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11.














혼모노읽기.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혼모노는 넘기고 스무드구의 집: 갈월동 98번지를 읽음.



스무드_한국이라는 맥락이 아이러니와 블랙코미디에 강력하게 작용하는 작품. 스무드라는 작품의 제목(이 단편의 제목이자 제프의 작품명)과 달리 한국에도, 이민자라는 정체성에도 스무드하게 스미지 못하는 듀이를 받아들여준 공동체가 미국을 선망하고 그 질서에 편입되기를 바란다는 점도 아이러니. 제프의 작품 세계의 매끈함에 대한 서술에서는 한병철의 아름다움의 구원이 떠오르기도 했다. 구 안에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큐레이터와 이를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제프의 모습을 보며 듀이가 감정적 유대를 느끼며 강하게 자각한 정체성의 공허함에 대한 암시일까 생각하기도.


누구나 제프의 작품을 좋아했다. 제프의 작품에는 분노도 불안도 결핍도 없었다. 바버라 크루거나 뱅크시의 작품처럼 무엇을 비판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사전지식 없이도 감상할 수 있고 뭘 안다고 감상이 크게 달라질 것도 없었다.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도 그런 매끈한 세계를 추앙했다. (71)


어릴 적 미국으로 입양되어 온 어머니는 자신이 사우스 코리안인지 노스 코리안인지도 알지 못했지만 아버지는 달랐다. 이민자 부모 밑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늘 자신의 출신이나 배경을 숨겼다. 그에게는 'Yongbok'이라는 미들네임도 있었으나 누군가와 통성명을 할 때 그것을 언급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간혹 누가 출신에 관해 물으면 아버지는 위스콘신 태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했고 나에게도 이를 주입했다.

듀이, 우린 미국인이야. (80-81)


그는 이제 많이 늙어 사진 속 젊고 건장한 남성과 동일인물이라 보기 어려웠지만, 세월을 거스른 낯설고 뜨거운 감정만은 내게 온전히 전해졌다. 보물. 내 아버지에게선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라 그랬던 걸까. 미스터 김과 나 사이에 세워진 두꺼운 벽에 가느다란 실금이 생긴 것 같았다. 느닷없이 이상한 통증이 일었다.

사진 속 소년들을 손으로 짚었다.

이들도 당신과 '대구'에 살고 있나요?

그들은 '서울'에 삽니다. 하지만…… 만나지 못합니다.

왜요?

내 물음에 미스터 김은 선글라스를 벗고 눈가를 문질렀다. 무뚝뚝한 입매와 달리 눈은 맑고 순했다. 뜸을 들이다 그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알 수 없습니다.

미스터 김이 한국어로 무어라 웅얼거리며 말을 이었다. 말소리가 뭉개져 명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꼭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안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겠죠. (98)


당신에게 무척 고맙다고 전해달랍니다. 당신이 아주 소중하대요.

타인에게 그런 말을 들은 건 처음이었다. 가족에게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감정의 가느다란 실금이 점차 벌어지더니 뜨거운 무언가가 그 바깥에서 울컥 밀려들어오듯 온몸이 달아올랐다. 이건 민망함일까, 뭉클함일까.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101)


미스터 김은 그들을 가리켜 '열사'라고 불렀다.

저들의 이름이에요?

내 말에 미스터 김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열사'가 무슨 뜻이냐고 묻자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아주 좋은 사람들이라고 풀이해주었다.

아주 좋은 사람들. 그의 말을 나도 미온하게나마 수긍했다. 여기 모인 이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 같았다. 대가 없이 호의를 베풀고 수고를 마다않고 마음까지 내어주는, 온정이 넘치는 이들이었다. 미스터 김이 말을 이었다.

내게는 가족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축제의 장에 모인 좋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나는 미스터 김이 일러주는 대로 '열사'를 연달아 발음해보았다. 발음하기가 쉽지 않았다. 미스터 김은 참을성 있게 혀의 위치와 입 모양을 교정해주었다.

요울사, 욜사…… '열사'.

마침내 그들을 '열사'로 부르게 되었을 때, 미스터 김도 나도 작게 환호했다. '열사'. 내가 정확히 발음한 최초의 한국 이름이었다. (106-107)


당신도 '열사'예요. 우리처럼요.

알 수 없는 고양감에 젖어들었다. 생애 처음 느끼는 감각이었다. 시끄럽고 이상하지만 뜨거운 이곳에서 나는 분명 그들과 섞이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아버지에게도 이 풍경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나라, 아니 우리의 나라를.

[아버지, 저 지금 한국에 있어요.]

메시지와 함께 사진을 전송하기 전, 나는 미스터 김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열사'들의 함성과 커다란 스피커 볼륨 때문에 미스터 김과 말이 계속 엇갈렸다. 고개를 돌렸다. 광장 한가운데에 설치된 거대한 청동상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여기 어디예요?

그제야 이해한 듯 미스터 김은 큰 소리로 이곳이 어디인지 말해주었다. 번역 앱을 켜고 그에게 한번 더 얘기해달라고 했다. 그의 말이 고스란히 영어로 번역되었다.

이곳은 '이승만 광장'입니다.

아버지에게 사진을 전송한 뒤 메시지를 덧붙였다.

[저 지금 이승만 광장에 있어요. 아주 좋은 사람들과 함께요.] (108-109)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_건축을 소재로 술술 풀어내는 스승과 특성 없는 제자의 이야기의 입담에 빠져들어 읽었고, 앞부분에서는 문득 오래 전 읽었던 「건축이냐 혁명이냐」가 떠오르기도 했다. 건축 위에 어떤사람이 있느냐에 따라 갈려버린 스승과 제자의 길. 다만 구보승의 아버지가 지관이었다는 사실에서 뭔가 더 연결되지 않을까 싶었던 생각은 맥거핀처럼 길을 잃었고, 결말 자체는 밋밋하다고 느껴졌던 작품.


여재화가 기밀을 밝혔음에도 구보승은 무덤덤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태연해 도리어 여재화가 더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혹시 손 떼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그렇게 하게.

여재화의 말에 구보승은 예상과 달리 선선히 답했다. 아닙니다. 그러고 싶지는 않습니다. 수련원이든 고문실이든……

구보승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인간을 위한 공간이긴 하니까요. 저는 끝까지 함께 하겠습니다. 오늘 선생님께 들은 말은 이 자리에서 다 잊고요. (176-177)


공간을 설계할 때는 요령과 경험도 필요하나 그것만을 불가결이라 할 수는 없었다. 불가결은 상상력이었다. 무형의 공간에 선을 더하고 면을 채우고 종국에는 인간까지 집어넣는 일. 그곳에서 살아갈 인간을 위한 자문자답은 기본이거니와 미학과 독창성까지 살리는 일. 그것이 건축가가 갖추어야 할 불가결이었다. 한데 이 취조실은 채우면 채울수록 공허함만 커졌다. 건축의 본질이나 사명, 순수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가라앉고 이제는 세속이나 명욕 같은 불순물만 남았다고 여겼던 여재화였지만, 이 공간과 이곳에서 머무를 이들을 상상할 때면 잊었던 초심이 저변에서 서서히 떠오르는 것 같았다. 건축 위에 사람이 있다고 믿었던 한 시기가 서서히. (180)


제 생각에, 이 공간엔 창을 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피조사자가 유리를 깨고 밖으로 나갈 가능성도 있고 자칫 비명이 새어나갈 수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희망이 생기잖습니까.

희망?

죽고자 하는 사람도 빛 속에선 의지와 열망을 키웁니다. 살고 싶다는 마음을 품을 수도 있고 흔들렸던 신념이 굳건해질 수도 있죠.

여재화 역시 빛이 사람의 마음을 두드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숙고 끝에 창을 넣은 것이었다. 한줌도 안 될 인간다움이나마 지킬 수 있다면 지켜야 했기에. 그것은 취조실에서 조사를 받는 이들을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 공간을 설계하는 여재화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구보승은 달랐다.

취조실에 희망은 불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예의 바르지만 어조에 단호함이 묻어 있었다. 여재화는 생각했다.

내가 알던 구보승이 맞나. 그저 허허실실로 물렁하던 놈이?

당황했지만 냉정을 되찾고 보니 그리 놀랄 일이 아니란 생각도 들었다. 창문을 없애 빛을 막고 소음을 방지하는 건 지극히 합리적인 발상이었다. 곰곰이 되짚어보면 그것이 구보승의 특기였다. 합리성. (181-182)


선생님,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인간에게는 희망이 필요합니다.

여재화는 흠칫했다. 이제껏 구보승이 밀어붙였던 합리와 대척점에 놓인 사고였다. 드디어 인간을 고려하다니. 독학하는 과정에서 건축의 기조를 깨달은 게 아닐까, 어렴풋이 유추하며 여재화는 안도했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인간이 생활하는 공간에 창이 없어선 안 되지.

. 제가 선생님의 뜻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빛이 인간에게 희망뿐 아니라 두려움과 무력감을 안길 수도 있다는 것을요. 그래서 창이 필요했던 건데…… 저는 완전히 반대로 생각했으니까요.

여재화는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구보승은 화색을 띤 채 말을 이었다. 빛이 공간의 형태를 드러내 조사자에게 두려움을 심고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해 무력감을 안길 거라고.

희망이 인간을 잠식시키는 가장 위험한 고문이라는 걸 선생님은 알고 계셨던 거죠? (191-192)


이제 다 늙어버린 남자는 건물의 정초석을 손으로 쓸다 그곳을 떠난다. 구의 집의 ''가 두려워할 구()인지, 구원의 구()인지, 혹은 그저 자신의 성을 딴 것인지 남자는 알지 못한다. 스승은 이십년 전 별세했고, 죽기 전에 따로 만나지 못해 그 뜻을 물어볼 수도 없었다. 뜻을 되짚어보다 남자는 그만둔다. 이제 와 그게 무슨 소용이 있나. (201)



25.9.12.

혼모노완독. 우호적 감정, 잉태기, 메탈을 읽음.



우호적 감정_ 회사를 배경으로 해서 그런가. 여러 면에서 장류진 작가의 단편이 떠올랐던 작품. 겉은 부드럽고 매끄러운 모양을 이룬 것처럼 보이지만 속은 뜨거운 딤섬처럼, 셋의 관계도 사소한 계기로 터지게 되는 이야기. 직장 내의 위태로운 인간관계를 딤섬에 빗댄 것이 참신하다고 느껴졌다.


사람들과 섞여 시시한 이야기를 나누다 딤섬을 입에 넣었다. 입안에서 얇은 피가 터지며 뜨거운 육즙이 흘러나왔다.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들 서로의 그릇에 음식을 덜어주고 술잔을 채워주며 소리 내어 웃고 있었다.

정이 흘러넘치고 우호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그 안에서, 나는 뜨거운 딤섬을 차마 삼키지도 뱉지도 못한 채, 그대로 머금고 있었다. (240)



잉태기_혈육을 어떻게든 내 뜻대로 통제하겠다는 욕망과 집착은 세계에 어떻게든 나의 흔적을 남기겠다는 욕망. 매우 달라 대립하는 것 같지만 미더덕처럼, 연리목처럼 그들의 욕망은 너무나 닮았기에 뗄 수 없는 관계. 세대의 차이가 있지만 욕망의 추함은 한 줄기로 같다는 암시일까.


가만보면 저 양반이나 너나 꼭 닮았어.

뭐가요?

사랑에 갈급해서 제가 받지 못한 걸 죄 자식에게 쥐여주려고 하잖니. (272)


얼어 있던 미더덕이 물에 닿으며 녹진해진다. 한때는 이게 그렇게도 징그러웠지. 저 오톨도톨한 돌기도, 잘린 손가락을 연상케 하는 몸체도, 암수가 한몸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도 닿기만 해도 몸서리치던 때가 있었는데 무뎌진 건지 익숙해진 건지 이제는 담담하다. 핏줄에게 가장 좋은 것만 쥐여주고 싶다는 욕심. 아이 앞에서 한없이 연약해지는 마음. 그런 면에서 시부와 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아닐까. 애정으로 집요하게 얽혀 한몸이 되어가는 관계. (280-281)



메탈_한때의 열정을 간직한 이와 열정이 사그러든 이의 반목과 부서짐. 그들을 한데 묶어주었던 순수한 열정이 사라졌을 때 끈끈해 보였던 관계는 너무나 쉽게 균열이 가고 깨진다. 다만 이런 이야기는 너무 많이 보지 않았나하는 생각.



눈으로 보았던 책의 두께에 비해 페이지는 400페이지가 채 되지 않아서 두꺼운 종이를 썼나, 라는 생각을 하며 조금만 얇고 가벼웠으면 하고 잠시 생각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아파오는 어깨 때문일까, 가방에 읽을 책을 담으려고 고민할 때마다 그 두께와 무게를 먼저 고민하게 되니 책이 얇고 가벼운지가 중요해졌다(물론 이동 중에 읽는 일은 드물지만). 애정하는 에코백에서 백팩으로 갈아탈 시기가 되었나



25.9.14.















챔피언들의 아침식사읽기 시작.


이제는 그 말을 들을 수 없다. 번영 말이다. 그것은 한때 낙원의 동의어였다. 그리고 피비 허티는 자신이 권하는 무례함이 미국적 낙원을 구현하리라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보이던 식의 무례함은 이제 유행이 되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더이상 새로운 미국적 낙원을 믿지 않는다. 나는 피비 허티가 정말 그립다. (19)


들어보라.

트라우트와 후버는 줄여서 미국이라고 부르던 나라인 미합중국의 시민이었다. 아래는 그들의 국가였는데, 진지함을 요구하는 많은 것들이 그러하듯 완전히 개소리였다.


, 그대는 보이는가. 이른 새벽 여명 사이로

황혼의 마지막 미광 속에 우리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환호했던

넓은 줄무늬와 빛나는 별들이 위험한 전투 속에서도 우리가 사수한 성곽 위에서 당당히 나부끼는 모습이?

포탄의 붉은 섬광과 공중에서 터지는 폭탄이 

밤새 우리의 깃발이 건재했음을 증명해주었네

, 말해주오. 성조기는 여전히 휘날리고 있는가 

자유의 땅과 용사들의 고향에서?


우주에는 천조 개의 나라가 있지만, 여기저기 물음표가 찍힌 횡설수설한 노래를 국가로 가진 나라는 드웨인 후버와 킬고어 트라우트가 살던 나라뿐이었다. (25-26)


트라우트는 어떤 사람들은 별나게 여겼을지도 모를 또다른 짓도 했다. 그는 거울을 구멍leak이라고 불렀다. 거울을 두 우주 사이의 구멍으로 여기는 것을 즐거워했다.

거울 근처에 아이가 있는 것을 봤다면 그는 아이를 향해 경고하듯 손가락을 흔들고는 아주 근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 구멍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안 된다. 다른 우주로 빨려들어가고 싶은 건 아니겠지?"

때로 누군가가 그의 앞에서 "실례합니다. 구멍으로 물 좀 빼야겠어요"라고 말했다. 이는 아랫배에 있는 밸브를 통해 몸에서 액체 폐기물을 빼내고 싶다는 의향을 밝힐 때 쓰는 표현이었다.

그러면 트라우트는 "제 고향에서 그 말은 거울을 훔치겠다는 뜻입니다"라고 익살스럽게 대답하곤 했다.

그리고 어쩌고저쩌고.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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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1.















2025 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읽기 시작. 백온유 작가의 반의반의 반, 강보라 작가의 바우어의 정원을 읽음.


반의반의 반_돈의 행방으로 시작되어 드러나는 영실-윤미-현진의 관계와 민낯들. 차가움, 강인함, 기품으로 보였던 영실의 면모를 오천만원의 비밀이 드러났을 때 추함으로 달리 보는 윤미와 현진도, 사람에 대한 믿음 없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곁을 내어주지 않았다가 품위 있는 죽음을 위해 이제야 누군가에게 의지하며 자기기만에 빠진 영실도 찌푸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인생의 굴곡진 순간에 오천만원이 어떻게 자신을 구했을지 가늠해보는 윤미와 현진의 생각에서 느껴지는 모성에 대한 고정 관념왜 엄마/할머니는 내가 그토록 힘들 때 나를 도울 수 있으면서 돕지 않았나와 같은 질문, 누구에게도 다정하지 않았으면서 타인에게 자신에 대한 존중을 바라는 영실의 마음도 훤히 드러나는 것 같았달까.


오천만원은 현진의 꿈에서 자꾸만 어떤 가능성이 되었다. 스무살 현진의 대학 등록금이 되기도 했다가, 스물두 살 때 사정이 어려워 포기해버린 교환학생 프로그램의 유학비가 되기도 했다. 그돈을 보태 작은 원룸 전세를 얻어 독립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도둑맞은 금액의 반의반만 있어도 지금보다는 행복할 텐데. 대학생 때 열 시간씩 아르바이트를 했던 일이나 취준생 시절 용돈벌이를 위해 갔던 물류 창고에서 박스가 떨어져 발등에 금이 갔던 일이 차례로 떠올랐다. 산재 처리가 되어 보상금으로 이백만원을 받았을 때, 현진은 공돈이 생긴 것처럼 기뻤다. 그 돈으로 할머니와 엄마를 데리고 외식을 하면서 뿌듯함을 느꼈던 기억이 자꾸만 소환되었다.

왜 나의 필요를 채워주려 할머니는 희생하지 않았을까. 궁극적으로 현진이 궁금해진 부분은 그것이었다. 할머니는 마땅히 그런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존재가 아닌가. 그러기 위해 지금껏 부지한 목숨이라고 해도 그리 어색하지 않은, 그런 존재. 현진은 억지를 써가며 영실을 열렬히 원망해보았다. (34-35)


바우어의 정원_고통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배우라는 직업에 투영시킨 메타소설처럼 읽혔다. 파란색을 수집하는 새틴 바우어, 사람들 앞에서 고통을 제시하는 역할극의 내담자들, 자신의 고통을 극화하여 제시해 배역을 따낸 은화 모두 어떻게보단 보여주기에 초점을 둔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든 고통의 근원을 찾아 그것을 품고 어떻게표현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시작이 오디션 이후 차 안에서 이루어지는 은화와 정림의 역할극인 것처럼 읽혔다. 정림과의 대화 이후 고통의 시작점으로 나타난 구더기가 들끓는 우유팩이 남기는 강렬한 이미지. 그리고 그때의 불씨에서 다시 시작하겠다는 마음. 이를 표현하는 문장에 담긴 감정의 진함이 인상적이었던 작품.


파란색 사물로 사랑을 표현하는 새가 있다는 거 아세요? 은화는 운전대를 잡은 손을 풀었다가 다시 쥐었다오랜만에 하는 운전이라 그런지 손의 감각이 어색했다호주 동부에 사는 수컷 새틴 바우어 새가 그 주인공인데요꽃잎이나 열매심지어 플라스틱 병뚜껑까지땅에 떨어진 모든 사물 중 파란 것만을 모아 둥지를 꾸미고 암컷을 초대하는 독특한 구애 방식 때문에 '정원사 새'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해요새틴 바우어이름도 참 예쁘지 않나요? 은화는 손가락으로 운전대를 톡톡 두드렸다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새였다그래병원 대기실 책장에 꽂혀 있던 정사각형 판형의 아동용 그림책그 책의 맨 첫번째 장에 새틴 바우어가 있었다암컷을 유혹하기 위해 자신의 깃털 색과 비슷한 파란 물건을 강박적으로 수집하는…… 저기요술 드신 거 아니죠뒤따라오던 여성 운전자가 은화의 차를 추월하며 창문을 내리고 소리쳤다위험하니까 졸리면 어디 가서 눈 좀 붙이세요퍼뜩 놀라 중심을 잡는 은화의 등을 후려치듯옆 차선에서 쇠파이프를 실은 화물차가 날카로운 경적을 울리며 지나갔다. (56)


새틴 바우어가 파랗고 쓸모없는 물건들로 공들여 정원을 장식하듯, 사람들 앞에서 고통의 파편을 훈장처럼 늘어놓던 내담자들. 그들은 오직 그 순간에만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삶에서 상처를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사람들처럼. (64)


주위의 모든 것이 그녀가 조금 전에 행한 작은 복수와 대비되어 무정한 아름다움을 드러냈다. 가로등 아래 춤추는 눈송이들. 창문을 장식한 색색의 전구들. 구세군의 맑은 종소리. 노점에서 풍기는 어묵 냄새. 사람들의 웃음소리…… 눈 내리는 연말의 밤거리를 통과하면서 은화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하나하나 감각했고, 그러는 동안 천천히 비참해졌다. 어린 은화는 배우로서 그 비참함을 잘 간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만큼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그녀 자신만의 것이었으므로, 작고 파란 불씨 하나가 그녀의 정원 안에서 고요히 타올랐다. (81)



25.9.2.

2025 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계속 읽기. 서장원 작가의 리틀 프라이드를 읽음.


리틀 프라이드_자신과 비슷한 처지이면서 자신이 편입되고 싶은 집단의 일원이 내 생각과 달리 말종과 같은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혼란한 마음을 잘 잡아낸 단편이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해설에서도 이야기하는 부분이지만, 내가 동의할 수 없는 생각을 가졌으나 내가 원하는 사회/집단의 공식적인 인정을 이끌어내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인물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망설임의 과정이 끝내 전우가 되기를 거절하는 행동까지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다만 앞의 두 작품과 비교했을 땐 여러 인간 군상과의 마주침과 부딪힘이 깊게 다뤄지지 않고 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밀도가 낮다고 느껴졌다.


오스틴이 골라준 풍미 가득한 커피를 마시던 오후, 나는 언젠가 혜령과 퀴어 퍼레이드를 따라 걷던 날을 떠올렸다. 무척 더운 날이었는데 퍼레이드 행렬은 그늘 한 점 없는 아스팔트 도로로 나아갔다. 우리 앞의 트럭에는 상의를 입지 않은 몸 여기저기에 무지개 모양이나 'QUEER' 혹은 'PRIDE'라고 보디페인팅을 한 남자 여럿이 타고 있었다. 원래는 그 위에서 간단한 공연을 하거나 구호를 외치려던 것 같았는데, 더위 탓인지 그들은 그저 트럭 난간을 짚고 한 번씩 손을 흔들어주며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땀으로 번들거리는, 잘 다듬어진 예쁜 몸을 나는 조금 서글픈 심정으로 지켜봤다. 그때 나는 이미 탑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였지만, 그들처럼 웃통을 벗고 싶지는 않았다. (112)


병원을 나서서 건물 뒤편의 작은 부지, 사실상 흡연 공간이나 다름없는 조촐한 공원에 이르렀을 때 나는 그 쇼가 과거의 우리가 얘기했던 것처럼 정말 혁신적이고 대안적이었는지 생각에 빠졌다. 기꺼이 옷을 벗는 사람들과 그들을 향해 따뜻한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을 떠올리자 걷잡을 수 없이 기분이 나빠졌다. 혜령이 말하곤 했던 '너무나 집요한 생각'을 다시 시작한 것 같았다. 그러다 문워크 춤을 췄다는 트랜스맨을 두고 혜령이 한 말을 되새기는 데 이르렀다. 혜령은 그가 아주 멋졌다고 말했지만, 그렇지만, 그에게 매혹되었던 건 아니었다. 그리고 아마 내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그 사실을 아주 천천히 받아들였다. 환자복을 입고 담배를 피우고 거리낌없이 침과 가래를 뱉는 남자들 사이에서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123-124)



25.9.3.

2025 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계속 읽기. 성해나 작가의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 성혜령 작가의 원경, 이희주 작가의 최애의 아이를 읽음.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_읽는 동안 지젤 샤피로의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가 계속 떠올랐던 작품(괴물들구입했을 뿐 아직 이 책은 가지고 있지 않다). 시의성 있는 글감을 던지고 생생한 인물의 고뇌와 있을 법한 핍진한 사건들을 펼쳐놓아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하는 서술 방식은 혼모노를 읽고 느꼈을 때와 비슷했다. 물론 작품 속 감독의 윤리적 문제는 현실에 비하면 약과였지만다만 길티 플레저를 감각하고 원하면서도 계속 고뇌하던 화자가 그 시기를 통과한 이후의 마무리는 소소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내가 자극에 길들여져서 그런 걸까. 그렇지만 수미상관의 구성과 결말의 감각이 연상시키는 모럴은 제목과 잘 어울렸다.


나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고 가끔은 징그럽기도 했다. 어떻게 작품을 본 적도 없으면서 '안 봐도 비디오' 따위의 평을 내리는 걸까. 어째서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을 나락으로 보내려 안간힘 쓰는 걸까. 도대체 왜 사실관계도 명확하지 않은 사건을 멋대로 공론화하고 거짓말까지 얼기설기 덧붙여 온갖 데로 퍼 나르는 걸까. (144-145)


난 누가 듣는 음악, 좋아하는 영화 리스트만 봐도 어떤 유형인지 예측 가능하거든? 근데 너는 뭐랄까. 난감하달까…… 아니 지루하다고 해야 하나. 모럴이 없으니까.

그 사람과 헤어지고 돌아가던 길에 모럴의 뜻을 검색해보았다.

'인생이나 사회에 대한 정신적 태도.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의 구분에 관한 태도'

뜻도 모르고 지껄인 게 분명했지만, 내게 적용해보면 완전히 잘못 쓴 것도 아니었다. 그때까지 나는 무엇이 좋고 싫은지, 옳고 그른지 깊게 따지고 들지 못했으니까.

나에게는 태도랄 게 없었다.

그 사람의 허울뿐인 고상함이 지긋지긋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 사람과 있을 때 체감되는 나의 무지와 단순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147)


나는 내심 오영이 항변해주길 바랐다. 무슨 말이라도 당당히 해주었으면 했다. 하지만 오영은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만 볼 뿐이었다. 총대 옆에 앉은 학생도, 프리랜서 둘도 마찬가지였다. 스크린 속에서 상을 받은 누군가가 이야기하는 소리가 웅얼웅얼 들려왔다. 불편한 고요가 흐르는 와중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 걸까. 왜 모두가 제일 아닌 양 좌시하는 걸까. 사랑하면…… 사랑하면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171)


김곤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죄송합니다. 거듭 말하며 정수리가 보일 정도로 깊이 수그렸다. 그리고 그 순간……

.

내 안에서 무언가 터졌다. 매캐한 연기가 사방을 감싸듯 눈앞이 뿌예졌다. 땅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왜 이러지. 생각을 정리할 겨를도 없이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박수가 잦아들 때까지 허리를 굽히고 있던 김곤, 암전과 퇴장. GV는 단정히 마무리되었다. 통속적이고 보편적이어서 누구나 수긍할 수밖에 없는 영화의 엔딩처럼. (177-178)


방금 전의 일들이 다 허구 같았다. , 무언가 터지던 순간도 그 순간의 감정도 이상하리만치 현실감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정말 허구 아닐까 하는, 내가 실패한 영화를 한 편 본 게 아닐까 하는. 별 반 개도 아까울 만큼의 너절한 서사. 치덕치덕 처바른 클리셰. 질문도 남지 않고 더할 말도 없는 싸구려 엔딩. 감독이 지고 만 영화. 아무도 보고 싶어하지 않는 영화. 그렇게 지독히도 못 만든 영화를 본 게 아닐까 하는 생각.

그런데 왜 생각할수록 더…… 허무해질까. 모든 게 흠 없이 온전한데 왜 나만 팔다리가 떨어져나간 것처럼, 살점이 다 뜯겨 너덜너덜해진 것처럼 괴로운가. 왜 이리 지독히도 헛헛한가. (178-179)


망설이다 반석 위에 앉아 포즈를 취했다. 호랑이의 등에 손도 얹어보았다. 상황에 익숙해지자 골을 뒤흔들던 악취도 서서히 사그라드는 것 같았다. 호랑이가 불편한 듯 근육을 움찔댈 때마다 척추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어쩐지 죄를 저지르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흥분되었다.

그건 언젠가 느껴본 적 있는 감각이었다. 죄의식을 동반한 저릿한 쾌감. 그 기시감의 정체를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지독하고 뜨겁고 불온하며 그래서 더더욱 허무한, 어떤 모럴

떨쳐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제는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의 말처럼, 이미 일어난 일은 없던 일이 될 수 없으니까. (183-184)



원경_인생에서 갑작스레 다가온 죽음의 그림자를 감지한 이가 과거의 옛 사랑에 기대려 하지만 결국 소외되는 이야기.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는 신오를, 유방암 가족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혼자만의 상상 끝에 원경과 헤어지기로 결심한 신오를 보며 한숨을 푹푹 쉬며 읽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것을 통제하려 했던 신오가 암에 걸렸다는 것이 아이러니.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여러 문제들과 그 사람이 가지고 올 불확실한 미래까지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는 일”(201)을 받아들일 수 없는데 옛 사랑이 어떻게 두려움의 탈출구가 될 수 있을까. 있지도 않을 것 같은 금괴를 찾는 세 여성의 모습에선 삶이 보이고 신오에겐 보이지 않는 것도 삶에 대한 태도 때문이 아닐지.


원경을 떠올리면 물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채워진 컵이 생각났다. 처음 만난 식당에서 원경이 컵에 물을 따라줬을 때 신오는 속으로 작게 감탄했다. 어떻게 물을 저렇게 깔끔하고 적당하게 따를 수 있지. 원경은 그 물컵처럼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신오는 원경처럼 적당한 사람을 만나본 적 없었다. 전에 만났던 여자들 중에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전화해주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사람도 있었고, 신오와 절대 같은 화장실을 쓰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었다. 신오는 자신이 매우 평균적이고 상식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과 잘 맞는 사람을 찾기가 그토록 어렵다는 것에 매번 놀랐다. 원경은 달랐다. 원경의 상식 수준과 감수성의 정도는 신오의 신경에 거슬린 적이 없었다. 잔인한 범죄, 특히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 뉴스에 과하게 방어적으로 반응하지도 않았고, 어떤 드라마나 특정 배우에 지나치게 몰입해 신오를 당황하게 하지도 않았다. 이런 사람이라면 함께 살아도 좋겠다고 신오는 생각했다. 누구를 만나면서 처음 해본 생각이었다. (200)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여러 문제들과 그 사람이 가지고 올 불확실한 미래까지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라면, 신오는 지금까지 누구도 사랑해본 적이 없었다. 앞으로도 누군가를,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사랑하기란 불가능할 것이었다. (201)


이모님과 보살님이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원경도 한편에 서서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신오는 눈을 감지 않았고 손을 모으지도 않았다. 똑바로 바라보고 싶었다. 저 희고 빛나는 뼈들을. 이모님과 보살님과 원경은 구덩이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신오는 그 안으로 끌려들어갈 것처럼 몸을 기울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신오는 이 여자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이들은 모두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자신은 그렇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신오는 깊은 구덩이에 빠진 듯한 외로움을 느꼈다. (217)


제목 '원경'은 이러한 맥락에서 신오에게 세 가지 멀어짐을 선사한다. 하나는 그를 일상으로부터 떨어뜨려놓는 근원인 악성종양(原境), 다른 하나는 이제는 멀어졌지만 한때 가장 가까운 타자였던 전 연인('원경'), 그리고 또하나는 신오가 그녀에게 다시 다가섬으로써 먼 풍경(遠景) 속으로 떠나버리는 세 명의 여자들이다. 원경은 신오가 그녀들과 세계로부터 어떻게 멀어지게 되는지를 초점화한다. 작품 전체를 휘감는 불안은 오로지 신오만의 것이다. 자신에게 닥친 불안을 그는 과연 제패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서사의 관건이다. (222)


화면 전체를 신오의 이야기로 가득 채우던 소설이 서사의 진행과 함께 그의 얼굴을 점점 작게 담아내다 끝내 구덩이 옆에서 한없이 작아진 채 침묵하는 모습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데크레셴도의 악상이다. 그에 반해 서사의 진행과 정비례하여 커지는 크레셴도의 불안은 세계의 엔트로피 그 자체이며, 엔트로피를 거스를 수 있는 존재가 전무하다는 점에서 이는 난공불락의 적이다. 불안이라는 거대한 적, 그것이 다름 아닌 인물의 내부에서 솟아난 것일 때 소설이 싸우는 대상은 결국 자기 자신이 된다. 가령, 신오의 배에서 암이 발견되는 것은 물론 하나의 사건incident 이지만 그것은 단지 신오라는 캐릭터를 형성하는 세부 조건에 가까우며 세계와 소설 간의 갈등을 유발하는 핵심 사건event은 아니다. 소설이 전면화하는 사건은 신오가 삶에 관한 실존적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 그러니까 불안이라는 적의 출현이다. (222)



최애의 아이_팬심의 극단까지 상상하고 가보는 작품이라고 해야 할까. 최애의 아이를 내가낳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건드리는 것은 욕망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 아이돌 산업을 둘러싼 추한 욕망과 재생산의 문제까지. 한껏 떠오르는 듯했던 우미가 추락하는 계기와 과정은 익숙한 느낌이 들었지만 마지막 결말 처리 방식은 작품집 전체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다. 팬심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 극단으로 나아갔기에 이렇게 귀결될 수밖에 없었던 걸까.


이 사랑이 처음은 아니었다. 마음을 주는 데 있어 우미는 중고품이었다. 나 진짜 다 줬어. 아까울 거 하나 없는데 못 줄게 뭐람? 있는 거 없는 거 닥닥 긁어 주다보면 다 준 것 같아도 또 차오르는 순간이 있었고 그럼 또 줬다. 사랑을 받는 것보다 하는 게 좋아서 계속 줬다. 어느 날엔 내가 이 사랑을 접는 게 죄가 되겠구나. 이렇게 마음을 주다가 그만두면 그 사람의 기둥이 무너지겠구나 싶어 스스로가 무서워질 정도로 줬다. 우주적 엔트로피의 측면에서 못할 짓을 한 거지. 우미는 생각했다. 어느 평행 우주에선 돌이나 미니 다육이인 유리가 펙 하고 죽었을지도 모를 힘이었다. 비록 이 우주에서 유리는 이런 사랑은커녕 우미의 존재조차 모른다 해도. (240)


이렇듯 이 소설은 신자유주의적 성공 신화를 루키즘 버전으로 답습하여 아름다움이 돈이 되는 자본의 규율에 대한 사회의 내면화와 그 극단에서 무참히 파괴되는 인간의 존엄을 고민하도록 이끈다. 동시에 덕질 문화가 소비주의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복잡다기한 영역임을 알게 한다. (281)


이희주에 따르면 아이돌은 사랑받을 요건을 일반인보다 많이 보유하고 있어 사랑에 미숙한 이들마저 "가장 쉽게 마음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는 일부 사람들로 하여금 아이돌을 섣불리 "공공재"(268)처럼 인식하게 하는 복잡한 특성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엄연한 노동자로서의 "아이돌의 인권을 보장"(250)할 것을 적극 요구하면서, 아이돌 인권 보호의 필요성 또한 환기한다. 성장 서사마저도 "감정적인 연출"(266)을 입고 판매되는 것을 넘어, 아이돌을 낱낱이 환금 가치로 환원하다못해 정자마저 판매하는 이 미래는 나날이 상품화되는 아이돌의 인권 실태를 조명하고, 아이돌 산업의 핵심을 이루는 극단적인 감정 노동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무엇보다 이러한 서사가 가능하게 된 기반에는 그간 남성중심적 섹슈얼리티 규범 속에서 '씨받이' 취급을 받으며 모욕당해온 여성 인권의 역사가 자리하고 있다. (295)



25.9.6.

2025 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완독. 마지막 심사평까지 읽기를 마쳤다.


~~물결치는~~떠다니는~~~_근래의 젊은작가상의 마지막 작품에서 이전까지의 서사와 다른 방식을 시도하는 소설을 자주 만나는데, 이 작품도 그랬다. 제목이 왜 저런가에 대한 답은 찾지 못했으나, ‘빙의라는 소재에서 출발하여 한쪽에는 지구의 탄생 설화가 있고(인류가 멸망한 뒤의 지구인지, 태초의 지구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한쪽에는 기생 쌍둥이로 태어나 항상 다른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는 동생을 보며 살고 있는 K가 있다. 자생체와 기생체가 구분되지 않는 지구를 보면서, 그 설화를 들으며 자신을 돌아보는 K를 보면서 주체에 대한 생각,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관념들에 균열을 내는 목소리가 상상되었다. 이제 찾아보니 재작년 마지막에 실린 작품도 현호정 작가의 것이었군


부랑자는 천한 말이 아니라고 그는 말했다. 둥실둥실 떠다닌다는 뜻의 ''에 물결친다는 ''이니 해파리 같은 거라고, 해파리가 천하냐고 따지듯 물었다. (301)


그러다 누군가 물에 잠긴 그대로 야훼에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입에서 거품이 뿜어져 나오는 버글버글 소리에 여. . . . 하는 새된 음성이 군데군데 조그맣게 섞여들었습니다. 세계가 바로 이곳에 도달하도록 행로를 정한 서구 자본주의의 일등 가부장이 누구인지 혹시 아냐고 그 사람에게 아무도 안 물었습니다. 어느 하나 비웃지도 않았습니다. 몇몇은 몰래 따라 기도하기까지 했는데 그들의 입에서도 거품이 나와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또 아무도 안 웃었습니다. 잘게 찢은 솜 같은 게 흰나비떼처럼 몰려든 건 그때였습니다.

"만나다!"

기도하던 이가 외치더니 덩어리 하나를 먹었습니다.

"뭘 먹기도 전에 맛나대." (305)


K가 쌍둥이, 특히 쌍태아의 발생 과정에 집착적인 흥미를 갖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한쪽이 다른 한쪽과 어디까지 공유할 수 있는지, 어디부터 나뉠 수 있는지, 그것을 누가 결정할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다른 태아를 흡수하며 DNA가 섞여 두 가지 이상의 자아를 가지게 된 태아의 경우를 '평범한' 다중인격장애와 구분한 연구만 해도 그랬다. 자아랄지 인격의 근원이 염색체뿐일까. 그것의 유무로 내 몸속 타자의 혼과 평범한 정신질환을 구분할 수 있을까. 정신이 오직 염색체에만 깃들 이유가 있을까. 혼에게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상황에 맞춰 변화에 적응하며 진화적 시도를 이어간 것이 다윈의 핀치만은 아니었을 거다. 영혼들은 이어지기 위해 무엇에든 들러붙지 않았을까. 기억이나 노래, 그림, 냄새, 몸짓…… 어디에든 매달려 여기까지 왔을 거다. 그러나 그런 얘기는 연구 자료에 나오지 않았다. K는 기대 없이도 계속 공부했다. 영어로 된 논문과 징그러운 사진들을 살피다보면 꾸물꾸물 동생이 다가와 품을 파고들었다. (311)


"사는 게 괴롭고 외로울 때요. 나는 내가 지구라는 몸에 잘못 실린 혼이라고 생각했어요."

K는 다음 근무자를 위해 카운터를 정리하며 말했다.

"이 세상은 내 터전이 아니다. 이 신체는 내 실체가 아니다. 이번 판은 연습이다. 이렇게 구차한 시간들이 진짜로 내 인생은 아닐 거다…… 뭐 그런 식으로 생각한 거죠. 그런데 방금 이야기를 듣고 나니까 이제는 진짜 내가 다른 어딘가에 있을 것 같지도 않아요. 다만 참 궁금하네. 지금 여기 있는 이것은 무엇일까. 내가 아닌 것만은 확실한데요." (319)


미래는 가능성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다. 실체가 있는 모든 시간은 자신을 미래로부터 분리해 현재로 드러낸다. 그러나 결합이 있어야 분리도 있다. 물결치며 갈라지는 미래 사이로 굳어지는 현재에 발을 디딜 때, 사건들은 단단히 뭉쳐 나를 견딘다. 영혼이 몸에 발을 담그듯 저 삶들은 이 삶 속에 끊임없이 뛰어든다. 어쩌면 나는 결합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결합을 결정하는 쪽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쪽도 아닌, 결합 자체일 뿐일지 모른다. 최소한 나는 그것을 통해 여기 있었다. 그리고 나를 있게 한 모든 결합은 불균형적이고 비대칭적이며 무엇보다도 비확정적이었다. (320)


개연성의 압박을 덜어낸 내화는 재해를 일으킬 자연마저 사라지고 폐허의 땅까지 물속으로 완전히 가라앉은 디스토피아를 향해 속도감 있게 질주한다. 빠른 전개가 혼잡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밈meme과 자조적인 어투의 적절한 배합으로 생겨난 유머와 "하고많던 생물에 미생물 무생물" "차례차례 차차 잃고" "느른히 늘어져"(299), "퍽이나 떡이나" (304)와 같이 유사한 발음을 활용한 리듬감 있는 문체 덕일 테다. 이러한 요소들은 전위적인 상상력으로 그려낸 종말 이후의 세계를 읽는 이들이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다. (328)


"근대적 개인은 타자의 의지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행위능력을 부여받은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에 신체나 정신의 일부를 공유하는 분신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절대적인 위협이자 죽어야 할 적"으로 간주되어 "근대 이후 대개의 문학적 서사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었던 데 반해, 현호정의 소설에서 분신은 친밀한 존재로 그려진다. 라즈베리 부루(한 방울의 내가), 단명소녀 투쟁기(사계절, 2021)와 같은 작품이 서로 다른 존재의 상호 의존을 긍정적인 것으로 사유하게 했다면, 이 소설은 신체를 명확히 구분할 수 없는 기생 쌍둥이를 제시하여 분신의 개념을 확장한다. 이는 자립성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근대의 개인관을 재사유하게 할 뿐 아니라 한 인간이 하나의 신체를 독립적으로 소유한다는 근대적 신체관까지 의문에 부친다. 기생 쌍둥이 현상은 태아 오십만 명 중 한 명의 비율로 발생하는 기형적 사례로 알려져 있지만, 기생쌍둥이가 한 세대 전체에 나타나는 세계에서 정상과는 다른 모양새를 가리키는 '기형'이라는 명칭은 부적절해진다. "상대적으로 더 크고 정상적인 몸을 가진 아기를 '자생체', 더 작고 비정상적인 몸을 가진 아기를 '기생체'"(309) 부르는 관습 역시 기생체들의 몸체가 자생체보다 커지고 활동도 왕성해짐에 따라 둘의 위상이 바뀌는 시점에 이르러서는 무용해진다. (331-332)


시간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고 공간 역시 끊임없이 유동하는 것이라면, 나라는 자아는 여러 존재가 관계 맺고 여러 시간대가 지나는 하나의 장일 것이다. 현호정의 이 소설에 따르면, "미래는 가능성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실체가 있는 모든 시간은 자신을 미래로부터 분리해 현재로 드러낸다" (320). 그렇다면 여기에 있다는 것, 현재에 살아 있다는 것은 수많은 가능성의 물결을 가르는 찰나의 발디딤으로만 확인된다. 여러 시간대의 존재가 내 안에 겹겹이 흐르고 있음을 인지할 때야 비로소 나의 존재가 선명해지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다른 존재들과 결합하여 변화될 가능성을 지닌, 표류하는 몸이다. (336)



심사평 읽기.


서장원의 리틀 프라이드는 잊기 힘든 결말을 가진 전작 해피 투게더가 그랬듯 이번에도 퀴어적 욕망의 사각死各 중 하나를 또렷하게 비춘다. 일라이 클레어의 망명과 자긍심』만이 아니라 자기-사랑의 두 유형에 대한 루소의 구별도 떠올리며 읽었다. 자기를 지키는 데 쓰이는 자연적 '자애심amour de soi'과 타인과의 비교로 발생하는 사회적 '자긍심amour-propre'은 다르다는 것. '퀴어 프라이드'엔 후자도 필요하다. 나만 나를 사랑하면 되는 게 아니다. 타인도 나를 사랑해야 하고, 다른 누구보다 더 나를 사랑해야 한다. 퀴어도 예외가 아닌 게 아니라 퀴어라서 더욱 그렇다. (그래서 작중 오스틴은 ''와 비슷하지만 다르고, 혜령은 옳지만 틀렸다.) (351)


클레어 데더러의 『괴물들』은 (본인의 말에 따르면) 괴물이 된 남성 예술가의 목록을 제시하기보단 그들의 팬에 대해 고민한 결과물인데, 이 책의 국역본보다 먼저 나온 성해나의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는 같은 질문을 훌륭하게 던진 선례다. 촬영 중 아역 배우를 학대한 감독을 계속 추앙해야 하는가. 이 소설의 미덕 중 하나는 계속 추앙할 수 있는 사람과 이젠 그럴 수 없는 사람 사이의 차이, '겪은 만큼 분노하는' 그 차이의 존재가 공동체의 윤리적 난제임을 알고 있다는 데 있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임신한' 주인공의 회고적 성찰을 다루는 '재고再考, revisited' 유형의 에필로그는 그래서 적절하다. (352)


이 소설이 의심이라는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 익숙한 직업적 선입견에 기대고 있다는 점이 걸렸다. 요양보호사 수경에 대한 현진의 의심과 영실의 믿음이 인물들이 맺는 관계나 감정의 디테일보다는 특정한 직업의 조건에 의존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웠다. 이 소설에서 노년 여성은 속아넘어가는 사람, 요양보호사는 신뢰할 수 없는 사람으로 설계된 구조는 흔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믿음과 의심이란 어떤 인물에게 부착되거나 어떤 구조에 배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점차 쌓였다가 휩쓸리는 것, 증발했다가도 부지불식간에 고여있는 것, 끈적하게 들러붙었다가도 너덜너덜해지는 것, 그러니까 관계 속에서 미세하게 변화하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355) 


이 소설의 질문은 "아이돌을 멀리서 좋아하기만 하면 되지 왜 그의 아이까지 낳으려고 해?"가 아니라 그 반대를 향한다. "아름다운 것을 가지고 싶은데 그걸 내가 낳는 건 왜 안 돼?" 이것은 성씨를 물려주거나 유전자를 퍼뜨리려는 욕망이 아니라 자신이 아는 가장 반짝이는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에서 임신은 신성한 유전학이나 자애로운 가정학이 아니라 고도로 추상화된 미학의 영역이다. 그런데 가족을 꾸리거나 국가 인구를 늘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감히 아름다움을 누리기 위해 임신을 한다고? 합계출산율이 0.7대인 나라에서 조건 맞는 대로 낳아도 모자랄 판에 유전자를 미적으로 줄 세우면서까지 말이다. 애초에 거대한 알레고리인 이 소설은 이런 상상이 가닿을 디스토피아(국가주의적 우생학과 자본주의적 루키즘의 결탁)까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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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26.

















작은 일기읽기. 이토록 실망하고 한탄하게 만드는 세계를 더욱 기민하게 매일 감각하면서도 가능성을 믿는 것이, “이 세계를 깊이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곰곰이 생각했다. 세계가 못되처먹었다고 말하기는 너무나 쉽지, 라고 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하지만 이대로 부서지는 게 좋겠다, 이런 사회, 하고 생각할 수가 없다. 많은 이들이 애쓰고 있고, 너무 많은 이들이 어렵고 아프다. (153)


희망을 나는 믿는 것 같지 않은데 그럼에도 세상을 보는 마음엔 늘 모종의 믿음이 남아 있고 이것이 뭘까, 이것을 다른 이들은 뭐라고 부를까,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가능성. 너무 평범한 말이라서 그 말을 발견하는 데 오래 걸렸다. 가능성을 믿는 마음, 그걸 믿으려는 마음이 언제나 내게도 있다. 언제나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가능성만을 바랄 수 있을 뿐인 세계는 얼마나 울적한가. 희망을 가지고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기가 너무나 어려운 세계, 그 어려움이 기본인 세계는 얼마나 낡아빠진 세계인가.

너무 낡아서, 자기 경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세계.

다만 이어질 뿐인.

 

세상은 죽음을 좋아하지 않는다. 세상은 삶도 좋아하지 않는다. 세상은 세상만을 좋아할 뿐이다.*

 

하지만.

 

"그는 열렬히 그러나 저급하게 사랑한다"는 말은 가능하다. "그는 깊이 그러나 저급하게 사랑한다"는 말은 불가능하다. **

 

내가 이 세계를 깊이 사랑한다. (171-172)

 

* 크리스티앙 보뱅 환희의 인간, 이주현 옮김, 1984BOOKS 2021, 69.

** 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윤진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1, 8.


문학주간 2025 개막 행사에 황정은 작가가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전신청을 할까 생각했었는데, 가고 싶었지만 그날 내가 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와중에 매진이 되어 있었다. 정말로 오랜만에 만날 수 있는 기회였기에 아쉽지만, 언제 올지 모를 다음을 기다리며...

 


25.8.30.

작은 일기완독. “불법 계엄이라는 국가 폭력에 관통당한 경험(186)을 이렇게 끓어오르는 단단한 문장으로 기록해준 것에 대한 감사함과, 지나온 일들을 다른 의미에서 잊지 않겠다는 마음가짐, “각자의 자리에서 어떤 정체성으로 어떤 부침을 겪고 있든그것을 받아들이고 품을 줄 아는 마음의 품을 지닌 채 함께 저항하겠다는 다짐을 새기며 책을 덮는다. 다음에는 작가의 소설을 만나고 싶다는 바람과 함께.

 
















단테읽기.

 


25.8.31.

단테완독. 피렌체를 보기 전에 다 읽었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과, 그러기에 단테가 피렌체에 있었던 기간은 너무 짧았구나라는 생각을 동시에 했다. 신곡의 내용이나 단테의 전기를 구체적으로 다루기보다는 단테의 여정을 따라 훑고 가는 느낌. 그렇지만 신곡의 이름만 알고 있었던 사람의 입장에서 작품이 얼마나 단테의 삶과 닿아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 책이었다. 그 정도로 감상은 마무리하고, 신곡을 언제 읽게 될지는


어려서 잠시 불린 이름이기는 하지만, 이탈리아어로 '지속하다''견디다'의 뜻을 지닌 두란테는 단테의 삶을 정의하는 데 딱 맞는 단어다. 그는 현실의 상황에 정면으로 대결하는 가운데 삶을 이어갔고, 신곡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지옥의 끔찍한 고통의 현장을 참고 견뎌 연옥에 도달하고 천국에 오른다.

한편 '알리기에리'라는 성의 기원이 된 라틴어 '알리게르aliger''날개 달린'이라는 뜻이다. 날개의 이미지는 단테의 글에서 자주 등장한다. 예컨대 연옥에 오른 단테는 독수리의 발톱에 채여 하늘로 오르는 꿈을 꾸면서 천국의 섭리와 은총의 신비한 힘이 이끄는 상승의 힘을 느낀다(연옥」 928~30). 참고 견디는 상승의 힘은 날개에서 나온다. 그는 "내게 빛과 희망을 주었던 / 길잡이를 따라서 강한 욕망의/깃털과 날렵한 날개로 날아가야 한다"(연옥428-30)라고 다짐한다. "날개penne"는 펜과 더불어 사랑의 의미도 지닌다. 이름과 성이 잘 어울려 구원을 꿈꾸는 작가 단테의 기본 모습을 그려준다. (38)


내세 여행기 『신곡』을 채우는 것은 본 곳에 대한 기억과 보지 못한 곳에 대한 상상이며, 또 그 둘을 왕복하는 단테의 펜촉이다. 단테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허세를 부리지도 않으며 강요하지도 않는다. 본 것을 보았다고 말할 뿐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내세는 상상보다는 비유로 이루어진다고 해야 한다. 발명으로서의 상상보다는 다시 말하기(또는 재현)로서의 비유, 전자는 없는 것을 있게 하는 반면, 후자는 있는 것을 다시 (다른 방식으로) 있게 한다는 차이가 있다. 우리가 신곡에서 읽는 상상의 내세는 단테가 직접 본 현실의 비유이자 재구성이다. (61)



청신체는 글자 그대로 '맑고 새로운 문체'라는 뜻이다. '돌체dolce'의 뜻은 달콤함과 부드러움이지만, '맑다'는 뜻의 ''으로 옮긴 것은 무난하다. '돌체'의 함의는 깊고도 넓지만, 사랑의 태도로 요약할 수 있다. 가슴속에 들어온 사랑은 부드럽고 달콤한 말을 속삭인다. 마음을 모아 그 말을 받아쓰면 그것이 곧 시가 된다. 이것이 청신체 시인의 시작 방법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내면에 들이는 일이 출발이고, 마음을 모으는 일이 다음이며, 받아 말하고 쓰는 일이 최종이다. 마음을 모으고 받아써야 할 사랑. (77)


그렇게 마음에서 나와 언어로 드러나는 시는 새로운 내용과 형식을 지닌다. 새로운 내용이란 지금까지 말한 지성의 영혼을, 새로운 형식이란 '고귀한 속어volgare illustre'를 가리킨다. 단테는 중앙의 보편언어였던 라틴어가 아니라, 지역의 특수 언어였던 이탈리아어로 창작했다. 학술서와 편지는 라틴어로 썼지만, 내면 표현에 집중하는 창작에서는 이탈리아어를 선택했다. 라틴어는 책을 통해 배우는 문법적 언어인 반면, 이탈리아어는 어머니의 음성이 그대로 젖어들어 본능처럼 새겨진 언어였다. (78)


단테는 인간 언어의 가능성과 한계에 동시에 직면했다. 그는 스스로 주변의 사물과 맺는 무매개적인 관계에서 언어를 자아냈다. 대상과 그 대상을 실어 나르는 언어가 있을 뿐인 지극히 단순한 구조에서 그의 문학이 출발한다. 이런 생각 위에서 나는 단테의 문학이 비유의 기반 위에 서 있고, 그의 언어가 상징성의 영역에 들어앉아 있다는 전통 주류 비평에서 벗어난 가느다란 지류를 탐사하고자 했다.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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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21.

















『작은 일기』 읽기. 「입에서 나오는 말」 챕터를 읽었다. 쭉 읽다가 에에올에 대한 감상을 다룬 부분의 한 페이지 전체를 밑줄로 채웠다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나를 빨아들이는 듯했던 영화의 장면장면과 마지막을 보며 지금 우리에게 너무나 필요하지만 식상할 수 있는 메시지를 이렇게 놀라운 방식으로 전달하는 것에 감탄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이제 곧 4월이고 5월이다. 곳곳의 이팝나무에 꽃이 필 것이고 그 향기에 홀려 긴 밤 산책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올 것이다. 파주로 와서인지 몇해 전부터 이팝나무를 자주 보았다. 박근혜정부 때 가로수로 자주 심었다는 이야기를 작년에 들었다. 그에겐 그의 아버지가 '국민을 생각하는 마음'을 상징하는 나무였다고 한다. 나는 박상진 선생의 『궁궐의 우리 나무』에 실린 내용으로 이팝나무를 기억하고 있었다. 흉년에 굶어 죽은 아이들을 묻은 땅 근처에 밥 대신 심었다는 나무. 만개한 꽃송이 무리가 쌀밥을 닮아 '이팝'이 되었다는 나무. 정말 그랬다면 그 옛날, 꽃향기가 온 마을을 그득 채우는 때마다 어른들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나. 작년에 나와 이런 대화를 나눈 허태임 선생은 4, 돌배나무 꽃이 질 때를 세월호가 가라앉은 때라고 말했다. "4"보다도 먼저 입에서 나오는 말. 어떤 이들에게는. (128-129)


찜찜함을 덜어 보려고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2022를 연달아 보았다. 제목을 한글로 고스란히 옮긴 데에는 피치 못할 이유가 있을 거라고, 분명 맞춤한 사자성어가 따로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엔딩에 떠오른 자막으로 그 말을 보았다. 천마행공天馬行空.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이를 이르는 단어라는데, 나중에 찾아보고서야 그 뜻을 알았고, 천마행공의 천天을 천千이라고 오독했다. 천마리 말이 가는 곳. 다중우주가능성를 이르는 말이자, 한 사람 안의 허무를 이겨내기 위해 그 정도의 분투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일개인의 내면에 도사린 허무란 그렇게 만만하고 하찮은 것이 아니야, 하고 생각하면서. (133-134)


나는 이 모든 걸 목격하러 이 세계에 왔다.

가급적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이번 한번뿐이니까 올 앳 원스.

삶의 목적과 의미를 '목격'에 두고 산 지 꽤 되었다. 태어나 보고 듣고 겪는다. 이걸 하러 나는 여기에 왔다. 아주 작은 무수한 입자들로 흩어져 있다가 어느 날 인간이라는 물리적 형태로 세상에 출현해, 기적적으로 출아해, 세상을 겪고 세상의 때가 묻은 채 다시 입자로 돌아갈 것이다. 세상을 관통한, 그리고 세상이 관통한 더러운 경험체로서.

 

우리가 서로를 목격하고 있으니 각자의 방식으로 다정해져야 해. 나의 목격과 나를 목격하는 다른 목격자를 위해서라도 가급적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이번 한번뿐이니까 올 앳 원스. (135)



25.8.22.
















『급류』 읽기. 해솔과 도담의 운명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큰 줄기를 이루는 이야기. 전형적이지만 풋풋하게 시작하는 듯했던 서울 아이와 산골 아이의 사랑은 사소한 실수로 비롯된 비극적인 사건으로 갈라지고 헤어져서도 서로를 그리워하다 다시 만나 불 같은 사랑을 하고전형적인 이야기라고 느껴지지만 감정적으로 진하고 강렬한 이야기 덕분에 몰입하여 읽게 된다.

 


25.8.23.

『급류』 완독. 출간되었을 때 꽤나 화제였던 책이어서 이름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읽으면서 왜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았는지 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도서전에서도 새로운 표지를 입고 나와 있었지만 사지 않았었는데영화와 같은 장면 묘사, 절절한 감정 묘사, 두 인물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정열과 사랑 등이 작품을 끝까지 읽게 만들고, 마지막에 도담과 해솔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적 울림이 사람들을 끌어당긴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나에게는 이 모든 것이 너무 뜨거웠고, 그래서 한 발 멀어지는 듯한 느낌이 있었고, 내가 요즘 소설을 읽으면서 바라는 이야기는 이런 것이 아닌데라는 생각을 떨쳐내기 어려웠다는 것은 기록해두어야 할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재미없게 겨우 읽었다는 뜻은 아니지만…(그러기엔 이틀 만에 다 읽었다) 충분히 잘 쓴 작품이고, 인물 간의 인연을 적절하게 얽고 풀면서 독자를 이끄는 소설이라는 생각을 하며 읽었다.


도담에게 사랑은 급류와 같은 위험한 이름이었다. 휩쓸려 버리는 것이고,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 발가벗은 시체로 떠오르는 것, 다슬기가 온몸을 뒤덮는 것이다. 더는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왜 사랑에 빠진다'고 하는 걸까. 물에 빠지다. 늪에 빠지다. 함정에 빠지다. 절망에 빠지다. 빠진다는 건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100)


알 것 같았다. 해솔이 그날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자신을 보는 해솔의 투명한 눈동자를 바라보면 그 안에 슬픔이 있었다. 미안함이 있었다. 어쩌면 원망의 눈빛도……

가족의 죽음을 눈앞에서 겪은 두 사람은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진실로 체감했다. 이 삶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고, 하루도 허투루 보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 인생을 낭비 없이 백프로 살고 싶어."

해솔이 말했다.

"나도 그러고 싶어."

도담도 그 말에 동의했으나 그에 대한 해석은 달랐다. 해솔은 나태하지 않고 성실한 삶을 추구했고 도담은 늘 새로운 자극을 추구했다.

"나는 모든 가능성을 살 거야. 여행처럼 신나게 살 거고, 모든 걸 경험해 볼 거야." (13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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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주 이후에 시간이 꽤 지나서 7월 초반에는 몇 번 읽기를 기록해 놓은 것이 있었으나, 읽었다는 사실 외에 남겨놓은 것 없이 밀려둔 일처리만 끝내고 예정되어 있던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다. 아마 지금까지 떠났던 여행 중에 가장 준비를 안 하고 떠난 여행이 아닐까나라가 이탈리아여서 그런지 배경지식을 최대한 쌓고 가자는 마음이 있었는데 그런 준비가 전혀 없이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캐리어와 가방에는 책만 다섯 권이 들어갔는데, 그 중 이탈리아에 대한 지식을 얻고자 넣은 책이 두 권이었다(여행 가이드북을 제외하면. 적으면서 생각하니 다섯 권이라고 쓰면서도 여행 가이드북은 세지 않았다).

















일처리의 와중에도 읽었던 책은 일과 관련이 있어서 읽었던 『L의 운동화』. 운동화 복원 작업에 대한 소설에 얽힌 현대 미술에 대한 이야기들, 손에 문제가 생긴 여성 복원가와 자식에 대한 이야기들 모두가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로 읽혔다. 당연히 세월호 사건이 떠오르기도 하고(중간중간에 시위가 배경처럼 등장한다)… 어떤 방식으로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가의 문제.
















로마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밀려오는 졸음을 참으며 읽었던 책은 서가명강 시리즈의 『그들은 로마를 만들었고, 로마는 역사가 되었다』. 로마를 이끌었던 4명의 지도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간략하게 실려있다. 로마에서 볼 것들이 고대 로마의 역사와 관련이 있어서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구입했던 책. 주요 유적에 대한 역사보다는 4명의 인물(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의 행적에 주목한 책이었지만 그래도 로마 역사의 대략적인 흐름을 아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나에게 로마 역사에 대한 지식은 중학교 시절 배웠던 세계사 지식 외엔 없었기 때문.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로마를 동서로 나누어 통치하기 시작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고,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게 된 배경, 그리고 이후 삼위일체에 대한 논쟁이 정리된 것도 콘스탄티누스 시기였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이후에 로마를 돌아다니면서 보았던 유적들 몇 가지(주로 포로 로마노에 있던 개선문들)를 볼 때 책의 내용을 떠올리며 돌아볼 수 있었다.



















또 챙겼던 책은 피렌체를 돌아볼 것을 대비하여 골랐던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의 『단테』. 아쉽게도 이 책은 다 읽지 못하고 피렌체를 여행하게 되었다. 사실 로마에서부터 종종 교회의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저것이 천국과 연옥과 지옥의 모습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그림들이 많이 있었다. 특히 시스티나 성당의 정면화를 보았을 때. 단테의 집은 시간이 맞지 않아 들어가보지 못했고,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두 번째로 만났다고 전해지는 산타 트리니타 다리는 그의 흔적이 전혀 없이 하염없이 야경을 보는 이들과 버스킹하는 이들만이 가득했다. 돌아와서라도 다 읽어야지라고 생각했으나 방학이라는 연휴가 끝나니 핑계처럼 일거리들이 들이닥치는 것을 하루살이처럼 처리하는 중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 무거운 책을 다섯 권이나 왜 챙겼는지 모르겠으나꽤나 긴 여행이기도 했고, 최소한 남부에 있는 동안은 특별한 일정 없이 갈 곳만 정해놓은 일정이었기에 책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마음에서 챙긴 것이었다. 그러나 가보고 싶은 곳이 언제나 많았던 나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그리고 숙소에 돌아와서는 다음 날 가볼 곳에 대한 지식을 벼락치기로 익히느라 시간이 전혀 없었으니과유불급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과한 욕심이 짐을 더 무겁게 한다는


















종종 해변에서 펼쳐서 읽었던 책은 황정은 작가의 『작은 일기』. 같은 시간을 겪었지만 내가 책으로 항상 알아왔던 작가는 온몸으로 이 일들을 겪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이전에 나왔던 『일기』를 읽었을 때도 느꼈던 것이지만 황정은 작가의 글을 읽고 있으면 세계의 엄혹하면서도 폭력적인 면모를 온몸으로 겪어내고 그것을 온힘으로 증언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같은 시간을 겪고 지나왔지만 작가는 이를 훨씬 예민하게 감각하며 어떻게든 이 지경이 된 세계를 증언하고 바꾸고자 했구나, 하는 생각. 이탈리아의 뜨거운 햇빛을 받으며 읽으면서도 마음에는 세계의 한 모습 같은 한기가 엄습했다. 한기를 맞으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사람들이 떠오르면서.


국회의원이든 시민이든 그 자리에 모인 사람 중에 절박하지 않은 이가 있었을까. 나도 계엄에 반대하고 윤석열의 탄핵과 구속을 간절히 바라며 서 있었지만, 윤석열과 그가 초래한 국가 상태를 묘사하려고 '정상' '비정상'을 반복해 말하는 몇몇 연설은 집중해 듣기가 어려웠다. 이 사회의 정상성 기준으로 불편과 부당을 겪는 사람들, 소수자들도 여기 있는데 별 조심성 없이 그 말들이 사용되고 있었다. 선 자리가 따끔했고, 뒤쪽 눈치가 보였다. 하지만 지금 이 불편함을 말할 수 있을까, 지금은 그래도 되는 시간일까. 2016년 광화문에서 한 생각을 2024년 국회 앞에서도 했다. 스스로를 비겁하다고 느꼈다. (13)


분노한, '우리'로 단일하다고 간주하는 집단 안에서 느끼는 불편함과 소외감.

소수를 향한 다수의 불편.

너무 많은 사람들 틈에서 강화되는

정상성 요구, 단일한 집단이 되려는 욕구.

 

모두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일로 광장에 모인 거대한 집단이

보수적인 정상성을 추구하고자 할 때

단지 그 자리에 섞여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고,

닥치라는 분노의 대상이 되는 것을 쓸 것.

특히나 분노한 사람들 속에서. (20-21)


어제는 탄핵이 가결되어 기쁘다고 말하는 편지에 기쁘지 않다는 말을 적어 답신했다. 옹졸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난 토요일 광장에서, 탄핵안 가결로 잠시 둥둥 기쁨 뒤로 단 한 순간도 기쁘지 않다. 광장에서 아무도 국가 폭력으로 다치지 않아 기쁘다는 말을 듣고 읽을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사람들이 다치고 죽는 상황이 이렇게 많은 이들의 마음에 뻔한 가능성으로 존재했던 그 시간 자체가, 그런 시간이 있는 현실 그 자체가 두렵고 아프다. (41-42)


가수 연영석이 「윤식이 나간다」를 부르고 있을 때, 쓰러진 사람이 있다며 노래가 중단되었다. 노래를 중단시키고 상황을 알리는 박민주 활동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이번 시국 내내 단단한 음성과 차분한 진행으로 많은 이들에게 의지가 되었던 그가 처음으로 그런 목소리를 냈다. 다들 기다렸다. 찍지 마, 찍지 마, 하고 번져 오는 말을 따라 하기도 했지만 대개는 말이 없었다. 걱정이 되어 다들 앞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누가 그랬나. 케이팝과 응원봉의 물결을 보며 축제 같다고.

그런 면도 물론 있지만 이 집회의 가장 깊은 근원을 나는 그 순간에 본 것 같았다. 슬픔. 저마다 지닌 것 중에 가장 빛나는 것을 가지고 나간다는 그 자리에 내가 바로 그것을 쥐고 나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의 무사를 바라며 앉아 있었다. (84-85)


여행은 누구도 아픈 일 없이 잘 마무리되었고, 광복절을 끝으로 방학 같은 연휴도 모두 끝이 났다.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고, 생활에 치여 멀리했던 책들과 마주할 시간이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책읽기의 즐거움/괴로움에 빠질 시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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