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1.11.














「진주의 결말」과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을 읽음. 「진주의 결말」은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의 불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한 사람을 이해하게 되면서 이 세계가 명료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지만, 실상은 카오스일 뿐 우리가 상대를 이해한다는 착각은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 것”에 지나지 않는 일이라는 이야기.


누군가를 이해하려 한다고 말할 때 선생님은 정말로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85)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저 역시 기만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저의 수많은 모습 중에서 자기들 입맛에 맞는 것들만 모아 저라는 이미지를 만들었으니까요.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는 논리적으로 앞뒤가 척척 맞겠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그것은 기만입니다. 실제의 제 삶은 앞뒤가 척척 맞아떨어지지 않거든요. 제가 선택한 제가 그럴싸한 이야기였듯이 선생님이 분석한 저 역시 또다른 그럴싸한 이야기겠지요. <사건의 결말> 제작진이 편집한 저 역시 하나의 이야기이고요. 그러나 아시겠지만, 저는 그 어떤 이야기도 아니에요. 저는 혼돈 그 자체입니다. 카오스 그 자체예요. 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렇습니다. (87)


우리가 달까지 갈 수는 없지만 갈 수 있다는 듯이 걸어갈 수는 있다고, 마찬가지로 그렇게 살아 갈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달을 향해 걷는 것처럼 희망의 방향만 찾을 수 있다면, 이라고. 그래서 저는 치매에 걸려 우연히 떠오른 생각을 의심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믿는 아빠의 마음을, 마치 치매에 걸린 것처럼 사전 경고도 없이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는 신의 마음을 이해한 사람처럼 살아보기로 한 거예요. 그래서 불을 질렀습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었어요. 이해만 있었죠. 소방관들이 우리집의 유리창을 깨는 걸 보고 제 속이 얼마나 시원했게요, 가슴이 얼마나 벅차올랐게요. 저는 비로소 자유를 얻었거든요. 그 순간 전 모든 이야기로부터 자유로워진 거예요." (97)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은 한 사람의 부재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로 읽혔다. 시간마저 광대하게 느껴지는 고비사막에서, 시간의 흐름이 바위를 깎아내듯 정미에 대한 그리움도 깎이고 파묻히리라는 깨달음을 얻은 인간의 슬픔에 대한 이야기.


고비사막에서 보는 하늘에는 시간적인 광대함도 담겨 있었다. 밤이 되자 어둠 속에서 고대의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사시대, 혹은 아직 인간이 지구에 나타나기 이전의 원시적인 하늘. 별들만이 가득한 하늘. 광활하게 펼쳐진 공간처럼 시간 역시 계속 뻗어나갔다. 과거로, 더 먼 과거로, 시간이 시작되던 그 순간까지. 그렇게 시간은 쌓이고 또 쌓여 한없이 깊어졌다. 그는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 사막을 이해하기 위해 읽은 책에서 본 ‘깊은 시간deep time’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 깊은 시간이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107)

과거의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익숙한 아름다움, 무엇인지 그 정체를 잘 알고 있는 아름다움이라면 미래의 아름다움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아름다움, 지금까지의 상식으로는 모순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 그러니까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아름다움이다. 이 미래의, 두렵지만 우리를 매혹시키는 아름다움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건 우리에게 밤이 찾아와 피로해진 우리 육체가 잠들 때다. 과거라는 이름의 유령들은 잠든 우리 곁을 지키지만, 이제 우리는 거기에 없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깨어난다. (108)


"글쎄. 난 세상은 점점 좋아진다고 생각해. 지금 슬퍼서 우는 사람에게도. 우리는 모든 걸 이야기로 만들 수 있으니까. 이야기 덕분에 만물은 끝없이 진화하고 있어. 하지만 난 비관주의자야.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세상을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 비관주의가 도움이 돼. 비관적이지 않으면 굳이 그걸 이야기로 남길 필요가 없을 테니까. 이야기로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인생도 바꿀 수 있지 않겠어? 누가 도와주는 게 아니야. 이걸 다 우리가 할 수 있어. 우리에게는 충분히 그럴 만한 힘이 있어. 그게 나의 믿음이야. 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순간은 찾아와. 그것도 자주. 모든 믿음이 시들해지는 순간이 있어. 인간에 대한 신뢰도 접어두고 싶고,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때가. 그럴 때가 바로 어쩔 수 없이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할 순간이지. 아무리 세찬 모래 폭풍이라고 할지라도 지나간다는 것을 믿는, 버스 안의 고개 숙인 인도 사람들처럼. 그건 그 책을 읽기 전부터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였어.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에게 수없이 들었던 이야기이기도 하고, 지금도 책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 그분들은 왜 그렇게 했던 이야기를 하고 또 할까? 나는 왜 같은 이야기를 읽고 또 읽을까? 그러다가 문득 알게 된 거야. 그 이유를."

"이유가 뭔데?"

"언젠가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 되기 때문이지." (120-121)


24.11.14.

「엄마 없는 아이들」,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 「사랑의 단상 2014」를 읽음.
「엄마 없는 아이들」은 대학생 시절 연극 동아리에서 잠시 만나 동질감으로 이어졌던 감정과 상실의 감정이 우연한 만남으로 떠오르게 된 이야기.


태어날 때 엄마가 필요했던 것처럼, 죽을 때도 누군가 필요한 것일까? 기쁨으로 탄생을 확인해준 사람처럼, 슬픔으로 죽음을 확인해줄 사람. 죽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죽 음을 확인할 수 없을 테니까. 죽어가는 사람에게 죽음은 인식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유예된다. 죽어가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지금 살아 있는 것이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피에로의 재담 같은 아이러니. (133)

명준이 이제는 굳게 믿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얼굴은 유동한다. 흐르는 물처럼 시간에 따라 조금씩 과거의 얼굴에서 미래의 얼굴로 바뀌어간다. 그렇게 우리의 얼굴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 덕분에 거기 희망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게 예술이 하는 일이라고도. 배우는 표정으로 그 시간적 간극을 압축해 조명 아래에서 드러내 보인다. 현재의 얼굴에 과거를, 또 미래를 모두 담고서. 얼굴의 유동적 가능성을 믿지 않으면 연기는 불가능하다. 무대에 오르기 전, 배우의 얼굴은 빈 캔버스와 같아야 한다. 젊음과 늙음, 남자와 여자, 인간과 동물, 생물과 무생물이 공존하는 가능성의 얼굴. 그러다가 번개의 번쩍임에 의해 어둠 속의 얼굴이 일순간 드러나듯이 연기를 통해 어떤 표정이 노출된다. 인식적 클로즈업. 그리고 알아봄. 그 모든 사랑의 발생학. (142-143)

봄의 울음과 달리 슬픈 감정은 전혀 없었다. 물론 상실감 은 있었다. 연극이 끝났다는 것, 더이상의 술자리는 없다는 것. 그리고 엄마를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 명준은 그렇게 상실을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그 울음은, 말하자면 피에로의 재담 같은 아이러니의 울음이었다. 그가 늘 믿어온 대로 인생의 지혜가 아이러니의 형식으로만 말해질 수 있다면, 상실이란 잃어버림을 얻는 일이었다. 그렇게 엄마 없는 첫 여름을 그는 영영 떠나보냈다. (156)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 역시 어느 시절 우연히 일본에 가서 남긴 자신의 메모가 어떤 사람의 죽음을 막았다는, 그것을 2014년 4월 16일에 일본으로 가서 공연을 하며 알았다는 이야기.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려고 애쓸 때, 이 우주는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을까?”(181) 찰나의 연인이 남긴 사랑과 그 흔적이 누군가의 기억에 남고 그것이 사람을 살게 한다는 이야기라면, 기억한다는 것은 사랑에 더 가까워지는 행동일까? 사랑하고 살아지는.


그러다가 나는 후쿠다 준이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살고 있어서, '날개를 주세요‘라고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유복하게 살기도 했고, 고향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자살하려 했다가도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어느 시점부터인가 줄곧 나를, 한 번도 만나본 적도 없고 얼굴도 모르는 나를 기억하게 된 일에 대해서 생각했어. 나는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동안에도 나를 기억한 사람에 대해서 말이야. 그렇다면 그 기억은 나에게, 내 인생에, 내가 사는 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하려고 애쓸 때, 이 우주는 조금이라도 바뀔 수 있을까? (181)

「사랑의 단상 2014」는 제목을 보자마자 롤랑 바르트를 떠올렸지만 그것은 아니었고, 사랑의 찌질하고 지난하고 불타올랐던 과정과 결과, 그리고 이후의 영향에 대한 단편적인 이야기들의 모음. ‘사랑해’에 대한 검색 기록에 이르면 마음을 울컥하고 울렁거리지만 이 연결이 자연스러운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예전의 나로 돌아가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거기 돌아갈 수 있는, 예전의 나 같은 건 없다는 걸 지훈은 그때서야 깨달았다.
애당초 원해서 빠진 게 아니었기 때문에 원한다고 빠져나올 수도 없었다. (192)


“언제나 마음이 유죄지."
영원한 여름이란 환상이었고, 모든 것에는 끝이 있었다. 사랑이 저물기 시작하자, 한창 사랑할 때는 잘 보이지도 않았던 마음이 점점 길어졌다. 길어진 마음은 사랑한다고도 말하고, 미워한다고도 말하고. 알겠다고도 말하고, 모르겠다고도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하고, 말만 하고.

마음은 언제나 늦되기 때문에 유죄다. (196)


잊지 말 것. 영화를 보며 지훈은 중얼거렸다. 용기를 낸다는 것은, 언제나 사랑할 용기를 낸다는 뜻이라는 것을. 두려움의 반대말은 사랑이라는 것을. (204)

자신은 이제 새들이 모두 날아가고 난 뒤의 빈 나무 같은 사람이 됐다고 생각했지만, 그 기사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한번 시작한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고, 그러니 어떤 사람도 빈 나무일 수는 없다고, 다만 사람은 잊어버린다고, 다만 잊어버릴 뿐이니 기억해야만 한다고, 거기에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고. (210-211)

24.11.17.














군산의 한 카페에서 『희랍어 시간』을 읽기 시작. 언어에 대한 기민한 감각을 가진 주인공의 상념에서 사고와 음성과 언어 사이의 괴리에 대해 생각한다. 사고를 그대로 담기에 음성은 너무 느리고, 이를 담아내야 할 언어는 그릇이 너무 좁다. 한강 특유의 곡진하고 우묵한 감정은 여기서도 여전하고, 종종 읽으며 강렬한 이미지를 사용한 비유에 놀라기도 하며 읽는다. 두번째로 목소리를 읽은 여자와 눈이 멀어가는 남자의 이야기는 어떻게 이어질 것인지.


집으로 돌아와 마지막 단편인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를 읽음. 작품집의 첫 작품이었던 「이토록 평범한 미래」와 주제의식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이는 작품.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멀어지는 고독의 삶”을 통해 우리들이 공통으로 가진 시원을 찾는 것, 그리고 과거를 살고 미래를 사는 것. 과거의 우리를 생각하듯 미래의 우리를 생각하는 것은 「이토록 평범한 미래」와 닮았다. 표제작이 개인에 초점을 두었다면 이 작품은 더 넓어진 느낌. 세 명의 바르바라의 이야기가 연결되며 나아가는 결론은 “이질적인 다른 사람의 세계를 받아들여” 자신의 존재를 확장시키고 정신의 삶은 계속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 그러므로 “타인에게 더 다정”하고, “어둠과 빛이 있다면 빛을 선택”하는 것.


"나의 삶이 나의 삶으로 끝난다면야 이 인생은 탄생이라는 절정에서 시작해 차츰 죽음이라는 암흑 속으로 몰락하는 과정이 되겠지. 사실, 인생에 그런 일면이 없지는 않아. 육체에 고립된 삶이 바로 그렇지. 과학이 발달해 새 몸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그렇다면 비관 같은 건 없을 거야. 하지만 육체를 가진 우리는 필멸하지. 늙어서 몸이 삐걱대고 병에 걸리면 그 사실을 확실히 알게 돼. 그러니 늙은 몸의 비관주의는 피할 길이 없어. 하지만 인간에게는 또한 정신의 삶이 있지 않은가?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들려줬던 루이 라벨의 말, 고립과 고독의 차이가 생각나는가?"

"예, 여기 노트 맨 앞에 적어놓았어요. '고립은 자신에 대한 애착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타인을 멸시하기에 비극을 초래한다. 하 지만 고독은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이탈하는 것이다. 이 이탈을 통해 각 존재는 공통의 시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

"바로 그거야. 정신의 삶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멀어지는 고독의 삶을 뜻하지. 개별성에서 멀어진 뒤에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은 얼마간 서로 겹쳐져 있다는 거야. 시간적으로도 겹쳐지고, 공간적으로도 겹쳐지지. 그렇기 때문에 육체의 삶이 끝나고 난 뒤에도 정신의 삶은 조금 더 지속된다네. 우리가 육체로 팔십 년을 산다면, 정신으로는 과거로 팔십 년, 미래로 팔십 년을 더 살 수 있다네. 그러므로 우리 정신의 삶은 이백사십 년에 걸쳐 이어진다고 말할 수 있지. 이백사십 년을 경험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미래를 낙관할 수밖에 없을 거야." (230-231)


우리 정신의 삶이 과거로 팔십 년은 더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말의 뜻이 여기에 있다네. 나는 1940년대를 기억하고 있어. 그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지금까지 증언했잖아. 지금 만약 내 곁에 열 살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는 나를 통해 팔십여 년 전의 일들을 역사가 아닌 실제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그렇다면 그 아이의 손자는 이백 년에 가까운 시간을 경험한 시각으로 내가 겪은 1940년대의 일들을 바라볼 수 있을 거야. 거기에 비관이 깃들 여지가 있겠는가? 그렇게 나는 지금 이백 년을 경험한 사람의 시각으로 1801년 신유박해를 바라보고 있다네. 이승훈을, 정약용을, 이벽을. 오직 연민과 사랑이 있을 뿐, 여기에 비관이 깃들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우리 정신의 삶이 백 년을 넘지 못하고 비관으로 빠져드는 까닭은 인간의 인식은 그 인식만은 대상으로 삼지 못해 그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지. 눈이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234-235)


“그래서 거울이 있잖아요.”

"그래, 거울을 보면 돼. 거울은 바깥으로 향하는 시선을 안쪽으로 되돌리지. 그럼 인간의 인식을 안쪽으로 되돌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게 하는 거울은 뭐냐? 그걸 알려면 자신이 인식한 세계가 바로 자신의 존재라는 것을 알아차려야만 해. 각자가 보는 세계가 바로 자신의 존재를 비춰주는 거울이니까. 존재의 크기는 그가 인식하는 세계의 크기와 같아. 그렇다면 존재를 확장시키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이겠어?"

"세계를 더 많이 인식하는 것인가요?"

"이질적인 다른 사람의 세계를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거지. 그게 바로 사랑의 정의야. 그렇다면 신의 정의는 모든 이를 받아들인 존재, 모든 이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존재일 수밖에 없겠지. 가능한 모든 세계를 인식하는 게 바로 신일 테니까. 우리가 신이 되어 모든 세계를 인식할 수는 없지만, 다른 사람의 기억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며 자신의 존재를 확장해나갈 수는 있어. 우리의 기억은 시공간적으로 겹쳐져 있으니까. 조부의 기억은 증조부의 삶으로 이어지고, 증조부의 기억은 어린 시절에 만난 신유박해를 기억하는 칠십 노인의 삶으로 이어지지. 그리고 증조부가 어릴 때 들은 바르바라 이야기가 내 막내 여동생의 세례명으로 이어진다는 것. 이런 식으로 육체가 죽은 뒤에도 정신의 삶은 계속 되는 것이라네." (235-236)


할아버지의 말대로 과거의 우리는 이토록 또렷하게 생 각할 수 있는데, 왜 미래의 우리를 생각하는 건 불가능한 것일까? 그럼에도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 그리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 그게 할아버지의 최종적인 깨달음이었다. (240)


생각이란 육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걱정과 슬픔, 외로움과 괴로움으로 이어질 뿐이지만, 그 생각이 사라질 때 비로소 정신의 삶이 시작된다는 것을. 그 정신의 삶은 시간적으로 또 공간적으로 서로 겹쳐지며 영원히 이어진다는 것을. 그럼에도 이 현상의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나는 매 순간 육신의 삶으로 되돌아가 다시 기뻐하고 슬퍼하고 미워하고 화낼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겹쳐진 정신의 삶, 그 기저에 현존하는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므로 나는 노력하기로 했지. 이 삶에 감사하기로. 타인에게 더 다정하기로. 어둠과 빛이 있다면 빛을 선택하기로. (242)















작가의 말까지 다 읽은 후 과거의 나는 김연수 소설에 어떤 평가를 남겼는지 확인하고자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의 리뷰를 다시 보았다. 모든 단편의 줄거리가 기억나진 않지만 전반적인 느낌은 기억이 어슴푸레 떠올랐다. 전체적으로는 『이토록 평범한 미래』가 더 원숙해진 느낌인데(주제적인 부분도 그렇고 이를 풀어내는 방식도 그렇다), ‘「뿌넝숴」를 넘는 작품이 있었나?’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아닌 것 같다. 내 나름대로 세워둔 평가의 바로미터에서 어디에 두어야 할지 고민하게 된 작품집. 『소설가의 일』에서 서사적으로 인생을 두 번 산다고 말했던 김연수는 이제 우리는 인생을 세 번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말년의 푸코는 '자기 배려'를 위한 주체성에 골몰했다. 1981~1982년에 콜레주드프랑스에서 한 강의를 엮은 책에서 내가 읽은 건 살아갈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단단한 주체성의 구조를 만들어내 기 위한 그의 끈질긴 사색과 집념이다. 푸코는 강의 내내 ‘내가 누구인지' 묻는 근대의 주체화 방식을 뒤로하고 ‘내가 무엇일 수 있는지' 묻는 고대의 주체화 방식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말한다. 내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식론적인 세계관보다는 내 안에 없는 나를 만들어가기 위해 스스로를 변형시켜가는 실천적인 세계관으로 살아야 한다고 여긴 푸코에게 '영성spiritualité' 은 철학과 대등한 지적 체계였다. 이때의 영성은 나를 변형시키는 정신의 삶을 위해 필요한 '자기와의 관계 맺기'와 '자기 돌보기'의 핵심을 의미한다. 거대한 전환의 시대에는 자신을 아는 것보다 자신을 변형시키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아는 것은 딜레마에 빠지게 하지만 선택하는 것은 딜레마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이유는 알게 한다. 하지만 이해는 행동하게 한다. (252-253)


푸코가 절실히 매달렸던 주체화 개념은 김연수의 이번 소설들에서 동시대적인 삶이 품고 있는 질문의 형태로 현재화된다. 미래를 기억한다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묻지 않고 자신이 누구일 수 있는지 물으며 스스로를 변형시킨다는 말이기도 하다. (253)

이들에게 세번째 삶이란 유한한 인간이 영원을 실천하고 낙관을 확신할 수 있는 삶의 방법이다. 미래가 기준이 되어서 현재를 결정하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주체를 변형시켜나가는 정신의 삶을 살 수 있다. 실천을 중요하게 여겼던 스토아주의자들은 죽음, 질병, 고통 등과 관련된 참된 원칙들을 발견하고 그에 부합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수련하기 위해 '죽음 명상‘을 했다. 죽음 명상은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삶 안에 죽음을 현재화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 수련의 핵심은 하루하루를 생의 마지막처럼 사는 데 있다. 세네카는 죽음 명상을 가장 많이 수행한 사람으로, 세네카가 사람들과 주고받은 서신에는 그가 미래를 살아내기 위해 연습한 죽음 명상의 구체적인 방법이 나온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미래를 현재화해 삶을 회고할 수 있는 시선을 가짐으로써 자신이 자기 삶의 심판관이 되는 것이다. 시간을 겹쳐 보았던 그는 미래를 가져와 현재를 채우고 과거가 된 미래를 통해 전체를 봤다. 심판관의 눈을 통해 미래에 이르기 전에 먼저 미래를 사는 셈이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흐르는 건 기억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기억이 흐르는 길을 만들어내는 것뿐이지만 기억의 흐름을 만듦으로써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살 수 있다. 그 긴 시간 속에서, 짧은 시간 속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을 목도하는 우리는 세상을 낙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56-257)

한동안 괴로운 마음에서 좀체 벗어나지 못했다. 마음의 괴로움 앞에서 내가 무기력했던 이유는 그게 두번째 화살이기 때문이었다. 붓다는 세상에서 겪는 고통을 첫번째 화살에 비유했다. 그리고 첫번째 화살을 뽑을 생각을 하지 않고 그 화살이 어디서 날아 왔는지, 누가 쏘았는지, 왜 내가 이런 대접을 당해야만 하는지 따지다가 다시 맞는 화살을 두번째 화살이라고 말했다. 두번째 화살은 뽑고 난 뒤에도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다. 거기 여전히 첫번째 화살이 있으니까. 뭔가를 했는데도 고통이 사라지지 않으니 두번째 화살 앞에서 사람은 점차 무기력해진다.
그와 달리 첫번째 화살을 뽑고 나면 즉각적으로 기쁨이 찾아온다. 그건 고통이 사라지기 때문에 찾아오는 기쁨, 단순한 기쁨이다. 두번째 화살을 맞지 않기 위해서는 만족스럽지 않고 때로는 고통스러울지라도 지금 이 순간의 세상을 품에 안아야 한다. 그게 바로 첫번째 화살을 뽑는 일이다. 몸은 힘들겠지만 고통과 불만족을 겪어내면 이윽고 단순한 기쁨이 찾아온다. 가을이 되면 가을이 제일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고 싶다. 여기에 단순한 기쁨이 있다. 물론 겨울과 봄과 여름에도 단순한 기쁨은 있다. (272-27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4.11.04.

김연수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의 표제작을 읽음. 대학생 때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와 『7번국도 Revisited』를 읽었지만 기억이 아예 없고, 나에게 김연수 단편의 최고치는 「뿌넝숴」로 남아있다. 『나는 유령작가입니다』가 마지막 독서였기 때문. 표제작은 「뿌넝숴」에 미치지 못한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김원이라는 사람의 깨달음의 연결고리가 특이해 실소하면서 읽었다. 카지노에서 모든 돈을 잃고 얻은 시간에 대한 깨달음이라니. 과거와 미래 모두에 집착하는 현대인들을 위한 21세기형 ‘카르페 디엠’과 같은 느낌. 마지막 부분을 읽을 때는 최근에 읽고 있는 『소설가의 일』이 떠오르기도 했다.















"과거는 자신이 이미 겪은 일이기 때문에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데, 미래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이라 조금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그런 생각에 인간의 비극이 깃들지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입니다." (29)

"아까 김원이라는 사람 이야기를 했잖아. 둘 중 하나를 계속 선택하는 도박에서는 지면 질수록 그다음에 이길 확률이 100퍼센트에 수렴한다면서. 그 남자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어. 약간 안됐다는 듯이 우리를 바라보면서. 지금 일층 큰방에는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인생들이 모여 있어요. 두 분 다 학생인 것 같은데 어쩌다가 이런 곳까지 오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메이저리그 투수가 한 말 중에 이런 게 있어요. 이기면 조금 배울 수 있지만 지면 모든 걸 배울 수 있다. 지기만 하는 인생도 나쁘지 않아요. 중간에 선택을 바꾸지만 않는다면." (32)

하지만 이제는 안다. 우리가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선택해야만 하는 건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는 것을.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미래가 다가올 확률은 100퍼센트에 수렴한다는 것을. 1999년에 내게는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이 있었다. 미래를 기억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과 일어날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34-35)

어쩌면 우리가 원하는 그런 세계는 절대로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지 못할지도 모르고, 이 병은 낫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고 이 불안을 모두 떠안겠다. 그리고 정말 우리가 원하는 세계가 오지 않는 것인지 한 번 더 알아보겠다. 이게 현대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윤리가 아닐까. 자신의 불안을 온몸으로 껴안을 수 있는 용기, 미래에 대한 헛된 약속에 지금을 희생하지 않는 마음, 다시 말해서 성공이냐 실패냐를 떠나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태도. (『소설가의 일』, 50-51쪽)


24.11.05.

「난주의 바다 앞에서」 읽기. 황사영의 아내 정난주의 이야기와 손은정이 아닌 손유미의 이야기가 겹쳐진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와 주제가 겹쳐져 보이기도 하고.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비에도 지지 않고 KO 당하기 직전까지 버티고 버티며. 미야자와 겐지의 「목련」 이야기가 어려웠는데, ‘부처의 선’이란 무엇인가 골몰했지만 결론을 내리진 못했다.















『죽이고 싶은 아이』 재독. 2편을 읽기 위한 복습의 느낌으로 읽었다. 작년 겨울에 읽었던데 두 인물의 이름부터 가물가물한 이 기억력... 서은과 주연을 둘러싼 인물들의 말들에서 매정하고 무서운 세상의 민낯이 보여 종종 서늘해지는 느낌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억울한 사연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이 있고 한껏 그에게 몰입시키다 반전에 반전을 마지막에 남겨두는 이꽃님 작가의 스타일은 여기서 출발한 건지도(『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에도 반전이 중요하게 작용하긴 한다). 『죽이고 싶은 아이』에서는 마무리가 갑작스럽고 매끄럽지 못하다는 느낌, 반전을 위한 성급한 끝맺음의 느낌을 받았었는데, 이러한 방식은 『당연하게도 나는 너를』에서 좀더 정교해져서 다시 나타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역순으로 작품을 읽었으니, 『죽이고 싶은 아이』에 더 낮은 평가를 줄 수밖에 없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과연 2편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보여줄지.


24.11.06.















『죽이고 싶은 아이 2』 완독. 1권에서 이어지는 살인사건의 스토리는 초반부에 바로 밝혀지며 마무리되고, 남은 사람들의 상처 회복기가 주를 이룬다. 2권이 나오게 된 것은 주연을 위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1권에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황폐해진 주연이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자신의 상처와 죄책감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는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아이를 둘러싼 소문과 입방아와 말없는 동조가 얼마나 인간을 갈기갈기 찢어놓는지에 대한 이야기. 사람을 둘러싼 사람들의 말이 얼마나 잔인한지 몸서리치면서, 주연이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고 오랫동안 쌓여왔던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에 감정적으로 흔들리면서 읽었다. 다만 1권에 비해 작가의 직접적인 목소리가 자주 개입되는 것 같다는 부분은 아쉬운 점. 작가도 인물에게 감정적으로 몰입해있어서일까.


24.11.07.

『소설가의 일』 2부 읽기 시작. ‘인생이라는 게 뭐 그따위’이니 처음에는 닥치는 대로 인생을 살고 그 후에 서사적으로 인생을 두 번 사는 것. 언제가 돌이킬 수 없는 다리, 또는 불타는 다리인지 모르니 살아봐야 한다는 것. 20년 동안 좋아할 밴드의 곡을 미리 알고 찾아 들을 수 없으니 지금 좋은 노래를 열심히 듣는 것. 이런 이야기를 플롯 포인트와 3막 구조에 연결시켜 풀어내는 방식이 재치 있다. 김연수 작가의 글을 몇 편 읽어보지 않았지만 가장 좋아하는 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이야기 작법에서는 예상치 못한 결론으로 이르기 위해 반드시 거치는 이런 지점들을 플롯 포인트Plot Point라고 부른다. 플롯 포인트는 이야기를 다른 방향으로 전환시키는데, 대개의 이야기에는 두 개의 큰 플롯 포인트가 있다. 그래서 이야기는 3막 구조인 셈이다. 시드 필드 같은 시나리오 작가는 모든 영화는 시작하고 삼십 분이 지날 무렵에 첫번째 플롯 포인트를 지난다고 말한다. 대개 백이십 분짜리 영화라면 첫 플롯 포인트는 삼십 분에, 두번째 플롯 포인트는 구십 분쯤에 있다. 이 지점을 지나면 이야기의 방향이 크게 바뀌면서 주인공은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 특히 첫번째 플롯 포인트를 가리켜 '돌아갈 수 없는 다리' 혹은 '불타는 다리'라고도 부른다. 1막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은 어떤 사건을 경험하는데, 그러고 나면 다시는 예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91)

서사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인생을 두 번 산다. 처음에는 그냥 닥치는 대로 살고, 그다음에 결말에 맞춰서 두 번의 플롯 포인트를 찾아내 이야기를 3막 구조로 재배치하는 식으로 한번 더 산다. 인생이 그렇다면, 소설도 마찬가지겠지. 그렇게 해서 소설은 원래 두 번 쓰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런데 강연에서 이런 말을 하자, "처음부터 잘 쓰지 그랬냐?"라는 사람도 있더라. 그런 말을 들으면 그런가 싶어서 그 사람 얼굴을 쳐다본다. 인생 처음 살면서 ‘지금이 내 인생의 첫번째 플롯 포인트로구나. 이 불타는 다리를 지나면 돌이킬 수가 없으니 최선을 다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여기 있구나 싶어서. 처음부터 잘 쓰지 그랬냐고? 아직 결말을 모르는데 어떻게 처음부터 잘 쓰나? 마찬가지다. 내 인생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무슨 수로 처음부터 잘 살겠나? 소설을 쓰는 일은 ’인생이라는 게 원래 뭐 그따위'라는 사실을 깊이 이해 하는 일로 시작한다는 말은 이런 뜻이다. 처음부터 잘 사는 사람은 누구도 없다. 그건 소설도 마찬가지다. 모든 이야기가 끝난 뒤에야 비로소 소설은 시작된다. (91-92)

모든 이야기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반영한다. (한번 더 여러분들을 괴롭힌다면, 그래서 좋은 이야기일수록 핍진성이 풍부하다.) 그러므로 이야기 작법에서는 행동은 반드시 갈등을 일으키고 이 갈등은 주인공을 감정적으로 좌절시킨다고 말한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보지 않았는가? 『법구경』을 들춰보면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지 마라. 미운 사람과 만나지 마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운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 그 다음에 나오는 “사랑에서 근심이 생기고 사랑에서 두려움이 생긴다"라는 부처님의 말씀은 이야기 작법 중 행동/액션의 운용원칙을 말하는 것 같다. 행동은 갈등을 낳고, 이 갈등은 주인공을 감정적으로 좌절시킨다. (102)

내가 쓰는 소설의 주인공이 '행동한다-좌절한다-곰곰이 생각한다-다시 행동한다'를 반복하면서 점점 절정을 향해 나아간다면, 소설을 쓰는 나 역시 ‘쓴다-좌절한다-곰곰이 생각한다-다시 쓴다'를 반복하면서 점점 소설 쓰기의 절정으로 올라가야만 하리라. 그러니까 먼저 소설가가 되라고 말한다면 순서가 잘못됐다. 소설가라면 플롯의 시작점이 행동이라는 걸 알아야만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의 삶이 '쓰기'에서 시작한다는 사실도 알 것이다. 그러니 먼저 소설가가 되어야만 소설을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먼저 뭔가를 써야만 소설가가 될 수 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소설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부처님이 말씀하신 원리에 따라 먼저 뭔가를 쓰고 좌절하고 다시 쓰고 또 좌절하고 그럼에도 다시 쓰는 그 과정을 반복하다가 죽고 싶다는 뜻이기도 하다. (104)


24.11.09.















지하철에서 『사랑이라니, 선영아』 읽기. 아직 앞부분까지만 읽어서 팔레노프시스와 <얄미운 사람>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까지는 파악을 못하고 있다. 삼각관계인가? 김연수 특유의 고유어들과 사변적인 문장들은 여전하고 이젠 익숙해진 편.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읽기. 소위 말하는 덕질을 ‘구애가 필요치 않은 사랑’으로 정의한 것이 흥미롭다. 사회 제도와 공간이 둘이어야 안정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생각도 그렇고.















쭉 읽으면서 자주 등장하는 책은 에바 일루즈의 『사랑은 왜 아픈가』이다. 『에로스의 종말』에서도 다뤄진 적이 있는데, 어떤 내용일까 잠시 궁금해하며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4.10.17.















서리북 읽기. 지난 호에 이어서 새롭게 연재되는 ‘고전의 강’ 코너가 눈에 띈다. 이번에는 밀턴 프리드먼의 『자본주의와 자유』와 『선택할 자유』. 윤석열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언급했던 경제학자의 저서이기에 (도대체 무슨 내용이길래라는 마음으로) 조금 더 집중해서 읽었다. 프리드먼이 새뮤얼슨과 서신으로 주고 받은 자유로운 논쟁의 이야기를 볼 때는 그런 학문적 풍토가 부러워지기도 하고.














프리드먼의 사상을 되짚어 보는 것은 그와 관련한 여러 오해를 해소하고,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극복하는 데 그의 사상으로부터 제대로 된 도움을 얻는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흔히 프리드먼은 시장만능주의를 주장한 자유방임주의자로 여겨지지만, 이런 고정관념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닐지라도 지나친 측면이 있다. 부의 소득세를 제안한 것에도 반영되어 있지만 그는 복지 정책을 시행하는 것이 국가의 핵심 임무 중 하나라고 생각했으며, 그의 대표적인 경제 이론인 통화주의(Monetarism)는 정부의 적절한 통화 정책이 경제 안정에 매우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는 단순히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기 때문에 정부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식의 급진적 무정부주의가 아니라, 정부가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어야 하고 경제에 어떻게 관여해야 하는지에 대한 원리와 구체적 방안을 제시했다. (235)

로즈 프리드먼은 밀턴 프리드먼과 시카고 대학 경제학과 대학원 동기였다. 그러나 가사와 육아 부담 그리고 여성에 대해 폐쇄적인 당시의 학계 상황 등으로 인해 박사 논문 쓰기를 포기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소비 행태를 분석했던 그녀의 연구는 밀턴 프리드먼이 『소비 함수 이론』을 집필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으며, 그가 대중을 대상으로 쓴 글은 대부분 로즈 프리드먼이 정리하고 적절한 사례를 선정하는 등 그녀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다. 로즈 프리드먼의 이같은 기여에 대해 밀턴 프리드먼은 『자본주의와 자유』에서는 서문에 밝히는 데 머물렀지만, 『선택할 자유』에서는 공저자로 그녀의 공헌을 명시했다. (240-241)

이 외에도 프리드먼은 언론 기고와 방송 출연을 활발하게 했다. 그중 특히 유명한 것이 1960년대 후반부터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Newsweek)》에 폴 새뮤얼슨(Paul Samuelson)과 정기적으로 번갈아 가며 실었던 칼럼이다. 정부의 적극적 경제 개입을 옹호하는 케인스주의의 대표 학자인 새뮤얼슨과 국가의 자의적인 경제 개입에 반대했던 보수주의자 프리드먼이 당시의 경제 현안을 두고 18년에 걸쳐 전개한 품격 높은 지상 논쟁은 당대에 큰 주목을 받았으며, 1960년대까지만 해도 아직 경제학계 외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프리드먼의 이름과 사상을 대중에게도 널리 알렸다. 아울러 그의 칼럼은 미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경제 정책 형성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241)

프리드먼은 『선택할 자유』의 서문에서 『선택할 자유』가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다른 주제 가운데 상당 부분을 다시 다루고 있으며, 주장 역시 크게 다르지 않지만, 보다 구체적인 사례를 풍부하게 제시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선택할 자유』, 20쪽) 단 내용적 측면에서 두 가지가 추가된 점이 주목할 만한 차이다. 첫째는 인플레이션과 관련한 논의이다.(『선택할 자유』, 9장)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 경제는 석유수출국기구(Organization of the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 OPEC)의 석유 가격 인상으로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었는데, 이와 관련한 정부 정책의 문제점을 다룬 내용이 추가되었다. 둘째는 정부와 공무원의 행태에 대한 경제학적 분석을 책 전반에 걸쳐 전개했다. 이는 앤서니 다운스(Anthony Downs), 제임스 뷰캐넌(James Buchanan), 고든 털럭(Gordon Tullock) 등이 발전시킨 공공 선택 이론(public choice theory)의 연구 성과, 즉 정부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정책을 펼치는 중립적 존재가 아니라 공무원이 자신의 승진이나 소속 부처의 이익을 추구하는, 나아가 이익 집단에 의해 포획(capture)되어 국민의 이익보다는 이익 집단을 위해 정책을 펼치는 존재임을 보여 주는 이론적·실증적 분석 결과를 반영한 것이다. (244-245)

프리드먼이 대학원에 입학한 193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경제학계는 오늘날과 많이 달라서 경제학 이론에 기초해서 현상을 분석하는 작업보다는 제도에 대한 서술에 가까운 연구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시카고 대학 경제학과는 경제학 이론에 기초한 현상 분석 그리고 이를 자료에 근거하여 검증하는 실증 분석을 결합한 연구를 지향했다. 이러한 접근은 상당 기간 비주류였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경제학의 일반적 연구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즉 프리드먼과 시카고학파의 경제학자들은 단순히 보수주의적인 이데올로기를 통해 세상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경제학의 연구 방법을 혁신하는 데 크게 기여했고, 『자본주의와 자유』는 그런 혁신을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소개한 책이기에 큰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246-247)

『자본주의와 자유』의 중요한 목적은 케인스주의 비판이다. 프리드먼에 따르면 케인스주의, 나아가 사회주의적인 경제 통제는 경제적 자유뿐 아니라 정치적 자유마저도 억압하기 때문에 제거되어야 한다. 아울러 케인스주의는 시장이 매우 불안정함을 전제하지만, 프리드먼은 이것이 사실과 다르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케인스주의자들은 시장의 불안정성을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로 대공황을 들지만, 프리드먼에게 대공황은 시장의 불안정성이 아니라 정부, 보다 구체적으로는 중앙은행이 경기 침체에 맞서 통화 공급을 늘려야 할 시기에 통화량을 크게 줄였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정부의 재정 정책과 복지 정책은 많은 경우 비효율적이며 많은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뿐이라고 프리드먼은 주장했다. (249)

프리드먼이 불평등 완화를 위해 부의 소득세를 제안한 이유는 서로 관련된 두 가지 요인 때문이다. 첫째는 이것이 기존의 소득세 제도를 그대로 활용하면 되기 때문에 추가적인 제도 설계 없이도 복지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소득세 제도가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모든 사람의 소득을 정부가 파악할 수 있으므로, 소득 수준에 따라 세금을 걷듯이 소득이 일정 수준에 못 미칠 경우 그 액수만큼 정부가 지원하면 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부의 소득세 제도를 도입하면 복지 제도 운영에 수반되는 정부의 낭비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실시하는 많은 복지 정책은 현물 지급 방식이다 보니 복지 정책 실시를 위해 공무원을 추가로 고용해야 하는 등 부대 비용이 크게 소요되는 반면 복지 혜택이 주어져야 하는 사람에게 제대로 지급되지 못해서 발생하는 여러 부작용이 존재한다. 하지만 부의 소득세는 기존 소득세 제도를 활용하면 되고 보조금 지급으로 모든 업무가 끝나기 때문에 제도 운영과 관련한 비효율을 크게 줄일 수 있다. (252-253)


24.10.18.














『느티나무 수호대』 완독. 모든 게 완결된 결말은 아니고 진행형임을 암시하며 마무리되었지만 따뜻한 결말. 혹자는 이렇게 문화적 다양성이 넘치는 동네가 한국에 어디 있겠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를 비현실적이라고 치부하기 어려운 것은 최근에 『어딘가에는 싸우는 이주여성이 있다』의 서평을 읽은 후이기 때문. 작가가 던지는 우리 사회에 현저한 문제들은 묵직하지만, 이를 어떻게든 풀어내고 헤쳐나가려 좌충우돌 고군분투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밝고 당차다.














『가녀장의 시대』 완독. 각각의 장이 짧고 에피소드 형식으로 되어 있다. 속도감 있는 문체와 쿨하고 재치 있는 서술이 인상적. 세 가족의 일상 이야기도 좋지만 군데군데 가부장제의 모순, 새로운 가족 형태에 대한 이야기가 가볍게 다뤄지면서 생각할 거리를 준다. 이슬아의 작품 중 처음 읽는 작품이 소설이 되었는데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게 만든 작가의 필력이 부러웠고, 다른 작품들도 읽고 싶어지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소설에서도 다룬 『새 마음으로』에 손이 간다..


"사람의 자식 된 자로서 어찌 효도를 하지 않으리오."

할아버지가 근엄하게 해설했고 그것은 가부장의 말이었다. 감히 내 말을 부정하는 것이냐는 질문과도 같았다. 말은 우리를 '마치 ~인 듯' 살게 만든다. 언어란 질서이자 권위이기 때문이다. 권위를 잘 믿는 이들은 쉽게 속는 자들이기도 하다. 웬만해선 속지 않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속지 않는 자들은 필연적으로 방황하게 된다. 세계를 송두리째로 이상하게 여기고 만다. 어린 슬아는 선택해야 했다. 속을까 말까. (9)


자신에 관한 긴 글을 듣자 오랜 서러움이 조금은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슬아의 해설과 함께 어떤 시간이 보기 좋게 떠나갔다. 이야기가 된다는 건 멀어지는 것이구나. 존자는 앉은 채로 어렴풋이 깨달았다. 실바람 같은 자유가 존자의 가슴에 깃들었다. 멀어져야만 얻게 되는 자유였다. 고정된 기억들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존자에 관한 여러 개의 진실이 시골집 거실에 차곡차곡 놓였다. 마당에서는 배추들이 절여지는 중이었다. (109)


이런 상상을 해보기로 한다. 하루 두 편씩 글을 쓰는데 딱 세 사람에게만 보여줄 수 있다면 어떨까. 세 명의 독자가 식탁에 모여앉아 글을 읽는다. 피식거릴 수도 눈가가 촉촉해질 수도 아무런 반응이 없을 수도 있다. 읽기가 끝나면 독자는 식탁을 떠난다. 글쓴이는 혼자 남아 글을 치운다. 식탁 위에 놓였던 문장이 언제까지 기억될까? 곧이어 다음 글이 차려져야 하고, 그런 노동이 하루에 두 번씩 꼬박꼬박 반복된다면 말이다.
그랬어도 슬아는 계속 작가일 수 있었을까? 허무함을 견디며 반복할 수 있었을까? 설거지를 끝낸 개수대처럼 깨끗하게 비워진 문서를 마주하고도 매번 새 이야기를 쓸 힘이 차올랐을까? 오직 서너 사람을 위해서 정말로 그럴 수 있었을까? 모르는 일이다. 확실한 건 복희가 사십 년째 해온 일이 그와 비슷한 노동이라는 것이다. (228)


"무화과가 다 익었네. 우리 대표님은 글쓰느라 마당에 무슨 열매가 열렸는지도 모르시겠죠?"

복희가 기쁜 마음으로 무화과를 딴다. 복희에게 아름다움이란 계절의 흐름, 맑은 날에나 궂은날에나 자라기를 포기하지 않는 존재들. 웅이에게 아름다움이란 슬픔과 기쁨의 극치를 다 아는 가수의 목소리. 밥하고 글쓰는 두 여자. 슬아에게 아름다움이란 단정하고 힘있는 언어, 그리고 동료가 된 모부의 뒷모습.

지구에서 우연히 만난 그들은 무엇보다 좋은 팀이 되고자 한다. 가족일수록 그래야 한다는 걸 잊지 않으면서. (308)



24.10.20.















도봉산 쪽 카페에서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읽기. 프롤로그를 읽는 순간 ‘아, 이 책은 내가 좋아하겠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그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 “멜로”로서의 사랑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랑의 양태에 대한 다양한 단상들에 오래 눈길이 남아 줄곧 표시를 해두었다. 나에게 사랑이라는 주제는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 않는, 끝없이 변화하고 증식하는 무엇이다.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지 못했던 지점들을 만나서 반갑고, 골똘히 생각해보게 하는 말들이어서 반갑고,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말들이어서 반갑다.


멜로. 원래는 '노래'라는 뜻의 그리스어다. 멜로드라마는 노래가 곁들여진 연극이 그 기원이다. 프랑스혁명 이후부터 홍행하기 시작한 멜로드라마는 기존의 정통극과 달리 통속성과 오락성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이 통속성과 오락성은 멜로드라마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스토리텔링에서 '사랑'이라는 주제는 이후로 대중이 가장 잘 몰입하고 가장 손쉽게 음미하는 소재가 되었다. (9-10)

멜로드라마처럼 사랑을 도구로 삼아 사랑을 소비해 온 문화들을 우선 사랑의 적으로 간주해야 한다. 사랑을 낭만적 영역이라 치부하고 탐구를 외면해온 시선 역시 사랑의 적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멜로드라마의 세례를 받고서 허구적인 사랑 놀음에 함께 웃고 함께 우는 사이에, 우리는 그와 비슷한 격정적인 감정만을 사랑이라며 동경해왔다. 심정이 짜릿한 설렘과 심장이 저릿한 통증을 함께 겪고 싶다고 막연하게 사랑을 꿈꾸지는 않았을까. 거기에 어떤 약속과 어떤 책무가 뒤따르는지에 대한 예상은 그다음 순위의 관심으로 미뤄놓지는 않았을까. (10)


나는 사랑에 무능력했던 나의 경험들이 사랑에 대한 무지와 두려움에서 기인되었다고 생각해왔다. 언젠간 이 두려움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사랑을 멜로로 연결 짓고 식상해하던 습관이 사랑에 대한 결례라는 걸 우선 알아채야 했다. 사랑의 적들은 사랑의 반대편에 있지 않고 사랑의 내부에 매복해 있다는 것도 알아채야 했다. 사랑의 적들이 겹겹이 덧씌워진 채로 사랑은 본래의 얼굴을 잃은 지 오래되어 보였다. 사랑에 대하여 무지한 채로도 사랑을 했던 나 같은 이들이, 사랑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으로써 사랑을 소외시켜왔던 것이다. (12-13)


서로를 선택할 수 없는 조건이기 때문에, 좋아할 수 없는 사람도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당위가 가족에게는 있다. 이 당위가 인간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을 보장해주면 좋으련만, 사랑이 지닌 위험으로 기울 때가 많다. 그래서 타고난 사랑의 능력을 훼손당하기도 하고, 인간을 무의식적으로 불신하기도 하며, 미지에 대한 당연한 불안에 내성이 없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사랑의 압력과 폭력에서 기인된 트라우마가 심장 깊숙이 각인되어버리기도 한다. 오래된 제도로서의 가족은 서로를 계속해서 희생해야만 존속될 수 있다. 개인의 서사가 두려움 없이 전달되고 이해되며 존중되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39)


좋아는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이 남들에게 빈축을 살 만한 것일 때에 좋아하는 마음을 쉽게 철회할 수 있는 애호의 세계. 준거집단의 기준에 편입돼야 마음이 편하고 유행을 따라야 뒤처지는 느낌이 들지 않는 애호의 세계. 애호의 세계에서는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를 통해 자신의 본성을 확인하는 기회를 잃는 대신, 같은 걸 좋아함으로써 소속감을 형성하는 기회를 얻는다. 판에 박힌 것을 싫어하면서도 스스로 판 속으로 들어간다. (48)


사람들은 로맨스 서사의 판타지로 배워온 사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내가 하는 사랑은 이토록 구질구질한데 영화 속 사랑은 감미롭기만 하니, 번번이 내가 어딘가 잘못된 사람처럼만 느껴진다. 사랑은 어딘가에 따로 있는 것만 같고, 내가 하고 있는 이것은 어떤 실수이거나 고행이거나 투쟁처럼만 느껴진다. (56-57)


상처를 남기고 종결된 사랑은 대개 초라함과 추악 사이에 놓여 있다. 상처를 남기지 않고 종결된 사랑은 별로 없다. 사별의 경우가 아니고서는 사랑했던 사람을, 사랑이 시작될 때의 그 아름답던 사람으로 기억해주는 이 역시 별로 없다. 이미 초라함과 추악 사이에 버려진 사랑을 스스로의 발화로 인해 보다 더 초라하고 보다 더 추악한 것으로 재편하면서까지 자신의 실책을 덮어버리려 해서 는 안 된다. 차라리 지나간 사랑은 봉인해야 옳다. 입을 다무는 게 낫다. 마치 처음 포옹을 하던 그 순간처럼,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온전히 포갬으로. (83)



24.10.21.

서리북 15호 완독. 아카키와 바틀비와 잠자를 비교해보는 글쓰기를 흥미롭게 보았다.
















아카키는 우리 주변에서 더러 마주치는, 자족적이고 평온하고 바로 그 때문에 음산한 일 중독자의 느낌을 준다. 정서 실력도 나쁘지 않아 해고될 위험도 없으니 일체유심조, 정신 승리가 따로 없다. 그럼에도 작가는 그에게 북국의 추위(자연환경)와 만년 9급 관리(사회적 지위)와 빼앗긴 외투(속된 물건) 등 환유의 굴레를 씌우고 삭막한 정조에 붙박아 둔다. "그까짓 외투 때문에!"라고 말들 하지만 외투 자리에 다른 것을 넣어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나 너 때문에 고생깨나 했지만 사실 너 아니었으면 내 인생 공허했다."(박찬욱, 《헤어질 결심》) 요컨대 외투는 그 본질상 한시적인 우리의 삶을 일순간이나마 유의미하게 만들어 주는 어떤 고갱이 같은 존재다. (261)

물론, 인간이 인간이기를 멈추고 벌레가 되는 순간 비로소 인간다움을 응시하게 된다는 역설이 「변신」을 관통한다. 흡사 아카키-유령이 아카키-인간보다 더 생기로운 것처럼, 말없이 창백하게 기계적으로 정서만 하던 바틀비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면벽 공상에 빠져 있는 바틀비가 더 인간다운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필경사는 책상 앞에 앉아 정서할 때, 영업사원은 구매자를 찾아다니며 물건을 팔 때 비로소 사회적 자아를 실현한다. 자, 쉴 틈 없이 움직이는 빡빡한 인간-영업사원의 삶과 온종일 방바닥과 벽과 천정을 산책하는 인간-벌레의 삶 중 어떤 것이 더 살아 있음에 가까운가. (266)

소설의 화법과 문체를 고려하더라도 그 자체로 어딘가 특이한 아카키, 바틀비와 달리 잠자는 너무나 평범한 인물이다. 주인은 저 파놉티콘처럼 존재하는 척만 해도 노예가 알아서 제 몸을 채찍질한다. 한편 주인은 주인대로 '법 앞'의 말단 문지기처럼 '피로 사회'(한병철)의 엄정한 위계질서 안에서 자신을 소진한다. 「외투」와 「필경사 바틀비」가 주인-사회와의 충돌에서 도드라지는 노예-인물의 개성적 성격에 주목한다면, 「변신」은 평범과 정상과 상식과 중치의 육화인 인물을 덮친 비극의 보편적 부조리를 강조한다. 잠자의 오묘함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즉, 잠자는 그저 '인간 아무나'고 그 '인간 아무나'는 누구나 하루아침에 벌레가 될 수 있다. "도대체 인간이라는 사실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이 땅에서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인간입니다." 끝으로 요제프 K의 "개 같군!"이라는 마지막 탄식을 변주해도 재밌겠다. "영락없이 말똥구리 신세군!" 언제 읽어도 아리송하고 격하게 웃긴 이 느낌, 카프카적인 것(Kafkaesque)'이 참 좋다. (267-268)















『소설가의 일』 읽기. 외숙모의 시에서 출발해 어머니의 뉴욕제과점을 지나 매일 쓰는 작가로 넘어가는 흐름이 너무 자연스러워 감탄하며 읽었다. “매일매일 획기적으로 나아지지도, 그렇다고 갑자기 나빠지지도 않는 세계 속에서, 어떤 희망이나 두려움도 없이, 마치 그 일을 하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일하는 사람들의 세계 속에서” ‘신인’으로 태어난다는 것. 뒤에 나오는 휴게소의 인사기계에서 재능으로 넘어가는 부분도 필력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결국 재능은 인사기계처럼 가짜를 만들 뿐, 소설가를 대신해서 써주지는 않는다는 것. 결국 쓰는 것은 소설가의 몫이라는 이야기로 읽힌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고 있으면, 지금 뭔가를 쓰고 있다면, 그는 ‘소설가'라는 그 문장의 질감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프루스트 씨는 그때 뭔가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내용이 뭐든, 내가 이해하든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든, 그는 뭔가를 썼고, 그의 시간은 11권의 책으로 남았다. 소설가의 일생이란 그런 것이다. 그 일생 앞에서는 다작이라는 말도 무의미하고, 수면용 소설이라는 말도 무의미하다. 그저 어떤 시간의 흐름이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 자신이 경험한 시간의 흐름을 소설로 보여줄 수 있다면, 결과적으로 그는 소설가가 된다.  (12)

매일 글을 쓴다. 한순간 작가가 된다. 이 두 문장 사이에 신인, 즉 새로운 사람이 되는 비밀이 숨어 있다. (19)


휴게소에서 인사기계를 마주 보고 서 있을 때, 검은 집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티모시가 외치는 장면을 떠올렸다. 나는 그 검은 집이라는 게 소설가의 재능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술집에 모여서 농담거리로 삼을 뿐 그 안에 뭐가 있는지 들여다볼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는 집과 같은 것. 소설가가 재능에 대해서 말할 때는 소설을 쓰고 있지 않을 때다. 소설가에게 재능이란 인사기계나 기도기계 같은 것, 그러니까 마치 나 대신에 소설을 써주는 것처럼 느껴지는 소설기계 같은 것이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이건 호두과자기계와 다른 종류의 기계다. 재능이라는 소설기계는 소설을 만들지 않는다. 소설기계 역시 소설가의 죄책감이나 꺼림칙함을 덜어주기 위해서 고안된 기계다. 소설을 쓰지 않기 위한 방법 중에서 재능에 대해서 말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고도 죄책감이 없는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23)


처음 소설을 쓰려고 앉았을 때, 나는 무엇도 감각하지 못하는 영혼과 같다. 그래서 무엇이든 감각하려고 애를 쓴다. 그건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빠르게' 쓰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렇게 조금씩 소설 속의 세계는 작가에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초고는 그렇게 쓰여진다. (33)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내가 찾아내려고 하는 건 디테일이다. 우리말로는 세부 묘사라고 하는데, 소설에서는 세부 정보라고 말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녀는 질투심이 강한 여자였다"라는 관념에 세부 정보라는 빛을 쪼이면 소설의 문장이 나온다. 질투심이 강한 여자의 눈빛은 어떻게 생겼는가? 질투심이 강한 여자는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가? 질투심이 강한 여자는 언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가? 소설의 문장이라는 건 이같은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얻어진다. 그러니 소설가가 시놉시스를 쓰거나 줄거리 요약을 하거나 작품 설명을 하고 있다면, 원칙적으로는 소설을 쓰는 게 아닌 셈이다. (35)

이야기는 이 세계를 보고 듣고 느낀 주인공이 자신에게 없는 게 무엇인지를 알아차릴 때 생겨난다. 예컨대 출근길 만원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난 미녀에게 첫눈에 푹 빠진 은행원이 있다고 치자. 평상시처럼 졸고 있었다면 그런 일이 없었을 텐데. 그래서 자기 마음을 표현했다가 단번에 차였다. 이때 은행원이 그 미녀의 해골을 상상한다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되긴, 소설이 망하는 거지. 그러니까 소설가는 이 세상이 더 많은 번뇌망상으로 가득하기를 바라는, 아무튼, 어딘가 좀 비뚤어진 인간일 수밖에 없다.

앞에서 소개한 공식이 기억나는가? 감각적으로 구성된 캐릭터에게 욕망을 부여한 뒤에 방해물로 그 욕망이 실현되는 것을 저지하면 이야기가 발생한다던 그 공식. 이걸 불교 경전 식으로 말하자면, 고생길이란 보고 듣고 느낄 줄 안다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불우해진 중생이 자신에게 없는 것을 간절히 원하건만 세상의 갖은 방해로 그걸 얻지 못하는 과정을 뜻한다. 그러니 할리우드의 이야기 공식은 이렇게 바꿀 수 있겠다.


(보고 듣고 느끼는 사람 + 그에게 없는 것) / 세상의 갖은 방해= 생고생(하는 이야기) (40)


24.10.22.
















도서관에 남아있는 한강 작가의 단편집 『노랑무늬영원』 읽기. 첫 단편인 「회복하는 인간」부터 작가의 도장이 진하게 찍혀있는 느낌을 받는다. 사랑했지만 혈연이어서 보일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치부와 수치심에 대하여. 까닭도 모르게 혈연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끝내 남은 상처가 낫지 않기를 바라는 인간의 설움에 대하여 생각해본 시간.


『소설가의 일』 읽기. 소설 쓰기의 방법에 대해 이렇게 쉽고 물 흐르듯 쓴 책이 있었나 싶다. 작법서를 따로 찾아 읽은 적은 없지만. 작가의 영업 비밀을 몰래 엿보는 것 같은 느낌. ‘왜’ 상자와 ‘어떻게’ 상자의 비유가 인상적이었다.


이 모든 생고생이 내게 없는 것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나의 장점, 내가 사랑하는 것들 때문에 생긴다는 걸 아는 순간, 구멍에 불과했던 단순한 욕망은 아름다운 고리의 모양을 지닌 복잡한 동기가 된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이 인생을 이끌 때, 이야기는 정교해지고 깊어진다. (47)


그러므로 현대소설의 주인공이 온몸으로 끌어안아야만 하는 것은 여자 주인공이 아니라 이 불안이다. 만약 『춘향전』처럼 만난 첫날에 사랑가 부르며 여주인공 옷고름 푸는, 참으로 명쾌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면, 자신이 조선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을 원망해야만 할 것이다. 마찬가지다. 인간에 대해서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구는 주인공이 나오는 소설보다 구닥다리로 느껴지는 소설은 없다. 설사 그의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다고 해도 불안 속에서 자신이 이해한 게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주인공이 훨씬 더 매력적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에 그런 주인공에게 우리의 마음이 가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원하는 그런 세계는 절대로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지 못할지도 모르고, 이 병은 낫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고 이 불안을 모두 떠안겠다. 그리고 정말 우리가 원하는 세계가 오지 않는 것인지 한 번 더 알아보겠다. 이게 현대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윤리가 아닐까. 자신의 불안을 온몸으로 껴안을 수 있는 용기, 미래에 대한 헛된 약속에 지금을 희생하지 않는 마음, 다시 말해서 성공이냐 실패냐를 떠나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태도. (50-51, 강조는 인용자)

어떤 사람을 둘러싼 세계에서 원인과 결과의 연결고리를 제거하면 그는 무기력해진다. 그렇다면 이건 우리 인생에 대한 은유가 아닐까. 사춘기가 지나면서 우리 인생도 조금씩 인과의 사슬에서 벗어나니까. 공부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는 건 아니라거나 착하다는 이유만으로 잘 살지는 못한다는 걸 우리는 깨달아간다. 해서 무기력은 현대인의 기본적 소양이다. 그런 무기력의 양대 산맥이 바로 현대 연애와 암 선고다. 내 뜻과 무관하게 느닷없이 찾아오는 질병과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연인을 견디는 일이 현대소설의 본질이 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결국 현대소설의 윤리는 불안을 이겨내고 타자와 공존하는 그 용기에 있는 셈이다. 이 용기는 두번째 그룹의 개들과 마찬가지의 처지이면서도, 그러니까 모두들 안 된다고 말하고, 또 자신부터가 여러 번 실패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뭐라도 해보겠다고 나설 때 비롯한다. 용기는 동사와 결합할 때만 유효하다. 제 아무리 사소하다고 해도 어떤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그건 용기가 될 수 없다. (52-53)

이야기의 관점에서는 수많은 백스토리와 인물을 포함하고 있는 게 가장 좋은 동기다. 언제나처럼. 그렇다면 이 삶도 마찬가지다. 이 삶이 멋진 이야기가 되려면 우리는 무기력에 젖은 세상에 맞서 그렇지 않다고 말해야만 한다. 단순히 다른 삶을 꿈꾸는 욕망만으로는 부족하다. 어떤 행동을 해야만 한다. 불안을 떠안고 타자를 견디고 실패를 감수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지금 초고를 쓰기 위해 책상에 앉은 소설가에게 필요한 말은 더 많은 실패를 경험하자는 것이다. (54)

하지만 질문은 독창적일 필요가 없다. 그저 상자 두 개를 상상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양손을 이 상자 두 개에 넣고 ‘왜?'와 ’어떻게?'가 쓰여진 카드를 꺼내기만 하면 우리는 소설 창작의 절반을 한 셈이다. 눈치챘을지 모르 지만, '왜?'라는 의문사로 알아낸 대답들은 모두 백스토리가 된다. 이 백스토리는 등장인물의 성격이 어떻게 형성됐는지를 설명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어떻게?'라는 의문사로 알아낸 대답들은 모두 디테일이 된다. 이 디테일은 플롯을 진행시킨다. 그리고 백스토리와 디테일을 갖추면, 그 어떤 인물도 악한이 될 수 없다. (60)


24.10.23.














『알로하, 나의 엄마들』을 다 읽다. 하와이 이주민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김영하 작가의 『검은 꽃』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세 여성이 겪는 풍파가 가득한 서사가 끊이지 않아 순식간에 읽게 된다. 인물들의 굴곡진 삶에 나도 함께 감정의 파도를 타며 읽었으나, 그것만으로는 전형적인 이민자 소설에 가깝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다. 버들의 자식들의 목소리에서 다른 소설과의 구별점을 찾았고, 특히 정호-데이비드의 말은 내가 청소년소설을 읽을 때 가지던 예상을 깨는 말이었다. 현대로 치면 세대 갈등이 연상되는 대목이었다고 해야 할까? 갑자기 영화 《도쿄 소나타》의 형이 미군에 입대하겠다고 고집부리는 장면이 떠오른 건 왜일까?


24.10.24.

한강의 『노랑무늬영원』 마저 읽기. 개정판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소개만 보았을 때는 단편의 순서가 많이 달라졌다. 오늘 읽은 건 「에우로파」, 「밝아지기 전에」, 「왼손」. 「파란 돌」을 읽다가 멈춤.


「에우로파」에서 눈에 띄는 내용은 화자의 성 정체성과 목성의 위성 에우로파(얼음으로 뒤덮인)에 대한 노래이지만, 정체성의 혼란, 사랑과 동일시를 오가는 감정의 외줄타기, 서로 다른 이유로 마음에 새겨진 상처들을 우회하며 오가는 대화 등 다양한 이야기들이 진한 감정의 발자국을 남기며 독자를 이끈다. 단편들을 쭉 읽으면서 이 작품들에서 중요한 건 이야기가 아니라 인물들이 명백히 드러내지 않는 상처와 감정의 골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점에서 ‘골똘히’라는 부사가 잘 어울린다.


「밝아지기 전에」__화자의 삶과 은희 언니의 삶을 나란히 둔 것은 서로가 서로의 버팀목이 되었기 때문일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내면의 상처들을 품고 살며 상대방의 삶에서 자신에게 없는 것 같은 단단함을 보는 삶. 서로의 막연한 꿈에서 말하지 않은 부분을 읽어내지만 그걸 드러내지 않는 서로에 대한 존중.


「왼손」__무의식에 내재된 다양한 (금지된) 욕망을 왼손이 의식을 거스르며 실행해나가는 과정은 공포스럽고 놀랍기도 하지만, 자기파괴적인 결말을 포함해 어딘가에서 본 것만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24.10.25.~26.

『노랑무늬영원』 읽기. 「파란 돌」의 뒷부분을 마저 읽고 「노랑무늬영원」을 이틀 동안 읽음.


「파란 돌」__한강 작가의 소설 속 화자들의 목소리는 왜 이리도 다들 말로 다 표현하기도 어려운 설움을 목소리에 꾹꾹 눌러담고 있나. 어느 순간 삶의 어떤 고비를 겪은 화자가 어린 시절 잠시 마주쳤던 당신께 보내는 편지. 인생을 놓고 보면 잠깐이었지만 강렬했던, 상처 많은 두 사람이 잠시 서로에게 기대었던 이야기.


「노랑무늬영원」__중편 분량의 작품. 소설집의 작품 중 가장 먼저 발표된 작품. 여기까지 읽으니 작품의 정조가 대체로 비슷하다는 느낌도 받는다. 몇 가지 모티브가 반복되기도(길거리에서 차를 몰다 동물을 치게 되거나 혹은 칠 뻔하거나 하는 이미지들). 하지만 가장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읽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미술을 전공했으나 차사고로 양손 모두 힘을 쓰지 못하게 된 화자. 사고 이후로 사랑이 메말라 결혼 생활도 껍데기만 남아버리고, 투명해지고 기민해진 감정과 감각만 남아버린. 갑작스럽게 등장한 사진의 존재에 관련된 기억을 쫓아가며 잠시 스쳐갔던 사랑의 감정을, 지금은 메말라서 없어진 사랑을 찾아보려는 몸부림처럼 읽혔다. ‘노랑무늬영원’이라는 학명을 가진 도마뱀의 강렬한 색채, 그리고 화가 Q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강렬한 노랑의 이미지. 마지막에 화자가 손으로, 세계가 힘을 빼앗아버린 그 손으로 찍어내는 노랑. 노랑이 작품 전반에 넘실거린다. 다만 잔멸치의 떼가 나타나는 꿈은, 그 꿈의 반복은 무엇이었을까.


『소설가의 일』 1부 완독. 요약하자면 할리우드의 이야기 공식, ‘왜’ 상자와 ‘어떻게’ 상자, 빈도수 염력사전(적확한 어휘 찾기), 그리고 핍진성.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대소설은 주인공의 동기를 파헤치는 장르다. 그런 점에서 현대소설은 추리소설의 일부다(라고 우기는 건 내가 추리소설이야말로 소설 중의 소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63)

사실 『주홍색 연구』는 코난 도일의 첫 작품이기 때문에 뒤에 쓴 추리소설에 비해 단점이 많이 지적된다. 예컨대 나를 매료시킨 동기 부분이 대표적으로 지적되는 결함이다. 추리소설의 독자들이 읽기에는 이 부분이 너무 길다. 코난 도일이 동기 부분을 이렇게 길게 쓴 이유는 당대의 소설들이 이런 식으로 '현재의 괴기한 사건 + 그 사건의 동기를 말하는 기나긴 멜로드라마 + 괴기함 속에 숨은 자연적 질서를 이해하는 결말'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마담 보바리』도 이런 식으로 추리소설로 재구성할 수 있다. '남부러울 것이 없었던 한 의사 부인의 끔찍한 음독자살 + 왜 마담 보바리는 불륜에 빠져서 어마어마한 빚을 지게 됐는가 + 어떤 부인들의 이해할 수 없는 일탈을 보바리즘으로 깔끔하게 정리하는 결말.' (64)

나는 사랑이란 행동이 아니라 말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빠른 시간 안에 상대방에 대해 더 구체적인 정보를 더 많이 알아내자면, 그의 행동을 지켜볼 겨를이 없다. 그래서 막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상대방에 대해 더 많이, 더 구체적으로 알수록 우리는 더 빨리 사랑에 빠진다. (70-71)

이렇게 생각하고 다시 쓰는 게 소설가에게 중요한 이유는 우리를 둘러싼 언어의 세계가 여러 겹으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제일 바깥쪽을 추상적이고 큰 단어들, 예컨대 평화, 정치, 슬픔, 절망 따위의 단어들이 단단하게 감싸고 있고,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구체적이고 작은 단어들이 숨어 있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글을 쓸 때. 우리는 대개 제일 바깥에 있는 단어들로 글을 쓴다. ‘5월을 보내는 마음이 슬프다'느니, ’그녀는 질투심이 많다'느니. 자기가 쓴 초고를 보면 누구나 약간의 구토증세를 느끼는데,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이 우주가, 아니, 우리를 둘러싼 언어의 세계가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좀 쓸 만한 단어는 그런 너저분한 단어들을 뚫고 가야 나온다. (75)

즉 소설가에게는 두 개의 상자가 있다. 각각 '왜?'와 '어떻게?'라는 의문사가 들어 있는 상자들이다. 세계를 감각하는 인간이 온갖 방해를 무릅쓰고 자신에게 없는 뭔가를 얻기 위해서 생고생하는 간단한 이야기를 만든 뒤, 이 상자 속의 의문사들을 하나씩 꺼내 붙이면 질문이 완성된다. 이건 쉽다. 그렇다면 소설가가 질문에 대답하는 방식은 어떨까? 이제는 빈도수 염력사전을 펼친다. 염력을 이용해서 가능하면 뒤쪽 페이지에 있는 단어와 표현 들을 쓰려고 노력한다. 이건 한 번에 쉽게 되지 않는다. 말하지 않았나? 우리가 사는 우주는 가만히 놔두면 삐딱해지는 곳이라고. 지구가 기울어진 꼴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에 추상적인 대답이 나온다고 너무 실망하지 말고 생각의 힘을 이용해서 빈도수 염력사전의 뒤쪽에 있는 단어들로 바꿀 생각을 하면 되겠다. (76)

만약 자기가 쓴 초고를 봤는데 토할 것 같다면 그건 소설가의 일거리, 즉 생각할 거리가 많이 생겼다는 뜻이다. 이건 뱃살이 생기거나 방이 더러워지는 일과 비슷하다. 말하자면 우리 우주가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란 뜻이다. 뱃살이 나왔다고 난 원래 배불뚝이로 태어난 것이라며 절규하거나, 방이 더러워졌다고 왜 나는 사는 방마다 더러워지느냐고 좌절하는 사람만큼이나 이상한 게 처음 쓴 문장이 엉망이라고 재능을 한탄하는 사람들이다. 단번에 명작을 쓰고 싶다면, 시간이 갈수록 방이 깨끗해지는 우주에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다. (77)

이런 이유로 소설을 시작하는 학생들에게 핍진성은 상상력을 제약하는 방해물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나는 그와 완전히 반대라고 생각한다. 핍진성은 소설을 쓰기 위한 최소한의 토대다. 소설가는 구체적인 문장을 넘어서 핍진한 문장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까지가 소설을 쓰기 위한 준비 과정이다. 많은 독자들이 내게 "소설보다 에세이가 더 좋아요"라고 말할 때 나는 그 말을 '핍진한 문장보다 구체적인 문장이 더 좋아요'로 이해한다. 물론 구체적인 문장만 해도 대단하다. 하지만 소설가에게는 구체적인 문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이해해주기를. 지금 나는 허구의 세계를 문장으로 창조해서 실제 감동을 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소설은 허구이지만, 소설에 푹 빠진 독자가 느끼는 감정은 허구가 아니다. 그게 다 핍진한 문장이 받쳐주기 때문이다. 어떻게 캐릭터를 만들고 플롯을 짜는가가 모두 이 핍진성에 기초한다. (83-8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4.9.30.















『기도를 위하여』 읽기. 김말봉의 단편들을 읽을 때에는 흥미롭기는 했으나 아 그렇구나 그때는 이렇게 썼구나 하면서 보았는데, 뒤이어 나오는 박솔뫼의 「기도를 위하여」와 에세이를 읽고난 후에는 이상한 리듬감 같은 것이 몸 안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입말과 글말 사이를 오가는 반점과 온점이 없는 문장들을 눈으로 따라가다 보면 요상한 리듬을 가지고 읽게 되고 지금 내가 쓰는 문장들도 뭔가 그것을 닮아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하필 단편에서 떠나간 순애의 영혼이 비중있게 다뤄져서 그랬나. 묘한 여운도 함께 남는데 괜스레 나는 쓸데없이 혼령과 영혼과 유령의 유의미한 차이가 있을까 골똘히 고민하였다. 왁자지껄한 소음에 금방 깨어났지만.

24.10.1.

『기도를 위하여』 완독.


24.10.2.















서리북 읽기. 리뷰 파트로 넘어가 『세월호, 다시 쓴 그날의 기록』의 서평을 읽는다. 세월호의 전사부터 그날에 드러난 켜켜이 쌓여있던 무능함과 보신주의, 이기주의의 복합체를 마주하는 일은 언제나 힘겹다. 거기에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수도 없이 했으면서 학생들의 대피를 도왔다는 이유로 아무 책임도 지지 않은 강혜성까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한탄”(170쪽)은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 선조위와 사참위의 활동들을 보면서 사법만능주의가 낳은 것과 가리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이 깊어지던 중, 서평의 말미에서 박호진 학생과 정차웅 학생의 이야기를 읽으며 울컥해지는 마음에 책을 잠시 내려놓았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의 상처는 여전하고, 못난 어른들은 상처에 약을 바르고 새살이 돋게 할 생각조차 않는다.














홍성욱, 「조각조각 꿰매진 '그날'의 슬픈 진실」


가장 큰 차이는 『세월호』(2016)의 2부 "왜 못 구했나"가 『세월호』 (2024)에서는 4부로 가고, 4부 “‘대한민국에서 제일 위험한 배', 어떻게 태어났나"가 2부로 갔다는 것이다. 즉 2부와 4부가 맞바꾸어졌다. 재난을 연구하는 사회과학자나 과학기술학 연구자는 재난이 발생하기 전에 '잠복기', '잠재적 조건(latent condition)' , '구조적인 취약성'이 누적된다고 보는데, 『세월호』(2024)는 이런 관점을 채택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는 2014년 4월 16일 아침에 발생했지만, 그 이전에 취약성이 계속 누적되는 잠복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재난에 대해 사회과학적 틀을 적용하고 나니, 세월호의 4월 16일 이전의 전사(前史)를 다룬 내용이 중요해졌다.(157-158)


세월호는 화물보다 평형수를 훨씬 더 많이 싣고 다녀야 하는 배가 되었고, 이런 상태로는 도저히 수지를 맞추지 못했다. 청해진 임원들은 화물을 더 싣고 평형수를 빼서 무게만 맞추자고 결정했고, 세월호는 이런 불안정한 상태로 운항하기 시작했다. 시험 운항과 운항관리규정 심사 모두 접대와 뇌물로 통과했다. 세월호의 운항관리규정은 화물을 최대한도로 싣기 위해 출항 10분 전까지 화물을 적재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158-159)


이미 9시 23분경 진도연안해상교통관제센터(이하 진도VTS)-세월호-두라에이스호의 삼자 통화에서 두라에이스호 선장은 빨리 승객에게 구명동의를 입혀서 퇴선시키라고 했지만, 세월호 선장은 묵묵부답이었다.(124쪽) 123정을 타고 온 해경은 도피하는 선장과 선원을 구한 뒤에 한 번 배에 올라갔지만, 구명 뗏목을 떨어뜨리는 일만 했지 배에서 승객의 퇴선을 명령하거나 유도하지 않았다. 배에 달린 마이크로도 충분히 방송을 할 수 있었는데 이마저도 하지 않았다. 배가 점점 기운다는 정보를 받은 해경 지휘부 역시 퇴선을 명령하지 않았다. 구조 현장에 있던 대부분이 배에 사람이 많이 타고 있었고, 바다에 떠다니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무도 퇴선 명령이나 퇴선 유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실에서 대기하던 학생 중에서만 200명 가까이 목숨을 잃었다(단원고 학생 희생자는 총 250명이었다).
123정이 도착한 시간은 9시 34분이었고, 선미 쪽에 모여 있던 기관부 선원과 조타실에 모여 있던 선장과 선원이 123정을 타고 도주한 시간은 9시 39분 이후였다. 9시 50분에서 9시 58분 사이에 학생들이 주로 머물던 4층이 침수되었다. 3층은 그보다 일찍 침수되었다. 9시 52분에 123정 정장 김경일은 서해지방해양경찰청(이하 서해청)에 승객 반이 못 나오고 있다는 무전을 했고, 이를 들은 서해청과 해양경찰청(이하 본청)은 123정 승무원이 배에 올라가서 승객을 동요하지 않게 하라고 요청했지만, 123정 정장 김경일은 배가 기울어져서 올라가지 못한다면서 헬기에 요청하겠다고 하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9시 59분에 목포해양경찰서(이하 목포해경) 서장 김문홍이 승객들에게 배에서 뛰어내리라고 외치거나 마이크로 방송을 하라고 김경일에게 요청했지만,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후 선원 김영호의 제안에 따라 세월호에 접안해서 승객 6명을 구조했지만, 그 뒤로는 다시 세월호에 가까이 가지 않고 멀리서 고무보트가 구해 오는 승객만을 배에 실었다. (161-162)

날씨 좋은 날 기기 고장을 일으킨 여객선이 왜 급하게 기울면서 침몰했는지는 세월호의 전사가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왜 구하지 못했는가는 이와는 또 다른 문제이다. 123정이 배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구조에 소극적이었던 모습은 사진과 영상으로 잡혀서 국민의 공분을 샀다. 신고를 받고 세월호와 30분 이상 통화를 유지한 진도VTS, 현장에 출동한 123정, 현장에 출동한 세 대의 헬기, 이들을 지휘한 목포해경, 서해청, 본청 구조본부는 왜 적극적으로 승객 퇴선 유도를 하지 않았을까? 세월호 참사를 두고 음모론이 횡행했던 것은 배가 갑자기 넘어간 이유가 납득이 안 되기도 했기 때문이지만, 해경의 행동이 '못 구했다'라기보다 '안 구했다'는 것에 더 가까워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오랫동안 선원과 해경이 담합해서 희생자들을 수장시켰다는 음모론이 횡행했다. (162)

해경은 자신들이 퇴선 명령을 했다가 사망자가 생길 경우에 자신이 민형사상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도 한 해경 간부는 같은 상황이 반복되더라도 면책 특권이 주어지지 않는 한 해경은 역시 퇴선 명령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게다가 해경 지도부는 '큰 배는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는 상식을 믿고 있었다. 세월호 같은 배는 적어도 몇 시간, 심지어 며칠 동안도 바다에 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큰 여객선이 침몰한다는 얘기를 듣고, 해경들은 '승객 다 구하고 특진하겠다', ‘123정 상 받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165)

유가족과 시민들은 자신들은 도망가면서 승객에게는 가만히 있으라고 방송한 선원에 분노했다. 그런데 사실 방송을 한 사람은 3층 안내 데스크에 있던 여객부 직원 강혜성이지, 조타실에서 모였다가 도주한 선원이 아니었다. 9시 22분에 2등항해사가 강혜성에게 연락해서 해경이 오니까 대기하라는 방송을 하라고 했지만, 강혜성은 이미 그 이전부터 자신의 판단에 따라 승객들에게 그 자리에 있으라는 방송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있던 3층에 물이 들어 오던 시기까지 강혜성은 열 번 넘게 선실에서 대기하라고 방송했다. 9시 28분에는 "선실이 더 안전하겠습니다"라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방송까지 했다.(462-466쪽, 793쪽) 학생들의 대화나 카카오톡 대화 내용을 보면 갑판으로 나가려다 이 방송을 듣고 선실에 머문 사례가 있다. 기록으로 남지 않은 경우는 훨씬 더 많을 것이다. 3층의 일반 승객은 주로 성인들이었고, 이들은 강혜성의 방송을 무시하고 바다에 뛰어들어 살았다. 반대로 사망한 학생 대부분은 방송 내용을 공유하면서 선실에 물이 들어올 때까지도 방송을 믿고 해경의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물은 서서히 들이친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한 층을 삼켜 버렸다. (169)

세월호 이후 젊은 세대는 '어른의 말을 들으면 죽고, 안 들으면 산다'고 자조적으로 얘기하고는 하는데, 이는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이 낳은 참사 때문이었다. 선원 재판에서 검찰은 강혜성이 명령에 따라 한 번 방송을 했고, 목숨을 걸고 승객의 대피를 도왔다는 점 때문에 기소조차 하지 않았다.(469-470쪽) 그러면서 그 책임은 파도 속으로 흩뿌려졌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한탄만이 남았다. (170)

기본 대신에 담합, 눈 감고 아웅 식의 대충주의, 관료주의, 무사안일, 낙관적인 선입견, 방관적 태도, 객실이 더 안전하니 가만히 있으라 방송하는 월권, 법적인 책임만 피하려는 보신주의가 참사를 낳았다. 대한민국은 3만 불 소득에, 세계인이 선망하는 K-문화를 자랑한다. 이 화려한 얼굴 반대편에 곪아 터지는 추한 이면이 있는데, 세월호 참사는 이런 이면의 슬픈 자화상이다. (172)

세월호 참사 조사위원회의 위원 구성은 다른 정치적 성격이 강한 위원회처럼 여야가 위원을 추천하는데, 참사의 전모를 밝히는 위원회의 경우 이런 정치적 구성은 바람직하지 않다. 여기에 (우리나라의 다른 위원회처럼) 위원장을 명망 있는 변호사가 맡고 위원 중에 변호사가 포함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위원회의 흐름을 사법 정의를 구현하는 쪽으로 몰고 가는 경향을 강화하는 문제가 있다. 즉, 구조적인 원인을 밝혀 참사의 전모를 드러내면서 사회적 위험을 경감하고 안전 사회를 구현하는 것보다, 책임자를 색출해서 처벌하는 것이 우선시된다. 형사 재판에서의 유죄와 사회적 책임이 있다는 것은 매우 다르다. 세월호 재판에서 자주 드러났듯이 사법주의는 법원에서 무죄를 받으면 아무 책임도 없는 것처럼 되어 버리는 문제가 있다. 위원회 내에서 조사위원과 조사관의 역할이 분리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경우에 전문성을 가진 조사위원이 실제 조사를 할 수 없고 조사관이 수행한 조사에 대해서 평가하기만 하는 문제도 생긴다. 조사하려는 문제는 잘게 쪼개지고, 참사의 전체 구도를 보지 못한 채로 각 사안에 대해서 티끌만큼의 의문이라도 있으면 이를 의혹으로 부풀려서 다시 조사를 하는 관행이 계속되는 것도 문제다. (173-174)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하나의 정합적인 서사를 갖는 데 실패했다. 왜 책임져야 할 사람들에게 면죄부가 부여되었는지, 왜 아직도 어딘가 의혹투성이 같은지, 왜 진실은 아직 떠오르지 않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그런데 어찌 보면 우리 자신이 '잊지 않겠다'라고 되뇌면서, 진실이 떠오르기만을 바랐던 것 같기도 하다. 『세월호』(2024)가 보여주듯이 "진실은 대체로 모호하고 복잡한 형태로 떠다니고 있어 한 손에 꽉 잡히지도 않는"(809쪽) 것임에도 말이다. 진실은 아름답다는 말이 있지만, 복잡한 세상에서 진실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아름다운 그림보다 조각보와 비슷할 것이다. 금방 연결이 안 되는 증거와 자료를 분석하고 검증해서 사실을 꼼꼼하게 확인하고 이를 다시 커다란 그림으로 꿰어 낸 것이기 때문이다. (174-175)

"받아요! 애기요, 애기!"를 외치며 박호진 학생이 아이를 먼저 구조대에 건네주었다. 그 학생들에게는 자신의 목숨보다 애기를 살리는 일이 우선이었다. 정차웅 학생은 자신의 구명조끼를 옆 친구에게 양보하고 물에 빠진 친구를 구하려고 들어갔다가 목숨을 잃었다. 자신의 구명조끼를 학생에게 건네주고 사망한 교사도 있었다. 세월호에 걸려 침몰 위기를 맞았어도 끝까지 승객을 구한 어선의 선원들도 있었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었다. (176)


『불편한 편의점』 서평을 읽다가 그저께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알라딘에서는 편의점에서 택배 받기를 선택하면 적립금을 주는데(처음엔 500원이었으나 200원으로 줄었다), 이 때문에 나는 줄곧 집 근처 씨유로 배송을 시키고 찾아가는 일이 잦았다. 그저께도 택배를 받으러 편의점에 들렀더니 (아마도) 점장님이 택배 단골손님이 오셨다느니, 1년 동안 받기로 해놓은 거를 끊을 수도 없고... 라는 등의 말들을 궁시렁궁시렁하는 것을 들으며 어색하게 하하, 웃고 나와서 민망해졌다(그리고 오늘 또 택배를 받아왔다). 서평에서도 언급한 「나는 편의점이 간다」의 화자가 피하고 싶었던 상황이 이런 거였나, 하는 생각을 했다. 지지난 주였나 그때에도 택배를 주면서(또 같은 사람이다) 사업하시냐는 질문을 받고 난감한 적이 있었는데..

소위 ‘장소 힐링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K-힐링이 유행하는 현상에 대한 거부감이 나에게 있는 듯하다. 바뀌지 않을 사회에 대한 낙담과 위안의 추구와 같은 현상이 읽혀서 그런가. 서평의 말마따나 “'서민'·‘소시민'의 생활과 도덕을 유지하는 것만도 모험이 돼버린 오늘날, 피로와 불안을 중지시킬 수 있는 '위안'과 '행복'의 가치는 결코 작지 않”기는 하지만, “돌파력을 충전한 소설”을 만나고 싶다는 욕망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가득한 책들의 세계를 샅샅이 탐구하기엔 인생이 짧다...














권보드래, 「'K-힐링'과 소설의 노스탤지어」


소설이 근대적 양식으로 자립한 것은 이야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성찰과 실존의 실험 때문이다. 사회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문제를 드러내고 위선을 까발리고 고투 속에서 길을 찾으려는 노력 없이 소설은 존재하기 어렵다. 제1차 대전 후 세계 소설사의 전개가 보여 주듯 이야기보다 성찰과 실험을 중시하는 경향마저 강력하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소설이란 '우리'의 모순을 고발하고 '나‘의 심연을 해부하는 글쓰기 양식이었다. 더 나갈 길에 대한 신뢰, 적어도 더 나은 삶에 대한 갈망을 전제로 소설은 소설다울 수 있었다. 길이 막힌다면? '나'와 '우리'의 교차가 사라지다시피 한다면? 소설은 다른 글쓰기로 진화하게 되리라. 소설과 닮았으되 근대 소설과 판이한 무언가로. '사회적인 것'의 종언은 곧 소설의 종언이다. (188)


애초에 '우리'도 '사회적인 것'도 환상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비장애인·이성애자·남성의 좌표를 '우리'로 기만당한 역사가 있을 뿐이라고, 그러니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압력에서 해방돼 저마다의 해방을 교차시키자고, 그러면서 공존의 계기를 증식시켜 보자고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환상을 상실한 곳에서 나는 불안하다. 혼란스럽다. 여러 갈래의 시선과 주장 사이에서 찢긴다. 차라리 아우성에 귀 닫고 사소한 관계와 취미와 도락 속으로 물러나고 싶다. 뉴스를 피하고 논쟁을 차단한다. 영화나 드라마가 요구하는 주의력조차 부담스럽다. 매일 10분 치 연재분을 먹는 웹소설의 생리에 익숙해진다. 성찰이나 실험은커녕 긴 이야기를 맛보는 것도 힘들어지고, 그저 일상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무용한 습관을 찾을 뿐이다. (188)


K-힐링과 웹소설은 좋은 짝패 같다. 웹소설의 전형적 주인공은 비인간적일 정도로 월등하다. 로맨스건 판타지건 무협이건 주인공은 실패와 후회로 점철된 1회차 인생 후 n회차 인생을 맞아 무쌍의 능력을 발휘하면서 퀘스트를 성취해 나간다. 시간을 거슬러 어렸을 적으로 돌아가거나(회귀) 다시 태어나는(환생) 건 예사고, 다른 시대를 사는 타인의 몸에 깃드는 일(빙의)도 자주 벌어지건만, 한결같이 과제는 분명하고 전략은 명쾌하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미래와 의미를 찾을 길 없는 고난과 명분 붙이기 어려운 우울 등은 회빙환(회귀·빙의·환생) 주인공에게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1회 차 인생의 경험이 예지·통찰·역량의 자원이 되는 가운데 그의 새로운 인생은 돈·지위·관계에서 사랑·인정에 이르기까지 오직 성공으로 이어진다. 요즘이라면 SNS로 전시하기 맞춤한 호화로운 일상도 부록처럼 따른다. '의미 잃은 존재'와 '길 없는 편력'이라는 근대 소설의 테마는 웹소설에서는 난센스다. (189)


반면 『불편한 편의점』의 인물들은 누구랄 것 없이 문제투성이다. 고립과 실패와 우울은 보편적이다. 회피하고 화내고 허세 부리지만 그들도 그 사실을 잘 알기에, 계몽적이거나 시혜적인 접근은 질색하면서도 호의적 손길과 변화의 계기를 갈망한다. '바보 현인' 독고 씨는 그런 계기로서 맞춤한 존재다. 그는 우월하거나 열등하거나 또는 잘나거나 못난 위계를 교란하면서 참 투박하게도 친절을 베푼다. 원 플러스 원(1+1)이라며 옥수수수염차를 내밀고 폐기 식품이라면서 핫바를 데워 주고 전깃줄을 낑낑 끌어다 추운 날 야외 테이블 옆에 온풍기를 틀어 준다. 독고 씨, 나도 나도. 내게도 한 조각 관심과 돌봄을. 오래된 동네의 작은 편의점이라면 반쯤은 구멍가게일 수 있을 테니, 편의점과 구멍가게 사이 절묘한 균형을 부디. 궁금해하지 않되 진심으로 친절하게, 매뉴얼대로이면서도 나만은 조금쯤 멋대로 편안할 수 있게끔. 세상이 바뀔 리 없으니 작게나마 숨 쉴 공간을. (189-190)


한국 사회가 최종적으로 고향-농촌과 작별한 지도 오래다. 영화 〈집으로...>(2002)와 〈워낭소리〉(2009), 소설 『엄마를 부탁해』(2008)가 전 국민적 호응을 얻었던 그때쯤일까. 얼마 후에는 '응답하라' 시리즈(2012-2016)가 유행했다. 그것은 곧 작별이자 애도의 과정이었다. 가족과 이웃과 평생 가는 인연이라는 정답고도 지긋지긋한 세계에 대한. 이제 그 세계는 사라지다시피 멀어졌다. 생활이 소비 중심으로 압축되고, 소비는 프랜차이즈화되고만 오늘날, 나의 일상은 표준화 속에서 쾌적하다. 낯선 동네에서도 으레 편의점을 찾는다. 비위생과 비표준과 불친절의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으니까. 내 취향은 글로벌한 유통망과 트렌디한 신상품에 진작 길들었으니까. 그것이 자생적이고 토착적인 다양성을 위협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장소'는 사라지고 '공간'만 남겠구나 탄식하면서도. 노스탤지어는 달콤하지만 생활을 바꾸기란 막막하고도 힘겹다. (190-191)


책의 몫도 소설의 몫도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그런 만큼 『불편한 편의점』이 100만 부 넘게 팔렸다는 소식은 일단 반가웠다(꼭 망원동에 건물 올려서 사시사철 <망원동 브라더스> 연극을 공연하실 수 있기를!). '서민'·‘소시민'의 생활과 도덕을 유지하는 것만도 모험이 돼버린 오늘날, 피로와 불안을 중지시킬 수 있는 '위안'과 '행복'의 가치는 결코 작지 않다. 그렇지만 동시에, 어떤 방향으로든 돌파력을 충전한 소설을 만나고 싶다. 서민적 위안과 소시민적 행복에 만족한다는 건 타협일 뿐 장기 지속의 해결책일 수 없으니까. 인간은 어리석게도 '삶 밖의 삶'을 포기하지 못하니까. 누구나 '지금·여기‘를 욕구 불만의 무한 연쇄가 아니라 희망의 계기로 살아 내고 싶어 하지 않는가. 다른 지평의 동력으로서 발본적 성찰과 모험이 간절하지 않은가. 나는 여전히 소설의 남은 가능성을 믿고 있나 보다. (194)


24.10.7.














『느티나무 수호대』 읽기. 『모두 깜언』의 주제를 이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다문화나 도시 재개발과 환경 문제 등의 연장선. 느티나무가 선생님으로 변하는 판타지가 가미되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


24.10.10.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가 밤 아홉 시쯤 스마트폰을 켰는데, 잠시동안 거짓말인 줄 알았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고???? 물음표와 느낌표가 순식간에 몰아쳤다가 사라지는 순간. 종종 한국 작가들의 해외 문학상 수상이나 후보작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긴 했지만 별다른 감흥이 없었는데, 한강 작가의 문학적 세계가 어느덧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구나... 라는 생각에 감개무량해졌다.















북플 기록을 돌아보면 내가 처음으로 읽은 한강 작가의 작품은 『바람이 분다, 가라』였다. 이상하게도 나는 「내 여자의 열매」를 먼저 읽은 것 같았는데... 제목이 주는 끌림 때문에 처음으로 구입해서 읽었던 것 같고, 이후에 『소년이 온다』와 『채식주의자』를 읽었다. 『소년이 온다』를 읽을 때는 장면장면이 주는 먹먹함에 책장을 넘기기 힘들었고, 『채식주의자』를 읽을 때는 몇 개의 강렬한 이미지들이 오래도록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도서 관련 팟캐스트들도 열심히 들을 때여서 자주 이야기를 들었던 『희랍어 시간』도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뒷전으로 밀렸고, 당시의 나는 오만하게도 ‘이제 한강 작가의 작품은 충분히 읽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작별하지 않는다』가 나왔을 때 잠시 궁금했던 기억이 있지만 찾아보진 않았었고...

사람들이 너도나도 서점을 찾고, 온라인 서점에서도 한강 작가의 책이 없어 구할 길이 없다는 즐거운 소식들이 들린다. 한강 작가의 책을 읽으면서 10여 년 전의 내가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돌아보고, 그때 멈추었던 한강 작가의 책들을 들춰봐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언제나 내 마음에는 쓸쓸한 비관론이 먼저 고개를 들어서 지금의 독서 붐이 순식간에 사그러들 것을 염려하지만, 이번 수상을 계기로 한국에서 독서를 향유하고 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일상에 더 자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4. 9. 23.















서리북 15호 읽기. 대전과 광주에 대한 서평을 흥미롭게 읽었다. 왜 대전은 노잼도시로 이미지화되었는지, 왜 광주는 고층 아파트 밀집지역이 되었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글들. 인기를 얻게 된 밈들이 도시의 정체성을 납작하게 만든다는 일침에 공감하면서도 어느 순간 나는 소제동이 핫플이구나 하면서 머릿속에 여행 갈 만한 곳으로 저장하고 있었다. 도시 계획과 실행의 역사에서 건설업의 부상과 부패 구조의 견고화의 산물로 만들어진 고층 아파트 단지와 자동차 이동 중심의 도시 광주를 읽으며, 복합 쇼핑몰들의 대거 유치의 과정에서 비슷한 전철을 밟게 될 광주의 모습을 상상하며 씁쓸해지기도 했다. 결국 이 글들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지방 소멸로 질주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난장이다. 어떻게든 서울에 뿌리를 내려보고자 발버둥치는 나를 포함해서.















심채경_「당신의 블로그를 파헤쳐 납작한 대전을 만나다」


재미가 없다는 뜻의 키워드 '노잼'이 게임, 사람, 영화가 아니라 대전과 직결되기 시작한 것은 2019년부터다. 아이러니하게도 2019년은 대전시가 출범 70주년과 광역시 승격 30주년을 기념해 대전 방문의 해로 지정한 해다. 대전을 홍보하고 방문을 독려하자 '이렇게 노잼인데 놀러 오라는 것이냐'는 일종의 조롱이 되돌아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벼운 조롱이 혐오나 무관심이 아닌 놀림거리이자 유머 코드로 승화되며 밈으로 확산됐다는 것이다. (17쪽)


성심당을 향해 돌진하는 사람들은 대전의 구석구석을 탐험하지 않고, 오래된 도시가 품고 있는 역사를 탐색하지도 않는다. 새로운 장소에서 자신만의 재미를 찾거나 다르게 보이는 공간의 사연을 묻지 않는다. 그래서 대전은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다. 공간이 지닌 기억과 감정, 그 속의 물질과 사람들의 특성, 그 모두를 복합적으로 느끼는 총체적인 경험을 장소성('sense of place‘ 또는 ’placeness‘)이라 할 때,(52) 성심당과 코레일이 약간의 돈을 버는 동안 대전은 장소성을 잃었다. (18쪽)


대전역 인근에 있는 소제동은 대전의 대표적인 구도심으로, 일제강점기에 철도 노동자를 위한 관사촌으로 번성했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을 만큼 오래된 풍경이 펼쳐지는 곳이다. 수십 년간 아무도 돌보지 않은 듯 무너진 벽 사이로 잡초와 넝쿨식물이 무성한데, 또 어떤 건물은 내부를 근사하게 리모델링하되 담장과 문패는 그대로 두어 레트로 감성의 카페, 식당으로 변신했다. 100여 년의 시간이 한데 공존하는 듯한 이 동네에는 별명이 있다. 2의 익선동. 오래된 한옥 마을이었다가 힙한 카페 거리로 변모한 서울의 익선동과 분위기가 비슷해서다. 경부선과 호남선이 분기하는 철도 요충지인 대전, 적산 가옥이 들어찼다가 전쟁 폭격으로 일부만 남았던 역사, 빈집이 절반 가까이 되도록 황폐해져 갔던 수십 년의 이야기가 '익선동'이라는 세 글자로 납작해진다. 소제동뿐인가? 봉명동은 대전의 홍대, 둔산동은 대전의 강남으로 불린다. 그러면 핫한 지역이라는 뜻이다. (20쪽)


지방도시의 매력은 서울을 기준으로 평가된다. 그래서 지방도시는 빠르고 확실한, 실패 없는 성공을 위해 지역 고유의 특성 대신 서울과의 유사성에 천착하기도 한다. 서울의 경리단길 같은 성공 사례는 신속히 복사, 붙여넣기 되어 전국 각지에 '리단길'이 조성된다. (21쪽)















박경섭_「전라도와 함께 지역 문제를 이해하고 극복하기」


1980년대 도시 계획의 수립과 1990년대 실행 과정에서 구도심 인구 과밀과 주택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시 외곽 곳곳에 택지 지구가 개발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고층 아파트가 대규모로 건축되었고, 호남 기반 건설사들은 급격히 성장해서 전국구 건설사가 되었다. 성장한 지역 건설사들 대부분은 지역 시민사회 단체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지역 언론사의 사주가 되었다. 20216월 학동 참사가 자본, 언론, 권력의 결탁, 즉 부패 구조에서 기인한다는 책의 내용은 뼈아프다. 그리고 20221, 학동 참사의 아픔이 가시기도 전에 발생한 화정동 아이파크 붕괴 사고는 아파트의 도시 광주의 민낯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32쪽)


광주는 2000년을 전후해 아파트와 자동차의 도시로 급속하게 변모했다. 글쓴이가 밝혔듯이 광주는 계획도시인 세종시를 제외하면 주택에서 아파트가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은 도시다. 광주가 아파트의 도시로 변화하면서 달라진 것은 건설업의 성장과 부패 구조의 강화만이 아니다. 주거지인 아파트 단지와 일터로의 이동을 위해 승용차 중심으로 도로 교통이 구성되었으며, 생필품의 조달은 전통 시장보다 대형 마트가 담당하게 되었다. 아파트, 승용차, 대형 마트의 삼각 동맹이 광주의 새로운 생활양식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32~33쪽)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1960년대까지 광주의 가장 큰 공장이자 가장 많은 노동자들이 일했던 전남방직과 일신방직이 자리 했던 방직 공장 부지에는 화력발전소와 고가수조 등 다수의 근대 산업 유산이 존재하고 있다. 광주의 시민사회 단체는 광주의 역사가 담겨 있는 산업 유산의 공적 가치에 근거해 시민 문화 시설과 산업 박물관이 건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신속한 행정 속에 대형 쇼핑몰 건립에 대한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의 우려의 목소리는 묻혔고, 광주의 도시사와 산업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방직 공장의 공공성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지금도 심각한 교통 체증을 유발하는 유스퀘어(광주종합버스터미널)와 더현대 광주가 들어 설 방직 공장 부지는 불과 1킬로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데, 이로 인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교통 문제 역시 숙제로 남겨졌다. 글쓴이는 민주당의 지지 기반을 흔드는 복합 쇼핑몰 이슈를 지역 지배 체제의 균열로 파악했지만 광주시의 발빠른 유치 작전을 보면 이러한 체제가 흔들릴 것 같지는 않다. (35쪽)

















기도를 위하여를 읽는 중. 김말봉이라는 이름은 처음 들었는데, 작가소개에서 흥미를 느껴 도서관에 신청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망명녀는 내가 대학생 시절 언뜻 보았던 신경향파나 카프 문학보다 훨씬 재미있게 읽었다. 아무래도 삼각관계의 구조가 함께 얽혀있어서일까. 작가정신의 소설, 잇다시리즈의 기획은 감탄스럽고, 뒤에 나올 박솔뫼의 작품은 어떻게 김말봉의 작품과 연결되어 있을지 궁금해진다.



다시 서리북 읽기. 밀양의 송전탑 문제에서 시작해 도시를 위해 희생당하는 농촌의 이야기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도시의 편리한 생활을 위해 농촌의 희생을 모두가(국가를 포함해서) 강요하고, 농촌-시골의 정치적 목소리는 적은 인구와 고령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하고, 일관된 기준 없는 보상으로 반대하는 이들을 매도하는 폭력성. 그렇다면 송전탑과 기타 시설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어떤 과정을 밟는 것이 모두의 목소리를 존중하는 일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질문만 남았다.














하승수_「곳곳이 밀양,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이유는?」


도시로 전기를 보내기 위한 발전소와 송전선이 농촌·어촌·산촌 곳곳에 들어서고 있다. 태양광과 풍력 발전도 농촌·어촌·산촌으로 밀려들고 있다. 발전원은 바뀌어도, 도시와 공장으로 전기를 보내기 위해 시골 사람들은 희생을 감수하라는 것은 똑같다. 도시로 보내는 것은 전기만이 아니다. 도시에서 벌어지는 각종 공사에 필요한 토석을 채취하는 곳도 농촌이다. 그로 인해 주민들은 수십 년 간 소음, 진동, 분진에 시달려 왔다. 공장과 도시에서 배출되는 산업 폐기물 처리 시설이 밀려드는 곳도 농촌이다. 전기는 도시로 보내주고, 쓰레기는 농촌이 받아들이라는 식이다.

그리고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존중받지 못해 왔다.(47) 인구가 적고 고령화되었다는 이유로 무시당해 왔다. 주민들이 난개발과 환경 오염 시설에 반대하면 '님비(Not In My BackYard, NIMBY)'로 몰아붙인다. (55~56쪽)


그러나 전국 곳곳에 있는 밀양 할매들은 어렵고 외롭다. 동해 안의 신울진 원전 단지에서 출발하는 50만 볼트 초고압 송전선 때문에 강원도와 경북 일대에서도 밀양 같은 상황들이 발생하고 있다. 한전은 주민들을 분열시키고 갈등을 조장하는 매뉴얼을 들고 이 지역을 휘젓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밀양에서 다 해본 일들이다. 밀양을 봐라. 거긴 그렇게 심하게 반대했는데 결국 우리가 송전탑 세웠다. 우리가 못할 것 같냐. 싸워봤자 어르신만 힘들 뿐이다”(135)라고 얘기한다. (61쪽)


싸우는 이주여성들에 대한 글도 인상적. 결국 필요한 건 선민의식이 아닌 구조의 변화. 신자유주의가 국내 노동자를 이주노동자의 처지와 같게 만들고 있다는 지적을 인상깊게 보았다.















채효정_「타인의 목소리가 나의 목소리가 될 때」


처음 책 제목을 봤을 때 나는 기록 노동자 희정이 성소수자들의 노동을 추적한 르포인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오월의 봄, 2019)를 떠올렸다. 바로 옆에서 일하는 퀴어를 보지 못하는 건 당사자들이 커밍아웃을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변에서 그들을 '당연히 없는(또는 퀴어가 아닌)' 존재로 치부하기 때문이다. 조금 다른 맥락이기는 하지만 나는 우리 옆에서 일하는 이주여성이 잘 보이지 않는 이유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직장 동료, 학교의 교사나 학부모, 옆집 사람 등 시민들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마주치는 '평범하고 정상적인' 관계로 만나지지 않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이 도시를 지탱하고 있지만 대부분 한정된 특수 직종에 종사하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로 일하고 있다. 지방 소도시나 농촌 지역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래도 서울이나 수도권에 비해서는 훨씬 더 잘 보인다. 아마도 그것은 삶에 더 깊숙이 들어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농촌 지역에서는 이주 배경 학생이 없으면 학교가 유지되기 힘든 지역도 상당하다. 이처럼 이주에 대한 감각은 지역에 따라서 달라진다. (66쪽)


인력 외주화의 논리는 지금도 여전하다. 개인에게 돌봄의 짐을 지우고 국가와 사회가 돌봄을 돌보지 않은 탓에, 이제 돌볼 사람도 없고 돌봄 비용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되니 '비싼 도우미 비용'을 탓하며 '(값싼) 외국인 가사도우미 수입'을 해법이라고 내놓는 것도 그때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사람들이 오도 가도 못하고 발이 묶여 돌봄 대란을 치러야 했던 팬데믹을 겪고도 반성이 없다. 이주의 시대가 한 세대를 지나고, 한국은 농촌도, 산업도, 돌봄도, 이주노동자와 이주여성들이 없이는 지탱할 수 없는 곳이 되었지만 한국 사회는 그들을 그만큼 고마운 존재로 대접하지 않는다. 문제가 생겼으니 다문화 가족 정책도 생겼을 테지만 무엇보다 한국 노동자들에게 시킬 수 없는 일을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는 시켜도 되는 것인지, 한국 여자들이 기피하는 삶을 외국 여자들에게는 강요해도 되는지, 근본적 질문은 제대로 물어지지 않았다. '국민'은 평등해야 하지만 '비국민'은 차별해도 되는 것인가. (68쪽)


자본의 이동과 노동의 이동이 엄연히 다름에도, 마치 자본과 노동자들이 똑같이 이동의 기회를 가진 것처럼, 노동자를 선택할 수 있는 기업의 권리와 회사를 선택할 수 있는 노동자의 권리가 동등한 것처럼, 직업과 직장의 다양성과 선택의 자유를 부추기던 신자유주의의 속삭임에 많은 이들이 속아 넘어갔다. (69쪽)


이주여성이라는 호명에는 '이주여성'으로 범주화되는 특정한 이주의 경로가 내재해 있다.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이주, 자발적이기보다 비자발적인 이주, 빈국에서 부국으로, 남반구에서 북반구로의 이주 경로가 '이주'라는 말에 담겨 있다. 이 경로는 곧 차별과 불평등의 경로이기도 하다. 유럽의 이주노동자는 동유럽과 북아프리카에서 오고, 미국의 이주노동자는 남아메리카에서 오며, 한국의 이주노동자는 주로 중국과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온다. 외국인이라도 미국이나 유럽에서 왔으면 대우가 달라지고, 이주노동자라도 몸집이 크고 외모가 유럽인에 가까운 러시아나 중앙아시아 출신은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한국인들의 보편 의식으로 깊이 새겨져 있는 식민주의와 인종주의의 민낯을 마주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식민지로, 해방 후에는 미국에 종속된 나라로, 인종주의적 차별과 폭력을 끔찍하게 경험한 곳임에도, 왜 우리는 그 차별의 기억을 차별하는 자의 우월감으로 극복하고 있는 것일까. 가해자의 위치에서 차별당한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는 책의 전반부는 부끄러움과 슬픔으로 점철된다. (69~70쪽)


신자유주의화가 불러온 노동계급의 파편화, 고립화, 내부 난민화는 국내 노동자의 상황을 이주노동자와 점점 유사하게 만들었다. 임노동 체제의 바깥으로 내밀어진 비정규직 불안정 노동은 오랫동안 무가치화되고 비가시화되었던 여성 노동의 형태와 점점 유사해졌다. 이런 양상을 두고 북반구 산업 선진 국가 내부의 노동 형태가 남반구 노동과 유사해지고 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국내 노동자들도 이주노동자화되고 있다는 의미다.

이렇게 젠더와 국경을 가로질러 증대되는 이주와 노동의 취약성은 그 취약성을 공유하는 이들의 공통성이 되기도 한다. 파편화되고 고립된 삶에 맞서 커뮤니티를 만들어 내고, 서로의 취약성에 공감하고 필요한 요구의 공통성을 확인하며 연대하며 싸워 나갔던 이주여성들의 이야기가 지금 파편화되고 고립되어 있는 수많은 노동자 민중들에게 필요한 영감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으면 좋겠다. "나중엔 이주노동자들도 돕는 공간이 되고 싶어요. 처음엔 우리 힘든 것만 보였는데" (143)라고 부티탄화 옥천군결혼이주여성협의회 회장은 말했다. 그 말은 자신이 겪은 차별에 저항하는 싸움을 자신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과 동시에 그 싸움이 자신의 것만이 아님을 깨달아 가는 사람의 말이었다. (75쪽)


24. 9. 24.

기도를 위하여읽기. 단편 고행을 읽었다. 흔한 치정 이야기지만 등에와 오줌의 서스펜스가 주는 코미디.



알라딘에서 주문한 책을 받으며 문지 스펙트럼 에코백을 이미 주문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 또 골랐다는 것을 깨달았다산 책을 깜빡하고 또 산 적은 없는데 굿즈를 또 사다니.



서리북 읽기. 김홍중의 글을 오랜만에 보았다. 유머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코엔 형제의 영화와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를 통해서 풀어낸 점이 인상적. 이전에 읽으면서 김홍중의 '이마고 문디' 코너가 난해하다는 느낌이 종종 있었는데 이번에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유머가 지닌 힘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었던 계기.















바로 이 지점에서 코엔 형제는 자신들의 철학을 전면화한다. , 문제는 우리를 영원히 떠나지 않으며, 어느 누구도 문제의 외부로 나갈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새로 다가오는 문제는 불길하고 무시무시해 보이지만, (이미 지나간 모든 문제들이 그러했듯) 언젠가 슬그머니 소멸할 것이라는 사실을. <시리어스 맨>의 이념은 이것이다. 문제가 인간의 불가피한 존재 조건임을 깨닫고 나면, 좋은 삶을 사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랍비들이 충고하듯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지 마. 인생은 문제들의 영겁 회귀야. 끝없이 밀려오는 문제들을 그냥 살아 내라고. 이 내재적 세계의, 생성의 영원함을 믿으라고." (111쪽)















발터 벤야민에 의하면,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은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비상사태'가 상례임을 가르쳐 준다." 패배자들과 약자들에게 파국은 예외가 아니라 일상이다. 파국 이후의 번영에 대한 믿음은 승자들의 안이한 시간 감각이다. 약자의 입장에서 보면, 파국 이후에는 또 다른 파국이 올 뿐이다. 그들이 반복되는 역사와 인생의 고난을 통해 배운 교훈은 이것이다.

그들은 문제 속에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헐벗을' 뿐이다. 더 강해지거나 위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약해지고 부서지고 다치고 고장 난다. 약자들에게 문제는 기회가 아니라 순수한 위험이다. 생존의 위험, 파멸의 위험, 치유 불가능한 상처의 위험. 이런 위험들 속에 던져진 채 그들은 '구원 가능성'을 찾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구원 가능성은 밝은 미래에의 낙관이 아니라 그런 낙관이 불가능할 때 솟아나는 부조리한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환각처럼 지금 눈앞을 휙 지나가는 순간적인 느낌. 웃음이라고 해야 할까? 깨달음이라고 해야 할까? 마음속에서 뭔가가 저절로 내려놓아질 때, 꽉 차 있던 존재에 텅 빈 자리가 만들어질 때, 그때 비로소 내려 오는 빛이나 숨결 같은 것. 작고 미약한 힘. (112쪽)


하여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는 낙관주의자가 아니라 파국주의자의 언어다. 파국주의자는 안다. 긍정적인 자들이 그리는 장밋빛 미래는 허구라는 것을. 언제나 행복한 종합으로 귀결되는 변증법은 가진 자들의 오만한 논리라는 사실을. 패자들, 약자들, 떠도는 자들은 안다. 삶은 그저 파국이며, 그 밖으로 가는 기적적 출구는 없음을. 이런 순수한 내재성을 긍정하는 자들만이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다. 슬픔과 웃음이라는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 교차하는 불가사의한 공간. 유머는 그 공간에서 솟아 나온다. (112~113쪽)
















1905년의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에서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두 명의 '유머리스트' 사형수 이야기를 제시한다. 첫 번째 실례는 월요일에 교수대로 끌려가는 도둑이 ", 이번 주는 시작이 좋군"이라 말하는 경우다. 이어 프로이트는 "처형장으로 가는 도중 감기 들지 않도록 목에 두를 머플러를 달라고 요청하는" 사형수를 거론한다. 유머란 이런 것이다. 유머를 말하는 자는 "현실적인 이유들 때문에 마음 상하고 고통받기를 거부하며 외부 세계로부터의 외상(外傷)이 자신에게는 문제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일종의 '정신승리적' 주체다. 유머를 통해 주체는 "자아의 불가침성을 만방에 천명한다. (113~114쪽)


1923년의 논문 유머에서 프로이트는 유머리스트의 주체성에 대해 좀 더 상세한 분석을 시도한다. 그에 의하면, 유머리스트의 자아는 두 상이한 심급으로 쪼개져 있다. 한편에는 문제적 상황에 처해 있는 (곧 사형을 당하게 되어 있는) 자아가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는 이 자아를 굽어보면서 마치 자신에게는 결코 죽음이 도래하지 않을 듯이 말하는 또 다른 자아가 있다. 프로이트는 이 두 번째 자아가 사실은 '초자아(超自我)‘라고 본다. 어린아이의 눈에 비친 위대한 부모의 이미지를 모델로 형성된 초자아는 자아가 마주하고 있는 리얼리티의 위중함 따위는 손쉽게 부정한다(성인의 눈에 아이들의 문제가 대수롭지 않게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프로이트는 말한다. 유머란 초자아가 자아에 대해 취하는 이 고압적 태도에서 나오며, 유머 속에서 초자아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던진다. "보아라, 이것이 그렇게 위험해 보이는 세계다. 그러나 애들 장난이지. 기껏해야 농담거리밖에는 안되는 애들 장난이지!" (114쪽)


비극의 주체는 (오이디푸스로부터 예수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처형하는 권력 앞에 침묵하며 법의 심판을 수용한다. 하지만 처형을 통해 역설적으로 비극의 주인공은 불멸의 개체성을 획득한다. 이런 점에서 비극은 숭고를 동반한다. 하지만, 유머의 주체는 침묵도, 불멸도, 부활도, 숭고도 알지 못한다. 사형수는 법에 의해 곧 목숨을 잃을 존재다. 그런데, 그는 지금 감기를 걱정하고, 날씨를 생각하고, 계단을 이야기한다. 목에 머플러를 둘러 달라 말한다. 육신에 대한 이런 본능적이고, 즉물적이며, 유물론적인 관심은 임박한 죽음 앞에서도 결코 약화되지 않는다. 그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살()의 욕망과 감각을 잃지 않는다. (115쪽)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유아적이고 생리적인 집착이 법의 권위를 흔드는 효력을 발휘한다. 처형장 유머에 웃음을 터뜨리는 자는 이렇게 묻게 된다. 저처럼 처절하게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고, 생명을 유지하고자 하는 사람의 목을 자르는 ''은 과연 정의로운 것인가? 유머가 "심판 없이 행해진 정의"이며 "심판 없는 처형 행위"라는 벤야민의 통찰이 뜻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유머에 "괴물적인 것"이 있다면, 이 괴물성은 생명의 종식 불가능성, 기괴한 불멸성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유머 안에는 죽여도 죽지 않는 것, 죽일 수 없는 것, 죽음을 알지 못하는 것, 우리 인격 속에서 부단히 움직이는 괴물적 생명성, 그러나 언제나 상처와 박탈과 소멸의 위협에 시달리는 생명성의 절박한 목소리가 메아리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죽지 않는다, 나는 살고 싶다, 나는 불멸이다, 이렇게 외치는 목소리가. (115~116쪽)


유머는 죄인들을 심판한다고 주장하는 법의 맹목성, 추상성, 형식성, 자의성을 폭로한다. 법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묻게 한다. 법의 정당성에 균열을 낸다. 경찰, 검사, 판사의 권력은 유머 속에서 도리어 심판의 대상이 된다. (116쪽)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분열 분석이 명철하게 드러낸 것처럼, 프로이트는 욕망을 오이디푸스 삼각형(아빠-엄마-아들) 속에 가두어 버리고, 그 가공할 힘을 순치하고자 했다. 유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절차가 수행된 듯이 보인다. , 프로이트는 유머를 사회적 권위(초자아)에 귀속함으로써, 유머에 잠재해 있는 불온성과 비판성을 은폐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프로이트의 유머 이론도 수정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유머의 참된 발화자는 초자아가 아니라 '이드(ld)'인 것이다. 죽음도 부정(否定)도 시간도 알지 못하는 무의식, 욕망의 흐름으로 기계 작동하는 '이드'가 바로 유머리스트의 숨은 실체다. 따라서, 유머리스트는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안에 존재하는 '고아=무신론자=탈주자'. 다스릴 수 없는 민중의 근원적 저항성이다. 비인간적·반사회적 생명력, 진압할 수 없는 욕망 기계다. (116~117쪽)


바로 이런 점에서, 유머는 구조적으로 슬픔과 분리할 수 없다. 유머는 웃긴 만큼이나 슬픈 것이다. 모든 것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자가 주는 웃음이 유머기 때문이다. 상실의 깊이가 유머의 통렬성과 비례한다. 풍자나 농담이나 위트와 달리 유머에는 비탄의 날카로운 편린이 박혀 있다. 영화사에서 이런 유머리스트의 주체성을 가장 탁월하게 형상화한 존재는 찰리 채플린이 연기한 '떠돌이 찰리'. 그의 유머는 언어를 넘어서 몸짓 전체로, 존재 전체로 확장되어 있다. 가는 곳마다 곤경에 빠지지만 좌절하는 일 없이, 찰리는 부단히 움직여 나간다. 어떤 권력, 폭력이나 악의, 간계도 손상을 입힐 수 없다는 듯, 어떤 고난이나 문제도 생명을 해칠 수 없다는 듯, 찰리는 유머리스트 특유의 불굴의 무사태평함을 유지하며 미국 자본주의의 정글부터 파시스트 소굴까지, 서커스 무대에서 컨베이어 벨트까지, 서부 탄광으로부터 권투 경기장까지 천연덕스럽게 횡단한다. (117쪽)


카우리스마키의 스타일은 '미니멀리즘'으로 대표된다. 초기작부터 그는 "금욕주의, 간결성, 생략주의(ellipticism), 무표현적 연기"를 추구해 왔다. 대사는 최소화되어 있고, 인물들의 표정도 가면을 쓴 듯 내향적이고 검약적이다. 한 인터뷰에서 카우리스마키는 자신이 오즈 야스지로를 매우 좋아하며, 일본 영화 특유의 장식 없는 정직성을 높게 평가한다고 토로한다. 이것은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예술적 원리가 "축소""단순성"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119쪽)


이들이 보여 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무리 죽여도 죽지 않는 것, 죽일 수 없는 것, 파괴할 수 없는 것, 손상시키거나 굴복시킬 수 없는 것. 비인간적이고 맹목적인 생명의 충동. 인간-너머의, 목숨-너머의 생명성이다. 언데드(undead). 20세기 정신분석학은 인간 정신에 내재하는 이 괴물적 힘을 '죽음 충동'이라는 용어로 개념화했다. 우리가 흔히 잘못 이해하는 바와 달리, 정신분석학이 말하는 죽음 충동은 자살에의 의향, 죽고 싶다는 생각, 소멸을 향한 자연적 경향, 혹은 엔트로피 같은 것이 아니다. 죽음 충동은 죽음과 무관하다. 반대로 그것은 생명의 끈질기고 강렬한, 유기체가 결코 체험할 수도 없고, 인지할 수도 없는 '-유기체적 생명성'을 지시하는 용어다. 주체를 무의식적으로 강박하여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행위마저도 끝없이 반복하게 만드는 마성적 힘. 바로 그런 의미에서 죽음 충동은 "생명이 항상 그 자신을 초과(exceed)하는 방식"이자 "살아 있으라는 순수한 압력"이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124쪽)


코엔 형제의 영화적 이념이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로 집약될 수 있다면, 카우리스마키 시네마의 이념은 "인생은 영원히, 언제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야"라고 말할 수 있다. 항상 다시 시작하는 것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진정하고 유일한 리듬이다. 실업에 빠지면 다시 직장을 구하고, 헤어지면 다시 만나고, 빼앗기면 다시 획득하면 된다. 다치면 회복하고, 또 다치면 또 회복한다. 하지만, 도저히 다시 시작할 수 없을 정도로, 도저히 다시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도저히 다시 시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파괴되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랍비 마샥이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가사를 빌려와 래리의 아들에게 물었듯이, "진실이 거짓으로 밝혀지고, 모든 희망이 사라져 버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놀라운 해답을 제공한다. (125쪽)


당신이 완전히 무너졌을 때, 그래서 다시 시작할 어떤 힘조차 없을 때, 바로 그때 타인들이 나타난다는 것. 누군가 나타난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다. 실제로, 그의 영화에서 누군가 다쳤을 때, 누군가 버려졌을 때, 누군가 곤경에 처했을 때, 누군가 아플 때, 어김없이 사람들이 나타난다. 누군가 비열하게 폭행을 당할 때, 사람들이 꾸역꾸역 나타나 폭력에 맞선다. 붕대를 감아준다. 밥을 준다. 노래를 부른다. 손을 내민다. 악인들이 약자들을 파괴시킨다는 점에서 이 세상은 일종의 지옥이다. 하지만 불멸하는 생명의 힘이 약자들로 하여금 계속 삶을 다시 시작하게 한다는 점에서 이 세상은 '유머러스한' 지옥이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서, 그 유머러스한 지옥에는 언제나 선인(善人)들 이 있다. 착한 사람들이, 그들이 도움을 주기 위해 뻗는 손들이 있다. ()은 악()의 발생을 막지는 못하지만, 악이 극단으로 흘러 가는 것을 어느 지점에서 끊어 낸다. 중지시킨다. 그렇다고 지옥이 천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왜 악이 존재하느냐라고 수많은 철학자들이(가령 C.W.L. 라이프니츠) 물었다. 하지만, 카우리스마키 영화는 그 질문을 뒤집는다. 세상은 늘 지옥인데, 왜 지금까지도 악은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는가? 왜 선은 이토록 완강하게 잔존하는가? 왜 착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나타나는가? 선은 왜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는가? (125~126쪽, 강조는 인용자)


사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최근에 <사랑은 낙엽을 타고>만 보았는데, 잔잔하면서 평범한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를 심상하게 다루는구나 정도의 느낌만 받았고 깊은 인상을 남기진 못했었다. 이번 글을 통해 다시 찾아볼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24. 9. 25.

다와다 요코의 글자를 옮기는 사람읽기. 단어들의 파편에서 길을 잃고 정처없는 번역가의 발길에서 또 길을 잃는다. 오래전 배수아의 뱀과 물을 읽었을 때의 느낌(이 책도 다 읽지는 않았다. 몇 가지 이미지만 강렬하게 남았을 뿐).
















단어들이 이어지지 않은 채 원고지에 흩어졌다. 모두 이어서 문장이 되도록 해야 하는데 생각만 들고 거기에 필요한 체력은 최소한도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체력보단 폐활량이 모자랐다. 하나의 문장을 천천히 숨을 쉬며 읽고 거기서 꾹 하고 한 번 숨을 멈춘 다음 머릿속에서 뜻을 풀이하고 어순을 정리할 것, 그리고 조심스럽게 숨을 내쉬면서 풀이한 문장을 쓰는 것이 요령이라고 번역가 에이 씨는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단어 하나를 읽는 데도 숨이 차서, 힘들어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 다음 단어에는 거의 도달하지도 못한다. 그래도 적어도 나는 단어 하나하나의 낯선 감촉에 충실한 편이고 지금은 그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단어 하나 하나를 조심스럽게 건너편 강변에 던지는 느낌이 있었 다. 그래서인지 전체가 이리저리 흩어지는 것 같기도 하지만 전체를 다 생각할 여유는 없다. 전체는 아무럼 어떠냐는 생각까지 들었다. 번역이란 것이 '건너편 강변에 건네는 것'이라면 '전체'쯤은 잊어버리고 이렇게 작업을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어쩌면 번역은 전혀 다른 것일지도 몰랐다. 이를테면 변신 같은. 단어가 변신하고 이야기가 변신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바뀐다. 그리고 마치 처음부터 그런 모습인 양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늘어선다. 이렇게 하지 못하는 나는 분명히 서투른 번역가다. 나는 말보다 내가 먼저 변신할까 봐 몹시 무서울 때가 있다. (22~23쪽)


24. 9. 28.

글자를 옮기는 사람완독. 단조로우면서 고요하고 요상했던 일상이 갑자기 초현실적인 추격극으로 바뀌었을 때 느껴진 이야기의 낙차. 번역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작가의 창의적인 대답처럼 느껴진 소설이었다. 요약하면 번역은 변신이다’? 낯설게 하기의 변신 버전 같은 답변으로도 느껴진다. 작가의 여행하는 말들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 책. (그리고 곧 구매했다)


즉 번역은 원본이 다른 언어로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원본이 변신하는 움직임이다. 그러므로 번역문은 원본과 전혀 다른 새롭게 태어난 글이고 그 이질성만으로 충분히 원본과 다른 가치가 있다. 또한 번역은 글만 변신하는 움직임이 아니라 글을 쓰고 있는 사람도 변신하는 움직 임이라는 말이 읽는 사람을 사로잡는다. 익숙치 않은 외국어를 나의 익숙한 언어로 옮기려면 단어 하나를 두고도 수없이 대조하고 연상해야 하는데, 대조와 연상은 글을 쓰는 사람의 정신적이고 물리적인 행위다.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거나 손가락으로 사전이나 참고 서적을 뒤적거려 보는. 따라서 변신은 이 행위를 하는 동안 번역가가 어떤 곳에 도달했을 때의 상태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92~93쪽)


주인공이 성 게오르크 전설을 번역한다는 점 그리고 주인공이 머무르는 카나리아 섬이 15세기에 스페인이 식민지로 점령하고 기독교 개종을 강요했던 나라라는 점은 모두 유럽의 기독교 문명을 상대화하고 이 소설을 문명 이면의 이야기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섬을 머나먼 자연의 풍경으로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을 경계한다. 문명이 휩쓸고 지나간 장소를 무해한 자연으로 대하는 태도 역시 그 장소에서 벌어지는 삶들을 지우는 일이다. "무심코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을 뿐인데 관광객의 시선으로 바다를 보는 것 같아서 창피했다."(11), "아름다운 청년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는 건 자유 침해지만 내가 그런 관광객이나 할 법한 말을 하려고 섬에 온 것도 아니고 설사 내가 아이스크림을 판다 해도 관광객이 그런 말을 했다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았다."(54) 햇볕이 내리쬐고 바다가 너울거리고 사람들이 농업과 무역에 의존해서 사는 아름답고도 각박한 섬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고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는가는 주인공의 고민일 뿐만 아니라 읽는 사람에게도 던져지는 고민이다. (95쪽)


비록 단어가 뚝뚝 쉼표로 끊기고 뜻이 불분명한 번역이지만 바꿔 말하면 우리에게 상상의 여지를 많이 남긴다. 이렇게 언어의 마찰 속에서 상상의 실마리를 찾는 것이 바로 다와다 요코가 추구하는 번역이다. 위의 인용에서 번역을 변신에 비유했듯이 번역은 한 단어를 비슷한 뜻의 다른 단어로 교체하는 것이 아닌, 다른 뜻, 다른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맥락, 다른 형태의 글자, 다른 소리와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다른 느낌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어쩌면 원문 단어에 대응하는 비슷한 뜻의 번역문 단어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와다 요코는 이렇게 번역이 맞아떨어지지 않아 틈새가 벌어지는 곳에서 새로운 발견을 하려고 한다. 옮긴이가 이전에 옮겼던 문학 에세이에서도 그러한 자기의 작품 세계를 밝힌 바 있다. "서로 다른 문화 사이의 다리를 건너는 것보다 빈틈을 발견하는 것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빈틈에서 하는 새로운 발견이란 이를테면 출발어와 도착어의 최초 모습을 찾아내는 발견이다. "[일본어의] '나날[月日]'[독일어의] '해와 달[Sonne und Mondl]로 풀이하듯, 오역으로 느낄 정도로 직역을 하는 것은 우리를 말의 원점으로 되돌린다. 또 오랫동안 비유로만 쓰여서 원점에서 멀어진 노쇠한 말을 다시 살려 낸다.” (96~97쪽)


하지만 주인공이 달려가는 마지막 모습에서 불안이나 위기보다는 탈출의 기쁨과 안도감이 느껴진다. 번역을 방해하는 사람들에게서 탈출한 기쁨이고 번역을 다 끝낸 뒤의 안도감이다. 그리고 바다로 들어갈지 말지 망설이는 모습에서 옮긴이는 주인공이 여전히 번역 작업 속에 머무르고 있음을 느꼈다. "번역은 내내 결단을 내려야 하는 작업"(45)이기 때문이다. 후반부 소동은 주인공이 자고 난 뒤에 일어난 것으로 보아 주인공의 꿈으로 읽을 수도 있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주인공이 번역하는 과정에서 품은 환상 속 변신으로 읽을 수도 있다. 꿈이라면 주인공은 꿈속에서도 망설이고 있는 것이고, 글자를 옮기는 사람은 그렇게 "결단을 내려야 하는 작업"인 번역을 상징하며 끝나는 소설이다. (10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