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어제책 / 숨은책읽기
숨은책 989
《문학의 길 교육의 길》
이오덕 글
소년한길
2002.7.30.
늘 걸어다녔고, 앞으로도 걸어가려고 합니다. 굳이 종이(면허증)를 안 땄습니다. 종이를 미리 따면 쓸모가 있다는 말도 들었지만, 아예 종이가 없어야 느긋이 걸을 뿐 아니라, 딴청을 안 하리라 여겼습니다. 어릴 적에는 놀러다니느라 걸었고, 여덟 살부터는 배움터를 오가려고 걸었습니다. 그야말로 미어터지는 버스를 안 타고 싶기도 했고, 길삯을 모아서 책을 사읽었어요. 길을 걸으면서도 책을 읽었습니다. 걸으며 책을 읽으면 둘레가 아무리 시끄러워도 까맣게 잊어요. 문득 숨을 돌리려고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구름빛을 읽고, 동무가 사는 마을을 지날 적에는 담 너머를 기웃기웃하면서 이제 동무가 일어났으려나 어림했습니다. 여덟 살에도 집에서 여섯 시 반 무렵이면 길을 나섰거든요. 《문학의 길 교육의 길》은 2003년 늦가을에 처음 읽었습니다. 이오덕 같은 어른은 그저 높은 곳에 계시다고 보았는데, 뜻밖에 2003년 가을부터 이오덕 어른이 살던 무너미마을 돌집에 깃들어 어른 글꾸러미를 추스르는 일을 맡았어요. ‘글길(문학의 길)’하고 ‘배움길(교육의 길)’을 돌아보는 거의 마지막으로 남긴 글을 아주 조금씩 읽었어요. 이 책을 덮으면 이제 어른이 남긴 다른 새글은 없거든요. 글길도 배움길도, 살림길도 사랑길도, 숲길도 사람길도, 노래길도 꿈길도, 노상 매한가지라고 느낍니다. 잘하거나 잘난 남을 기웃거리지 않을 적에 우리가 스스로 지을 오늘길을 걸을 수 있어요. 모자라거나 못난 나를 고스란히 받아들일 적에 이제부터 새롭게 심어서 가꿀 씨앗을 품을 수 있어요. 누구나 언제나 싱그럽게 사람빛인 줄 되새기는 글 한 자락을 곱씹습니다. 아이 곁에서 하루를 살림하기에 어질고 슬기롭게 집일도 글일도 배움일도 포근히 다스리는 줄 새록새록 되새깁니다. 어른은 어른으로서 길을 걷습니다. 나는 나로서 길을 걷습니다. 너는 너로서 길을 걷겠지요. 서로 다르게 선 자리를 읽고 이으면서 함께 어깨동무하는 이곳에 있어요.
ㅍㄹㄴ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오늘도 아이들은 죽어가고 있는데, 그 수많은 아이들이 닭장에 갇혀 있는 비참한 동물의 신세가 되어 병들어 가고 죽어가고 있는데,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은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지금 참으로 시시한 일에 매달려 있다. 허깨비를 붙잡고 씨름하고 있는 꼴이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6쪽)
생각해 보라. 그때(1950∼70년대) 우리나라의 어느 교실에서 이런 일하는 아이들이 스스로 하는 그 일을 당당하게 글로 쓸 수 있게 하였던가? 그런 글이 단 한 편이라도 나온 일이 있는가? 농촌 학교에서 나온 신문이나 문집에도 일하는 아이들이 솔직하게 그 삶을 쓴 글은 나오지 않았다. 도시에서 나오는 신문이나 문집은 말할 것 없다. (121쪽)
글쎄 그 아이들 글을 안 읽었다고 하더라도 온 천지에 그런 아이들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아이들을 눈앞에 두고 그 아이들과 함께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걱정하고 괴로워하고, 살아갈 길을 찾으려고는 하지 않고 ‘간절한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이 시대’라면서 돌아앉아 이것저것 명상이나 하고, 이러쿵저러쿵 추상된 논리나 늘어놓다니, 이래도 되는 겁니까? (207쪽)
어떤 문학작품이든지 그것을 다른 나라 말로 번역하는 일은 그 원작의 나라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번역을 하게 되는 나라를 위해서 하는 일이다 … 우리가 유럽의 어느 나라 작가가 쓴 작품을 우리말로 번역을 하는 까닭은, 영국이면 영국, 프랑스면 프랑스란 나라를 위해, 그 나라 문학을 위해 번역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문학을 위해, 우리나라 사람을 위해 우리말로 옮기는 것이다. (322쪽)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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