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예술로 가는 길 - 창조적 사진을 위한 실제적인 조언, 개정판
한정식 지음 / 눈빛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 책이름 : 사진, 예술로 가는 길
- 글쓴이 : 한정식
- 펴낸곳 : 눈빛(2006.5.1.)
- 책값 : 12000원


 시골집에 있을 때는 쉬를 할 때 꼭 밖에 나갑니다. 밖에 나가서 산기슭이나 감나무 밑이나 밭둑을 찾습니다. 뒷간에서는 똥만 누고 오줌은 곧바로 이 산 저 들에 돌려 줍니다. 예부터 ‘감나무 밑에 개를 매어 놓으면 감이 맛있게 잘 익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늘 자리를 바꾸어 가며 오줌을 누니까 감나무가 썩 잘 자라지는 않겠지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을까요?


.. 사진가의 삶이 진지해야 진지한 사진이 나오는 것이지, 사진을 오래 해야 나오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사진을 오래 해도 인간적으로 숙성되지 못한 사람에게서는 그처럼 얕은 사진밖에 나오지 않고,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어도 인간적 깊이가 있는 사진가에게서 심도 있는 사진은 나오는 법이다 ..  〈21쪽〉


 어제부터 그믐이지 싶습니다. 달력을 봅니다. 맞네요. 그믐이 되겠네요. 밤에 쉬하러 밖에 나오면 캄캄 어두움이더니만. 제가 사는 바로 옆집은 불이 나는 바람에 다른 곳으로 옮겨갔습니다. 이제, 제가 사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은 더 깊은 산속에 하나, 마을로도 한참 떨어진 곳에 또 하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깊은 밤에 불을 다 끄고 바깥으로 나오면 그야말로 어둠뿐입니다. 둘레에 불이 하나도 없으니 밤하늘이 아주 잘 보입니다. 추운 겨울바람이 더 춥게 느껴집니다. 예부터 추운 날은 별이 더 잘 보인다고 했는데, 별이 막 떨어질 듯이 보인다고 했는데, 안경을 안 써서 잘은 모르겠으나 참말 별이 잘 보입니다. 어제는 부엉이 우는 소리를 아주 오랜만에 들었습니다. 이제 바야흐로 사냥철이 끝나가는지, 사냥꾼들 총부리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멧새가 밤에 조용조용 몰래몰래 우는가 봅니다.


.. 사진이란 어떤 예술이라는 말인가. 한마디로 해서, 자연과 인생에 대한 자기 발언이다 … 복합적인 인생과 자연을 대상으로 거기에서 깨달은 내 생각, 내 느낌을 찍는 것, 이것이 사진이다 … 진지하게 우리의 삶과 환경을 둘러보는 것이 사진이라는 인식을 바탕에 깔고 사진을 해야 한다 ..  〈62∼63쪽〉


 고요한 곳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일이란 큰 고마움이자 아름다움이라고 느낍니다. 오로지 제 스스로 몸을 놀려야 살아갈 수 있고, 사람 아닌 온갖 소리와 움직임을 느낄 수 있거든요. 지금 이 세상에는 사람 목소리와 움직임이 얼마나 많은가요. 이런 소리와 움직임에서 멀찍이 벗어나 나한테서만 나는 소리와 움직임으로, 또 사람 아닌 소리와 움직임을 부대낄 수 있는 곳이 어디일는지요.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인데, 자연을 못 느끼고 자연을 모르고 자연을 멀리하는 요즘 아닙니까. 더욱이, 이제는 태어나기를 시멘트집에서 태어나고 죽기를 시멘트집에서 죽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흙하고는 동떨어졌달까요. 인연이 없달까요. 흙이 뭔 줄도 모른달까요.


.. 예술은 황무지에 길을 내는 행위이다. 다른 사람들이 이용할 길을 만드는 작업이다 … 이미 닦여진 길은 그냥 걸어가기에는 편하지만, 그것은 남을 따라가는 행위이다. 길을 만드는 일이 아닌 것이다. 예술가란 길을 만드는 사람, 길을 여는 사람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  〈149쪽〉


 지지난주부터는 물이 아예 안 나옵니다. 그나마 그사이 날이 풀리며 두 번 녹은 적 있는데, 그 뒤로는 안 녹네요. 이제부터 참 겨울이구나 싶습니다. 뭐, 물이 안 나와도 그동안 미리 받아 둔 물이 있으니 밥은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씻을 수는 없어요. 그런데 이 산골짜기에서는 씻지 않아도 때 탈 일이 없으니까, 몸 더러워질 일이 없으니까, 안 씻는다고 몸에 나쁠 일이 없습니다. 외려 씻는 일이 도움이 안 된달까.

 해가 지고 밤이 되면 어두워지는구나 하고, 창밖이 밝아지며 날이 새면 아침이 오는구나 합니다. 아침마다 박새와 콩새가 조잘조잘 지저귀며 창가에까지 날갯짓을 합니다. 사람이 있으니 먹잇감이 둘레에 있을까 싶어 오는구나 싶은데, 안타깝게도 저는 이 새들한테 줄 만한 먹이가 없군요.

 제 사진기는 헌책방에서만 움직입니다. 시골집에 있을 때는 가방에서 얌전히 잠들어 있습니다. 가끔, 제 살림집 둘레라든지 책상맡이라든지 사진으로 담으면 어떨까 싶기도 해서 디지털사진을 찍곤 합니다. 지금도 글을 쓰며 밤참으로 먹던 날고구마를 한 장 찍었습니다. 필름값이 두려운 저로서는 가볍게 즐기고픈 사진은 디지털을 씁니다. 필름값이 두렵기는 하지만 헌책방 삶터를 고이고이 간직하고 싶기에, 헌책방을 찍을 때만큼은 필름을 씁니다. 거의 아낌없이.

 생각해 보면, 누구나 자기 삶은 자기 스스로 가꾸며 즐길 때가 가장 좋지 싶어요. 저는 저대로 사람 발길 드문 시골집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자전거를 타고 헌책방 나들이를 떠납니다. 제가 찍는 사진이라면 이런 제 삶이 고스란히 담긴 사진이겠지요. 제가 찍는 사진이 예술이 될 수 있다면, 저부터 제 삶이 반가워야 할 테고 즐거워 할 테며, 기쁜 마음으로 가꾸어야지 싶어요. 뭐, 예술이 안 되더라도 저 나름대로 살아가는 삶을 담을 수 있다면, 제 목소리를, 제 움직임을, 제 마음을, 제 생각을 담을 수 있다면 좋을 테고요. (4340.1.1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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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불의 책장수
오스네 사이에르스타드 지음, 권민정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 책이름 : 카불의 책장수
- 글쓴이 : 오스네 사이에르스타드
- 옮긴이 : 권민정
- 펴낸곳 : 아름드리미디어(2005.11.1.)
- 책값 : 12000원


 지난주 서울 나들이를 갔을 때입니다. 서울에 머물 땐 으레 홍제동에 사는 선배 집에서 지냅니다. 선배들은 텔레비전과 영화를 즐겨보는 터라, 이 집에 머물 땐 텔레비전과 영화도 함께 보게 됩니다. 지난주에는 우리 나라에도 곧 들어온다는 〈보랏〉이라는 영화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 술탄이 파키스탄에 있는 사이에 그의 책방은 공공도서관과 마찬가지로 약탈을 당했다. 귀한 책들이 헐값으로 수집자들에게 넘어갔고, 탱크나 총알이나 수류탄과 맞바꿔지기도 했다. 술탄 자신도 책방을 챙기기 위해 파키스탄에서 돌아왔을 때 국립도서관에서 약탈된 책을 몇 권 사들였다. 정말 수지맞는 장사였다. 수백 년 된 작품들을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구입할 수 있었다. 이 중에는 우즈베키스탄의 500년 된 원고도 있었는데, 나중에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이 원고를 되사기 위해 술탄에게 2만5천 달러를 제시했다. 술탄이 발견한 작품 중에는 자히르 샤 국왕의 소장본이자 애독서인, 서사 시인 피르다우시의 《왕서》도 있었다. 술탄은 제목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도둑들로부터 아주 헐값에 책 여러 권을 사들였다 ..  〈36쪽〉


 영화 〈보랏〉은 카자흐스탄사람이 미국에 와서 겪는 일을 우스꽝스럽게 그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느끼기로는 ‘우스꽝스럽게’ 그리지 않았습니다. 카자흐스탄이라는 나라를 아주 바보로, 얼간이로, 질낮고 쓰레기와 다를 바 없는 나라처럼 그렸습니다. 이와 달리 미국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앞서고 멋있고 아름답고 깨끗하고 평등과 평화가 넘치는 나라로 그렸습니다.


.. 샤킬라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용기를 내어 결혼 후에도 다시 일하러 나가겠다고 하면 허락하겠느냐고 묻는다. 와킬이 그러겠다고 대답하지만 샤킬라는 믿지 않는다. 이 사람은 아마 결혼하자마자 마음을 바꾸겠지. 하지만 와킬은 샤킬라를 안심시킨다. 일하는 게 행복하다면 자기는 괜찮다고, 물론 아울러 아이들과 살림만 잘 챙긴다면 말이다 ..  〈104쪽〉


 영화 〈보랏〉은 카자흐스탄을 무대로 했다지만, 정작 이 영화를 찍은 나라는 카자흐스탄이 아닌 루마니아. 더욱이 영화 무대로 자리를 내어준 루마니아 마을은, 자기네 마을이 ‘강간범이 득시글거리고 꾀죄죄하고 아주 몹쓸 곳’인 듯 그려졌다면서 영화 만든 사람들을 고소한다는 이야기가 들립니다. 그래, 영화를 찍은 미국사람들은 미국 극장에 내걸 이 영화를 보면서 키득키득 웃고 ‘저런 미개하고 야만스런 나라!’ 하고 읊겠지요. 참과 거짓이 무엇인지는 조금도 모르는 채, 영화에 담은 ‘우스개’를 즐기는 사이, 어느 곳에서는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줄 모를 테지요. 이 영화를 내걸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카자흐스탄이 참말로 어떤 나라인지 모르는 채, 영화에 나온 모습이 마치 참이라도 되는 듯 엉뚱하게 알지 않겠어요? 언젠가 할리우드 영화에서 ‘대한민국 남녘’ 모습을 엉터리로 그려내어 말썽이 있었음은 까맣게 잊어버렸을 테고요.


 “여성들은 넉넉한 삶을 살지도, 자신의 아름다움이나 젊음의 열매를 맛보지도, 사랑의 즐거움을 누리지도 못한다(61쪽).”고 하는 아프가니스탄. “교사의 상당수가 여자였기 때문에 몇몇 남학교도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자격을 갖춘 남자 교사들을 찾기가 힘들었던 것이다(100쪽).”는 현실.


 우리들은 ‘북녘’이라는 나라를 얼마나 알면서 북녘 이야기를 할까요. 일본이라는 나라를 얼마나 알면서 일본 이야기를 할까요. 가까운 중국이나 러시아라고 하지만, 이들 나라 속살을 제대로 알까요?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버마, 스리랑카,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는 얼마나 알지요?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 서울이 ‘카불’임을 아는 사람은 그럭저럭 있겠지만, 이 나라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꿈꾸는지, 무슨 일을 하고 무슨 놀이를 즐기는지, 문화와 사회는 어떠한지, 이 나라를 둘러싼 세계 흐름은 어떠한지를 털끝만큼이나마 헤아리려는 움직임이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으로 쳐들어간 까닭을 알아보려는 사람 또한 몇이나 될는지. (4340.1.1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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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하나님과 함께
야누쉬 코르착 지음, 송순재.김신애 옮김 / 내일을여는책 / 2001년 6월
평점 :
품절


 

- 책이름 : 홀로 하나님과 함께
- 글쓴이 : 야누쉬 코르착
- 옮긴이 : 송순재, 김신애
- 펴낸곳 : 내일을여는책(2001.6.5.)
- 책값 : 6500원


 그제 시골집으로 돌아왔을 때입니다. 집안 분위기가 어딘가 으스스했습니다. 왜 그럴까 하고 생각해 보지만 달리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천장에 올려놓은 쥐끈끈이에 쥐가 잡혀서 죽었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이튿날 천장 뚜껑을 열고 들여다보니 작은 새앙쥐가 죽어 있습니다. 그렇구나. 이 목숨 하나 죽어서 그랬구나.

 죽은 쥐를 어찌 할까 망설입니다. 땅에 묻을까 어찌할까. 서울이었다면 묻을 땅이 없으니 쓰레기통에 처박힐 텐데. 망설이다가 보일러방에 옮겨 놓습니다. 그런데 그 뒤로 여기저기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다른 쥐가 들어왔나? 불을 켜 놓고 샅샅이 살펴보지만 보이지 않습니다. 불을 끄면 다시 부스럭 소리. 그러다가 문득 드는 생각이 있어서 보일러방에 옮겨 놓은 새끼쥐 주검을 들고 와서 천장에 다시 올려놓습니다. 그 뒤로 소리가 뚝 끊깁니다.

 어미쥐였을까요. 글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저는 앞으로 가방, 자전거로 다시 태어나야지 싶은데, 새끼쥐로도 다시 태어나야겠구나 싶습니다. 책방 나들이를 하며 가방을 애먹이니까, 먼길 나들이를 한다며 자전거를 고달프게 하니까, 또 쥐끈끈이를 써서 쥐를 죽였으니까. 그러고 보니, 벼로도 보리로도 콩으로도 배추로도 무로도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제가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목숨을 바쳐 준 모든 목숨붙이 삶을 한 번씩 차근차근 다시 겪어야지 싶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제 넋은 홀가분할 수 없어요. 지금은 사람 모습이지만, 또 지금은 사람으로 있다고 해서 다른 목숨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잡아서 먹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못살게 굴기도 하잖습니까. 세상에 하느님이 있다면 사람이 믿는 하느님뿐 아니라 버느나무가 믿는 하느님이 있고, 새앙쥐가 믿는 하느님이 있으며, 쑥이 믿는 하느님이 있다고 봅니다. 또, 이렇게 다 다른 하느님이 있겠지요. 고구마 하느님, 파리 하느님, 개 하느님, 고등어 하느님도 있지 싶습니다. 모든 목숨붙이가 오롯이 제 삶을 사랑하고 가꾸고 즐길 수 있도록 돌보고 어루만져 주는 하느님이 있지 싶습니다.


……
저는 저 자신을 위해서 하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에
똑바로 서서 간청합니다.
아이들에게 선한 의지를 주시고, 그들의 힘을 북돋워 주시고,
그들의 수고에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아이들을 편한 길로 인도하지는 마옵소서.
그렇지만 아름다운 길로 인도하옵소서.
제가 드리는 간청에 대해 단 한 번 드리는 불입금으로
저의 하나뿐인 찬송을 받아 주시옵소서.
그것은 슬픔입니다.
저의 슬픔과 노동을 드립니다.  〈한 교사의 기도 - 120쪽〉


 우리들 믿음이 오롯이 이루어지자면, 하나로 크게 빛을 보자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려면, 사람 아닌 목숨붙이를 아끼는 하느님을 느끼고, 사람 아닌 목숨붙이와 함께하는 하느님을 섬기고, 사람 아닌 목숨붙이를 어루만지는 하느님을 받아들일 때이지 싶습니다.

 낮밥을 먹으려고 밥술을 푸다가 천장을 올려다봅니다. “미안하다, 미안해, 미안합니다.” 세 마디를 속으로 읊습니다. 그러나 “하지만 내가 사람으로 사는걸…….” 하는 핑계가 이어집니다. 참말로 내가 사람으로 살기 때문에 저 새끼쥐를 끈끈이로 잡아 죽여도 되는가요?


.. 그가 말하는 이야기는 다만 단순한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일상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문제와 시련과 고통으로 얼룩진 삶의 현장이 늘 그를 따라다녔다. 하루를 넘기기가 버거웠고, 하루의 과제를 해결하느라 늘 허덕이며 씨름하였다. 그는 실천을 소중히 여겼다. 온통 실천과 뒤범벅이 되어 생을 불태웠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 그의 이야기는 읽기가 그리 쉽지 않다. 또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다. 그 맛은 자극적인가 하면, 때로는 깊고, 때로는 아련한 아픔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쓴 동화들은 아주 재미가 있다. 그의 글은 흔히 논리적인 주장이나 체계적인 이론을 기대한 독자들을 당혹하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언제쯤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이나 설명이 나올까 하는 기대를 충족시키지도 않는다. 장르를 구분하기 좋아하는 문학도들은 그의 글을 두고 혹 당혹해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한 글쓰기야말로 읽는 이들이 창조적 사유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독특한 힘이었다 ..  〈옮긴이 말 : 18∼19쪽〉


 쥐를 잡았기에 낮이나 밤에 벽을 긁는 소리가 사라졌습니다. 쥐들이 제 책을 갉아먹을 걱정도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무겁습니다. 외려 답답합니다. 그렇지만 다시 쥐가 끓어 사각사각 극극 긱긱 하는 소리가 들린다면? 틀림없이 그때 또다시 끈끈이를 다시 찾아서 어딘가에 놓지 않을는지. 못난 사람이라서. (4340.1.1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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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느긋하게 읽어서 스스로 배우는 것
 [책이 있는 삶 3] '빠르게 많이' 읽기를 경계함


 제가 책읽는 모습을 보는 분들은 놀랍니다. 그다지 빨리 읽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그렇게 많은 책소개 글을 언제 다 쓰느냐고 묻습니다. 가만히 보면, 저는 책을 더디게 읽는 편이고, 여러 권을 겹쳐서 읽습니다. 그래서 얼핏 보면 무척 빠르게 많이 읽는 듯하지만, 오래오래 느긋하게 여러 가지를 읽기에 여러 가지 책을 두루 알 뿐입니다. 책을 읽은 지는 퍽 오래되었으나 책 이야기를 글로 쓴 지는 얼마 되지 않기도 하고요.

 책은 저에게 지식을 건네주는 교사가 아닙니다. 지식은 책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얻을 수도 있고 인터넷이나 신문에서도 얻을 수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스스로 깨달아 얻을 수도 있고요. 책에서 지식을 얻을 때, 책은 그냥 ‘참고서’입니다. 옆에 놓고 도움 삼는 책이요. 하지만 저에게 책은 올바르게 살아가는 길을 열고 보여주는 스승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온갖 일을 하면서 깨닫고 느끼고 새롭게 헤아리는 갖가지 이야기를 만나고 배우는 마당입니다. 미처 겪지 못한 일을 다른 이들이 먼저 겪은 이야기로 들으며 차근차근 준비할 수 있을 때도 있고, 앞으로 겪을 일을 맞이하도록 마음다짐을 할 때도 있고, 벌써 겪은 일을 하나둘 되짚으며 돌아볼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책을 느긋하게 읽습니다. 서둘러 읽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읽다가 가슴을 울리는 대목을 만나면 잠깐 책을 덮고 숨을 몰아쉽니다. 그 대목 하나로 하루 내내 즐겁기 때문입니다. 너무 많은 것을 얻기보다는 그때그때 제 자신을 이끌고 일깨우는 슬기를 얻고픈 책입니다.


.. 빨리 어른이 되게 하는 것이 교육이 아니다.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의 아름다움이 있다. 빨리 개구리가 되는 것이 올챙이의 목적이나 그것이 결코 행복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올챙이는 올챙이 때의 헤엄치는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  《쇼지 사부로-새와 이야기할 수 있는 아이》(특수교육,1990) 122쪽


 《새와 이야기할 수 있는 아이》란 책은 판이 끊어졌기에 헌책방에서 만났습니다. 지난해 8월 22일에 신촌에 있는 헌책방에서 산 뒤로 오늘 아침까지 181쪽을 읽었습니다. 읽는 내내 가슴을 울리는 대목이 많아서 좀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이 대목도 그래요. “빨리 어른이 되게 하는 것이 교육이 아니”듯, “빨리 책을 읽는 것이 책읽기(독서)가 아닐” 테지요? 저는 이렇게 믿습니다.

 책에 담은 줄거리를 제대로 헤아리는 것이 책읽기라고 봅니다. 책을 읽는 빠르기는 하나도 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책을 몇 권 읽었느냐도 마찬가지입니다. 통계 내기 좋아하는 분들은 우리 나라 사람들이 한 달이나 한 해에 책을 몇 권 읽는지를 조사하지요? ‘권수 조사’는 하지만, 자기가 읽은 책을 제대로 자기 것으로 삼았는지, 읽은 뒤에 얼마나 자신이 달라졌는지는 살피지 않습니다.

 지금은 더는 하지 않는 어느 방송사 ‘책읽기 추천 풀그림’은 “어떤 책을 읽어야 한다”는 당위는 내세우지만 “그 책을 읽어서 어떤 마음을 품고 어떻게 살아가고 일하고 놀고 어울려야 좋은지”는 이야기하지 못했습니다. 또 “책을 읽는 마음가짐과 몸가짐”, “추천하는 책에서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헤아리는가”는 살피지 않았습니다.


.. 현명해지고 싶은 고매한 희망을 품고 어려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헛수고로 끝났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애당초 그러한 책을 읽으려고 한 것이 잘못이었다고 믿어버린대도 무리가 아니다. 그런데, 잘못은 오히려 난해한 책을 한 번밖에 읽지 않고 그것으로 많은 것을 얻으려고 했던 데에 있다. 올바른 방법으로 접근하면, 전문서가 아닌 바에야 설령 아무리 난해한 책이라도 독자를 절망시키는 일은 없다 ..  《모티머 J.애들러-독서의 기술》(범우사,1986) 26쪽


 책을 느긋하게 읽는 일은 어려운 책을 읽을 때에도 참 좋습니다. 날마다 조금씩 읽어 나가다 보면, 날마다 새로 얻고 아는 것이 있는 터라, 처음 읽을 때는 낯설고 어렵던 이야기들이 차츰차츰 눈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퍽 빠르게(하지만 다른 책을 읽을 때보다는 느린) 그 어려운 책을 읽을 수 있어요.

 독후감을 써야 한다고, 과제물을 내야 한다고 허겁지겁 읽어제끼는 책에서 무엇을 얻거나 배우겠습니까? 책을 읽어 독후감을 쓰겠다고 하면 독후감도 독후감대로 쓰이지 않지만, 책은 책대로 읽히지 않습니다. 책 읽은 느낌을 쓰고프다면 책을 즐겁게 읽으면 그만이에요. 즐겁게 읽은 책이라면 책 읽은 느낌이 술술 즐겁게 풀려나옵니다. 어렵고 딱딱하고 시간에 쫓겨 거칠게 대충대충 읽은 책은 독후감을 쓸 때 괜히 말이 어려워지고 딱딱해지고 거칠어지며 대충대충이 되고 말아요.

 이런 말도 한번 생각해 보면 좋겠군요. 일본에서 이름난 지식인인 다치바나 다카시란 사람은 책을 ‘빨리 많이’ 읽어내는 일을 늘 힘주어 말하지요? 그런 생각을 맞바로 비판한 이야기입니다.


.. 나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몇 가지 있다. 우선 ‘한 쪽 읽는데 1초, 좀 늦더라도 2,3초’라는 읽기 방식이다. 그런데 이것은 가능한 방법은 아니다. 굳이 심신에 무리를 주면서라도 훈련을 거듭하면 나한테도 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책을 그렇게나 빠른 속도로 읽지 않으면 안 되는지 그것을 모르겠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내가 읽은 재미있는 책, 엉터리 책 그리고 나의 대량 독서술, 경이의 독서술》은 서평집이기도 하지만, 거기서 예로 들고 있는 책 가운데 5분이나 15분에 읽어버리고 싶은 책은 단 한 권도 없다. 매력이 있을 것 같은 책이라면 여느 때처럼 느릿느릿 읽고, 읽고 싶지 않은 책이라면 처음부터 아예 손에 들지 않는다 ..  《야마무라 오사무-천천히 읽기를 권함》(샨티,2003) 18쪽


 느긋하게 책을 읽는 일만큼 책읽기에서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책은 지식을 얻고자 읽는 매체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읽어서 즐기는’ 것이고, ‘읽어서 즐기는 가운데 스스로 얻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읽어서 즐기는 가운데 스스로 얻는’ 것은 슬기일 수 있고 지식일 수 있고 정보일 수 있습니다. 무엇을 얻고 배우고 깨우치더라도 좋습니다. 읽는 맛, 보람, 재미, 즐거움, 알뜰함, 반가움, 멋짐, 훌륭함, 눈물, 웃음, 슬픔, 기쁨, …… 같은 온갖 것을 느낄 수 있는 일이 가장 중요하지 싶어요.

 사람이 어떤 일을 빨리 해내는 게 가장 중요하다면, 사람은 나기 무섭게 죽어야 가장 중요하고 좋은 일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빨리 일을 해내는 것보다 ‘제대로 즐겁고 올바르고 알맞게’ 해내는 게 중요하겠지요? 책읽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꼭 ‘천천히’일 까닭은 없습니다. 자신에게 가장 알맞는 빠르기로 ‘느긋한 마음’을 품고 읽을 때가 가장 좋지 싶어요.

 책을 고를 때도 느긋하게, 책을 사서 읽을 때도 느긋하게, 읽으면서 시나브로 얻은 것을 마음으로 즐기고 몸으로 옮길 때도 느긋하게 하는 일이 바로 책읽기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멋진 일이자 놀이라고 생각합니다. (4337.10.13.물.ㅎㄲㅅㄱ)


= 글을 쓰는 사이에 소개한 책 =
1.새와 이야기할 수 있는 아이
 - 지은이 : 쇼지 사부로 / 옮긴이 : 정필화 / 펴낸곳 : 특수교육(1990.7.24)
2.독서의 기술
 - 지은이 : 모티머 J.애들러 / 옮긴이 : 민병덕 / 펴낸곳 : 범우사(1986.12.20)
3.천천히 읽기를 권함
 - 지은이 : 야마무라 오사무 / 옮긴이 : 송태욱 / 펴낸곳 : 샨티(2003.11.11)

***
차분하고 느긋하게 책을 읽는 방법을 말하고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책읽기가 한결 즐겁고 반가운 일이 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이런 글을 써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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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누슈 코르착의 아이들
야누슈 코르착 지음, 노영희 옮김 / 양철북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 책이름 : 아이들
- 지은이 : 야누슈 코르착
- 옮긴이 : 노영희
- 펴낸곳 : 양철북(2002.12.18)
- 책값 : 8500원



'아이들'을 돼지우리에 가두는 어른들
- 야누슈 코르착 지은 <아이들>



<1> 1942년 8월 6일, 고아들과 함께 가스실에서 죽은 코르착


유럽에서 큰 전쟁이 다시 터지고 유대인이 하나둘 끌려가던 1942년 8월 6일, 야누슈 코르착이라고 하는 사람은 아이들 손을 잡고 폴란드 거리를 걸었습니다. 그 뒤에는 스테파니아라는 고아원 교사가 마찬가지로 아이들 손을 잡고 걷습니다. 나라가 보살피지 못하고, 사람들이 내버린 고아들 200명 남짓은 저마다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이나 책을 손에 들고 단출하게 옷을 차려입은 채 트레블링카 가스실이 마지막역인 화물차에 올랐습니다.

코르착을 아는 동무들은 독일군 손아귀에서 코르착이 벗어나게 해 주겠다고 애를 썼지만, "당신 아이가 아프고 불행하고 위험에 처해 있는데 이 아이를 버리지는 않겠지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200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꾸하면서 폴란드 거리 곳곳에 버려진 고아들을 거두어서 보살피다가 가스실로 갔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1904년에 의사 자격을 얻은 뒤 러일전쟁 때 군의관으로 징병된 코르착은 전쟁을 겪은 뒤, "전쟁은 참으로 혐오스러운 것이다.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굶주리고 학대받고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떤 국가든 참전하기 전에 아무 죄도 없는 아이들이 다치고 죽고 고아가 되어야만 하는 현실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사회를 개혁하려면 먼저 교육을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편,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빼앗기고 잃어버린 '존중', '사랑', '관심'을 되돌려 주고자 애쓴 사람이 야누슈 코르착이라고 하는 폴란드사람입니다.


아이가 어른과 다른 점은 단 하나, 돈을 벌지
못한다는 것뿐입니다.
생계를 어른에게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어른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강요받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양철북(200)> 35쪽


"아이들을 알려고 하기 앞서 자기 자신을 알려고 애쓰라"고 말하는 코르착입니다. 세상사람을 고치는 의사가 되었으나 의술만으로는 아픈 마음을 다스릴 수 없어서 교육자가 되고, 고아원장이 된 코르착입니다. "비밀을 캐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는 비밀을 가질 권리가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어린이가 누려야 할 권리, 어린에게 지켜줘야 할 권리를 말하고, 몸으로 지켜주려 애쓴 코르착입니다.


아이가 숟가락으로 식탁을 두드리고 있을 때
그 숟가락을 빼앗아 버린다면,
단지 물건 하나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자신의 에너지를 분출하고
소리를 냄으로써 자신을 표현하던
손의 일부를 빼앗는 것입니다. <38쪽>



우리들은 아이들이 누리고 얻을 권리도 지켜주지 못하지만, 자기 감정을 나타낼 숟가락마저 빼앗아 버립니다. 그리고 주먹을 들어 머리통을 내갈기거나 손바닥을 펴서 뺨따귀를 때리죠? 손가락에 힘을 주어 팔뚝이나 옆구리에 멍이 들 만큼 세게 꼬집기도 하고요.


<2> 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까지는 아주 정성스럽게 '좋은 책'을 기꺼이 사 줍니다. 돈이 얼마가 들던 그다지 신경쓰지 않습니다. 아이가 그 책을 다 읽어내고 속으로 삭여내느냐도 헤아리지 않습니다. 여기저기에서 들은 깜냥으로 끝없이 책을 사 줍니다. 그런데 이런 '책 사주기'는 아이가 중학생이 될 때부터 끊어집니다. 이때부터는 학원교재, 문제모음, 참고서, 학습지뿐입니다. 이제는 과외비에 돈 대느라 바쁩니다.


무슨 놀이를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노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놀이를 할 때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느냐가 중요합니다. <42쪽>



제 어릴 적 기억으로, 어머니가 책을 사 주신 일은 아주 드뭅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어릴 적에 책을 얼마 안 읽었습니다. 동네 아이들과 신나게 뛰어노느라 바빴거든요. 놀이란 놀이는 다 하면서 놀던 그때를 생각해 보면, 요즘 아이들은 우리에 갇힌 돼지와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좁은 우리에 틀어박혀서 주인이 주는 밥만 꾸역꾸역 먹어야 하는 돼지와 요즘 아이들이 무엇이 다를까요? 좁디좁은은 우리에 갇힌 돼지는 자기 생태와 달리 '사람 눈에는 더럽게 보이고 살도 디룩디룩 찝'니다. 마찬가지로 요즘 아이들은 머릿속에 지식은 많이 들어가지만 사람답게 자라나는 마음과 생각은 익히거나 배우지 못해요.

책을 푸짐하게 사 주는 부모들이 그 책을 아이와 함께 읽고 즐기나요? 아닙니다. 그런 부모는 아주 드뭅니다. 어린이책에 담긴 깊고 너른 뜻을 제대로 헤아리는 부모는 눈 씻고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저 '아이가 어리니까 사서 읽히게 하는 것'뿐인 부모가 거의 모두입니다. 그러니, 그런 부모들이 중고등학생 아이들에게 책 한 권 사 주지도 않을 뿐 아니라, 아이가 사람답게 크고 곧고 튼튼한 생각을 갖추도록 가르치는 일에는 털끝만큼도 눈길을 보내지 못하는 거예요.

아이에게 참으로 중요한 걸 모릅니다. 세상 모든 부모들은 '아이를 낳고 밥을 먹이고 옷을 입힐 줄'은 알지만 '아이가 사람답게 자라도록 가르치고 이끌 줄'까지는 모릅니다. 밥과 옷과 집은 돈이 있으면 얼마든지 해줄 수 있습니다. 요즘 부모는 '돈'으로 할 줄 아는 것만 생각할 뿐, 돈 없이, 아니 돈을 넘어서 온몸과 온마음으로 부대끼며서 아이 마음을 헤아리고 함께하면서 나눌 수 있는 것은 도통 모르고, 알려고도 애쓰지 않습니다.


똑같은 교복을 입고 있어도
그 안에는 수백의 다른 심장이 뛰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각은 서로 다른 난제이고,
서로 다른 과업이며,
서로 다른 염려와 관심을 베풀어야 할 대상입니다. <58쪽>



<3> 어린이에게도 '사람 권리'가 있다


국제연맹은 1924년에 어린이 인권선언을 채택하고 1959년에 2차로 선언문을 다시 만들지만 '말'뿐인 선언문이었답니다. 코르착은 국제연맹 선언문이 있기 앞서부터, "선언문은 선의에 호소할 것이 아니라 강요해야 한다. 호의를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요구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1989년, 비로소 '어린이 인권협정'이 나와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어린이 인권' 문제를 법으로 강제할 장치를 마련합니다. 하지만 이런 인권협정이 있어도 우리 나라에서 살아가고 자라는 어린이들 모습은 '인권을 누리는 모습'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대로, 중고등학생은 중고등학생대로, 학교를 안 다니는 아이들은 또 그 아이들대로 온갖 짐과 굴레에 갇힌 채 숨도 제대로 못 쉬며 살고 있어요.

"사실은 어린이들은 인류, 국민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뿐 아니라,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이고, 현재 여기에 있는 사람들입니다.<67쪽>"라는 걸 어른들이 모르기 때문일까요?


"엄마는 어른이 차를 엎지르면 '괜찮아요'라고
말하면서 내가 엎지르면 화를 내요!"
아이들은 불공평한 대우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서 종종 울음을 터뜨리지만 어른들은
대수롭지 않고 성가신 것으로만 취급합니다.
그리고 무시할 만한 것으로 여깁니다.
"또 칭얼거리고 징징대네!"
이 말은 아이들에게 쓰려고
어른들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53쪽>


어린이가 어른의 잘못을 따지는 것을
우리는 싫어합니다.
그들에게는 우리의 잘못과 어리석음을 눈치챌
권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56쪽>



돈이 있고, 얼굴이 예쁘고, 권력이 있으면 죄를 지어도 죄값을 받지 않고 뒷구멍으로 빠져나올 수 있듯, 우리들은 '어른'이라는 엄청난 권력으로 '어린이'를 차별하고 괴롭힌다고 봅니다. 멀리 볼 것 없이, 우리네 학교를 생각해 봅시다. 교사들은 학생들이 잘못했을 때 '체벌'해야 하느니 마느니, 회초리를 어떤 것으로 써야 하느니 마느니를 따집니다. 그런데, 교사들이 잘못했을 때는? 학생들이 잘못했을 때 교사에게 체벌을 받아야 한다면, 교사들이 잘못했을 때는 학생에게 체벌을 받으면 될까요?


<4> 윗물이 맑으면 아랫물이 맑겠죠?


코르착이 한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에게는 예부터 내려오는 훌륭한 말이 있습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이 그 말입니다. 윗물, 그러니까 어른들이 맑고 깨끗하고 아름다워야 아랫물은 아이들은 그런 어른을 보고 배우고 따르고 우러르고 좋아하기 마련입니다.

청소년범죄는 청소년이 못나고 문제가 많아서 일으키는 범죄가 아닙니다. 어른들이 저지르는 온갖 범죄를 흉내내고 따라하는 범죄입니다. 청소년들이 범죄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터전을 만들고 만 어른들 탓입니다. 남녀차별, 인종차별, 계급차별, 재산차별, 생김새차별, 지역차별, 학력차별이 곳곳에 퍼진 우리 사회에서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고 느끼면서 자랄까요? 이렇게 '차별 넘치는 세상'에서 동무들끼리 따돌리고 괴롭히는 '왕따'라는 게 안 생길 수가 없습니다.


.. 안타깝게도, 무심한 어른은 화가 났거나 기분이 좋지 않
을 때, 이 물건들을 꺼내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머니
가 늘어진다거나 서랍 속에 복잡하다는 이유로요. 다른 사
람의 소중한 재산을 이런 식으로 매정하게 다룰 수 있나요?
이렇게 하는데 어떻게 아이가 다른 사람이나 물건을 존중하
는 마음을 배우겠어요? 그것은 쓰레기통에 들어갈 휴지 조
각이 아니라 소중한 물건이고, 눈부신 꿈의 조각입니다 .. <131쪽>



아이들을 아이들답게 받아들이고 껴안고 토닥거리면서 감쌀 수 있는 마음이 참으로 소중합니다. 이런 마음을 지니면 우리 사회에 차별이 자리할 수 없습니다. '다름'을 '아름다움'으로 느끼면서 '틀림'과 '잘못됨'을 하나씩 고치고 다듬어 나갈 수 있어요.


모든 사람이 다 같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바보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낮과 밤, 여름과 가을, 젊은이와 늙은이가 있고,
뜰에는 나비가, 하늘에는 새가 있고,
꽃 색깔이나 사람들 눈 색깔이 저마다 다르듯이
신이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였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사람들만 차이를 싫어하고,
생각하고 들여다보고 이해할 필요가 있는
다양성을 불편해 합니다. <146쪽>



<아이들,양철북(2002)>이란 작은 책에는 코르착이 우리에게 건네는 속깊은 이야기가 담겼습니다. 허리를 굽혀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길 바라는 이야기, 사실을 얘기할 수 없지만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아서 말없이 있는 아이들 이야기, 사랑이 있으면 곧바로 사랑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아이들 이야기가 담겼습니다.


=== '야누슈 코르착'은 어떤 사람? (제 나름대로 갈무리해서 적어 봅니다) ===

1879년 7월 22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자기 이름은 '헨리크 골드슈미트(Henryk Goldszimt)'인데 스무 살이 되던 해 폴란드에서 권위 있는 문학상 가운데 하나인 '파데레프스키(Paderewsky)'상을 받으면서 글이름(필명)인 '야누슈 코르착'을 쓴다. 이 문학상은 응모자에게 글이름을 쓰라고 요구하는 바람에 공모하기 바로 앞서 글이름을 '야냐슈 코르착'이라 지었다는데, 식자공이 잘못해서 '야누슈'로 쓰는 바람에 그 뒤로 이 이름을 그대로 쓴단다.

가난하고 아픈 이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의사가 된 코르착은 부유한 환자에게는 돈을 많이 받고 가난한 환자에게는 돈을 한 푼도 안 받고 돌봐 주는 한편 약 살 돈까지 주고 가기도 한 사람이다. 그런데 의술만으로는 사회 문제를 풀 수 없음을 느끼고는, 새로 세워진 유대 어린이 고아원 원장이 되며 아이들 문제를 부대끼고 고쳐 나가게 된다. 이때부터 코르착은 고아원 다락방에서만 살며 아이들을 돌보는 일로 평생을 바친다.

코르착은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한편 <매트 1세>, <내가 다시 어려진다면> 같은 작품을 쓰고 <작은 평론>이라는 어린이 주간지를 만들고 폴란드 국영방송에서 '의사 할아버지'란 이름으로 어린이와 보육 문제를 사람들에게 알리기도 한다. 그러던 1939년,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했고 마침내 1942년 8월 6일, 고아원 아이 200명 남짓과 평생 고아원지기로 함께 일한 교사 스테파니아 들과 함께 가스실로 가는 기차에 당차게 오르며 삶을 마친다. 1989년에 국제연합에서 내놓은 어린이 인권협정은 바로 코르착이 쓴 어린이 인권에 얽힌 글을 바탕으로 썼으며 1979년 '세계 아동의 해'는 코르착이 태어난 지 100해를 기려서 '야누슈 코르착의 해'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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