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마음에 있는 생각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다. 뚜껑을 열어 보여 줄 때까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한 번 뚜껑을 열고 그 안을 보여 줬을 때 생겨나는 타인의 마음을 목격하면, 자기 자신의 마음속도 그것에 따라 변하고 말지도 모른다.

<흑백>, 미야베 미유키 -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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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13계단 - 제47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밀리언셀러 클럽 29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 황금가지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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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가 컸을까. 막상 반전을 거듭하는 걸 보니 재미보다는 뻔하고 지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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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침묵은 어떤 발언보다 더 효율적인 법.

삶은 이런 식으로 노력을 자주 비껴갔다. 단일 선택지가 선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병렬적으로 쌓이면 악행으로 치닫기 쉬웠다. 이웃에게 조금이라도 밉보이지 않으려 손수 그릇을 치웠고, 길고양이까지 챙기려 했고, 이를 위해 가급적 흠결이 없는 제품을 구매했던 나의 연쇄적인 노력들은 염분을 제거하지 않은 참치 하나로 나쁜 짓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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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하고자 하는 도덕적 욕망을 추구하는 일은, 가끔 패배가 정해진 게임에 참여하는 일처럼 불합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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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마트도 같은 맥락이었다. 돈은 없지만 다양한 식자재를 구입하고 싶다는 사람들의 소박한 욕망은 비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바닥에 눌어붙은 통장 잔고를 위해 그들이 열심히 지켜온 갖가지 선택지들이 병렬로 연결되고, ‘25마트 상품’이라는 저질 제품으로 수렴하는 순간 최종적으로는 ‘무책임한 선택’만 남는다.

선량한 구렁이가 눈가를 어찌나 핥아댔는지 5년간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든 악인이 되지 않는 방식만 선택하는 건 마음 안에 용수철을 꾹 눌러두고 손을 떼지 않는 일과 같았다. 예측하지 못한 곳으로 튀지 않게끔 스스로를 절제하는 일.

고상한 불행은 천박한 행복을 이길 수 없었다.

서로의 게시글에 좋아요를 눌러주는 관계라면 구린 것도 아닌 척 넘어가기 십상이다. 마땅히 모순적인 일을 해도 ‘너는 예외다’라며 눈감아 주는 것은 비겁보다는 어떠한 관용이었다. 나와 친밀한 사람에게는 참된 정의가 무엇이냐, 도덕이 무엇이냐 사력을 다해 왈가왈부하는 일보다야 밥 한술 더 물려주는 것이 나를 제법 아량 넓은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쉬운 선택지를 택했다. 관계가 불편해지는 것보다 일상에 모순을 더하는 일이 쉬웠다.

같은 정당이라면 아무리 멍청한 소리를 해도 지지하는 정치인을 머저리다 욕할 필요가 없다. 친구가 장사하면, 아무리 바보 같은 물건이라도 좋다고 홍보해 주는 사람을 거짓말쟁이다 욕할 필요도 없다. 사람은 다 그렇게 살고 있다. 사람다움의 본질은 때때로 얄팍하다.


  하지만 사과 씨를 심은 곳에서 오렌지 나무가 자라면 그것만큼 황당한 일이 없듯이, 기대로 쌓은 관계가 틀어질 때, 그때는 괘씸함에 배신감까지 추가되어 되돌릴 수 없는 적이 태어난다. 멍청한 소리까지 지지해 줬던 동료 정치인이 돌아설 때 가장 큰 적이 되고, 바보 같은 물건을 홍보해 줬던 친구가 돌아서면 가장 곤란한 민원인이 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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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언어를 구사했고, 외국어로 글을 쓰며 삶의 문제를 해결해 갔다는 독일 작가 괴테는, “외국어를 통해 자신을 바라볼 때, 외국어는 그 자체로 거울이 된다”•고 썼다. “외국어를 모르는 사람은 모국어도 알지 못한다”•• 라는 그의 유명한 말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알고 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도 자신감이라는 것을. ‘이 정도로 프랑스어를 사용하며 사는데도 모르는 게 있다면, 모를 만하니까 모르는 것’이라는 믿음에서 오는 자신감이다.


숫자를 세는 법도 독특했다. 희한한 20진법과 60진법으로, 이를테면 숫자 78은 soixante-dix-huit(60+18, 수와썽 디즈윗)이 됐고, 83은 quatre-vingt-trois(4×20+3, 꺄트르 방 투화)라고 불렀다. 나는 이 숫자 세는 법을 보고, 우리나라 초등학생들의 산수 실력이 프랑스 아이들보다 앞서는 이유가, 우리가 오랫동안 믿고 있었던 지능이나 교육 방식 같은 그런 거창한 게 알닐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78을 칠십팔이라고 부를 수 있는 아이들과 60+18이라고 계산한 후에야 부를 수 있는 아이들의 산수 실력은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은행에 갔다고 해보자. 담당자와 약속을 잡고 갔지만, 앞선 미팅이 지연돼 대기실에 앉아 잠시 기다리게 됐다. 그는 대기실로 들어오면서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라고 말하며 이렇게 덧붙일 것이다. 이제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Je suis à vous!”라고. 이 표현은 조금 전까지 다른 일로 바빴지만 이제 당신과의 일에 집중하겠다는 의미로, 상대를 기다리게 했을 때 프랑스 사람들이 아주 흔하게 쓰는 표현이다.


언어는 말하는 이의 주관적인 감정과 생각과 세계관을 가득 담고서 내게로 온다. 누군가의 언어를 여과 없이 흡수해 내 것으로 만든 세월이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 수도 있다. 


아주 다른 두 개의 세계 속에 각각의 내가 있다. 그 언어들이 나를 만든 건지, 내가 그 언어에 맞는 자아를 매번 꺼내는 건지 모르겠다. 새로운 언어 속에서 해방감을 느끼고, 익숙한 모국어와 자기 자신을 ‘외부의’ 시선으로 낯설게 보는 일, 외국어를 알아서 생기는 즐거움이다.


두 언어 사이를 오가는 일은, 마치 손으로 모래를 옮기는 것과 같았다. 아무리 손을 꼭 쥐고 조심조심 움직여도 알갱이가 술술 빠져나간다.


프랑스어로 “내가 당신을 생각합니다Je pense à vous” 혹은 “우리는 당신을 생각합니다Nous pensons à vous”는 주로 어려운 일을 당한 누군가를 위로하는 말로 사용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와 비슷한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나는 이 말을 국가적인 사고로 사망한 이들의 유족을 위로하기 위한 대통령 연설이나 공적인 자리에서 자주 들어왔는데, 매번 그 말의 정확한 의미가 와닿지 않았다. 내가 당신을 생각한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위로의 대상이 아닌 행위의 주체만 강조하는 생색내기가 아닌가 하면서.


  주 뻥스 아 부. 그 순간, 한 음절 한 음절 힘을 준 나지막한 목소리를 들으며 비로소 이해하게 됐다. 당신을 생각한다는 말의 의미를.


  당신을 생각하겠다는 말은 당신의 상황을 헤아리고, 당신의 고통과 상처를 내 것처럼 여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것은 내 시간이 당신과 함께한다는 의미고, 나의 마음이 당신 곁에 머물고 있으니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의미이며, 그러니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나를 생각하라는 뜻도 된다. 또 그 말은, 당신의 아픔을 나도 함께 느끼겠다는 의미였고, 그러니 당신의 비극은 나의 비극이기도 하다는 뜻이었다.


나 그럼 주말에 짧게 베를린은 어때? 몇 년 전에 출장 갔을 때 보니까, 도시가 엄청 젊고 힙하던데. 한번 다시 가고 싶었어.


  동거인 베를린? 독일인들과 주말을 보내자고? 왜 돈을 내고 그런 우울한 일을 해야 하지?


“지금보다 10킬로그램이 더 찐다고 해도, 5킬로그램을 더 뺀다고 하더라도 저는 정상 범주라고 말씀드릴 거예요. 그 이상이면 건강에 무리가 가겠지만요. 몸무게에 연연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다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마음의 문제니까요.”


  교과서 같은 말이지만,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알았다. 이 선생님이 나의 주치의가 될 것임을. 지난 15년간 쌓여온 내 몸의 기록을 넘겨줄 사람을 찾았음을.


프랑스의 야당 정치인 중에는 본업이 우체부인 사람도 있다. 그는 과거 TV 정치 토론 프로그램의 단골 패널로 활약하면서 대선 후보를 긴장시킬 만큼 인기가 높았는데, 프랑스인 누구나 그의 이름을 아는 지금도 파리의 한 우체국에서 일하는 중이다. 모두가 자기 고양이를 찾는 일만으로도 존엄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 거대 자본이 모든 부를 독점하지 않는 사회가 아마도 그가 찾아 나선 고양이일 것이다.


어차피 삶은 ‘그럴 수-있다peut-être’ 속의 연결선에 지나지 않아. 나는 그 단어를 만드는 가느다란 선 위를 걷고 있지. 내 무게 때문에 선이 끊어진다면 할 수 없지 어쩌겠어. 뭐가 살아남고 뭐가 죽었는지는 그때 가서 보는 수밖에.•

  


  

    • 모하메드 음부가르 사르,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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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트러스트
에르난 디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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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쇼몽 식 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도 길을 잃지 않고 푹 빠져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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