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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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전지 작업으로 짤막한 가지만 흉흉하게 남아있던 나무. 왜 그 생명들이 죽었다고 여겼을까. 엄연히 땅에 뿌리를 내리고 꿋꿋하게 서 있는데 말이다. 4월 중순을 넘어서자 야들야들 연둣빛 이파리들이 빼꼼 빼꼼 고개를 내민다. 생명은 참으로 끈질기구나. 이렇게 절망을 뚫고 다시, 봄으로 걸어가는구나. 작은 쉼표 같은 뭉클함이 심장을 훑고 간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겨울철 표어처럼, 작은 여지만 있다면 기어이 불꽃으로 타오를 준비가 되어있는 걸까.

반면 손끝에 닿자마자 녹아버리는 눈꽃처럼 순식간에 사그라지는 것 또한 생명의 불꽃이다. 극단은 통한다던가. "사람 쉽게 안 죽어."라는 말이 무색하도록 허무한 죽음도 존재하는 듯하다. 그런 죽음은 새하얀 빛깔의 속성과 닮아있을까. 빨주노초파남보 여러 감정이 뒤섞여 복잡하지만 결국 없는 듯 단순하게 보이는 색처럼.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는 이런 느낌을 닮아있다. 내내 시리면서 데일 듯한 이야기다. 극단을 품은 양 상반된 요소들이 혼재한다. 심장이 동상을 입은 듯 화끈해진다. 질식할 듯 춤을 추는 하얀 눈이 까만 밤을 뚫고 절규한다. 고요한 눈처럼 사락사락 내리는 문장을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 쉼 없이 쌓이는 눈의 무게를 무방비 상태로 감당하지 못할지 모른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 사건을 다룬 소설이다. 일적으로 만나 친구가 된 경하와 인선. 이야기는 인선의 어머니와 이모가 겪은 4.3 사건을 인선이 경하에게 들려주는 방식으로 펼쳐진다. 당시 상황과 역사적 현장에 있었던 이들의 트라우마가 생생하게 서술된다. 하루키의 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 나오는 도서관 관장님의 유령처럼 인선의 영혼은 경하 앞에 등장하여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역사적 기록을 펼쳐 보여준다.

경하는 유서를 써 놓을 정도로 삶의 구석까지 내몰린 상태이다. 불쑥 온 인선의 연락에 제주로 내려가게 된 그녀는 가장 낮은 곳에서 4.3 사건을 경청하는 독자의 아바타가 되어 역사의 장막에 가려진 사실을 목도한다.

몽환적인 시어인 듯 간지처럼 삽입된 문장들은 서사에 생생한 숨결을 불어 넣는다.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주변의 밝기와 소리와 온도를 조절한다. 몇몇 문장으로 핀 조명 안에 담긴 진실은 더욱 또렷하게 부각 된다.

작가는 4.3의 정체성과 연결된 소설적 장치를 선택한다. ', , 불꽃'이라는 1, 2, 3부의 제목부터 '결정, , 폭설, , 남은 빛, 나무, 작별하지 않는다, 그림자들, 바람, 정적, 낙하, 바다 아래'의 소제목에 이르기까지 모든 제목이 화룡점정인 양 주제의 핵심과 연결된다. 전개의 마지막에 가까워지면 픽션적 서사는 증발하고 작가가 알리고자 하는 역사적 장면만이 심장에 각인된다.

 

작가 한강의 문장은 섬세하다. 육각의 눈의 결정을 만들어내는 한 변의 나뭇가지처럼. 심장에 톡 닿으면 금세 녹아버릴 듯 물기 어린 문장들이다. 시를 읽는 듯한 간결함이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글자가 후두둑 떨어져 나갔을까. 고갱이로 이루어진 가뿐한 문장들이 스르르 녹아들어 스며든다. 마음이 축축해진다.

작별하지 '않는다''못한다'의 차이는 분명하다. 소설의 얼개를 구성하는 자료를 조사할수록 작가의 결론은 점점 선명해졌으리라. 부정어임에도 불구하고 전자에는 주체의 결연한 의지가 담겨있으니까. 그런 의지들이 진실을 향해 올곧게 나아가기에 잘려나간 가지 끝에 다시 잎이 돋아나는 지도 모른다.

작가의 인터뷰 장면이나 그녀가 구사하는 언어를 볼 때면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떠오른다. 연약해 보이면서 심지가 굳은 사람,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 작품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가벼워 보이면서도 무거운, 부드러워 보이면서도 단단한, 어둑해 보이면서도 빛이 보이는, 죽음을 다루는 가운데 삶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 이야기. 이런 이유로 한강의 소설 세계를 통과하면 심연의 바다를 순식간에 다녀온 해녀가 된 기분이 든다.

소설을 읽는 동안 넷플릭스 드라마<폭싹 속았수다>를 보게 된 건 우연이었을까. '완전히 속았다'는 말로 잘못 알았다가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의미라는 걸 알고 뭉클했던 작품. 내리 16부작을 보았던 이틀 간의 시간처럼 소설 속 문장이 시선을 옭아매곤 놓아주지 않는다. 제주어가 사라질 뻔했다는 4.3을 알고 나니 더욱 찡해진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제주 4.3이 어떤 사건이냐는 질문을 받았더라면 동공 지진을 일으켰으리라. 생소한 역사인 데다 굳이 알고자 하지도 않았던 사건이다. 카더라 풍문으로 이름 정도만 들어본 터라 그토록 디테일한 소설 속 표현에 혼란의 시간을 보낸다. 어느 정도까지 사실에 근접했을까. 작가의 묘사가 차라리 상상력에 의한 과장이길 바랐다.

194731, 민간인을 향한 경찰 발포 사건을 기점으로 194843, 제주 남로당 무장대의 반란이 일어난다. 그 후 1954921일까지 7년여에 걸쳐 제주도 민간인을 향한 초토화 작전이 실행된다. '반군 진압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들이민 학살, 이념이나 종교적 신념으로 인한 학살, 특정 지역 거주민을 대상으로 한 학살, 보복성 학살'. 지구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학살의 유형이 다 있다는 나무위키의 기록을 본다.

6.25 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다는 사건. 제주도민의 10분의 1이 죽거나 행방불명되었으며 초토화 작전으로 인해 촌락별 제사 일이 거의 비슷하다는 황망한 사실. 25천 명에서 3만 명으로 추정된다는 사망자 수치가 실감 나지 않는다.

4.3 평화기념관에는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 '백비'가 있다고 한다. 역사적 진실에 입각한 이름을 새기지 못해 제주 4.3 다음의 어미를 명확하게 붙이지 못한다고.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어떤 이름으로 정의해야 희생자의 넋을 보듬을 수 있을까.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거짓이 없는 사실'. '진실'의 사전적 의미는 이토록 명료하건만 현실 세계에서 이 둘을 가르는 일은 만만치 않다. 탐욕이 개입된 세상에서는 부분적인 사실로 전체를 대표하는 양 커다랗게 부풀리는 적반하장은 카오스를 만든다. 안개처럼 진실의 주변을 뿌옇게 둘러싸 제3자의 시야를 가린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실화인지 만들어낸 일화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빨갱이'를 괴물로 여기던 국민학교 시절, 교육으로 배운 어떤 내용도 의심하지 않았다. 5학년 이후 어렴풋이 들었던 5.18 광주도 무섭고도 과격한 사람들이 일으킨 폭동 사태로 여겼던 날들도 있다.

하나하나 거짓의 꺼풀이 벗겨질 때마다 마음속 혼란은 점점 커진다. 무엇보다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독특한 사람들로 간주하던 사람들이 놀랍도록 평범한 이들이라는 점이다. 오다가다 볼 수 있는, 동네에서 흔히 마주치는, 너무 평범해서 기억에 남아있지도 않은, 그런 이들이 역사의 중심에 담겨있다는 사실이다.

2025411일 오전 65. 드디어 그들의 진실이 '진실을 밝히다: 제주 4.3 아카이브'라는 제목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다. 당시의 기록뿐 아니라 후대의 진상 규명, 상생과 화해의 기록도 등재 대상이라고 한다. 수많은 유골을 은폐했던 시리고 어두운 덮개가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렇게 조금씩 벗겨지는 걸까.

 

토닥토닥 영혼을 덮기 위한 수의 같다. 겉표지의 바다 위에 그려진 장막이 무고하게 희생된 이들을 감싸주는 듯하다. 쓰나미인 양 몰려오는 무엇이라 생각했던 하얀 천을 가만히 응시한다. 작가의 표현대로 '바다 대신 흰 천 같은 눈이 하늘에서부터 밀려 내려와 그들을 덮어주는' 걸까. 성난 파도처럼 밀려드는 폭력으로부터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펼쳐진 얇은 울타리. 속절없이 당할지라도 함께 흠뻑 젖을 준비가 되어있는 장막은 어쩌면 소설 속 작가의 외침을 극대화하기 위한 오브제인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니 머리에 쥐가 난 것처럼 미세한 전류가 뇌를 감싸고 도는 듯 저릿하다. '영원처럼 느린 속력으로 눈송이들이 허공에서 떨어질 때,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들이 갑자기 뚜렷하게 구별된다.'는 소설 속 문장처럼 정신이 번쩍 든다.

인간의 광기와 잔인한 본성의 결과를 지켜보는 내내 제주어 '속솜허라'의 주문에 걸린 듯 숨을 죽인 채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삶과 죽음 앞에서 영혼은 조금 더 깊어지고 보다 무거워지나. 무심히 지나친 진실들이 방향 지시등처럼 깜빡인다. 이제, 속솜허지 마소서. 당신들의 희생 덕분에 또 다른 평범한 이들에게 봄이 오고 있으니. 점멸등처럼 봄을 향해 반짝이는 연둣빛 신호를 따라 조심스레 코끝 찡한 봄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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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턴 투 네이처 - 삶이 불안할 때 나는 숲으로 갑니다
에마 로에베 지음, 이성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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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상한 뼈마디를 드러낸 나무들이 곳곳에 있다. 아파트 단지 전지 작업으로 잔가지가 제거된 나무들이다. 깔끔하다기보다 순식간에 댕강 머리채를 잘린 듯 음산하다. 괜스레 착찹해진다.

삭막한 풍경을 둘러보다 봄이 그리기 시작한 점묘화를 발견한다. 키 작은 산수유꽃 몇 점이 흔들린다. 가지 위로 내려앉은 노란 햇살 부스러기인 양 반짝인다. 가지 끝에 매달린 풍경처럼 딸랑딸랑 봄을 알린다. 굳어졌던 마음이 사르르 녹는다.

꽃을 발견한 건 우연일까. 평상시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은 필연의 뿌리와 연결되는 게 아닐까. 사소해서 알아차리기 어려울 뿐 거슬러 올라가면 결정적인 계기는 분명 존재하리라. 세상을 향해 빼꼼 고개를 내민 새싹인 듯 자연이 나를 향해 점점 다가오고 있다.

내가 자연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표현이 보다 정확하리라. 그 계기에는 에마 로에베의 리턴 투 네이처가 있다. 겨울이나 여름, 혹은 가을에 만났더라면 삶의 풍경은 지금과는 또 달랐으리라. 봄에, 이 봄에 자연을 향해 나의 몸을 이끄는 책을 만난 건 우연일까.

 

리턴 투 네이처는 플러그가 뽑혀가는 자연에 다시 인간을 연결하여 서로 윈윈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책이다. 따로 일정을 잡아 여행하지 않아도 자연과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공유한다. 일상으로 자연을 끌어다 놓는다.

공원과 정원, 바다와 해안, 산과 고지대, 숲과 나무, 눈과 빙하, 사막과 건조지, 강과 개울 등 세상의 모든 곳을 충전 지대로 만들고자 시도한다. 작가의 시각에는 도시와 시가지조차 자연의 일부로 비추어진다.

그녀는 여덟 군데의 특징을 세세하게 살피며 각각의 환경마다 우리가 감각하는 요소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여준다. 많은 이들의 실험 자료를 토대로 과학적인 증거를 제시한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이들의 노력을 목도하니 마음이 따뜻해진다.

작가 에마 로에베의 시도에서 높이 평가할 만한 점은 자연으로의 진입 장벽을 대폭 낮추었다는 점이다. 그녀는 해당 장소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시간별로 제안한다. 5~10분이 생긴다면, 1시간이 생긴다면, 더 많은 시간이 생긴다면, 그 장소가 가까이 없다면 어떤 행동을 취하면 좋을지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나아가 더 생각해볼 것, 그 장소가 지속 가능하도록 사고방식을 전환할 것을 당부한다.

 

보는 것만으로도 편안해지는 책 표지이다. 초록 그림자를 품은 초록 물에서 신선한 산소가 송글송글 나오는 듯하다. 매끄러운 수면이 보드라운 융단 같다. 책날개를 들춰보며 이 장면이 그림이 아니라 사진이라는 사실에 안도한다. 지구 어딘가에는 이런 풍경의 초록 세상이 존재한다는 의미니까. 그 앞에 서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니 마음이 정갈해진다.

'현대인의 대부분은 일상의 87%를 실내에서 보내고 있다!' 띠지에 적힌 문구 앞에서 멈칫한다. 이동 시간을 빼면 집 아니면 직장 혹은 스터디 카페가 대체적인 나의 루틴이니 맞는 말이다. 요즘 내 삶의 무대에 자연이 있었던가. 휘리릭 하루를 되감기 한다. 초록은커녕 덜 익은 연두도 없다.

주변의 초록을 찾아라! 이 책을 읽는 동안 수행할 미션을 정해본다. '삶이 불안할 때 나는 숲으로 갑니다.' 부제 앞에서 서성인다. 숲에 가면 불안이 녹아내릴 수 있을까. 하지만 숲이 없는데 무슨 수로?

'가장 쉽고 깊은 치유를 만나는 자연으로의 여정'이라. 가장 쉽다니까 작가를 한 번 믿어볼까. 작은 기대를 품고 종이의 숲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자연을 접한다는 건 여행처럼 큰맘을 먹어야 가능한 일이라 여겨왔다. 이는 당장 오늘은 어렵다는 의미이다. '쉽다'는 작가의 말을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었다.

"! 시험 문제 쉽게 내셨나요?" "그럼! 너무 쉬워서 100점이 너무 많이 나오면 좋아서 어쩌지?" 시험이 끝난 후, 녀석들은 더 이상 교사의 쉽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전문가의 쉬움은 이토록 다르니, 그런 '쉬움'일 수도 있으니까. 쉬우면서 깊은 치유가 과연 가능할까.

마음이 들썩이기 시작한 건 '5~10분이 생긴다면'이라는 문구를 보면서부터다. 어쩌면? 지금 당장 5분이나 10분을 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하루 5, 자연과의 만남이 선사하는 깊은 회복력' . 띠지에 적힌 문구를 다시 보며 나는 그 '5' 도전을 해보기로 한다.

정기 인사이동으로 3월부터 바뀐 업무 환경, 정시 퇴근은 꿈도 꾸지 못하는 나날을 보낸 지 두 주 남짓 되었을까. 졸린 눈을 비비며 꾸역꾸역 꿈에만 존재하는 듯한 자연을 한 챕터씩 겨우 넘어가던 날, 새싹처럼 꼬박꼬박 튀어나오는 '5'의 도발을 더 이상 간과할 수 없게 된다. 지난 수요일, 하던 일을 과감하게 접고 직장을 나선다.

 

교문을 나와 왼쪽 주택가의 골목길을 따라 주욱 내려가다 큰 길이 등장하면 횡단보도를 건너 잿빛 도롯가를 조금 걷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탄다. 퇴근 경로이다. 그날은 무엇에 이끌린 듯 반대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다른 루틴을 택하고 싶었다.

몇 걸음 걸으니 횡단보도 너머로 지금껏 눈에 띄지 않던 언덕이 보인다. ? 생각보다 코앞에 있는 지형지물에 당황한다. 8년 전, 분명 이 동네에 살았는데, 그때는 없었잖아.

아니, 아니, 없었을 리가 없다. 알라딘의 거인이 산을 송두리째 옮겨 놓은 게 아니라면 말이다. 왜 이런 곳을 보지 못한 걸까.

나 같은 무릎 병자도 한 번 올라가 볼까 생각이 들 정도로 만만한 흙길이다. 고동색의 나무 난간까지 있으니 인간이 다니는 길은 맞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장소.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미지의 공간이다. 보통 때라면 결코 가지 않을 곳에 첫 발을 딛는다. 산이라 하기에는 지극히 낮지만 저 위로 나무가 보이고, 흙이 있다는 것만으로 약간의 친숙함까지 느낀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자연을 생각해서일까.

 

생각보다는 실천이지. 호기롭게 '산책'이라 부르며 미지의 장소에 오른다. , 막다른 길이 나오면 되돌아오면 되니까 조금만 가보자. 갈색의 낮은 울타리 옆, 살짝 경사진 흙길을 몇 걸음 올라가니 짚이 깔린 길이 이어진다. 다시 몇 개의 나무 계단을 밟으니 소담스런 공터가 펼쳐진다. 왼편으로는 제법 나무들도 있어 산속에 있는 느낌이 든다.

저 아래 도시와의 경계도 없지만 산으로 순간 이동이라도 한 듯 공기의 흐름이 바뀐다. 불과 5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먼지 가득한 도로가 잿빛 강물인 양 흐르고 있건만 무슨 마법이 펼쳐진 걸까. 단오 그네를 떠올리게 만드는 기다란 동아줄, 나무 벤치들, 야트막한 둔턱에 군데군데 자라난 커다란 나뭇가지 사이로 하루를 열심히 달려온 태양이 마지막 존재감을 뿜어낸다.

천천히 걷는 어르신들, 주인과 산책하는 나른한 강아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 주변의 풍경들이 슬로우 화면으로 펼쳐진다. 드문드문 산책하는 사람들도, 간간이 흔들리는 나무들도, 사락사락 나뭇잎을 부비는 바람도, 천천히 천천히 나를 스친다. 무작정 앞으로 걸어가니 익숙한 지하철역이 보인다. 불과 5분 정도가 지나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내일 비가 올까. 습관적으로 휴대폰 날씨 앱을 하늘인 양 들여다보다 움찔한다. 하늘 한 번 올려다보지 않고 날씨를 검색하다니. 하늘을 본 게 언제였더라. 구름이 얼마나 많이 흘러 들어와 떠 있는지, 하늘이 무슨 빛으로 펼쳐져 있는지, 바라보지도 않은 채 머리 위 세상을 알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아이러니라니.

미리 안다고 해서 안심이 되는 건 아니다. 의지가 없는 구름은 변화무쌍하게 흘러가니까. 예보의 명령에 따르는 구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당신도 알고 있다. 자연은 그저 자연스럽게 자연의 길을 갈 뿐이다.

일주일 치 날씨를 1초 만에 예측하며 미래를 당겨오는 세상이다. 삶이 점점 촘촘해진다. 이러다 눌러 붙는 어깨 근육처럼 경직되는 건 아닐까. 언제부터 이 조그마한 휴대폰 안에 세상이 담기게 되었을까. 세상이 넓어진 건 맞나. 온라인 세상이 펼쳐지면서 세상이 두 배로 확장된 듯 보이지만 오히려 좁아지는 건 아닐까.

지하철 안에도 온통 휴대폰 속 세상이 들어와 있다. 휴대폰에 몰입하는 사람들이 한가득이다. 시각과 청각만 열어둔 채로 네모난 컴퓨터와 휴대폰 속 세상으로 빨려 들어간다. 오프라인 세상을 향하는 감각이 점점 둔감해지는 줄 느끼지도 못한 채.

 

다음 날 퇴근길에도 흙길을 걷는다. 닫혀있던 다른 감각 기관들이 열린다. 향긋한 나무 내음이 코끝을 스친다. 한껏 들이마신다. 언제부터 새 소리가 들렸던 걸까. 부드러운 바람이 뺨을 어루만지며 달아난다. 산책로로 조성된 장소, 주민들을 위한 운동 공간, 존재하는지 몰랐던 공원이 이토록 가까이 있었다니.

몽글몽글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폭신한 감촉이 운동화를 뚫고 양말을 감싸고 있는 발바닥까지 전해진다. 두 발이 플러그라도 된 양 짚이 깔린 길을 밟으며 충전한다. 양말을 벗고 싶은 마음을 자제한다. 발에 묻을 흙을 무사히 제거할 대책을 마련하는 대로 기필코 시도해 보리라.

많이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은 생각보다 많이 흐르지 않았다. 배경은 금세 시멘트 바닥으로 바뀌지만, 고속 충전을 한 듯 피로가 풀린다. 한 달 전만 해도 상상도 하지 못한 경험이다. 실내화와 실외화의 구분이 굳이 필요할까 싶은 도어 투 도어의 출퇴근길. 딱딱한 바닥에서 바닥으로 이어지던 경로에 흙 내음이 슬그머니 끼어 들어온다.

다른 경로로 5분 산책을 한다. 분명 트인 공간인데 묘하다. 나무와 흙으로 둘러싸인 그곳에만 가면 비눗방울 속으로 들어간 듯 공간의 흐름이 다르게 느껴진다.

 

구획이 정해져 있지 않은 흙길은 많은 경로를 가능하게 만든다. 경우의 수가 많다는 건 나의 하루를 다른 빛깔로 채색할 수 있다는 의미다. 우뚝 선 나무들은 계절마다 다른 옷으로 갈아입으며 변신할 터이다. 하루의 산책은 그러데이션처럼 매번 조금씩 다르리라. 나만의 산책길에 펼쳐질 미지의 풍경을 가늠하니 작은 설렘이 새처럼 날아든다.

에너지를 충전하며 하루를 마무리한 지 일주일째다. 이제야 서류나 모니터가 아닌 사람들이 보인다. 새로 바뀐 동료들과 아이들, 앞으로 마주하게 될 그들의 영혼이 나에게 펼쳐 보여줄 세계가 산책길 풍경만큼이나 기대된다. 5분의 쉼표가 부린 마법이다.

진동수가 일치하는 두 개의 진동이 만나면 큰 폭으로 진동한다. 삶의 시작과 자연의 시작이 만나 공명을 일으킨 걸까. 봄에, 새싹이 돋아나는 시작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니 더욱 울림이 크다.

그 계기가 되어준 이 책을 바로 이 시기에 만난 건 그래, 이건 차라리 필연이다. 첫걸음마를 하는 아이처럼 삶을 채워보라는, 삶이 주는 선물이다. 5분 쉼표를 품에 안으니 마음이 간질거린다. 심장에 파릇한 새싹이 돋아 영혼이 향긋해진다.

 

p239, 5째 줄: 사막과 건조지에서 더 생각해볼 것 글씨체를 크게

p275, 밑에서 3째 줄: 강과 개울에서 더 생각해볼 것 글씨체를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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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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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프일까. 한 달이 넘게 어떤 글도 흘러나오지 않는다. 마음에 변비라도 걸린 듯 혼란스러운 감정과 생각의 찌꺼기가 쌓이고 또 쌓인다. 의도적이지 않은 쌓임의 덩어리는 실체가 없다. 찬란하게 빛나는 육각의 눈 결정이 아니라 무게에 꾹꾹 눌려 뭉뚱그려지다 잿빛 얼음덩이로 그늘진 구석에 숨어들어 간다. 문장이라도, 단어라도 끌어올리려 안간힘을 쓴다. 절뚝거리는 손가락이 간헐적으로 키보드를 걷는다. 말을 처음 배우는 아기처럼 분절된 문구가 더듬더듬 드러난다.

글은 양방향 화살표인가. 나로부터 나오지 않는 글은 내게 들어오지도 않을 작정인가. 책 속의 글자가 설익은 밥알인 양 심장의 외피를 겉돌다 떼구르르 달아난다. 질척한 감정들 사이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는 듯이. 책장을 몇 번이나 들춰보다 덮기를 반복한다. 책상 위에 놓인 책 표지를 바라만 보다 근 한 달을 어정쩡하게 날려 보낸다.

다른 이의 말에 집중하기가 어렵다. 양옆 시야를 가린 경주마처럼 종종 주변 풍경을 놓친다. 융통성 없는 시선은 어찌 눈앞만 질주하는가. 키오스크에서 코앞에 버젓이 드러나 있는 메뉴를 발견하지 못한다. 몇 번의 동공 지진 후, "먼저 하세요." 타발적인 양보심을 발휘한다. 생각한 대로 잠시 바뀌어 보이는 글자의 변신술을 경험한다. 방금 들은 말도 기억나지 않거나 헷갈린다.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나이로 인한 인지 장애를 슬그머니 의심해 본다.

 

온 식구의 생일과 전화번호를 또렷이 기억하시는 80대 중반의 친정어머니가 스친다. 당신에 비하면 아직도 팔팔한 50대 청춘이니 세월에 책임을 전가하기에는 다소 민망하다. 어쨌든 빠르게 녹아내리는 눈인 양 자존감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푸념인 듯 중얼거린 잿빛 시간, 자존감이 바닥을 구르던 시간을 과거형으로 표현한 건 지금은 서서히 벗어나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 시작에는 김기태의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이 있다.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은 무기력자에게 주어진 기간 미션이었으니까. 독서 모임 날짜가 임박해 간다는 건 벼락치는 읽기라도 시작하지 않으면 리뷰고 나발이고 몽땅 망해버릴 데드 라인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의무감이 슬럼프의 등을 밟고 올라선다.

'작가의 말' 없이 세상을 향해 던져진 글 덩어리를 접한다. 작가는 글로 말하는 존재이니 굳이 '작가의 말'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

한 번 펼치니까 느리게나마 읽힌다. 다행이다.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내용을 기억하려 긴장하지 않아도, 맥락을 찾아 헤매지 않아도 이해가 되는 내용이다. 단편 모음집이니 짤막한 호흡으로도 감당이 된다. 대하소설이거나 스펙터클다이내믹한 이야기였으면 어쩔 뻔했을까. 질식할 듯 마음이 답답하거나 감성의 온도 차로 인해 유리화된 멘탈에 균열이 생겼을지 모를 일이다.

 

그의 문장을 만나서 정말 다행이다. '일하면서 듣기 좋은 카페 음악, 생각 없이 틀어만 놔봐~' 음악을 듣는 기분이랄까. 산책하는 속도로 독자를 이끄는 글이다. 그렇다고 마냥 가볍지만은 않다. 피라미드같은 사회 구조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들, 생태계로 비유하자면 생산자의 범주에 포함되는 평범한 이들의 이야기이다.

역도 선수 소녀, 케이팝 아이돌 그룹의 팬, 사회가 요구하는 무난한 삶을 걸어가는 직장인, 가난으로 공감대가 형성되는 두 사람, 짝짓기 예능 프로그램에 참여한 여자, 불안을 품고 사는 노인, 교육적 딜레마 사이에서 고민하는 교사, 강박증에 얽매인 남자,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이 배출한 스타와 팬. 각자의 자리에서 진지하게 살아가는 아홉 편의 서사 앞에서 마음은 서서히 차분해진다.

사회라는 연극 무대에 서는 소수의 주인공이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 1이거나 무대 배경으로 오도카니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이거나 주인공을 비추는 핀 조명이거나 군무를 추는 N분의 1인이거나 은은하게 흐르는 BGM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그들의 독백과 외침을 경청하며 공감하게 만드는 흡인력, 김기태 작가의 글이 지닌 힘이다.

작가의 의식의 흐름을 대략이나마 따라가고 싶어 최초의 작품부터 출간 순서대로 읽기로 한다. 여덟 번째로 배치된 작품의 문고리를 잡아당긴다. 2022년 동아일보 신춘 문예 당선작 무겁고 높은부터 시작한 건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 된다.

 

무겁고 높은에서 역도 선수인 고3 송희의 목표는 100킬로그램의 바벨을 버려보는 거다. 들어보는 게 아니라 버려보는 것. 그녀는 버려보기 위해 들어 올린다. 버리는 것과 떨어뜨리는 게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전자와 후자를 판단하는 기준은 자발성이다. 스스로의 의지로 무게로부터 벗어나는 행위는 삶의 속성과도 자연스레 중첩된다. 시선의 반전을 꾀하는 작가의 관점에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녹록하지 않은 가정 환경이 묘사되면서 주인공을 둘러싼 삶의 무게가 그려진다. 그녀의 독백을 따라가면 삶을 마주하는 진지하고 맑은 용기를 만난다. 묵직하면서 당당한 태도는 절로 내 자신을 돌아보는 거울이 된다. '역도' 대신 ''으로 주어를 바꾸어 읽어도 괴리감이 없다. '앉아서 시작하고 일어서서 끝낸다'던지, '들어보고 싶다기보다 버려보고 싶었다'던지, '내 손안에 있는 내 것. 내 몫의 약속'이라든지. 시린 삶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삶에 대한 열기를 감지한다. 저온 고압에서 만들어진다는 불타는 얼음 '하이드레이트'를 떠올린다.

작가는 노력 끝에 성공한다는 평범한 전개를 거부한다. 현실은 동화가 아니니까. 선발전에서 목표 달성을 하지 못하고 바벨을 떨어뜨린 주인공은 운동과는 무관한 길을 걷게 될 예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그녀의 목표는 자신과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드디어 100킬로그램을 깔끔하게 버리고 역도를 그만두는 장면에서는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문장의 온도가 고스란히 마음에 스며들어 덩달아 심장이 뜨거워진다.

 

조금씩 마음이 열리면서 문장 길 산책에 약간의 속도가 붙는다. 세상 모든 바다에서는 공연장 안에만 있는 평화를 바라보고, 전조등에서는 뭔가 다른 게 되어볼 수 있지 않느냐는 문장 앞에 멈추며 한 인간의 본질을 가늠한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에서는 미미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헤아리며 '친한 사이'를 정의해보기도 한다.

'친한 사이'는 어떤 설명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지인들의 얼굴을 영화 필름이 만들어내는 파노라마인 양 돌려본다. 함께 있는 장면이 어쩐지 어색한 사람, 매번 그래왔던 듯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사람, 아무런 느낌 없이 스쳐 가는 사람들이 차례로 떠오른다. '마주 보고 앉았을 때 어떤 이질감도 없는 사이, 자기 검열을 거치지 않고 대화해도 부담 없는 사이'로 나만의 정의를 내려본다.

롤링 선더 러브에서는 배경을 제거한 사람에 대하여, 주인공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을 나에게도 던져보며 내가 원하는 것을 손꼽아본다. 지난주, 발령받은 학교에 출근했을 때 교사 연수 중 이루어졌던 아이스브레이킹 활동이 생각난다. 모둠별로 돌아가면서 나의 장점 10개를 말하면서 손가락 접기. 역지사지를 떠올리던 날이다. 예전에 담임 학급의 학생들에게 적어내라고 했던, 열 가지도 없냐며 잘 생각해 보라고 웃으면서 다그치던 인간은 손가락의 개수가 이렇게나 많았나 새삼 깨달으며 반성한다. 지금 복기하며 천천히 꼽아보니 발가락까지 동원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아이들은 장점이 없었던 게 아니라 얼마 전의 나처럼 나의 장점을 헤아려 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게 아닐까.

 

마음속에 여유 대신 불안을 품은 노인의 이야기 태엽은 121/2바퀴에서는 '왜 시도도 안 해봤을까'라는 문장이 맥락과 관계없이 심장에 꽂힌다. 겁이 많아서, 이렇게 하면 저렇게 될까 봐.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당겨와서 걱정하느라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흘려보냈던가. 그래서 달라질 수 있었던 삶의 풍경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홀로그램이다. 시도해 보지 않아 결코 알 수 없는 나의 모습이 문득 궁금해진다.

이상적인 수업을 꿈꾸는 교사의 이야기 보편 교양에서 가장 오랜 시간 머문다. 충분한 연금 수령액에 도달하려면 십오 년은 더 일해야 하며 그 연금을 실제로 받으려면 이십오 년이 남아있는 주인공. 다행히 나를 비껴갔지만, 젊은 주변 선생님들의 현실이 남의 일 같지가 않다. '교육은 예전에 끝났어', '제가 뭘 가르쳤다고 하던가요?' 다큐멘터리를 목도 하듯 사실적으로 묘사된 교실 풍경이 너무나 익숙해서 소름이 돋는다. 크고 작은 교실 붕괴를 경험하며 근근이 버텨가는 삶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수업 첫날의 수강생은 교사의 책임이 아니다. 그러나 수업 마지막 날의 수강생은 교사의 책임이다.' 반은 체념하는 마음이 크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아직도 수업을 잘하고 싶은 바람이 있다. 무모하리만치 열심히 수업을 준비하는 주인공을 바라보며 첫 학교에서의 내 모습을 떠올린다. 때로는 실수도 하고 어설펐지만, 새로운 시도에 겁이 없던 장면들이 재생된다. 괜스레 코끝이 찡해진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어떤 실수는 바로잡을 수 없을 뿐이다.'팍스 아토미카에서 묘사되는 강박증을 보며 나를 살핀다. 주인공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나 역시 정리 정돈에서 약간의 강박을 보인다. 싱크대 수납장에 라면 봉지를 넣을 때 무늬를 맞춘다든지, 책을 높이별, 색깔별로 정리한다든지, 패턴에 맞춰 물건을 종류별로 배열한다든지. 정돈된 환경에서 마음의 안정감을 느낀다. 다른 이에게는 이를 강요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마음이 불편하면 그 방향을 바라보지 않는 것으로 나름 자신과 타협을 본다.

로나, 우리의 별에 대해서는 메모해 놓은 내용이 없다.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을 본방 사수했던 예전이라면 달랐으리라. 격하게 공감하며 또 다른 문장을 독해하고 있을지 모른다. 현재의 나로서는 관심에서 벗어난 영역이라 특별한 울림점은 찾지 못한다.

학교를 옮기는 해이다. 매년 가르치는 학생들은 달라지지만, 교수 환경의 변화에서 오는 긴장감이 크다. 나의 관심사는 변화하는 환경에 어떻게 잘 녹아 들어갈까이다. 이런 이유로 보편 교양에 많은 공감을 하며 덩달아 수업과 학생 지도를 고민하는 시간을 가진다.

마음 군데군데 작은 뾰루지가 나 있는 이미지를 상상한다. 그걸 건드리는 문장들에 반응하게 되는 걸까. 누구에게나 좋은 책은 없다. 고민으로 생긴 뾰루지를 짜주거나 연고를 발라주고 밴드를 붙여주는 책을 누군가 좋아하게 될 뿐이다.

 

고민이 많았던 이유를 알겠다. 어색한 공간, 어색한 사람들, 어색한 시간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서성이며 방황할까 두려운 거였다. 나를 전혀 모르는 집단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며 집단의 일부로 자리를 잡을 때까지 걸릴 진공의 낯섦이 묵직하게 다가와서 그랬던 거다.

두려움의 다른 이름은 설렘 아닐까. 작가의 의도든 아니든 이런 생각이 나오는 데 이 책의 지분은 상당하다. 문체일 수도 있고, 문장의 속도일 수도, 서사의 색채나 온도 때문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게 번갈아 다가오면서 내 고민을 톡톡 건드렸나. 낯선 장소에서 방황하다 친근한 도로로 들어선 듯 안도감이 생긴다.

나에게는 아직도 나흘의 준비 기간이 남아있다. 다행이다. 개학 하기 전에 정신 차려서. 오랜만에 하는 3학년 담임, 과학 기획 업무, 스마트 교육, 달라진 출판사의 교과서 지도, 평균 수업시수 22시간이라도 잘 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명예롭게 퇴직하기 위해 스스로 정한 2년의 남은 기간 동안 신규 교사의 마음으로 열심히 마무리하고 싶다.

사물함의 이름표를 붙이고, 얼굴도 모르는 아이의 이름을 한 명씩 발음하며 책상 이름표를 붙이고, 교실 바닥을 쓸고, 불필요한 물건들을 버리고, 청소 도구함을 정리하고 왔다.

손끝을 맴도는 은은한 온기에 심장이 서서히 데워진다.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다. 시작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눌려있던 나의 열정은 불타는 얼음이 되어 이제 세상 밖으로 드러날 준비를 하고 있다. 시작을 준비하는 마음, 이건 분명 설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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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의 공간 일기 - 일상을 영감으로 바꾸는 인생 공간
조성익 지음 / 북스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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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다이어그램에서 나는 우주를 본다. 집합 간의 논리적 관계를 나타낸 2차원 그림을 우주의 미니어처인 양 가만히 바라본다. 가장 매력적인 건 여집합을 정의하는 그림이다. 전체 집합에 속하면서 집합 A에 속하지 않는 모든 원소의 집합. 전체 집합 U에서 우주를 의미하는 'universe'를 떠올리고 집합 A''인 양 놓아두니, A의 여집합은 자연스레 나를 둘러싼 공간이 된다.

여집합은 보집합으로도 불리운다. '()''남는다', '()''보완한다'는 뜻이다. 나는 후자의 의미가 더 마음에 든다. 나를 보완해 주는 대상이라니, 얼마나 든든한가! 온 우주가 나를 돕는 행운을 맞이하는 것처럼 온통 나를 둘러싼 공간의 존재 아닌가! 상상만 해도 오리털 이불로 폭 둘러싸인 기분이다.

, , 집합에서 우주라뇨, 너무 오버하시는 거 아닙니까! 집합 문제를 풀며 머리를 쥐어짜다 쥐가 날 지경인 고3 학생들이 이 글을 싫어합니다. ~ 너무 약올라하지 말도록. 머리를 쥐어짜지 않게 되면 삭신을 쥐어짜게 되니 그럭저럭 공평한 걸로 여깁시다!

처음부터 이토록 한가한 시선을 가진 건 아니다. 지긋지긋했던 함수의 그래프에서 유려한 곡선미를 발견하거나 사칙연산 기호에 인생을 접목하는 건 수학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치열한 점수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 우연히 접하는 수학 기호는 삶의 속성을 안은 채 다가오기 시작한다.

 

치열한 삶을 살아가던 시기에 공간의 존재감을 느낄 여유는 없다. 세상이라는 뚜껑으로 들어가는 사인펜처럼 세상과 나 사이의 간극이 좁아지기 때문이다. 그 시기, 공간이라 여길만한 곳은 학교를 제외하면 집이 유일했다.

어둡고 좁고 시리고 후텁지근한 공간을 메우던 가난은 공간을 비슷한 냄새로 채운다. 안방 문만 열면 바로 바깥인 삶에서의 집은 하루를 통과하고 돌아온 몸을 잠시 뉘는 장소 정도의 의미를 지닌다. 서로를 보듬는 가족들의 온기가 아니었다면 빠져나오지 못했을 공간, 공간을 인지하게 된 나이로부터 결혼 전까지의 기억이다.

어둠과 넓이와 추위와 더위로부터 벗어나니 36.5도의 온기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공간에 놓인다. 20대까지는 몸이 시렸다면, 30대와 40대를 건너는 동안에는 마음이 시렸다. 의무가 대부분인 삶에서 '즐거운 나의 집'은 노래에서나 등장하는 유토피아였다. 여집합과 나 사이에 이도 저도 아닌 틈이 만들어진다. 불안정한 마찰음과 눅진한 바람이 새어 들어온다. 가난에서 벗어나도 공간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건 매한가지였다.

간간이 저녁 시간에 커피숍에서 책을 읽는 시간을 확보하지만 어정쩡하면서 겉도는 상태였다. 책과 커피잔을 배경으로 종종 남겨놓은 셀카를 들여다보면 당시 나의 표정이 읽힌다. 다른 이들은 감지하지 못할 슬픔이 배어있는 눈동자가 조용히 나를 마주 본다. 안간힘을 쓰며 탈출한 공간조차 제대로 누린 것 같지는 않다.

 

건축가의 공간 일기는 인생 공간을 찾는 방법에 대한 레시피이다. 건축가 조성익은 '인생 공간은 어디에나 있다.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 뿐'이라며 책 한 권에 희망을 잔뜩 담아 건네준다. 공간을 조각하는 전문가가 공간의 맛을 직접 보고 그 느낌을 실감나게 묘사해 주니 보다 넓은 관점에서 공간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 생긴다.

그가 제시하는 방법은 세 가지이다. 첫째, 좋은 공간에 나를 둘 것, 둘째, 일상 공간을 인생 공간으로 만들 것, 셋째, 내 공간의 목소리를 찾는 것이다. 외국에 있는 유명한 공간보다 숨은 맛집 같은 장소를 안내하고, 그가 대표로 있는 건축사 사무소가 위치한 서교동에서도 자신만의 인생 공간을 찾는다.

앞부분에는 '인생 공간, 동네에서'라는 제목의 지도가 있다. 집과 일터를 포함한 공간을 그린 동네 지도다. 느슨한 공간, 오감 공간, 땡땡이 공간, 스케일 공간, 사람 구경 공간, 아날로그 공간, 몰입의 공간, 소속감의 공간, 산책 공간, 스몰 토크의 공간 등이 펼쳐진다. 군데군데 정체성을 부여하여 삶의 순간마다 머물기 위한 맞춤형 지도에서 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저자가 본문에서 소개하는 공간은 다양하다. 수도원, 교회, 성당, 묘지, 시장, 건축사 사무소, 야구장, 음악감상실, 엽서 도서관, 기차역, 사우나, 술집, 도서관, 정원, 자택, 오두막, 숙박 시설, 빵집, 민박집 등. 그가 안내하는 좋은 공간을 구경하다 보니 여행의 목적으로 삼아도 되겠다 싶다.

 

좋은 공간은 어떤 모습인가. 좋다, 나쁘다는 개인적인 취향이 적용되는 영역이지만 보편적인 조건은 있는 듯하다. 책 속에서 특히 와 닿았던 공간의 정체성을 메모한다.

첫째, 느린 속도로 머무는 공간으로 치유의 역할을 하는 '슬로 스페이스'이다. 절제된 장식, 변화하는 햇빛, 빛의 증폭기로 구성된 공간. 이 모든 조건을 갖춘 공간으로 저자는 수도원과 동네 카페를 제시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사용했다는 시간 개념 중 의미 있는 한순간을 뜻하는 카이로스 시간을 즐기기를 권한다.

둘째, 일하다가 땡땡이를 칠 수 있는 공간이다. 언제든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면서 경외심을 주는 '스케일의 공간'으로 그는 교회와 성당을 소개한다.

셋째, 계절감을 주는 공간, 시장이다. 계절감을 묘사하는 멋진 문장들이 눈에 띈다. '계절감은 시장의 인테리어, 선으로 흐르는 시간 속에 점을 찍어 마음에 저장하는 일, 계절의 초입에 있다는 제철 음식 데이' 같은 문장들이다.

넷째, 시각 이외의 감각으로 경험하는 공간이다. '눈은 분석하지만 몸은 기억한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문손잡이가 건물이 건네는 악수'라는 문장을 접하니 건물의 손잡이가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다섯째, 시각적 소음이 제거된 몰입의 공간이다. 건축가는 조명을 이용해 공간을 변신시킨다고 한다. 집보다는 조명이 있는 스터디 카페에서 글이 훨씬 잘 써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걸까.

 

'좋은 공간에 나를 두고, 공간이 건네는 좋은 목소리를 들으면 우리의 삶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는 문장을 이미지로 상상한다. 근심 걱정이 사르르 녹는 듯 마음이 느슨해진다. 익숙하지 않은 고개가 아직은 어색하게 돌아가지만, 50대가 되어서야 나와 여집합을 바라볼 여유가 생긴 듯하다.

의지대로 나의 몸을 둘 수 있는 자유를 마련하는 중이다. , 0.7mm 볼펜, 이면지, 노트북, 마우스, 이어폰, 텀블러 등 필요한 물건까지 풀옵션으로 갖춘다. 지금 여기, 조용히 키보드를 두드리는 스터디 카페에서 나는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

여집합을 바라보게 만드는 책을 만나 구석구석 공간을 바라보며 안정감이 오는 이유를 찾는다. 미래의 삶을 위해 진지하게 공부하는 젊은 모습들을 보면 열심히 살고 싶어진다. 삶에 비추는 핀 조명인 양 노트북 위로 내리쬐는 조명 아래에서 나의 삶을 글로 옮긴다. 따뜻한 차를 마시며, 이어폰으로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공기 청정기 사이로 얼핏 스치는 향을 맡으며, 매끈한 키보드의 감촉을 손끝으로 느낀다.

살짝 열린 오감으로 흘러 들어오는 잔잔한 자극들이 나의 삶을 기분 좋게 보듬는다. 좋아하는 넓이, 질감, 온도, 소리의 진동, 냄새 입자의 출렁임. 다른 자극으로 메워진 또 다른 공간을 찾아 나만의 동네 지도를 만들고 싶다. 촉감이 좋은 이불처럼 만들어진 여집합에 폭 둘러싸이고 싶다. 열심히 여기까지 온 나에게 공간의 물리량을 하나하나 찾아가며 삶의 이벤트를 만들어주고 싶어졌다.

 

p48, 11째 줄: 베르그먼 브리그먼

p56. 밑에서 4째줄: 덴진바시스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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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북꾸 에디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평점 :
절판


실제로 본 적도 없으면서 자주 떠올리는 자연물이 있다. 바다 위로 드러난 순백의 뾰족함 아래, 드러나지 않은 거대함을 가늠한다. 몸체를 지탱하지만, 결코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영역 말이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바다 밑으로 잠긴 빙하를 인간의 무의식에 비유한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나를 지탱하나 결코 의식할 수 없는 영역이니 맥락이 닿는다.

꿈의 해석을 처음 접한 건 20대이다. 오랜만에 과거의 나를 떠올린다. 내가 좋아했던 것을 떠올린다는 게 적확한 표현이리라. 당시 매력을 느꼈던 분야는 심리학이다. 자연 과학처럼 실험으로 증명하기에 어려운 면이 많지만, 이 또한 신비주의 연예인을 영접한다고 여긴다. 의미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선물 포장을 벗기는 것만으로 두근거리는 아이가 되어 책장을 넘긴 기억이 난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소설판꿈의 해석이다. 프로이트가 언급한 의식, 전의식, 무의식에 관한 이론을 소설로 구현한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물론 나만의 해석이다. 하루키는 한 존재의 정신 영역 전체를 가시적으로 묘사하려 한 듯하다. 바다 밑에 잠긴 빙산의 부분까지 말이다. 해수면을 기준으로 빙산의 영역을 구분해도 본질은 결국 하나의 덩어리이다. 같은 맥락으로 한 존재는 속성에 따라 구분된 정신세계의 모든 영역을 아우른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공간적 배경은 대조적인 두 영역을 상징한다. 첫 번째, 평범한 현실 세계는 의식의 영역이다. 두 번째, 비현실적 세계로 묘사되는 '도시'는 무의식의 영역이다. 두 영역의 경계에는 불확실한 벽이 존재한다. 살아있는 생명체인 양 모양도 바뀌고 견고함도 달라지는 몽환적인 벽이다. 벽은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있다는 전의식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출렁이는 바다 밑으로 잠겼다 드러남을 반복하는 빙산의 영역처럼.

처음부터 작가의 빅 픽처가 그려지는 건 아니다. 1부는 10대 소년과 소녀의 첫사랑에 대한 시적인 묘사로 포문을 연다. 풋풋하고 섬세한 문장이 잔잔한 물결로 흐른다. 소녀를 향한 순수가 고스란히 투영되니 문장을 따라가는 나의 심장도 덩달아 투명해진다. 간결한 시를 느슨하게 풀어나가는 문장이 그림을 그린다. 같은 공간 속에 나란히 앉아 있는 시간, 그들의 세계에는 서로의 이름조차 무의미하다. 기억만이 선명할 뿐이다.

차례 이전에는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의 시 쿠블라 칸이 등장한다. 드러나는 심상이 본문의 분위기와 닮아있다. 몽환적으로 그려진 대서사시의 일부. '땅 아래 암흑의 바다'가 무의식의 정체성과 겹쳐진다. ‘도시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소설에는 안개가 스멀스멀 스며든다. 현실의 색채가 흐릿해지고 주인공은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든다. 끝까지 읽고 전체적인 얼개를 그려보면 소설의 진가가 드러난다. 모든 퍼즐이 완성되는 순간, 안개가 싹 걷힌다.

 

주인공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고 일관되게 ''로 서술된 건 심오한 의도가 담긴 설정이다. 이 책 한 권은 주인공의 정신세계 전체를 상징하니 ''는 나의 이름을 부를 필요가 없다. 다만 주인공은 하나의 본질을 가진 두 명이다. 한 명은 의식의 영역에 있는 '', 다른 한 명은 무의식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이다. 내 안의 또 다른 나, 나이면서 내가 모르는 나, 무의식의 존재를 의식과 구분하여 어떻게 묘사한단 말인가.

공간적 배경에 배치한 인물 설정을 보며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한다. 이러한 속성을 모두 만족할 수 있는 대상으로 '그림자'를 설정하다니! 나와 떨어지지 않고 늘 함께하지만 온전한 나라고 말하기 어려운 존재이다. 게다가 작가는 그림자를 본체와 분리한다. 그림자와의 분리가 새삼스럽지는 않다. 이미 우리는 피터 팬이 옷장 서랍에 두고 온 늘어진 그림자에 단련되었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림자의 본질이다.

하루키는 그림자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단순히 생각하면 그림자는 뒤에서 나를 따라다니는 존재이므로 무의식의 범주에 넣기 쉽다. 작가는 여기에서 반전을 꾀한다. 대다수가 앞을 볼 때 뒤로 돌아 빛을 등진 채 어둠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림자를 제대로 볼 수 있도록. 그는 분신인 그림자를 의식의 영역에, 진정한 자아를 무의식의 영역에 배치한다.

 

무심코 하는 행동은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 나도 몰랐던 모습이 진정한 자아를 반영할 때가 많다. 거짓 표정과 말을 지어내도 무의식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최면 요법으로 진실을 알아내는 이유도 대게는 비슷하리라. 진실이 담긴 공간이지만 우리는 그 안에 있는 마음들을 의식하지 못한다. 종종 멈추어 서서 마음과 꿈과 욕구를 살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거기에 진실된 내가 있으므로.

'도시'의 도서관에는 오랫동안 축적된 꿈들이 먼지에 덮인 채 있다. 무의식에 있는 ''의 꿈이기에 그 꿈을 읽을 자격은 내게 있다. ''만이 꿈 읽는 이가 되어 오래된 꿈을 펼쳐볼 수 있다. 소녀는 에게 거대한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존재를 알려주고 사라진다. 이윽고 40대가 된 ''10대의 설렘을 주고 사라져 버린 소녀를 찾아 도시로 들어간다. 그곳에 소녀가 있다. 모습은 같지만 ''를 모르는 존재이다.

도시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두 가지 의식이 필요하다. 첫째, 자신의 그림자를 떼어버리는 것. 둘째, 눈에 상처를 내는 것. 도시로의 입장이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라 가정해 본다. 그림자를 버리는 건 가식을 버린다는 의미로, 외부 세상을 볼 수 있는 수단을 차단하는 건 올곧게 내면을 들여다보기 위한 목적이라 여긴다. 1부의 주체는 그림자를 ''라고 지칭하는 ''이다. 도시에서 불필요한 그림자는 그림자 쉼터에 있다 시간이 흐르면 죽어버린다.

 

분침과 시침이 없는 디지털시계를 사용하면 시간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도시'의 시계에는 바늘이 없다. 시간은 흐르지만, 오직 현재뿐이며 모든 것이 덮어 쓰이고 갱신된다. 흐름을 이해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시시각각 시간을 확인하며 살아가는 하루를 떠올린다. '도시'의 시간을 상상하니 호흡이 점차 느려진다. 너무 빨리 뛰어온 건 아닐까. 산책하는 심장의 속도로 오랜 꿈들을 꺼내어보며 조금은 천천히 걸어갈 수도 있을 텐데.

작가가 묘사하는 도시를 상상하는 동안 나의 시곗바늘은 느려진다. 일상에서 발생했던 불편한 마음이 섬세한 진동으로 잦아들며 마음이 느슨해진다. 하루키 문장의 매력이 이런 모습일까. 억지스럽지 않고 따라가는 이의 긴장을 이완시키는 면모가 있다. 구멍이 송송 뚫린 듯해도 어느 순간 공기층을 머금어 포근하게 목을 감싸는 털목도리 같다. 시적인 표현 역시 책의 무게에 부력으로 작용한다.

이 책을 읽으며 시간의 상대성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진다. 첫사랑 소녀에 대한 기억에서 소년의 시간은 멈춘다. 얼핏 사랑이 주를 이루는 듯하지만 작가가 건네는 메시지에는 사랑을 포함한 인간의 삶이 담긴다. 필요 없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도시'에 시곗바늘이 없다는 건 많은 시사점을 준다. 작가는 마음속에 내가 충분히 알지 못하는 영역, 시간도 손을 대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며 무의식의 영역을 암시한다.

 

1부의 무대는 '도시'이며 주인공은 ''. 내가 도시로 들어오기까지의 배경을 설명하며 현실과 도시가 번갈아 전환된다. 그림자는 아직 정체성을 부여 받기 전이다. 도시로 입장할 때 분리되어 서서히 죽어가던 그림자는 본체를 설득해 탈출을 시도한다. ''는 불확실한 벽 앞에서 선택의 순간을 맞는다. 이 도시에 남을 것인가, 저 세상으로 갈 것인가. 결국 ''는 도시에 남겠다는 선택을 하고 그림자만 내보낸다. 새로운 국면의 전환이다.

2부의 무대는 도시 밖 현실 세계이며 주인공은 도시 밖으로 나간 '그림자'. 그는 이제 내가 되어 살아간다. 본체가 도시에서 매일 오래된 꿈을 읽는 동안, 분신인 그림자는 ''의 기억을 고스란히 지닌 채 ''로 살아간다. 어차피 둘은 하나로 이어져 있는 존재이니. 그는 스스로 그림자임을 인지하지 못한다.

도시의 스위치는 잠시 꺼지고 현실의 전원이 들어온다. 시골의 도서관장으로 일하게 된 ''는 세 명의 인물과 서사를 이룬다. 첫째, 인물이라고 칭하기 애매한 전임 도서관장 고야스 씨의 유령이다. ''는 이미 비현실적인 '도시' 체험자이므로 위화감은 없다. 멘토와 멘티처럼 대화가 오간다. 둘째, 엘로 서브마린 점퍼를 입고 매일 도서관에 드나들며 책을 읽어 치우는 서번트 증후군 소년이다. 셋째, 고야스 씨의 무덤을 들렀다 오는 길목에 있는 카페 주인이다. ''의 마음에 새로운 봄꽃을 피우는 여성이다. 이들 중 나의 시선을 당기는 캐릭터는 앞의 두 존재이다.

 

고야스 씨의 영혼은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서브마린 소년과 먼저 라포를 형성한 사람도 생전의 그이다. 주인공이 그의 무덤에서 한 독백을 듣고 소년은 '도시'를 꿈꾸기 시작한다. ‘서브마린이란 별칭도 잠재적인 사물을 연상하게 만드니 사소한 별칭까지도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주인공이 고야스 씨의 무덤을 찾으면서 카페 주인 여성과의 인연이 시작되니 삶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의 중심에 죽음의 상징이 있는 셈이다.

죽음 이후 존재의 흩어짐을 생각한다. 물질과 에너지는 동급이며 우주의 에너지는 보존된다니, 육체를 이루고 있던 물질은 분해가 되어 다른 무언가로 변한 다음 흩어질 터이다. 지구 중력장의 영향을 받으며 세상 어딘가를 여행하리라.

영혼도 중력장의 영향을 받을까. 육체처럼 흐트러지거나 다른 무언가로 변할까. 속성이 다르니 영역에 구애받지 않고 우주 어딘가로 날아가 버릴까. 문학 작품에서 종종 등장하는 유령처럼 지구 어딘가에 붙들려 있을까. 혹은 인간의 가청 진동수를 넘어서는 초음파가 존재하듯 가시 범위를 넘어선 형태로 머물고 싶은 장소를 서성이고 있을까.

소설 속 유령의 모습을 보며 예전에 했던 상상을 떠올린다. 영혼의 모습은 육체의 그것과 동일할까. 나의 영혼은 육체와 얼마나 닮아있을까.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은 다른 형상을 지닐까.

 

서브마린 소년은 육체와 영혼의 모습이 확실히 다른 듯하다. 3부에는 '도시'로 들어와 주인공과 역할 분담을 하며 꿈을 읽는 소년이 등장한다. 서번트 증후군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던 신규 때 한 아이를 만났다. 교사 이름과 세계의 수도를 기가 막히게 맞추던 아이였다. 나는 다만 지켜볼 뿐이었다. 어쩔 줄 모르는 묘한 시선으로. 지금도 주로 지켜보는 일밖에는 할 수 없지만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시선으로 보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을까.

소설 속 ''와 소년과의 대화 장면을 보니 생각이 많아진다. 현실 세계에서는 단 한 마디도 제대로 말하지 않던 아이가 '도시' 안에서 주인공 ''와 대화를 나눌 때는 더없이 유려한 언어를 구사하기 때문이다. 그토록 많은 책을 읽어 탄탄한 의식을 지닌 아이의 영혼은 심지가 굳다. 부족해 보이는 모습은 의식적인 세상에서만 비추어지는 모습이었던 거다.

소년이 마지막으로 주인공에게 건네는 말에 귀를 기울인다. 마음과 의식은 다른 곳에 있으며 본체나 그림자가 어느 쪽에 있는지 따질 필요가 없다는 것, 각자 서로의 소중한 분신이니 분신을 믿는 건 자신을 믿는다는 뜻이라는 것. 결국 진짜 '''그림자'가 있는 현실 세계를 향하여 '도시'를 떠난다. 의식과 무의식의 합체를 예상할 수 있는 완벽한 결말이다.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상대가 나에게는 글이다. 노트북 앞에 앉기 전까지는 어떤 글을 쓰게 될지 모른다. 불완전한 문장이 될지라도 그저 한 발을 내딛는 용기를 낼 뿐이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서 과감하게 한 발을 디디면 낭떠러지 건너편으로 연결되는 다리가 나타나는 장면처럼. 막연한 믿음이 있다. 빈 문서 1을 앞에 두면 무슨 얘기든 털어놓으리라는 것을. 감정의 미세한 울림을 읽고 글을 준비하고 있는 무의식 속의 나를.

책의 내용에 공감하든 아귀가 맞지 않는 듯 삐걱대든 일단 정독한다. 문장이 좋아도, 문장이 좋지 않아도, 모든 문장을 좋아라 하실 문학계의 도깨비님까지는 아니더라도. 중간중간 과속방지턱을 마주친 듯 멈춘다. 책 밖으로 흘러나와 나에게 닿는 문장들을 메모하며 작가의 세상을 걷는다. 나를 통과하여 이윽고 세상에 없던 단 한 편, 나의 글이 흘러나올 때까지.

나의 향기가 짙게 배어 나오는 문장으로 이루어진 글을 보며 종종 전율한다. 내가 제일 잘 나간다는 자만이 아니다. '이런 문장들이 나의 무의식 안에 있었구나'라는 의외의 발견에 가깝다. 무의식의 공간에 혼재되어 있다 적당한 시기가 되어 흘러나오는 문장들이 나는 좋다. 나는 무의식의 나를 가장 알고 싶은 최애의 독자니까. 내가 나비의 꿈을 꾸든 나비가 나를 꿈꾸든, 내가 글이 되든 글이 내가 되든 상관없다. 어느 쪽이든 어차피 ''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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