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

책숲하루 2025.6.14. 봄이 가면


―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 (국어사전 짓는 서재도서관)

: 우리말 배움터 + 책살림터 + 숲놀이터



  나는 잘 잊어버리면서 잘 떠올립니다. 나는 잘 잃어버리면서 잘 둡니다. 아주 엇갈리는 두 가지를 아무렇지 않게 하기 일쑤입니다. 어쩌다가 이런 두동진 모습일까 하고 돌아보노라면, 늘 고삭부리로 쓰러지고 앓아눕고 코피를 쏟고 숨막혀서 달포 남짓 끝없는 재채기로 죽을 노릇이던 어린날을 보낸 뒤에, “차라리 군대에서 의문사로 숨을 거두는 일도 나쁘지 않겠구나.” 하고 여기면서 “어느 아이는 스무 살까지만 살고 싶다고 하면서 스무 살을 못 살았는데, 나는 벌써 스무 살을 넘고 스물한 살이잖아? 잘 살았어.” 하는 혼잣말을 하면서 뒹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강원 양구 멧골짝 ‘완전무장지대(이름은 비무장지대이나 무시무시한 완전무장지대)’에서 용케 안 죽고 살아남아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스물세 살 일입니다. 스물네 살에 대학교 자퇴를 하고서 고졸이란 끈으로 일자리를 찾기란 죽음바다 같으면서도 파란바다 같았습니다. ‘대학교 자퇴’이니까 어렵다고 여길 뿐, 처음부터 ‘고졸 중졸 국졸 무학’이라고 여기면 어느 일자리이건 고마울 뿐입니다. 그래서 스물다섯 살부터는 “학교를 안 다녔습니다” 하고만 말했습니다.


  봄이 지나간 첫여름 밤에 부산에서 《카모메 식당》을 읽으면서 뱃속을 달랩니다. 나는 집밖에서는 그냥 굶으면서 바람과 빗물과 이슬을 마시면서 일하고 싶지만, 이렁저렁 만나는 아름다운 이웃님은 “으째 밥을 안 먹고 일을 한다요? 밥먹자고 하는 일 아닌교?” 하고 묻습니다.


  지난 2024년에 어느 부산 이웃님한테 건넨 책에 적은 넉줄글을 새삼스레 되읽습니다. 속으로 혼잣말을 합니다. ‘어, 내가 이렇게 글을 적어 놓았네? 내가 남긴 글이 맞아? 나는 봄을 사랑하는 마음을 언제 품었을까?’ 소쩍새 울음소리와 풀벌레 노랫가락과 개구리 떼노래가 없는 부산 한복판이되, 고흥 시골집 밤노래가 예까지 울리리가 여기면서 이제 등허리를 펴려고 합니다.


봄이 오면

봄바람이 잎을 깨우고

봄볕이 땅을 녹이고

봄하늘에 제비가 납니다



* 새로운 우리말꽃(국어사전) 짓는 일에 길동무 하기

http://blog.naver.com/hbooklove/28525158


*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 지기(최종규)가 쓴 책을 즐거이 장만해 주셔도 새로운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짓는 길을 아름답게 도울 수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숲노래 노래꽃 . 오늘 아침에



오늘 아침 2025년 6월 14일

무릎셈틀이 간당간당하다

지난해 이맘때 광주에 가서

“존것 드릴게” 하는 말을 듣고서

헌것으로 샀는데

숨을 벌써 거두려 한다


부산에서 고칠 수 있을까

오늘 새로 사야 할까


깜빡깜짝하는 무릎셈틀한테

고맙다고 말을 한다

아침 빗소리를 듣는다


2025.6.14.

※ 무릎셈틀 : 노트북


ㅍㄹ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숲노래 삶읽기 / 숲노래 마음노래

하루꽃 . 따뜻하지 않아서 2025.6.3.불.



따뜻하지 않아서 싫을 수 있어. 따뜻하지 않아서 네가 둘레를 덥힐 수 있어. 따뜻하지 않아서 추울 수 있어. 따뜻하지 않아서 네가 둘레를 품을 수 있어. 바꾸려면 먼저 느껴야 하지. 가꾸려고 할 적에도 먼저 느끼고 알 노릇이란다. 먼저 느끼고 알아보고 헤아리기에, 바꿀는지 가꿀는지 가릴 수 있거든. 어쩐지 내키지 않거나 못마땅한 나머지 처음부터 내내 등돌리거나 눈감다 보면, 느낄 일부터 없고, 넌 아무것도 스스로 못 바꾸고 못 가꿀 뿐 아니라, 안 배우고 고이면서 곪다가 죽어가게 마련이란다. “나쁠 삶(경험)”이란 없어. “좋을 삶(체험)”도 없지. 모든 삶은 ‘좋음·나쁨’이 아닌, “네(내)가 느끼기를 기다리면서 찾아오는 일”이란다. 너는 처음에는 그저 느끼고 바라보면서, 이 일을 넌지시 스쳐 보낼는지, 네가 풀거나 녹여서 없앨는지, 알맞을 곳으로 띄워 보낼는지, 네 나름대로 느끼고 받아들여서 바꾸거나 가꿀는지 가누면 돼. 넌 네 몫대로 하면 되거든. 넌 네가 못할 만한 일을 구태여 끌어안거나 붙잡아야 하지 않아. 넌 네가 마주하는 일을 그저 그 모습 그대로 보고 느끼면서, “자, 그러면 나는 어떤 마음으로 무엇을 할까?” 하고 생각을 그릴 노릇이야. 너(나)는 생각하려고 몸을 입은 넋인 빛이거든. 그저 빛으로 온누리를 흐를 적에는 빛 그대로 모두 밝히는 길이야. 빛으로 그대로 모두 밝히는 길로 있다가, 네가 새롭게 씨앗을 일으켜서 심고 싶은 마음이기에, 몸을 입고서 사람으로 태어나지.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숲노래 삶읽기 / 숲노래 마음노래

하루꽃 . 여름숲 2025.6.4.물.



‘여름숲’이라고 해도 ‘첫여름숲’과 ‘한여름숲’과 ‘늦여름숲’이 달라. ‘첫여름숲’에서도 ‘앞·첫여름숲’과 ‘가운·첫여름숲’과 ‘뒷·첫여름숲’이 다르지. 곰곰이 보면, 한 해를 이루는 365라는 날마다 숲결이 달라. 사람도 날마다 다르지. 늘 배우는 사람은 늘 배우는 매무새를 나아가며 달라. 배우고 익혀서 새로 펴는 사람은, 늘 배우고 익혀서 새로 펴는 길대로 살아가며 달라. 안 배우고 안 익히는 사람은 쳇바퀴로 힘쓰느라 낡고 늙어서 죽어가는 빛이 새삼스럽도록 다르지. 넌 똑같이 생긴 구름을 본 적 있니? 넌 똑같이 내리는 비나 눈을 본 적 있니? 해와 별도 어느 하루조차 안 똑같아. 모두 늘 움직이고 숨쉬면서 새로 나아가는 빛이란다. 그래서 사람이라는 몸을 입고서 ‘살림빛’으로 걸어가는 삶이 있고, ‘죽음빛’으로 물드는 굴레가 있어. 그저 똑같이 곧거나 반듯하기만 한 하루라면, 배울 수도 익힐 수도 바꿀 수도 가꿀 수도 없어. 그저 똑같으니 ‘새’가 없어서 ‘샘물’도 ‘생각’도 없거든. 여름숲을 눈여겨보면, 닮지만 다른 잎빛이 어떻게 짙푸르게 물드는지 알 수 있어. 새봄에 갓 돋는 잎빛은 나무마다 다른데, 새여름 잎빛도 나무마다 달라. 새가을에 물드는 잎빛도 다를 뿐 아니라, 새겨울에 앙상한 가지빛까지 나마무다 다르단다. ‘철갈이’를 하는 푸른옷마냥, 사람은 ‘철들기’를 하면서 마음을 갈고닦으면서 몸을 가다듬어. 천천히 물이 들면서 찬찬히 빛이 번지는 숲은, 바로 풀과 나무가 이루는데, 사람은 마음에 온갖 생각을 반짝반짝 빛숲으로 이룬단다. 네(내) 빛숲이 자라는 길을 보렴.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숲노래 삶읽기 / 숲노래 마음노래

하루꽃 . 냄비 2025.6.5.나무.



네가 사는 나라에서는 ‘솥’을 썼어. 묵직하고 커다란 살림이란다. 너희 이웃나라에도 솥이 있는데, 가볍고 얇은 솥인 ‘냄비(なべ)’를 즐겨썼어. 너희 나라 사람들은 묵직하고 큰 솥은 다루거나 씻거나 나르기 힘들다고 여기면서 어느새 ‘솥’을 버리고서 ‘냄비’라는 ‘일본 얇은솥’으로 바꾸었단다. 그런데 가만히 짚어 보렴. 끓이는 살림이라면, 크기나 빛깔이나 모습을 바꾸어도 ‘솥’이지 않아? 왜 말까지 덩달아 버릴까? 모든 벌레는 다르지만 ‘벌레’라는 이름이고, 모든 꽃은 다르지만 ‘꽃’이란 이름이야. 너희 나라하고 아주 먼 나라에서 들여와도 그저 ‘나무’라는 이름이지. 그러니까 이름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해. 왜 어느 이름은 그대로 가는데, 어느 이름은 슬그머니 바꿀까? 더 들여다보면 요사이는 ‘플라워’나 ‘보태니컬’처럼 대놓고 바깥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쓰기도 하고, 이런 이름이어야 멋스럽거나 뜻있다고 여기기도 해. 비닐을 덮는 시골사람조차 ‘덮기’가 아닌 ‘멀칭’이라는 영어 이름을 쓴 지 한참이야. 들숲에 돋는 풀을 왜 ‘풀’이라 하지 않고서 ‘잡초·약초·야생초’나 ‘식물’이라고 할까? 풀을 ‘풀’이라 하지 않을 적에는, 사람들 스스로 풀빛과 풀내음과 풀살림을 잊다가 잃어. 솥을 ‘솥’이라 하지 않을 적에는, 바로 너희 스스로 밥살림과 집살림을 다 잊고 잃는 굴레로 나아간단다. 이름을 잊거나 버릴 적에는 ‘임·있음’을 잊거나 버려. “내가 나로 있는 이곳”을 잊고 잃는단다. 너는 무엇을 보겠니? 너는 어디로 가겠니? 너는 어떻게 있겠니? 너는 어떤 ‘임’으로 서겠니? 너는 살림을 짓고 이루겠니? 아니면 살림시늉으로 가겠니?


ㅍㄹㄴ


글 : 숲노래·파란놀(최종규). 낱말책을 쓴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쉬운 말이 평화》, 《곁말》,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이오덕 마음 읽기》을 썼다. blog.naver.com/hbooklov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