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의 삶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의 글은 매번 나를 향한다. 타인을 언급할 때조차 그를 거울삼아 나의 흔적을 찾는다. 리뷰를 써도 글의 정체성은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읽고 쓰느냐 그냥 쓰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어떤 책을 읽어도 도착지는 내가 되어버린다. 언제부터였을까. 글은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200쪽도 되지 않는 한 권의 책에서 답을 발견한다.

김영하의 단 한 번의 삶은 세 사람의 삶을 덤덤하게 써 내려간 산문이다. '이 세상으로 나를 초대하고 먼저 다른 세계로 떠난 두 분'과 두 분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작가의 삶이 담긴다. 본문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두 분'이란 글자가 시선을 붙든다.

당신들의 삶이 여든 해를 넘기면서 종종 마음의 준비를 하는 나를 돌아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선 세상에 덩그러니 던져진 아이마냥 자식은 아직 두 분을 떠나보낼 준비를 하지 못한다. 과속 방지턱에 걸린 것처럼 두 글자의 둔턱을 넘지 못해 한참을 서성인다.

 

책의 문을 열고도 분량에 비해 오랜 시간 머물던 책이다. 428, 51, 53. 사흘 동안 대략 여덟 시간에 걸쳐 읽는다.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는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흐른다. '단 한 번'이라는 문구가 건네는 간절함 때문일까, ''이라는 한 글자가 주는 무게감 때문일까.

작가는 이 책을 가리켜 '평생 단 한 번만 쓸 수 있는 글'이라 칭한다. 부모님을 떠나보낸 후 당신들과의 인연을 회상하며 자식의 관점에서 두 분의 삶을 돌아본다. 작가로서의 삶을 포함하여 신변잡기적인 일상을 그린다. 자서전을 보듯 작가 개인의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순간순간의 사유들이 나의 삶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한 인간의 삶은 특별하면서도 보편성을 띄는가. 묘하게도 전혀 이질적이지 않다. 김영하 작가와 함께 산책하며 지나온 삶을 주고받는 대화의 시간을 보낸 느낌이다. 어떤 장면에서는 맞장구를 치고, 대부분의 문장 앞에서는 가만히 경청하며 나의 삶을 들여다본다.

 

모두에게 나쁜 문장은 없다. 모든 사람에게 나쁜 사람이 없는 것처럼. 문장의 진동수가 내 삶의 파동과 얼마나 잘 맞느냐의 차이만 존재할 뿐이다.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의미의 무게감과 문장의 속도감이 나와는 잘 맞았다. 공명의 순간들이 모여 심장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킨다.

'사공이 없는 나룻배가 닿는 곳''미래'라는 발상이 인상적이다. '결말에 맞춰 과거의 서사를 다시 쓰는 것'이라는 해석에 동의한다. 무의미해 보이는 시도조차 미래의 어느 시점에선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지난 20여 년의 삶을 가만히 겹쳐본다.

엄청나게 거대한 의도가 있던 건 아니다. 리뷰를 한 번 써 볼까? 문장이 너무 길어지니 시를 한 번 써 볼까? 마음이 답답하니 글로 한 번 표현해 볼까? 사소한 선택 끝에 나의 글은 조금씩 흘러나왔다. 시작하면서 끝에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 생각한 적은 없다. '해 볼까?' 생각이 들어 그저 한 것뿐이다. 김영하 작가의 말대로 지금에 맞춰보니 지나온 서사가 의미 있게 되살아난다.

 

'공양주로 일하던 / 어미의 소원은 / 이팝꽃처럼 솔솔 / 갓 지어낸 밥 한 공기 / 내 새끼 뱃속에 담아 / 배불리는 것이었다 // 부처님 공양하고 / 남은 밥 찐 도시락 / 어느 날 삭아버려 / 축 늘어진 이팝꽃 / 자식은 밥을 버리며 / 철없이 투덜댔다 // 30년 뒤 절 마당 / 갓 지어낸 밥 한 공기 / 이팝꽃처럼 솔솔 / 지어주고 싶었지 / 버려진 이팝꽃은 / 노모의 마음속에서 / 여전히 뜨겁게 / 피어나고 있었다' ('이팝꽃처럼 솔솔')

'평생 남의 차 바퀴만 / 만지작거리던 홍서 옹 / 나이 팔십에 자가용 생기셨다 // 좌석은 하나 / 몸통만한 두 바퀴 / 침대 옆에 얌전히 접혀 / 주차된 자가용 // 장애인 화장실로 운전하는 / 무면허 대리기사 채 여사 / 니 아부지 늘그막에 호강한다며 / 말간 웃음 지으신다 // 왼 다리엔 통통한 부츠 / 오른 다리엔 하얀 스타킹 / 우아하게 다리펴신 홍서 옹 / 말간 웃음 지으신다 // 천천히 흐르는 물줄기 / 보글보글 가벼운 비누거품 / 해사해진 얼굴 위로 / 이슬 머금은 은잔디 // 공간의 바퀴가 돌면 / 집이었다 병원이었다 / 벽이었다 커튼이었다 / 햇살은 빗살이 되지만 // 당신 멋지다 / 몸통 닦아주는 손길에서 / 안 아파 / 웃음짓는 얼굴에서 / 따뜻한 물감 흘러나와 / 서로 마음에 그림을 그리신다 // 시간의 바퀴를 / 함께 돌려오신 당신들은 / 사랑한다 말을 할 / 필요가 없으셨다' ('바퀴')

'심장에 담긴 얼음 가까스로 꺼내보니 / 뼛조각 부서지듯 허공 향해 우수수수 / 새하얀 사막을 타고 검은 강물 흐른다. // 막막한 종이 위에 하릴없이 서성이다 / 찐득이 흐르는 글 물끄러미 바라보니 / 시 안에 물컹한 얼굴 거울인 듯 나를 봐 // 칼바람 덩그러니 여전히 난 혼자지만 / 신문지 덮은 듯이 살포시 따스해져 / 또 다시 기대어보다 세상 향해 흐른다.' (시조 '거울 시')

 

닥치는 대로 글짓기 대회에 나갔을 때, 좋은 결과를 안겨준 시들은 경험의 결과물이었다. 절에서 공양주로 일하신 어머니의 고생스런 시간은 5월의 시 '이팝꽃처럼 솔솔'이 되어 훌훌 날아간다. 갑작스런 무릎 수술로 병원에 입원하시면서 잠시 섬망까지 온 아버지의 고통은 '바퀴'라는 시와 함께 굴러간다. 외롭고 시린 순간도 시조 '거울 시'가 되어 말갛게 나를 비춘다.

고통은 현재를 힘겹게 만들지만 심장에 담긴 그것은 고스란히 시의 소재가 된다. 단지 나는 시어를 낚는 어부가 되어 고통의 언어들을 건져내 물기를 툭툭 털기만 하면 되었다. 정확하게 그리고 싶었다. 보이지 않는 마음을, 느낌으로만 실체를 인지할 수 있는 마음을 꺼내고 싶었다.

고통은 매번 뜨겁다.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면 화상을 입는다. 반면 고통으로부터 너무 멀어지면 마음이 시리다. 삶이 어느 정도 흘러간 지금은 고통을 껴안을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한 듯하다. ''이라는 장갑을 끼고 고통을 어루만지는 방식이다. 뜨거운 고통을 품은 글은 난로가 되어 시린 마음을 데워줄 수 있다. 글로 고통을 사랑하는 것, '글 러브'.

 

고통 없는 삶은 없다. 인지를 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의 체온처럼 고통에는 늘 디폴트 값이 존재하는 듯하다. 봄을 걸어가는 순간조차 공허의 형태로 서성이는 고통을 감지한다. 본능적으로 나를 향해 초점을 맞추는 셀카를 글로 찍으며 조금씩 심장을 데운다.

'어쩌면 가능했을지도 모를 무한한 삶들 중 하나일 뿐이라면, 이 삶의 값은 0(1/=0)'이며, '존재의 이 한없는 가벼움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더는 단 한 번의 삶이 두렵지 않을 것 같다.'는 작가의 문장이 많은 위안을 준다. 내일을 향해 발걸음을 뗄 수 있게 해주는 도움닫기 판을 마주한 듯 든든하다.

글 쓰는 삶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요즘, 지난 시간을 종종 되감기 한다. 모든 날이 좋았다는 도깨비님의 대사처럼 모든 순간이 신의 한 수 인양 의미 있게 되살아난다. 그러니 노래 제목처럼 삶의 '모든 날, 모든 순간'을 허투루 지나칠 수 없다고통이 담긴 삶을 글로 감싸 안으면, 고통은 따스한 꽃으로 피어나 심장을 데워준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별하지 않는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파트 전지 작업으로 짤막한 가지만 흉흉하게 남아있던 나무. 왜 그 생명들이 죽었다고 여겼을까. 엄연히 땅에 뿌리를 내리고 꿋꿋하게 서 있는데 말이다. 4월 중순을 넘어서자 야들야들 연둣빛 이파리들이 빼꼼 빼꼼 고개를 내민다. 생명은 참으로 끈질기구나. 이렇게 절망을 뚫고 다시, 봄으로 걸어가는구나. 작은 쉼표 같은 뭉클함이 심장을 훑고 간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겨울철 표어처럼, 작은 여지만 있다면 기어이 불꽃으로 타오를 준비가 되어있는 걸까.

반면 손끝에 닿자마자 녹아버리는 눈꽃처럼 순식간에 사그라지는 것 또한 생명의 불꽃이다. 극단은 통한다던가. "사람 쉽게 안 죽어."라는 말이 무색하도록 허무한 죽음도 존재하는 듯하다. 그런 죽음은 새하얀 빛깔의 속성과 닮아있을까. 빨주노초파남보 여러 감정이 뒤섞여 복잡하지만 결국 없는 듯 단순하게 보이는 색처럼.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는 이런 느낌을 닮아있다. 내내 시리면서 데일 듯한 이야기다. 극단을 품은 양 상반된 요소들이 혼재한다. 심장이 동상을 입은 듯 화끈해진다. 질식할 듯 춤을 추는 하얀 눈이 까만 밤을 뚫고 절규한다. 고요한 눈처럼 사락사락 내리는 문장을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 쉼 없이 쌓이는 눈의 무게를 무방비 상태로 감당하지 못할지 모른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 사건을 다룬 소설이다. 일적으로 만나 친구가 된 경하와 인선. 이야기는 인선의 어머니와 이모가 겪은 4.3 사건을 인선이 경하에게 들려주는 방식으로 펼쳐진다. 당시 상황과 역사적 현장에 있었던 이들의 트라우마가 생생하게 서술된다. 하루키의 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 나오는 도서관 관장님의 유령처럼 인선의 영혼은 경하 앞에 등장하여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역사적 기록을 펼쳐 보여준다.

경하는 유서를 써 놓을 정도로 삶의 구석까지 내몰린 상태이다. 불쑥 온 인선의 연락에 제주로 내려가게 된 그녀는 가장 낮은 곳에서 4.3 사건을 경청하는 독자의 아바타가 되어 역사의 장막에 가려진 사실을 목도한다.

몽환적인 시어인 듯 간지처럼 삽입된 문장들은 서사에 생생한 숨결을 불어 넣는다.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주변의 밝기와 소리와 온도를 조절한다. 몇몇 문장으로 핀 조명 안에 담긴 진실은 더욱 또렷하게 부각 된다.

작가는 4.3의 정체성과 연결된 소설적 장치를 선택한다. ', , 불꽃'이라는 1, 2, 3부의 제목부터 '결정, , 폭설, , 남은 빛, 나무, 작별하지 않는다, 그림자들, 바람, 정적, 낙하, 바다 아래'의 소제목에 이르기까지 모든 제목이 화룡점정인 양 주제의 핵심과 연결된다. 전개의 마지막에 가까워지면 픽션적 서사는 증발하고 작가가 알리고자 하는 역사적 장면만이 심장에 각인된다.

 

작가 한강의 문장은 섬세하다. 육각의 눈의 결정을 만들어내는 한 변의 나뭇가지처럼. 심장에 톡 닿으면 금세 녹아버릴 듯 물기 어린 문장들이다. 시를 읽는 듯한 간결함이 만들어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글자가 후두둑 떨어져 나갔을까. 고갱이로 이루어진 가뿐한 문장들이 스르르 녹아들어 스며든다. 마음이 축축해진다.

작별하지 '않는다''못한다'의 차이는 분명하다. 소설의 얼개를 구성하는 자료를 조사할수록 작가의 결론은 점점 선명해졌으리라. 부정어임에도 불구하고 전자에는 주체의 결연한 의지가 담겨있으니까. 그런 의지들이 진실을 향해 올곧게 나아가기에 잘려나간 가지 끝에 다시 잎이 돋아나는 지도 모른다.

작가의 인터뷰 장면이나 그녀가 구사하는 언어를 볼 때면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떠오른다. 연약해 보이면서 심지가 굳은 사람,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 작품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가벼워 보이면서도 무거운, 부드러워 보이면서도 단단한, 어둑해 보이면서도 빛이 보이는, 죽음을 다루는 가운데 삶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 이야기. 이런 이유로 한강의 소설 세계를 통과하면 심연의 바다를 순식간에 다녀온 해녀가 된 기분이 든다.

소설을 읽는 동안 넷플릭스 드라마<폭싹 속았수다>를 보게 된 건 우연이었을까. '완전히 속았다'는 말로 잘못 알았다가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의미라는 걸 알고 뭉클했던 작품. 내리 16부작을 보았던 이틀 간의 시간처럼 소설 속 문장이 시선을 옭아매곤 놓아주지 않는다. 제주어가 사라질 뻔했다는 4.3을 알고 나니 더욱 찡해진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제주 4.3이 어떤 사건이냐는 질문을 받았더라면 동공 지진을 일으켰으리라. 생소한 역사인 데다 굳이 알고자 하지도 않았던 사건이다. 카더라 풍문으로 이름 정도만 들어본 터라 그토록 디테일한 소설 속 표현에 혼란의 시간을 보낸다. 어느 정도까지 사실에 근접했을까. 작가의 묘사가 차라리 상상력에 의한 과장이길 바랐다.

194731, 민간인을 향한 경찰 발포 사건을 기점으로 194843, 제주 남로당 무장대의 반란이 일어난다. 그 후 1954921일까지 7년여에 걸쳐 제주도 민간인을 향한 초토화 작전이 실행된다. '반군 진압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들이민 학살, 이념이나 종교적 신념으로 인한 학살, 특정 지역 거주민을 대상으로 한 학살, 보복성 학살'. 지구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학살의 유형이 다 있다는 나무위키의 기록을 본다.

6.25 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다는 사건. 제주도민의 10분의 1이 죽거나 행방불명되었으며 초토화 작전으로 인해 촌락별 제사 일이 거의 비슷하다는 황망한 사실. 25천 명에서 3만 명으로 추정된다는 사망자 수치가 실감 나지 않는다.

4.3 평화기념관에는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 '백비'가 있다고 한다. 역사적 진실에 입각한 이름을 새기지 못해 제주 4.3 다음의 어미를 명확하게 붙이지 못한다고.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어떤 이름으로 정의해야 희생자의 넋을 보듬을 수 있을까.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거짓이 없는 사실'. '진실'의 사전적 의미는 이토록 명료하건만 현실 세계에서 이 둘을 가르는 일은 만만치 않다. 탐욕이 개입된 세상에서는 부분적인 사실로 전체를 대표하는 양 커다랗게 부풀리는 적반하장은 카오스를 만든다. 안개처럼 진실의 주변을 뿌옇게 둘러싸 제3자의 시야를 가린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실화인지 만들어낸 일화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빨갱이'를 괴물로 여기던 국민학교 시절, 교육으로 배운 어떤 내용도 의심하지 않았다. 5학년 이후 어렴풋이 들었던 5.18 광주도 무섭고도 과격한 사람들이 일으킨 폭동 사태로 여겼던 날들도 있다.

하나하나 거짓의 꺼풀이 벗겨질 때마다 마음속 혼란은 점점 커진다. 무엇보다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독특한 사람들로 간주하던 사람들이 놀랍도록 평범한 이들이라는 점이다. 오다가다 볼 수 있는, 동네에서 흔히 마주치는, 너무 평범해서 기억에 남아있지도 않은, 그런 이들이 역사의 중심에 담겨있다는 사실이다.

2025411일 오전 65. 드디어 그들의 진실이 '진실을 밝히다: 제주 4.3 아카이브'라는 제목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다. 당시의 기록뿐 아니라 후대의 진상 규명, 상생과 화해의 기록도 등재 대상이라고 한다. 수많은 유골을 은폐했던 시리고 어두운 덮개가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렇게 조금씩 벗겨지는 걸까.

 

토닥토닥 영혼을 덮기 위한 수의 같다. 겉표지의 바다 위에 그려진 장막이 무고하게 희생된 이들을 감싸주는 듯하다. 쓰나미인 양 몰려오는 무엇이라 생각했던 하얀 천을 가만히 응시한다. 작가의 표현대로 '바다 대신 흰 천 같은 눈이 하늘에서부터 밀려 내려와 그들을 덮어주는' 걸까. 성난 파도처럼 밀려드는 폭력으로부터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펼쳐진 얇은 울타리. 속절없이 당할지라도 함께 흠뻑 젖을 준비가 되어있는 장막은 어쩌면 소설 속 작가의 외침을 극대화하기 위한 오브제인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니 머리에 쥐가 난 것처럼 미세한 전류가 뇌를 감싸고 도는 듯 저릿하다. '영원처럼 느린 속력으로 눈송이들이 허공에서 떨어질 때,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들이 갑자기 뚜렷하게 구별된다.'는 소설 속 문장처럼 정신이 번쩍 든다.

인간의 광기와 잔인한 본성의 결과를 지켜보는 내내 제주어 '속솜허라'의 주문에 걸린 듯 숨을 죽인 채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삶과 죽음 앞에서 영혼은 조금 더 깊어지고 보다 무거워지나. 무심히 지나친 진실들이 방향 지시등처럼 깜빡인다. 이제, 속솜허지 마소서. 당신들의 희생 덕분에 또 다른 평범한 이들에게 봄이 오고 있으니. 점멸등처럼 봄을 향해 반짝이는 연둣빛 신호를 따라 조심스레 코끝 찡한 봄을 걷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리턴 투 네이처 - 삶이 불안할 때 나는 숲으로 갑니다
에마 로에베 지음, 이성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앙상한 뼈마디를 드러낸 나무들이 곳곳에 있다. 아파트 단지 전지 작업으로 잔가지가 제거된 나무들이다. 깔끔하다기보다 순식간에 댕강 머리채를 잘린 듯 음산하다. 괜스레 착찹해진다.

삭막한 풍경을 둘러보다 봄이 그리기 시작한 점묘화를 발견한다. 키 작은 산수유꽃 몇 점이 흔들린다. 가지 위로 내려앉은 노란 햇살 부스러기인 양 반짝인다. 가지 끝에 매달린 풍경처럼 딸랑딸랑 봄을 알린다. 굳어졌던 마음이 사르르 녹는다.

꽃을 발견한 건 우연일까. 평상시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은 필연의 뿌리와 연결되는 게 아닐까. 사소해서 알아차리기 어려울 뿐 거슬러 올라가면 결정적인 계기는 분명 존재하리라. 세상을 향해 빼꼼 고개를 내민 새싹인 듯 자연이 나를 향해 점점 다가오고 있다.

내가 자연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표현이 보다 정확하리라. 그 계기에는 에마 로에베의 리턴 투 네이처가 있다. 겨울이나 여름, 혹은 가을에 만났더라면 삶의 풍경은 지금과는 또 달랐으리라. 봄에, 이 봄에 자연을 향해 나의 몸을 이끄는 책을 만난 건 우연일까.

 

리턴 투 네이처는 플러그가 뽑혀가는 자연에 다시 인간을 연결하여 서로 윈윈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책이다. 따로 일정을 잡아 여행하지 않아도 자연과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공유한다. 일상으로 자연을 끌어다 놓는다.

공원과 정원, 바다와 해안, 산과 고지대, 숲과 나무, 눈과 빙하, 사막과 건조지, 강과 개울 등 세상의 모든 곳을 충전 지대로 만들고자 시도한다. 작가의 시각에는 도시와 시가지조차 자연의 일부로 비추어진다.

그녀는 여덟 군데의 특징을 세세하게 살피며 각각의 환경마다 우리가 감각하는 요소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여준다. 많은 이들의 실험 자료를 토대로 과학적인 증거를 제시한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이들의 노력을 목도하니 마음이 따뜻해진다.

작가 에마 로에베의 시도에서 높이 평가할 만한 점은 자연으로의 진입 장벽을 대폭 낮추었다는 점이다. 그녀는 해당 장소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시간별로 제안한다. 5~10분이 생긴다면, 1시간이 생긴다면, 더 많은 시간이 생긴다면, 그 장소가 가까이 없다면 어떤 행동을 취하면 좋을지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나아가 더 생각해볼 것, 그 장소가 지속 가능하도록 사고방식을 전환할 것을 당부한다.

 

보는 것만으로도 편안해지는 책 표지이다. 초록 그림자를 품은 초록 물에서 신선한 산소가 송글송글 나오는 듯하다. 매끄러운 수면이 보드라운 융단 같다. 책날개를 들춰보며 이 장면이 그림이 아니라 사진이라는 사실에 안도한다. 지구 어딘가에는 이런 풍경의 초록 세상이 존재한다는 의미니까. 그 앞에 서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니 마음이 정갈해진다.

'현대인의 대부분은 일상의 87%를 실내에서 보내고 있다!' 띠지에 적힌 문구 앞에서 멈칫한다. 이동 시간을 빼면 집 아니면 직장 혹은 스터디 카페가 대체적인 나의 루틴이니 맞는 말이다. 요즘 내 삶의 무대에 자연이 있었던가. 휘리릭 하루를 되감기 한다. 초록은커녕 덜 익은 연두도 없다.

주변의 초록을 찾아라! 이 책을 읽는 동안 수행할 미션을 정해본다. '삶이 불안할 때 나는 숲으로 갑니다.' 부제 앞에서 서성인다. 숲에 가면 불안이 녹아내릴 수 있을까. 하지만 숲이 없는데 무슨 수로?

'가장 쉽고 깊은 치유를 만나는 자연으로의 여정'이라. 가장 쉽다니까 작가를 한 번 믿어볼까. 작은 기대를 품고 종이의 숲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자연을 접한다는 건 여행처럼 큰맘을 먹어야 가능한 일이라 여겨왔다. 이는 당장 오늘은 어렵다는 의미이다. '쉽다'는 작가의 말을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었다.

"! 시험 문제 쉽게 내셨나요?" "그럼! 너무 쉬워서 100점이 너무 많이 나오면 좋아서 어쩌지?" 시험이 끝난 후, 녀석들은 더 이상 교사의 쉽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전문가의 쉬움은 이토록 다르니, 그런 '쉬움'일 수도 있으니까. 쉬우면서 깊은 치유가 과연 가능할까.

마음이 들썩이기 시작한 건 '5~10분이 생긴다면'이라는 문구를 보면서부터다. 어쩌면? 지금 당장 5분이나 10분을 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하루 5, 자연과의 만남이 선사하는 깊은 회복력' . 띠지에 적힌 문구를 다시 보며 나는 그 '5' 도전을 해보기로 한다.

정기 인사이동으로 3월부터 바뀐 업무 환경, 정시 퇴근은 꿈도 꾸지 못하는 나날을 보낸 지 두 주 남짓 되었을까. 졸린 눈을 비비며 꾸역꾸역 꿈에만 존재하는 듯한 자연을 한 챕터씩 겨우 넘어가던 날, 새싹처럼 꼬박꼬박 튀어나오는 '5'의 도발을 더 이상 간과할 수 없게 된다. 지난 수요일, 하던 일을 과감하게 접고 직장을 나선다.

 

교문을 나와 왼쪽 주택가의 골목길을 따라 주욱 내려가다 큰 길이 등장하면 횡단보도를 건너 잿빛 도롯가를 조금 걷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탄다. 퇴근 경로이다. 그날은 무엇에 이끌린 듯 반대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다른 루틴을 택하고 싶었다.

몇 걸음 걸으니 횡단보도 너머로 지금껏 눈에 띄지 않던 언덕이 보인다. ? 생각보다 코앞에 있는 지형지물에 당황한다. 8년 전, 분명 이 동네에 살았는데, 그때는 없었잖아.

아니, 아니, 없었을 리가 없다. 알라딘의 거인이 산을 송두리째 옮겨 놓은 게 아니라면 말이다. 왜 이런 곳을 보지 못한 걸까.

나 같은 무릎 병자도 한 번 올라가 볼까 생각이 들 정도로 만만한 흙길이다. 고동색의 나무 난간까지 있으니 인간이 다니는 길은 맞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장소.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미지의 공간이다. 보통 때라면 결코 가지 않을 곳에 첫 발을 딛는다. 산이라 하기에는 지극히 낮지만 저 위로 나무가 보이고, 흙이 있다는 것만으로 약간의 친숙함까지 느낀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자연을 생각해서일까.

 

생각보다는 실천이지. 호기롭게 '산책'이라 부르며 미지의 장소에 오른다. , 막다른 길이 나오면 되돌아오면 되니까 조금만 가보자. 갈색의 낮은 울타리 옆, 살짝 경사진 흙길을 몇 걸음 올라가니 짚이 깔린 길이 이어진다. 다시 몇 개의 나무 계단을 밟으니 소담스런 공터가 펼쳐진다. 왼편으로는 제법 나무들도 있어 산속에 있는 느낌이 든다.

저 아래 도시와의 경계도 없지만 산으로 순간 이동이라도 한 듯 공기의 흐름이 바뀐다. 불과 5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먼지 가득한 도로가 잿빛 강물인 양 흐르고 있건만 무슨 마법이 펼쳐진 걸까. 단오 그네를 떠올리게 만드는 기다란 동아줄, 나무 벤치들, 야트막한 둔턱에 군데군데 자라난 커다란 나뭇가지 사이로 하루를 열심히 달려온 태양이 마지막 존재감을 뿜어낸다.

천천히 걷는 어르신들, 주인과 산책하는 나른한 강아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 주변의 풍경들이 슬로우 화면으로 펼쳐진다. 드문드문 산책하는 사람들도, 간간이 흔들리는 나무들도, 사락사락 나뭇잎을 부비는 바람도, 천천히 천천히 나를 스친다. 무작정 앞으로 걸어가니 익숙한 지하철역이 보인다. 불과 5분 정도가 지나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내일 비가 올까. 습관적으로 휴대폰 날씨 앱을 하늘인 양 들여다보다 움찔한다. 하늘 한 번 올려다보지 않고 날씨를 검색하다니. 하늘을 본 게 언제였더라. 구름이 얼마나 많이 흘러 들어와 떠 있는지, 하늘이 무슨 빛으로 펼쳐져 있는지, 바라보지도 않은 채 머리 위 세상을 알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아이러니라니.

미리 안다고 해서 안심이 되는 건 아니다. 의지가 없는 구름은 변화무쌍하게 흘러가니까. 예보의 명령에 따르는 구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당신도 알고 있다. 자연은 그저 자연스럽게 자연의 길을 갈 뿐이다.

일주일 치 날씨를 1초 만에 예측하며 미래를 당겨오는 세상이다. 삶이 점점 촘촘해진다. 이러다 눌러 붙는 어깨 근육처럼 경직되는 건 아닐까. 언제부터 이 조그마한 휴대폰 안에 세상이 담기게 되었을까. 세상이 넓어진 건 맞나. 온라인 세상이 펼쳐지면서 세상이 두 배로 확장된 듯 보이지만 오히려 좁아지는 건 아닐까.

지하철 안에도 온통 휴대폰 속 세상이 들어와 있다. 휴대폰에 몰입하는 사람들이 한가득이다. 시각과 청각만 열어둔 채로 네모난 컴퓨터와 휴대폰 속 세상으로 빨려 들어간다. 오프라인 세상을 향하는 감각이 점점 둔감해지는 줄 느끼지도 못한 채.

 

다음 날 퇴근길에도 흙길을 걷는다. 닫혀있던 다른 감각 기관들이 열린다. 향긋한 나무 내음이 코끝을 스친다. 한껏 들이마신다. 언제부터 새 소리가 들렸던 걸까. 부드러운 바람이 뺨을 어루만지며 달아난다. 산책로로 조성된 장소, 주민들을 위한 운동 공간, 존재하는지 몰랐던 공원이 이토록 가까이 있었다니.

몽글몽글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폭신한 감촉이 운동화를 뚫고 양말을 감싸고 있는 발바닥까지 전해진다. 두 발이 플러그라도 된 양 짚이 깔린 길을 밟으며 충전한다. 양말을 벗고 싶은 마음을 자제한다. 발에 묻을 흙을 무사히 제거할 대책을 마련하는 대로 기필코 시도해 보리라.

많이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은 생각보다 많이 흐르지 않았다. 배경은 금세 시멘트 바닥으로 바뀌지만, 고속 충전을 한 듯 피로가 풀린다. 한 달 전만 해도 상상도 하지 못한 경험이다. 실내화와 실외화의 구분이 굳이 필요할까 싶은 도어 투 도어의 출퇴근길. 딱딱한 바닥에서 바닥으로 이어지던 경로에 흙 내음이 슬그머니 끼어 들어온다.

다른 경로로 5분 산책을 한다. 분명 트인 공간인데 묘하다. 나무와 흙으로 둘러싸인 그곳에만 가면 비눗방울 속으로 들어간 듯 공간의 흐름이 다르게 느껴진다.

 

구획이 정해져 있지 않은 흙길은 많은 경로를 가능하게 만든다. 경우의 수가 많다는 건 나의 하루를 다른 빛깔로 채색할 수 있다는 의미다. 우뚝 선 나무들은 계절마다 다른 옷으로 갈아입으며 변신할 터이다. 하루의 산책은 그러데이션처럼 매번 조금씩 다르리라. 나만의 산책길에 펼쳐질 미지의 풍경을 가늠하니 작은 설렘이 새처럼 날아든다.

에너지를 충전하며 하루를 마무리한 지 일주일째다. 이제야 서류나 모니터가 아닌 사람들이 보인다. 새로 바뀐 동료들과 아이들, 앞으로 마주하게 될 그들의 영혼이 나에게 펼쳐 보여줄 세계가 산책길 풍경만큼이나 기대된다. 5분의 쉼표가 부린 마법이다.

진동수가 일치하는 두 개의 진동이 만나면 큰 폭으로 진동한다. 삶의 시작과 자연의 시작이 만나 공명을 일으킨 걸까. 봄에, 새싹이 돋아나는 시작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니 더욱 울림이 크다.

그 계기가 되어준 이 책을 바로 이 시기에 만난 건 그래, 이건 차라리 필연이다. 첫걸음마를 하는 아이처럼 삶을 채워보라는, 삶이 주는 선물이다. 5분 쉼표를 품에 안으니 마음이 간질거린다. 심장에 파릇한 새싹이 돋아 영혼이 향긋해진다.

 

p239, 5째 줄: 사막과 건조지에서 더 생각해볼 것 글씨체를 크게

p275, 밑에서 3째 줄: 강과 개울에서 더 생각해볼 것 글씨체를 크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슬럼프일까. 한 달이 넘게 어떤 글도 흘러나오지 않는다. 마음에 변비라도 걸린 듯 혼란스러운 감정과 생각의 찌꺼기가 쌓이고 또 쌓인다. 의도적이지 않은 쌓임의 덩어리는 실체가 없다. 찬란하게 빛나는 육각의 눈 결정이 아니라 무게에 꾹꾹 눌려 뭉뚱그려지다 잿빛 얼음덩이로 그늘진 구석에 숨어들어 간다. 문장이라도, 단어라도 끌어올리려 안간힘을 쓴다. 절뚝거리는 손가락이 간헐적으로 키보드를 걷는다. 말을 처음 배우는 아기처럼 분절된 문구가 더듬더듬 드러난다.

글은 양방향 화살표인가. 나로부터 나오지 않는 글은 내게 들어오지도 않을 작정인가. 책 속의 글자가 설익은 밥알인 양 심장의 외피를 겉돌다 떼구르르 달아난다. 질척한 감정들 사이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는 듯이. 책장을 몇 번이나 들춰보다 덮기를 반복한다. 책상 위에 놓인 책 표지를 바라만 보다 근 한 달을 어정쩡하게 날려 보낸다.

다른 이의 말에 집중하기가 어렵다. 양옆 시야를 가린 경주마처럼 종종 주변 풍경을 놓친다. 융통성 없는 시선은 어찌 눈앞만 질주하는가. 키오스크에서 코앞에 버젓이 드러나 있는 메뉴를 발견하지 못한다. 몇 번의 동공 지진 후, "먼저 하세요." 타발적인 양보심을 발휘한다. 생각한 대로 잠시 바뀌어 보이는 글자의 변신술을 경험한다. 방금 들은 말도 기억나지 않거나 헷갈린다.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나이로 인한 인지 장애를 슬그머니 의심해 본다.

 

온 식구의 생일과 전화번호를 또렷이 기억하시는 80대 중반의 친정어머니가 스친다. 당신에 비하면 아직도 팔팔한 50대 청춘이니 세월에 책임을 전가하기에는 다소 민망하다. 어쨌든 빠르게 녹아내리는 눈인 양 자존감이 허물어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푸념인 듯 중얼거린 잿빛 시간, 자존감이 바닥을 구르던 시간을 과거형으로 표현한 건 지금은 서서히 벗어나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 시작에는 김기태의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이 있다.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은 무기력자에게 주어진 기간 미션이었으니까. 독서 모임 날짜가 임박해 간다는 건 벼락치는 읽기라도 시작하지 않으면 리뷰고 나발이고 몽땅 망해버릴 데드 라인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의무감이 슬럼프의 등을 밟고 올라선다.

'작가의 말' 없이 세상을 향해 던져진 글 덩어리를 접한다. 작가는 글로 말하는 존재이니 굳이 '작가의 말'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

한 번 펼치니까 느리게나마 읽힌다. 다행이다.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내용을 기억하려 긴장하지 않아도, 맥락을 찾아 헤매지 않아도 이해가 되는 내용이다. 단편 모음집이니 짤막한 호흡으로도 감당이 된다. 대하소설이거나 스펙터클다이내믹한 이야기였으면 어쩔 뻔했을까. 질식할 듯 마음이 답답하거나 감성의 온도 차로 인해 유리화된 멘탈에 균열이 생겼을지 모를 일이다.

 

그의 문장을 만나서 정말 다행이다. '일하면서 듣기 좋은 카페 음악, 생각 없이 틀어만 놔봐~' 음악을 듣는 기분이랄까. 산책하는 속도로 독자를 이끄는 글이다. 그렇다고 마냥 가볍지만은 않다. 피라미드같은 사회 구조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들, 생태계로 비유하자면 생산자의 범주에 포함되는 평범한 이들의 이야기이다.

역도 선수 소녀, 케이팝 아이돌 그룹의 팬, 사회가 요구하는 무난한 삶을 걸어가는 직장인, 가난으로 공감대가 형성되는 두 사람, 짝짓기 예능 프로그램에 참여한 여자, 불안을 품고 사는 노인, 교육적 딜레마 사이에서 고민하는 교사, 강박증에 얽매인 남자,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이 배출한 스타와 팬. 각자의 자리에서 진지하게 살아가는 아홉 편의 서사 앞에서 마음은 서서히 차분해진다.

사회라는 연극 무대에 서는 소수의 주인공이 아니라 지나가는 사람 1이거나 무대 배경으로 오도카니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이거나 주인공을 비추는 핀 조명이거나 군무를 추는 N분의 1인이거나 은은하게 흐르는 BGM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그들의 독백과 외침을 경청하며 공감하게 만드는 흡인력, 김기태 작가의 글이 지닌 힘이다.

작가의 의식의 흐름을 대략이나마 따라가고 싶어 최초의 작품부터 출간 순서대로 읽기로 한다. 여덟 번째로 배치된 작품의 문고리를 잡아당긴다. 2022년 동아일보 신춘 문예 당선작 무겁고 높은부터 시작한 건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 된다.

 

무겁고 높은에서 역도 선수인 고3 송희의 목표는 100킬로그램의 바벨을 버려보는 거다. 들어보는 게 아니라 버려보는 것. 그녀는 버려보기 위해 들어 올린다. 버리는 것과 떨어뜨리는 게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전자와 후자를 판단하는 기준은 자발성이다. 스스로의 의지로 무게로부터 벗어나는 행위는 삶의 속성과도 자연스레 중첩된다. 시선의 반전을 꾀하는 작가의 관점에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녹록하지 않은 가정 환경이 묘사되면서 주인공을 둘러싼 삶의 무게가 그려진다. 그녀의 독백을 따라가면 삶을 마주하는 진지하고 맑은 용기를 만난다. 묵직하면서 당당한 태도는 절로 내 자신을 돌아보는 거울이 된다. '역도' 대신 ''으로 주어를 바꾸어 읽어도 괴리감이 없다. '앉아서 시작하고 일어서서 끝낸다'던지, '들어보고 싶다기보다 버려보고 싶었다'던지, '내 손안에 있는 내 것. 내 몫의 약속'이라든지. 시린 삶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삶에 대한 열기를 감지한다. 저온 고압에서 만들어진다는 불타는 얼음 '하이드레이트'를 떠올린다.

작가는 노력 끝에 성공한다는 평범한 전개를 거부한다. 현실은 동화가 아니니까. 선발전에서 목표 달성을 하지 못하고 바벨을 떨어뜨린 주인공은 운동과는 무관한 길을 걷게 될 예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그녀의 목표는 자신과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드디어 100킬로그램을 깔끔하게 버리고 역도를 그만두는 장면에서는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문장의 온도가 고스란히 마음에 스며들어 덩달아 심장이 뜨거워진다.

 

조금씩 마음이 열리면서 문장 길 산책에 약간의 속도가 붙는다. 세상 모든 바다에서는 공연장 안에만 있는 평화를 바라보고, 전조등에서는 뭔가 다른 게 되어볼 수 있지 않느냐는 문장 앞에 멈추며 한 인간의 본질을 가늠한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에서는 미미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헤아리며 '친한 사이'를 정의해보기도 한다.

'친한 사이'는 어떤 설명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지인들의 얼굴을 영화 필름이 만들어내는 파노라마인 양 돌려본다. 함께 있는 장면이 어쩐지 어색한 사람, 매번 그래왔던 듯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사람, 아무런 느낌 없이 스쳐 가는 사람들이 차례로 떠오른다. '마주 보고 앉았을 때 어떤 이질감도 없는 사이, 자기 검열을 거치지 않고 대화해도 부담 없는 사이'로 나만의 정의를 내려본다.

롤링 선더 러브에서는 배경을 제거한 사람에 대하여, 주인공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을 나에게도 던져보며 내가 원하는 것을 손꼽아본다. 지난주, 발령받은 학교에 출근했을 때 교사 연수 중 이루어졌던 아이스브레이킹 활동이 생각난다. 모둠별로 돌아가면서 나의 장점 10개를 말하면서 손가락 접기. 역지사지를 떠올리던 날이다. 예전에 담임 학급의 학생들에게 적어내라고 했던, 열 가지도 없냐며 잘 생각해 보라고 웃으면서 다그치던 인간은 손가락의 개수가 이렇게나 많았나 새삼 깨달으며 반성한다. 지금 복기하며 천천히 꼽아보니 발가락까지 동원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아이들은 장점이 없었던 게 아니라 얼마 전의 나처럼 나의 장점을 헤아려 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게 아닐까.

 

마음속에 여유 대신 불안을 품은 노인의 이야기 태엽은 121/2바퀴에서는 '왜 시도도 안 해봤을까'라는 문장이 맥락과 관계없이 심장에 꽂힌다. 겁이 많아서, 이렇게 하면 저렇게 될까 봐.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당겨와서 걱정하느라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흘려보냈던가. 그래서 달라질 수 있었던 삶의 풍경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홀로그램이다. 시도해 보지 않아 결코 알 수 없는 나의 모습이 문득 궁금해진다.

이상적인 수업을 꿈꾸는 교사의 이야기 보편 교양에서 가장 오랜 시간 머문다. 충분한 연금 수령액에 도달하려면 십오 년은 더 일해야 하며 그 연금을 실제로 받으려면 이십오 년이 남아있는 주인공. 다행히 나를 비껴갔지만, 젊은 주변 선생님들의 현실이 남의 일 같지가 않다. '교육은 예전에 끝났어', '제가 뭘 가르쳤다고 하던가요?' 다큐멘터리를 목도 하듯 사실적으로 묘사된 교실 풍경이 너무나 익숙해서 소름이 돋는다. 크고 작은 교실 붕괴를 경험하며 근근이 버텨가는 삶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수업 첫날의 수강생은 교사의 책임이 아니다. 그러나 수업 마지막 날의 수강생은 교사의 책임이다.' 반은 체념하는 마음이 크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아직도 수업을 잘하고 싶은 바람이 있다. 무모하리만치 열심히 수업을 준비하는 주인공을 바라보며 첫 학교에서의 내 모습을 떠올린다. 때로는 실수도 하고 어설펐지만, 새로운 시도에 겁이 없던 장면들이 재생된다. 괜스레 코끝이 찡해진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어떤 실수는 바로잡을 수 없을 뿐이다.'팍스 아토미카에서 묘사되는 강박증을 보며 나를 살핀다. 주인공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나 역시 정리 정돈에서 약간의 강박을 보인다. 싱크대 수납장에 라면 봉지를 넣을 때 무늬를 맞춘다든지, 책을 높이별, 색깔별로 정리한다든지, 패턴에 맞춰 물건을 종류별로 배열한다든지. 정돈된 환경에서 마음의 안정감을 느낀다. 다른 이에게는 이를 강요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마음이 불편하면 그 방향을 바라보지 않는 것으로 나름 자신과 타협을 본다.

로나, 우리의 별에 대해서는 메모해 놓은 내용이 없다.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을 본방 사수했던 예전이라면 달랐으리라. 격하게 공감하며 또 다른 문장을 독해하고 있을지 모른다. 현재의 나로서는 관심에서 벗어난 영역이라 특별한 울림점은 찾지 못한다.

학교를 옮기는 해이다. 매년 가르치는 학생들은 달라지지만, 교수 환경의 변화에서 오는 긴장감이 크다. 나의 관심사는 변화하는 환경에 어떻게 잘 녹아 들어갈까이다. 이런 이유로 보편 교양에 많은 공감을 하며 덩달아 수업과 학생 지도를 고민하는 시간을 가진다.

마음 군데군데 작은 뾰루지가 나 있는 이미지를 상상한다. 그걸 건드리는 문장들에 반응하게 되는 걸까. 누구에게나 좋은 책은 없다. 고민으로 생긴 뾰루지를 짜주거나 연고를 발라주고 밴드를 붙여주는 책을 누군가 좋아하게 될 뿐이다.

 

고민이 많았던 이유를 알겠다. 어색한 공간, 어색한 사람들, 어색한 시간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서성이며 방황할까 두려운 거였다. 나를 전혀 모르는 집단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며 집단의 일부로 자리를 잡을 때까지 걸릴 진공의 낯섦이 묵직하게 다가와서 그랬던 거다.

두려움의 다른 이름은 설렘 아닐까. 작가의 의도든 아니든 이런 생각이 나오는 데 이 책의 지분은 상당하다. 문체일 수도 있고, 문장의 속도일 수도, 서사의 색채나 온도 때문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게 번갈아 다가오면서 내 고민을 톡톡 건드렸나. 낯선 장소에서 방황하다 친근한 도로로 들어선 듯 안도감이 생긴다.

나에게는 아직도 나흘의 준비 기간이 남아있다. 다행이다. 개학 하기 전에 정신 차려서. 오랜만에 하는 3학년 담임, 과학 기획 업무, 스마트 교육, 달라진 출판사의 교과서 지도, 평균 수업시수 22시간이라도 잘 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명예롭게 퇴직하기 위해 스스로 정한 2년의 남은 기간 동안 신규 교사의 마음으로 열심히 마무리하고 싶다.

사물함의 이름표를 붙이고, 얼굴도 모르는 아이의 이름을 한 명씩 발음하며 책상 이름표를 붙이고, 교실 바닥을 쓸고, 불필요한 물건들을 버리고, 청소 도구함을 정리하고 왔다.

손끝을 맴도는 은은한 온기에 심장이 서서히 데워진다.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다. 시작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눌려있던 나의 열정은 불타는 얼음이 되어 이제 세상 밖으로 드러날 준비를 하고 있다. 시작을 준비하는 마음, 이건 분명 설렘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건축가의 공간 일기 - 일상을 영감으로 바꾸는 인생 공간
조성익 지음 / 북스톤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벤 다이어그램에서 나는 우주를 본다. 집합 간의 논리적 관계를 나타낸 2차원 그림을 우주의 미니어처인 양 가만히 바라본다. 가장 매력적인 건 여집합을 정의하는 그림이다. 전체 집합에 속하면서 집합 A에 속하지 않는 모든 원소의 집합. 전체 집합 U에서 우주를 의미하는 'universe'를 떠올리고 집합 A''인 양 놓아두니, A의 여집합은 자연스레 나를 둘러싼 공간이 된다.

여집합은 보집합으로도 불리운다. '()''남는다', '()''보완한다'는 뜻이다. 나는 후자의 의미가 더 마음에 든다. 나를 보완해 주는 대상이라니, 얼마나 든든한가! 온 우주가 나를 돕는 행운을 맞이하는 것처럼 온통 나를 둘러싼 공간의 존재 아닌가! 상상만 해도 오리털 이불로 폭 둘러싸인 기분이다.

, , 집합에서 우주라뇨, 너무 오버하시는 거 아닙니까! 집합 문제를 풀며 머리를 쥐어짜다 쥐가 날 지경인 고3 학생들이 이 글을 싫어합니다. ~ 너무 약올라하지 말도록. 머리를 쥐어짜지 않게 되면 삭신을 쥐어짜게 되니 그럭저럭 공평한 걸로 여깁시다!

처음부터 이토록 한가한 시선을 가진 건 아니다. 지긋지긋했던 함수의 그래프에서 유려한 곡선미를 발견하거나 사칙연산 기호에 인생을 접목하는 건 수학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치열한 점수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 우연히 접하는 수학 기호는 삶의 속성을 안은 채 다가오기 시작한다.

 

치열한 삶을 살아가던 시기에 공간의 존재감을 느낄 여유는 없다. 세상이라는 뚜껑으로 들어가는 사인펜처럼 세상과 나 사이의 간극이 좁아지기 때문이다. 그 시기, 공간이라 여길만한 곳은 학교를 제외하면 집이 유일했다.

어둡고 좁고 시리고 후텁지근한 공간을 메우던 가난은 공간을 비슷한 냄새로 채운다. 안방 문만 열면 바로 바깥인 삶에서의 집은 하루를 통과하고 돌아온 몸을 잠시 뉘는 장소 정도의 의미를 지닌다. 서로를 보듬는 가족들의 온기가 아니었다면 빠져나오지 못했을 공간, 공간을 인지하게 된 나이로부터 결혼 전까지의 기억이다.

어둠과 넓이와 추위와 더위로부터 벗어나니 36.5도의 온기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공간에 놓인다. 20대까지는 몸이 시렸다면, 30대와 40대를 건너는 동안에는 마음이 시렸다. 의무가 대부분인 삶에서 '즐거운 나의 집'은 노래에서나 등장하는 유토피아였다. 여집합과 나 사이에 이도 저도 아닌 틈이 만들어진다. 불안정한 마찰음과 눅진한 바람이 새어 들어온다. 가난에서 벗어나도 공간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하는 건 매한가지였다.

간간이 저녁 시간에 커피숍에서 책을 읽는 시간을 확보하지만 어정쩡하면서 겉도는 상태였다. 책과 커피잔을 배경으로 종종 남겨놓은 셀카를 들여다보면 당시 나의 표정이 읽힌다. 다른 이들은 감지하지 못할 슬픔이 배어있는 눈동자가 조용히 나를 마주 본다. 안간힘을 쓰며 탈출한 공간조차 제대로 누린 것 같지는 않다.

 

건축가의 공간 일기는 인생 공간을 찾는 방법에 대한 레시피이다. 건축가 조성익은 '인생 공간은 어디에나 있다.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 뿐'이라며 책 한 권에 희망을 잔뜩 담아 건네준다. 공간을 조각하는 전문가가 공간의 맛을 직접 보고 그 느낌을 실감나게 묘사해 주니 보다 넓은 관점에서 공간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 생긴다.

그가 제시하는 방법은 세 가지이다. 첫째, 좋은 공간에 나를 둘 것, 둘째, 일상 공간을 인생 공간으로 만들 것, 셋째, 내 공간의 목소리를 찾는 것이다. 외국에 있는 유명한 공간보다 숨은 맛집 같은 장소를 안내하고, 그가 대표로 있는 건축사 사무소가 위치한 서교동에서도 자신만의 인생 공간을 찾는다.

앞부분에는 '인생 공간, 동네에서'라는 제목의 지도가 있다. 집과 일터를 포함한 공간을 그린 동네 지도다. 느슨한 공간, 오감 공간, 땡땡이 공간, 스케일 공간, 사람 구경 공간, 아날로그 공간, 몰입의 공간, 소속감의 공간, 산책 공간, 스몰 토크의 공간 등이 펼쳐진다. 군데군데 정체성을 부여하여 삶의 순간마다 머물기 위한 맞춤형 지도에서 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저자가 본문에서 소개하는 공간은 다양하다. 수도원, 교회, 성당, 묘지, 시장, 건축사 사무소, 야구장, 음악감상실, 엽서 도서관, 기차역, 사우나, 술집, 도서관, 정원, 자택, 오두막, 숙박 시설, 빵집, 민박집 등. 그가 안내하는 좋은 공간을 구경하다 보니 여행의 목적으로 삼아도 되겠다 싶다.

 

좋은 공간은 어떤 모습인가. 좋다, 나쁘다는 개인적인 취향이 적용되는 영역이지만 보편적인 조건은 있는 듯하다. 책 속에서 특히 와 닿았던 공간의 정체성을 메모한다.

첫째, 느린 속도로 머무는 공간으로 치유의 역할을 하는 '슬로 스페이스'이다. 절제된 장식, 변화하는 햇빛, 빛의 증폭기로 구성된 공간. 이 모든 조건을 갖춘 공간으로 저자는 수도원과 동네 카페를 제시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사용했다는 시간 개념 중 의미 있는 한순간을 뜻하는 카이로스 시간을 즐기기를 권한다.

둘째, 일하다가 땡땡이를 칠 수 있는 공간이다. 언제든 쉽게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면서 경외심을 주는 '스케일의 공간'으로 그는 교회와 성당을 소개한다.

셋째, 계절감을 주는 공간, 시장이다. 계절감을 묘사하는 멋진 문장들이 눈에 띈다. '계절감은 시장의 인테리어, 선으로 흐르는 시간 속에 점을 찍어 마음에 저장하는 일, 계절의 초입에 있다는 제철 음식 데이' 같은 문장들이다.

넷째, 시각 이외의 감각으로 경험하는 공간이다. '눈은 분석하지만 몸은 기억한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문손잡이가 건물이 건네는 악수'라는 문장을 접하니 건물의 손잡이가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다섯째, 시각적 소음이 제거된 몰입의 공간이다. 건축가는 조명을 이용해 공간을 변신시킨다고 한다. 집보다는 조명이 있는 스터디 카페에서 글이 훨씬 잘 써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걸까.

 

'좋은 공간에 나를 두고, 공간이 건네는 좋은 목소리를 들으면 우리의 삶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는 문장을 이미지로 상상한다. 근심 걱정이 사르르 녹는 듯 마음이 느슨해진다. 익숙하지 않은 고개가 아직은 어색하게 돌아가지만, 50대가 되어서야 나와 여집합을 바라볼 여유가 생긴 듯하다.

의지대로 나의 몸을 둘 수 있는 자유를 마련하는 중이다. , 0.7mm 볼펜, 이면지, 노트북, 마우스, 이어폰, 텀블러 등 필요한 물건까지 풀옵션으로 갖춘다. 지금 여기, 조용히 키보드를 두드리는 스터디 카페에서 나는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

여집합을 바라보게 만드는 책을 만나 구석구석 공간을 바라보며 안정감이 오는 이유를 찾는다. 미래의 삶을 위해 진지하게 공부하는 젊은 모습들을 보면 열심히 살고 싶어진다. 삶에 비추는 핀 조명인 양 노트북 위로 내리쬐는 조명 아래에서 나의 삶을 글로 옮긴다. 따뜻한 차를 마시며, 이어폰으로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공기 청정기 사이로 얼핏 스치는 향을 맡으며, 매끈한 키보드의 감촉을 손끝으로 느낀다.

살짝 열린 오감으로 흘러 들어오는 잔잔한 자극들이 나의 삶을 기분 좋게 보듬는다. 좋아하는 넓이, 질감, 온도, 소리의 진동, 냄새 입자의 출렁임. 다른 자극으로 메워진 또 다른 공간을 찾아 나만의 동네 지도를 만들고 싶다. 촉감이 좋은 이불처럼 만들어진 여집합에 폭 둘러싸이고 싶다. 열심히 여기까지 온 나에게 공간의 물리량을 하나하나 찾아가며 삶의 이벤트를 만들어주고 싶어졌다.

 

p48, 11째 줄: 베르그먼 브리그먼

p56. 밑에서 4째줄: 덴진바시스지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