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밥 하는 마음


 내 어머니를 뵈러 찾아가든, 옆지기 어머님을 뵈러 찾아가든, 언제나 밥 대접을 받습니다. 우리가 두 어머니한테 밥 대접을 해 드리고 싶으나 좀처럼 이런 자리를 마련하기 힘듭니다.

 우리 딸아이가 무럭무럭 자란 뒤를 헤아려 봅니다. 우리 딸아이가 스물이 되고 서른이 된다면 나와 옆지기는 쉰을 넘고 예순을 넘겠지요. 이때에 딸아이가 밥을 차려 주겠다 할 때에 나나 옆지기는 어떻게 마주할까 궁금합니다. 가만히 앉아 넙죽 받아먹기만 하려나요. 아니면, 아버지와 어머니로서 아이한테 밥을 차려 줄까요. 두 할머니가 앞으로 스무 해나 서른 해 뒤까지 튼튼히 살아가신다 하면 어떻게 하실는지 궁금합니다. 나이를 많이 자셨으니 조용히 밥상을 받으실는지, 나이가 많으신데에도 어찌 귀여운 손녀한테 밥상을 받느냐며 당신이 차리실는지요.

 두 어머니는 두 아이한테 늘 새로 한 밥을 차리고 새로 한 반찬을 내놓습니다. 해 놓은 밥이건 식은 밥이건 도무지 내놓지 않습니다. 먹던 반찬 또한 되도록 내놓지 않습니다. 그냥 손쉽게 주셔도 되건만, 또는 우리가 알아서 차리면 되는데, 두 어머니는 당신 몸을 움직이고 당신 손을 놀립니다.

 아침마다 아이가 먹을 새밥을 합니다. 아침에 몸이 몹시 고단하여 새밥을 못한다면 낮이나 저녁에 새밥을 합니다. 하루에 한 번만 새밥을 합니다. 두 번 새밥을 하고 싶으나 아이가 아직 밥을 조금만 먹기에 밥을 두 번 하기 힘듭니다. 나중에 씩씩하게 커서 밥을 꽤 먹는다면, 아이랑 아빠가 먹을 밥을 하루에 두 번 할 날을 맞이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 여느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이 되면 아이가 잘 안 먹어 밥이 조금 남기 일쑤입니다. 이 밥은 고스란히 이듬날로 넘어갑니다. 아이가 배고프면 먹으라고 밥상에 이 밥을 그대로 놓습니다. 이듬날이 됩니다. 새밥을 합니다. 새밥 냄새가 구수합니다(아이한테도 구수할는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구수하다고 느껴 주기를 빌지만 참말 모를 일입니다). 아이 밥그릇에 있던 헌밥은 아빠 밥그릇으로 옮깁니다. 아이 밥그릇은 깨끗이 씻어 물기를 닦은 다음 새밥을 담습니다. 이러면서 떠올립니다. 아하, 두 어머니가 당신 두 아이한테 새밥을 굳이 차리는 마음이란 내가 내 아이한테 노상 새밥을 해서 가장 먼저 떠서 주는 마음이랑 똑같다고. 책을 새로 써낼 때 서양사람은 으레 당신 아이라든지 옆지기라든지 어머니한테 바친다는 말을 거의 빠짐없이 적어 놓는데, 이 마음도 새밥 하는 마음이랑 고스란히 이어지겠다고. (4343.10.25.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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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화와 글쓰기


 옆지기 어머님이 전화를 했다. 오늘 갑자기 바람 몹시 불며 날이 썰렁해졌는데 우리 식구들 시골집에서 잘 지내느냐고 물으신다. 어머님 지내시는 집은 들판이라 바람이 많이 분다고 한다. 트인 들판이니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우리 시골집보다 훨씬 춥다고 느끼리라 생각한다. 아이 엄마랑 아이는 일찌감치 곯아떨어져서 내가 전화를 받으며 고맙다고 말씀드린다. 전화를 받는 내내, 또 전화를 끊고 나서 곰곰이 곱씹는다. 제대로 따진다면, 날씨가 이렇게 갑작스레 추워질 때에는 아들(이나 사위) 되는 사람이 먼저 ‘잘 지내시느냐?’ 하는 인사를 두 어머니한테 따로따로 전화로 여쭈어야 할 노릇이 아니었는가. 돌이켜보면, 날씨를 여쭙는 인사이든 살림을 여쭙는 인사이든 제대로 챙긴 적이 없지 않느냐 싶다. 집식구한테 알뜰히 한다고 느끼지 못하지만, 집식구한테뿐 아니라 바깥식구한테조차 살뜰히 못한다고 느낀다.

 부끄러우니까 글을 끄적인다. 두 시간쯤 앞서 곯아떨어진 집식구와 마찬가지로 나도 일찍 곯아떨어지고 싶으나, 홀가분한 저녁때에 글 한 줄이나마 적바림하고 싶어 아직 잠을 미룬다. 그러나 정작 홀가분한 저녁때를 맞이하니 글이 나오지 않는다. 불을 켤 수 없어 책을 읽지도 못한다. 억지로 볼펜을 쥔들 셈틀을 켠들 글을 쥐어짤 수 있겠나. 아이가 기저귀에 오줌을 눈 듯하다. 아이 기저귀를 갈고 나도 드러누워야겠다.

 아이 기저귀를 갈았다. 기저귀를 갈며 다리 쭉쭉이를 하니 아이 키가 또 제법 자란 듯 싶다. 날마다 아이를 보면서 아이가 조금씩 키가 자란다고 느끼기는 하는데, 이렇게 쭉쭉이를 해 보면 훨씬 잘 느낄 수 있다. 오늘 낮과 저녁, 아이가 졸음에 겨워 일부러 짓궂게(아이는 짓궂은 줄을 모르리라) 아빠 책을 마구 끄집어 내며 어지럽힐 때에 “그러면 안 되지.” 하고 말하니 “그러며 아 대지.” 하고 따라한다. “제자리에 꽂아 놔.” 하고 말하면 “지자리에 꼬아 나.” 하고 따라한다. 아, 이렇게 쏙쏙 받아먹는 아이를 어떻게 꾸짖을 수 있으랴. 이처럼 하나하나 제 엄마 아빠를 배우며 크고자 하는 아이 앞에서 어찌 이맛살을 찌푸릴 수 있으랴. 더 느긋하게 살아가며 더 차분하게 책을 사귀고 더 조용히 글을 쓰는 가운데 더 착하게 마음을 추슬러야 한다고 다짐한다. (4343.10.25.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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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가 글을 쓰는 사이 아이가 슬슬 옆으로 와서 뭔가를 무너뜨리는 소리를 내더니 조용하다. 뭐를 하다 싶어 슬쩍 돌아보니, 아빠가 헌책방마실을 하고 난 다음 아직 갈무리를 못해서 쌓아 두었다가 이제야 비로소 스캐너로 긁으려고 한 책들을 제 앉음높이에 맞게 쓰러뜨리고는 앉아 있다.

- 2010.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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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목집 골목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해마다 똑같이 피고 지는 일이란 없다. 올 오월에는 이 꽃을 보았다면 다음 2011년 오월에는 어떤 꽃을 마주할 수 있을까.

- 2010.5.7. 인천 중구 율목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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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고양이 연구 파랑새 그림책 69
이자와 마사코 지음, 히라이데 마모루 그림, 이예린 옮김 / 파랑새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고양이 삶을 들여다보면 즐겁다
 [즐기는 그림책 24] 이자와 마사코·히라이데 마모루, 《도둑고양이 연구》(파랑새,2008)



 아이가 어릴 적부터 “돼지야.” 하고 불렀습니다. 이제 아이는 아빠가 “벼리는 돼지지.” 하면 “대지지.” 하고 따라합니다. ‘돼지’가 무엇이고, 돼지라 일컬을 때에는 무슨 뜻인지는 읽지 못하지만, 소리를 고스란히 따라합니다(아직 ‘돼·지’라고 또박또박 말하지 못하지만). 나중에 아이가 커서 저를 가리켜 돼지라 말한 줄 안다면, 아이는 좋아할까요 싫어할까요. 아마, 다른 사람이 나를 보면서 “당신은 돼지야.” 하고 말할 때에 나는 어떤 느낌일까 하고 헤아린다면 아이 마음을 살필 수 있는지 모릅니다.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누군가 나를 두고 “넌 돼지네.” 하고 말한다면 어떠한 느낌일는지. 돼지, 돼지, 돼지. 음, 돼지를 키우거나 곁에서 지켜본 분이라면 알 텐데, 돼지는 참 귀엽습니다. 착하고 어여쁩니다. 심술돼지 아닌 사랑돼지라고 할까요. 어쩐지 돼지라는 이름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돼지라는 짐승이름은 놀림말로 흔히 썼어요. 밥을 많이 먹어도 돼지, 뭘 잘 못해도 돼지, 굼뜬다 할 때에도 돼지 ……, 그야말로 돼지는 못난 사람을 가리키는 이름씨처럼 자리잡은 우리 나라입니다. 이런 흐름이니까 제가 아이를 보며 “요 돼지야!” 할 때에 둘레 사람들이 “아니, 그렇게 예쁜 아이한테 돼지가 뭐예요?” 하고 물을밖에 없습니다.

 그림책 《도둑고양이 연구》를 보며 생각합니다. 이 그림책은 꽤 사랑받은 작품이지만 출판사에서 더는 안 찍습니다. 왜 안 찍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이 책을 다시 내준다면 책이름은 고쳐 주면 좋겠습니다. 일본사람 이자와 마사코 님과 히라이데 마모루 님이 이 책을 1991년에 내놓으며 붙인 이름은 “Let's Follow And Observe A Town Cat!”입니다. 일본사람은 이 그림책에 ‘A Town Cat’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도둑고양이’가 아닌 ‘도시고양이’ 또는 ‘동네고양이’ 또는 ‘마을고양이’ 또는 ‘시골고양이’인 셈입니다.

 그림책 무대를 살피면 자그마한 도시인데 논이 함께 있습니다. 아마 큰도시는 아닐 테며 작은도시조차 아닐 수 있어요. 우리로 치면 읍내이거나 면내에서 고양이를 살핀다 할 만해요. 그러니까 영어로 하자면 ‘A Town Cat’일지라도 한국말로 옮길 때에는 ‘시골고양이’라 해도 어긋나지 않습니다.

 요즈음 흔히 쓰는 말로 고친다면 ‘골목고양이’나 ‘길고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마, ‘골목고양이’나 ‘길고양이’가 가장 어울릴 테고, 이 가운데에서는 ‘골목고양이’가 한결 어울립니다. 그저 길을 다니는 고양이가 아니라, 골목 사이사이를 누비며 살아가는 고양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림책을 내놓은 분은 “여러분은 아프리카 초원이나 아마존 정글에 가야만 동물을 연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동물들만 잘 관찰해도 여러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고양이를 연구할 수도 있어요(2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참말, 이 그림책은 고양이를 찬찬히 살피는 분이 하루 동안 고양이 삶이 어떠한가를 돌아본 이야기를 담습니다. 골목개를 꼼꼼히 살펴도 이와 같은 그림책을 엮을 수 있으며, 하루살이를 하루 내내 살펴도 이처럼 그림책을 엮을 수 있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하루 동안 어찌 지내는가를 살펴도 이러한 그림책을 엮을 수 있습니다.

 문득, 열여섯 해 앞서 일이 떠오릅니다. 인천을 처음 떠나 서울에 있는 대학교를 다니던 때에 동무 하나가 자취방에서 지내는데, 이 녀석 집에 ‘도둑고양이’가 드나들며 밥을 얻어먹었습니다. 동무녀석도, 또다른 동무들도, 저도 으레 ‘도둑고양이’라고 말했습니다. 비쩍 마른 가난한 자취생 집에서 ‘얼마 안 되는 밥’을 얻어먹으니까 이렇게들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고양이를 보며 ‘동네고양이’라거나 ‘길고양이’라거나 ‘골목고양이’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고양이 눈높이가 아닌 사람 눈높이에서 바라보았으니까요. 늘 고양이 눈썰미가 아닌 사람 눈썰미에서 살폈으니까요. 노상 고양이 삶이 아닌 사람 삶에서 곱씹었으니까요.

 《도둑고양이 연구》를 내놓은 분은 “두 시간이 지나고 세 시간이 지나도 나오스케는 계속 자고 있습니다. 해는 점점 서쪽으로 기울어 가는데……. 드디어 나오스케가 일어났어요. 커다란 바위에 멍하니 걸터앉아 있던 나도 나오스케를 따라나섭니다(21쪽).” 하고 이야기를 잇습니다. 글쓴이(와 그린이)는 고양이가 얌전히 잠들어 있을 때에는 가까운 바위에 멍하니 걸터앉아 기다립니다. 고양이가 부시시 일어나 천천히 거닐면 고양이를 좇아 부시시 일어나 한들한들 거닙니다.

 고양이가 밥을 먹으면 지켜보는 사람도 밥을 먹고 싶으나 밥을 먹을 수 없습니다. 고양이를 지켜봐야 하니까요. 고양이가 다시 잠들어 준다면 비로소 밥을 먹겠지요. 그러나 고양이는 좀처럼 잠들어 주지 않습니다. 한참 돌아다니다가 겨우 잠들어 줍니다. 그러고는 다시 일어납니다. 깊은 밤 깨어나 다시금 동네마실을 합니다.

 “나오스케는 논 쪽으로 걸어갑니다. 가다가 뭔가를 보았는지 때때로 냄새를 맡거나 장난을 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고양이처럼 밤에도 잘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불빛이 거의 없는 밤, 좁다란 논둑길을 걸을 때는 조심해야 됩니다 미끄러질 수도 있거든요. 하지만 조용한 밤길이 기분 좋네요(33쪽).” 하고 말하는 글쓴이(와 그린이)입니다. 아무래도 글쓴이(와 그린이)가 살펴본 고양이는 도시 한복판 길고양이가 아닌 작은 시골마을 길고양이었기 때문이라 할 텐데, 깊은 밤에 논둑길을 거니는 고양이를 따라 논둑길을 거닐면 참 싱그럽고 시원합니다. 깊은 밤 달빛에 기대어 논둑길을 걸어 보셔요. 아무 불빛이 없고 어떤 소리도 없는 밤나절 달빛 옆에 반짝반짝 빛나는 별빛을 느끼며 논둑길을 걸어 보셔요.

 도시에서는 너무 힘들겠지요. 도시에서는 꿈조차 못 꾸겠지요. 그래요. 도시에서 살아가는 골목고양이 또한 달빛이랑 별빛을 못 느낍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 누구나 달빛이랑 별빛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스스로 한결 애틋하며 포근하고 너그러운 나날이라 한다면, 이러한 도시에서 밥을 나누어 먹는 골목고양이들 삶 또한 더욱 애틋하며 포근하고 너그러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도시에서 마주하는 비둘기를 놓고 으레 ‘닭둘기’라 하지요? 그런데, 이들 닭둘기는 스스로 좋아 닭둘기가 되었겠습니까. 메마르고 팍팍한 도시에서 살아남자면 어찌할 수 없어요. 평화이니 사랑이니 떠벌이며 수십 수백 마리를 잔뜩 풀어 주어 공원 하늘을 가득 채우도록 하면서 손뼉칠 때는 언제고, 도시에 무슨 애벌레가 있고 풀씨가 있으며 열매가 있다고, 이 비둘기들이 살아가겠습니까. 비둘기도 사랑을 나누고 새끼를 낳고 싶습니다. 비둘기도 어디에서든 오순도순 조용히 살아가고 싶어요. 도시라는 곳은, 그리고 큰도시라는 곳은, 비둘기이든 고양이이든 느긋하며 포근히 지내기 어렵습니다. 이와 함께 사람들 누구나 어깨동무하면서 즐겁고 힘차게 머물기 힘듭니다. 이리하여 우리들은 도시에서 마주하는 고양이를 보면서, 또 시골에서도 흔히 ‘들고양이’이든 ‘길고양이’이든 ‘고샅고양이’이든 ‘골목고양이’이든 이야기하지 못하면서 ‘도둑고양이’라 말해 버리는구나 싶어요. 사람들 스스로 내 이웃 등살을 울궈먹지 않고서는 살아남기 어려운 도시이잖아요. 사람들부터 내 동무 등짝을 후려치며 밟고 올라서지 않고는 살아내기 힘든 한국땅이잖아요.

 고양이는 흙을 좋아합니다. 흙이 없으면 살지 못합니다. 똥을 눌 때에 땅을 파고 눈 다음 흙으로 덮어야 합니다. 고양이는 풀을 좋아합니다. 풀이 없으면 살지 못합니다. 잠을 잘 때에 부드러우며 따사로운 풀숲에 음전히 누워 새근새근 잠듭니다.

 사람은 흙이나 풀을 안 좋아하기 일쑤이고, 생각조차 안 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람들 누구나 흙이랑 풀이랑 없으면 살지 못합니다. 좋아하든 싫어하든 흙이랑 풀이랑 없을 때에 살아남을 사람이란 없습니다. 고양이를 집에서 키우며 ‘가짜 흙’을 마련하여 똥오줌을 누이고 ‘퓰처럼 느낄 폭신한 잠자리’를 마련하여 쓰다듬습니다. 가만히 돌이켜보면 우리들 사람 삶이란 ‘참말 있어야’ 할 무언가를 마련하지 못하거나 누리지 못하면서 ‘거짓으로 만든’ 무언가에 휩싸인 채 목숨만 잇지 않느냐 싶습니다.

 이자와 마사코 님하고 히라이데 마모루 님은 고양이 한 마리를 하루 내내 들여다보면서 즐거움을 듬뿍 느낍니다. 이분들이 고양이 삶이 아닌 사람 삶을 하루 동안 들여다보았다면 무엇을 느낄는지 궁금합니다. 연봉 1억을 받는다는 사람 삶을 하루 동안 들여다본다면 무슨 즐거움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국회의원님이나 선생님이나 군수님 하루 삶을 들여다볼 때에 무슨 재미가 있으려나 궁금합니다. (4343.10.25.달.ㅎㄲㅅㄱ)


― 도둑고양이 연구 (이자와 마사코 글,히라이데 마모루 그림,파랑새 펴냄,2008.2.21./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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