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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삶과 죽음

 

달빛 아래서의 만찬, 아니타 존스턴

 

중독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중독자의 의지 부족이나 인격적 결함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대상이 위로와 즐거움을 주거나 삶의 문제를 부분적으로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중독은 생존을 도와준다. 그러니 지나친 수치심이나 굴욕감, 좌절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런 감정을 강요해서도 안 된다. 중독은 누구나 겪는 삶의 고단함에 대한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대응일 뿐, ‘문제가 아니다

 

이 책은 내가 읽은 여성의 섭식 장애 관련서 중에서 관점, 현실 인식, ‘해결책과 스토리가 모두 좋다. 중독 증상 때문에 사회의 경멸적 시선과 자기 비하에 지친 이들이 읽으면 충분히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을 얻을 수 있다. 이야기와 은유는 흥미진진하고 깊이와 통찰이 넘친다. 알코올, 담배, 마약 중독은 니코틴 같은 특정 성분에 대한 중독이다. 그런데 폭식은 먹는 행위 자체에 대한 중독이다.

 

내가 반복해서 읽은 부분은 통나무 이야기다. “폭우 후 물살이 사납게 불어난 강물에 빠졌다. 다행히 통나무가 떠내려 와서 붙잡고 머리를 물 밖으로 내놓고 숨을 쉬며 목숨을 부지한다. .....물살이 잔잔한 곳에 이르자 헤엄치려 하는데, 한쪽 팔을 뻗는 동안 다른 쪽 팔이 거대한 통나무를 붙잡고 있다. 한때 생명을 구한 그 통나무가 이제는 원하는 곳으로 가는 것을 방해한다. 강가의 사람들은 통나무를 놓으라고 소리치지만 그럴 수 없다. 거기까지 헤엄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

 

과거엔 절실하게 필요했지만 지금은 위협이 되는 것. 작가는 중독을 통나무에 비유한다. 인생에서 완전한 기쁨이나 완벽한 절망은 없다. 한때 나를 구원했던 것(사람, 생각, 조직....)이 나를 억압하는 시기가 온다. 이것은 나의 성장 때문일 수 도 있고 대상의 변절이나 상실 때문일 수도 잇다. 어쨌든 나는 그것들과 헤어지거나 최소한 거리를 두어야 생존할 수 있다. 내게 이 이야기는 분리의 어려움에 대한 비유였다. 20년 된 관계, 30년 된 생각, 사라진 이들과 헤어져야 한다.

 

한낮의 우울, 앤드류 솔로몬

 

이 책의 한 땀 한 땀은 모두 심오하고 아름답고 비극적이어서 매 순간 감탄하느라 숨을 두 번씩 쉬게 된다. 처음 읽었을 때 연필로 밑줄을 그었는데 그 표시가 두 번째 읽을 땐 방해가 되었다. 책을 다시 사서 표시하지 않고 또 읽었다. 원서로도 읽었다. 참고문헌과 주 내용도 중요해서 분책해, 가지고 다니면서 읽었다.

 

원제는 정오의 악마- 우울증의 모든 것’. 이 책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몇십 년간은 우울증 관련 저술에 도전하는 이가 드물었으리라.

 

내가 아는 한 우울증에 관해 정치적, 학문적, 미학적, 윤리적으로 <한낮의 우울>보다 잘 쓴 책은 없다. 하나의 문장을 고를 수 없는 책이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는 말처럼 근거 없는 말도 없다. 굳이 비유하자면 에이즈와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둘 다 완치 개념을 적용하기 힘든 질병이다. 잠복성, 만성질환, 치명성, 외로움, 사회적 낙인.......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심각한 면역력 저하다. 면역성이 사라지면서 부드러운 미풍조차 사포로 미는 듯한 통증을 느끼는 우울증 환자의 증상은 인생의 본질이 순간에 있음을 깨닫게 한다.

 

우울증은 내 두뇌의 암호 속에 영원히 살고 있다. 그것은 나의 일부다......나는 우울증을 제거하려면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 정서적 메커니즘들을 손상시키는 방법밖에 없다고 믿는다. 따라서 과학이든 철학이든 미봉책(half-measures)을 통해 접근해야 한다.”

 

나는 이제까지 미봉책을 제대로 꿰매지 않은 상태로 알고 있었다. 완전히 봉합하지 않는 미봉(未縫), 혹은 미봉(未封)인줄 알았던 것이다. 아뿔싸! 사전적 의미의 미봉책은 미봉책(彌縫策)이었다. ()와 봉(), 모두 꿰매거나 깁는다는 뜻으로 흔적과 자국이 남는 것은 그 자체로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본질적 해결이 우월하고, 미봉책은 속임수나 일시적 방도에 불과하다는 부정적 의미가 강한 단어다. 아무런 표시가 남지 않는 천의무봉(天衣無縫)이 찬사인 이유다.

 

흔적 없음은 존재 없음이다. 아름답지도 않고 완전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꿰맨 자리는 아물기도 하고 터지기를 반복하기도 한다. 생명은 미봉의 점철. 그러므로 미봉책은 임시방편이 아니라 영원한 방도다.

 

언니의 폐경, 김훈

 

나는 최근 몇 년 사이 세 번 삭발했다. 아침마다 머리 감기가 귀찮아서였다. 주변의 반응은 머리 감기보다 더 번잡스러웠다. “암이니?”, “(머리가)아프니?”, “논문 스트레스?”......내 진심 (게으름)을 몰라주고 사람들이 너무 걱정해서 잠시 나의 사회성을 의심했지만, 실상 나는 매우 사회적인 인간이다.

 

<칼의 노래>같은 글은 불편하다. 그러나 나는 다음 세 가지를 주장한다. 김훈은 소설, 논픽션, 기사, 수필을 불문하고 모든 글을 잘 쓰는 예술가다. 나는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장르의 구별에 의문을 품는다. 그는 인간이든 자연이든 물상이든 묘사 대상에 대한 대상화를 최소화하는 윤리적인 작가다. 그의 글이 풍경과 상처가 되는 이유다.

 

박완서가 일상에 관한 뛰어난 서술자였다면, 육체에 해당하는 작가는 김훈이 아닐까 생각한다

<화장>을 읽은 독자는 더욱 동의하리라. 몸은 자원이 아니라 행위자다.

 

삶에 대적하는 화자의 태도. “남편의 속옷에 붙어 있던, 길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에 관하여 나는 한마디도 묻지 않았는데, 마지막 예절과 헤어짐의 모양새로서 잘한 일이지 싶다.” 나는 이 문장을 넘기지 못하고 몹시 몸부림치고 몹시 몸서리쳤다. 나이 들어 영원히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이들과 세월로 인해 잃고 얻을 모든 것들과 이렇게 관계 맺을 수 있기를 소원하면서.

 

, 틱 낫 한

 

진짜 문제는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라 화를 나게 하는 사람 아닌가? 예전에 읽든 틱 낫 한의 책(<>< <평화 이야기>은 그래도 덜 했는데, <>는 화를 돋우었다. 물론 책마다 타깃 그룹이 있고 모든 독자를 만족시킬 수 없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분노를 다룬다는 책이 인간의 고통에 대한 이해가 겨우 이정도인가.

 

분노가 무엇인지, 그리고 상처받은 인간의 고통을 모르는 사람만이 늘어놓을 수 있는 아름답고 한가하고 피상적인이야기들. 이 책은 한때 70만 권 넘게 팔렸다. 위로를 갈구하는 현대인이 안쓰러울 뿐이다. 아시아 출신 도인들은 서구에서 증명받은 뒤 다시 아시아 시장으로 온다. 그들의 내공과 관련 없는 오리엔탈리즘, 불쾌한 지식의 정치학이다.

 

그러다 반전. 나는 단 한마디에 깊고 냉철한 위로를 받았다. 지난 몇 년 동안 시달려 왔던 개인적 의문까지 풀렸다. “내 행동만이 나의 진정한 소유물이다. 나는 내 행동의 결과를 피할 길이 없다. 내 행동만이 내가 이 세상에서 서 있는 토대다.”

 

내가 아는 한 이 구절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인류의 지적 성취를 요약하고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행위 뒤에 행위자 없고(니체), 행동은 사상의 기반이 되며(비트겐슈타인), 인간의 행동의 반복으로 구성되는 재현(주디스 버틀러)이다.

 

참나는 내 행동뿐이다. 인간사에서 죽음과 더불어 유일한 진실이 있다면 이것이다. 유일한 진실이자 유일한 정의인 것 같다. 알아야 할 것은 분노의 본질이 아니라 분노의 위치다. 행동만이 나를 말해주고 행동만이 내가 가진 유일한 것이다. 이 부담스런 소유에 나는 안도한다.

 

오늘 부는 바람, 김원일

 

인생을 한 장면으로 요약한 소설이 있다면 나는 주저 없이 김원일의 <오늘 부는 바람>을 들겠다.

 

<오늘 부는 바람>1970년대 도시 빈민의 가난과 절망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문학과 지성의 본뜻, 문학과 지성의 관계를 배웠다. 빼어난 문장이란 그 자체로 영상이며 읽는 이의 몸에 배어들고 몸을 베는 글이다.

 

작품의 내용은 비극적이지만 분위기는 힘이 있다. “.....이제 엄마 생각에도 서러워지지 않았다. 껌보다도 더 질긴 삶이 내 발을 땅에다 굳건히 세우고 있을 뿐이었다.”

 

작가 후기 역시 매혹적이다. “나는 구원이나 긍정을 바탕으로 한 화해보다도 어둠이나 죽음의 아름다움, 삶의 어려움이 주는 쓸쓸함과, 고통에 소리 죽여 흐느끼는 절망을 사랑해왔다. (나는 이런 작가를 사랑한다!).....비극의 세계가 부정이나 허무가 아니라 거대한 질서의 운동이요, 생을 절실히 사랑하는 애정의 소산임을 확신한다.”

 

인생의 고통을 놓지 않는 사랑스런 후기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이 시대의 비극은 애정의 소산임을 확인할시간이 없는 비극이다. 날마다 전쟁이고 흐느낌이다.

 

병을 달래며 살아간다. 다이쿠바라 야타로

 

홍준표 경남지사에게 공공 의료는 좌파 정책이다. ‘우파 민중은 안 아픈가? 공공 의료는 국가의 기본 역할인데? 그는 아나키스트인가? 내가 분노하자 주변에서는 뭘 기대하냐는 반응이다. 일부 지도층의 이런 발상에 대한 현저한 면역 결핍이 내 지병이다. (내 지병은 홧병)

 

질병은 삶의 부작용이 아니라 본질이다. 의료는 복지 이슈가 아니다. 쌀 수급을 복지 정책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질병은 비정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용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다. 홍 지사의 사고는 철학의 문제, 그것도 국정 철학의 오류다. 그는 좌파의 국가관을 의심하기 전에 자신의 공동체관부터 검증받아야 한다.

 

일본 출신의 티베트 의사이자 승려인 다이쿠바라 야타로의 <병을 달래며 살아간다>는 티베트 의학의 인식론과 증상에 따른 실제 치료법을 다루고 있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인간을 신의 구현물로 보지 않는다. 동식물처럼 자연의 일부일 뿐, 불완전해도 상관없다.

 

몸의 생애는 곡선이다. 내려갈 때가 있다. 성형 열풍이나 완벽한 몸 이미지는 몸의 과거와 미래를 인정하지 않는 비현실적 행위다.

지금 뭘 하고 있나요?” 알퐁스 도데는 말한다. “아프고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의료 수준과 제도를 자랑하는 쿠바는 1986년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 때 모든 국가가 기피한 원전 난민을 무료로 치료해주었다. ‘국격이 있다면 이런 것이다. 원래 진주의료원 같은 기관은 동리마다 있어야 한다. 폐업이 아니라 더 만들어야 한다.

 

살아남은 자의 아픔, 프리모 레비

 

어떻게 작품과 자기 자신을 분리시킬 것인가? 작품이 끝날 때마다 나는 한 번씩 죽는다.”이런 사람은 홀로코스트가 아니었어도 매일 다시 태어났을 것이다.

 

레비는 평균 생존 기간 3개월인 오시비엥침(독일어로 아우슈비츠)에서 110개월을 버티고 살아남았다. ....... 그는 투신 자살했다. 지금 우리 사회 보통 사람의 자살과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을 헤아리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난 무려 100년 참고 참는다....../난 내일 죽음과의 약속을 지킬거다! /하지만 너네 인간들은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 내말을 이해할 수 없을 거다. (용설란)

 

망각을 거부한 투사가 치러야 하는 대가는 남은 인생이 과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확신이다. 불확실한 삶이라면 가능성을 희망이라 믿고 살겠지만 확실한 상태에서 선택은 많지 않다.

확실성의 볼모가 된다는 것. <기차는 슬프다>가 바로 그것이다. “단 하나의 목소리와 단 하나의 노선으로/ 정해진 시간에 떠나야 하는 기차보다 / 더 슬픈 게 있을까/ 그 어떤 것들도 이보다는 더 슬프지 않다.” 이 구절을 읽을 때 내 시간이 멈췄다.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장승수.

 

셋째는, 공부의 의미가 조금 다르다. 최근 임지현은 <홀로코스트와 탈식민의 기억이 만날 때>라는 글에서, 사유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 찾아온 대학생 한나 아렌트에게 하이데거가 한 말을 전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네.” 인생에서 어려운 일이 세 가지 있다. 생각, 사랑(관계), 자기 변화.

 

훌륭한 저작을 남긴 지식인이나 작가의 오만을 사랑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생각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생각은 그 자체로 새로운 것이다. 나도 조금 생각한 적이 있다. 피학의 쾌락이 있었지만, 공부가 가장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무능력도 원인이겠지만 사유는 힘든 일이다. 생각할수록 공부할수록 무지의 공포는 비례상승한다. 나 자신이 작아지고 우울해진다. 우울은 공부의 벗. 공부를 멈추지 않는 사람은 겸손하다. 자신에게 몰두한다. 계속 자기 한계, 사회적 한계와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계속 공부하는 사람이 드문 이유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생각하기를 두려워하는 사회는 생각하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이다.

 

태백산맥, 조정래

아는 의사 셋이 같은 주제로 흥분하는 걸 보고, 염 대장의 말이 근대 과학의 패러다임과 관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믹스 커피 성분이 카제인나트륨과 우유를 대립시키는 광고 때문에 시작된 이야기 였다. “카제인(단백질 화학명)이 우유잖아.”, “용각산이 바로 도라지 가루지.” “리튬(조울증 치료제)이 버드나무 잎에서 나는 거거든.” 그들의 요지는 같은 성분인데 우유(‘자연)와 카제인나트륨(’화학의 이미지를 대립시키는 교묘한 광고라는 것이었다.

 






자살의 이해, 케이 레드필드 재미슨

 

<자살의 이해>는 제목 그대로, 자살의 이해를 돕는 책이다. ......이 책은 저술의 모범이다. 사회적 필요, 다학제 관점, 정치적 열정, 전문 지식, 고통에 대한 공감. 생명체인 인간과 사회적 인간, 개인과 구조, 이 쟁점들을 상호 융합적으로 다룬다.

 

이해는 아는 것을 버리는 것이다. 선입견이든 지식이든 기존의 앎을 버리지 않는 한, 새로운 것은 절대 우리 몸에 들어오지 않는다. 충돌은 앎의 지름길이다.

 

간혹 매우 총명한 이들과 조우한다. 나는 그들의 비법을 알고 있다. 이해는 영혼이 순수한 사람의 특권이다. 대상에 대한 사랑. 이해하고 싶어서 기득권을 포기하는 데 망설임이 없다. 자신을 보수하지 않는다.



러브 스토리, 에릭 시걸.

 

내가 제일 듣기 싫은 미안함에 관련한 표현은 “(나는 동의하지 않지만) 네가 불쾌했다면 미안해.”. 이럴 땐 차라리 싸우자는 게 예의다. 진짜 미안할 때는 할 말이 없거나 멀리서 오랫동안 미안해한다.

 

<러브 스토리>의 연인들은 계급 차이 때문에 남자 주인공(올리버) 집안의 반대로 결혼에 어려움을 겪는다. 올리버가 제니에게 미안하다고 하자, 제니는 사랑하는데 뭐가 미안해.”라고 말한다. 마지막 페이지에서 제니가 죽자 올리버의 아버지는 안됐구나. (i’m sorry.)”“라고 말한다. 올리버는 아버지에게 사랑은 미안해할 일을 하지 않는 겁니다.“라며 원망스레 울먹인다.

최근 의문이 조금 풀렸다. ‘사랑미안은 같은 말일 수도 있고 무관할 수도 있다.

 

가장 친한 친구가 8년 째 아프다. 심각한 병이지만 사회적 낙인이 심해 위로받기는커녕 변명과 거짓말로 하루하루를 버틴다. “돈 잘 벌고 착하고 자랑스러운딸이었던 그녀는 걱정거리와 민폐로 전락했고 경력, 경제력, 인간관계 모든 것을 잃었다. 그녀의 고통을 지켜보며 인생을 배우는 나는 미안하다.

 

기대에 부응하는 삶, 아프다/죽고 싶다는 호소. 그녀는 주변 사람들에게 늘 미안하다고 말한다. 질병의 증상(신체적 통증)으로 고통받는 그녀에게 정신 차리라고 혼내는 사람도 있다. 낙오자 취급은 엘리트였던 그녀의 자아에 사망 선고가 되었다.

 

그녀의 증상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환자라는 이유만으로 미안한 것이다. 약자는 보호받고 지원받아야 하지만 통치 세력이 노골적으로 약육강식을 지시하는 사회에서 뭘 기대하겠는가.

 

아픈 사람이 미안해할 때야말로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아, 이 말이 필요하다. 인생은 열렬한 사랑의 순간보다 괴로운 시간이 훨씬 많다. 공감은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마지막 잎새, 오 헨리.

 

몇 해전에 성별을 기준으로 하여 10대에서 70대까지 열네 개 그룹으로 나누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 무엇인가라는 설문 결과를 본 적이 있다. 놀랍게도 거의 모든 연령과 성별에서 다시 태어난다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다.”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내 대답 역시 그렇다


여기서 공부10대를 억압하는 입시 공부가 아닌 뭔가 의미있는 인생을 원한다는 뜻일 것이다.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일까. 내가 필요한 존재였다는 것, 무엇인가를 추구했다는 것, 나만의 세계가 있었다는 것 등으로 다양할 것이다.

 

60대 친구가 몇 있다. 돈과 학벌을 따지는 속물이 득실거리는 우리 사회에서 남들 보기에도 비교적 성공한인생들이다. 그들 역시 공부 이야기를 제일 많이 한다. 자신은 이룬 것이 없다며, 가진 것이 없는 내게 말한다. “그래도 너는 책을 썼잖니, 나는 한 것이 없다.”

 

의욕, 삶의 방향, 목적. 사람은 결국 무엇때문에 산다. 삶의 의미는 인간이 묻는 것이 아니다. 삶이 우리에게 묻는 것이다. 이 질문에 답하려는 몸부림이, 내가 생각하는 의미 있는 삶이다.

 

사람들이 외로운 이유 중 하나는 자신에게서 인정받지 못하는 데 있지 않을까. 자기가 추구하는 가치에 몰두하는 사람은 덜 외롭다. 아무도 모르게 혼자 죽는 것. 모든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이다. 버먼은 그렇게 죽었지만 비참한 죽음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대단히 위대하고 행복한 마침표도 아니다. 이것이 오 헨리 작품의 매력이다. 슬픈데 따뜻하고, 찡한데 안식이 있다. 희망과 절망 그런 차원이 아니다. 애상이나 애잔함은 오히려 충만한 느낌이 있다.

 

누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김승옥

 

다른 측면에서 글쓰기는 조금 더 평등하다. 운동, 음악, 미술 분야에 비해 장비가 간단하고 독학 가능성이 있다. 거칠게 말해, 연필 한 자루면 된다. 나는 글이 투자 대비 생산성이 가장 큰 콘텐츠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엄청난 양의 독서, 습작, 조사를 해야 하는 데다 삶의 매순간이 연습이다. 좋은 글을 빨리 쓰는 사람이 있다. 비결은 연습(치열한 삶)이다. 글 쓰는 시간은 연습을 타자로 옮기는 시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물론 고뇌를 사랑하는 사람을 존경한다. 그렇지만 그들을 존경하기만 하면 그걸로써 의무감의 해방을 느끼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예술가는 아니지만 이 문장에 동의한다. 일하지 않고 예술만 즐기고 싶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열 받지 않아도 되는영화와 소설을 읽으며 살고 싶다. (이 책에서 가장 동감하는 구절.)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아름다음만 소비하고 싶다. 비생산의 삶. 죽을 때 연기조차 없는 삶. ‘독자가 된다는 것은 주체로 사는 피로와 죄악을 피하는 길이다. 호랑이나 사람이나 무엇인가를 남긴다? 끔찍하다.

 

하지만 연습을 많이 한 이들이 독자로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들은 오만할 자격이 있다. 연습은 끝이 없는 개념이다. 외롭고 지루한 연습이 아무런 보상이 없을 수도 있는 삶을 기꺼이 선택한 이들이다. 이들은 이미 모든 것을 가졌다. 진실을 아는 자의 만족스런 불평이다. 김승옥도 알고 있다. “천 번만 먹을 갈아보고 싶다. 그러면 내 가슴에도 진실만이 결정되어 남을까?”

 

하류지향, 우치다 타츠루

 

모 신문에 게재된 채현국 선생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치유란 사람의 매력 그 자체의 효과이지 시대의 멘토해주는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그의 언어는 모두 깊고 힘이 있었다. 나를 붙잡은 구절은 모든 것은 이기면 썩는다. 예외는 없다. 돈이나 권력은 마술 같아서, 아무리 작은 거라도 자기가 휘두르기 시작하면 썩는다.”였다.

 

지식, 사회,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가 존경스러운 불문학자 우치다 다쓰루의 <하류지향>은 승, 부 중 어느 한쪽을 격려하지 않는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당대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을 철저히 그들의 입장에서 사고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를 보고했다는 점이다. 소위 내재점 관점(질적 방법)‘이 잘 적용된 예다.

 

이 책에 등장하는 학생들은 온 힘을 다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학력 저하는 노력의 성과. 그러나 자기 선택은 어느 정도 안전하고 정의로운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약자는 고립되어 있기 때문에 약자다. 자유는 고립 이데올로기다. 스스로 결정하고 결과도 혼자 책임질 것. 위험 사회가 사회적 약자에게 강요하는 삶의 방식 혹은 죽음의 방식이다.

 

저자처럼 계몽 의식과 책임감을 지닌 기존 자본주의의 수혜자는 그들의 선한 의지와 달리 시혜자가 되지 못한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절박하지만 진짜 현실인식은 안이한 듯하다. 충격은 이제부터다. 룸펜, 의지박약자, 잉여는 구제 대상이 아니라 파국의 주체다.


 

에필로그, 다르게 읽기와 독후감 쓰기.

 

 

좋은 독후감의 전제는 일단 다르게 읽기. 단언컨대 모든 사람이 알 만한 진부한 사고방식으로는 절대 좋은 글이 나올 수 없다. 나는 좋은 책이 반드시 좋은 독후감을 낳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지 않는 경우도 많다. 독후감은 책에 관한 것이 아니라 책과 읽기의 상호 작용이기 때문에, 책의 수준과 무관하다.

 

....책을 읽고 책에 대해 쓰는 것은 결국 자신에 대해 쓰는 것이다. 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독후감, 책을 다시 쓰는 것, 저자가 쓰지 못한/않은 부분을 쓰는 것 그리하여 새로운 의미, 곧 새로운 정치학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읽는 사람도 있고 저렇게 읽는 사람도 있는데 그 차이는 왜 발생할까. 대개는 콩쥐한테 동일시하고 그치는 경우가 많지만 계모의 내면 세계나 아버지, 친척, 이웃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지가 궁금한 이들도 있다. 나는 팥쥐는 꼭 딸이어야만 하는가, 아들일 경우 어떻게 될까가 궁금했다. 이런 생각의 차이들은 가치 다양성, 관용, 배려 차원의 내용 확대가 아니다. 정치적 모순, 갈등, 위계의 내용을 다시 구성하는 것이다. 정치적 전선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독후감은, 내가 쓰고 싶은 독후감은 다른 시각으로 읽음으로써 없는내용을 만들어내는 방법, 즉 지면을 투사하는 것이다. “행간을 읽는다.”라고도 표현한다. 다른 안경을 쓰고 읽음으로써 텍스트를 복잡하고 풍부하게 만들어서,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은 진위여부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경합하는 읽기이다.

 

내가 생각하는 독후감의 의미는 단어 그 자체에 있다. 독후감(讀後感), 말 그대로 읽은 후의 느낌과 생각과 감상이다. 책을 읽기 전후 변화한 나에 대해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없다면 독후감도 없다. 독서는 몸이 책을 통과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통과할 수도 있고 몸이 덜 사용될 수도 있다. 터널이나 숲속, 지옥과 천국을 통과하는 것처럼 어딘가를 거친 후에 나는 변화할 수밖에 없다.

 

독후감은 그 변화 전후에 대한 자기 서사이다. 변화의 요인, 변화의 의미, 변화의 결과.......그러니 독후의 감이다. 당연히, 내용 요약으로 지면을 메울 필요가 없다. 독후에 자기 변화가 없다면? 왜 없었을까를 생각하고 그에 대해 쓰는 것도 좋은 독후감이 된다. 나는 왜 책을 읽고 아무 느낌이 없을까도 좋은 질문이다. 자기 탐구가 깊어진다는 점에서 더 좋은 독후감이 도리 확률이 높다. 자신의 경험, 인식, 지식, 가치관, 감수성에 따라 여정의 깊이는 달라진다. 독후감의 수준은 여기서 결정된다.

 

 

독자의 위치성, 그 위치성을 의식하고 의심하고 사랑하는 읽기가 책의 위상을 결정한다. 영화든 드라마든 미술작품이든 책이든 모든 텍스트는 철저히 읽는 이의 상황에 의존한다. “저자는 죽었다.” , “책은 독자가 다시 쓴다.” 라는 말은 권력이 결국 읽는 이, 듣는 자에게 있다는 뜻이다. 언제나 문제는 나 자신이다. 물론, (주체, subject)는 사회와 대립하는 개인이 아니라 시회적 몸(social body)이다.

 

책이 되지 못한 책들의 피해, 비평이 되지 않는 비평의 폐해는, 수많은 책을 읽는 들에 의해 청산될 수 있다

어느 출판사의 사훈은 책 때문에 망가지는 나무가 없도록 하자는 것이라고 한다. 좋은 독자는 지구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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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리뷰가 아닌 필사가 돼버렸다. 우선 내게는 생소한 작가가 너무 많았다. (나의 무지에 죽고 싶었다.) 에필로그에서 작가가 말했듯 그녀가 온몸으로 책을 통과하는 글들에 섣불리 개입할 수가 없었던 것도 결정적 이유다. 단 한 챕터도 그냥 흘러갈 수 없었다. 환호작약, 촌철살인의 문장들로 흘러넘친다.

 

내가 읽은 서평집 중에 최고다. (장정일, 이현우, 이다혜, 정혜윤, 장석주, 정여울, 이동진 모두에게 미안하지만) 그 이유는 아마도 그녀의 독후감의 원칙 때문이 아닐까. 어떤 책을 읽는가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독자의 독서 이후의 변화. 정희진은 자신의 원칙들로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정희진만이 쓸 수 있는 유일무이한 독후감을 써냈다.

 

타성적인 서평 백 편을 읽느니

개성적인 독후감 한 편을 읽는 편이 낫다.

그녀가 어떤 책을 칭찬하면 침을 질질 흘릴 정도로 그 책을 읽고 싶었다.

 

그녀가 통과한 책들을

이제 내가 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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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7 0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3-17 02:43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이렇게 훌륭한 글을 쓰고 싶네요^^
 

4장 안다는 것.

 

프로이트 1,2 피터 게이

 

페미니즘 내에서도 프로이트를 유용한 자원으로 삼는 이론이 있고 비판 세력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정신분석학 자체가 젠더 이론이기 때문에 프로이트를 전제하지 않고는 페미니즘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둘은 근친, 최소 절친인데 대개는 페미니즘과 프로이트주의가 서로 웬수지간인 줄 안다.

 

근대성의 키워드가 개인(주체)’이라면 프로이트만큼 공정하고, 깊이 있고, 폭넓게 인간을 해부한 사상가도 없다.

 

프로이트 전기 중에서 가장 빼어나다고 평가받는 거장 피터 게이의 <프로이트>를 정영목의 번역으로 읽게 되어 기쁘다.

 

방법에의 도전, 파울 파이어아벤트

 

과학철학의 걸작인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가 끊임없이 인용되는 이유는 그가 객관성의 신화를 정면 비판했기 때문이다. 과학은 그것을 신봉하는 집단 안에서만 과학이지, 반례와 새로운 세력에 의해 신앙심이 흩어지면 과학의 지위를 잃고 새로운 과학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 이것이 패러다임 혁명이다. 이후 기존 이론은 오류, 데이터, 역사로 남는데, 이 과정이 과학의 발전이다.

 

파이어아벤트는 모든 과학은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일 뿐 아니라 모든 이데올로기에 객관적인 척도로 이용된다. 기존의 거대한 독단주의는 사실로서 지위를 가질 뿐 아니라 그보다 극히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도그마 없이 과학은 불가능하다.”라고 주장한다.

 

약자의 대응은 두 가지다. 하나는 객관을 향한 욕망을 접고 자기 입장을 더 깊이 있게 전개하면서 그렇게 말하는 당신 입장은 뭐냐?”라고 질문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들 뜻대로 균형 감각과 중도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물론 불가능하다. 균형의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언어의 세계에 중립이란 없기 때문이다. 객관성은 권력자의 주관성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익명성은 가장 무서운 서명이고 객관성은 가장 강력한 편파성이다.

 

역사철학 테제, 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은 1940년 그가 자살하던 해 <역사철학 테제>여덟번째 장에 이렇게 썼다. “억눌린 자들의 전통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은 비상사태가 예외가 아니라 상례라는 점이다. ......진정한 비상사태를 도래시키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 ......파시즘이 승산이 있는 이유는, 그 반대자들이 진보를 역사적 규범으로 삼아 이를 들고 파시즘에 맞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인생의 시시각각이 비상이고, 민중의 고통으로 품위를 유지하는 지배자의 입장에서는 민중의 각성이 비상이다.

 

벤야민이 그토록 비판한 역사주의는 인과관계에 기초한 역사의 연속성, 기원을 전제한 단선적 진화 발전주의, 도달해야 할 바람직한 미래가 있다는 신념을 말한다. 비로 우리 모습이 아닌가? 그는 진리는 불꽃처럼 순간적이며, 역사는 원래부터 파편적이고 또 과거의 승리자와 동일시해서 기록한 것이므로 잘못된 것이라고 보았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려, 진보는 그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사회학적 상상력, C 라이트 밀즈


 

찰스 라이트 밀스의 <사회학적 상상력>은 어떻게 소개하든 사족이다. 이 책은 전공을 막론하고 공부를 주제로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고, 인식하고 갖춰야 할 정치학과 윤리학을 다루고 있다.

 

많은 비평가들이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논하는 부분은 특이하게도 부록인 장인 기질론이다. 지식인을 화이트칼라로 여기는 것은 앎에 대한 가장 치명적인 오해다. 자료 조사, 인터뷰, 독서, 집필..... 논문 하나를 위해 수천 쪽의 자료를 읽는 것은 기본이다. 체력과 끈기가 관건이다. 연구는 고된 노동이다.

 

밀스가 좋아한 용어 기예Craft’는 세 가지 조건을 함축한다. 외롭고 지루한 노동, 완성도에 대한 비타협성, 창의력. “기존의 집단 문화에 저항하라.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방법론자가 되자.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이론가가 되고, 이론과 방법이 지식을 생산하는 실천이 되도록 하자.”

 

무엇을 할 것인가? , V.I 레닌

 

<지젝이 만난 레닌 레닌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권한다. 마르크스라면 몰라도 요즘 세상에 웬 레닌? 이렇게 생각한다면, 레닌주의에 관한 오해가 아니라 지식 일반에 대한 오해다. 사상은 과학이든 이데올로기든 조류가 아니라 현실의 필요와 상황에 근거한 것이다. ....어떤 지역에서 한물간이야기가 다른 이들에겐 절실할 수 있고 가장 올바른 길일 수 있다. 사상은 보편성이 아니라 공간적 맥락에서 논해져야 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의 요지는 변혁 운동에서 나타나는 경제주의 비판과 그 대안으로서 전위 조직 건설이다. 두 가지는 같은 주제의 얘기다. 사회 구조와 개인의 관계에 대한 현실 마르크스주의자 레닌의 크레도(Credo). 근대성의 핵심은 계몽, 기획성, 인간 의지에 의한 사회와 자연 개조다. 나는 이 책이 근대적 사유를 끝까지 밀어붙인 최고의 텍스트라고 생각한다.

 

구조와 개인의 관계는 이미 루이 알튀세르, 미셀 푸코, 샹탈 무페 등 수많은 포스트구조주의자에 의해 해결됐다. 내가 이 글을 쓴 진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무엇을 할 것인가? What is to ’be done’?”, 이 수동태 표현이 숨막힌다. ‘하면 된다가 아니고 무엇인가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젠 무엇을 함으로써가 아니라 안함으로써 세상이 바뀌길 바란다. 무엇을 안 할 것인가? 무엇이 가장 올바른가 보다 최소한 어떤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한다가 화두가 돼야 한다.

 

선악을 넘어서, 프리드리히 니체

 

두치펑, 푸코, 니체까지, 이 세 텍스트의 공통점은 희망이나 아름다움 따위는 전혀 없고 나쁜 것 일색이라는 점이다. 좋은 말로 나쁜거지, 이들은 지향 자체가 잔인하고 염세적이다. 근데, 그게 위안이 된다.

 

니체의 위대함은, 철학이 플라톤 시대부터 순수 정신과 선 자체를 날조하고 이에 상반된 방식으로 지식을 생산해 왔던 기존 인식론의 전제를 뒤흔들었다는 점이다. , 대립적 사고에 필요한 개념인 원인, 결과, 상호성, 숫자, 법칙, 자유, 목적 등은 인간이 만든 것 일뿐 실재하지 않는다.

 

사회적 약자는 약한 사람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부당한 질문을 받는 사람이다. “너 빨갱이지?”, “폭력적이지?” “게으르지?” “더럽지?”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신으로부터 면허라도 받았는가?

 

성의 정치 성의 권리, 권김현영 외.


선을 구획하는 것은 자연도 신도 아닌, 사소하고 우연한 권력들이다. 이 권력을 가시화해야 한다. “배제되지 않기 위해 포함되길 거부하라.”(한채윤)라는 말이 이 책의 패러다임을 요약한다. 선택 밖에서 선택하라! 제도 안에 머물게 되면 그 안에서 또 다른 배제가 진행되고 굴요적인 자기 조정을 계속 요구받게 된다.

 

기존 규범을 문제 삼지 않고 그 안에서 약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이중 메시지에 자발적으로수갑을 채우는 행위다. 사회가 당연시하는 사유의 경로를 추적하는 것이 지성이고 운동이다. 권력의 법칙을 해체(, 인식)하지 않는 저항은 반칙, ’불평불만‘, ’낙오자의 불복심지어 역차별의 가해자라는 엉뚱한 비난을 뒤집어쓴다. 인간의 기준이 남성인 상태에서, 여성은 남성과 같음을 주장하면 이중 노동을 해야 하고 다름을 주장하면 시민권을 잃고 피보호자가 된다.

 

주류가 되고 싶다면 무조건 노력하지 말고 일단, 포함과 배제의 원리를 공부하라. 이 책은 그 노고를 덜어줄 것이다. 여성주의의 실용성과 지적 수월성을 보여주기에 손색이 없다.

 

빅 이슈, 일본어판214

 

세계 41개국에서 발행되며 14000명의 노숙인이 판매원으로 일하는 잡지 <빅 이슈>는 노숙인의 자립을 지원하기 위한 네트워크다. 편집, 기획, 집필에 각 분야의 전문가가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고 실제작비 외 수익은 모두 노숙인에게 돌아간다.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말은 오랫동안 사회운동에 참여해 온 유명 여가수 가토 도키코(71)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는 1989년 베를린 방벽 붕괴부터 2011년 일본 동북부 지역을 강타한 대지진, 이른바 ‘3.11’까지의 인생 역정에서 깨달은 바를 이렇게 요약했다. “레벌루션에는 반란의 의미도 있지만 회전re volution)한다는 뜻도 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삼라만상은 항상 운동하고 있으니 사는 것이 혁명이다.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무수한 작은 변화가 세상을 흔들리게 하고 시대를 변화시킨다.”

 

빼앗긴 우리 역사 되찾기, 박효종 외

 

나는 광주민주화운동, 4.3 사건에 대한 보수 세력의 역사 날조에 분노한다. 하지만 정권이 바뀔 때마다 시비를 반복하지 않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대안은 역사 인식을 달리하는 집단이 이분화되지 않고, 각자 내부에서 분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수 진영이 부패 파렴치 집단만이 아닌 지적인 보수, 이데올로기적 보수, 문화적 보수, 사상적 보수 등으로 다양화되고 그들 사이에-서도 비판과 논쟁이 활발해지기를 바란다. 하긴, 우리에게 부재한 것은 토론 문화가 아니라 토론하는 사람이다.

 

건국과 산업화는 에피소딕한 사건이 아니라 시멘틱한 사건이라는 내용이 인상적이다. 에피소드는 일상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단어다. 끼어든 것, 삽화, 간주, 토막 이야기, 큰 흐름에서 벗어난 해프닝이라는 뜻이지만, 에피소드=삽화라는 인식은 역사가 연속적이라는 가정 안에서만 그렇다. 역사는 불연속적이다. 하나의 정사만 있는 것도 아니다. 반복도 법칙도 없다.


이에 반해 시맨틱(semantic)’은 단어, 단락, 기호, 상징의 표현과 함의 등에서 이야기의 관계성을 총칭하는, “문명사적 지성의 큰 흐름이다. 한마디로 에피소딕은 우연이고 시맨틱은 필연이라는 것이다.

 

문화의 위치 탈식민주의 문화 이론 호미 바바

 

한 글자도 고치지 말라는 유형이 있다. 대개 글을 못 쓰는 사람들이다. 원래 못 쓰는 데다 타인의 지혜를 무시하니까 더 못 쓰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편집자가 고치라는 대로 고친다. 이유는 두 가지다. 그들은 무조건 옳다. 독자와의 관계에서는 그들이 전문가다. 또한 누구나 자기 글에 대해서는 객관적 판단이 어렵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점검해줄수록 좋다.

 

문제는 문장이 아니라 정치적 입장의 차이가 있을 때다. 이때 나는 다른 사람이 된다. 담당자의 나이와 지위를 불문하고 싸운다’ (실은, 하소연하다가 사과한다.)

 

하이브리디티hybridity는 유명한 용어다. 탈식민주의 이론의 핵심 용어로 혼성성, 잡종성으로 번역한다. 이종 식물을 교배하여 제3의 종을 만드는 원예학에서 유래했지만, 호미 바바의 <문화의 위치>를 계기로 하여 근대성 논쟁에 전환점이 되었다. 사실 이 책은 혼성성 개념만 다루기에는 아쉬운, 한 문장 한 문장이 이론인 당대의 고전이다.

 

 혼성성은 역사를 기원이 아니라 흔적으로 본다. 순수성이나 (순수성이 여러 개인) 다양성은 같은 차원의 관념일 뿐, 현실로서 존재할 수 없다.

 

글쓰기 홈스쿨, 고경태, 고준석, 고은서


 

은유는 해석자가 개념을 상상한다. 기존 개념은 이동하고 여러 가지로 분화한다. 전이, 전의다. 은유를 잘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비교적 간단한데, 일단 박식해야 한다. 아는 단어가 3개인 사람과 30개인 사람의 언어가 같을 수 없다.

 

또 하나는 정치적 입장이다. 은유는 특정 세계관 안에서만 작동한다.

 






탈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글 읽기와 삶 읽기2 조혜정

 

지식인은 해체된 지 오래된 단어다. 임시 복원한다면, 자기 노동과 일상을 언어화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통념적 의미로 그냥 쓴다면, 우리 사회에는 세 유형의 지식인이 있다. 지식이 없는 사람, 지식인이라고 주장하고 간주되는 사람, 서구 지식과 지금, 여기의 경합을 쓰는 사람이다. 조혜정 선생님은 세 번째에 속하는 극소수 중 한 사람이자, 그중에서도 선구자다. .....만일 나더러 한국 현대사를 대표하는 책 열 권을 선정하라면 아홉 권은 모두 이 책 다음이다.


이 책은 절박했던 나를 해명해주었다. 민족 해방과 탈식민의 차이를 알게 되었다. 조혜정 덕분에 나는 이상한 여성주의자이자 삐딱한 민족해방론자가 될 수 있었다. 동시에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탈식민 페미니스트로 살아갈 자신감이 생겼다.’

 

주류(서구, 남성, 비장애인, 이성애자.....)’의 범위는 유동적이긴 하지만, 그들의 삶과 기존의 언어는 일치한다. 그러나 주변의 경험은 불일치한다. 이것이 근대의 가장 강력한 통치 방식이다.

 

에피스테메episteme는 미셀 푸코가 부각시킨 말로서 주어진 시대의 앎의 기본 단위를 말한다. 중심은 앎을 말하지만, 우리는 혼란을 호소한다. 이 혼란은 혼란 자체로 멈출 수도 있지만, 이해되지 않은 새로운 현상이다....바위처럼 보이는 기존의 권력 관계는 의외로 쉽게 조각날 수도 있다. 바위 틈새에 콩을 집어넣고 계속 물을 붓는다. 가진 자의 혼란! 거대한 바위 덩어리, 우리를 억압했던 그들의 거대 담론은 부서진다.

 

과학과 젠더, 이블린 폭스 켈러



 

이른바 통섭의 시대에 공부의 유목민에게 비전공자 운운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리는 사람이 지식인인가? 그런 판관 노릇을 하고 싶으면, 이 정권에서 장관을 하시는 게 맞다. 공부의 의미를 독점하고 지식인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문지기들. 여기 들어오지 마. 그렇게 지킬 것이 없어서 겨우 지식의 문지기 노릇을 하는가?

 

이 책은 초기 여성주의 인식론을 대표하는 고전으로서 인류 지식의 연원을 추적한다. 개인(남성)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성 차별 주조를 통해 과학과 철학으로 둔갑했는가를 역사, 정신분석, 과학사의 세 차원에서 분석한다.

 


포스트모던의 조건, 장프랑스와 리오타르

 

나는 미래에 관심이 없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면 인생은 사후 해석이다. 그때 혹은 지금 일어난 일의 의미를 당시에 아는 사람은 없다. 나중에 주변이 정리된 후’, 즉 맥락이 생긴 후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건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해석이며, 이는 사건 이후의 삶에 따라 달라진다.

 

포스트는 최근 인류 300년 역사를 설명하는 핵심적인 담론이다. 이 논쟁에서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시간은 순서가 아니라는 것. 시간이 과거, 현재 미래순으로 흘러 앞으로 나아간다는 개념은 근대에 고안된 것이다.

 

흔히 생각하듯 봉건 다음에 근대, 근대 다음에 탈근대가 아니다. “근대가 실현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탈근대?”라든가 시대 착오, 시기상조식의 논쟁 구도는 이미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이다. 직선적 시간은 근대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이전의 시간 개념은 내부가 닫힌 순환하는 원의 구조로서 미래라는 개념이 없었다.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을 본격적으로 제기한 고전,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의 조건>의 부제도 시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지식의 문제이다. 총체적 거대 서사에 대한 비판과 재현(표상)의 위기, 인식의 안정성, 확실함, 합리성, 이런 가치들이 도전받기 시작했다.

 

세계사의 해체, 사카이 나오키 외


 

사카이 나오키, 도미야마 이치로 등 주목할 만한 일본의 탈식민주의 지식인들이 우리 사회에 잘못 소개되는 방식은 전형적이다. 식민 지배를 반성하는 양심적 친한파 지식인? 그렇지 않다. 이들은 서구 중심주의를 비판하지만 저항의 단위를 국가로 설정하지 않는다. 한국의 국가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좀 더 친근한 글을 고른다면, <세계사의 해체>가 좋다. 깊이와 박학을 두루 갖춘 니시타니 오사무와 나오키의 대담집이며 부제는 서양을 중심에 놓지 않고 세계를 말하는 방법이다. 동아시아 시각의 탈식민주의 입문서로 손색이 없다.

 

누구나 상황에 따라 미국’, ‘도쿄’, ‘오키나와’, ‘미야코지마일 수 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중심과 주변이 어디냐가 아니라 자기 위치 설정이다. 중심이든 주변이든 내부의 차이는 내외부의 차이보다 더 큰 경우가 대부분이다. 중심과 주변, 이 이분법의 가장 큰 문제는 실재하지 않는 덩어리를 하나의 단위로 동결시킨다는 점이다. 이것이 현실의 운동을 가로막는 지배의 본질이다.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제임스 M 케인


 

<국민과 서사>(호미 바바 편저)에서 제프 베닝턴의 글을 읽고 이 암호를 해독했다.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모든 음절이 중요하다. 첫째, 우편배달부뿐 아니라 발신자나 방문객은 두 번 행동한다. “딩동, 딩동”, “,” “여보세요?, 안 계세요?” 한 번 시도하는 이는 거의 없다. 한 번만 길게 누른다면 싸이코혹은 최소한 긴장감을 조성하는 상당한 부정적인 행동의 전조다. 그러니까 언제나 두 번울린다.

 

둘째, 우편 제도와 인쇄술의 발달은 근대 국민국가의 중요한 물적 토대였다. 그 이전의 사자, 사신은 집단과 집단이나 개인 간의 일대일 메신저였지만 철도의 발달과 함께 온 국민을 횡단하는 전달 제도가 자리를 잡았다. 사자에 비해 동시적, 다중적 소통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남성은 모두 죽는다. 프랭크는 멕시코 출신, 그의 정부의 남편은 그리스인이다. 우편배달부는 국가를 대변하는 국민이다. 이들은 소수자 우편배달부쯤 될 것이다. 벨 울리기는 국민의 권리와 의무같은 행위다. 떠도는 삶, 이유 모를 죽음, 우편배달부끼리 쫓고 쫓기는 삶.

 

무엇이 달라졌을까. 메시지는 대개 비문으로 되어 있다. 편지 내용을 알고 죽거나 모르고 죽는 것. 이것이 인생이다. 그러니,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정확한 제목이 아닐 수 없다.

 

남성성/, R, W 코넬

 

여성주의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오해는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사상이라는 인식이다. 여성주의는 여성에 관한 주장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것이며 평등이 아니라 정의를 지향한다. 여성주의나 마르크스주의는 당파적이지만 인간 해방을 위한 계몽이라는 점에서 보편적이다.

 

저자 코넬은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세계적인 석학으로서 남성성 연구의 선구자이며 이 책은 그의 대표작이다. ‘는 남성으로서 자기 몸의 경험을 성찰하면서 여러 차례 성전환 수술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를테면 그녀트랜스젠더 여성이면서 50대에는 머리가 벗겨지고 아내와 사별했다.”

 

자신이 누군지 모를 수밖에 없는 남성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여자는 자기를 잘 아냐고? 인종 차별 사회에서 유색 인종은 자기 처지를 알지 못하면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말로 답을 대신하겠다.

 

이 책은 학술적이지만 사례가 풍부하고 성별 이론 전반에 박식한 옮긴이(현민)의 주석 덕분에 쉽게 읽을 수 있다. 내가 책으로 배웠어요유형이이서 그런지, 남성은 여전히 놀라운 존재다. 흥미로운 생애사와 쉽게 풀어낸 정신분석, 정치학, 퀴어, 역사 이론은 인문학 입문서로서도 손색이 없다.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안드레아 도킨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의 원제는 <삽입섹스Intercourse>. <삽입섹스>는 남성의 섹슈얼리티 권력을 다룬 1970년대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대표작인데 여기서 급진적은 발본적이라는 뜻이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공적 영역에 국한된 남성 기준의 평등 개념에 반대하고 새로운 사조를 추구했다. 사적인 문제로 간주되는 성, 가족의 권력 관계를 이론화했다. 개인적인 것은 본디, 정치적인 것이다. 인류 최초로 사적인 영역이 정치학의 대상이 되었다.

 

무지는 약자를 무시하는 권력에서 나온다. 자신을 남성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여성흑인의 목소리를 공부하지 않는다. 간혹 고민하더라도 그것을 공부로 착각해서, 자기도취와 연민에 빠지기도 한다. 여성은 남성 이론을 모르면 무시받지만, 남성은 좌우를 막론하고 여성주의는 물론 자기 생각도 모르는 이가 숱하다. 주체가 타자를 모르면 자기를 알 수 없다. 간단한 이치다.

 

좌파는 무엇으로 사는지가 궁금한가? 무지로 산다. 이는 여성주의자를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해당한다. 거듭 말하지만, 의미는 찾아나서는 것이다. 있는 의미는 이미 권위다. “현존하는 것이 진리일리는 없다.” (<좌파로 살다>, 에른스트 블로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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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9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회학적 상상력》, 《세계사의 해체》 담아갑니다.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는 절판이네요.

시이소오 2016-03-09 21:37   좋아요 0 | URL
저도 사회학적 상상력 읽고 싶네요^^

oren 2016-03-10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성들여 옮겨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온통 제가 모르는 책들과 저자들이 너무나 많아서 `뭐라고` 댓글을 달기가 몹시도 주저됩니다만, 그래도 `딱 한 곳`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딴지를 걸고 넘어가고 싶네요.(전체의 맥락은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문장의 어느 한 구석을 찾아내서 꼬투리를 잡는다는 게 몹시도 꺼려지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어서요.)

도대체 니체의 텍스트가 왜 저런 말도 안되는 악평에 시달려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희망이나 아름다움 따위는 전혀 없고 ‘나쁜 ’ 것 일색이라는 점이다. 좋은 말로 ‘나쁜’ 거지, 이들은 지향 자체가 잔인하고 염세적이다.]. 니체만큼 오독하기 쉬운 책도 없다더니, 저런 고명하신(?) 분이 니체를 저토록 오독하다니, 저는 그게 너무 놀랍습니다. 저 책의 저자가 읽었다는 바로 그 책 속에 담긴 `니체의 목소리`로 반박해주고 싶군요.

* * *

뭐라고? 그 반대이다! 제기랄.

- 니체, 『선악의 저편』, 제2장, <자유정신> 중에서

시이소오 2016-03-09 22:04   좋아요 1 | URL
저도 좀 의아스럽긴해요^^; 취향이라고 한다면 딱히 반박하기 어려울것 같고.....아마 이해가 안돼서 필사해놨던것 같습니다^^

북다이제스터 2016-03-09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에 파울 파이어아벤트 판매 책이 단 한 권도 없단 것이 무척 아쉽습니다. ㅠ

시이소오 2016-03-09 23:09   좋아요 0 | URL
정희진씨 추천책엔 유난히 품절, 절판도서들도 많네요. 프리먼 다이슨의 <과학은 반역이다>에 소개된 책들은 거의 번역이 안됐더라구요. 번역된 책들먼저 읽어야겠습니다^^

yamoo 2016-03-09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9권이 있고 3권을 읽었습니다. 근데 <방법에의 도전>의 백미는 그 논증 구조에 있습니다. 주장의 근거를 살피는 것이 이 책 읽기의 미덕이죠.

개인적으로 정희진의 <패미니즘의 도전>인가...너무 실망스러워서 이 책을 살까말까 망설이고 있습니다만..

시이소오 2016-03-09 23:47   좋아요 0 | URL
우와, 대단하세요. ^^
 

3장 권력

 

슬픔의 노래, 정찬


 

한국 소설 중 나만의 ‘3부작이 있다. <슬픔의 노래>, <얼음의 집>, <> 모두 한 작가의 작품이다. 우연이다. 우리 사회에서 인생은 생잔(生殘, 살아남기’), 권력은 폭력, 슬픔은 실패를 의미한다. 이런 현실에서 폭력과 권력 탐구를 짊어지는 작가는 흔치 않다. 어쨌든 정찬같은 캐릭터의 지식인이 많아야 한다고 절실히 주장한다.

 

내가 이해하는 정치신학자정찬의 주제는, 권력과 폭력 앞에 선 인간의 선택이다. 가해자든 피해자든 그들의 모습은 작가를 통해 예술과 신학의 이유가 된다. 그는 권력과 폭력을 비판하거나 혐오하기보다, 사유한다.

 

<얼음의 집>의 주인공은 고문 기술자다. 그는 사정에 버금가는 쾌감이라는 권력 행사를 자제하면서, 진실(자백)을 만들어내는 임무를 수행한다. 쾌락을 통제하는 것,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 어떤 인간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20여 년간 가정 폭력 상담을 하면서 열 대를 때릴 수 있는데 여덟 대에서 멈추는 남자를 만난 적이 없다.

 

정찬의 주인공들은 타인의 신체적 고통으로부터 획득되는 권력의 전능함을 알고 있다. 권력의 경험을 사유하는 그들은 기술자가 아니라 예술가’. 최소한 방황하는 영혼이다. <슬픔의 노래>에 등장하는 ‘80년 광주가해자의 보개. “칼이 몸속으로 파고들 때 칼날을 통해 생명의 경련이 손안 가득 들어오지요.......생명의 모든 에너지가 압축된 움직임. .......한 인간의 생명이 이 작은 손안에 쥐어져 있다는 것이죠.......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쾌감입니다.” 이후 그는 죄의식의 갑옷을 벗는 배우가 되었다.

 

정찬의 작품을 읽을 땐 머리와 심장의 분간이 사라진다. 독자의 몸은 무간 지옥에 빠진다. 작가가 먼저 부서져 강이 된 까닭이다.정말 사족. 박정희 체제의 공과를 논할 때 공은 경제 성장, 과는 인권 탄압이라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고문은 정권의 흠이 아니다. 통치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리바이어던, 토머스 홉스.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인간 해방에 국가가 어떤 의미를 지니며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매뉴얼수준의 규범과 철학을 제시한다. 홉스는 중세가 저물고 원자화된 개인의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대에 살았으며, 정신도 미세한 물질로 구성되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유물론자였다.

 

그는 자연상태에서는 남녀가 평등하다고 믿었다. 그의 관심사는 자연 상태가 어떻게 가부장제 사회가 되었는가였다. 홉스가 분석한 원인은 이기적인 남성들의 집단적 동의에 의한 시민법의 일종인 결혼법때문이다. 자연 상태가 국가의 탄생과 시민사회로 넘어오면서 결혼 제도를 통해 여성은 개인이었다가 개인의 여자로 강등되었다. 성차는 당위가 아니라 인위적 제도라는 것이다.

 

홉스에게 결혼은 여성을 인간의 범주에서 제외시킨 결정적 사건이었으므로 개인 간 범죄의 경중을 비교할 때 기혼녀의 정조 유린은 미혼녀의 그것보다 더 큰 범죄다.”

 

천자문, 주홍사


 

내가 읽은 책 중 최고의 라스트신이 <천자문>일 줄이야. 역시 고전은 고전이다. <천자문>의 마지막 문장은 위어조자 언재호야이다. “뜻은 없지만 말을 잇는 조사가 있는데, ()은 앞 문장을 가리켜 이에’ ‘여기에서라는 뜻이다. ()와 재()는 탄식할 때, 의심할 때 혹은 반어적으로 사용한다. ()는 대개 끝내는 말(~이다)로 쓴다.


위어조자 언재호야’ 996자를 알아도 마지막 네 글자 조사를 모르면 글을 쓸 수 없다. 문장의 성립은 조사로만 가능하니, 문장은 결국 조사의 기술이다. 글자와 조사의 관계를 실과 바늘, 나사와 볼트처럼 짝 개념으로 볼 수도 있다. 둘의 위치는 동등하고 불가분이다. 하나가 없으면 나머지도 소용없다.

 

그러나 이들은 동등하지 않다. 사실은 조사가 더 우월하다. 글자들의 관계, 즉 문장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은 뜻이 있는 글자가 아니라 뜻이 없는 글자, 조사다. 무의미는 모든 의미다. 뜻의 무게를 진 자는 사용이 한정되지만, 조사는 자유로운 영혼이면서 문자를 배치하고 지배한다. 의미(권력)없음이 의미를 통제하는 것이다.

 

실은 좋은 글귀 색거한처 침묵적요(한가한 곳을 찾아 사니 조용하다) - 말고 갖고 싶은 문장이 있었다.

 ‘탐독완시 우목낭상’ “돈 없이 책방에 가도, 한 번 읽으면 머릿속에 책 내용이 다 들어온다.”

 

극단의 시대, 에릭 홉스봄, 무솔리니가 집권하자 기차가 정시에 도착했다.


 

내가 평소 좋아하는 글귀가 두 개 있다. 하나는 사랑(관계)은 아무나 하나, 그 누가 쉽다고 했나.”이고 하나는 이 글 제목이다. 전자는 인간을, 후자는 세상을 요약한다. 고민의 순간마다 상기되면서 할 말을 잃게 하는 매혹이 있다. 이 매혹의 정체는 인간()의 무능과 이중성.

 

원래는 무솔리니가 기차를 정시에 달리게 했다”(Mussolini made the trains run on time)인데, 내가 조금 고쳤다.

 

에릭 홉스봄은 당대를 대표하는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라이벌에드워드 톰슨(영국 노동계급의 형성)과 함께 영국 지성의 자부심이다. 원제는 ‘1914 ~1991’이라고 시기가 표기되어 있다. 자본주의가 지구를 목 죄기 시작한 1990년대까지 포함했다면 저자는 극단의 시대를 넘어 종말론의 시대를 분석해야 했을 것이다. 20세기 들어 인류는 7천 년에서 8천 년 걸릴 변화는 70여 년 동안 겪었다. 옮긴이의 전언대로, 이 책은 “20세기의 자서전이다.

 

무솔리니가 집권하자 기차가 정시에 도착했다.” 히틀러의 스승이자 변절한 사회주의 언론인 베니토 무솔리니가 파시즘의 우월성을 시위하기 위해 만든 프로파간다였다. 이는 실제가 아니라 담론의 효과였다. 이탈리아 기차는 이미 잘 달렸고, 무솔리니 집권 후에도 기차는 시간표대로 정확히 운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파시즘을 향한 대중의 지지는 질서의 효능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현행 주폭단속이 좋은 예다. 싹쓸이! 질서(order)는 글자 뜻 그대로 대중의 주문이자 지배자의 명령이다. 통치자의 입장에서는 편리하고, 나만 희생자가 아니라면 대중은 기차가 정시에 도착하리라는 환상에 동의한다.

 

군대를 버린 나라, 아다치 리키야, 평화의 근원은 빈곤과 고립

 

전쟁과 평화. 이 두 단어가 늘 붙어 다니는 이유는 둘 다 뜻이 모호하기 때문이 아닐까. 같이 써놓으면 인식 가능할 것이라는 착각. “전쟁은 안개와 같다카를 폰 클라우제비츠가 시작해서 로버트 맥나마라가 답한 전쟁의 의미다. 불확실하고 부정확한 정보 때문에 그 추이나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는 뜻이다. 전쟁도 모르겠는데 평화는 얼마나 알기 어렵겠는가.

 

이 글의 제목은 저자가 코스타리카 여행 중 외교부 직원에게 들은 말이다. 빈곤과 고립이 평화의 비밀이라니! 코스타리카는 실질적, 합법적으로 군대가 없는 지구상 유일한 국가다.

 

모든 국민이 군대가 없다는 삿길에 자부심을 품고 있으며 환경, 인권, 평화 선진국의 정책과 이미지를 전 세계에 선전하여 이를 방위력과 외교력으로 전환시켰다. 군대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침략당할 가능성이 적다.

 

미국과 북한만 외국이 아니다. 지구상에는 다양한 사회가 있다. 책이 전하는 몇 가지 감동. 코스타리가 교도소에는 담장이 없다. ‘탈출 가능한 철조망은 있다. 교도 행정의 목표는 수감자가 자신에게 어떤 권리가 있는지 알게 하는 것이다. 갱생의 첫걸음은 자기 인식, 자기 평가, 자기 긍정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재범률은 20%에 불과하다. 보험료를 못 낸 사람이나 불법체류자도 국립병원에서 무료로 치료해준다.

 

군주론, 마키아벨리. 사랑과 외경 중 어느 것이 나은가.


 

박근혜 대통령이 시장에서 감자를 사면서 냄새를 맡는 사진은 정치적, 미학적 충격이었다. 나는 대통령들의 채소류에 대한 무지와 무시에 분노한다. 먹을거리는 민생의 기본이다.

 

냄새를 맡고 구입하는 식자재는 거의 없다. 생선조차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런데 흙 묻은 감자를 코에 바짝 대고 과일 향기를 맡는 듯 포즈를 취한 여자 대통령의 모습은 그로테스크하다. 대통령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성스러운 포즈의 진부함과 오브제의 야릇한 부조화는 비/웃음을 생산했다.

 

군주가 국민에게 사랑받은 것과 외경 받은 것 중 어느 것이 나은가마키아벨리는 둘 다 겸비하면 좋겠지만 이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므로, 택일한다면 외경의 대상이 되는 편이 안전하다고 주장한다. <군주론>의 요약이자 유명한 구절이다.

 

감자의 향기는 사랑도 두려움의 대상도 아닌 웃음거리, 트러블 메이커, 국민을 당황스럽게 하는 지도자를 연상시킨다. 클린터의 섹스중독이나 부시 2세의 무식, “왜 나만 미워해!”라고 투정 부리면서 갑자기 사임한 후쿠다 전 일본 총리......이들은 바람직한 군주와 거리가 먼 것이 아니라 군주에서 논외인 경우다.

 

폭군 정치는 당연히 저항을 불러온다. 그러니,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다.’ 나는 국민과 다른 세상에서 사는,

현실에서 탈구된, 감자의 향기를 연출하는 여성 리더십이 더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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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침묵, 한용운

 

나의 관심은 님이 누구냐가 아니라 침묵의 의미다. 모든 예술은 남겨진 자의 고통에서 시작된다. 떠나는 사람이 나는 너를 버렸노라.”라고 읊는 경우는 없다. 떠난 자는 말이 없다. 대단한 이유에서가 아니라 부재하니까 침묵인 것이다. 반면 남겨진 자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다. 그리움, 슬픔, 체념, 자책, 희망.

 

님은 자기 자신이 아닐까. , 님은 대상이 아니라 자아이다. 침묵하는 자아인 동시에 침묵을 뿜으며 더 깊은 침묵을 만들어내는 자아. 마지막, 님의 사랑과 침묵은 범람한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하늘을 덮다,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의 진실, 민주노총 김00 성폭력사건 피해자 지지모임


이 책은 200812월에 발생한 민주노총 내 성폭력 사건을 통해 드러난 통합진보당, 민주노총, 전교조 소속 일부 간부들의 손바닥으로도 하늘을 덮을 수 있는 약자에 대한 횡포, 관료주의, 무능과 무식에 대한 보고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 책은 한국 사회가 어떻게 작동하는 가에 대한 정밀 진단서이다. 청소년에게 가장 권하고 싶다.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진보 개념은 근대화 시각에서 발전주의를 의미한다. 민주주의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는 적대하거나 논쟁하는 세력이 아니다. 정상적인 국가 건설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추구하되 방법이 다를 뿐이다. 공통점은 성 차별과 주류 지향이고, 차이는 종북이라는 기이한 용어에서 보듯 제대로 된 국가를 만드는 일에 통일을 포함하는가 여부와 그 방식일 것이다.

 

사건의 가해자는 5년 구형에 3년 실형을 받았다. 진보 진영이 일반 사회보다 성폭력이 더 빈번한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조직 보호를 내세운 이들의 사후 대응 방식은 유별나다. ‘공작 정치(social rape)’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다. 진짜 피해와 무서움은 이것이다. 남성은 물론 많은 여성 활동가들이 사건 은폐, 축소를 주도하고 가담했다. 진보라는 과도한 자의식에 비해, 기본적인 인권 개념은 물론 자신이 남성인지 여성인지 인식조차 없는 이들에게 사회생활의 목적을 묻고 싶다.

 

손자병법, 손무

싸우지 않고 이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서로 당연하게 설정 하고 있던 전선 자체를 해체하는 것이다. 기존의 사고방식, 싸움 주제를 생소한 것으로 만들어 적을 인식 분열 상태로 만든다. 그러기 위해서 약자는 자신이 약자라는 인식과 더불어 자각이 다른 사람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것이 약자의 인식론적 특권이다. 강자는 자기 생각을 약자에게 투사하지만, 똑똑한 약자는 두 가지 이상의 시각에서 자신과 상대방을 모두 파악한다.

 

전선을 구획하는 자가 이긴다. 누가 먼저 어떤 선을 긋느냐, 누가 먼저 생각하는 방법을 창조하느냐. 기존 전선에 걸려 넘어질 것인가, 내가 룰을 만들 것인가. “다르게 생각하라.” 강자가 다르게 생각하면 양극화를 만들고, 약자가 다르게 생각하면 세상을 이롭게 한다. 기존의 틀에서는 아무리 좋은 전략도 필패다. 내가 쉽고 익숙한말을 경계하는 이유다.

 

나의 진짜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발상의 전환으로 매복하고 있어야 한다. 쉽지 않다. 여성은 을 사랑하고, 가난한 사람은 처럼 살고 싶어 한다. 탈식민 병법이 필요하다.

 

월간 비범죄화, 성판매여성비범죄화추진연합 발행

 

나는 모든 글은 질적 차이가 있을 뿐이지 예술과 외설, 논문과 잡글, 사실과 허구, 본격소설과 통속소걸, 문학과 사회과학 따위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어떤 글을 읽고 즐거움, 의문, 성찰을 경험했다면 글의 소속(?)은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글의 내용과 정신이다.

 

일본어인 찌라시는 흩뿌리다의 명사형이다. 책의 기본은 권()인데, 찌라시는 묶인 것도 아니고 뿌리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내가 읽은 글 중 가장 재미있고, 유익하고, 공동선을 위한 글은 찌라시였다.

 

성판매 여성을 비범죄화하라!

 

우리 성판매여성비범죄화추진연합은 오늘, 성판매 여성에 대해 전면적으로 비범죄화 할 것을 엄숙하고 거룩하게 선포하는 바이다. 다만 선언하고 선포할 뿐, 설득하지 않을 것이다. 원래 선언은 그런 거니까.

 

우리는 자본주의, 가부장제, 젠더 권력의 문제인 성매매를 성판매 여성 개인의 문제로만 취급하는 것에 반대한다.

성판매자를 범죄자와 피해자로 나눌 수 있다는 착각 속에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자들을 규탄하다.

가능하지도 않을 강제냐 자발이냐 기준 세우기는 그만하고, 성판매 여성의 노동 조건에 대한 문제 제기와 사회적 지원에 대한 논의에 힘을 써야 할 것이다.

성판매를 성적으로 타락한 자, 더럽혀진 자, 비난받아 마땅한 자로 낙인찍어 차별하는 자들을 낙인찍을란다.

치사하게 구매하는 입장이면서 판매하는 사람 비난하기 없기다.

 

20134월 어느 봄날에.

성판매여성비범죄화추친연합(이하 소속단체)

 

곰팡이와싸우는세입자연대, 남성연대반대하는남성모임, 도우미안쓰는노래방협회, 딸자식이뭘하고돌아다녀도지지할학부모회, 모소리작고아름다운꼴페미연대, 목소리크고못생긴꼴페미연대, 명절날엄마의파업을꿈꾸는일안돕는딸년오미, 반성매매인권행동[이룸], 야근칼퇴근직장문화확립추진위원회, 서로비난안하는부모자식연합, 성구매할생각없는한줌의남성모임, 성욕의총량을측정계량중인연구자(개인), 시급만오천원시대를꿈꾸는알바연합, 애국국민이기싫은국민연합, 여가부하는일별로맘에안드는여성주의자모임, 한국에와서여성월주의로변질된페미니즘연구회(우리 졸라 많지?). 월간 비범죄화 정기구독 메일링 신청

http://goo.gl/KkFik

 

운현궁의 봄, 김동인


힘없는 대원군의 처지를 묘사하는 부분에서, 당시 세도가 김좌근의 첩 양씨가 선배를 흉내 내는 장면이 나온다. 명종 때 윤원형의 소실 정난정을 따라하는 시반선 행사다. 한강 하류에 밥을 쏟아 물고기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이다. 구경 나온 배고픈 백성들에게 물고기가 밥을 잘 먹는지 강물 속을 굽어보라.”고 말한다.

 

몇몇은 강으로 뛰어든다. 물고기 밥을 훔친 죄로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엉덩이 뼈가 부서지도록 맞는다. 가족은 그 밥을 바란 죄로 오십 대씩 태형에 처해진다. 그 장면이 중학교 1학년에겐 얼마나 충격이었는지 나의 정치 의식과 공권력에 대한 분노는 그때 고정되었다.

 

고물이 보물이 되려면 사람의 마음과 일이 필수적이다. 내게 별로 득이 되지 않으면서 주고 욕먹을가능성이 많은 일이다. 그게 귀찮아서 다들 그냥 버리는 것이다. 웬만한 사람들에겐 물건을 새로 사는 게 재활용보다 편하다. 자원을 아끼고 나누는 데는, 노동이 요구된다. 나는 이 노동이 자본주의를 구제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몸이 이미 체제다. 변화는 다른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망가진 세상을 수선하는 일이다.

 

문장강화, 이태준.


이태준의 1939년작 <문장강화>는 반복해서 읽기 즐거운 실속 있는 책이다. 임형택이 쓴 해제의 훌륭함도 감안해야겠지만, 70여년 전 책이 요즘 나오는 글쓰기 책보다 깊이 있고 세련되었다. 이 책은 이렇게 써라.”라고 일러주기보다 좋은 글을 많이 보여준다. 우리 문장이 이렇게 풍요로웠구나, 글 잘 쓰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구나,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언젠가 친구가 너는 죽어도 내 고통을 모를 것이라 했을 때 상처받았지만, 중요한 것은 무지가 아니라 무지를 깨달아 가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뭘 모르는지 모르는 사람. 이런 사람이 활발한 사회 활동을 할 때, ‘걸어다니는 재앙(, 그 공주!)’이 따로 없다.

특히 남성은 결핍을 결핍한 완전한 존재다. 자기 위치를 알기 어렵다. 물이 흐르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포말이 일 때다. 큰 물줄기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포말이 클 때다.



그나마 대안은 24시간 긴장, 타인 존중, 말 줄이고 경청, 자기 몸을 작게 하기, 중단 없는 주제 파악......나부터.

 

돈 잘 버는 여자 밥 잘하는 남자, 알리 러셀 혹실드, 2교대The Second Shift


남성에게 집은 쉼터지만 여성에게는 노동의 공간이다. 물론 예외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규범이다. 그래서 남성은 혼자일 때 더 외롭고 더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상하다. 난 혼자일 때 외롭지 않을뿐더러 아무런 스트레스도 받지 않거늘. 많은 남성들이 그렇지 않을까?)

 

이 책은 내가 많이 권하는 책 중 하나다. 감정 노동 개념으로 유명한 저자가 부부 50쌍을 인터뷰하고 일부는 같이 생활하면서 맞벌이 부부의 가사 분담을 분석한 책이다.

 

남성이 여성만큼 가사 노동을 하지 않는 한, 그 노동과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한, 인류의 모든 민주주의는 실패한다. (가슴을 도려내는구나.)

 


최후의 만찬은 누가 차렸을까? 로잘린드 마일스


가정에 소속된 여성치고 임금 노동에 종사하든 안 하든 끼니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운 여성은 거의 없다. 그때 이 책이 생각났다. <최후의 만찬은 누가 차렸을까? - 세계 여성의 역사>. 물론 밥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동서양에 걸친 세계 여성의 역사다. 기존 역사에서 여성 역할의 중요성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다. 여성의 노동 없이 인류 역사는 단 하루도 가능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저자의 시선과 약간 다르다. 그녀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최후의 만찬은 누가 차렸을까? 만일 남자 요리사였다면 열광하는 추종자를 거느린 성인이 되어 그를 기념하는 축일이 생겼지 않았을까?”였다. 물론 스타 요리사의 성별도 중요하다. 하지만 내가 궁금한 것은, ‘그 많은 설거지는 누가 했을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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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6-03-03 18: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떠나간 자의 슬픔.. 남겨진 자의 고통..

마태우스 2016-03-03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근데 최후의 만찬은 누가 차렸을까는 품절이네요 아쉽습니다. 글구 하늘을 덮다 이 책이요, 저도 사서 읽으려고 했는데 책의 가독성이 많이 떨어지더라고요. 도대체 무슨 얘긴지 확 와닿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도 하늘을 덮다를 덮다, 했습니다. 암튼 저와 관심분야가 비슷한 것 같아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시이소오 2016-03-03 22:53   좋아요 0 | URL
정희진 씨 서평집에는 절판 도서가 꽤 많습니다. 하늘을 덮다, 덮다 ㅋ
마태우스님이 서민박사님은 아니죠?
 

2장 주변과 중심

 

검은 피부 하얀 가면 프란츠 파농


 

누구에게나 이뤄지지 못한 약속의 땅에 사랑하는 사람을 묻는 일이 한번쯤은 찾아오리라...... 사랑하는 사람을 묻을 땅을 파느라 더러워진 옷, 아니 얼룩진 옷......옷이야 갈아입으면 되지만, 얼룩진 마음은 기억에서 잊혀질지언정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는다.”

 

고로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아무도 모른다>의 마지막 장면, 비행기를 보여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소년이 죽은 여동생을 공항 부근에 묻고 돌아오는 장면을 소설가 김연수는 이렇게 썼다.

 

며칠을 이 문장과 함께 살았다. ‘얼룩진 옷을 입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 내가 약자의 삶을 선택하면, 일부러얼룩진 옷을 입으면 얻게 되는 인식론적 자원이 있다......하지만 나는 당연히 얼룩을 안고 살아갈 것이다. 정의로워서가 아니다......얼룩으로 인해 감당해야 할 삶이 있다. 얼룩의 이물감, 분노 조절 실패, 사회적 시선과의 싸움.......

 

평화 혹은 민주주의를 추구한다는 것은 얼룩진옷을 벗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소외를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것. 사람들은 고통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 행복보다 괴로움이 안전하다. 행복은 지켜야 하는, 피곤한 것이다.

 

<검은 피부 하얀 가면>36살에 죽은 파농이 27살에 쓴 책이다. 이런 책은 지식만으로 쓰여지지 않는다. 1970년 미국의 급진주의 페미니스트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이 <성의 변증법>25살에 썼듯이 자기 위치성에 대한 정치적 자각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걸작이다.

 

타자를 만지고 느끼며 동시에 그 타자를 내 자신에게 설명하려는 노력을 왜 그대는 하지 않는가?”

 

나의 육체여, 나로 하여금 항상 물음을 던지는 인간이 되게 하소서

 

고정희 시전집1,2, 고정희


 

이 책은 시선집이 아니라 시 전집이다. 그런데 한 사람의 전집이 아니라 마치 한국 명시선’ ‘한국 현대 시인선처럼 연애편지에 인용하기 좋은 시부터 신학, 민, 자연에 이르기까지 인생과 시대를 아우르는 주제가 망라돼 있다.

 

섣부른 생각이지만 고정희 같은 인물이 다시 나올까 싶다

시집을 뒤적이다가 <사랑법 첫째>라는 시에 연필을 꽂아 둔다.

 

그대 향한 내 기대 높으면 높을수록

그 기대보다 더 큰 돌덩이를 매달아놓습니다

부질없는 내 기대 높이가

그대보다 높아서는 아니 되겠기에

기대 높이가 자라는 쪽으로

커다란 돌덩이 매달아놓습니다.

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

기대 따라 행여 그대 잃지 않기 위하여

내 외로움 짓무른 밤일수록

내 설움 넘치는 밤일수록

크고 무거운 돌덩이

가슴 한복판에 매달아놓습니다

 

이별의 기술, 프랑코 라 세클라.

 

나의 소원은 인류 멸망이다. 내 소원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죽사는 모든 사람의 희망일 것이다.

 

시간 차 비극의 제일은 무엇일까. 며칠 전 사랑의 반대말은 사랑이다. 사람들마다 각자 사랑의 개념,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부모 자식 간에 사제 간에 연인 간에 갈등이....” 이런 하나 마나 한 장광설을 늘어놓던 내게 친구가 말했다. “너는 아직도 그러고 사는구나, 사랑은 그런 게 아냐. 사랑한다, 사랑했다. 이게 서로 반대야

 

비극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의 책을 좋아하는데 <이별의 기술>이 그렇다. 이별 와중에 의문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에게 권하고 싶다. 부제는 인류학자가 바라본 만남과 헤어짐의 열 가지 풍경이지만 내용은 이보다 흥미롭고 참혹하다.

 

상대에게 떠난 이유를 따지는 것은 전혀 효과가 없다. 사랑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실리 측면에서도 그렇고, 사실 진짜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심오하지 않다. ‘피해자에게 관심도 없다. 관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쪽이 약자가 될 뿐이다. 그들은 단지 할 수 있으니까 그런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그들이 될 수 있다.

 

트라우마는 가해자때문이 아니라 가해자를 이해하려는 순간 시작된다.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 낸시 홈스트롬

 

살해된 통영 초등생(<한겨레> 2012724일자 1)와 정치학자 이성형 교수의 영면. 두 사건은 내가 사는 세상을 요약하는 듯하다. 충격과 슬픔도 컸지만 열패감이 더했다. , 세상이 세구나.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35편의 논문이 실려 있다. 섹슈얼리티, 공공정책, 인종, 군사주의까지 다루지 않은 분야가 없다. 이 책은 내가 접한 페미니즘 입문서 중에서 가장 우수하며 가장 충분하다. 또한 가슴 죄는 명언들이 즐비하다. 여성주의는 양성 평등이 아니라 사회 정의를 위한 것이다.

 

너 자신을 파괴하고 눈에 띄지 말라.”는 사회의 메시지, 아니 협박을 받으며 살아가는 주변인에게 가장 중요한 생존 전략은 자기부정이다. “‘숨자, 살아남으려면 숨자.’ 라고 생각했다. ”

 

파멸이 약자스스로에 의해 저질러진다면 권력자들은 더없이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그들인 우리는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사회는 어려운 조건에 놓인 어린이를 보호하는 데 총력을 쏟아야 하며, 선하고 재능 있는 이가 53살에 세상을 떠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신약성서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성경은 언제나 원본 없는 개정판이었고 또 그래야만 한다. 정치적(신화적)해석 말고 표현상으로도 바이블은 없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의 앞 구절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 반대하는 하느님이다. 따라서 보복하지 말라, 저항하지 말라, 앙갚음하지 말라, 대적하지 말라 등이 널리 알려져 있으나 나는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가 가장 맘에 든다.

 

악의 활동, 피해가 발생하는 시간은 짧다. 그러나 악의 이유를 묻게 되면 영원히 피해자가 된다. “?”라고 질문하는 그 순간부터 피해자 됨의 진정한 의미, 불행감과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된다. 악의 이유에 대한 궁금증은 피해자의 자아 존중감을 파괴하는 악의 본질이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무관심으로 악의 기능을 중단시키자. 그럼, 누가 악과 싸우나? 그건 악 자신이 할 일이다.

 

성의 변증법, 술라미스 파이어스톤

 

<성의 변증법>을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대표작, 여성학의 고전이라고 소개하는 것은 부정의하다

이 책은 그냥 인류의 고전이다.

 

부모 사랑 금기는 오이디푸스/엘렉트라 콤플렉스, 동성애 혐오를 낳았다. 파이어스톤은 이 세 가지 억압이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기본 장치이며 가족 폐지를 통한 근친상간 금기의 종식은 성, 계급, 자아 개념을 바꾸는 인류의 혁명을 가져올 것으로 보았다. 현재 가족은 계급 우월과 인생 성패의 기준으로 절대시되고 있다. 가족 제도가 만악의 근원이라거나 인간이 발명한 가장 폭력적인 행위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필요한 것은, 가족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가장 인위적인 제도라는 인식이다.

 

세 가지 물음, 톨스토이. 지금 접촉하고 있는 사람


 

며칠 전 어떤 사람이 내게 물었다.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나는 주저 없이 엄마라고 대답했다. 그는 이 아니라고 했다. “그럼, 나 자신?” “아니면 통찰을 주는 예술가?” 나는 계속 틀렸다. 답은 지금 접촉하고 있는 사람이다. 톨스토이의 우화 <세 가지 물음>에 나오는 질문 중 하나다.

 

톨스토이의 단편은 그의 지혜만큼이나 넘치게 출간되어 있다. 최근 국내 최대 47편을 수록한 책이 나와서 사고 싶었지만, 참았다. “지금 접촉하고 있는책부터 읽기로.

 

경제적 공포, 비비안느 포레스테


 

아직도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이들을 만난다. 이 헌신적인 사도들에 대한 내 감상은 세 가지다. ‘, 저 열정이 부럽다.’ ‘천당이 그렇게 좋으면 먼저 가시지’ ‘여기가 지옥인데 뭘 벌써부터 걱정을..’

<경제적 공포 노동의 소멸과 잉여 존재>의 저자 비비안 포레스테는 그의 다른 명저 <고요함의 폭력>에서 이 상황을 요약한다. “지옥은 비어 있고 악마들은 다 여기 있다.”

<경제적 공포><자본론> 이후 가장 많이 팔린 경제학서라고 한다.

 

지금 이 체제에 시너를 부을 것인가? 폭탄을 설치할 것인가? 자폭할 것인가? 필요한 것은 앎이다. ‘무능한 잉여의 유일한 자원은 생각하는 능력뿐이다. 필독을 권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인생, 자녀 교육, 투표에 대한 생각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이다.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그렉 버렌트 외


지금 누군가 이 책을 사고자 한다면 결사적으로 말리겠다.....이런 책을 사려고 망설이는 상태라면 이미 연애가 깨졌거나 시작하지도 않은 것이다. 남자가 신뢰를 준다면 이 책의 존재를 알 리 없다. 책을 읽고 진실을 직면한 치료 효과가 없진 않겠지만, 자신에 대한 분노로 최소 며칠간은 미칠 가능성이 있다.

 

심화학습을 원한다면 자본주의의 고전인 재클린 사스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읽으면 된다. 자본주의는 사랑과 가족 문제를 여성의 일, 성 역할로 할당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다만, 가장 추잡한 남자는 헤어지면서 좋은 인상으로 기억되고 싶어 희망 고문을 지속하는 자, 두 번째 저질 남자는 거절 못하고 질질 끌면서 여자의 감정과 자원을 착취하는 부류다. 이런 분들은 코끼리에 밟혀 죽어야 한다.’

 

보스턴 결혼 에스터 D. 로스불름 외 엮음, ‘그것


섹스 생활 없는 여성 동성 결혼을 다룬 <보스턴 결혼>을 읽으며 행복해하다가, 새삼 베스트셀러에 문제의식을 품게 되었다. 여성주의나 동성애는 그들에 대한 이슈가 아니라 사회에 대한 담론이다....깊이 있는 지식과 통찰력, 편집, 번역에서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주는 책(이 책!)여성’, ‘레즈비언이라는 레터르가 붙어 툭수분야의 서적으로만 여겨진다면, 공동체 전체의 손실이 아닐 수 없다.

 

헨리 제임스의 소설 <보스턴 사람들>에서 유래한 보스턴 결혼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미국 도시 지역에서 경제적으로 독립한 여성들 간의 동거 관계를 말한다. 보스턴 결혼은 여성에게 돌봄, 연대감, 로맨스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보스턴 결혼>의 매력과 성취는 인류사 전반에 대한 상상력과 모색에 있다. 로맨틱하고 헌신적이지만 섹스가 필수적이지 않은(asexual) 동성 결혼은, 진부한 질문을 근본적인 질문으로 바꿔놓는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섹스, 금욕, 육아, 친밀성, 가족이란 무엇인가.

 

<보스턴 결혼>에는 지시대명사가 많다. “그것 하기”, “우리가 뭐였든 하여간 그거였을 때, 우리에게 있었던 그게 무엇이었든 간에”, “그 여자는 결코 모를, 그 사람 전부를 알 길”, “소녀가 소녀를 만나고 소녀가 소녀를 잃고, 소녀가 소녀를 얻는다.” 이 책에서 섹스는 그것it’이다. 섹스는 미지의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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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2-27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이소오 님 정말 책을 꼼꼼하게 읽으시는군요.. ㅎㅎㅎㅎ

시이소오 2016-02-27 21:48   좋아요 0 | URL
모르는 책이 너무 많아서 컬쳐 쇼크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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