. (200)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여러 문제들과 그 사람이 가지고 올 불확실한 미래까지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라면, 신오는 지금까지 누구도 사랑해본 적이 없었다. 앞으로도 누군가를,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사랑하기란 불가능할 것이었다. (201)
이모님과 보살님이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원경도 한편에 서서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신오는 눈을 감지 않았고 손을 모으지도 않았다. 똑바로 바라보고 싶었다. 저 희고 빛나는 뼈들을. 이모님과 보살님과 원경은 구덩이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신오는 그 안으로 끌려들어갈 것처럼 몸을 기울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신오는 이 여자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이들은 모두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자신은 그렇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신오는 깊은 구덩이에 빠진 듯한 외로움을 느꼈다. (217)
제목 '원경'은 이러한 맥락에서 신오에게 세 가지 멀어짐을 선사한다. 하나는 그를 일상으로부터 떨어뜨려놓는 근원인 악성종양(原境), 다른 하나는 이제는 멀어졌지만 한때 가장 가까운 타자였던 전 연인('원경'), 그리고 또하나는 신오가 그녀에게 다시 다가섬으로써 먼 풍경(遠景) 속으로 떠나버리는 세 명의 여자들이다. 「원경」은 신오가 그녀들과 세계로부터 어떻게 멀어지게 되는지를 초점화한다. 작품 전체를 휘감는 불안은 오로지 신오만의 것이다. 자신에게 닥친 불안을 그는 과연 제패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서사의 관건이다. (222)
화면 전체를 신오의 이야기로 가득 채우던 소설이 서사의 진행과 함께 그의 얼굴을 점점 작게 담아내다 끝내 구덩이 옆에서 한없이 작아진 채 침묵하는 모습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데크레셴도의 악상이다. 그에 반해 서사의 진행과 정비례하여 커지는 크레셴도의 불안은 세계의 엔트로피 그 자체이며, 엔트로피를 거스를 수 있는 존재가 전무하다는 점에서 이는 난공불락의 적이다. 불안이라는 거대한 적, 그것이 다름 아닌 인물의 내부에서 솟아난 것일 때 소설이 싸우는 대상은 결국 자기 자신이 된다. 가령, 신오의 배에서 암이 발견되는 것은 물론 하나의 사건incident 이지만 그것은 단지 신오라는 캐릭터를 형성하는 세부 조건에 가까우며 세계와 소설 간의 갈등을 유발하는 핵심 사건event은 아니다. 소설이 전면화하는 사건은 신오가 삶에 관한 실존적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 그러니까 불안이라는 적의 출현이다. (222)
「최애의 아이」_팬심의 극단까지 상상하고 가보는 작품이라고 해야 할까. 최애의 아이를 ‘내가’ 낳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건드리는 것은 욕망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 아이돌 산업을 둘러싼 추한 욕망과 재생산의 문제까지. 한껏 떠오르는 듯했던 우미가 추락하는 계기와 과정은 익숙한 느낌이 들었지만 마지막 결말 처리 방식은 작품집 전체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다. 팬심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 극단으로 나아갔기에 이렇게 귀결될 수밖에 없었던 걸까.
이 사랑이 처음은 아니었다. 마음을 주는 데 있어 우미는 중고품이었다. 나 진짜 다 줬어. 아까울 거 하나 없는데 못 줄게 뭐람? 있는 거 없는 거 닥닥 긁어 주다보면 다 준 것 같아도 또 차오르는 순간이 있었고 그럼 또 줬다. 사랑을 받는 것보다 하는 게 좋아서 계속 줬다. 어느 날엔 내가 이 사랑을 접는 게 죄가 되겠구나. 이렇게 마음을 주다가 그만두면 그 사람의 기둥이 무너지겠구나 싶어 스스로가 무서워질 정도로 줬다. 우주적 엔트로피의 측면에서 못할 짓을 한 거지. 우미는 생각했다. 어느 평행 우주에선 돌이나 미니 다육이인 유리가 펙 하고 죽었을지도 모를 힘이었다. 비록 이 우주에서 유리는 이런 사랑은커녕 우미의 존재조차 모른다 해도. (240)
이렇듯 이 소설은 신자유주의적 성공 신화를 루키즘 버전으로 답습하여 아름다움이 돈이 되는 자본의 규율에 대한 사회의 내면화와 그 극단에서 무참히 파괴되는 인간의 존엄을 고민하도록 이끈다. 동시에 덕질 문화가 소비주의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복잡다기한 영역임을 알게 한다. (281)
이희주에 따르면 아이돌은 사랑받을 요건을 일반인보다 많이 보유하고 있어 사랑에 미숙한 이들마저 "가장 쉽게 마음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는 일부 사람들로 하여금 아이돌을 섣불리 "공공재"(268쪽)처럼 인식하게 하는 복잡한 특성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엄연한 노동자로서의 "아이돌의 인권을 보장"(250쪽)할 것을 적극 요구하면서, 아이돌 인권 보호의 필요성 또한 환기한다. 성장 서사마저도 "감정적인 연출"(266쪽)을 입고 판매되는 것을 넘어, 아이돌을 낱낱이 환금 가치로 환원하다못해 정자마저 판매하는 이 미래는 나날이 상품화되는 아이돌의 인권 실태를 조명하고, 아이돌 산업의 핵심을 이루는 극단적인 감정 노동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무엇보다 이러한 서사가 가능하게 된 기반에는 그간 남성중심적 섹슈얼리티 규범 속에서 '씨받이' 취급을 받으며 모욕당해온 여성 인권의 역사가 자리하고 있다. (295)
25.9.6.
『2025 제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완독. 마지막 심사평까지 읽기를 마쳤다.
「~~물결치는~몸~떠다니는~혼~~」_근래의 젊은작가상의 마지막 작품에서 이전까지의 서사와 다른 방식을 시도하는 소설을 자주 만나는데, 이 작품도 그랬다. 제목이 왜 저런가…에 대한 답은 찾지 못했으나, ‘빙의’라는 소재에서 출발하여 한쪽에는 지구의 탄생 설화가 있고(인류가 멸망한 뒤의 지구인지, 태초의 지구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한쪽에는 ‘기생 쌍둥이’로 태어나 항상 다른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는 동생을 보며 살고 있는 K가 있다. 자생체와 기생체가 구분되지 않는 지구를 보면서, 그 설화를 들으며 자신을 돌아보는 K를 보면서 주체에 대한 생각,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관념들에 균열을 내는 목소리가 상상되었다. 이제 찾아보니 재작년 마지막에 실린 작품도 현호정 작가의 것이었군…
부랑자는 천한 말이 아니라고 그는 말했다. 둥실둥실 떠다닌다는 뜻의 '부浮'에 물결친다는 '랑浪'이니 해파리 같은 거라고, 해파리가 천하냐고 따지듯 물었다. (301)
그러다 누군가 물에 잠긴 그대로 야훼에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입에서 거품이 뿜어져 나오는 버글버글 소리에 여. 아. 오. 이. 하는 새된 음성이 군데군데 조그맣게 섞여들었습니다. 세계가 바로 이곳에 도달하도록 행로를 정한 서구 자본주의의 일등 가부장이 누구인지 혹시 아냐고 그 사람에게 아무도 안 물었습니다. 어느 하나 비웃지도 않았습니다. 몇몇은 몰래 따라 기도하기까지 했는데 그들의 입에서도 거품이 나와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또 아무도 안 웃었습니다. 잘게 찢은 솜 같은 게 흰나비떼처럼 몰려든 건 그때였습니다.
"만나다!"
기도하던 이가 외치더니 덩어리 하나를 먹었습니다.
"뭘 먹기도 전에 맛나대." (305)
K가 쌍둥이, 특히 쌍태아의 발생 과정에 집착적인 흥미를 갖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한쪽이 다른 한쪽과 어디까지 공유할 수 있는지, 어디부터 나뉠 수 있는지, 그것을 누가 결정할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다른 태아를 흡수하며 DNA가 섞여 두 가지 이상의 자아를 가지게 된 태아의 경우를 '평범한' 다중인격장애와 구분한 연구만 해도 그랬다. 자아랄지 인격의 근원이 염색체뿐일까. 그것의 유무로 내 몸속 타자의 혼과 평범한 정신질환을 구분할 수 있을까. 정신이 오직 염색체에만 깃들 이유가 있을까. 혼에게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상황에 맞춰 변화에 적응하며 진화적 시도를 이어간 것이 다윈의 핀치만은 아니었을 거다. 영혼들은 이어지기 위해 무엇에든 들러붙지 않았을까. 기억이나 노래, 그림, 냄새, 몸짓…… 어디에든 매달려 여기까지 왔을 거다. 그러나 그런 얘기는 연구 자료에 나오지 않았다. K는 기대 없이도 계속 공부했다. 영어로 된 논문과 징그러운 사진들을 살피다보면 꾸물꾸물 동생이 다가와 품을 파고들었다. (311)
"사는 게 괴롭고 외로울 때요. 나는 내가 지구라는 몸에 잘못 실린 혼이라고 생각했어요."
K는 다음 근무자를 위해 카운터를 정리하며 말했다.
"이 세상은 내 터전이 아니다. 이 신체는 내 실체가 아니다. 이번 판은 연습이다. 이렇게 구차한 시간들이 진짜로 내 인생은 아닐 거다…… 뭐 그런 식으로 생각한 거죠. 그런데 방금 이야기를 듣고 나니까 이제는 진짜 내가 다른 어딘가에 있을 것 같지도 않아요. 다만 참 궁금하네. 지금 여기 있는 이것은 무엇일까. 내가 아닌 것만은 확실한데요." (319)
미래는 가능성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다. 실체가 있는 모든 시간은 자신을 미래로부터 분리해 현재로 드러낸다. 그러나 결합이 있어야 분리도 있다. 물결치며 갈라지는 미래 사이로 굳어지는 현재에 발을 디딜 때, 사건들은 단단히 뭉쳐 나를 견딘다. 영혼이 몸에 발을 담그듯 저 삶들은 이 삶 속에 끊임없이 뛰어든다. 어쩌면 나는 결합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결합을 결정하는 쪽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쪽도 아닌, 결합 자체일 뿐일지 모른다. 최소한 나는 그것을 통해 여기 있었다. 그리고 나를 있게 한 모든 결합은 불균형적이고 비대칭적이며 무엇보다도 비확정적이었다. (320)
개연성의 압박을 덜어낸 내화는 재해를 일으킬 자연마저 사라지고 폐허의 땅까지 물속으로 완전히 가라앉은 디스토피아를 향해 속도감 있게 질주한다. 빠른 전개가 혼잡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밈meme과 자조적인 어투의 적절한 배합으로 생겨난 유머와 "하고많던 생물에 미생물 무생물" "차례차례 차차 잃고" "느른히 늘어져"(299쪽), "퍽이나 떡이나" (304쪽)와 같이 유사한 발음을 활용한 리듬감 있는 문체 덕일 테다. 이러한 요소들은 전위적인 상상력으로 그려낸 종말 이후의 세계를 읽는 이들이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다. (328)
"근대적 개인은 타자의 의지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행위능력을 부여받은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에 신체나 정신의 일부를 공유하는 분신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절대적인 위협이자 죽어야 할 적"으로 간주되어 "근대 이후 대개의 문학적 서사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었던 데 반해, 현호정의 소설에서 분신은 친밀한 존재로 그려진다. 「라즈베리 부루」(『한 방울의 내가』), 『단명소녀 투쟁기』(사계절, 2021)와 같은 작품이 서로 다른 존재의 상호 의존을 긍정적인 것으로 사유하게 했다면, 이 소설은 신체를 명확히 구분할 수 없는 기생 쌍둥이를 제시하여 분신의 개념을 확장한다. 이는 자립성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근대의 개인관을 재사유하게 할 뿐 아니라 한 인간이 하나의 신체를 독립적으로 소유한다는 근대적 신체관까지 의문에 부친다. 기생 쌍둥이 현상은 태아 오십만 명 중 한 명의 비율로 발생하는 기형적 사례로 알려져 있지만, 기생쌍둥이가 한 세대 전체에 나타나는 세계에서 정상과는 다른 모양새를 가리키는 '기형'이라는 명칭은 부적절해진다. "상대적으로 더 크고 정상적인 몸을 가진 아기를 '자생체'로, 더 작고 비정상적인 몸을 가진 아기를 '기생체'로"(309쪽) 부르는 관습 역시 기생체들의 몸체가 자생체보다 커지고 활동도 왕성해짐에 따라 둘의 위상이 바뀌는 시점에 이르러서는 무용해진다. (331-332)
시간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고 공간 역시 끊임없이 유동하는 것이라면, 나라는 자아는 여러 존재가 관계 맺고 여러 시간대가 지나는 하나의 장일 것이다. 현호정의 이 소설에 따르면, "미래는 가능성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고 "실체가 있는 모든 시간은 자신을 미래로부터 분리해 현재로 드러낸다" (320쪽). 그렇다면 여기에 있다는 것, 현재에 살아 있다는 것은 수많은 가능성의 물결을 가르는 찰나의 발디딤으로만 확인된다. 여러 시간대의 존재가 내 안에 겹겹이 흐르고 있음을 인지할 때야 비로소 나의 존재가 선명해지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다른 존재들과 결합하여 변화될 가능성을 지닌, 표류하는 몸이다. (336)
심사평 읽기.
서장원의 「리틀 프라이드」는 잊기 힘든 결말을 가진 전작 「해피 투게더」가 그랬듯 이번에도 퀴어적 욕망의 사각死各 중 하나를 또렷하게 비춘다. 일라이 클레어의 『망명과 자긍심』만이 아니라 자기-사랑의 두 유형에 대한 루소의 구별도 떠올리며 읽었다. 자기를 지키는 데 쓰이는 자연적 '자애심amour de soi'과 타인과의 비교로 발생하는 사회적 '자긍심amour-propre'은 다르다는 것. '퀴어 프라이드'엔 후자도 필요하다. 나만 나를 사랑하면 되는 게 아니다. 타인도 나를 사랑해야 하고, 다른 누구보다 더 나를 사랑해야 한다. 퀴어도 예외가 아닌 게 아니라 퀴어라서 더욱 그렇다. (그래서 작중 오스틴은 '나'와 비슷하지만 다르고, 혜령은 옳지만 틀렸다.) (351)
클레어 데더러의 『괴물들』은 (본인의 말에 따르면) 괴물이 된 남성 예술가의 목록을 제시하기보단 그들의 팬에 대해 고민한 결과물인데, 이 책의 국역본보다 먼저 나온 성해나의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는 같은 질문을 훌륭하게 던진 선례다. 촬영 중 아역 배우를 학대한 감독을 계속 추앙해야 하는가. 이 소설의 미덕 중 하나는 계속 추앙할 수 있는 사람과 이젠 그럴 수 없는 사람 사이의 차이, 즉 '겪은 만큼 분노하는' 그 차이의 존재가 공동체의 윤리적 난제임을 알고 있다는 데 있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임신한' 주인공의 회고적 성찰을 다루는 '재고再考, revisited' 유형의 에필로그는 그래서 적절하다. (352)
이 소설이 의심이라는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 익숙한 직업적 선입견에 기대고 있다는 점이 걸렸다. 요양보호사 수경에 대한 현진의 의심과 영실의 믿음이 인물들이 맺는 관계나 감정의 디테일보다는 특정한 직업의 조건에 의존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웠다. 이 소설에서 노년 여성은 속아넘어가는 사람, 요양보호사는 신뢰할 수 없는 사람으로 설계된 구조는 흔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믿음과 의심이란 어떤 인물에게 부착되거나 어떤 구조에 배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점차 쌓였다가 휩쓸리는 것, 증발했다가도 부지불식간에 고여있는 것, 끈적하게 들러붙었다가도 너덜너덜해지는 것, 그러니까 관계 속에서 미세하게 변화하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355)
이 소설의 질문은 "아이돌을 멀리서 좋아하기만 하면 되지 왜 그의 아이까지 낳으려고 해?"가 아니라 그 반대를 향한다. "아름다운 것을 가지고 싶은데 그걸 내가 낳는 건 왜 안 돼?" 이것은 성씨를 물려주거나 유전자를 퍼뜨리려는 욕망이 아니라 자신이 아는 가장 반짝이는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에서 임신은 신성한 유전학이나 자애로운 가정학이 아니라 고도로 추상화된 미학의 영역이다. 그런데 가족을 꾸리거나 국가 인구를 늘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감히 아름다움을 누리기 위해 임신을 한다고? 합계출산율이 0.7대인 나라에서 조건 맞는 대로 낳아도 모자랄 판에 유전자를 미적으로 줄 세우면서까지 말이다. 애초에 거대한 알레고리인 이 소설은 이런 상상이 가닿을 디스토피아(국가주의적 우생학과 자본주의적 루키즘의 결탁)까지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