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대화
1960년대 미국 문학계에 등장한 뉴저널리즘은 내러티브 논픽션에 일대 전기를 가져왔다. 조앤 디디언, 게이 탈리스, 트루먼 커포티, 노먼 메일러를 필두로 한 뉴저널리즘 작가는 소설에서 사용하는 세련된 장치들을 거침없이 가져다 썼다.
내적 독백
내러티브에 모티브(동기)가 결합해야만 플롯이 된다. 따라서 인물의 심리 상태는 플롯을 진전시킨다.
9. 주제
그리고 그 1년 반 동안 나는 톰과 정기적으로 만나 내러티브 논픽션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모든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톰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철학자 조지 허버트 미드의 ‘반사경 자아looking –glass self가 떠올랐다. 반사경 자아란 다른 사람에게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인식한다는 개념이다.
주제문
완성된 스토리에서 사건의 동선은 주제를 위해 존재한다. 독자에게 ‘시간을 투자해 보길 잘했다’는 만족감을 주는 것도 결국은 이 주제다.
문을 나서면서 불을 끄는 게리. 집 안에는 이제 포스트잇이 없다. 문 앞에 붙어 있는 딱 한 장만 빼고.
거기엔 “믿어라. 의심하지 마라”고 적혀 있었다.
주제는 작가의 특징
레이조스 에그리는 드라마 전체를 떠받치는 기초가 된다고 해서 주제를 ‘전제’라고 불렀다. 에그리의 시각으로 보면 전제는 외부 세계 어딘가에 떠다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그가 “전제를 찾겠다고 돌아다니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제란 자신의 신념에서 나온다.”
우리의 대화는 결국 세상에 대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느냐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더듬고 파헤치는 것이었다.
진정한 환원주의자인 윌라 캐더가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세상에 스토리는 두세 가지가 전부다. 이 두세 가지가 마치 처음 있는 이야기인 양 치열하게 되풀이될 뿐이다.”
존 프랭클린의 말을 빌리면, 상투성은 문장에서 발휘되면 민망하지만 주제가 되면 핵심 요소로 변화한다. “신기하게도 상투성은 개념으로 다뤄지면 항구불변의 진실로 탈바꿈한다.”
변함없는 단골주제들
“단골로 등장하는 전형적인 주제로는 염원, 수색, 여정, 추구, 포획, 구조, 탈출, 사랑, 금지된 사랑, 짝사랑, 모험, 수수께끼, 미스터리, 희생, 발견, 유혹, 정체성의 상실 혹은 회복, 변질, 변신, 괴물 물리치기, 명계로의 추락, 환생, 속죄 등이 있다.”
토마 톰린슨은 가장 보편적인 교훈을 이끌어 내고자 했다. “그는 이제 거대한 수체의 미스터리를 푸는 일이 일상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안다. 간혹 문제가 안 풀릴 땐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다. 한참 후에 다시 보면 새로운 점이 보인다. 그리고 주로 자신의 본능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폴라 라로크도 스토리의 교훈적 성격을 언급한 바 있다. “동화에서 <이솝 우화>, <보바리 부인>에 이르기까지 전형적인 이야기들의 알맹이를 들여다보면 그곳엔 경고를 던지는 도덕적인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현대 예술의 보편적 패턴을 세련되고 교묘하게 연장 해석한 것들로서 대의, 결과, 이유, 질서를 추구한다.”
사실 내러티브 논픽션은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거나 대중의 갈채를 받는 사람의 이야기다. 이것이 바로 내러티브 논픽션과 정통 저널리즘을 가르는 중요한 차이점 중 하나다.
문명이란 둑이 있는 강이다. 강에서는 사람을 죽이고, 훔치고, 소리 지르고, 역사학자가 주로 기록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의 피가 넘실댄다. 한편 둑에서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가정을 꾸리고, 사랑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노래를 부르고, 시를 쓰고, 조각상을 만든다. 문명은 이 둑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둑을 보지 않고 강을 바라보는 역사가는 염세주의자이다.
- 윌 듀란트.
주제 찾기
나는 아무리 소설이라 하더라도 주제는 결국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먼저 흥미로운 인물을 내세우고, 그럴싸한 시련을 던져 평온함을 뒤흔들면 이야기가 굴러가기 시작한다. 이때 인물이 시련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세상 이치에 대한 작가의 생각에서 나온다.
논픽션 작가는 주제를 반드시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
톰 프렌치는 제목을 짓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할 때면 주제에 집중한다고 말한다. “나는 늘 장 제목, 소제목은 물론 전체 제목을 뽑으려고 고민한다. 그렇게 하면 스토리의 요지가 무엇인지, 구조와 힘이 무엇인지로 모든 생각이 수렴된다.”
맥키는 “진정한 주제는 낱말이 아니라 문장”이라고 말했다. “스토리의 의미가 담겨 있는, 더는 줄여지지 않는 명쾌하고 정돈된 한 문장이다.”
문장이니 당연히 동사가 들어가야 한다. 동사는 효과적인 주제문을 쓰는 열쇠다. 프랭클린은 어떻게든 능동사를 찾으려 한다. 나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목적어를 필요로 하는 타동사를 찾는다. 목적어가 ‘무엇’에 대한 대답이므로 문장을 타동사를 기준으로 짜면 인과관계가 확연해진다.
“좋은 전제는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각 요소는 좋은 희곡에 필수 불가결하다. 가령 ‘검약은 낭비를 부른다’를 살펴보자. 이 전제의 첫 번째 단어는 인물(검약하는 인물)을 드러낸다. 두 번째 단어 ‘낭비’는 극의 결말을 암시하고, 세 번째 단어 부른다는 갈등을 나타낸다.”
따라서 어떤 원고가 됐든 나는 늘 똑같은 낱말을 가장 먼저 적는다. 컴퓨터 화면에 새 문서를 열고 ‘주제’라고 입력한다. 그 뒤에 쌍점을 찍고, 그대로 잠시 앉아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적확하게 담아낼 ‘명사 –동사 –명사’의 문장구조를 고민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이라면 ‘주제 : 스토리는 삶에서 의미를 짜낸다’를 첫 문장으로 쓸 것이다.
10. 취재
몰입
현장에서 지켜보기, 귀담아듣기, 냄새 맡고 피부로 느끼기. 이것이 몰입 취재다.
그들이 마시는 공기를 마신다
묵묵히 지켜보며, 그들의 주변을 맴돈다
그들의 일상적인 업무 리듬을 파악한다.
그들만의 언어를 익힌다
그들이 주로 보는 책자, 지침서, 전문 출판물을 읽는다.
그들이 믿고 따르는 그 분야의 권위자를 찾아본다.
어떤 하위 문화에 몰입해 보내는 시간이 조금도 아깝지 않은 이유는 외부인의 출입이 통제된 담벼락 안의 세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 낯선 사람을 만나면 경계하고 방어벽을 세운다. 하지만 눈에 익으면 신뢰 내지는 무관심이 생겨난다. ‘벽에 붙은 파리’기법은 이런 이치를 바탕으로 한다. 일단 충분히 친숙해지면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는 배경의 일부가 된다. 그러면 몰입 취재 대상은 비로소 긴장을 풀고 평소 모습으로 돌아간다.
접근
나는 이럴 경우 생존자들에게 다가가 “지금 당신의 말 한마디가 올바른 역사를 알릴 중대한 역할을 한다”라는 일종의 책무감을 심어 주라고 조언한다.
관찰 및 재구성 내러티브
인터뷰 하기
첫째, 취재원에게 내가 무엇을 하려 하는지를 명확하게 알리는 것이 좋다. .....전형적인 기사를 쓰려는 게 아니라고,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느껴지는 것을 모두 실제 있었던 그대로 되살려 내려 한다고 분명히 밝힌다.
‘’앞으로 15분 동안 우리의 대화는 힘든 노동이 될 것입니다. 외람되지만 우리 둘 다 목수라고 생각해 주세요. 함께 일한다는 생각으로 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저는 지금 분해된 조각들을 하나로 조립해야 하거든요 ‘
구체적인 사실을 떠올릴 땐 한 가지 기억이 도 다른 기억을 불러내기도 한다. 그래서 취재원에게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 어디에 있었고,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상키시켜 주는 게 꽤 도움이 된다.
리처드 벤 크레이머는 거실에서 하는 인터뷰를 좋아하지 않는다. “거실에 앉으면 꼭 팔짱을 끼게 된다”는 것이 그 이유다. 대신 부엌 식탁으로 자리를 옮겨도 되겠느냐고 묻는다. 좋은 생각이다. 내 경험상 이럴 때 맥주 한 잔을 곁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인물, 장면, 액션, 주제
내러티브, 하다못해 피처기사를 쓰는 기자의 취재 노트라면 모름지기 시각적인 디테일, 일화, 액션의 흐름은 물론 냄새까지 담겨 있어야 한다. 취재하는 자신에 대한 기록(어떤 질문을 던졌고 그때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관찰하는 동안 자기 내면에서 어떤 반응이 일어났는지 등)이 담겨 있으면 더 바랄 게 없다. 원고를 작성할 때 모두 필요한 재료다.
인물이 스토리의 동력인 만큼 취재 노트에는 신체적 특징, 얼굴 표정, 제스처, 목소리 톤, 그 밖의 모든 직접적 인물 묘사가 넘쳐 나야 한다. 이런 것은 대화를 나눌 때 관찰해 기록하는 것이 좋다. 의미를 전달하는데 비언어적 신호가 언어보다 더 효과적일 때가 많다. 인터뷰할 때 기자들이 사용하는 전형적인 방법은 별로 궁금하지 않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취재원이 열심히 대답하는 동안 외모와 옷차림 등에 대한 세부적인 사항을 적는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스토리는 누군가가 무언가를 욕망할 때 시작된다. 따라서 스토리 내러티브를 위한 취재는 동기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존 프랭클린은 스토리의 스케일이 큰 경우 몇 시간씩 이어지는 ‘심리 인터뷰’를 진행한다. 처음에는 유년기에 대해 질문함으로써 유전적, 행동적 동기를 찾아본다. 그런 다음 주인공의 인생을 더듬어 올라가며 중대 결정을 내린 순간, 그런 선택을 했던 요인들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디테일은 가설을 만들고, 가설은 다시 더 많은 디테일 수집의 단서가 된다. ....이렇게 가설을 세우고 관찰하기를 반복하다 보면 어떤 시각적 디테일 혹은 액션을 골라잡아야 할지 방향이 잡힌다.
트루먼 커포티는 논픽션을 쓰는 데는 “시각 디테일을 보는 좋은 식견이 필요한데 이런 면에서 작가는 일종의 ‘텍스트 사진가’, 그것도 아주 까다롭게 이미지를 고르는 사진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펌프에 마중물을 부어 물을 끌어올리는 원리처럼 먼저 자기 자신이든 주인공에 대해서든 이야기한 뒤 이제 당신의 이야기를 하나 들려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디테일은 아무리 사소하고, 특별할 것 없는 개인적인 이야기라 해도 신중하게 선별하면 강력한 효력을 낸다. 톰 프렌치는 “작고 소소한 순간의 힘과 중요성을 믿지 않으면 안 된다”고 조언한다. “신문기자란 중대한 순간에 강해지게끔 훈련 받는다. 그런데 이 일을 오래 하면 할수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 보이는 순간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정말 중요한 일은 바로 내 앞에서 일어나고 있다.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기만 하면 된다. ”
보석의 질 자체보다 세팅의 질이 중요하다. 세팅의 질은 취재 과정 동안 작가가 하는 생각의 질을 반영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끊임없이 자문한다. ‘그녀는 왜 그랬을까?’,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이 난관이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일까?’
계속 질문하다보면 자꾸 발견하게 된다.
스토리를 보는 안목
모든 시련이 해결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해결은 모두 시련에서 나온다. 그래서 존 프랭클린은 거꾸로 해결에서 스토리를 찾아보라고 제안한다. 우리 앞에 놓인 신문이나 뉴스 웹사이트를 보면 해결이 널려 있다. “뉴스기사는 대부분 시작이 빠진 결말”이다.
11. 스토리 내러티브
스토리는 모두 똑같은 것 같지만 저마다 다르다는 점에서 눈송이를 닮았다
- 존 프랭클린
12. 해설 내러티브
나는 리치에게 해설 내러티브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려면 단지 경로만 밝아선 안 된다고 말했다. 사람이나 사물의 자취를 따라가야 한다. 해설 내러티브는 즉물적인 구체성을 요구한다. 독자가 구체적인 시간, 구체적인 장소를 머릿속에 그릴 수 있어야 한다.
“액션을 쭉 따라가며 설명을 하고 싶은 거잖아. 그러려면 우선 밀착해서 관찰해야 해. 사실에 충실한, 구체적인 디테일과 액션이 많아야 하니까. 일반적으로는 한 명의 사람을 따라가겠지. 하지만 그게 무생물이 되지 말란 법은 없어. ...단 그게 멈춰 있으면 안 돼. 계속 움직여야 해. 그러면 반드시 이런저런 인물들을 스치게 돼 있어. 이렇게 해서 이야기에 사람 냄새를 불어넣는 거지.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액션이야. 내러티브를 구축하는 스토리 라인을 만드는 게 액션이니까. 프런체프라이의 여러 면면을 끄집어내 보여 주기에 적절한 장소로 자넬 이끄는 것도 이거야.”
해설 내러티브의 이 두 가지 임무(액션과 설명)을 돕는 구조적인 요소가 두 가지 있다. 우선 액션 줄기, 즉 스토리 라인은 전체 형태를 잡아 주고 시간과 공간에 따라 내러티브를 이동시킨다.
여담은 체계적인 혹은 실용적인 설명을 제공함으로써 더욱 커다란 맥락안에서 액션을 바라보게 한다. 액션은 추상화 사다리의 아래쪽 칸에서 일어난다. 이곳은 감정이 지배한다. 설명은 사다리의 위쪽 칸에서 일어나며 이곳은 의미가 지배한다.
마크 크레이머의 말처럼 “여담을 할 절호의 타이밍은 액션이 한창 일어나고 있을 때지 액션과 액션 사이가 아니다. ”
눈에 잘 보이는 뚜렷한 구조는 내러티브를 어떤 방향으로 밀고 나아간다. 존 프랭클린이 구조를 “기계에 깃든 영혼”이라고 부른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그들은 그것을 어떻게 하는가?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리고 어디로 가는가?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이것은 어쩌다 이토록 난장판이 되었나?
그 사람이 된다면 어떨까?
나는 이 형식을 3+2 해설 내러티브라고 부른다. 내러티브 장면이 세 개, 사이사이에 들어갈 여담이 두 개.
13. 그 밖의 내러티브
비네트
비네트는 한 장면으로 완결된다. 비네트는 장면 하나로 끝나기 때문에 이 삶의 한 조각에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같은 주제 의식을 담아내야 한다. 현대 내러티브 논픽션의 큰 스승인 월트 해링턴은 비네트를 “저널리즘의 하이쿠”라고 말했다. 기자와 편집자들은 비네트를 “교향시”라고 부른다.
북엔드 내러티브
장면이 있는 액션이 긴 설명을 샌드위치처럼 앞뒤로 받치고 있는 구조다. 내러티브로 시작하고 내러티브로 마무리함으로써 중간에 자리 잡은 길고 지루한 내용을 지탱한다.
경수필
최초의 경수필 대가를 꼽으라고 한다면 16세기 프랑스 지성을 대표하는 몽테뉴가 아닐까.
보통 5분 정도면 독파하는 짧은 경수필 (1000자 이내)은 신문 칼럼이나 잡지의 주된 형식이다. 모든 경수필은 몽테뉴의 수필처럼 내러티브, 방향 전환, 결론으로 이루어진다. 말하자면 귀납적이다. 구체적인 예에서 추상화 사다리를 오르고, 우주적인 진리를 결론으로 이끌어낸다.
파트1 : 내러티브, 650단어 (매우 구체적으로)
파트2 : 전환, 150단어 (구체적인 것에서 일반론으로)
파트3 : 결론 200단어 (요약 정리)
짧은 경수필 구조는 이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내러티브를 쪼개서 그 사이사이에 중간 결론을 넣을 수도 있다. 내러티브를 짧게 줄이고 주제에 대한 추상적인 논지를 길게 이어갈 수도 있고, 반대로 내러티브를 길게 가져감으로써 문학적 단서들을 통해 보편적인 결론이 은근히 드러나도록 할 수도 있다. 미국의 몽테뉴라 불리는 E.B 화이트는 <다시 호수로>에서 마지막 방식을 취했다.
칼럼
칼럼은 신문, 잡지, 온라인을 막론하고 길이가 800단어 내외로 거의 정해져 있다. 800단어라고 해도 짤막한 내러비트를 넣을 여지는 충분하다
1인칭 내러티브 이슈에세이
에세이는 ‘상념과 산책’이라고도 불린다. <애틀랜틱>의 수석 특파원 제임스 팰로스는 1인칭 내러티브 이슈에세이를 주로 썼다. 때로는 1만 5,000단어를 넘기도 했고, 때로는 주제를 상당히 깊이 있게 파고들기도 했는데 그 중 <51번째 주>는 그의 이름을 널린 알린 기사다.
마이클 폴란은 잡지기사나 책을 쓸 때 모두 이 형식을 사용한다. 폴란은 ‘물리적 공간을 이리저리 돌아볼 때도 내러티브를 쓸 수 있지만 어떤 시스템을 샅샅이 돌아볼 때도 내러티브를 쓸 수 있다’고 말한다. 미국의 식품 생산 시스템을 파헤친 그의 베스트셀러 <잡식동물의 딜레마>가 아주 좋은 예다.
14 윤리의식
1980년 <워싱턴포스트>의 재닛 쿡은 퓰리처상을 받은 <지미의 세계> 속 아동 마약중독자가 꾸며 낸 인물임을 시인했다. 1998년 <뉴리퍼블릭>의 스티븐 글래스는 있지도 않은 출처를 만들어내고, 지금까지 쓴 27편의 스토리 중 일부를 지어냈음이 들통났다. 같은 해 <보스턴 글로브>의 생활면 칼럼니스트 퍼트리샤 스미스는 인용문과 등장인물을 허위로 만들어 냈다고 시인하고 신문사를 떠났다.
프랭크 매코트는 영국에서 막 독립한 아일랜드에서 궁핍한 유년기를 보냈다. 당시의 이야기를 쓴 <안젤라의 재>는 1996년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에 진입했다. 평단에서 호평이 쏟아졌고 퓰리처상을 비롯해 권위 있는 문학상을 모두 휩쓸었다. 여러 군데가 조작이었지만 <안젤라의 재>는 퓰리처상 논픽션 부문 상을 수상했다.
창조적 논픽션은 철저한 진실성 준수에 달려 있다. 구체적 사실에 의존해 정직하게 현실 세계를 쓰고, 기억과 상상에 의존해 이 세상을 총천연색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 더 멋진 스토리를 쓰겠다고 사실을 왜곡하거나 없는 사실을 만들어 낸다면 그것은 픽션이다.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로 풀기 위해 존재하는 사실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창조적 논픽션이다.
손드라 펄, 미미 슈워츠, <사실적 글쓰기 : 창조적 논픽션 작법과 요령>
‘감정적 진실’은 창조적 논픽션에서 정확성을 논할 때 종종 튀어나오는 개념이다. 모든 디테일을 일일이 정확하게 묘사할 수는 없지만 본질적으로 사실인 커다란 의미를 잡아낼 수는 있다는 주장이다.
이 논쟁은 2003년 제임스 프레이의 <100만 개의 작은 조각>이 출간되면서 전면 부각되었다. 책은 알코올 중독, 마약중독을 극복하기 위해 힘겨운 시간으 보낸 프레이의 삶이 담긴 전형적인 회고록이다. 2006년 오프라 윈프리의 토크쇼에 소개되며 300만 부가 팔려 나갔다. 그 뒤 ‘스모킹 건’이라는 진실 추적 웹사이트에서 이 책이 날조됐다고 폭로했다.
논픽션 <선악의 정원>을 쓴 존 베런트는 몇가지 사실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자 “사실적인 기록이 아니다”라고 인정했음에도 무려 216주 동안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스틸은 몰입 취재의 윤리적 책임에 대해 한마디 했다. “사람마다 각자 주어진 임무가 있죠. 기자의 임무 역시 아주 특수하고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임무에는 네 가지 윤리적 책임이 수반된다고 덧붙였다. 첫째, 진실을 말할 것, 둘째, 독립적일 것, 셋째, 피해를 최소화할 것, 넷째, 책임을 질 것
논픽션 스토리 텔러를 위한 질문
내가 정말로 있었다고 주장하는 일이 내가 표현한 그대로 일어났는지 어떻게 알았는가?
그건 사실인가? 누가 사실이라고 이야기하는가?
나는 사실을 옳게 알고 있는가? 또한 옳은 사실을 알고 있는가?
나는 장면을 얼마나 완벽하게 재현해 놓았는가? 재현에 바탕이 된 정보제공자는 하나인가, 둘인가, 그 이상인가?
당시 현장에 있던 다른 목격자의 기억과 대조해 보았는가?
사료나 공식 기록 등의 문건을 통해 독립적 검증을 거쳤는가? 예를 들어 정보제공자가 “비바람이 부는 칠흑 같은 밤”이라고 말했을 때 기상청에 전화를 걸어 그날의 날씨를 확인했는가?
나는 정보제공자를 신뢰하는가? 정보제공자의 기억이 부정확하거나 그가 다른 속셈을 갖고 있어 내가 그에게 속아 넘어갔을 가능성은 없는가?
내 목적은 떳떳한가? 나는 독자에게 실체를 전달하려 노력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 필력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거나 감동시키려 할 뿐인가?
재현의 신빙성을 보증하는 것이 출처 명기다. 이것이 없어서 신뢰성을 떨어뜨리는가? 어떤 장면을 재현할 때 어떻게 취재했고 어떤 출처에서 나왔는지 독자의 이해를 도울 편집자 주석이 있어야 하는가?
어떤 방식을 써서 취재했는지 편집자에게 숨김없이 공개하고 설명할 수 있으며, 그럴 의향이 있는가? 독자에게도 그럴 수 있고, 그럴 의향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