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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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종 잊고 산다. 나를 둘러싼 많은 것들이 처음부터 존재해온 것이 아님을. 세상에 당연한 것이 있을까. 당연한 듯 마시는 공기도 당연히 내리쬐는 햇살도 초록을 흩뿌리며 서 있는 저 나무도 처음부터 당연한 존재는 아니었을 터이다. 까마득한 시공을 거슬러 올라가면 분명 우연처럼 일어난 시작이 있었으리라.

유형의 것뿐 아니라 무형의 것도 마찬가지이다. 문화나 정치, 경제, 사회 체제도 말이다. 정치는 먼 나라의 일이었다. 국가나 사회는 처음부터 나를 둘러싼 테두리였다. 그 당연함이 이 책을 읽으면서 무너졌다. 이 글은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다 여기며 살아온 한 사람의 짧은 반성문이자 역사와 정치에 무지몽매했던 평범한 인간의 부끄러운 고백이다.

 

작가 조지 오웰의 대표작은 예전부터 툭 치면 입에서 술술 흘러나왔다. 1984동물농장이 책장에 꽂힌 건 한참 전의 일이다. 자리만 잡았을 뿐 선뜻 손이 가지는 않았지만. 고전을 읽어야겠어. 더워지기 시작하던 몇 달 전, 지적 허영을 채우려는 마음으로 꺼내 들기는 했다. ~ 배우형일세. 표지에 나온 작가의 얼굴만 구경하다 웽웽거리는 모기 한 마리 때려잡고 책꽂이로 컴백했다.

왜 이제야 만났을까. 동물농장이 이런 내용이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원제도 ‘Animal Farm’이고 두께로 짐작했을 때 그저 동물들에 얽힌 에피소드 정도려니 했다. , 틀린 말은 아니다. 동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이에 얽힌 소설이니까. 하지만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고 나면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아니! 이렇게 깊은 뜻이!

처음 몇 장은 나의 짐작대로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동물들이 전투를 하고, 풍차를 건설하고, 일곱 계명을 발표했다. 판타지스러운 동화 정도인가. 돼지를 시작으로 말, , 염소, 고양이, 당나귀, 까마귀, , , 오리 등 소나기처럼 후두둑 쏟아지는 동물들에 이름과 캐릭터가 부여되었다. 몇 페이지 읽다 되돌아갔다. 빈 종이를 펼쳐놓고 동물의 종류-이름-캐릭터를 짝지어 메모하면서 읽어내려갔다.

부제도 없고 1번에서 10번까지 번호만 붙은 채 비교적 빽빽하게 이어진 내용에 이토록 몰입하게 될 줄이야! 동화 속 상황에 이렇게 답답하고 화가 치밀 일인가. 이 소설이 어린이용 동화가 아님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치밀한 내러티브를 지닌 저격용 이야기였다. 소설의 배경을 모르는 사람이 읽어도 한 국가의 체제를 겨냥하고 이에 대하여 깊이 사유케 하는 날카로움이 담긴 책이었다.

 

인간이 경영하는 농장에서 노예처럼 시달리던 동물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인간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 동물들은 수퇘지를 필두로 자신들만의 <동물농장>을 만든다. 처음에는 유토피아인 듯 이상적인 사회가 유지되지만 머지않아 그들 사이에는 지배와 피지배로 분리된 계층이 형성된다. 나중에는 반란 전과 다를 바 없는, 도리어 동족으로부터 대놓고 사기를 당하듯 상황이 악화된다. 돼지들은 반대 세력을 권모술수로 차례로 제거하고 지배 계급으로 부상한다. 이들과 사람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풍자하는 마지막 장면이 압권이다. 독자에게 물음표를 던지는 깔끔한 결말이다. 이런 체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라고.

작품 해설을 보고 스탈린 체제를 희화화한 작품이라는 사실에 전율이 일었다. 정치 상식이 없어도 체제가 돌아가는 전 과정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점차 변질되어버리는 순수한 의도, 지도자의 자질, 알지 못함으로 이용당할 수밖에 없는 대중들,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답답하리만큼 순응하게 되는 체제의 묘한 테두리, 지배와 피지배의 연결고리로 작용하는 존재의 간사함, 체제와 관계없이 묵묵히 살다 희생되는 존재들을 생각했다.

비판받는 체제가 만들어지는 건 나쁜 지도자 한 사람의 영향만은 아님을 깨닫는다.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바닷물에 잠긴 빙하처럼 거대한 배경으로 자리하는 것이다. 그들 모두는 100% 선함과 악함으로 구분할 수 없는 애매한 지점에 놓인다. 동물이 주인공인 이 소설은 어느 순간 동물의 탈을 쓴 인간의 일로 인식된다. ‘스탈린 체제라는 다섯 글자를 초고속카메라로 촬영하여 한 올 한 올 살랑거리는 털끝까지 관찰하고 난 느낌이다.

저자는 영리한 사람이다. 우화의 형식으로 주제를 표현한 점은 탁월한 선택이다. 체제가 지닌 맹점과 그것이 만들어져가는 처음과 끝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인간을 주인공으로 했더라면 보지 못했을 요소들이다.

 

한 편의 문학 작품은 당대를 대변하는 목소리로 가치가 매겨진다고 생각한다. 코로나로 둘러싸인 요즘에 포스트 코로나를 말하는 작품이 많은 공감대를 끌어낼 수 있는 것처럼. 어떤 작가가 코로나와 관련된 작품을 썼다면 100년 후의 독자에게도 공감을 끌어낼 수 있을까. 고전으로 이어지느냐 반짝스타로 묻히느냐는 여기에 있다. 특정 사회의 이슈로부터 보편적인 요소를 발견하여 표현하는 능력이 작가의 역량이며 작품의 수명을 결정한다고 본다. 정치와 체제에 기본 상식조차 없는 나에게 시대를 아우르는 공감을 끌어냈다는 건, 조지 오웰의 작품이 75년을 건너와서도 여전히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내용을 아는 사람은 많아도 의외로 읽어본 사람은 적다는 고전 분야. 학창 시절에는 시험공부로 활용되는 의무감으로 꾸역꾸역 머리에 집어넣기 바빴다. 그 맛을 제대로 알지 못한 건 당연한 결과였다. 중년이 되어서야 고전이라 불리는 책을 한두 권씩 펼쳐본다. 경험의 폭이 넓어지고 인생의 산에 조금은 높이 올라가 있는 지금, 예전에 읽었더라면 보지 못했을 것들이 보인다. 천천히 음미하며 나의 삶과 주변을 돌아보는 이 시간이 좋다. 잔잔했던 내 삶에 당연히 여겨왔던 것들이 바람처럼 스며들어와 나를 흔드는 이 느낌이 생소하면서도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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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택트 온라인 포스트 코로나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세상에서

쭈글쭈글한 손은 주춤주춤

무엇을 움켜쥘 수 있을까


짓누르던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이제야 한두 걸음 찾아가던 맛집도

목탁 소리 청아하게 꽃피던 절집도

기차 안에서 소녀인 양 품던 설렘도

손바닥만 한 마스크에 갇혀

공허한 울림조차 갖지 못했다


이번 명절엔 내려올 것 없다

마스크로 가벼운 듯 걸러낸 말을

전화기로 흘려보내던 당신

눈에 밟히는 자식들의 모습을

쓴 맛 나는 침과 함께

까슬까슬 삼키셨으리라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가

거대한 강물처럼 벌려놓은 거리가

마스크로 가려버린 입과 함께

앗아간 것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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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 옆에 카드봉투 아이콘이 눈에 띈 것부터 어긋난 걸까요? 그날따라 안 해본 걸 해보고 싶었던 마음부터였을까요? 어쨌든 야심차게 도전해보았던 8월의 깜짝 편지는 햄과 함께 날아가버린 듯 합니다.^^


6월 말은 병자가 되는 바람에 부득이하게 편지는 패스, 7월은 반 아이들에게 25통의 편지를 쓴 것으로 그걸로 되었다했구요, 8월 말은 다시 물감님께 고마운 마음을 담은 편지를 쓰고 싶었거든요. 그럼 그냥 편지나 쓸 것이지, 편지쓰기 전에 물감님방에 놀러갔다가 "물감" 옆의 카드봉투 모양이 눈에 띈 거지요. 눌러보았더니 간단한 메일을 쓸 수 있도록 되어있더라구요. 아항! 색다른 걸 하고 싶었어요.ㅠㅠ


제 댓글에 대한 대댓글을 꼬박 달아주시는 성향으로 보아 받으셨으면 리액션을 주셨을 것 같아 몇 주 지나면서 저절로 깨닫게 되더라구요. 햄과 함께 섞여들어갔다가 조용히 꺼졌다는 사실을요. 복사라도 해둘 걸 평소에는 그리 치밀하더니...힝ㅜㅜ 세상에 빛도 보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가버렸음을 인지한 순간 무척 속이 쓰라렸답니다.


안 보셨으니 하는 말인데, 보기 드문 감동의 문구로 처발처발했으며 살아 꿈틀대는 문장력으로 심장 깊이 각인될 듯한 내용이었다고 여기시면 되겠습니다.ㅋㅋㅋㅋ

고전을 이토록 많이 읽게 된 계기가 되어주셔서, 고전을 읽느라 고전하는 동안 빡치지 않도록 함께 깔 수 있는 친구가 되어주셔서 너무 감사했거든요.


연휴 동안 의미있는 시간 보내시구요, 언제 보실 지 모르지만 분실의 염려가 없는 제 공간에 제 마음을 담아 보냅니다. 아, 보내긴 보내는 건데 제 공간으로 오셔야 읽으실 수 있는 것이니 뭐라 해야 하죠?ㅎㅎ 읽으시려면 빨리 오시던가~~ 이 편지, 얼마만에 읽게 되실지 궁금하네요.^^

아버지와 아들에 대하여 생각해볼 10월에는 부지런히 화이팅하려 합니다! 잘 지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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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0-10-01 11: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이런.. 메일 확인했습니다 ㅎㅎㅎ 햄은 아닌데, 제가 확인을 못했네요 ^^
이 편지와 함께 지금이라도 읽어서 다행입니다.
저도 대화를 좋아하는 편인데 요즘은 사람만나기도 쉽지 않고 집에만 있으니 말하는 법도 까먹겠어요. 그나마 글쓰기 라는 수단이 있어서 대상이 없는 누군가와 계속 소통을 하는 기분은 듭니다. 그래서 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것마저 안했으면 삶이 참 적막하겠다 싶어서요.

요즘 날씨 참 좋죠?
적당히 선선하고 미세먼지도 별로 없고 하늘은 푸른 빛에 초목은 초록 빛인 완벽한 가을이 되었어요. 정신 없이 살다가도 일상을 잠시 잊고 세상을 보노라면, 지금 나라가 어지러운지 경제가 심각한지 내가 힘들고 괴로운지 하나도 모르겠더군요. 작년부터는 멍하니 풍경을 보는 시간이 늘어났어요. 흘러가는 강물과 구름, 날아다니는 매미와 잠자리, 바람에 춤추는 나뭇잎과 가지, 산책하는 강아지와 주인, 잔디밭에서 공 던지고 받는 아빠와 아이, 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들... 전에는 가만히 있는 것들이 평안함을 준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위로를 주는 기분이 들더군요. 그러면서 나 역시도 가만히만 있어서는 안되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가끔은 이렇게 사색에 잠기는 것도 참 좋네요 ㅎㅎ
고전문학 모임을 하게 된 것도 생각해보면 나비종 님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저의 ‘1984‘ 리뷰에 긴 댓글과 함께 넌지시 던지셨던 모임에 대한 말씀이 있기 전에는 고전을 쭉 읽을 생각이 없었거든요 ㅋㅋㅋ 매번 현대문학만 읽어오던 저에게 광활한 시야와, 글쓰기의 레벨업을 가져다준 좋은 계기였습니다. 이 모임이 쭉 되었으면 좋겠어요 ^^ 개인적으로 다른 이웃분들도 같이 참여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아직 같이 하고 싶다는 분들은 없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저희 둘만 하죠 뭐 ㅋㅋㅋ

벌써 10월이 되었습니다. 명절 연휴도 잘 보내시고, 독서의 계절도 열심히 즐기는 한 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편지 써주셔서 감사드리고요, 나비종 님의 다음 리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ㅎㅎ

나비종 2020-10-02 08:50   좋아요 1 | URL
한 달여 숙성된 메일을 지금이라도 읽으셨다니 기분이 좋아집니다~ㅎㅎ 더불어 안보셨다고 굳게 믿고 뻥친 점, 살짝 죄송하네요. ‘보기 드문 감동의 문구, 처발처발, 살아 꿈틀대는 문장력, 심장 깊이 각인..‘^^;;; 읽으시면서 의아하셨을 듯하여..‘엥? 이게? 대체 어느 부분이??‘ㅋㅋ

주변 풍경을 바라보시는 장면을 상상하며 따라가보니 햇살 따스한 어느 가을의 하루가 그려지네요. 적당히 선선한 바람, 많은 것들이 적당히 흔들거리는 그림같은 순간들이요.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위로를 주는 기분‘이란 말이 마음에 많이 남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너무 잘 알 것 같아서... 저는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다보면 어느 순간 찡해지기도 하고,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더군요.^^

고전문학모임의 시작을 가만히 거슬러올라가면 물감님께서 <1984>를 읽고 리뷰를 쓰시고, 제가 그 글에 댓글을 달고, 그 후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지금까지 온 것이니 이 모든 것은 조지 오웰님의 덕인 걸로~~ㅋㅋㅋ
무심히 담긴 문장이 눈에 띄면서 이렇게 이어진 걸 보면 시간과 공간과 이성과 감성이 절묘하게 맞아들어갔다는 생각이 들어요. 운...명...??ㅎㅎㅎ
저 역시 이 모임이 오래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 나물이 존재하는 날까지ㅋㅋㅋ 나물 먹을 때 가끔 생각이 납니다만~ㅎ 눈이 침침해지거나 귀가 어두워질 미래의 어느 날에 흐믓한 기억으로 떠올려질 것 같아요.
그러게요. 다른 분들도 같이 해도 괜찮을 것 같았는데 말이죠. 일단 시작이 중요하니 두 명이서 밀고 나갔지만 언제든지 환영인데^^ 뭐, 둘이 하다보면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는 어느 순간이 올 때도 있겠죠, 뭐. 고전의 세계는 광활하니까요. 읽을 게 없어지는 일은 없을 테니까 꿋꿋하게 명맥을 유지하자구요~^^

거위털 이불 덮고 여름을 났는데 이제 그 이불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10월이네요. 잘 지내시고, 10월 말 즈음 글로 다시 만나요~^^
 
벤야멘타 하인학교 (무선) - 야콥 폰 군텐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
로베르트 발저 지음, 홍길표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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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로 가득한 세상에서 반물질을 떠올리는 건 아직도 어색한 상상이다. 빅뱅과 동시에 물질만큼이나 생성되었다는 정반대의 존재. 양전자, 반양성자, 반중성자 등의 개념이 내게 명확하게 자리잡지는 못했지만, 많은 요소를 종종 두 가지로 분류하게 된 건 반물질을 알게 된 이후부터였다.

184쪽의 책장을 덮고 나니 뜬금없이 반물질이 내게 주었던 막연한 이미지가 연상된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도통 파악이 안 되는 책. 짜증조차 치밀지 않았다. 형편없다 꼭 집어서 말할 수도 없었다. 뭔가 분명 존재하는 것 같지만 작가의 정확한 의도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보다 네 배 이상의 두께감으로 시각을 압도한 책을 완독하는 과정도 이만큼 험난하지는 않았다. 온통 허연 공간에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인간이 되어버린 기분이다. 내가 올라가는지 내려가는지 그대로 머물러있는지 감조차 오지 않아 난감해지는 느낌 말이다.

이 책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극적인 전개? 입체감 있는 캐릭터? 무의식적으로 드라마틱한 무언가를 기다렸나. ? 이제 마지막이야? 끝내 허탈해졌다. 그래서 뭘 어쩌라고! 잡고 있던 끈을 따라갔더니 커다란 바위에 매여있는 장면을 발견한 기분이랄까. 세게 당긴 것도, 느슨하게 느꼈던 것도 모두 나였으며 혼자서 북치고 장구쳤다는 사실을 불현 듯 깨달은 순간처럼 힘이 빠졌다.

 

첫 페이지를 펼쳤던 날은 821. ~ 9월의 첫 리뷰를 너로 정했다! 만만해 보이는 두께에 가뿐한 산책길을 예상했다. 926일에 마지막 페이지를 읽게 될 줄도 모르고. 맨발로 지압 길을 걷는 정도의 과속방지턱을 더듬더듬 넘다가 사흘 만에 꿈틀거리는 두 손을 붙들었다. 집어 던지고 싶었다. , ~ 조용히 책을 덮었다. 책읽기에 한해서는 멀티가 안되는 터라 다른 책으로 갈아타지도 못하고 다시 이 책을 펼치지도 못했다3주 동안 시 한 편을 쓰고 숨 고르기를 했다. 4주째는 오랜 습성을 깨고 두 권의 책을 읽고 두 편의 리뷰를 작성했다.

2차 시기, 더는 읽기를 미룰 수 없던 920. 다시 첫 페이지를 펼쳤다. 내용이 말끔히 클리어되었기 때문이다. 사흘을 읽다가 다시 덮는 순간 기시감을 느끼며 두 손을 맞잡았다. 여전히 안개 속을 기어갔다. 책장은 앞으로 넘어가는데 의식은 반대 방향으로 후퇴했다. 하루의 휴식기를 가졌다.

3차 시기, 두 주먹 부르르 떨며 도전했다. 3분의 1지점에 꽂혀있던 책갈피를 빼고 첫 페이지로 돌아갔다. 무슨 노무 내용이 이리도 말끔하게 리셋된단 말인가! 물 없이 내리 고구마 세 개를 먹는 마음을 느끼며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갔다. 몇 번의 왕복 끝에 마지막에 도달했다. 아파트 단지에서 마라톤 거리를 완주한 인간이었던 거다, 나는.

 

귀족의 삶에서 벗어나고자 들어간 학교에서 미미한 존재로서의 삶을 깨달아가는 주인공 야콥의 성장 소설이다. 이 책을 체계적으로 논하기는 일찌감치 망한 것 같으니 소설의 3요소를 중심으로 삶은 계란 껍질 정도의 깊이만 분석해보기로 한다. 이 리뷰를 읽고 이 소설을 전체적으로 통찰하기는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리뷰에 내용과 맥락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첫째,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벤야멘타 하인학교이다. 저자 로베르트 발저의 자취를 살펴보면 조수, 비서 등으로 일한 것으로 보아 직업에 종사하면서 느꼈던 요소들이 이 소설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하인을 양성하는 다소 생소한 개념의 학교에서는 배우는 것이 없다. 학교임에도 불구하고 야콥은 가르치는 교사들이 없다고 말한다. 학원의 설립자인 벤야멘타 씨와 그의 누이동생에 의해 오로지 인내와 복종만을 배우는 학교이다.

오늘날 교실의 모습이 떠오른다. 산업혁명으로 많은 노동자가 필요해져서 생겨난 공장식 양성기관이 학교의 기원이라고 들었다. 일제히 칠판을 바라보며 집단 지식을 머릿속으로 집어넣는 데 익숙해진 학생들. 똑같은 물건을 대량으로 찍어내듯이 사고조차 똑같이 하게 될 것 같은 상황이다. 여러 나라에서 교육 개혁이 일어나고 있어 교실의 풍경도 많이 달라지고 있다지만, 아직 혁신적인 전환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배움은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구현될까.

벤야멘타 하인학교에서는 배움 따위는 아무 쓸모도 없다고 본다. 지식의 빅데이터를 학생들에게 입력하는 우리의 학교와의 차이점이다. 중간에 다른 교사들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상징적인 묘사로 보인다. 소년의 눈에 교사들은 죽음과 유사한 상태로 잠들어 있다. 떼거지로 있는 인간들을 바라보며 사람이 없어, 사람이, 쯧쯧이라 한탄하는 장면처럼 말이다. 대놓고 까고 있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마차가 등장하는 시기이다. 이렇다 할 역사적인 사건은 언급되지 않은다. 저자는 다른 요소에 더욱 집중한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주인공은 다양한 캐릭터를 가진 주변의 친구들을 묘사한다. 흔들림 없는 원칙으로 복종하는 삶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크라우스, 아무 생각 없이 물음표 없는 행복 안에 갇혀 살아가는 하인리히 등. 이들은 인내와 복종으로 살아가는 대중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벤야멘타 씨는 거인과 폐위된 왕으로 비유되는 인물이다. 과거에는 메이저로 살아가다 어느 순간 추락하여 마이너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상황이다. 배울 것이 많다고 생도들에게 말하지만 정작 본인은 매사 의욕 없는 패턴으로 일상을 보내는 언행 불일치 인간이다. 한때는 화려한 불꽃으로 타오르다 이제는 꺼져버린 성냥 한 개비가 연상된다.

벤야멘타 씨의 누이 리자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 선 인물이다. 내실로 표현되는 가상의 세계를 차례로 보여주며 주인공을 안내한다. 이 때 리자가 주인공에게 하는 말들은 상징적인 비유로 가득하다. 정신세계의 증강현실을 보여주는 듯한 이 장면은 몽환적인 공간을 바라보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녀가 나중에 뜬금없이 죽는 건 맥락 없이 허탈하지만, 정신세계에 대한 성찰을 멈추고 소년이 세상으로 나아갈 계기가 되어주는 의미로 이해했다. 죽음이 주는 무게감보다는 키보드의 엔터키 정도로 이전과 이후를 나누는 경계 정도로 묘사된다.

중간에 등장하는 형 요한은 저자의 아바타로 보여진다. 대중은 현대판 노예이며 개인은 집단 사고의 노예라 단언한 문장에서는 작가의 관점이 엿보인다. 젊었을 땐 누구나 영()이 되어야만 한다고 무로 돌아가신 공유 님을 연상케 하는 문장들이 곳곳에 보인다. 주저리주저리 하는 말들이 대부분 숫자 0으로 수렴한다. 위반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며, 왜냐면 세상에는 추구할 만한 가치가 없어서. , 이런 식이다.

 

셋째, 소설에서 서사적인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초기 미동 시간의 지진파의 모습을 기록지로 관찰한 기분이랄까. 주인공이 길동이처럼 동서로 번쩍번쩍 활보하기는 하지만 매우 자잘하게 P파만 지직거릴 뿐이다.

처음에는 신비롭게 감추어진 내실 이야기로 뭔가 미스터리한 사건을 기대하게 한다. 일어날랑말랑 냄새만 피우다 푸쉬쉬 꺼져버린다. 주변 캐릭터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으로 인내심을 키운 다음, 이제 사건을 보려 하면 마지막 페이지가 펄럭인다.

갑툭튀한 벤야멘타씨의 누이의 죽음 정도가 사건이라 할만한데 본격적인 S파로 출렁이려고 한 발짝 크게 내딪는 순간 엔딩 컷이다. 드라매니아를 농락하는 열린 결말 느낌이랄까.

삶에 있어 줄곧 카메라를 든 관찰자 마인드를 고수한 주인공이 무기력하던 벤야멘타씨와 새로운 출발을 하려는 것, 하고 많은 장소 중에 황야로 삶의 목적지를 정한 점은 전하는 메시지가 크다.

 

마이너의 영역을 말하는 내용이라서일까. 화려한 기쁨도 처절한 슬픔도 없는 밋밋함이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다. 메이저와 마이너가 뒤집히면 이런 기분이 들까. 온통 상징으로 도배된 내용 안에는 열정이라는 놈도 들락거리고 가난과 결핍의 통로가 등장하기도 한다. 산으로 동굴로 오르내리며 주절주절 말하고 다니신 차라투스트라님이 떠오른다. 하아~ 도무지 굴곡 없던 전개와 문체는 인내심의 시험 도구로 최상급의 레벨이다. 내 취향의 반물질같은 책이라서 삶의 의미고 뭐고 내내 돼지족발 삶은 물을 들이키던 기분이었다.

조금이라도 높이 오르려는 치열한 삶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가. 모두가 Yes라고 할 때 No를 하려면 용기가 필요할 터이다. 힘을 뺀다는 건 중력을 거스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리라. 강력한 메시지를 어필하지 않는 듯 보이는 작가의 문장들에서 혼란을 느꼈던 건 힘을 뺀 낯선 세상에 발을 들여놓은 생소함에서였을까. 뭔가 존재할 것 같은데 보지 못하는 답답함에서였을까. 어쩌면 이런 모습이 외면하고 싶었던 현실의 삶과 더욱 닮아서였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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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0-09-28 13: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야, 얼마나 꾸역꾸역 읽으셨는지 상세하게도 써주셨네요 ㅎㅎㅎ
진짜 이 책보다 몇배는 두꺼운 책도 이정도로 괴롭진 않았는데 말이죠..
저 역시도 내용 파악이 안되고 주제도 가늠이 안됩니다.
아마 대다수 독자들이 우리와 같을 거니까 낙심하지 말자구요 ^^

야콥의 형을 저자의 아바타로 생각하신 부분이 신선하네요.
비중이 크지 않아 그냥 넘긴 인물이었는데 말이죠.
또한 리자는 아직까지도 제게 미스테리한 인물로 남아있어요.
그녀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도 아리송하고, 이 사건으로 인해 소년의 변화가 있었는지 감지를 못했거든요. 저 정말 대충 읽었나봐요 ㅋㅋㅋㅋ

드럽게 재미없어도 이렇게 감상평을 나누고 나면 억울함이 사라져서 좋아요.
앞으로도 얼마나 억울한 작품을 만나게 될까 기대가 됩니다 ㅋㅋㅋ
근데 점점 저의 까칠함을 닮아가시는 듯한 기분이.... 기분탓이겠죠? ㅋㅋㅋㅋㅋㅋ

나비종 2020-09-28 17:37   좋아요 1 | URL
그렇겠죠? 저만 드럽게 재미없던 건 아니겠죠? 음, 별점 5점 주신 분들도 계실테니 취향 차이 정도로 정리해보죠.ㅋㅋ
주제 파악을 하려면 여러 번 읽어보면 될텐데 문제는 그 여러 번을 읽기가 싫어지는 책이란 거죠.^^;

저는 야콥의 형이 중얼거린 말들에 비중이 크다고 보았어요. 잠잠하다 결말에서 형에게 영원히 안녕을 고하잖아요. 뭔가 알에서 깨어난 것처럼.
마지막엔 온통 안녕이었죠. 형과도, 벤야멘타양과도, 크라우스와도. 이들과의 안녕이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았어요.
벤야멘타양은 정신적인 성찰을, 크라우스는 완벽한 복종을. 형이 좀 애매한데 0으로 돌아가라고 외쳐댔으니까 이제 형의 말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걸어가보자, 황야로 가서 삶의 어쩌구를 찾아보자! 뭐 이런 거요.ㅎ
그녀의 죽음으로 인해서 정확하게는 침묵을 고수하던 벤야멘타씨의 말문이 터진 거죠. 그래서 소년이 각성?한 거라고 여기기로 했습니다, 저 혼자만 ㅋㅋ

맞아요, 맞아요! 감상평으로 수다떠니까 좋아요!ㅎㅎ 리뷰보다 댓글이 더 기대되고 기다려진다는^^;
더 억울한 작품이 나올까요...? 이런 게 삶의 묘미인가요.ㅋㅋ 예측불허...를 불허하고 싶습니다만^^
물감님 덕분에 제 안에 있는 줄도 몰랐던 까칠함이 각성을 했습니다. 기분탓 아닌 것 같습니다만!ㅋㅋ 그동안은 작가님들이 상처받을까봐 드럽게 재미없는 건 4점을 줬었거든요.ㅎㅎ^^;
 

방 하나 부엌 하나 골목 끝에 느낌표

여섯 식구 허락된 자그마한 집이었지

흘러간 시간 거슬러 펼쳐지는 옛 풍경


치열한 하루하루 고단한 걸음걸음

시린 심장 녹여가며 자식들을 품던 당신

집이란 당신에게는 어떤 공간이었을까


당신을 담아내니 나의 글이 뜨끈해져

시큰한 코끝 위로 눈시울 뻑뻑하니 

아득한 공간 넘어와 물컹해진 나의 집


*2020. 9. 26. H시조백일장 본선, 참방(글제: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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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7 1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27 1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