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사랑하는 아이


 글을 쓰는 아빠 곁에는 글을 쓰는 아이가 있습니다. 좋은 책을 알아보며 읽으려 하는 아빠 곁에는 좋은 책을 알아보며 읽으려는 아이가 있습니다. 셈틀을 켜 놓은 책상맡에서 자판을 또각거리는 아빠 곁에는 나란히 셈틀 앞에 앉아 자판을 또각거리고파 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얌전히 앉아 밥을 먹는 아빠 곁에는 얌전히 앉아 밥을 먹으려는 아이가 있을까요. 글쎄, 아이는 밥 먹을 때만큼은 참으로 말을 안 듣지만, 배고픈 때에 맞추어 알맞게 밥을 해서 차려 놓으면, 배가 찰 때까지 얌전히 잘 받아 먹어 줍니다.

 사진을 찍는 아빠 곁에는 함께 사진찍기 놀이를 하고픈 아이가 있습니다. 골목을 거니는 아빠 곁에는 함께 손잡고 골목마실을 하고픈 아이가 있어요.

 아이는 아빠 곁에서 삶을 배웁니다. 아이는 손재주나 말재주나 몸재주를 배우지 않습니다. 아이는 오로지 삶을 배웁니다. 제 아빠가 미운 삶을 일군다면 미운 삶을 배우고야 맙니다. 제 아빠가 고운 말을 사랑한다면 고운 말을 알알이 받아들입니다. 제 아빠가 착한 나날을 보낸다면 아이 또한 시나브로 착한 나날을 보낼 테지요.

 그러나 아이 곁에는 아빠만 있지 않습니다. 아이 곁에는 엄마랑 할머니랑 할아버지랑 이웃이랑 동무가 있습니다. 아이는 아빠 곁에서만 놀지 않습니다. 더 눈길을 끌거나 더 눈길을 사로잡는 데로 쏠리거나 휘둘리거나 휩쓸립니다. 우리 집에서는 텔레비전을 안 보지만, 어느 집에 가거나 어느 밥집에 들어가거나 텔레비전 없는 데가 없습니다. 아이는 텔레비전 켜진 데에서 발길을 떼지 못할 뿐더러, 텔레비전이 있는 집에서는 아빠가 열 번을 부르건 백 번을 부르건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좋은 책을 알아보는 사람은 좋은 넋으로 살아가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좋은 넋으로 일구는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 알쏭달쏭합니다. 좋은 넋으로 좋은 살림을 일구지 않을 때에는 좋은 책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느끼지만, 좋은 넋이란 또 무엇이고 좋은 살림이란 또 무엇이며 좋은 책이란 참말 무엇인지 아리송합니다.

 텔레비전 앞에서 방방 뛰며 눈을 못 떼는 아이 곁에 선 아빠는 눈을 지긋이 감습니다. 텔레비전 없는 우리 멧골집으로 돌아가기 앞서까지는 어찌하는 수 없습니다. 서울에 볼일을 보러 와서 전철을 타고 움직일 때에도 가야 하는 데까지 그예 가야지, 사이에서 내릴 수 없습니다. 밀고 밟으며 치는 사람들한테 시달리면서, 아이 또한 시달려야 합니다. 매캐한 바람을 아이도 마셔야 합니다. 복닥거리고 시끄러운 소리를 아이도 들어야 합니다.

 서울이라고 착하거나 참답거나 고운 사람이 없을 수 없습니다. 서울이든 대전이든 제주이든 착하거나 참답거나 고운 사람은 늘 있어요.

 그러나 이대로 좋으려나요. 이대로 이 나라 이 터전 이 나날이 괜찮으려나요. 서울 홍제동에 자리한 헌책방 〈대양서점〉에서 《한국인의 정서》(우석,1981)라는 묵은 책 하나를 이천 원쯤 주고 장만했습니다. 글을 쓴 하종갑 님은 경남일보라는 지역신문 기자입니다. 서울에서 살며 서울 이야기를 쓰는 기자가 낸 책이었을 때에도 《한국인의 정서》 같은 책이 잊히거나 묻히거나 안 읽혔을까 궁금하지만, 서울에서 살며 서울 이야기를 쓰는 기자는 《한국인의 정서》 같은 책을 처음부터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쓸 수조차 없으리라 봅니다. 아니, 이런 책이 나왔어도 읽어서 기쁘게 삭이며 즐거이 느낌글 하나 기사로 쓰지 못했겠지요.

 우리 아이가 글을 사랑하는 아이로 무럭무럭 자라 주면 좋겠습니다. 아빠부터 글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야겠지요. 우리 아이가 착한 마음씨를 보듬는 아이로 예쁘게 크면 고맙겠습니다. 아빠부터 착한 마음씨를 아끼는 사람으로 살아야겠지요. 오늘 하루도 아빠는 손에 물이 마를 겨를 없이 신나게 빨래를 합니다. (4344.1.9.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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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글쓰기 삶쓰기 ㉡ 글짓기랑 글쓰기


 《몽실 언니》라는 동화책 읽은 동무 있나요? 진작에 읽었다구요? 읽으라는 소리는 자주 듣는데 아직 못 읽었다구요?

 저는 《몽실 언니》라는 동화책을 1998년 1월에 처음 읽었어요. 1984년에 나온 《몽실 언니》인데, 아저씨는 자그마치 스물네 살 나이에 이 동화책을 비로소 알아보았답니다. 아저씨는 강원도 양구 산골짜기에서 군대살이 스물여섯 달을 보냈어요. 1995년 11월에 눈바람 맞으며 군대에 가서, 1997년 12월에 똑같이 눈바람 맞으며 군대를 떠났어요. 그런데 아저씨가 군대를 떠나 사회로 돌아온 1998년 1월은 새로운 대통령이 뽑힌 때이기도 하지만, 한창 국제통화기금이다 뭐다 하면서 편의점 알바이니 술집 알바이니 하는 일자리마저 없던 때예요. 군대에서 늘 하던 삽질 솜씨를 살려 막일꾼으로 일감을 찾아보고자 했지만, 이마저도 없었어요. 스물여섯 달 동안 산골짜기 깊은 데에서 외롭게 지내다가 사회로 돌아온 만큼 몸과 마음을 쉬고팠는데, 나라가 어수선하다 보니 여러모로 눈치밥을 먹어야 했어요. 군대에서 막 나온 몸으로 주머니에 돈이 있나, 집에서 돈 몇 푼 얻을 수 있나, 하는 수 없이 헌책방을 찾아가 여러 시간 조용히 책을 읽는데, 이때에 《몽실 언니》라는 동화책이 제 눈에 번쩍 뜨였습니다.

 우리 말사랑벗님들이라든지 말사랑벗님들 언니나 누나나 동생들은 《몽실 언니》를 초등학생 무렵에 처음 만나겠지요. 조금 늦으면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나이에 만날 테고요. 그런데 저는 스물네 살이 되어서야 만났어요. 이무렵 《몽실 언니》를 처음 만나며 다른 어린이책을 하나하나 찾아 읽었어요. 그리고 더없이 슬퍼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 나는 내가 열두어 살 나이에 이 책을 만날 수 없었을까? 왜 나한테는 내 나이에 걸맞을 어린이책 하나 쥐어 주는 어른이 없었나?’ 생각했어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어린 날부터 학교에서 끝없는 베껴쓰기 숙제와 글짓기 숙제에 시달렸습니다. 그런데 《몽실 언니》를 읽고 나서는 속에서 자꾸자꾸 무언가 터져나오더군요. 책을 다 읽고 맨 끝자리 빈 종이에 ‘책을 읽으며 북받친 느낌’을 깨알같은 글씨로 촘촘히 적바림했어요.

 누가 읽으라 건넨 책이 아니고, 누가 쓰라 한 글이 아니었습니다. 그예 눈길이 꽂혀 읽은 책이요, 그저 마음으로 우러나며 쓴 글이었어요. 바야흐로 ‘글쓰기’를 몸으로 깨달은 셈입니다.

 이제 거의 모든 학교에서는 ‘글짓기’라는 이름을 안 쓰고 ‘글쓰기’라는 이름을 써요. ‘글쓰기’라는 낱말은 ‘글짓기’라는 낱말과 함께 낱말책에 곱게 실려요. ‘글쓰기’라는 낱말이 낱말책에 실린 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동네 조그마한 학원조차 “글쓰기 학원”이라 하지 “글짓기 학원”이라 하지 않아요. 글을 짓는 일이 얄궂거나 나쁜 일은 아니지만, 이제는 어느 누구도 섣불리 ‘글짓기’라는 낱말은 안 쓰려 해요.

 왜냐하면, 아저씨가 초·중·고등학교를 거치며 지겹도록 해야 했던 억지스러운 ‘글짓기’ 숙제하고 맞물리기 때문이랍니다. 글을 짓는 일은 “억지스레 머리로 쥐어짜듯 뱉어내는 글”이 되기에, 이 글을 쓰는 어린이나 푸름이나 어른이나, 제 꿈과 마음과 넋을 오롯이 담지 못한다고 여기기 때문이에요.

 ‘글쓰기’는, 글을 쓰려는 사람 누구나 스스로 살아가는 넋과 꿈과 마음을 차근차근 적바림하는 일이라고 해요. 이 낱말은 지난 2003년에 숨을 거둔 이오덕 선생님이 1960년대에 처음으로 쓰면서 퍼졌어요. 이오덕 선생님도 1950년대에는 ‘글짓기’라는 낱말을 똑같이 쓰셨지만, 학교에서 벌어지는 억지스럽고 모질며 틀에 박힌 수업으로 짓누르는 ‘글짓기’는 아이들 마음밭을 살찌우지 못한다고 여기셨어요. 아이들 마음밭을 살찌우면서, 아이들이 스스로 한결 씩씩하고 싱그러운 얼을 키우는 슬기를 빛내도록 돕고 싶어, 낱말부터 ‘글쓰기’라는 이름을 새로 일구어서 쓰셨습니다. 옳고 바른 마음가짐으로 착하고 참다우며 고운 이야기를 나누려는 글쓰기 나누기를 마흔 해 남짓 한 끝에 우리들은 오늘날 즐겁고 홀가분하게 ‘글쓰기’를 할 수 있답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곰곰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해요. 이름은 ‘글쓰기’로 고쳤지만, 예전과 똑같이 억지스러우면서 모질고 틀에 박힌 채 벌어지는 글쓰기 수업이나 교육이라 할 때에는 ‘옛날 글짓기’하고 마찬가지예요. 이름은 허울이 아니거든요. 이름이 제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알맹이가 엇나가거나 비뚤어지면 도루묵이 되고 말아요. 이름부터 제대로 쓰도록 힘써야 하는 가운데, 속살 또한 제대로 여물도록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글쓰기’와 함께 ‘글짓기’ 마음가짐을 새삼스레 헤아릴 줄 알아야 하지요. 글쓰기는 이오덕 선생님이 얘기하고 나누며 뿌리내리도록 했듯, 꾸밈없는 삶이 꾸밈없는 넋이 되어 꾸밈없는 말글로 태어나도록 하는 일입니다. 글짓기는 글을 짓는 일이라고 했지요? 글을 짓는 일이란 무엇일까요? ‘짓는’ 일이란 또 어떤 일일까요?

 글쓰기와 함께 글짓기도 바른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고 느껴요. 우리들은 ‘마음쓰기’를 하듯이 ‘글쓰기’를 하고, ‘농사짓기’를 하듯 ‘글짓기’를 할 때에 더없이 알차며 아름다울 수 있지 않겠느냐 생각해요.

 한자말로는 ‘배려(配慮)’라고 하는데, 우리말로는 ‘마음쓰기’예요. 말사랑벗님, 낱말책에서 ‘배려’라는 한자말을 찾아보셨어요? 한번 찾아보셔요. 말풀이를 보면 “마음을 씀”이라고 적혔답니다. 남다른 뜻이나 느낌을 담은 낱말 ‘배려’가 아니에요. 누구나 쉽게 아는 말 ‘마음쓰기’를 한자로 옮겨적을 때에 바로 ‘배려’랍니다. 꾸밈없이 마음을 쏟아 이웃을 아끼거나 사랑한다 할 때에 ‘마음쓰기’예요. 이 매무새 그대로 글을 쓴다면 ‘글쓰기’예요.

 농사를 짓는 마음가짐을 곰곰이 헤아려 보셔요. 우리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끼는 넋 그대로 몸소 땅을 일구고 갈며 씨를 뿌려 건사하고 갈무리합니다. 이렇게 갈무리한 곡식을 찧고 일고 씻고 냄비에 안쳐서 구수한 밥을 짓습니다. 농사를 지어 밥을 짓고 글을 짓습니다. 농사짓기란 밥짓기로 이어지고, 밥짓기는 다시 글짓기로 이어가요. 저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글짓기’ 다음으로 ‘사랑짓기’로 이어 보곤 합니다. 다른 자리라면 ‘노래짓기’나 ‘옷짓기’, 또는 ‘책짓기’나 ‘마을짓기’로 이을 수 있어요.

 말을 살리는 길이란 넋을 살리는 길이고, 넋을 살리는 길이란 우리 삶을 살리는 길입니다.
 

(최종규 . 2011 -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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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졸음과 글쓰기


 졸려 쓰러질 판이지만 머리맡에 기저귀를 챙겨 놓아야 한다. 밤새 아이한테 갈아 줄 기저귀가 곁에 없이는 잠들 수 없다. 아침에 일어나서 맨 먼저 하는 일이란 오줌으로 젖은 기저귀하고 아이 옷가지를 빨래하기. (4344.1.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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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 아닌 날씨를 보며 산다
― 데오도라 크로버, 《북미 최후의 석기인 이쉬》



- 책이름 : 북미 최후의 석기인 이쉬
- 글 : 데오도라 크로버
- 옮긴이 : 김정환
- 펴낸곳 : 창작과비평사 (1981.9.20.)



 이오덕 님이 1984년에 내놓은 책 《어린이를 지키는 문학》(백산서당) 끝자락을 보면 〈어린이의 마음을 지켰던 마지막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북미 최후의 석기인 이쉬》라는 책을 이야기하는 꼭지가 있습니다. 《북미 최후의 석기인 이쉬》라는 책을 제대로 읽어 제대로 말한 글은 1981년부터 2011년 오늘까지 오직 이 글 하나만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어쩌면, 책으로 묶이지 못하거나 신문·잡지 같은 데에 안 실린 채 조용히 적바림한 사랑스러운 느낌글이 있을는지 모릅니다. 구태여 누구한테 읽히려고 쓰는 느낌글이 아닌, 일기장에 살가이 적어 놓은 느낌글이 있을 수 있겠지요.


.. 캘리포니아 산기슭 언덕 지방의 샛강이나 하상에 깔린 자갈 속에 금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자 처음 이주했을 때는 물방울에 불과했던 것이 강물을 이루어 산맥의 서쪽 면을 쏟아져내리게 되었다 … 그들(백인)은 비록 물방앗간샛강족은 한 명도 못 잡았지만 잡아 죽일 인디안 ‘몇 명’은 발견해야 하리라고 생각했다 … 길이 나고 목장이 들어서고, 구릉 지대로 새로 밀려드는 백인 이주민들 때문에 물방앗간샛강 지방은 갈수록 잠식당했던 것이다 ..  (64, 98, 144쪽)


 1981년에 나온 《북미 최후의 석기인 이쉬》를 쓴 ‘데오도라 크로버’ 님은 1982년에 나온 《마지막 인디언》을 쓴 ‘디오도러 크로버’ 님하고 같은 사람입니다. 어느 책이 옮게 적바림한 이름인지 모를 노릇입니다. 두 책 모두 글쓴이 이름을 알파벳으로 밝히지 않았거든요. 다만, ‘크로버’는 ‘Kroeber’로 적으며, 남편 이름은 ‘알프레드 루이 크로버’라 합니다. 알파벳 이름이 ‘Kroeber’라 한다면, 네덜란드 쪽 이름이 아닌가 싶고, 네덜란드 쪽 이름이라면 이 이름은 ‘끄루베르’로 읽어야 맞는데, 영어 투로 읽는다면 ‘크루버’입니다.

 책에는 안 나오는 이름을 인터넷으로 살펴 가까스로 ‘Theodora Kroeber’라는 알파벳 이름을 찾아냅니다. 이 알파벳 이름으로 다시금 살피니, ‘Theodora Kroeber’ 님은 1897년 3월 24일에 태어나, 1979년 7월 4일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더욱이, ‘시오도라 크뢰버’ 님은 딸아이 ‘어슐러 K.르 귄’을 1929년 10월 21일에 낳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어슐러 K.르 귄’은 판타지문학 작품으로 몹시 사랑받는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 1850년대는 야나족에 있어 고난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측면이 적에게 노출되자 그들은 도매금으로 노예 신세가 되거나 납치되었고, 성병으로 인한 극심한 타격 때문에 그 수가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이런 인접 지방의 위험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했던 야히족은 고기를 잡고 사냥을 하고 식량을 주워 모으던 땅을 상실하면서, 멀지않아 그들을 굶어죽게 만들 심각한 타격을 처음으로 실감하게 되었다. 사슴이나 다른 사냥감들의 수가 감소했음은 물론, 권총을 쏘는 소리(이쉬는 권총이 ‘부서지는’ 소리라고 했다)가 투석기나 활 따위가 지닌 무성무기의 장점을 짓밟아 버렸기 때문에 짐승들이 워낙 조심을 하는 터라 몰래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 인디안들은 가능한 시간, 가능한 장소에서 말·노새·소 그리고 양들을 가져갔다. 그들은 고기는 식량으로 가죽은 걸칠 것으로 만들면서 이 가축들의 어느 부분도 버리지 않았다 … 단지 살기 위해서 훔치거나 죽인 것이지, 가축 수를 늘리거나 재산을 모으려고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  (88∼90쪽)


 헌책방마실을 하며 《북미 최후의 석기인 이쉬》를 곧잘 만납니다. 아주 흔한 책은 아니지만 아주 드문 책 또한 아닙니다. 헌책방 책시렁 한켠에 얌전히 꽂힌 모습을 심심찮게 마주합니다.

 그러나 이 책을 기쁘게 집어드는 사람은 썩 드뭅니다. 인류학을 하는 학자나 학생이 아니라면, 게다가 인류학을 하는 학자나 학생일지라도 책읽기를 몹시 좋아하거나 공부를 깊이 하려는 사람이 아니라면, 선뜻 이 책을 집어들지 않습니다.

 북중미 토박이들 말과 삶을 다룬 책이 그럭저럭 팔리거나 읽히곤 합니다. 북중미 토박이들이 살아오며 남긴 이야기를 바탕으로 ‘사람이 살아갈 슬기’를 얻는다고들 합니다.

 《북미 최후의 석기인 이쉬》라는 책은 ‘사람이 살아갈 슬기’를 다루지 않습니다. 북중미에서 마지막 석기사람으로 살았다 할 만한 ‘이쉬’라는 사람을 ‘박물관사람’으로 삼아 ‘보살폈다’고 하는 백인이 곁에서 지켜보고 학문으로 파헤친 이야기를 갈무리한 《북미 최후의 석기인 이쉬》입니다. 《마지막 인디언》은 《북미 최후의 석기인 이쉬》을 어린이도 알기 쉽도록 한결 부드러우며 애틋하게 엮은 동화문학입니다. 《북미 최후의 석기인 이쉬》는 이른바 보고서라 할 만합니다. 북중미 땅에서 ‘야히 겨레’가 어떻게 백인 손아귀에서 괴로워 하다가 그만 모조리 사라지고 말았는가를 차분히 들려주는 보고서라 할 수 있습니다. ‘이쉬’라는 야히 겨레 마지막 사람이 ‘야히 겨레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를 스스로 적바림해 놓아야 한다는 ‘야히 겨레 옛사람 목소리’를 듣고 나서 스스로 박물관사람으로 지내는 자취와 삶을 곁에서 꼼꼼히 살핀 ‘적이 아니지만 동지 또한 아닌 인류학자(남편)랑 이야기꾼(아내)’이 갈무리하면서 엮어 놓은 ‘야히 겨레 역사를 다른 모습으로 담은 책’이라 해도 좋습니다.


.. 이쉬는 사냥의 어느 과정도 결코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존경하는 마음으로 의식을 거치지 않고는 화살을 만지지도 않았다. 사슴 사냥을 나갈 때는 다른 의식절차도 첨가되었다. 사슴 사냥을 나가기 전날이면 이쉬는 밤이고 낮이고 생선을 먹지 않았고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그 금욕기간은 3일로 연장되는 적도 있었다 ..  (268∼269쪽)


 야히 겨레 마지막 사람 이쉬는 당신 삶을 숱한 글과 사진과 이야기로 남긴 채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야히 겨레 마지막 사람 이쉬 삶을 담은 첫 책이자 마지막 책이 될 《북미 최후의 석기인 이쉬》는 1981년에 조용히 태어나 조용히 읽히다가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아직 한국땅에서는 이 책이 책다이 읽히기 어렵다 할 테고, 문화학이나 인류학으로서도 깊이 헤아리기 힘들다 할 테며, 우리 삶을 돌아보는 좋은 길동무로 삼기에도 벅차다 할 테지요. 한국사람은 한국문화와 한국삶조차 살뜰히 돌아볼 겨를이 없을 만큼 몹시 바쁘니까요.

 시계나 달력에 맞추어서 살아간 사람이 아닌 이쉬입니다. 날씨와 철과 바람과 흙과 햇볕에 따라 살아간 사람인 이쉬입니다. 이쉬를 읽으려면 내 삶이 시계 아닌 날씨로 움직여야 하고, 달력 아닌 철에 따라 숨쉬어야 합니다. 돈이 아닌 사랑으로 사람을 사귀며 살아야 합니다. 1978년에 나왔다는 ‘이쉬 이야기 담은 영화’가 어떤 줄거리를 담았을는지 궁금합니다. 12달러면 살 수 있다는데, 한국에서 이 영화를 장만할 길을 찾아봐야겠습니다. (4344.1.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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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쟁이 책읽기
 ― ‘사진책 읽는 즐거움’을 찾는 길



 시를 쓰는 민영 님이 1991년에 내놓은 산문책 《내 젊은 날의 사랑은》(나루)을 읽다 보면, “시야말로 처음 쓸 때의 경건한 마음을 일평생 잊어버리지 않고 한 자 한 자 공들여서 써야 하는 예술입니다. 자기만 알고 남은 모르는 글을 써서는 안 되며, 지나치게 기교를 부려서 독자를 우롱하는 시를 써서도 안 됩니다. 또 시에는 복제품이 없습니다. 예술 중에는 더러 하나의 주제로 창작된 것을 똑같이 만들어 전시해도 되는 것이 있으나, 시는 언제나 새롭게 쓰여져야 합니다. 이 말 저 말을 적당이 꿰어맞춰서 쓰는 일은 용서되지 않습니다(158쪽).” 같은 대목을 마주합니다. 다시없이 옳은 말이요, 그지없이 알맞은 말이며, 더없이 좋은 말이구나 하고 느낍니다.

 데즈카 오사무 님 만화책 《우주소년 아톰》(학산문화사,2001) 7권을 보면, 아톰이 살려 준 ‘홈스판’이라는 사람이 “나를 로봇이라고 부르고 싶으면 부르시오. 그러나 나는 로봇이 된 것이 자랑스러울 정도요. 그것은 로봇이 얼마나 멋진 것인지를 알았기 때문이오. 그것은 수술을 받기 전 아톰에게서 배웠소. 인간처럼 욕심도 없고 잘난 척도 하지 않고 그저 올바른 일만 하는 로봇들(107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로봇 아톰은 무슨 일이나 척척 해내는데, 세 가지는 못합니다. 첫째, 거짓말을 못하고, 둘째, 나쁜 일을 못하며, 셋째, 사람을 죽이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로봇 아톰은 멀디먼 앞날 사람누리에서 사람들이 모조리 잊거나 잃거나 놓는 세 가지인 ‘착함’과 ‘참다움’과 ‘아름다움’을 알뜰히 건사하는 목숨붙이인 셈입니다.

 어린이문학과 교육운동과 우리 말글 바로쓰기를 해 온 이오덕 님이 1984년에 내놓은 책 하나가 《삶을 가꾸는 어린이문학》(고인돌,2010)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왔습니다. 어린이문학을 비평하는 책인데다 스물예닐곱 해나 묵은 글이지만, 이 책을 지난날부터 옛판으로 열 번 넘게 읽고 새판으로 거듭 읽으면서 언제나 새롭다고 느낍니다. “주제가 없거나 모호한 작품은 감동이 있을 수 없다. 감동이 없으면 죽은 작품이다. 다음에 주제가 있더라도 그것이 어린이 사회의 절실한 문제를 잡은 것이 아니고 어른들이 한결같이 강요하는 틀에 박힌 교훈을 얘기한 것이라면 이것 또한 작가에게 문학정신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밖에 없다(207쪽).”라든지 “어린이문학은 어린이에 대한 사랑이 밑뿌리로 되어 있어야 하는 문학이다. 어린이에 대한 사랑이란 아이들의 귀여움에 빠져 버리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의 마음, 아이들이 살아가는 현실을 깊이 이해하여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를 풀어 주고, 그들이 사람답게 자라나도록 하려는 정신이 곧 어린이 사랑이다(209쪽).”라든지 “많은 작가들이 흔히 저지르는 가장 뚜렷한 잘못은 아마도 짐승의 모습, 짐승의 생태를 그릇되게 나타내는 일일 것이다. 참으로 많은 작가들이 의인화를 쓰거나 바로 짐승을 살핀 얘기를 쓰면서 너무나 그 짐승을 모르고 있다. 모르는 것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알려고 하지 않고 관찰과 연구에 게으르고 성의가 없이 함부로 쓰고 있는 듯한 것이다(213쪽).”라든지 “소설이든 동화든 문장을 알기 쉽고 올바르게 써야 한다는 것은 문학 수련의 첫걸음이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동화작가들이 문장을 이상야릇하게 꾸며 쓰는 취미에 젖어 있다(218쪽).”라든지, 가만가만 읽어 보면, 꼭 어린이문학만 이야기하는 글이 아니로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어린이문학’이나 ‘동화’라는 낱말을 ‘사진’으로 바꿀 때에도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할 말이 없는 사진은 감동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감동이 없는 사진은 죽은 사진입니다. 주제가 있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뼛속 깊은 이야기를 잡지 않고 차갑거나 메마르거나 돈을 밝히는 틀에 박힌 이야기를 다루는 사진쟁이한테는 ‘사진넋’이 없다고 할밖에 없습니다. 사진은 사람을 사랑하는 넋이 밑뿌리로 되어야 하는 예술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깊이 살피며 어깨동무할 줄 아는 가운데 서로 고운 벗이 되어야 합니다. 사진을 찍으면서 막상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이나 사물이나 짐승 한살이와 터전을 너무 모릅니다. 모르는 일보다 더 걱정스러운 대목은 알려 하지 않으면서 무턱대고 사진부터 찍는 일입니다. 사진이든 어떤 예술이든 알기 쉽고 올바로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 숱한 사진쟁이는 사진을 이상야릇하게 꾸며 찍는 버릇에서 허덕입니다.

 미우라 아야코 님 수필책 《나의 빨간 수첩에서》(자유문학사,1988)를 읽다 보면, 병 때문에 몸이 여린 미우라 아야코 님을 보살핀 시어머님 얘기가 나옵니다. 당신 시어머님은 당신한테 “얘야, 연약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란다(67쪽).” 하고 말씀했답니다. 미우라 아야코 님 어머님은 아주 마땅한 삶을 마땅히 살아가며 미우라 아야코 님한테 사랑을 나누었고, 미우라 아야코 님은 사랑을 받아먹으면서 이 사랑을 다른 이웃한테 두루 나누었습니다. 여린 사람을 아끼며 사랑하는 매무새란 하느님이나 부처님을 믿는 이만 보여줄 매무새가 아닙니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거나 하는 모든 예술쟁이와 문화쟁이들이 골고루 갖출 매무새이기도 합니다. 아니, 문화쟁이나 사진쟁이라는 이름에 앞서 사람이라면, 옹근 한 사람이라면, 씩씩하며 튼튼한 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밑바탕으로 다스릴 몸가짐이에요.

 사진길을 걷는 저는 이런 책을 읽고 저런 책을 읽으며 그런 책을 읽습니다. 따로 어느 갈래 책을 더 좋아하거나 즐겨서 찾거나 찬찬히 살피지 않습니다. 제 마음을 움직이는 책, 제 가슴을 적시는 책, 제 삶을 북돋우는 책, 제 사랑을 쓰다듬는 책, 제 믿음을 살찌우는 책, 제 손길을 맞잡는 책을 좋아합니다. 만화책도 좋고 그림책도 좋습니다. 사진책은 마땅히 좋으며 어린이책과 청소년책과 어른책 두루 좋습니다. 소설책이나 시집이나 산문책도 좋아요. 환경책도 좋아하고 인문책이나 역사책도 즐겨 읽습니다. 과학책이나 철학책이라 해서 마다 할 까닭이 없습니다. 연변조선족 문학책이나 재일조선인 문학책도 즐깁니다. 책마을 일꾼이 쓴 ‘책을 말하는 책’도 좋아하며, 쉰 해나 백 해쯤 묵은 오래된 책도 좋아합니다. 잡지책도 곧잘 뒤적이고, 헌책방에서 《뿌리깊은 나무》를 두 호수 빼놓고 모두 찾아내어 읽었습니다. 그동안 제 도서관에 갖추려고 그러모은 사전붙이만 천 권이 넘고, 우리 말글을 다룬 책은 훨씬 많이 읽었습니다. 우리 말글 뿌리와 줄기와 가지와 열매와 꽃봉우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는 아무 말을 할 수 없거든요. 사진찍기를 하든 사진읽기를 하든, 이리하여 사진이 어떠하다고 이러쿵저러쿵 읊조리는 사진말을 하든, ‘말하는 삶’이 되자면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땅에서 나누는 한국말 얼거리와 속살을 옳고 바르며 참다이 짚으며 헤아려야 합니다. 맞춤법과 띄어쓰기란 밑앎이지만, 이보다 우리 말투와 우리 말결과 우리 말느낌과 우리 낱말과 우리 상말과 우리 말빛을 차근차근 톺아봅니다. 여성학을 다룬 책이라든지 인류학이나 문화를 다룬 책이라든지 노래나 뜨개를 다룬 책도 가만히 읽습니다. 종이접기 책도 기쁘게 장만하여 읽습니다만, 아직 종이접기는 참 어수룩합니다. 교육책도 꾸준히 읽는 가운데, 요사이는 《아기가 온다》(하늘출판사,1995)라는 책을 틈틈이 읽습니다. 저는 사진쟁이이기 앞서 옆지기한테 남편이요, 딸아이한테 아빠입니다. 집에서는 살림꾼 노릇을 해야 하며, 둘째를 집에서 낳아야 하는 만큼 《아기가 온다》라든지 《티베트 의학의 지혜》 같은 책은 줄거리를 꿸 만큼 꼼꼼히 읽습니다. 실러 키칭거 님이 쓴 《아기가 온다》를 읽으면 “임신은 단순히 출산만을 기다리는 기간이 아닙니다. 두 사람의 가치관을 키우며, 그것으로 자기들의 아기에게 어떤 세계를 만들어 줄 것인가, 하고 계획하는 기간입니다(40쪽).”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사진은 그저 작품을 만드는 예술이 아닙니다. 나와 나한테 찍히는 사람들 삶을 헤아리는 가운데 살가이 북돋우면서, 서로서로 새로운 누리를 즐거이 일구는 이야기꽃입니다. 아이를 함께 낳고 같이 보살피면서 아이사랑뿐 아니라 삶사랑과 사진사랑을 배웁니다.

 송명규 님이 쓴 환경책 《후투티를 기다리며》(따님,2010)를 읽으며 “요즈음의 내 기분은 거의 그날의 날씨에 좌우된다. 밝은 햇살을 받으며 출근하는 날에는 베란다에 남아서 봄의 따사로움을 만끽하고 있을 선인장 생각에 하루가 즐겁다. 그러나 뿌연 황사가 모처럼의 햇빛을 가로채면 나는 봄을 약탈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울화가 치민다. 그래서 조그마한 자극에도 숨겨져 있던 공격적인 본성이 여지없이 드러나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르는 피해자가 된다(142∼143쪽).” 같은 대목에 밑줄을 긋습니다. 사진을 찍어 사진문화나 사진예술을 이루는 분들은 으레 도시에서 살아가고, 더 큰 도시에서 살아갑니다. 흙을 밟거나 흙을 아는 사진쟁이는 아주 드뭅니다. 흙을 밟거나 흙을 안달지라도 흙하고 멀리 떨어진 채 보내는 나날이 훨씬 깁니다. 아니, 시골에서 살아가면서 자가용 아닌 자전거나 두 다리나 시골버스를 즐기는 사진쟁이가 다문 한두 사람이라도 있나 궁금합니다. 밥벌이에 쫓기고 돈벌이에 매이면서 정작 ‘내 사진’을 못할 뿐 아니라 ‘사진’조차 못하는 가운데 ‘사진찍기’에만 너무 바쁜 사람들뿐 아닌가 싶기까지 합니다.

 새로운 모습을 담아야 사진이라 할 테지만, 새로운 모습이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아직 아무도 안 찍은 모습이 새로운 모습이려나요. 아직 아무도 안 찍었을 때에도 틀림없이 새로운 모습일 테지만, 아직 아무도 안 다룬 주제라 해서 가장 뛰어나거나 훌륭할 다큐사진 주제가 되지 않을 뿐더러, 멋지거나 놀라울 광고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누구나 흔히 찍으며 어디서나 쉽게 마주하는 모습을 담으면서 되레 아름다운 다큐사진을 일군다든지 사랑스러운 광고사진을 얻곤 합니다. 사진을 하는 사람 스스로 새롭게 살아가는 매무새일 때에 날마다 새롭다 싶은 사진을 즐깁니다. 나 스스로 새 넋과 새 말로 새 삶을 돌보지 못한다면, 새 사진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리하여, 저는 책을 읽습니다. 사진책도 읽고 여느 책도 읽는 가운데, ‘사람책’을 함께 읽어요.

 사람책이란 ‘삶책’입니다. 삶책이란 곧 삶이며 사람이고 사랑입니다. 삶을 읽을 수 있으면 삶책과 사람책과 사진책과 책 또한 즐거이 읽습니다. 사람을 읽을 때에도 매한가지요, 사랑을 읽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읽기에서는 삶과 사람과 사랑이요, 찍기에서도 삶과 사람과 사랑입니다. 글을 쓰거나 살림을 꾸리거나 일을 하거나 놀이를 하거나 사진을 하거나, 누구이든 무엇보다 이 세 가지 ‘삶·사람·사랑’을 따사로우며 넉넉히 보듬을 줄 알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삶·사람·사랑 세 가지를 곱게 여미고픈 꿈을 꾸면서, 사진을 찍는 사람이나 사진을 읽는 사람 모두 ‘사진쟁이’답게 책다운 책을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비손합니다. 비손을 올립니다. 비손을 바치며 사진이랑 책이랑 삶이랑 사랑이랑 사람이랑 사진책이랑 어찌저찌 예쁘게 어깨동무하는가 하고 이야기 한 자락 적바림해 봅니다. (4344.1.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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