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하나님과 함께
야누쉬 코르착 지음, 송순재.김신애 옮김 / 내일을여는책 / 2001년 6월
평점 :
품절


 

- 책이름 : 홀로 하나님과 함께
- 글쓴이 : 야누쉬 코르착
- 옮긴이 : 송순재, 김신애
- 펴낸곳 : 내일을여는책(2001.6.5.)
- 책값 : 6500원


 그제 시골집으로 돌아왔을 때입니다. 집안 분위기가 어딘가 으스스했습니다. 왜 그럴까 하고 생각해 보지만 달리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천장에 올려놓은 쥐끈끈이에 쥐가 잡혀서 죽었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이튿날 천장 뚜껑을 열고 들여다보니 작은 새앙쥐가 죽어 있습니다. 그렇구나. 이 목숨 하나 죽어서 그랬구나.

 죽은 쥐를 어찌 할까 망설입니다. 땅에 묻을까 어찌할까. 서울이었다면 묻을 땅이 없으니 쓰레기통에 처박힐 텐데. 망설이다가 보일러방에 옮겨 놓습니다. 그런데 그 뒤로 여기저기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다른 쥐가 들어왔나? 불을 켜 놓고 샅샅이 살펴보지만 보이지 않습니다. 불을 끄면 다시 부스럭 소리. 그러다가 문득 드는 생각이 있어서 보일러방에 옮겨 놓은 새끼쥐 주검을 들고 와서 천장에 다시 올려놓습니다. 그 뒤로 소리가 뚝 끊깁니다.

 어미쥐였을까요. 글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저는 앞으로 가방, 자전거로 다시 태어나야지 싶은데, 새끼쥐로도 다시 태어나야겠구나 싶습니다. 책방 나들이를 하며 가방을 애먹이니까, 먼길 나들이를 한다며 자전거를 고달프게 하니까, 또 쥐끈끈이를 써서 쥐를 죽였으니까. 그러고 보니, 벼로도 보리로도 콩으로도 배추로도 무로도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제가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목숨을 바쳐 준 모든 목숨붙이 삶을 한 번씩 차근차근 다시 겪어야지 싶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제 넋은 홀가분할 수 없어요. 지금은 사람 모습이지만, 또 지금은 사람으로 있다고 해서 다른 목숨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잡아서 먹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못살게 굴기도 하잖습니까. 세상에 하느님이 있다면 사람이 믿는 하느님뿐 아니라 버느나무가 믿는 하느님이 있고, 새앙쥐가 믿는 하느님이 있으며, 쑥이 믿는 하느님이 있다고 봅니다. 또, 이렇게 다 다른 하느님이 있겠지요. 고구마 하느님, 파리 하느님, 개 하느님, 고등어 하느님도 있지 싶습니다. 모든 목숨붙이가 오롯이 제 삶을 사랑하고 가꾸고 즐길 수 있도록 돌보고 어루만져 주는 하느님이 있지 싶습니다.


……
저는 저 자신을 위해서 하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에
똑바로 서서 간청합니다.
아이들에게 선한 의지를 주시고, 그들의 힘을 북돋워 주시고,
그들의 수고에 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아이들을 편한 길로 인도하지는 마옵소서.
그렇지만 아름다운 길로 인도하옵소서.
제가 드리는 간청에 대해 단 한 번 드리는 불입금으로
저의 하나뿐인 찬송을 받아 주시옵소서.
그것은 슬픔입니다.
저의 슬픔과 노동을 드립니다.  〈한 교사의 기도 - 120쪽〉


 우리들 믿음이 오롯이 이루어지자면, 하나로 크게 빛을 보자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려면, 사람 아닌 목숨붙이를 아끼는 하느님을 느끼고, 사람 아닌 목숨붙이와 함께하는 하느님을 섬기고, 사람 아닌 목숨붙이를 어루만지는 하느님을 받아들일 때이지 싶습니다.

 낮밥을 먹으려고 밥술을 푸다가 천장을 올려다봅니다. “미안하다, 미안해, 미안합니다.” 세 마디를 속으로 읊습니다. 그러나 “하지만 내가 사람으로 사는걸…….” 하는 핑계가 이어집니다. 참말로 내가 사람으로 살기 때문에 저 새끼쥐를 끈끈이로 잡아 죽여도 되는가요?


.. 그가 말하는 이야기는 다만 단순한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일상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문제와 시련과 고통으로 얼룩진 삶의 현장이 늘 그를 따라다녔다. 하루를 넘기기가 버거웠고, 하루의 과제를 해결하느라 늘 허덕이며 씨름하였다. 그는 실천을 소중히 여겼다. 온통 실천과 뒤범벅이 되어 생을 불태웠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 그의 이야기는 읽기가 그리 쉽지 않다. 또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다. 그 맛은 자극적인가 하면, 때로는 깊고, 때로는 아련한 아픔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쓴 동화들은 아주 재미가 있다. 그의 글은 흔히 논리적인 주장이나 체계적인 이론을 기대한 독자들을 당혹하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언제쯤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이나 설명이 나올까 하는 기대를 충족시키지도 않는다. 장르를 구분하기 좋아하는 문학도들은 그의 글을 두고 혹 당혹해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한 글쓰기야말로 읽는 이들이 창조적 사유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독특한 힘이었다 ..  〈옮긴이 말 : 18∼19쪽〉


 쥐를 잡았기에 낮이나 밤에 벽을 긁는 소리가 사라졌습니다. 쥐들이 제 책을 갉아먹을 걱정도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무겁습니다. 외려 답답합니다. 그렇지만 다시 쥐가 끓어 사각사각 극극 긱긱 하는 소리가 들린다면? 틀림없이 그때 또다시 끈끈이를 다시 찾아서 어딘가에 놓지 않을는지. 못난 사람이라서. (4340.1.1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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