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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제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금희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평점 :
내가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게 된 건 전적으로 신형철 평론가 때문이었다. 신형철 평론가가 추천한 황정은의 <백의 그림자>에 완전 꽂혔기 때문. ‘수상작 소설집’의 혜택이자 저주는 내가 모르는 작가의 소설까지 읽게 된다는 점이다. 미지의 작가를 발견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 토 나올 정도로 싫은 소설을 읽게 되기도 한다. 안 읽으면 될 텐데, 고지식한 성격 탓인지 기어코 다 읽고 만다.
올해는 4강 1중 2약이라 할까. 김금희, 정용준, 장강명, 최정화는 좋았고, 김솔은 판단중지, 기준영, 오한기는 글쎄. <2015년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 중 이장욱의 <우리 모두의 정귀보>와 김금희의 <조중균의 세계>를 재밌게 읽었다고 썼었다. 심사위원들이 7편을 선정하는데 논란이 있었지만 대상작에 대해선 아무런 이견이 없었다고 한다. 나 역시 김금희의 <너무 한낮의 연애>가 가장 좋았다. 김금희, 될성부른 나무였던 것.
양희는 필용을 사랑한단다. 근데 내일은 모르겠단다. ‘애가 지금 누굴 놀리나.’ 남자로서 이런 상황, 신경이 안 쓰일래야 안 쓰일 수가 없다. 양희를 그닥 좋아하지도 않았건만 필용은 만날 때 마다 확인하다. ‘오늘도 그거(사랑) 지속되는 거야?’ 양희는 햄버거 주문을 부탁하듯 말한다.
“사랑하죠. 오늘도”
아, 이 소설, 왜 이리 사랑스러운지.
신형철은 이렇게 썼다. ‘김금희의 시대가 올까. 적어도 지금 내가 가장 읽고 싶은 것은 그의 다음 소설이다.’ 나 역시. 최근에 출간된 김금희 단편집 <너무 한낮의 연애>로 다시 만나야 겠다.
기준영, 2014년에도 기준영 소설을 읽었지만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다. 주로 ‘연애 소설’만 쓴다던데, 이토록 무거운 연애 소설이라. 내 취향은 아닌 듯.
정용준 소설은 처음이었다. 은희경의 심사평이 기억에 남는다.
“정용준의 <선릉 산책>은 정갈한 현악 연주 같다.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축을 이루어 정교하고 날렵하게 서사를 이끌어가는데, 무거운 콘트라베이스가 배음으로 계속 따라오고 간간이 첼로가 불길하게 주제를 환기시킨다.”
주제의식이 마음에 든다. 그러나, 간혹 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의 음이 콘트라베이스 때문에 묻히는 느낌이랄까.
다소 둔중한 풋워크. 아무튼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작가.
장강명의 <알바생 자르기>, 장강명의 장편만 읽었지 단편은 처음이었다. 다른 단편들과 같이 읽으니, 장강명의 장기가 눈에 쏙쏙 박힌다. ‘따라 올테면 따라와 봐’. LTE급 속도감. 장편에서도 장강명 소설의 속도감은 예사롭지 않은데, 단편이니 말해 무엇하랴. 경쾌한 풋웍. 거의 날아다닌다.
장강명 장편을 읽을 때면 항상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장강명은 워낙에 등장인물 뒤에 숨어 있는 작가인지라 작가의 가치관을 특정할 수 없다는 난감함 때문이다. 이번 단편을 읽고 알 것 같다. 장강명은 알려져 있다시피 <댓글부대>로 4.3평화문학상을 탔다. 장강명은 어느 정도의 인기를 획득한다면, 이문열, 이인화, 김탁환같은 극우주의 노선으로 갈아 탈 것처럼 보인다. 오해일까? (당연한 소리지만, 나는 저 세 작가의 책은 절대로 안 읽는다.)
김솔의 <유럽식 독서법>, 욕하면서 읽었다. 그러나, 그가 제기하는 주제의식이 읽은 후에도 머릿속에서 맴돌아 ‘판단 중지’란 표현을 썼다. 문체, 형식 다 맘에 안 든다. 계속 읽어봐야 판단이 가능할 듯.
최정화의 <인터뷰>. 허걱, 내가 가장 싫어하는 번역체 문장.
“우리가 아니면 누가 자네 말을 믿겠나? 그 얘길 다신 꺼내지 말게”
아, 한국 소설에서 저런 문장을 보면 정말 소오름이 쫙!!
세 번 고쳤다는 작가의 말에 용서했다. 손보미 작가처럼 카버를 모방하려 한 것 같은데, 나름 납득할만하고 깔끔한 구성. 최근에 출간된 <지극히 내성적인>도 번역체? 만일 그렇다면 손보미의 경우처럼 두 번 다시 안 읽겠다.
오한기의 <새해>, 역시나 후장사실주의 멤버. 이상하게도 내 기준에서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은 해마다 ‘극혐’ 소설 한 편이 꼭 실린다. 아마도 내가 늙어서겠지. 손보미가 없어 좋아했더니 오한기가 버티고 있을 줄이야. 정지돈의 <건축이냐, 혁명이냐>를 읽고 긴가민가했는데, 오한기 단편을 읽으니 알 것 같다. 후장사실주의는 ‘텅빈 수레’라는 걸. 십년 후에도 과연 후장사실주의를 표방한 소설가들이 소설을 쓰고 있을는지.
항상 소설가를 흠모했었다. 그런 내가 소설가를 혐오하게 될 줄이야! 손보미나 오한기 소설을 읽자니, 소설 따위 정말 아무나 써도 될 것 같다. 제임스 설터의 <사냥꾼들>을 읽는 중에 마치 오한기를 묘사한 듯한 문장을 만났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착각하는 사람 특유의 불쾌한 오만함이 그에게서 엿보였다.’
아직 어려서일까. 하루키가 세계적인 작가가 된 이유로 나는 ‘바닥을 향한 시점’을 얘기했었다. 오한기의 시점은 하늘 위를 붕붕 날아다니며, 독자를 깔아뭉갠다. 신형철은 오한기의 <새해>에 대해 ‘언뜻 한바탕 소극처럼 보이는 소설이지만 삶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다’고 평했다. 어떤 분이 그랬다지. ‘이 소설이 애초 갖고 있지 않은 것을 평론가인 당신이 선물하고 있다’고. 신형철은 동의하지 않았다. 나는 신형철에 동의하지 않는다.
거들먹거리는 시점은 누구한테 배운 걸까. 이런 시점을 쭈욱 고수해도 된다. 단, 문학으로 돈 벌겠다는 야심은 애시당초 버려야 할 것이다. 오한기는 초고를 수정 했을까. 내가 보기엔 맞춤법이나 문장 몇 개 정도. 위화는 상상력만으로 소설이 되는 건 아니라고 말했다. 상상력이 서사의 차이를 만든다면 상상력에 활기를 불어 넣는 것은 통찰력이라고. 통찰력 없이 상상력만으로 쓴 것을 위화는 ‘공상’이라 말했다.
오한기의 글은 소설이 아니다. 배설이라고 한다.
너무 가혹한가? 어차피 오한기는 전문가인 선배 소설가와 평론가들로부터 인정을 받은 셈이니, 일개 독자가 쓴 소리를 한다 해서 귀담아 들을 필요는 없을 듯. 게다가 나는 다다이스트 글은 전부 쓰레기, 배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위로가 될는지?
‘소설 따위를 읽는 건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오한기의 글을 읽으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김금희의 소설을 떠올리고 다시 도리질 친다.
김금희의 <너무 한낮의 연애>에 대한 신형철의 말처럼,
나는 이런 소설을 읽기 위해 나이를 먹은 것일까.
“사랑하죠, 오늘도”라고 말하고 싶다. 또한,
오늘은 채 끝나지도 않았지,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