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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칼로그 - 김용규의 십계명 강의
김용규 지음 / 포이에마 / 2015년 9월
평점 :
김용규는 <백만장자의 질문>이란 책으로 재벌에 부역하고 혹세무민하였으므로 별점을 깍는다.
20대 때 니체를 읽고 나 역시 니체를 따라 ‘안티 크리스트’를 선언했다.
그런 내가 십계명에 관한 책을 읽을 줄이야!
강석경의 <저 절로 가는 사람>을 읽고선 당장 삭발하고 출가하고 싶었다.
반면 이 책을 읽고선 당장 교회로 달려가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기도드리고 싶었다.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었다. 찬송하고 싶었다.
‘오, 주여~ 전능하신 하나님!!’
나는 모태신앙이었다. 어릴 때부터 일요일에 교회에 가는 건 평일에 학교 가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교회가면 좋았다. 먹을 것도 주고, 예쁜 교회 여동생도 있고, 교회 누나도 있고, 계란 먹는 부활절도 좋았고, 크리스마스 때면 부모님 허락 하에 밤을 샐 수 있는 ‘새벽송’도 좋았고, 성가대 활동도 좋아했다. (아, 가스펠 송을 얼마나 좋아했던가)
그럼에도 나는 무신론자가 되고 말았다. 내가 기독교에 의구심을 갖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성경 탓이었다. 머리가 커지면서 도무지 성경을 제정신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신이라는 자가 허구헌날 전쟁 일으켜 사람 죽이기 바쁘다. 잔인하긴 이루 말할 수 없다. 툭하면 시기하고 질투한다. 찬양하라고? 인간도 개나 고양이를 키우며 ‘나를 찬양해! 찬송해!’라고 하지 않는다. 전지전능한 신이라면 피조물의 찬양 따위가 무엇 때문에 필요할까? 오로지 허영심 때문이다. 욥을 보아라. 열심히 믿으면 뭐하나? 신은 사탄의 한 마디에 혹해서 죽어라고 괴롭힌다. 사랑은 개뿔. 살인하고, 잔인하고, 질투하고, 귀가 얇고, 의심하고, 시험하고.
이 신과 가장 흡사한 인간 성격 유형을 뭐라 하는가?
‘팜므파탈’이다. 신은 남자인가? 그렇다면 ‘옴므파탈’.
한국말로 하자면 양아치, 조폭, 깡패, 불한당이다.
초기 라틴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다.
정말 믿고 싶다.......죽도록 믿고 싶은데.....
빌려온 책들엔 낙서를 할 수 없어 조그마한 포스트 잇을 붙여놓는다. 와, 겨우 일계명 읽는데 거의 매 페이지마다 포스트 잇을 붙였다. 포기했다. 매 페이지마다 붙이면 도대체 왜 붙인단 말인가. 필사 포기다. 일주일은 걸릴 것 같다.
단 한 번도 십계명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토록 많은 학자들이 십계명을 연구했다니! 김용규는 크쥐스토프 키에슬롭스키의 연작 드라마 <데칼로그>에서 책의 영감을 얻었다. 그는 드라마 <데칼로그>를 매개로 십계명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을 시도한다.
그렇다면 십계명을 한 번 불러볼까.
1판
제 1계 :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출애굽기 20:3)
제 2계 :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출애굽기 20:3 ~6)
제 3계 :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출애굽기 20: 7)
제 4계 :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으니라 (출애굽기 20: 8~11)
2판
제 5계 : 네 부모를 공경하라.....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갈리라 (출애굽기 20: 12)
제 6계 : 살인하지 말라 (출애굽기 20: 13)
제 7계 : 간음하지 말라(출애굽기 20: 14)
제 8계 : 도둑질하지 말라 (출애굽기 20: 15)
제 9계 :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출애굽기 20:16)
제 10계 :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출애굽기 20:17)
1판이 신과 인간의 관계라면 2판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다. 이 열 계의 계명이 추후 율법학자들에 의해 613개까지 확대되었다. ‘안식일에 아이를 안아도 되지만 돌을 든 아이를 안으면 안 된다’는 둥 십계명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기는커녕 족쇄이자 사슬이었다. 김용규는 크뤼제만의 사회학적 해석‘을 토대로 ’존재론적 해석‘을 시도한다.
“예흐예 아세르 예흐예” 신은 자신의 이름을 모세에게 말했다. ‘나는 있다, 나는 존재한다’로 해석된다. 저자는 이러한 있음. 존재에 주목한다. 야훼는 ‘그는 있다’라는 뜻이다.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하게끔 한다. 제 1계명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의 뜻은 신 안에서만 인간이 자유롭다는 뜻이다.
제2계의 뜻은 ‘신이 아닌 것을 마치 신처럼’ 섬기지 말라는 뜻이다. 돈, 쾌락, 권력, 이성 등은 우상의 예다. 저자는 종교해악론자들과 종교말살론자들을 비판한다. <만들어진 신>의 리처드 도킨스, <종교의 종말>의 샘 해리스, <주문을 깨다>의 대니얼 데닛, <신은 위대하지 않다>의 크리스토퍼 히친스, <우주에는 신이 없다>의 데이비드 밀스 등등.
저자 입장에서 이들은 여전히 이성을 우상처럼 섬기는 자들이다. 저자는 종교에 의한 만행이 사실임을 부인하진 않는다. 그러나, 20세기에 벌어진 제노사이드가 모두 종교 때문은 아니라고 반박한다.
다른 이유로 나는 종교말살론에 반대한다. 종교를 없앨 수 있다는 생각은 ‘사유재산 폐지’만큼이나 순진한 발상이다.
신에게는 이름이 없다. 당연하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한정된다는 뜻이다. 신은 무한자요. 무규정자다. 이름이 있다면 그는 신이 아니다.
제 3계는 아무런 목적없이 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합당하게 신의 이름을 사용하라는 뜻이다.
제 4계명 역시 인간에게 자유라기보단 족쇄로 작용했다. 율법학자들은 안식일에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등 온갖 율법을 고안해냈다. 안식이란 무엇인가? ‘무엇 – 됨’이 아니라 ‘있음’에 거주하는 것이다. 아이는 엄마가 ‘무엇 –됨’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엄마의 ‘있음’에만 관심을 갖는다. 부모 역시 아이가 똑똑해서, 잘 생겨서 사랑하는 게 아니다. 자식의 ‘있음’에 감사하고 ‘있음’을 사랑할 뿐이다.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라고 말했다. 타인은 우리를 ‘있음’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무엇 –됨’으로만 바라본다.
죄란 무엇인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수페르비아’다. 즉, 인간 스스로를 신처럼 높이려는 마음이 죄다. 그것은 ‘신에게서 돌아서는 것’이다. 신에게서 돌아섬은 존재 상실이다. 리쾨르에 의하면 그것은 혼의 상실이다. 그것은 또한 ‘도저히 안식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죽은 혼’은 ‘콘큐피스켄치아‘ 곧 한없는 욕망이다.
그러므로 안식이란 ‘무엇 –됨’을 향한 한없는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존재 자체’를 기뻐하는 것이며, 존재 자체의 자유이며 신을 향해 돌아서는 것이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은 자만을 극복하고 복종하라는 가르침이다. 자만 때문에 타락했으므로 인간에겐 겸손만이 유일한 길이다. 니체는 기독교 정신을 낙타에 비유했다. 그는 기독교를 ‘삶을 부정하는 긍정’이라 비판했다. 저자는 복종이 ‘자유인의 미덕’이며 ‘복종하는 자’의 승리라고 주장한다. 나처럼 불가지론자(현재)의 입장에선 니체의 말이 더 설득력이 있다.
크뤼제만에 따르면 살인하지 말라에 쓰인 히브리어 동사 ‘rsh’는 의도되지 않은 살인마저 포함한다. 그러나, 저자는 ‘존재론적인 살인을 하지말라‘로 해석한다. 존재론적 살인이란 영혼의 살인이다. ’소외당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소외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프롬에 따르면 사랑이다. 따라서 ’살인하지 말라‘는 ’서로 사랑하라‘라는 뜻으로 확대된다.
저자는 ‘간음하지 말라’의 계명을 ‘네 이웃을 사랑하라’의 뜻이라 주장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을 두 종류로 나눈다. 피조물에 대한 하향적 사랑인 쿠피디타스cupiditas와 신을 향한 상승적 사랑인 카리타스caritas. 쿠피디타스가 ‘무엇-됨’에 대한 사랑이라면 카리타스는 ‘있음’에 대한 사랑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수관으로 흘러가는 물을 정원으로 끌어가시오’라고 했다는데 과연 그렇게만 하면 쿠피디타스를 카리타스로 바꿀 수가 있을까.
제 8계명 ‘도둑질하지 말라’는 인간을 소유 가능한 존재물로 취급하여 ‘무엇-됨’을 이용하려는 탐욕을 버리라는 뜻이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제 9계명은 ‘네 이웃의 명예, 권리, 소유, 그리고 행복에 해를 끼치는 말을 하지 말라, 사랑 안에서 서로 도우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말하라’
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말하라의 뜻은 ‘인식의 진리’가 아닌 ‘존재의 진리’에 어긋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저자는 마지막 10계를 영화 <데칼로그>처럼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와 ’네 이웃의 모든 소유를 탐내지 말라‘, 둘로 나눈다. 10계는 한 마디로 ’자족하라‘의 가르침이다. ’너는 네게 있는 것에 자족하고, 네게 없는 것을 탐하지 말라‘는 뜻이다.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은 가졌으나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은 가지지 않았다.
키르케고르는 인간의 구원을 ‘실존의 3단계’ 설로 설명하였다. 심미적 단계, 윤리적 단계, 종교적 단계. 종교적 단계의 예가 욥이다. 무한한 자기체념은 신앙 앞에 전제되는 최후의 단계다. 그에 따르면 구원의 문제는 신앙의 문제이지 이성의 문제가 아니다.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고난이 없는 인간은 종교적 단계에 들어가지 못한다.
프로이트와 프롬은 돈을 ‘지옥의 똥’으로 보았다. 프롬은 탐욕이 지닌 네크로필리아적 성격에 대해 말한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증오하고 죽은 것을 사랑하는 일종의 병적 상태, 그것이 네크로필리아다. 반면에 생명과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정열적 사랑이 바이오필리아다.
현대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사회는 신자유주의와 금융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을 ‘부채인간’으로 만들었다. 부채가 이익을 창출하는 금융자본주의에선 아무도 빚 없이 살 수 없다. 오늘날의 문학, 철학, 종교는 인간의 탐욕을 정당화하고 미화시킨다.
그렇다면 어떻게 탐욕에서 벗어날 것인가. 죄 때문에 탐욕의 노예가 되었기에, 죄 사함만이 탐욕에서 해방되는 길이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합하여’ 새로운 인간이 되는 것. 이른바 ‘레카피툴라티오(총괄적 갱신), 흔히 말하는 ’거듭남‘에 의해 탐욕에서 벗어날 수 있다.
프로이트로 말하자면 타나토스와 에로스.
기독교 사상에서 구원을 이루는 두 개의 주된 메커니즘이 있다. 칭의와 성화다. 칭의는 죄인을 의인 되게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죄 사함’이라고도 부른다. 성화는 악인이 선인이 된다는 뜻이다.
세례를 받고도 악한 행동을 계속하는 자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 저자에 따르면 구원 받을 수 없다. 세례가 아니라 성화가 구원의 징표다. 세례만 받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바울로부터 나왔다. 바울의 간사함 때문에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악의 구덩이 속으로 빠졌던가.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는 결국 ‘성화되어라’의 뜻이다. 성화되지 않고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
저자는 십계명이 가리키는 것은 결국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라는 가르침이라고 말한다. 다른 신이란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각종 우상이다. 십계명를 단 하나의 문장으로 말한다면 “너는 너 자신으로 존재하라”가 아닐까. 물론 이건 불가지론자의 관점이다.
키에슬롭스키는 <데칼로그>를 무엇 때문에 사는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만들었다고 말했다. 탐욕이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다. 신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부채인간’이다. 우리는 ‘무엇 –됨’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에 처해야 한다. 있음에 처하는 것. 그것이 곧 자유다.
십계명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왜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사악할까. 신도를 강간하는 목사의 이야기는 이제 더 이상 뉴스거리도 되지 않는다. 왜 여전히 기독교인들은 자유가 아닌 물질에 구속된 삶을 추구할까. 끊임없이 교회는 지어지지만 기독교인들의 탐욕은 누그러들지 않는다. 성화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내가 기독교에 느끼는 감정은 샤를 페기가 칸트의 도덕률에 대해 말한 것과 흡사하다.
“그것은 순결한 손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에는 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