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15. 폴 리쾨르의 제안을 따라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사유는 권력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반감과 결부되지 않기 위해, 시작 단계에서부터 우리를 불관용에 대한 거부로 이끕니다. 그리고 불관용에 대한 거부는 분노의 샘을 마르게 하여 사유를 관용으로 나아가게 하지요. 그러므로 관용은 어떤 대상들을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항의의 표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견딜 수 없음Intolerable’과 불관용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견딜 수 없음은 헤겔적 의미로 불관용의 이중 부정의 산물로서, 관용이 승리하고 난 이후에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요.) 불관용에 대한 거부로서의 관용은, 얼치기 관용이 승리했을 때 생기는 무관심이라는 사유의 덫을 유발하지 않습니다.

 

사유가 절 행복하게 해주었을까요? 어떤 답변이든 단호하게 말한다면 정직하지 못한 것일 테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유는 가장 견디기 어려운 지루하고 혐오스러운 조건에서도 편안함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유는 최후의 의식을 위한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지요.

 

p120. 당신의 텍스트는 독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말을 한다기보다 독자와 대화를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미하엘 하네케가 언급했던, 영화와 관객 사이의 관계와 유사해 보입니다. 그는 관객에게 숟가락으로 떠 먹여주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면서, 영화의 의미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관객에게 부여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영화 속에서 어떤 것들은 설명하지 않고 남겨둔다고 합니다.

 

p121. ‘질문의 저주에 대해 모리스 블랑쇼는 아주 유명한 답변을 남겼습니다. 의문 품기가 금지되고 의문 자체를 간단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자유는 끝이 난다는 거죠. 우리는 지속적으로 의문을 품는 한 자유롭고, 더 이상 의문을 갖지 않으면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p123. 독자나 관객의 능력을 박탈하지 않고 그들의 능력을 향상시키려는 모든 사람은 플라톤이 말한 동굴 거주자의 경험을 염두에 두고 시작해야만 합니다.

 

p125. 사회학 덕분에 행복하셨습니까?

 

괴테가 제 나이쯤 되었을 때, 어떤 이가 그에게 행복한 삶을 살았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지요. “그럼요. 행복한 삶을 살았지요.” 그리고 바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그런데 온전히 행복했던 한 주일은 기억할 수 없군요.”

 

p134. 참된 민주주의의 열정적인 옹호자인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질문 자체를 그만두는 것이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이며, 질문을 그만두면 우리는 참된 민주주의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이라고요. 전 그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p142. 요컨대 홉스적 질문이란, 해야 한다고 이미 정해진 것을 인간이 행하면서도 마치 의지에 따라 행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방법에 관한 문제이다.

 

 

 





제프리 알렉산더가 <사회학에 대한 현대적 입문>에서 제시한 실마리를 취하자면, 사회학의 미래는 인간에게 자유를 제공하는 문화정치학으로서 사회학을 다시 정립하고 부활시키려는 노력에 달려 있습니다.

 

이러한 경로에 도달하는 방법, 따라야 하는 전략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통념이나 행위자의 지식과의 끝없는 대화에 참여하는 것일 겁니다. 물론 이때, 세넷이 제안한 비공식성, 개방성, 협력이라는 교훈을 따라야 하죠. 제가 반복해서 강조하지만, 최근 세넷이 휴머니즘과 그 현대적 의미'에 관해 쓴 에세이에서 제안한 이 세 가지 교훈은 철저하게 흡수하고 확실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공식성이란, 대화의 규칙이 미리 정해져 있지 않고 대화 과정을 통해 비로소 만들어진다는 뜻입니다. ‘개방성은 어느 누구도 자신만이 옳다고 확신하는 진리를 갖고 있거나, 오로지 타인을 납득시키겠다는 태도를 지닌 채 대화에 참여해서는 안 됨을 뜻합니다. ‘협력은 대화의 모든 참가자들이 교사이자 동시에 학생이라는 점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대화의 승자도 패자도 있을 수 없지요.


 

p145. 은유는 그레고리 베이트슨이 말한 3의 학습상황에서만 정당성을 지닙니다. 이미 확립되어 있는 개념의 네트워크가 새로운 현상을 포착하기에는 충분하지 않거나 설익었을 때, 그러한 개념의 네트워크를 새로운 인식론적 틀에서 재조립하여 눈에 띄지 않던 특성들을 두드러지게 할 필요성이 있을 때 말입니다.

 

리이트 밀즈나 어빙 고프먼이나 로버트 니스벳 등 당신들이 사례로 들었던 학자들은 이러한 의도를 지니고 있었지요.

 

은유는 사유의 과정에서 연쇄적으로 진행되는 생각과 순간을 서로 연결해주는 수단입니다. 새롭게 주목되기 시작한 현상을 명명할 수 있는, 가능하고도 유일한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대표하지요.

 

p149 은유적인 병치는 다른 효과를 발휘하기도 합니다. 의도하지 않았던, 그래서 인식을 위해 별 쓸모도 없고 해로울 수도 있는 효과들이죠. 은유의 대상이 가진 많은 특징들이 눈에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은유를 통해 대상의 유사성은 암시되지만 동일성은 드러나지 않는 거죠. 유사성이 암시되는 경우에도 그 차이들은 부정되지 않고 단지 우회될 뿐입니다. 하위 리그로 강등되는 거죠. 은유는 부분이 전체를 나타내는 것이자 전체가 부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 적용 범위의 형태를 변형시켜, 존재하는 유사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새로운 3대상을 불러냅니다.

 

p152. 짐멜은 그의 저서 <렘브란트: 예술철학에 대한 에세이>에서, 렘브란트 회화의 분명하지 않은 윤곽과 흐릿한 경계선, 그에 따른 반향의 풍부함을 언급했습니다. 그러면서 회화의 표준에 대한 렘브란트의 명백한 반란을 칭송했지요. 짐멜은 이러한 반란을, 화가가 그리고 있는 대상(인간!)의 참된 개별성을 포착하려는 화가의 열망이 드러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대상의 참된 개별성은 단순히 인간의 개별성이라고는 할 수 없는 독특한 특징들을 마냥 재생산해서 쌓아올린다고 해서 도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경험에 대한 묘사는 명확성이라는 과학적 표준을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p153. 짐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술의 본성이 완전하고 철저하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우주의 구성을 목표로 삼고 있다면, 역사적으로 주어진 예술의 모든 형식은 이 목적에 단지 부분적으로만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요. 역사적으로 유한한 그 어떤 예술 형식도 세계의 총체성을 포괄할 수는 없다는 거죠. 은유는 사유의 좋은 요소입니다. 은유는 의도와 수행 사이의 변증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면서, 결국 그것이 드러낸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p155. 스파드는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개념 성장의 은유적 뿌리>

(안나 스파드가 바우만 딸이었다니!)

 

소리가 음악을 구성하는 요소이듯 언어는 개념 형성을 위한 구성요소이다. 언어는 단순히 이미 만들어져 있는 이념들을 포착하기 위한 도구라기보다는.....새로운 개념들이 창조되는 수단에 가깝다. 언어는 우리가 각자의 경험을 조직할 때 사용하는 개념적 구조의 전달자이다. 라코프와 존슨이 이미지 도식이라고 부른 것 이외에 우리가 세계를 지각할 수 있는 수단은 없다. 우리는 언어를 하나의 맥락에서 또 다른 맥락으로 옮겨 놓을 때, 언어-의존적이고 구조에 의해 강요되는 이미지 도식을 수행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은유에 대한 최신의 연구가 도달한 가장 중요한 메시지에 따르면 언어, 지각, 지식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p160.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는 그의 책 <역사: 최후 이전의 최후의 것들>에서, “편협한 안전전 세계적인 혼란으로 향한 길을 제공한다고 지적했습니다.

 

크라카우어는 분명하게 고정된 모든 것을 공포스러워했던 에라스무스를 칭송합니다. 에라스무스는 진리가 도그마가 되는 순간 더 이상 진리일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크라카우어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서로 경합하는 여러 원인들 가운데 어떤 것도 논쟁을 끝내는 결정적인 것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가능하다면 궁극 원인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서 궁극 원인 개념 자체를 폐기할 수 있는 사유와 삶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고요.

 

p165. 시간이 흐르면서 현대성은 전설 속 프로테우스처럼 그 모습을 바꿉니다. 얼마 전까지 포스트모더니티라고 호칭되었던 것, 그래서 제가 그 핵심을 집어 유동적인 현대성이라고 부르기로 한 것은, 변화야말로 유일한 영원성이며 불확실성이야말로 유일한 확실성이라는 확신이 커졌기 때문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저는 단단함유동성을 이분법적인 어려운 수수께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 이 두 가지 조건은 서로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는, 변증법적 동맹의 쌍이라고 간주합니다. (장 프랑스와 리오타르가 포스트모던해지지 않고서는 현대적일 수 없다고 했을 때는 아마도 이런 종류의 동맹을 염두에 두었을 겁니다.) 단단한 사물이나 상태를 추구하면 역으로 움직임이 유발되고 유동적인 상태에 빠지게 되는 일이 흔하지요. 유동성은 단단함의 적이 아니라 단단함을 추구했기에 나타난 결과입니다. 단단함 추구가 없었더라면 유동성도 태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p168. 파우스트는 아름다운 순간을 정지시켜 영원히 그 순간에 머무르고자 했다가 지옥에 대한 엄청난 공포에 사로잡혔지요. 사르트르는 이러한 공포를 추적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끈적끈적한 물체를 만졌을 때의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적대감까지 추적했지요. 사르트르가 이러한 공포는 증상적으로 보자면 인간이 유동적인 현대의 문턱에 들어섰기에 느끼는 공포라고 설명될 수 있습니다.

 

p174. 하지만 어떤 단어들은....아주 즙이 풍부한 단어들이 있는데요. 이러한 단어들은 듣는 사람의 상상력에 호소하면서 어떤 이미지를 환기시키고 자극합니다.

 

p175. 현대적 정신의 탄생의 고통에 대한 날카로운 아포리즘을 남겼던 리히텐베르크는 오래전에 이러한 곤경을 예견한 바 있습니다. 이미지가 인간의 세계에서 홍수를 이루기 시작해 인간간의 언어 능력이 익사 상태가 되었다고요. “단어 속에서 감각이 표현되는 것은 단어 속에서 표현된 음악과도 같다. 우리가 사용하는 표현은 표현되어야 하는 사물과 충분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를 원하는 시인은 독자를 곧장 그림으로, 그림으로 표현되는 사물로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그려진 풍경은 즉각적인 기쁨을 제공하지만, 시로 표현되는 풍경은 우선 독자들 각자의 머릿속에 그려져야만 한다.”

 

p177. 사회학자가 대화를 나누면서 수행해야 하는 이중의 역할이 있습니다. 사회학은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고, 익숙하지 않은 것을 익숙하도록 해야 하죠. 사회학자가 이 두 가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각자 알아서 수행하도록 기대 또는 강요되는 직면한 과제에서, 각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요인이 무엇이고 종속시키고 있는 요인이 무엇인지를 알아채고 명료하게 드러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염두에 두고 있는 대화는 매우 어려운 기술입니다. 이 대화는 논쟁에서 이기거나 자신의 관점을 관철시키기보다는 문제를 명료하게 만드는 데 상대방도 동참하도록 이끄는 것을 포함합니다. 대화에 참여하는 목소리를 줄이지 않고 오히려 다양화하는 것, 모든 대안을 경시하지 않고 가능성 있는 결과를 확장시키는 것, 대안적 관점을 꺽어버리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고 다함께 이해를 추구하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전적으로 대화를 지속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고무되어야 합니다.

 

p183. 프리드리히 빌헬름 셸링은 시작이 마무리될 때 회고적 충격이 될 것 이라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시작은 마지막 지점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언제나 분명하지 않지요. 시작 이전에 있었던 것들은 언제나 시작의 결과를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셸링의 이러한 주장에, ‘분명하지 않은 것드러냄은 단 한 번의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원칙상 영원한 과정이라는 점을 덧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본래의 뜻과는 모순되게 과거의 내용은 지속적으로 재평가되고 재편됩니다.

 

p184. 아주 오랫동안 저는 프로이트의 견해를 따라, ‘문명이란 일종의 대립되는 요소들 사이의 타협 과정이라고 여러 차례 주장해왔습니다.

 

p186. 역사의 진행이 보여주는 진자운동과 유사한궤적 때문에, ‘앞으로 가는 것뒤로 가는 것혹은 유토피아노스탤지아사이에는 사실상 혼동을 불가피하게 배태하고 있는 밀접한 유사성이 있습니다.

 

p202. 한나 아렌트는 사유는 인간의 행위 가운데 가장 고독한 것이라는 말을 꺼낸 적 있는데요, 개인적 경험에서도 저도 그러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p206. 어떤 질문에 대해 긍정적인 대답이든 부정적인 대답이든 양자 모두는 서로 반대되는 상대방 주장의 설득력을 꺽을 수 있을 정도로 설득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철학의 방법이지요. 이러한 능력에 관한 바츨라프 하벨만큼 좋은 사례는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하벨은 생각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키는 뛰어난 기술의 소유자였습니다. 미래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어떤 노래를 부르게 될지 알아야 한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또한, 어느 누구도 국민들이 그 다음해에 어던 종류의 노래를 기꺼이 부르려 할지 미리 말할 수 없다고 정확하게 덧붙이기도 하였죠.

 

p207. 리얼리티와 그 리얼리티에 대한 지각 사이의 긴밀한 연관은 단지 가정이 아니라 인간 실존 조건의 불가피한 속성입니다. 만약 당신이 하이데거의 용어를 선호한다면, ‘세계 존재라는 인간의 특별한 양태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요. 우리는 체험된 세계인 생활 세계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활 세계는 인식론뿐만 아니라 존재론, 리얼리티와 리얼리티에 대한 지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문제가 되고 있는 쟁점은 세계에 대한 지각의 변화, 그리고 이를 통해 리얼리티 속에서 원하는 변화를 유발할 수 있는 실현 가능성으로 압축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세계에 대한 지각을 변화시킴으로써 리얼리티를 변화시키는 것이지요.

 

다시 하이데거의 용어를 사용한다면,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단편들이 수중에zuhanden 있는 상태에서 눈앞에vorhanden 있는 상태로 바뀜으로써 목적 지향적인 행위의 대상으로 전환될 수 있는 기회가 높아지는 것이지요. 저는 인간 세계를 통념의 비가시성으로부터 끄집어내어 관심의 초점이 되게 하고, 주목되는 영역이자 의식적 행동의 현장으로 바꾸어놓는 소명을 지닌다고 믿습니다.(통념이란 심사숙고되지 않는 공통의 감각이자 지식이며, 우리는 흔히 사유할 때는 통념을 사용하면서도 통념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사유하지 않지요.) 친숙한 것을 낯설게 하고, 문제되지 않았던 것을 문제로 삼음으로써 말입니다.

 

p211. 우리 시대의 위험을 선구적으로, 그리고 주도적으로 탐색해온 중요한 이론가 울리히 벡이 지적했던 것처럼, 현대성이 시작될 때부터 지식은 개연성의 의미론적 지평 내에서, ‘알지 못함과 혼합되어 있습니다. 벡의 주장에 의하면, 과학의 역사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는 첫 시도인 확률 계산법의 탄생에서 시작했지요. 그 이후 위험이라는 범주를 통해 통제 가능성이라는 오만한 가정의 영향력은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p213. ‘위험이라는 범주는, 자연적인 환경이 무조건적 규칙성에 속박될 수 없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선험적인 투명성과 완전한 예측 가능성이라는 이상과는 달리, 확실성이라는 조건에 보다 근접할 수 있는 가능성은 오히려 축적된 지식의 실천적이고 기술적인 능력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데 있다는 겁니다.

 

p214. 즉 사건들의 개연성이 미리 결정되어 있으며 정밀하게 조사, 탐구, 평가 될 수 있는 세계가 있다는 가정 말이죠. 물론 이러한 가정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음이 분명해졌지만,‘위험 계산이라는 전략은 여전히 매력적인 제안입니다. 하지만 이 매력적인 전략은 완전하고 오류없는 확실성이 가능하다는 약속, 또는 그러한 미래를 예측하거나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주는 정신적 위안으로 전락했습니다.

 

 

조르주 와겐버그는 학자적인 지혜로 오늘날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그의 책 <메두사의 영혼: 세계의 복잡성에 대한 이념>) “방정식의 해결책은 여러 가지로 갈라질 수 있지만 단지 하나의 해결책만이 정확하고, 그것만이 체계의 리얼리티를 반영한다. 문제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아는냐는 것이다. 우연이 그것을 결정한다.....

 

존 그레이는 이미 수 십년 전에 이렇게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주권국가의 정부는 시장이 어떻게 반응할지 미리 알지 못한다...국민국가의 정부들은 1990년대에 멋도 모르고 행동했다.”

 

p220 사회 조직의 형태론에 있어서의 급진적 변동 또한 사영화로 인한 또 다른 결과입니다. 가장 근원적이고 극적인 변화는 생산자 사회로부터 소비자 사회로의 이행입니다. 비판이론은 생산자 사회의 시기에 가장 왕성하고 열정적이며 생산적인 사간을 보냈지요.

 

p221. 오늘날 프레카리아트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개념을 대체하고 있습니다만, 프레카리아트는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박탈되고 강등되고 고통 받고 굴욕당하고 있는 모든 인간을 총칭하는 포괄적인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p224. 경고음이 필요할 때 경고음을 울리는 것은 당연히 지켜야 할 약속입니다. 심지어 그 경고음을 들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말입니다. 위대한 폴란드 사상가이자 시인인 체스와프 미워시가 수십 년 전에 언급했던 말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세계는 부조리의 화신이자 돌아버릴 것 같은 정신의 산물의 모습으로 우리를 후려친다.”

 

하지만 2010년에 정치가로 변신한 베테랑 전사인 스테판 에셀이 93세의 나이에 쓴, 호소문 같은 제목의 <분노하라!>27개 언어로 번역되어 수백만 부가 판매되었습니다. 이 책은 수백만 명의 젊은이들을 비롯해 수많은 스페인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서도록 했지요.

 

p226. 에셀은 자신의 책을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제가 직접 번역해보겠습니다.


 

지금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변화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행성 위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이처럼 많은 황폐함을 본 적이 없다. 파괴는 수세기 동안 지속되고 있다. 대체 언제 끝이 날 것인가? 우리에겐 상상도 할 수 없는 부 바로 곁에 무시무시한 궁핍이 동거하고 있는 상황에 동의할 권리가 없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지난 수십 년간 그랬던 것처럼 테러리즘이 더 번창하도록 허락한다면, 궁지에 몰려 있는 우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이 작은 책은 해결책을 제시해주지는 않는다. 이 책은 경계경보이자 여론에 대한 호소, 양심에 대한 간청이자, 세계의 처지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고 수동성으로부터 벗어나자는 요청이다.

 

p230. 비판이 자기 의제의 최상위에 두어야 하는 것은 인간다움에 대한 존중, 그리고 존중받을 권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사회의 핵심적 관심사에 도달할 기회를 유지하고 싶다면 말입니다. 존중이 부활되지 않는다면 연대가 생겨날 가능성도 없습니다.

 

p231. 타인의 말을 듣고 우리의 말을 타인이 경청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귀 기울여 듣기의 기술을 배워야만 합니다. 우리의 소명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자기확신과 공손한 태도 사이의 균형이 요구됩니다. 또한 용기도 필요하죠. 인간의 경험을 해석하는 사회학자의 작업은 변덕스러운 사람에게는 추천하고 싶은 성격의 삶이 아닙니다.

 

p252. 대중은 항상 옳지는 않다. 대중이 원하는 것 또한 항상 옳지는 않다. 현재 대중이 생각하는 방식 또한 어떤 경우에는 매우 위험할 수 있다. 그렇기에 대중사회학이 취하는, 대중의 수준으로의 하향운동은 적절하지 못하다. 공공의 사회학은 대중의 상향운동을 돕고, 자신도 상승하여 그곳에서 공중으로 변화한 대중과 대화하려는 시도이다. 라이트 밀즈가 핵심을 잘 표현했듯이, 사회학의 쓸모는 대중의 공중으로의 전화를 이뤄낼 때 최종 완성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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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5. 사회학 자체가 자신이 탐색하는 사회세계를 구성하는 부분이 되어야 함을 필사적으로 부인한 결과, 사회학은 자성 능력을 잃어버린다. 사회학이 발견한 사실들은 사소해지고, 전문용어 속으로 이데올로기가 몰래 스며들어 결국은 권력자에게 매력적인 것으로 귀결되고 만다. 사회학이 초래한 이 결과는 헛발질 irrelevance이라는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도 지속되고 사회학도 지속되지만, 사회학과 세계는 좀처럼 만나지 못한다.


 

p16. 사회학에 의한 사회학의 구원은 1950년 대 후반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미국의 사회학자 라이트 밀즈는 사회학과 사회학적 상상력을 구별하면서, 이 둘이 반드시 연결돼 있지는 않음을 보여주었다.

 

p17. 사회학적 상상력은 개인의 삶과 각자의 일대기가 역사적 사건, 그리고 사회의 구조적 과정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이 펼쳐지는 동시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사회학적 상상력의 책무인 것이다. 또한 사회학적 상상력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인간의 삶을 질적으로 변화시키려는 포부를 품고 있다.

 

p19. 당신을 생각으로 이끌거나 혹은 자극하거나, 괴롭게 하거나 미소를 짓게 만드는 어떤 것과 마주쳤다면, 그것이 사회학적 상상력의 성과일 것이다. 무엇인가를 인식하는 데 계속 실패하다가도 돌연 인식의 도약을 경험했다면, 당신은 사회학적 상상력의 성과를 경험한 것이다. 당신이 그들이나 혹은 우리에 과한 무엇인가를 읽으면서 나와 연관되어 있는 무엇을 발견했다면, 당신은 사회학적 상상력의 성과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달성하는 한 사회학은 쓸모가 있다.

 

p20. 반면 정보만을 제공하는 사회학은 쓸모없으며, 사회학이 권력에 팔려간다면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하다. 사회학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연결하고, 자신의 시대가 자기 삶에 미치는 영향을 섬세하게 평가하는 도구로 채택될 경우 성공적이다.

 

P25. Q: 사회학은 인간 경험과의 대화라고 늘 정의해오셨습니다. 이 정의와 관련하여 두 가지 질문이 떠오릅니다. 먼저, 여기서 인간 경험이란 당신에겐 어떤 의미입니까?

 

경험Erfahrung과 체험Erlebnis 모두를 의미합니다. 경험은 우리가 세계와 교류하면서 나에게 생기는 일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체험은 우리가 세계와 조우하는 과정에서 살면서 내가 겪는 일을 의미합니다. 즉 체험은 일어난 일에 대한 지각과, 일어난 일을 흡수하고 이해 가능하게 하려는 노력이 합동으로 빚어낸 산물입니다. 경험은 객관성의 상태를 획득하기 위한 노력이지만 체험은 분명하고 명시적으로 주관적입니다. 경험과 체험이라는 개념을 다소 단순화하면, 경험은 경험의 객관적인 측면으로, 체험은 경험의 주관적인 측면이라고 옮길 수도 있을 겁니다.


 

p29. 라 보에티는 잘 알려진 것처럼 이런 태도를 자발적 복종이라 불렀지요. 하지만 존 쿳시의 소설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의 등장인물인 C는 라 보에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합니다. “자발적 복종과 이 복종에 대한 반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요즘 수많은 사람들이 선택하고 있는 제 3의 길도 있다. 그것은 무저항, 일부러 세상과 멀어지기, 내면으로의 이민이라는 길이다.”

 

P30 사회학적대화는 무저항을 지지하는 이러한 세계관을 문제 삼습니다.

 

P34. 사회학이 불가피하게 정치적인 것처럼, 사회학은 또한 윤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윤리적 실천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요, 윤리란 곧 실천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윤리성은 타자를 향한 책임성에 관한 문제이지요.

 

P35. 책임이란, 회피가 가능한 상황에서도 기꺼이 떠맡는 것임을 확실하게 합시다..사회학자는 좋든 싫든, 의도했든 아니든 상관없이, 자신의 직업 활동을 수행하는 동안 윤리 의식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야 한다고요. 그래야만 윤리적 태도가 당연하다고 여겨지고, 또한 타자를 책임질 기회도 늘어나겠지요. 우리는 가능한 범위까지 이 기회를 늘려야 합니다.......사회학자는 이 길을 탐색하고, 지도를 그려내야 합니다. 사회학자의 임무는 그것입니다.



 

P37.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에서 쿳시의 또 다른 성찰을 상기해보겠습니다. 르네 지라르의 싸우는 쌍둥이에 관한 우화에서 영감을 받은 쿳시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 두 집단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적을수록, 그들은 더욱 심하게 서로를 증오한다.”

 

P39. <커튼>이라는 책에서 밀란 쿤데라는 세르반테스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전설로 짜인 한 마법의 커튼이 세계 앞에 걸려 있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가 여행을 떠나게 하여 그 커튼을 찢도록 하였다.” 쿤데라는 예단Pre- judgement’이라는 커튼을 찢는 행위가 현대 예술이 탄생하는 순간임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싶어 했습니다. 현대 예술은 이러한 파괴적 제스처를 끝없이 반복해왔지요. 이 반복을 힘들다 하더라도 무한히 행해져야 하는데, 마법의 커튼은 찢기는 즉시 뒷면에 조각을 덧붙이기 때문입니다.




 

p40. 그는 사전해석preinterpretation의 커튼에 덧대어져 있는 진리를 단순히 모방하지 않고 커튼을 찢어버리는 세르반테스와 같은 용기를 보여주었다는 것이지요.

 

예단의 커튼에 구멍 내기는 끝없는 재해석이라는 노고를 요구합니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를 면밀히 조사하여 있는 그대로의 희극적 산문 속에서그 모습을 드러내고, 인간의 새로운 가능성을 어둠으로부터 퍼 올리는 것, 그리하여 사실상 인간의 자유 영역을 확장하고 이 모든 노력을 자유로운 인간성을 구성하는 행위로 드러내는 것과 같은 끝없는 노고 말입니다. 이런 일을 해냈느냐 혹은 실패했느냐에 따라 사회학이 판단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p42. 당신은 특히 오노레 드 발자크, 에밀 졸라, 막스 프리쉬, 사뮈엘 베케트 등에 대해 자주 언급하셨습니다. 또 언젠가 당신은, 만약 사막의 섬에 고립되게 된다면 소설책을 갖고 가기를 원한다고 하시면서, 로베르트 무질, 조르주 페렉,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예로 들었습니다. .....사회학자가 되는 동안 이 작가들의 어떤 점이 당신을 매료시켰나요? 또한 그들은 당신의 사유 방식과 사회학에 어떤 영향을 주었습니까?

 

실제의 세상살이에 대한 진리를 추구한다면, 카프카, 무질, 보르헤스, 페렉, 쿤데라, 미셀 우엘벡 등으로부터 힌트를 얻는 것 외에 좋은 방법을 선택할 수 없을 겁니다.

 

p45. 어떤 명칭을 선택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선험적으로 편견을 갖고 있는 것임을 상기해보십시오...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던 경험(‘나에게 일어난 일’, 즉 사건의 객관화될 수 있는 측면과 체험(사건이나 상태의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반향이자 주관적측면)같은 독일어 개념들 말입니다. 사회학담론에서 흔히 경험과 체험의 구별 부재는 인간 리얼리티에서 생긴 일, 체험된리얼리티를 단순 경험의 조사로 축소시키는 경향을 낳습니다. 그리하여 리얼리티에 대한 이해가 저하되고, 리얼리티의 구체적인 제시도 일그러집니다.


 

p46. 이탈로 칼비노는 <문학의 쓸모>라는 책에서, 픽션 속의 다양한 리얼리티의 차원이라는 개념을 제안했습니다. ‘진리의 다른 의미나 리얼리티와의 조우를 픽션 작품에서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하지만 정말 픽션에도 진리가 있는 것일까요?

 

그보다는 유일신교와 다신교, 혹은 하나의 진리와 복수의 진리라는 의미론적 영역이 보다 적절하고 적합해 보입니다. 아니면 고정되어 있는 진리와 고정되어 있지 않은 진리의 문제로 생각하면 어떨까요? 꽉 끼는 보호장비와 느슨한 보호장비, 하지만 무기력하기는 마찬가지인 보호 장비의 대조는 어떤가요? 쿤데라의 설명을 빌려온다면, 커튼을 짜서 리얼리티 앞에 드리우는 것과 커튼을 찢고 통과하는 것과의 차이도 괜찮겠습니다.

 

p50. 이 두 사례가 보여주는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은 흔히 데카르트의 오류라고 알려진 부수효과입니다. 데카르트의 오류는 연구자는 주체의 위치를, 연구 대상은 객체의 위치를 지닌다고 암묵적으로 전제합니다. 하지만 즈미예프스키와 메이오의 실험에서 연구 대상들이 실험적인 게임의 공동 참여자임을 알아채는 순간, 그 전제의 가면은 벗겨지고 일축됩니다. 그들은 게임에 매우 중요한 공적인 의미가 부여 되어 있다는 암시에 부합하기 위해, 돌연 자신들의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책임감 있게 게임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고, 자신들에게 어떤 역할이 부여되어 있든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p53. 사회학은 사회의 리얼리티에 대한 지각을 자크 데리다 식으로 지속적으로 해체하는 일을 수행하는 한 비판적 활동입니다. 혹은 리처드 로티가 정의했듯이 지속적인 캠페인의 정치를 수행한다고도 할 수 있지요.

 

p54. 사회학은 사회의 현재 모습이 충분히 긍정적이지 않다고 자각하고 있기에 지속적인 개선을 동경하게 됩니다.

 

유동적인 현재적 삶에서 대두되는 문제들은 끊임없이 해석에 굶주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비판사회이론일 필요하지 않을까요? 삶이란 현존하는 리얼리티를 지속적으로 비판하면서도, 그 리얼리티를 끊임없이 그리고 동시에 대량으로 잉태하는 것 외에 또 무엇이겠습니까? 비판 없이는 삶에 대한 어떠한 성찰도 시작될 수 없겠지요.

 

p56. 왜 변신론이죠? 왜 라이프니츠의 방법으로 되돌아가려는 건가요? ..변신론은 우리가 살아가는 있는 그대로의 바로 이 세계가, ‘가능한 세계중에서는 그나마 최선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의 무지와 몰이해 때문에 창궐하는 악과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이 명백히 모순처럼 보이지만, 전능하고 박애적인 신이 통치한다고 인정된 세계에서도 악의 존재는 세계의 완성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 변신론입니다.

 

팡글로스는 마거릿 대처의 신념인 TINA(There Is No Aternative)의 선구자이자 창시자이며 또한 그 이상의 영감을 준 인물이지요.

 

범사가 달리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어요.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하나의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지라,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최선의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에요. 코가 안경을 지탱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하세요. 그리하여 우리에겐 안경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두 다리는 분명 바지를 입도록 고안되었고, 그래서 우리에게는 바지가 있습니다. 돌은 큰 조각으로 잘려 성들을 짓는 데 사용되기 위하여 형성되었고, 따라서 각하께서는 아름다운 성 하나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 지방에서 가장 위대하신 남작께서는 가장 훌륭한 거처에 사셔야 합니다. ”

 

사회학은 변신론에게 농담과 재담만을 던질 뿐 그것과 단호하게 대립합니다.

 

P58. 사회학은 좋든 싫든, 대중이 필연성이나 자연적 질서라고 믿고 있는 기반을 무너뜨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대중적 신념이 구성되고 지속되는 데 영향을 미치는 비합리성을 폭로해야 하는 거죠. 사회학은 규칙과 규범의 뒤에 숨어 있는 돌발 사태와 단지 타자의 희생을 전제로 선택된 한 가지 가능성만 있다는 주장 주변에 넘쳐나는 다른 대안들을 들춰내야 합니다. 쿤데라의 알레고리를 빌려온다면, 사회학의 소명은, 재현으로 위장하고 리얼리티를 감추기 위해 드리워져 있는 커튼을 찢는 것입니다.

 

아도르노가 지속적으로 강조했듯이, 사회학이 간결하고 정밀한 설명을 추구할 때는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P61. 사회학을 수립한 창립자세 명은 사회학이라는 새로운 분과학문에 대해 서로 다른 야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에밀 뒤르켐은 사회학자가 탐구하는 리얼리티도 기성아카데미의 분과학문이 탐구하는 리얼리티의 기준을 만족시켜야 한다고 단언했습니다.

반면 막스 베버는 사회학이 탐구하는 리얼리티의 특수성을 인정했습니다.


 

게오르그 짐멜은 두르켐과 베버의 입장에 대한 모호한 지지를 피하려 했습니다. 짐멜은 이른바 ‘2차 해석학이나 ‘2단계 해석학이라 할 수 있는 상식과의 대화에 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 해석되어왔던 것을 재해석하고 인간의 생활세계Lebenswelt, 즉 체험된 세계를 채우고 있는 요소들을 구성하는 보편적이고 유일한 방식을 해석하는 것이지요. 1차 해석과 2차 해석은 끊임없는 탄생의 과정입니다. 그렇기에 해석의 결과는 일시적인 안정일 뿐입니다. 이러한 영속적인 위기상태야말로 사회학에게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서식 환경입니다.

 

p67. 저는 밀즈가 구체화했던 개인의 일대기역사를 함께 엮으려는 사회학자의 임무를, ‘사회학적 해석학을 수행하면서 완수하려 노력합니다. 사회학적 해석학은 인간의 행동을 상황 속에서의 도전(객관적 요소)과 삶의 전략(주관적 요소) 사이의 상호작용이자 상호교환으로 해석하려는 시도입니다.

 

적지 않은 사회학자들이, 마법사의 돌을 찾는 연금술사처럼 열정적으로 알고리즘을 찾다가 결국 허무에 빠졌어요. 저는 그보다는 발견적 충고, 권유나 가이드라인이 지닌 본래적 특성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p73. 정말 나는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왜 사회학이 내게 그토록 소중한지를 확실히 설명 할 수 없습니다. 다만 나는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사는 것을 배우지 못했으며, 만약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산다면 호기심을 상실하게 될 것 같습니다.

 

p76. 에이브러햄 매슬로가 신랄하게 지적했던 것처럼, 과학은 창조적이지 못한 사람들이 창조적인 작업에 합류하도록 허락하는 신기한 장치입니다.

 

p78. 우리 세대는 역사의 대리인 historical agent’이 천천히, 그렇지만 무자비하게 해체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이야기한 행위의 규칙에 따르면, ’역사의 대리인유기적인표준 집단을 꿈꿔온 지식인들이 염두에 두고 있던 존재로서, 자유와 평등과 형제애의 땅을 향한 길고 긴 행진 끝에 최종적으로는 사회주의적 목표에까지 도달하도록 인류를 인도하는 존재입니다.

 

p82. 베른슈타인은 화해를 지향하는 개량주의의 창시자로서, 페이비언주의자들로부터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지요. 베른슈타인의 개량주의는 사회주의적 가치와 의도를 자본주의 사회 내의 정치, 경제적 틀 속에서 추구했습니다. 현재의 상태를 단 한 번에 바꾸는 혁명보다는 점진적인 개량을 추구한 것이죠. 레닌의 낙담과 베른슈타인의 낙관적 기대 모두를 증명하는 역사적 사건들이 지속되면서, 죄르지 루차키는 역사의 이와 같은 분명한 저항(마르크스의 애초 예언을 따르지 않는)허위의식이라는 새로운 개념(하지만 결국 동굴 벽에 드리운 플라톤의 그림자를 연상시키는)으로 설명했습니다. 자본주의의 기만적인 총체성이 그러한 허위의식을 은밀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고무시킨다는 것입니다.

 

p

85. 톰슨은 현실의 실천과 결합되지 못한 이론적 실천을, 지식인들이 만들어내는 처녀수태(단성생식)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p88. 저는 이 질문과 직면했던 길고도 철저한 시도로서 아도르노의 저작들을 다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이 질문에 대해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습니다. ‘역사의 대리인에 대한 영국 지식인들의 열정이 무미건조해지기 훨씬 이전에, 아도르노는 그의 오랜 친구인 발터 베냐민에게서 그가 브레히트적 모티프라고 이름 붙인 경향을 발견하고는 이를 비판했습니다.

 

브레히트적 모티프란 노동자들이 아우라 상실 위기에 처한 예술을 구원하리라는, 또는 혁명 예술과 결합한 직접적인 미적 효과가 노동자들을 구원하리라는 기대를 일컫습니다.

그리고나서 그는 마지막 일침을 가합니다. “우리가 늘 그래왔듯이, 우리가 혁명을 필요로 했기에 그 필요성을 프롤레타리아트의 덕목으로 만든 것은 아닌지경계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아도르노는 오히려 반대의 사례를 지적했습니다. 사회적 악이 유해하게 지속되고 있음은 우리가 더욱 열심히 시도해야 할 보다 분명하고 강력한 근거가 된다고요.

 

아도르노의 견해에 따르면, 이러한 자기 학대적인 격리는 배신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또한 포기했다는 신호도 아니며 겸손의 제스처도 아닙니다. 이것은 또한 의사소통을 멈추겠다는 의도도 아닙니다. 인간 해방의 전망에 대한 진실을 훼손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결의일 뿐입니다. 이러한 거리두기는 역설적으로 앙가주망의 행위이기도 합니다.

 

p93. 그리하여 아도르노는 병 속에 든 메시지라는 의사소통 전략을 제안합니다. ‘병 속에 든 메시지는 두 가지 전제를 함축하는 은유입니다. 첫 번째로 이 은유는, 기록될 필요가 있는 메시지가 있고 병에 담아 멀리 보낼 가치가 있는 고민거리가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두 번째로는 언젠가 병 속에 든 메시지가 발견되었을 때, 그때에도 그 메시지가 여전히 가치가 있을 것을 전제로 합니다.

 

정해지지 않은 미래의 알 수 없는 독자에게 메시지를 위탁하는 이 같은 전략은, 동시대인들이 메시지를 들으려 하지 않거나 들을 준비도 되어 있지 않고, 설사 메시지를 들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간직하거나 유지하려 하지 않기에 선택된 것입니다. 이렇듯 메시지를 어딘지 모르는 장소와 시간으로 보내는 것은, 그 메시지가 현재의 무시를 견디고 살아남아 메시지의 잠재성을 잃지 않으리라는 희망에 의존합니다.

 

병 속에 든 메시지, 실패는 일시적이지만 희망은 지속적이라는 증명입니다. 또한 가능성은 파괴될 수 없으며 가능성의 실현을 방해하는 역경은 단단하지 않다는 증명입니다. 아도르노의 표현 속에서 비판이론은 바로 이에 대한 증명이며, ‘병 속에 든 메시지라는 은유를 정당화해줍니다.

 


p95. 부르디외는 마지막 저작인 <세계의 비참>의 후기에서 이렇게 지적합니다. 정치판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유권자들의 기대와 요구를 아주 빠르게 파악하고 구체화하지만, 그럼에도 정치영역은 비밀스럽게만 보이고 폐쇄적이 되려고 한다고 말이죠. 그러나 정치 영역은 다시 개방되어야 합니다.

 

p96. 곰곰이 생각해보면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심지어 살기 힘들도록 만드는 매커니즘을 인식한다고 해서 노력이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모순이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해서 모순이 해결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이지요. 문제의 근원을 인식하는 것과 문제를 박멸하는 것 사이에는 매우 길고 복잡한 길이 뻗어 있습니다.

 

첫 발걸음을 내디뎌야만 궤도 수정으로 가는 길을 알아내고 개척할 수 있을 테니까요. 우리는 실로 부르디외의 명령을 기억하고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실행해야 합니다. “자신의 삶을 사회세계의 연구에 바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한 사람은 그 세계의 미래가 걸려 있는 투쟁에 중립적이거나 무관심할 수 없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p98. 저는 제가 수행하는 종류의 사회학을 사회학적 해석학이라 부릅니다. 사회학적 해석학은, 우리가 처한 곳에서 사회적으로 형성된 상황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삶의 전략을 구성하는 인간의 선택을 해석합니다.

 

p99. 사회학적 해석학은 사회학적 수단으로 인간의 리얼리티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요청입니다.

 

p100. 사회학적 해석학은 통계적 코드화에 집요하게 저항해가는 과정입니다. 사회학적 해석학은, 저장하기 좋도록 연구 대상을 알고리즘 법칙을 구성하는 유한수로 환원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이러한 환원은 통상 망설임이나 죄책감도 없이 이루어지곤 하지요. 책임감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니까요.

 

P104. 사회학의 소명은 명백하게 변화하고 있는 세계에 방향 설정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사회학은 이러한 소명을, 변화를 철저하게 추적하고 그 결과뿐만 아니라 변화가 요구하는 적합한 삶의 전략들을 꼼꼼히 분석할 때 완수할 수 있습니다.

 


P107. 이에 대해 시배스천 폭스는 <폭스가 픽션에 대해 말하다>에서, 이를테면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작가의 삶과 작품의 관계는 논평이 금지되기는커녕 토론의 중요한 영역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분수령과도 같은 변화가 추측과 가십으로 향한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고 덧붙였습니다. “모든 예술작품이 작가의 개인적인 성격을 표현한다는 가정에 따라, 전기적 비평은 창작의 행위를 쇼로 환원시켜 놓았다는 거죠. 저커버그는 지난 20년 동안 이러한 신의 계시를 받은 유일한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P111. 유명인이 되었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라, 유명인들이 제공하는 것이 무엇이냐가 문제입니다. 저는 유명인에 대한 대니얼 부어스틴의 정의를 따르고 싶은데요. 그는 유명인이란, 유명하기 때문에 유명한 사람이라 정의했죠. 유명인이 실제로 무엇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20~30여 년 전에 저는 사회학적 전문용어의 사용을 아예 그만두었습니다. 그것은 사회학으로의 진입을 가능한 한 폐쇄적으로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지요. 사회학적 전문용어는 의사소통을 붕괴시키고 경계를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사회학이 중요한 것이 되고 싶다면 사람들에게 그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P113. 유명인처럼 보이는 것과 사람들이 귀 담아 듣는 유명인을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유명인은 잘 알려지기는 했지만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레지스 드브레의 미디어크라시라는 개념은 유명인의 두 가지 경우 중 후자는 감추고 오직 전자만을 장려하는 경향을 지칭하는 데 아주 유용한 개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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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3-07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꼼꼼한 발췌.. ^^

시이소오 2016-03-07 18:59   좋아요 0 | URL
ㅋ 감사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16-03-07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회학적 상상력... 저도 아주 근간 읽은 책이라 몹시 반갑습니다. ^^

시이소오 2016-03-07 22:17   좋아요 0 | URL
앗, 그러셨어요 ? 저도 반갑네요. 북다이제스터님 서재탐방하러 가야겠어요^^

syo 2016-03-08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지어 저는 어제 사회학적 상상력 다 읽고 지금 사회학의 쓸모 읽는 중인데, 책 안 읽고 이 포스트만 읽어도 될 뻔 했습니다.*_*

시이소오 2016-03-08 01:20   좋아요 0 | URL
ㅋ 직접 읽으셔야죠 ^*^

비로그인 2016-03-08 0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회학과 세계는 좀처럼 만나지 못한다는 이 구절~ 우울해지려고 하네요. ;^^

시이소오 2016-03-08 08:50   좋아요 0 | URL
그래도 만날 수 있는 희망이 있어요. 우울해하지 마시길 ^^;;

그루터기 2016-08-12 0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최근에 사회학입문서로 <나를위한 사회학>이란 책이 나왔던데요. 일본의 사회학 교수가 일상의 사회학에 대해서 쓴 책이였습니다. 이 책도 추천드리고 싶네요~^^

시이소오 2016-08-12 09:48   좋아요 0 | URL
오, 감사합니다. 읽어봐야 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