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걱, 책 이미지 올리다가 다 날렸네요. 바부팅이 알라딘.
(다시 올릴 의욕이 생기지 않네요. 차차 수정하겠습니다.)
정혜윤의 <삶을 바꾸는 책 읽기>에 실린 글들 중 잊이버리고 싶지 않은 글귀들을 적어보았습니다.
P10. “그럼 보이지 않는 존개가 될 때 얼마나 슬펐어?”
“그건 마치 저녁 시간인데도 손님이 하나도 없는 식당에서 구석에 있는 테이블을 닦고 있는 할머니가 된 것 같았어.”
“그건 무슨 말이니?”
“사실은 전에 한 번 그런 걸 본적이 있어. 손님이 없는 식당에서 할머니가 혼자 식탁 닦고 있는 거. 그걸 보니까 금방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았어. 월급이 깍인다거나 가게 문을 닫는다거나. 나도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됐을 때 안 좋은 일이 곧 생길 것만 같았어. 그러고 보니 손님도 없는데 불 켜 놓고 전기세만 나가는 가게를 보는 것도 슬퍼. 불 꺼진 가게도 슬퍼. 영업을 중단합니다. 라고 써 붙인 가게도 슬퍼.”
어렸을 때 만화 <뽀빠이>를 보는데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말라깽이 올리브는 어느 날 먹성이 아주 좋은, 기름기 좔좔 흐르는 남자의 구애를 받게 되지요. 그런데 그 남자는 이렇게 외쳐요. “당신의 머리카락은 스파게티 가락처럼 아름다워요.”, “당신과 나 사이는 샌드위치 속의 베이컨과 계란 사이처럼 가까워요.”
......그때 이후로 줄곧 제게 남은 문제는 하나였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을 사랑할 것인가? 무언가를 사랑하면 그 무언가를 사랑하는 모습 그대로 세상을 사랑하게 되겠구나. 저는 뭔가를 깊이 좋아하는 사람은 그 하나의 사랑에 자신이 귀하게 여기는 모든 가치를 부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의 사랑에서 출발해 세계 전체를 사랑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하나의 사랑에서 출발해 모든 것에 대한 답을 구하려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결국 디테일입니다. 사랑하는 순간 우리는 디테일로 기억하고 기억되길 바랍니다.
사라 에밀리 미아노의 <눈에 대한 백과사전>에 나오는 한 남자의 편지에서처럼요.
나를 당신과 사랑에 빠졌던 남자로 추억하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지평선에 뜬 작은 무지개를 보여 주러 당신을 앨버타 주로 데려갔던 남자로, 스위스의 산장에서 당신에게 담배를 가르친 남자로, 당신이 자신을 괴롭힐 때마다 영국에서부터 달려왔던 남자로 기억해 주십시오. 나 역시 당신을 그런 방식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p18. 마라도나는 에밀 쿠스트리차가 만든 영화 <축구의 신, 마라도나>에서 이렇게 자기 인생을 노래합니다. “나는 수없이 많은 잘못을 했지만 축구공만은 더럽히지 않았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언제 책을 읽나요?
p33. 오스트리아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하나의 흥미에서 다른 흥미로 끝없이 관심사를 옮겨 가기만 하는 그런 삶을 ‘코미디’라고 불렀습니다.
p35. 버트런드 러셀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마치 정원사가 어린 나무를 보듯이 인간은 어린아이를 본다. 특정한 내재적 속성을 가진 존재, 적절한 토양과 공기와 빛이 제공되면 시간이 흐르면서 놀랄 만한 성장을 이룰 존재로 간주하는 것이다.”
p39. 시인 세사르 바예호는 “돌아가고픈, 사랑하고픈, 존재하고픈 욕망”에 대해서 시를 쓴 일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비수에 새겨진 꿈”이라고 불렀습니다.
‘나를 키우는 시간’은 시간의 척추입니다. 우리 몸에도 척추가 있지만 시간에도, 영혼에도 척추가 필요합니다.
p41. 저는 어디선가 “사랑하는 연인이 어디에다 입을 맞출지 몰라서 온몸을 떠는 존재”란 글귀를 읽은 적이 있는데요.
우리에겐 의지가 필요합니다. 의지가 어떻게 생기는가 깊이 성찰했던 사람 중 하나인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빌자면 의지는 명령 때문이 아니라 영혼의 무게, 즉 사랑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도 영혼의 무게로 치자면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영혼을 단단한 핵처럼 품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하나 고유한 행성이 되고 또 그만한 무게와 자신만의 중력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책 읽는 능력이 없는데 어떡하나요?
저는 이것을 앙드레 고르에게 배웠습니다. 소외된 개인은 “내가 이것을 원해도 될까?” 라는 ‘도덕적 질문’에 대해 항상 “이것을 할 수 있는 건 내가 아니야.”, “다른 것을 해야 했기 때문이야.”, “나에겐 선택권이 없어.”와 같은 말을 한다고 합니다.
“바로 내가 그것을 원해서 했어.”라는 말이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에겐 복종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책 읽는 능력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은 슈발의 이야기를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꿈, 나의 관심사, 나를 감탄하게 하는 것, 나를 사로잡는 것이 나를 얼마나 멀리 밀고 가는지 알고자 노력하면 됩니다.
어떤 분야에서 정말 능력이 있는 사람이 제일 먼저 알게 되는 것은 자신에게 뭐가 부족한가 하는 점입니다. 넘쳐 나는 재능 때문에 계속하는 게 아니라 무엇이 부족한지를 알기 때문에 계속합니다. 들라크루아라는 화가는 천재적인 인간을 만드는 것은 새로운 생각이 아니라 그를 사로잡고 놓지 않는 생각, 즉 지금까지 말해진 것이 아직 충분히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말해지지 않았다는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삶이 불안한데도 책을 읽어야 하나요?
책은 저를 숨 쉬게 합니다. 아주 좋은 책을 만나면 저는 어쩐지 크게 한 번 숨을 몰아쉽니다. 어쨌든 책 읽기는 ‘쉬는 시간’입니다. ‘숨 쉬는 시간’입니다.
칼 세이건은 인간들이 수천 년 동안 어떤 종의 식물과 동물을 키우고 어떤 것들을 죽게 할 지를 신중하게 선별해 왔다고 말하려고 이 이야기(헤이케 이야기와 사무라이 게)를 했습니다. 벼가 인간을 좋아해서 자신들은 인간에게 꼭 필요하다며 찾아온 것이 아니란 거죠.
(밀이 우리를 길들였다는 유발 하라리의 주장. 인공지능이 인간을 길들이기 위해 처음엔 인간에게 우호적일 거라는 제리 카플란의 주장과 비교해보자.)
“우리는 해고당했지만 복직하고 싶죠. 일을 하고 싶죠. 꿈이에요. 그런데 꿈이 이뤄져서 복직이 된다 해도 야, 이제 복직되었으니 다 되었다, 하고 살고 싶지가 않아요. 다시 월급 받게 되었으니 만사해결이다, 하고 그전처럼 살고 싶지 않아요. 이번에 고통을 겪으면서 예전에 뭘 잘못했는지 알게 되었어요. ‘남의 일이 잖아요.’ 이 생각 말입니다. 이게 무서워요......다른 인간이 되어서 살아 보고 싶어요. 나 먹고사는 것만 신경 쓰고 살면 안 돼요. 우린 그렇게 살면 안 돼요.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어요.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책 좀 읽으면서 세상을 배우고 싶습니다.
- 해고 노동자 이창근의 말
윤리의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거야말로 나같이 나이 먹은 사람이 아침저녁으로 생각하고 있는 문제죠!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나이가 된 사람이 이대로 죽어도 괜찮을까 생각하면서......
오에겐자부로, <우울한 얼굴의 아이> 중에서
책이 정말 위로가 될까요?
왜 책을 읽느냐고요? 모르면 자꾸 되돌아가 다시 볼 수 있으니까요. (저는 이렇게 말하려고 했습니다. 오르한 파묵이 “우리는 편도 마차 승차권으로는 한 번 여행이 끝나고 나면 다시는 삶이라는 마차에 오를 수 없다. 그렇지만 만약 당신이 책을 한 권 들고 있다면 그 책이 아무리 이해하기 어렵고 복잡하더라도 당신은 그 책을 다 읽은 뒤에 언제든지 처음으로 되돌아가 다시 읽음으로써 어려운 부분을 이해하고 그것을 무기로 인생을 이해하게 된다.”라고 했다고요. )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젊은 시인들에게 몇 가지를 당부했는데 그중에 한 가지는 삶은 원래 무섭다는 것을 인정하란 거였습니다. 삶이 지닌 무서움을 강하게 부정하는 사람은 결국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상태가 될 거라고요.... 진짜 오만한 사람은 그 무엇에도, 자신의 고통에도, 타인의 고통에도 상처 받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입니다. 릴케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고통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미 죽어서 사라진 것도 나의 마음으로 스며들었습니다. 내가 이미 사라진 사람을 찾을 때마다 그 사람은 나의 내부에서 독특하고 이상한 모습으로 나타나곤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아직까지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다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오스카 와일드도 <옥중기>에서 릴케와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감옥에 있으면서 울지 않는 날은 마음이 즐거운 날이 아니라 굳어 버린 날이라고. 그래서 그는 슬픔과 고통을 애써 잊으라는 말을 거부합니다.
그것은 영혼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육체가 모든 종류의 평범한 것들을 섭취하여 아름다운 살덩이의 형태, 머리카락, 입술, 눈의 색과 그 곡선 등으로 바꾸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환기에 선 영혼도 육체와 같은 영양 섭취 구조를 갖고 있으며, 그 자신에게 있어서 비열하고 잔인하며 굴욕적인 모든 것을 진지한 사고의 흐름이나 고귀한 정열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오히려 영혼은 이러한 것들 속에서 그의 주장을 위한 최선의 방법을 얻을 수 있으며, 원래 그를 모독하고 파괴하려고 했던 것을 통해서 그 자신을 가장 완벽하게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형식이야말로 인생의 비밀이라고 말했습니다. 슬픔을 표현하려고 애쓰면 슬픔은 귀중한 것이 되고 기쁨을 표현하려고 애쓰면 환희는 커집니다. 이런 식으로 단순히 표현하는 것이 위로의 한 방식이 된다는 거죠.
책 읽기도 형식입니다. 발터 벤야민은 “사랑에 빠진 남자는 자신이 읽은 모든 책에서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을 찾아보게 된다.”라고 말합니다. 그럴 때 그에게 책 읽기는 사랑하는 사람의 표정과 몸짓이라는 형식을 발견하는 행위입니다.
어쩌면 멜로디 한 소절보다 짧을지도 모르는 인간은, 결국 시간일 뿐입니다.
- 김홍근, <보르헤스 문학 전기>
나는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 있게 된 것이 로렌초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적인 도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끝없이 상기시켜 준 어떤 가능성 때문이다. 선행을 행하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범한 그의 태도를 보면서 나는 수용소 밖에 아직도 올바른 세상이 , 부패하지 않고 야만적이지 않은, 증오와 두려움과는 무관한 세상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믿을 수 있었다. 정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것, 선의 희미한 가능성, 하지만 이것은 충분히 생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중략) 로렌초는 인간이었다. 그의 인간성은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았다. (중략) 로렌초 덕에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그래서 위로는 자기 자신과의 화해이고, 타인을 위한 용기이고, (고통의 망각이 아니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위로는 기억이 그러하듯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자기 창조입니다.
책이 쓸모가 있나요?
개인의 책임에 대한 강조는 앞으로 예상되는 높은 구조적 실업률에 비추어 보면 정말 무책임하고 악의적이다. 개인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봤자, 현 경제 시스템은 우리를 점점 덜 필요로 하게 되니까 말이다.
고용불안으로 우울증과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처방은, 심리적, 경제적 압박을 일으키는 구조적인 힘에 대항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 이 맞춤형 근심 해소 방안들은 긍정적 사고 훈련, .....베스트셀러 <시크릿>과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그 아류들......19세기 말 미국에서 발달한 소비 문화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 댄 하인드, <대중이 돌아온다>
거짓으로 예쁘게 보여 주는 거울에 자기를 비춰 보고 이를 통해 흡족한 마음으로 자신을 인정하는 인간. 그것이 바로 키치적 인간입니다. 어떻게든 보다 많은 사람들의 환심을 살 수 있길 바라는 태도. 그것이 바로 키치적 태도입니다.
키치적 인간은 현실의 이면을 보지 않으려 합니다. 그저 주어진 현실을 수용합니다. 결국 우리가 찬양하는 키치는 현실과 존재에 대한 절대적 동의를 그 속성으로 하기 때문에 키치를 훼손하는 모든 것을 삶으로부터 추방하려 합니다.
적도 지역에서는 지극히 가늘고 실처럼 생긴 벌레가 인간의 피부를 뚫고 들어가 살을 파먹는다. 그러면 무당을 부른다. 그가 마술피리를 불면 벌레가 홀려서 조금씩 몸을 펴면서 밖으로 나온다. 예술의 피리도 그러하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영혼의 자서전>
책은 바로 그런 쓸모입니다. 좋은 책은 우리의 영혼에 형태를 부여하고 고통에 한계를 주고 잘못된 생각을 끄집어내고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는 마술 피리입니다.
노인이 장승에 새긴 글귀에는 또 다른 의미도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살겠다라는 공개 선언이었습니다. 노인은 자기 삶에 대못을 꽝 박듯이 글귀들을 새겼다고 했습니다. 노인은 풀을 뽑는 것이 자기 수양이자 기도하고 생각합니다. 풀 한 포기 뽐을 때마다 헛된 마음을 한 자락씩 뽑아냅니다.
“채송화의 다른 이름은 일락화예요. 하루만 폈다가 싹 져 버려요. 시들지도 않고 깨끗하게 져요. 이 나이가 되니까 그렇게 깨끗하게 피어 살다가 지는 것이 귀하게 느껴집니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우리가 살아온 인생길을 두루마리 책의 이미지로 생각해 봤습니다. 이 생각 속에서 우린 등 뒤에 두루마리 책 한 권을 지고 길을 가는 나그네입니다. 두루마리 책에는 우리의 과거, 우리가 알고 있는 온갖 이야기들이 들어 있을 겁니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이 이미지에서 출발해 “첫번째 사랑과는 다른 두 번째 사랑을 만드는 인생의 지혜”에 대해 말을 합니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이 인생의 지혜는 바로 “인생 경험과 생애 커리큘럼”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독일 소설가 제발트는 “자신의 의지 만으로 사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제정신이 아니다.”라고도 말합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모두가 괴로움에 다 같이 시달린다는 사실을 깨닫게만 된다면” 구원은 오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책은 우리 영혼을 통해 꿈꾸는 존재입니다.
독서는 참으로 이상한 경험입니다. 사람들이 독서를 싫어하는 것도 이해가 되지요. 독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책 속의 다른 정체성과 결합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무모한 경험이니까요. 우리는 자신이 읽고 있는 책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지 못하는 채로 그 세계에 뛰어듭니다. (중략) 전적으로 자신을 내맡기고, 어떠한 말도 하지 않게 됩니다. 독서란 한 사람이 다른 정체성 속으로 들어가 태아처럼 그 안에 자리를 잡는 행위라고 정리해 둘까요. 고대인들이 다시 태어나기 위해 태아의 자세로 주검을 매장했던 것과 마찬가지지요.
- 파스칼 키냐르, <떠도는 그림자>
책의 진짜 쓸모는 뭐죠?
에릭 클랩턴이 “나는 명예를 얻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는 욕망이 없었다. 그저 내가 가진 것들로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음악을 만들어 보고 싶었을 뿐이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아예 “나는 모든 사람들을 닯는다. 내 생각은 평범하다. 평범함의 승리다.”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다른 생각을하는 거.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최선의 생각을 할 수 있으며, 내 작업에 필요한 최선의 것을 고안해 낼 수 있다. 텍스트도 마찬가지다. 텍스트가 간접적으로 들리게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내게서 최상의 즐거움을 생산해 낼 것이다. 내가 텍스트를 읽으면서 머리를 자주 들고 다른 것을 들을 수만 있다면.
-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책을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놀라울 정도로 특이한 비밀 결사를 구성한다. 모든 것에 대한 호기심과 연령의 구분 없이 섞이지 않음이, 결코 서로 만나는 일 없이도 그들을 한데 모아 놓는다.
(중략) 그 선택은 오히려 틈새와 주름들 안에, 즉 고독, 망각들, 시간의 경계, 열정적인 생활 태도, 응달 지역, 사슴의 뿔, 상아 페이퍼 나이프들 안에 칩거하고자 한다.
그 선택은 오로지 자신들에게만 속하는, 짧지만 수많은 삶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도서관을 설립한다.
- 파스칼 키냐르, <은밀한 생>
공감과 관련해서 제가 제일 즐겨 인용하는 것은 남아공의 ‘우분투’라는 말입니다. ....간단히 풀어보자면,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는 정신을 말합니다. 우분투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인간성이 다른 사람에 의해 담보되고 그 관계가 불가해하게 얽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우분투를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을 지지하며, 다른 사람들이 능력 있고 훌륭하다는 사실에 위협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분투를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이 굴욕이나 억압을 당할 때 자신 또한 같은 일을 당할 것을 알기 때문이죠.
생생하게 본다는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자신의 기억, 경험, 세상을 연결시켜 본단 뜻입니다.
자연적인 출생일은 개별성의 운명에 커다란 의미를 갖는 날이다. 왜냐하면 보편성 안에서 공유하는 것이 그것을 바탕으로 특수한 것의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이날은 어둠 속에 감춰져 있다. 자기의 출생일은 인격의 출생일과 동일하지 않다. 자기뿐만 아니라 성격 또한 그 자신의 출생일이 있다. (중략) 어느 날 그것이 무장한 인간처럼 인간을 급습하여,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을 취한다.....그날이 오기 전까지 인간은 세계의 한 파편, 심지어 그의 고유한 의식 이전의 존재이다. ....
- 로렌츠 바이크, <구원의 별>
“이것이 우리들 인간 모두의 기원의 관한 비밀이기 때문이란다. 서로 포옹할 때 우리는 보이지 않으면서 소리를 내는 존재가 되는 거야. 서로 껴안음으로써 서로 두드리지 않아도 우리는 울리는 거란다. 포옹으로 옛날 얼굴들과 옛날 몸들이 뒤섞이고, 그렇게 해서 그것들이 재생되고, 그렇게 해서 다시 젊어지는 거야. ”
- 파스칼 키냐르, <옛날에 대하여>
움베르트 에코는 이렇게 장난스럽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첵은 죽지 않는 능력을 준다. 단 앞으로가 아니라 뒤로.”
한 가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어떤 것이라도 이해한다. 만물에는 똑같은 법칙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조각을 공부했으며, 그것이 위대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특히 그 셋째 권에서 하느님이란 말이 나올 때마다 그 대신에 조각이란 낱말을 놓아 보았던 일을 기억한다. 그것은 정당하고 옳은 일이었다.
- 릴케, <릴케의 로댕>
레마르크의 <개선문>에는 라비크가 조앙 마두와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람은 언제나 외톨이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고독한 것만도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근처에서 들려오는 바이올린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장면이 있습니다. 저도 책을 읽을 때 그런 생각을 합니다. “ 사람은 누구나 고독하다. 그러나 그렇게 고독한 것은 아니다. 너무 늦게 알게 된 것들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늦게 알게 된 것은 아니다.”
둘은 거의 동시에 “날지 않는 돼지는 그냥 돼지일 뿐이야!”라는 말을 했습니다.
벤야민은 어떤 이미지든 접어 놓은 부채로 여길 줄 아는 능력이 상상력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어. 즉 나도 무엇인가 도움이 되는 인간이라는 것! 나에곧 생존 이유가 있다고 느낀다는 거야. 자신이 정말 다른 인간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야! 도대체 어떻게 하면 나는 유용한 인간이 될 수 있을까, 무엇에 도움이 될까? 나의 내면에는 무엇인가 있어.
- 빈센트 반 고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
루쉰은 책을 공기구멍이라 했습니다. 우린 사방이 막힌 어딘가에 갇혀있습니다. 숨구명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책과 삶의 관계에 대해 말한다면, “걸작은 시대를 통해서 매번 재발견된다. 그리고 우리는 걸작 속에서 매번 우리를 재발견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인 쉼보르스카는 “우리 삶은 중간 부분이 펼쳐진 책이다.”라고도 했습니다.
보르헤스는 각각의 책은 각각의 독서를 통해 다시 태어난다고 말했습니다. 즉 누가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의미가 무한하다고 했습니다.
책 하나하나가 우리를 부르는 영혼이고 인간 하나하나가 서로를 부르는 영혼입니다.
읽은 책을 오래 기억하는 법이 있나요?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제가 제일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사르트르의 ‘고매성의 협약’이란 말입니다. ...고매성의 협약은 상대방에게 최고의 신뢰를 보내고 최고의 기대를 하는 겁니다.
너는 아까 다른 일 때문에 여기 왔었지.
그리고 지금은 가버렸구나. 이 구석에서
어느 날 밤, 네 곁에서,
너의 부드러운 품 안에서
도데의 콩트를 읽었지. 사랑이
있던 곳이야. 잊지 마.
- 세사르 바예호, <트릴세 XY>
어떤 책부터 읽으면 좋을까요?
<인간의 대지>에서 길을 잃고 리비아 사막을 헤매는 ‘나’는 사막 여우에게 “내 작은 여우야, 나는 지금 절망적이란다.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절망적인데도 네가 어떤 성격일지 관심이 생기니 말이야.....”라고 말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저는 제가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알게 되면서 저도 그렇게 살고 싶어졌습니다.
눈을 감고 조용히 귀를 기울이면
소란함 속에서도 들리는 침묵과 신비의 소리를 발견하듯
순수와 맑음으로 만나진 자연과
동심으로 어우러진 사츠키와 메이 그리고 토토로의
꾸밈없는 표정 하나하나를 순간 닮아
행복해진 내가 그곳에 있었다
또한 내가 바라던 삶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 전진성,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비밀일기
“제가 읽었던 책들도, 그리고 제가 만났던 좋은 사람들의 영혼도 이렇게 제 혈관 어딘가에 흐르게 해 주십시오. 그것들을 지금 당장은 제가 불러내지 못한다고 해도 때가 되면 그것들이 ‘네, 저 여기 있어요.’ 하고 나오게 해 주십시오. 절 혼자 가게 버려두지 마세요.”
우리 영혼 속에는 지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압도하는 무언가가 있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마음 깊은 곳에 잠들어 있다. 그러나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것들이 다시금 떠올라 마음이 어지러워지면, 그것은 긴 잠에서 깨어나 마음속에 떠돌던 수많은 풍경을 한데 모은 뒤 우리 삶의 일부로 만든다.
- 로르카, <인상과 풍경>
나는....오늘 아무것도 하는 일 없는 공백의 페이지다. 완전히 공백 상태인 오늘만이 아니다. 내 일생 속에는 거의 공백인 수많은 페이지들이 있다. 최고의 사치란 무상으로 주어진 한 삶을 얻어서 그것을 준 이 못지않게 흐드러지게 사용하는 일이며 무한한 값을 지닌 것을 국부적인 이해관계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지 않는 일이다.
- 장 그르니에, <섬>
살이 있는 사람들의 지옥은 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 살고 있고 함께 지옥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방법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의 일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위험하고 주위를 기울이며 계속 배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즉 지옥의 한 가운데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별해 내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게 공간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 이탈로 칼비노, <보이지 않는 도시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