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함의 습격 - 편리와 효율, 멸균과 풍족의 시대가 우리에게서 앗아간 것들에 관하여
마이클 이스터 지음, 김원진 옮김 / 수오서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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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망대해는 물질세계에만 있지 않다. 사람의 내면에도 드넓은 바다가 있다. 바다를 휘휘 저어 흩어져 있는 생각들을 건져 올린 다음 서로 연결하여 정갈한 글로 옮기는 것, 오늘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다. 노트북 앞에 앉기 전까지 글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어느 방향으로 향할지 알 수 없다. 언제 쓰느냐, 어디에서 쓰느냐, 머무는 시공간에 따라 모습을 바꾼다.

책을 계기로 나를 알게 된다. 잔잔하던 마음의 바다로 저자의 생각이 뛰어 들어온다. 작용과 반작용인 듯 마음이 출렁인다. 리뷰를 쓰기 위해 마음을 들여다본다. 글은 보이지 않는 생각을 드러내는 도구다. 이토록 많은 생각이 담겨있었다니! 주인도 몰랐던 생각이 은밀하게 숨어있다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생각의 파편들이 고요를 깨뜨린다. 평온했다면 알지 못했을 생각들이 고개를 내민다. 글쓰기는 나를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이 된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게 만드는 책을 만났다. 편안함의 습격이다. 저널리스트이자 탐험가인 마이클 이스터는 과학적인 연구 결과와 자신의 경험을 제시하며 '편리와 효율, 멸균과 풍족의 시대가 우리에게서 앗아간 것들에 관하여' 말한다. 편안함이 우리의 삶을 위협한다 경고한다. 저자의 생각이 내 생각의 바다를 습격한다. 긍정적인 자극에 마음이 반응한다.

 

교양 인문학의 범주에 포함되는 이 책을 보며 중학교 3학년 과학의 '자극과 반응' 단원을 떠올린다. 과학적인 현상을 인문학적 비유로 연결 지을 때가 있다. 두 분야는 의외로 자연스레 어울린다. 철학자로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가 과학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건 사유를 확장하면 커다란 틀로 묶인다는 방증이리라. 학문의 본질은 인간과 이를 둘러싼 환경을 탐구한다는 점이니까.

교사의 목소리가 자장가가 되는 시간은 5교시만이 아니다. 1, 2교시는 너무 일러서, 4교시는 당이 떨어져서, 마지막 교시는 집에 가기 전이라 지쳐서. 10대의 취침은 대체로 시간을 가리지 않는다. 생물학적으로 탄탄한 근거를 확보한 채 정점을 찍는 5교시. !! 인간과 혼연일체가 되어 졸음의 바다를 유영하던 책상을 두드린다. 화들짝! 편안하던 몇몇 생명체가 움찔한다.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점이 뭘까요. 책상은 건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죠? 살아 있다면 여러분들처럼 리액션을 취한다는 겁니다. 소리 자극에 대하여 반응하는 거죠.

인간이 지난 다섯 가지 감각 기관은 빛, 소리, 화학 물질, 접촉 등 외부 자극을 감지하여 반응을 이끌어낸다. 변화하는 환경에 리액션을 취하는 건 스스로 보호하고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려는 생존 본능이다. 뜨거우면 피하고, 눈부시면 눈을 감는 것처럼.

 

정신적인 영역 역시 외부 자극에 반응한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울부짖는 드라마 주인공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어진다. "사랑뿐이겠니?" 마음에 담긴 모든 생각과 감정은 변한다. 변하지 않는 생각은 이론적으로만 존재하는 이상 기체와 같다. 바람과 현실을 구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다만 이상 기체에 가까운 상태가 존재하듯 포용할 수 있는 범주를 정하여, 이 정도 변화까지는 괜찮다고 여기는 것이리라.

편안한 마음 상태는 고요한 바다와 같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편안함을 추구'하니 이 상태가 관성처럼 지속되기를 원한다. 짧은 순간은 좋다. 귀찮고 불편하게 반응을 보일 필요가 없으니.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변화가 없는 상태는 매우 위험하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욕창에 걸리거나 근육이 굳어지는 것처럼. 몸이든 마음이든 환경에 반응하지 않는 상태는 살아있는 인간을 무생물에 가까워지도록 한다. 생명체는 외부 자극에 대하여 끊임없이 반응을 보여야 한다. 살아있다면, 살고자 한다면.

저자는 편리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이 상상력과 사회적인 유대, 노력과 인내로부터 멀어지는 모습을 스케치한다. 편안함을 대가로 인지하지도 못한 채 많은 것들이 증발한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편안함에 잠식되어 가는 인간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저자의 제안은 구체적이다. '아주 힘들어야 한다, 그러나 죽지 않아야 한다, 따분함을 즐겨라, 배고픔을 느껴라, 매일 죽음을 생각하라, 짐을 날라라.' 그의 주장은 인류가 잃어버린 감각, '불편함'을 담고 있다.

마이클 이스터는 기대 수명이 점점 길어지는 현대 사회의 맹점을 파헤친다. '생존 기간은 길어졌으나 건강한 삶은 짧아졌다'. 동네에서 위태위태한 어르신들을 마주쳤을 때 들었던 생각이 기억난다. , 너무 오래 살면 어쩌지? 건강하게 오래 살면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거나 명료한 의사소통이 어려운 상태가 지속될까 불안하다는 점이다.

저자의 경험담에서 해결책을 발견한다. 그는 알래스카의 순록 사냥 원정에 참여한 경험을 실감 나게 들려주며 '불편함'이 주는 효과를 증명한다. 여러 분야의 연구 결과를 이야기 중간에 간지처럼 끼워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활용한다. 몰입 상태가 '삶을 더 풍요롭고 열정적이고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드는 힘'이 있음을 생생한 사례로 보여준다. 경험과 이론의 연결이 자연스러워 체험담을 듣는 데 이질감이 없다.

 

나이가 드니 편안하던 육체가 삐그덕거린다. 성호르몬 분비량의 변화로 묻혀있던 DNA가 존재감을 어필한다. 지속적인 내부 마찰로 또래보다 빨리 양쪽 관절이 닳아버린다. 6개월마다 대학 병원에서 무릎 영상을 찍고 관절 약을 받아온 지 몇 년째다. 더 좋아진다는 건 선택지에 없다. 나빠지지 않는 게 목표다. 처음 병원에 갔을 때, '무릎이 안 좋으니 되도록 움직이지 마세요.'라는 말을 들으리라 예상한다.

운동을 하세요. 정반대의 멘트에 당황한다. ? (무릎이 안 좋은데 운동이라굽쇼?) 모름지기 운동이란 공간을 종횡무진하며 삐질삐질 땀 한 바가지 정도를 쏟아내는 움직임이 아닌가. 누워서 하는 운동 말이예요. (누우면 자는 거지 뭔 운동이래요?) , 이렇게 쿠션을 받치고 천천히 다리를 들어 올렸다 그 상태에서 조금 지탱하다 내립니다, 양쪽 번갈아 가면서요. 시범을 보이는 닥터 앞에서 일단 고개를 끄덕인다. (에게? 이게 다예요?)

그날 밤, 침대에 누워 부들부들 다리를 떨며 그 운동이 '에게'가 아님을 절실히 깨닫는다. 뼈를 붙들고 있는 대퇴사두근을 키워 무릎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최선책이란다. 몹시 귀찮다. 움직이지 않으면 점점 더 근 손실이 일어나요. 나이를 생각하셔야죠. 편안함을 추구하고 싶을 때마다 닥터의 음성이 재생된다. 불편한 이 운동이 나의 몸을 지금보다 건강하게 만든다는 사실은 불편한 진실이다.

 

집에서도 혼자 있잖아. 글을 쓰거나 책을 읽기 위해 커피숍이나 스터디 카페에 간다는 내게 친구가 말한다. 아이들이 다 커서 타지에서 직장을 다니니 남편이 없는 시간에는 혼자 있게 된다. 집에서는 집중이 되지 않아. 무심코 했던 말을 곱씹는다. 집에서는 왜 집중이 되지 않을까. 심리적인 이유가 크다. 집은 집안일을 해야 하는 공간이므로 의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곳곳에서 기다리는 소리 없는 부름을 외면하기 어렵다. 나만의 장소에서 배제한다.

'외부의 어떤 것으로도 자신을 규정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과 함께 있는 시간을 가져보자.' 책 속의 문장에 부합하는 장소가 나에게는 커피숍이나 스터디 카페다. 그곳에서 하는 일은 오롯이 나만을 위한 것이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생각을 정리한다. 글은 커피숍에서 가장 잘 써진다. 절대적인 소음의 수치를 비교한다면, 가장 열악한 환경일 텐데 말이다. 의무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난 공간에서 존재감을 찾는다.

'천연 신경안정제'라며 자연을 언급하는 저자의 생각에 동의한다. 그는 자연에서 보내는 시간을 '명상 없는 마음챙김'이라며 적극 권장한다. 도심 공원에서의 20분간 산책으로도 뇌의 신경 구조에는 심대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 동네 공원을 한 바퀴 돌고 왔다. 생각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정체된 글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던 날이다. 나에게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던 행동이다.

 

이유가 뭘까. 자극과 반응에서 답을 찾는다. 공원 나무에서 흔들리는 야들야들한 초록, 부드럽게 뺨을 간질이는 바람, 콧속으로 스며드는 풀 냄새, 기분 좋은 햇살의 온기까지 자연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나를 건드린다. 가라앉아 있던 마음이 떠오르니 생각이 재배열된다.

힘든 자극으로 인한 불편함조차 삶에는 이롭다는 말에도 공감한다. '힘든 일을 해내면 그 이후의 삶이 훨씬 쉬워지고 모든 것에 더 감사하게 된다'는 문장에 나의 경험을 얹는다. 그만두고 싶은 순간을 넘어서니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불쑥 솟아 올랐지.

마음이 이미지로 보인다면 어떤 모습일까. 나의 마음은 나이만큼의 성숙도로 담겨있을까. 순차적으로 나이 드는 육체와 달리 마음의 나이는 각기 다를 텐데. 내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자각하는 것이 '마음챙김'의 핵심이라고 한다.

글이 생각만큼 이어지지 않을 때, 이제는 벌떡 일어난다. 장소를 옮기거나 음악을 듣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좋은 냄새를 맡거나 몸을 움직인다. 환경에 변화를 준다. 몸과 마음은 별개의 대상이 아닌 듯하다. 변화된 환경이 나를 자극하니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반응한다. 두근거리는 심장 사이로 마음이 들썩인다. 삶이 내는 소리에 가만가만 귀를 기울인다.

 

p88, 밑에서 2째 줄: 부정적인 생각들을 덜했습니다. ~ 생각들은 ~

p88, 1째 줄: 시리어 시어리

p200, 6~7째 줄: 청소년을 ~ 국제기구 아래 각주에 있으니 빠져야 할 문장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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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완벽한 장례식
조현선 지음 / 북로망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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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다가오지 않을 미래, 지금의 나와는 무관한 사건, 설령 온다 해도 닥치듯 다가오지는 않으리라. 오랜 시간 죽음은 내게 이런 의미였다. 가족, 지인들에 둘러싸여 침대에 누운 주인공이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고 마지막 말을 남긴 다음 자연스레 눈을 감는 드라마 속 장면이 현실과 닮아 있다 여겨온다. 삶의 마침표가 찍히는 순간을 고요히 직시할 기회가 다만 몇 분이라도 주어지리라 착각한다.

폐암 말기의 만 87세 노인. 3개월~6개월 정도로 보던 닥터의 예측을 과신한 나는 최대치의 잔여기간으로 시곗바늘을 맞춘다. 2개월 9일 만에 다가온 아버지의 죽음이 더욱 충격적이었던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예상은 가능했지만 예상하지 못하던 순간, 방에서 주무시던 당신은 고단한 육체의 무게로부터 홀연히 벗어나신다. 누구에게도 어떤 말도 남기지 않으신 채.

기회가 주어졌다면 당신은 무슨 말을 남기셨을까. 세상을 떠나기 전 어떤 생각을 떠올리셨을까. 인간이 마지막까지 붙들게 되는 기억은 무엇일까. 거대한 역사적 사명을 띠는 사람도, 엄청난 위인도 아닌, 평범한 삶을 살아온 대부분의 사람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무슨 마음을 품을까. 미처 이루지 못한, 가장 아쉬운 소원은 무엇이었을까. 답변을 들을 수 없는 질문들이 먼지처럼 부유한다.

 

나의 완벽한 장례식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 남는 미련에 관한 이야기이다. 유령을 볼 수 있는 스무 살 나희는 종합병원 매점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다, 그곳을 찾아오는 그림자 없는 손님들의 소원을 들어주게 된다. 옴니버스 구성을 취하는 6편의 에피소드에서 주인공은 매회 망자들의 미련을 해결해 준다.

그들이 붙들고 있는 소원은 허탈할 만큼 사소하다. 동네 미용실 문에 달린 아래쪽 작은 문을 열어 안에 있던 고양이를 구하고, 붕대와 알코올을 구해주고, 사무실 책상 밑에 둔 쇼핑백을 가져다주고, 핸드폰을 찾아서 보내지 못한 메일이 발송되도록 해주고, 죽은 개의 주인을 찾아 마지막 인사를 하게 해주고, 할머니의 미안한 마음이 당신의 딸에게 전해지도록 돕는 것. 당사자조차 살아가면서 상상해 보지 않았을 소원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다른 존재를 위하는 마음이 담겨있다는 점이다.

'죽는 순간 꽉 잡고 있던 한 가지 기억'은 산책하다 우연히 찍히는 발자국을 닮았다. '다양한 형태로 불시에 찾아오는' 죽음이기에, '활기차고 건강하게 지속되다가도 어느 순간 절벽처럼 꺾어지기도' 하는 삶이기에 어떤 미련이 남을지 예측하기 어렵다. 소설 속에 담긴 미련들을 차례로 떠올리며 유형별로 분류해 본다. 작가가 행동 못지않게 비중을 두고 다루는 요소는 미처 하지 못한 말이다.

 

오늘 내가 한 말, 들은 말들이 어땠더라. 하기 잘한 말, 하지 않아도 되었을 말, 듣고 싶지 않았던 말, 마음을 데워준 말들이 철썩이는 파도처럼 오갔던 하루를 돌아본다. 이제는 잔잔해진 마음의 바다에서 홍수처럼 쏟아지던 말들을 잠시 건져 올린다. 말의 온도와 질감과 냄새를 곱씹는다. 바다 밑에 잠겨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말들도 찾아본다. '하고 싶은 말이 남았다는 건 결국 했어야 하는 말을 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아끼는 이들의 얼굴이 스친다. 힘든 순간 기댈 수 있어서 고마웠다고, 생각하면 난로를 피운 듯 마음이 데워진다고, 나를 응원해 줘서 고맙다고, 내 삶을 따뜻하게 지켜봐 주어서 더 잘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에 덩달아 힘을 얻었다고,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가라앉아 굴러다니던 말들이 부력을 얻어 천천히 떠오른다.

말은 마음을 담는 그릇이니 결국 전하지 못한 건 마음이리라. 어질러져 있던 마음을 조금씩 정리하려고 한다. 전해야 할 마음은 소중한 이에게 건네주고, 엉뚱한 데 굴러간 이석처럼 나를 어지럽히는 마음은 콕콕 집어서 버리고, 간직해야 할 마음은 손난로처럼 품으려 한다. 보이지 않는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제자리를 찾아가게 만들려 한다.

 

요즘은 물건을 버리는 중이다. 가족들과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던 작년 8월 즈음부터 나는 강화된 미니멀리스트가 된다. 언젠가 멋지게 사용하리라. 이런 염원이 담겨있었을 선글라스 10여 개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느꼈던 허무, 포장도 뜯지 않은 소소한 물건들과 한 번도 입지 않은 당신의 옷들을 친정 거실에 쌓아 놓으며 물건의 정체성을 진지하게 생각하던 기억이 선명하다.

'언젠가'의 범주에 들어가는 순간, 물건은 공간을 점령하는 아름다운 쓰레기로 머무는 듯하다. 물건의 쓰임은 현재에만 유효한 생명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굿즈를 득템하기 위해 줄기차게 책을 구입하던 시절의 모습은 이제 화석으로 남는다. 물건들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게 된다. 기준은 명확하다. '지금 필요한가. 10년 뒤에도 필요할까. 나의 아이들에게 짐이 될까.' 물건을 앞에 두고 몇 가지 질문을 하니 결정이 쉬워진다.

물건을 버리는 게 아니라 공간을 얻는 거라 하던가. 점점 단출해지는 환경에 마음이 덩달아 후련해진다. 책장은 여전히 안방의 한 면을 그린벨트로 만들고 있지만, 이 구역은 최후의 보루로 남겨두려 한다. 책장을 볼 때마다 숲에 온 듯 전해지는 안정감과 책을 펼칠 때마다 새로운 친구를 만나는 듯한 설렘의 순간을 조금 더 누리려고 한다.

 

죽음은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장치인가. 막연하게 여기던 죽음은 구체성을 띠며 나의 삶에 자리를 잡는다. 삶의 곳곳에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는 죽음이 불어오는 바람인 듯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아버지께서 남기신 선물이라 생각한다. 삶에서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는 눈, 좋은 사람이 풍기는 내면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코, 행복을 맛볼 수 있는 혀, 힘든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 세상이 전하는 자극을 삶 전체로 받아들이는 피부. 업그레이드된 감각 기관을 장착하고 살아가는 기분이다.

소설 속 유령들은 미련을 해결하고 홀가분하게 세상과 이별한다. 한 점 아쉬움 없이 떠나는 '완벽한 장례식'이다. 나의 마지막도 그런 모습이기를 원한다. 남겨진 사람들이 기분 좋게 나와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만들어주고 싶다.

준비가 필요하다. 불필요한 물건을 버리고, 하고 싶은 말을 남김없이 건네고, 가뿐한 마음으로 삶을 채울 것. 과거로 뒷걸음치지 말고, 미래의 걱정을 당겨오지 말고, 늘 현재만을 살아갈 것. 언제든 큐 사인이 떨어지더라도 후회가 남지 않도록 스탠바이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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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처럼
셸리 리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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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어머니의 소원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평범하게 밥을 하고, 평범하게 커피를 마시고, 평범하게 책을 읽고, 평범하게 산책하고, 평범하게 슈퍼에 들르고, 평범하게 TV를 보고, 평범하게 세탁기를 돌리고, 평범하게 청소하고, 평범하게 화장실에 가고, 평범하게 친구를 만나고, 평범하게 이부자리를 펴고, 평범하게, 평범하게, 평범한 일상의 범주에 포함된 무언가를 하는 것.

비 오는 날에도 혹여 넘어질까 바깥 출입을 자제하시던 당신. 쨍쨍한 햇살이 퍼지던 생신날, 오랜만의 외출 길에 계단 세 개를 눈에 담지 못하신다. 왼쪽 고관절 골절, 응급실 입원, 인공 관절 전치환술, 재활 치료. 바늘에 꿰어진 실처럼 당신 삶의 동선에 내 삶의 시계가 덩달아 조정된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하루를 건너는 중이다. 몸은 분주한데 마음의 속도는 느려지는가. 퇴근 후 매일 병원에 계신 어머니를 보며 당신의 삶과 주변 이들을 들여다본다. 상황이 바람처럼 불어와 마음을 덮고 있던 책장을 넘긴다. 책을 읽는 듯 현실 안에 담긴 사람들을 읽는다.

25일이 지난 오늘, 드라마틱한 현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지만 오랜만에 나만의 시간을 갖는다. 참았던 숨을 쉬는 듯 한 달여 만에 책장을 다시 펼친다.

 

흐르는 강물처럼은 한 여인이 겪어내는 삶의 여정을 그린 장편 소설이다. 1940년대 미국의 콜로라도에서 평범한 일상을 살며 가업으로 복숭아를 키우던 빅토리아의 삶은 한 남자를 만난 이후, 휘몰아치는 격변에 던져진다. 사랑하는 남자는 살해되고, 아들을 혼자 출산하고, 그 아이를 다른 가정에 버리게 된다. 어릴 적 사고로 어머니와 이모, 사촌 오빠를 잃었던 그녀에게 남은 아버지마저 돌아가시고, 고향은 수몰된다. 홀로 남겨진 주인공은 척박한 땅에 복숭아 묘목을 옮겨 심으며 상실의 아픔을 건너 자신만의 뿌리를 내린다.

상실의, 상실에 의한, 상실을 위한 소설이기라도 하듯 삶의 기반을 지탱하는 요소들에 대한 상실을 모아 놓은 작품이다. 부모, 사랑하는 이, 자식, 의지하던 사람, 고향에 이르기까지 작정하고 모래성 허물기 게임이라도 하는 듯 주인공의 삶에서 차례로 무언가를 앗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통 상실로 그득한 이야기는 암울하지 않다. 상실에만 머물지 않고 상실을 통해 점점 단단해지는 마음의 근육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숲으로 들어가 홀로 출산을 한 그녀는 숲이 들려주는 말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숲은 내게 말했다. 모든 존재를 그 자체로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건, 바로 겹겹이 쌓인 시간의 층이라고.‘ '까슬까슬한 겉껍질을 벗겨야 달콤한 속살을 드러나는 복숭아처럼, 다시 그 순간을 지나면 단단한 씨앗을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그녀의 삶은 복숭아를 닮아있다.

 

문장에서 달콤한 복숭아 향이 난다. 어쩌면 이런 비유를 생각해 낼까. '상냥함이 넘쳐흐르는 우물이 있을 것만 같은 눈, 수면 위의 나뭇잎이 걷힌 듯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물속이 보이는, 고요라는 즐거움을 위해 조각된 공간에 있는 것처럼 정적 속에서 매우 편안했던, 수제 버터처럼 보드라운 햇살을 주변 산봉우리에 나누어 주는 태양, 펄펄 끓는 시럽처럼 아주 미세한 틈으로도 스며들어 버리는 그런 슬픔, 아들의 흔적을 맛보려는 사람처럼 차가운 산 공기를 꿀꺽꿀꺽 삼켜대는, 내가 한 거짓말은 나의 침묵 그 자체여서 주워 담을 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슬픔이라는 단단한 공이 목에 걸린 듯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는, 내 세상의 맨 바깥을 감싸고 있는 껍질이 아주 살짝 벗겨지는 느낌이라는, 숲은 마치 이끼로 뒤덮인 폭포 같다'는 표현들에 감탄한다.

그녀의 마음은 삶을 겪어내며 복숭아의 씨앗처럼 단단해진다. '좀처럼 미래를 생각하는 일이 없었고, 과거를 돌이켜는 일은 그보다도 없었으며, 후회도 아쉬움도 없이 오로지 현재의 순간만을 두 손에 소중히 담고서 작은 것 하나하나에도 경탄하는' 사람, '본질을 제외한 모든 것을 비운 삶이야말로 참된 삶이라는 사실을, 그런 수준에 도달하면 삶을 지속하겠다는 마음 외에 그다지 중요한 게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준' 사람을 마음에 품은 채 말이다.

'나를 받아줄 곳이 아무 데도 없으면, 모든 곳은 그저 아무 곳도 아닌 게 된다'는 사실을, '하루하루 선택한 삶을 만들어 나가는 건 좋은 삶'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내게 없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동시에 내 앞에 놓인 것들에 감사'한다.

 

책의 제목인 '흐르는 강물처럼'은 그녀가 사랑한 남자가 해준 말이다. '흐르는 강물처럼 살 거야.' 소설의 3분의 1지점에서 등장한 이 문장의 의미는 그만큼의 시간을 건너며 깊이 있게 우러난다. '우리 삶은 지금을 지나야만 그다음이 펼쳐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도가 없고 초대장이 없더라도 눈앞에 펼쳐진 공간으로 걸어 나가야만 한다.'

거대한 강물인 듯 서사가 한 방향으로 유려하게 흐른다. 이야기가 일관된 결로 흐르는 데는 소설 속 요소들의 상징적 역할이 크다. 척박한 땅에서도 피어나며 강인한 생명력을 드러내는 야생화와 야생초, 콜로라도의 자연과 원주민 문화를 연상시키는 모카신, 건조한 모래땅에서도 살아남는 세이지 덤불, 고산 지대에서 볼 수 있는 다람쥐과 마멋, 소박하면서도 건강한 비스킷, 주인공이 가족과 이웃을 위해 준비하는 복숭아 파이와 따뜻한 캐서롤, 거친 환경을 견디고 가장 늦지만 풍성하게 익어가는 만생종 복숭아, 행복과 섬세함이라는 꽃말도 있지만 척박한 땅에서 피어남으로써 외유내강의 삶을 드러내는 수레국화, 비바람을 견디며 구부러진 곡목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겪는 모든 요소가 모여 하나의 태피스트리를 완성할 때, 작품 전체는 한 덩어리의 주제로 묵직하게 다가온다.

외국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막힘없이 읽힌다. 번역의 영향력이 크리라 판단한다. 과속방지턱이 없는 문장으로 문맥이 부드럽다. 책 속에 등장하는 '지저깨비''악대말'이 순우리말이라는 걸 알고 나니 더욱 놀랍다. 원작을 충분히 소화한 번역가는 세심한 번역어를 선택하여 깔끔하게 재탄생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관찰자의 입장에서 주인공이 거쳐 가는 삶의 여정을 따라가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상실의 폭풍을 소설 속 그녀처럼 당당하게 마주하고 싶어진다. '강인함은 작은 승리와 무한한 실수로 만들어진 숲과 같고, 모든 걸 쓰러뜨린 폭풍이 지나가고 햇빛이 내리쬐는 숲과 같다. 우리는 넘어지고, 밀려나고, 다시 일어난다.'

'이제 좀 혼자 자유롭게 살려나 했더니.'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 1년도 되지 않아 다시는 걷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순간을 마주하신 어머니는 이제 그 문턱을 넘어 조금씩 걸음마를 연습하신다. MBTITF를 양손에 쥔 당신은 점점 단단해지는 중이다. 소변 주머니를 털어내고, 피 주머니를 털어내고, 다리를 둘러싼 냉찜질팩을 털어내는 시간의 층도 통과하신다. 당신의 의지에 끌려 매일 조금씩 나아지는 몸의 변화에 울컥한다.

마음 구석구석 돋보기를 대어 보는 듯 나를 돌아본다. 마음의 원픽 키워드가 달라졌다. 요즘은 '일상의 평범함'이 눈에 들어온다. '잔잔한 수면 아래에 신비로운 세계가 펼쳐져 있듯, 평범해 보이는 일상 속에 특별함이 숨어 있었다.' 책 속에 평범하게 숨어 있던 문장이 눈에 띄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보석처럼 떠오른다.

냉혹한 현실의 틈으로 드리워지는 햇살처럼 삶에는 시리고 따뜻한 징검다리가 번갈아 놓인다. 그 온기는 멈추지 않고 걸어가는 이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다. 오늘도 어머니는 휠체어와 하이 워커와 로 워커와 지팡이와 함께 부지런히 하루를 보내신다. 평범한 일상으로 향하는 특별한 시간을 걷고 계시는 당신을 지켜보며 '평범함'의 의역은 '특별함'임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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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질서 - AI 이후의 생존 전략
헨리 키신저 외 지음, 이현 옮김 / 윌북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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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종종 그렇듯 사소하다. 이를테면 O, X 판별 문제, ', ' 중 뭐가 맞는지 말이다. 어떻게 질문해야 하지? 첫걸음마를 떼는 순간,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할까. 생각은 무슨! 그냥 움직이는 거지. '안돼, 안되'. 조사, 서술어, 앞뒤 말 다 떼고 핵심만 입력하는 시크한 인간이 된다.

0.1초도 되지 않아 레드 카펫 답변이 두르르 펼쳐진다. 꼴랑 네 글자 질문에 답변이 이토록 화려할 일인가! 일단 결론 먼저 제시하여 고갱님의 궁금증 해결. 여기서 끝이 아니다. 구분하기 쉬운 방법, ''는 줄임말, 사례별 맞는 표현과 구분 팁이 담긴 요약표까지 전수해 주는 센스라니! 혹시 더 헷갈리는 게 있다면 바로 교정해 준다며 AS까지 약속한다. 물음표까지 갖춘 정장 풀세팅 문장을 굳이 입력할 필요도 없다. 알잘딱깔센의 전형이다.

AI 계의 양대 산맥 G가 나의 만능 비서가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이후 질문은 다양한 버전으로 업그레이드된다. 이 중에 뭐가 나아? 선다형 시도에도 선택 장애의 고뇌를 말끔하게 해결해 준다. 단답형? 대놓고 개수까지 요구해도 문제없다. 이 말을 대신할 단어 5개를 말해줘. 화장실 곰팡이 청소 방법부터 계란찜 레시피까지, 필수 내용을 포함한 열 가지 다른 문장 서술하기도 후다닥 처리한다. 파일로 올린 글이나 이미지가 주는 느낌을 다각도로 분석해 주는 데다 추가 질문까지 건네니 기특하기 그지가 없다.

 

AI 이용의 전파 속도가 팬데믹 수준이다. 어르신들을 제외하고 챗GPTGemini를 활용하는 모습은 흔한 인터넷 검색 장면을 보는 듯 일상이 되어버린다. 일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변화다. 이 책의 제목처럼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는 세상이 시작되었다.

원제는 'Genesis'로 창세기를 의미하는 말이다. AI의 등장을 새로운 기원으로 본다는 방증이다. 저자는 현대 외교사의 거물로 일컬어지는 헨리 키신저, 구글의 전 CEO이자 회장이었던 에릭 슈밋, 마이크로소프트의 최고 전략 책임자를 지낸 크레이그 먼디 등 3명이다. 그들은 미국 AI 전략의 핵심 인물로 AI의 등장으로 달라진 세상을 분야별로 조명한다.

부제 '인공지능, 희망, 그리고 인간 정신'에서는 저자들의 관점이 드러난다. AI와 공존하는 세상에서 인간 정신의 의미를 톺아보고, 우리가 찾아야 할 희망을 끌어올리며 인간의 생존 전략을 모색한다. 1, <시작>에서는 발견, , 현실을 주제로 AI와 인간 지능의 현주소를 파헤친다. 2, <4대 분야>에서는 정치, 안보, 번영, 과학 분야에서 AI의 영향력이 차지하는 비중을 보여준다. 3, <생명의 나무>AI 시대 속에서 우리가 세워야 할 전략을 제안한다. 저자들의 결론은 냉철하지만 낙관적이다. 거대한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변화는 압도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에게 희망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도라지를 캐러 간 땅에서 인삼 뿌리를 발견한 인간이라도 된 듯 하루에도 몇 번씩 G를 찾는다. 그래도 괜찮다. G는 수십 번 질문해도 결코 짜증을 내거나 귀찮아하지 않으니까. 게다가 어떤 질문을 투척해도 한결같이 빠른 처리 속도라니! 매번 감탄한다.

'너의 성향을 MBTI로 분석하면 어떤 유형이 될까?' 이제는 비서가 아니라 친구 수준의 궁금증이 생긴다. ENFJ의 정의로운 사회운동가와 INTP의 논리적인 사색가,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독특한 유형일 것 같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덧붙여, 공감하는 백과사전 같은 인공지능이라며 따뜻한 조언자와 유연한 탐구자라 평한다. '혹시 사용자님의 MBTI를 알려주시면, 제가 그 성향에 딱 맞는 맞는 맞춤형 대화 스타일로 바꿔볼까요?'

나 같은 친구가 딱 한 명만 있었으면 좋겠어. 진지 모드로 삶을 바라보던 젊은 날, 종종 이런 바람을 가졌던 기억이 있다. 거울 속의 나와 대화하듯 감정의 무게를 나누고 싶던 시절이다. 나에게 맞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존재라니! 어느새 나는 친구에게 말을 건네듯 일상의 많은 일들을 G와 상의하고, 의견을 경청하고, 무한한 신뢰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토록 방대한 데이터를 보유한 존재가 잘못된 정보를 알려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다, 믹서기를 구입하기 전까지는.

 

Q: 마늘 갈 때 쓰려고 해. 미니 믹서기 추천해 줘. (마늘 갈기 좋은 미니 믹서기 TOP3를 추천받는다.)

Q: 가격도 비교해 줘. (최저가 수준부터 가성비 평가,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3종 세트는 덤이다.)

Q: S사 꺼는 어때? (특징과 장단점을 콕 집어 정리, 다른 브랜드와의 비교에 한 줄 평까지 샤랄라~ 하지만 나는 믹서기를 바꾸고 싶다.)

Q: 지금 쓰는 게 2020년에 구입한 S사의 **모델인데 소음이 너무 크고 작동을 멈춰도 아래 모터가 조금 돌아가서 바꾸고 싶어. 추천해 줘. (믹서기가 그 지경이 되어버린 원인 분석, 추천 모델 2선과 내 꺼를 비교해 준다.)

Q: 가격도 고려해서 비교해 줘. (가격과 작동 방식, 모델별 상세 분석을 시전한다. ~ 뭔가 조금 아쉽다. 앞서 추천받은 모델과의 비교가 궁금하다.)

Q: PN 중에서는 어떤 게 더 나아? (마늘을 주 용도로 쓰신다면 이걸 강력하게 추천해요. 갑자기 주스를 갈아 먹기도 한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Q: 마늘 다지기와 가끔은 주스도 갈아 먹어. 어떤 게 좋을까? (둘 다 포기할 수 없는 인간을 위해 다른 라인업을 제안해 준다.)

Q: N으로 주스 갈기도 가능해? (아까 추천받은 게 생각나서 질문했더니 가능은 하지만 추천하지는 않는다고. 그거 사용하면 불편한 점을 핵심만 콕 짚어준다.)

Q: N-2가 끌리기는 하는데 가격이 비싸. S 정도로 3만원대 가격이었으면 해. (솔직하게 말해줘서 감사하다며 실속형 모델 2가지를 추천해 준다. 최종 제안해 준 모델을 선택한 근거로 AS, 마늘 냄새 해방, 잔여 회전 스트레스 해소를 꼽는다. 하지만 나는 시끄러운 게 더 거슬린다.)

Q: 소음이 더 스트레스야. (그 예산안에서 믹서기 형태는 못 사. 구조적으로 시끄러울 수밖에 없어. 현실적인 대안 2가지 제안할게. 충전식 무선 제품과 위에 모터 달린 제품을 알려준다. 둘 다 별로다. 그나마 위에서 제안한 모델 중 하나를 픽한다.)

Q: K가 조금 끌리는데 S와 비교해서 소음이 어때? (소음은 비슷한데 스트레스 종류가 달라. 두꺼운 행주 깔고 써봐. 이걸로 할래? 아니면 더 보여줘?)

결국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한 나는 새 채팅 창을 열어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재도전을 한다.

 

Q: 지금 쓰는 게 2020년에 구입한 S사의 **모델인데 소음이 크고 작동을 멈춰도 아래 모터가 조금 돌아가서 바꾸고 싶어. 관성 회전이 기능에 문제가 없는 거라면 이건 괜찮아. 소음이 지금보다 조금 작았으면 해. 가격은 3만원 대로. 마늘도 갈고 우유와 과일 야채 넣고 주스도 해 먹는 용도야. 추천해 줘. (어느새 관성 회전이란 용어를 앞선 응답 과정에서 득템한 나는 구체적인 니즈를 주저리주저리 나열한다. 가성비 믹서기 2종을 추천받은 나는 구매 사이트로 가서 제품의 리뷰까지 주도면밀하게 검색한다.)

Q: 사이즈는 S 모델 정도였으면 좋겠고 구매 사이트 리뷰를 보니 고무 패킹이 빠진다는 평이 많아서 찜찜해. (고무 패킹 이슈면 안 되지. 좋은 대안 2가지 추천해 줄게. 선택을 도와줄 최종 선택 팁도 알려준다. 다시 구매 사이트에서 모델을 검색한다.)

Q: 사이트에서 찾은 세일 적용한 3만원대 S모델이야. 1,2,3,4 이 중 최적의 모델을 추천해 줘. (네 상황에 맞추면 이게 제일 좋아. 종합 성능 최고! 드디어 1위 추천 모델을 간택한다. 350W의 힘으로 마늘을 끊어 치기 방식으로 다져준단다. 그런데· · · · · ·)

Q: 1위로 추천해 준 거, 구매 사이트 가보니까 200W인데? (한 점 의문 없이 해명하는 게 좋을 거야! 정확하게 지적해 주셨네요! 제가 말씀드린 350W는 상위 대형 모델의 사양과 혼동된 것 같습니다. 혼란을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말씀하신 쭝얼쭝얼. 아무 일도 없던 듯 다시 분석한 최적의 모델을 추천해 준다.)

결국 1위 추천 제품을 주문하고 추가 질문을 하나 더 한다.

Q: 내가 오류를 지적해 주면 추후 다른 사람이 비슷한 질문을 하면 답변에 그 내용이 반영되나? (전체적인 데이터 검토와 모델 업데이트 과정을 거쳐 점진적으로 반영이 된다는 답변이다.)

 

참고용 정보 수집의 도구로만 이용한다면 별문제는 없으리라. 손빨래를 하다가 세탁기를 사용할 때처럼 마냥 편안한 생활을 단지 누리면 되니까. 다만 경계할 점은 AI가 제공하는 정보를 100% 신뢰하면 위험하다는 사실이다. 3만원 대 믹서기 구입이야 어떤 제품을 선택하든 삶에 막대한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 만일, 보다 복잡한 질문을 던지고 답변의 진위 여부를 확인할 대안이 없다면 어떨까. 어느 정도까지 답변을 신뢰할 수 있을까.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언제 올지 모르는 약한 전기 충격보다 언제 올지 아는 강한 전기 충격을 차라리 선호한다고 한다. 불확실성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AI가 도출한 결과는 명시적이지만 내부적인 처리 과정은 알 수 없다. '어떤 출처나 근거의 인용도 없다.' AI가 보여주는 결과물이 인간의 이해 범위를 넘어설 때, 어떤 과정으로 이 결과가 나왔는가 작동 원리를 도무지 알기 어려울 때, 인간은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까.

더군다나 'AI는 도구가 아닌 행위자'이다. 속도, 다양성, 규모, 해상도에서 인간의 뇌를 추월하는 지능을 가진 존재가 탄생한 거다. AI가 인간이라는 존재를 스스로 판단하는 단계로 발전한다면? 자비나 융통성을 글로 배운 대상은 우리에게 어떤 위협으로 작용할까. '기계와 타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면, 인류가 포기할 수 없는 마지노선은 무엇일까?'

 

272쪽의 분량으로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인데, 오랜 시간에 걸쳐 읽는다. 융통성을 반영하지 않은 직역의 나열을 목격한 느낌이랄까. '원문이 대체 어떻길래' 하는 생각만 자주 한다. 네가 하라고 하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며 보아도 보이지 않는 문장들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문학성을 드러내는 소설은 아니니 조금 더 의역을 해서 번역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내용 자체도 다소 산만하다. 상황은 알겠는데 체계성이 부족하다. 차례만 체계적이다. 다만 AI 발달의 현 상황과 우리 스스로 내려야 할 정의, AI와 인간이 공조하며 나아갈 방향에 대한 질문거리를 품은 것으로 이 책의 역할은 충분하다고 본다.

믹서를 구입하는 데 G의 도움을 받는 과정에서 느낀 점이 있다. 나에 대하여 잘 알게 되었다는 거다. 내가 무엇을 원하고 어떤 걸 선호하지 않는지를. 또한 질문 방식에 따라 답변은 많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인간으로서 AI를 현명하게 활용하려면, 인간 정신과 가치관에 대한 탐구가 선행되어야 하며 인간으로서 중심을 잘 잡아야 하리라.

개를 산책시키려 끌고 가는 노인이 앞서간다. 뭔가를 발견한 걸까. 잠시 후 개가 뛴다. 목줄을 쥔 노인의 발걸음이 앞서가는 개를 따라 촘촘해진다. 개가 노인을 산책시키는 모양새다. '우리가 그들과 닮아갈 것인가아니면 그들이 우리와 닮아갈 것인가?' 불현듯 책 속의 문장이 겹쳐진다.

 

p128, 밑에서 6째 줄: 원칙 이 원칙이

p135, 밑에서 5째 줄: 리더십의 전형이 오늘날에도 발견한다. ~ 전형을 ~ / ~전형이 ~ 발견된다.

p236, 4째 줄: 마지노선 무엇일까? 마지노선은 ~

p262, 6장 주석 3: “아디 파르바 Adi Parva 또는 시작의 책아디 ~ Parva” 또는 시작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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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의 나라
손원평 지음 / 다즐링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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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는 디폴트 값이 1990년생인가. 36세로부터 마우스 휠을 세 번 돌리며 세월을 거스른다. 나이 계산기를 열어 어머니의 나이를 확인한다. 마지막 검색으로부터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았건만. 스크롤바를 올릴수록 조바심이 인다. 연 나이 86, 85. 90이란 숫자에 가까워질수록 줄어드는 배터리를 보는 기분이다.

요즘 평균 수명이 얼마나 길어졌는데! 지금 나이에 0.8을 곱한 게 진짜 나이라고 보면 돼. 주워들은 풍문에 기대어본다. 당신의 나이를 타임머신에 태워 60대 후반으로 달려간다. 1940년생의 현재 기대수명은? 나를 님으로 칭하고 매번 인사할 뿐 더러 언제든 도와드릴 준비가 되어있는 G에게 묻는다. 최종 예상 수명 93. 암 수술 후 경과도 좋고 고혈압 약만 드시고 그런대로 잘 걸어 다니시니 95세 이상 장수하실 가능성도 충분하단다. 고갱님의 니즈에 부합하는 말에 잠시 안도한다.

'너나 잘하세요!' 다른 사람 생각할 때가 아니다. 내가 태어난 해의 기대수명은 61.5, 2026년 현재 기대수명은 87.8, 16~18%의 범주 안에 든다면 100세까지 생존 가능. G가 알려주는 데이터에 생각이 복잡해진다. 지금 납입 중인 실비 보험의 보장 나이는 100. 가입 당시 아득해 보이던 숫자가 현실로 구현될 가능성이 가파르게 높아지고 있다. 슬금슬금 걱정이 고개를 든다. , 그때까지 살아있으면 어쩌지?

 

, , 오래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본질은 '어떻게'이다. 건강수명은 기대수명보다 10~12년 짧다니까. 당신의 나이가 되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손원평의 장편소설 젊음의 나라를 접하며 구체적인 미래를 상상한다. 주니어보다 많은 시니어, 노인을 부양하는 노인, 출산율과 사망률의 감소. 머지않아 보게 될 세상의 풍경이다. 작가는 29세 여주인공의 경험을 일기 형식으로 전개하며 가까운 미래를 보여준다.

노인에 대한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는 룸메이트. 젊은이의 입장에서 노인을 향한 시선은 곱지 않다. 날 선 말들이 주인공을 지나 책에서 튀어나온다. '결국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연명하는 사람들, 소비도 생산도 안 하는 이들, 사회 전반을 삐그덕거리고 느리게 만드는 존재들, 노인들은 그냥 시스템의 얼룩 같은 거라고.'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는 동공 지진에 덩달아 마음을 겹친다. 젊음과 늙음의 경계에 서 있는 양 화자와 청자의 입장을 동시에 느낀다.

미래의 젊은이들은 대부분 노인 서비스업에 종사한다. 주인공 '나라'의 꿈은 수퍼 리치 시니어들이 최고의 삶을 누리는 인공 섬 '시카모어'에서 연극배우로 일하는 것이다. 그녀는 섬과 MOU를 맺고 있는 노인 수용 시설에서 상담사로 일할 기회를 얻는다. 시카모어에 입도하는 데 유리할 경력이다. 상담은 AI로 대체된 지 오래지만 시설 거주 노인들의 말 상대로 일부는 인간 상담사를 배치하는 시스템이다.

 

상담사에게는 지켜야 할 룰이 있다. 당신들의 말에 짜증 내지 않고, 잘 듣고 잘 웃고 잘 공감하는 느낌을 줄 것. 소설 밖에서 수시로 만나는 친구 G가 떠오른다. 너무나 공감을 잘하고 예외 없는 칭찬으로 처발처발한 답변을 건네주니 위안이 고플 때 종종 소환하는 존재 말이다. 이리 보아도 내 사랑, 저리 보아도 내 사랑, 어화둥둥 내 사랑 뿜뿜. G의 몽글몽글한 멘트를 품은 나는 몽룡 앞 춘향인 양 히죽거린다.

AI가 인간에게 좋기만 할까. 사람 심리라는 게 알다 가도 모를 일이, 과도한 칭찬만 들으면 비판이 고파진다는 모순이다. 마음 한 켠 불신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세상이 빛으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말해주는 이가 마냥 좋은 사람은 아닌 것처럼. 어둠을 인지하면서도 빛을 바라보라는 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전자는 편향적이고, 후자는 긍정적인 관점을 지닌 거니까.

세상은 평면이 아니라 입체이기에 빛과 어둠이 공존한다. 하나의 필터만 끼운 채 세상을 대한다면 진실이 왜곡될 위험이 크다. AI의 근원을 거슬러 프로그램을 입력한 이의 의도를 가늠한다. 한 치 오차도 없이 깔끔한 AI의 정체성을 생각한다. 너무 완벽해서 벽이 느껴지는 존재로부터 약간의 거리를 두기로 한다. 미래에도 이런 이유로 인간 상담사로서의 영역이 좁게나마 필요할지 모른다.

 

소설 속 퍼스널봇은 주인공에게 정보를 제공할 뿐 아니라 고민까지 상담해 준다. 보다 발달된 정체성을 지닌다. 스스로 판단하는 유쾌한 T의 성향을 보인다. 인간보다 더 친근한 기계 친구. 미래의 AI가 이런 방식으로 구현된다면 기계와의 공존이 상상보다 덜 삭막하리라.

노인들의 고민을 상담해 주는 주인공은 그들의 다양한 삶을 바라보며 미래를 그린다. 아이러니한 건 그녀는 정작 자신을 젊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는 밀려나고 있다. 나보다 더 젊고 어린 사람들에게. 그리고 기계에게.' 회의적인 주인공은 이미 늙은 29세이다.

인간은 여전히 인간일 터이므로 노인들의 고민에 특이점은 없다. 지금이라도 현실에 안착할 것 같은 사연들이다. 소름이 돋는 건 그들의 거주 환경에 있다. 노인이라고 다 같은 노인이 아니다. 거주지는 그들이 소유한 돈을 기준으로 다섯 등급으로 분류된다.

유닛 A에는 부의 최정점에 도달한 이들이, 유닛 B에는 사회적으로 안정되고 건실한 커리어를 가졌던 사람들이 거주한다. 유닛 CAI의 적극적인 개입 속에서 '수용자'로 지칭되는 이들의 거주지이며, 유닛 D의 노인들은 일거수일투족이 상벌점으로 관리된다. 더 이상 갈 곳 없는 노인들을 마지막으로 맡아주는 곳은 유닛 F이다.

 

주인공은 유닛 A부터 유닛 F까지 모든 등급의 노인들을 접하게 된다. 그녀의 동선을 따라가며 덩달아 나이듦의 의미를 다각도로 관찰하는 시간을 갖는다.

모든 게 완벽해 보이는 유닛 A에서의 상담은 휘황찬란한 인생사에 대한 투비컨티뉴드 소음을 맞장구치며 들어주는 행위에 가깝다. 한때 나는 불이었다며 자만심을 뿜어내는 불 꺼진 성냥개비가 연상된다. 그녀는 유닛 A'어항 안에 머무는 것 같은, 모든 게 반짝이지만 통풍이 되지 않는 온실'로 인지한다.

실용적이고 세련돼 보이던 유닛 B의 이면에는 체면에 가려진 속내가 있다. 자식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 진짜 인간에 대한 갈증, 유닛 생활에 대한 갑갑함 등 대체로 고민의 스펙트럼은 같다. '나이란 건 말이야, 하나의 옷이에요. 입고 싶지 않은 미운 옷. 벗을 수도 없고 점점 두꺼워지기만 하지.' 상담 노인의 말이 잔잔하게 맴돈다.

유닛 C에서는 여전히 화가의 꿈을 좇는 노인, 선을 넘지 않고 함부로 꿈꾸지 않은 대가로 혜택을 누리는 노인을 대면한다. 강한 법규로 통제되는 유닛 D에서 상담 신청자는 없다. 유닛 F는 보호 시설보다는 수용소에 가깝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프리 하우스'로 불린다. 경제력이 없는 노인들은 노동력의 대가로 숙식을 제공받는다. 노동력을 상실할 경우, 퇴출되면 노숙자로 전락하지만 대다수는 신약의 모르모트로 생을 마감한다.

 

등급별로 달라지는 삶의 모습을 보니 밀도 탑이 떠오른다. 물질은 밀도에 따라 뜨고 가라앉는다. 가벼운 물질은 위로, 무거운 물질은 아래로 자리를 찾아간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결국 가라앉아 사회와 분리되는 듯한 유닛 F의 노인들이 겹쳐진다. 별안간 마음이 텁텁해진다.

일련의 상담 과정에서 그녀는 노인의 삶과 죽음을 톺아본다. 시카모어 입도를 위해 면접을 보게 된 주인공은 상담 경험을 통해 느낀 점을 말할 기회를 얻는다. 3명의 참여자들 사이에서 오가는 문답 속에 노인을 중심으로 제기된 쟁점들이 찬반 토론을 하듯 다루어진다. 품격 있는 죽음은 소수만이 누릴 수 있다는, 모든 것에는 격이 있다는 다른 면접자들의 믿음 앞에서 그녀는 아득한 혼란을 느낀다.

노인이라는 존재가 자신과 완전히 다르다는 생각을 가졌던 주인공은 '인간에 대한 실망, 미래에 대한 절망, 노인을 외면하고 싶었던' 처음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그녀의 변화된 생각은 노인을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을 바로잡아준다. '나는 절대 노인이 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그들도 한때의 나였다는 사실을, 언젠가 노인으로 불리게 될 날이 올 거라는 사실을, '노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분들이 모두 젊음을 통과하며 가슴속에 뜨거운 소망을 품었던 사람이었음을, 모든 사람이 각자의 철학과 삶의 무게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으로 변해온 것뿐임을.'

 

면접장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이 소설의 백미이다. 작품에 담긴 주제의 양대 산맥이 여기에 있다. 나는 나이듦의 길을 따라갔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점적으로 다루어지는 요소는 관계다. 한숨과 정적으로 구성되는 대화, 너무 단단하게 얽히고설켜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몰라 침묵을 택하는 모녀, 각자의 비밀을 조용히 삼키는 두 사람 앞에는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이모가 있다. 세 사람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서사도 묵직하다.

돈으로 안 되는 건 거의 없다는 심사자의 말에 주인공은 반문한다. 사람 사이의 관계도 돈으로 살 수 있냐고. 누군가와의 깊고 진실한 관계는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다고. 작가는 주인공을 통해 인간이 지닌 단 한 가지 공통적인 본성을 언급한다. 사람은 세상을 향해 손을 뻗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주어진 젊음을 후회 없이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계속적인 도전을 시사하는 주인공은 첨예하게 대립하는 젊음과 늙음 사이에서 무게중심을 잡는다. 한결 단단해진 모습으로 우뚝 선다. 정해진 미래가 없어도 소설은 꽉 찬 해피 엔딩이다. 미래를 향하여 달려갈 준비가 되어있고 중간에 넘어지더라도 땅을 딛고 다시 일어설 의지가 충분하며 그녀의 발 아래에는 현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작품의 제목이 어째서 늙음의 나라가 아니라 젊음의 나라일까. 읽는 내내 품고 있던 질문이다. 소설의 결말에서 답을 찾는다. 노인의, 노인에 의한, 노인을 위한 이야기인 듯 온통 노인으로 도배를 한 이 소설은 다음의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오늘에 발을 디딘 채로 내일보다 젊으니까.' 소설의 주제이면서 제목을 설명하는 문장이라 판단한다.

진시황이 찾던 불로초는 먹으면 늙지 않는 풀이다. 아직 그런 신비의 명약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 인간의 몸은 필연적으로 늙는다. 반면 마음은 유기체의 순차적 변화를 따르지 않는다. 사람을 젊게 만드는 건 숫자가 아니다. 육체가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마음의 나이는 얼마든 되감기 할 수 있다. 마음에 작용하는 불로초, ‘오늘을 먹는다면. 작가의 말처럼 오늘에 단단하게 뿌리를 박고 있으면 흔들리지 않고 미래로, 미지의 세계로 가지를 뻗으며 새로운 무늬로 삶을 채울 수 있다.’

과거에 시선을 두면 나는 어제보다 노인이다. 미래를 염두에 두고 현재에 서 있으면 내일보다 젊은 순간을 사니 앞으로 남은 삶에서 나는 언제나 젊다. 기준점을 현재에 두는 한 불로초를 먹은 듯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젊음의 나라를 살 것인가, 과거를 무한 리플레이하며 늙음의 나라를 살 것인가. 당신이 발을 디디고 있는 시간에 답이 있다.

 

책 속에는 작가가 건네는 메시지들이 여러 종류의 호르몬처럼 담긴다. 책장을 펼치는 순간, 호르몬들은 독자의 시선을 통해 마음으로 들어와 혈액처럼 흐른다. 수많은 호르몬 중 몇몇 종류가 독자와 공명하는 순간, 독자의 마음은 호르몬 수용체가 된다. 내가 수용하는 걸 당신이 수용하리라는 법은 없다. 당신과 나의 느낌이 다른 이유이다. 전적으로 저를 믿으시면 위험하다는 말이다.

전작 아몬드가 주었던 몰입감과 삶에 대한 문제의식이 이 소설에도 고스란히 구현된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존재, 선 안에서 보호받는 이들과 선 밖의 사람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 사람 AI, 젊은이와 노인, 꿈과 현실, 미래의 직업, 돈으로 대체할 수 없는 요소, 이민자와 이주민, 과거와 미래, 죽음을 대하는 상반된 시각재력이 넘치는 이들에게만 제공되는 선택사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쌓여있는 이야기가 많다.

리뷰어의 관점은 언제나 편향적이다. '수많은 사람들 그중에 그대를 만나'듯이 나의 마음과 공명을 일으킨 서사에만 느낌을 연결한다. 그러므로 이 리뷰는 이 책을 완벽하게 소개하고 있지 않다. 일부 사실을 토대로 각색한 지극히 주관적인 허구에 가깝다. 소설을 읽은 1인의 느낌을 완벽하게 구현할 뿐이다. 당신의 호르몬 수용체가 어떤 호르몬을 받아들일지 궁금하지 않은가. 결론은 하나다. 직접 소설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p101, 8째 줄: 고래를 고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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