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첫머리에 날씨가 확 쌀쌀해지며 가을 없이 겨울로 접어드는가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로 나날이 날씨가 풀리며 마치 겨울에서 봄으로 되어 간다는 느낌입니다. 11월을 코앞에 두고 있는 날이건만. 다가오는 11월 날씨는 어떻게 될까요. 12월에는 겨울이 될지 포근한 날이 이어지며 모기와 파리가 끊어지 않을는지 모르겠습니다. 해마다 뒤죽박죽 날씨로 변덕이 죽을 끓고 있잖습니까. 올봄과 올여름은 지난해와 견주어, 지지난해와 견주어, 지지지난해와 견주어 참 알쏭달쏭 오락가락이었습니다. 장대비가 여러 날 동안 쉬지 않고 퍼붓지 않나, 그러다가 확 맑아지지 않나, 태풍이 몰아닥치다가도 날이 짠 개지를 않나. 어쩌면 우리 나라에는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뚜렷하게 나뉘어 네 철 네 옷을 갈아입는 산과 들과 내와 바다는 멀찌감치 사라져 버렸을까요. 이름만 남은 범과 곰과 이리와 늑대와 여우입니다. 오소리와 너구리와 족제비와 수달을 어디에서 얼마나 만날 수 있는가요. 참새조차 자취를 감추며 비둘기와 까치만 맴도는 도시에서, 개구리가 왁왁 우는지 개골개골 우는지 꾹꾹 우는지 두 귀로 살펴 들을 수 없는 이 땅에서, 뜸부기며 소쩍새며 헤아려 볼 길 없는 시골에서, 우리들은 무엇을 배우고 가르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요.

 지금 우리한테는 ‘먹고살아야 한다’는 큰 목표가, 아니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한다’는 큰 목표가, 아니 ‘남보다 내가 더 많은 돈을 가져야 한다’는 큰 목표가, 아니 ‘나 홀로 1등이 되어 떵떵거리며 지내다가 드문드문 가난뱅이들한테 돈 몇 푼 쥐어 주며 으시대자’는 큰 목표가 이 나라 모든 사람을 휘감고 있습니다. 어른들만 휘감지 않고 아이들도 휘감습니다. 아니, 어른들 스스로 자기를 다그치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들이 낳아 기르는 딸아들을 서너 살부터 영재와 천재로 만들어 ‘네 이웃과 동무를 밟고 올라서서 너 혼자 잘 먹고 잘 되는 길로 걸어가는’ 버릇을 익히게 하도록 채근하고 있습니다.

 문득, 요즈음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어떤 줄거리가 담기나 궁금합니다. 집 앞에 있는 헌책방에 가서 5학년 2학기 〈사회〉 교과서를 펼쳐 봅니다. ‘우리 나라의 경제 성장’과 ‘정보화 시대의 생활과 산업’과 ‘우리 겨레의 생활 문화’ 세 가지를 다룹니다. 첫 단원에서는 ‘자유와 경쟁-우리 경제의 발자취-세계 속의 우리 경제-우리 기업의 해외 진출’을 다루는데, 모두 기업에서 돈 많이 벌고 공장에서 물건 많이 팔고 자동차 대수가 늘어나는 일이 ‘발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6학년 〈생활의 길잡이〉 교과서를 펼칩니다. 7단원 ‘자연 사랑’을 보니, 우리 나라에 디젤 자동차가 많아 공기가 많이 더러워진다고, 이 문제를 풀려면 나무를 많이 심으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나무가 하루아침에 자라지도 않지만, 자동차 줄일 생각은 아예 없고, 정작 공기가 더러워지는 큰 뿌리는 안 짚습니다. 고등학교 교과서도 꺼내어 펼치다가 제자리에 꽂아 놓습니다. 손이 덜덜 떨립니다. 아이를 낳으면 학교에 보내야 하나요? (4340.10.18.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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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에 잠이 깨어 일어납니다. 새벽바람이 서늘해 좀더 드러누울까 싶었으나 그냥 일어납니다. 꿈에서 저는 고등학교 2학년에서 3학년으로 갓 올라간 학생입니다. 얼굴에는 아무런 빛깔이 없고 그저 무뚝뚝함만 흐릅니다. 저뿐 아니라 동무들도 마찬가지. 모두들 대학교 들어가기만을 생각하고, 3학년 담임이 된 사람도 처음 교실에 들어와서 우리들한테 하는 말이 ‘너희들 어느 대학교에 가고 싶은지 손을 들어 보라’입니다.

 아이들한테 쪽지를 하나씩 나누어 주기에 뭔가 하고 들여다보니, 세 가지 주의사항이 적혔고, 세 번째 것은 담임선생이 들어와서 말할 때는 아무 소리도 내지 말고 다른 것도 하지 말고 자기만 바라보며 조용히 하라는 것. 속으로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생각하며 짜증스러운 얼굴로 그이 얼굴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듣습니다. 아니, 이야기라 할 수 없는 중얼거림을 듣습니다. “너희들이 어느 대학교에 가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맨 처음에는 의대를 써라. 그 다음에는 ……” 꿈에서도, 꿈을 깬 뒤로도, 이 소리가 무슨 생각으로 하는 말인지 갈피를 못 잡겠습니다. 담임이라는 사람은 한참 중얼중얼 떠들더니, “자, 그러면 묻자. 너희들 가운데 혹시 대학교에 가지 않겠다는 사람이 있느냐?” 하고 묻습니다. 맨 앞에 앉은 녀석이 손을 듭니다. 뒤따라 저도 손을 듭니다. “하나, 그리고 둘이냐?” 하는 중얼거림을 듣다가 잠이 깨었습니다. 그 뒤로 어떻게 되었을지, 또 그 뒤로 고3 교실에서 어떻게 지냈을지 모르겠습니다. 꿈이기는 하지만 다시 꾸기 싫고, 꿈이 아니라면 몹시 끔찍하겠구나 싶습니다. 남자만 다니는 학교에서 1학년 2학년 3학년 내내 남자 선생만 담임으로 보내야 하는 학교. 현실에서도 제 고등학교 3학년은 남자 선생 담임뿐이었고, 학교도 남학교였습니다. 지난날 칙칙함이 꿈에서도 똑같이 살아나 진저리가 쳐지기도 합니다.

 콩물 한 잔 마시고 마당으로 나옵니다. 담벼락에 책을 올려놓고 기지개를 켭니다.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별이 제법 많이 보입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인 듯하네요. 새벽에 신문을 돌리는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고 드문드문 지나가는 차 소리가 들립니다. 예전에는 밤하늘 별이 훨씬 많았겠지요. 이 도시에서도.

 그러고 보니, 이 나라에서 고등학교 3학년 자리에 있는 아이들은 곧 대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겠네요. 대학교에 가려는 아이들도, 대학교에 갈 마음이 없는 아이들도.

 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대학교 들어가는 시험을 치를 준비를 시키고, 내신성적이라는 이름으로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치르고, 틈틈이 모의고사를 치러서 ‘교과서 지식을 얼마나 머리속에 잘 간수하고 있는가’를 살핍니다. 아이들은 머리속에 잘 간수하고 있는 교과서 지식에 따라 차례가 매겨지고, 이 차례에 따라 모범생과 문제아이가 갈립니다.

 아이들은 ‘무슨무슨 대학교에 가려 하는가’로 ‘장래희망’을 상담하게 될 뿐입니다. 시골집에서 농사를 지을 아이라든지, 공장에서 일하려는 아이라든지, 출판사에 들어가 일하려는 아이라든지,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거나 하는 자기 예술을 가다듬으려는 아이라든지, 온몸을 바쳐 사회봉사나 사회운동을 하고픈 아이라든지, 다 다른 생각과 몸짓을 다 다른 방법으로 펼쳐 나가고자 하는 몸짓과 매무새를 추스르려면 어떻게 하면 더 나을지를 담임 교사와 상담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고등학교 3학년 담임 교사들이 ‘개성 넘치는 아이들 모두한테 걸맞게 세상 경험을 들려줄 만한’ 깊이나 너비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시인으로 살고픈 아이한테 ‘그렇구나, 네가 시인으로 살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머리 맞대며 헤아릴 교사가 있을까요. 버스기사가 되고 싶은 아이한테 ‘그래, 네가 뜻있고 멋진 버스기사가 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골똘히 헤아리며 함께 길찾기에 나서 줄 교사가 있을까요.

 대학교를 바라는 아이들한테는 어떠할는지요. 지구에서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벌레(곤충) 한삶을 헤아리고 싶은 아이가 생물학과에 가고 싶다고 한다면, 이 아이가 생물학과라는 곳에 가기에 알맞도록 차근차근 도와줄 만한 깊이를 갖춘 교사가 몇 사람쯤 있을까요. 잠자리를 연구하고 싶은 아이한테, 물방개를 연구하고 싶은 아이한테, 가문비나무를 연구하고 싶은 아이한테, 삵을 연구하고 싶은 아이한테, 우리네 고등학교 3학년 담임 교사들은 무슨 도움말을 건네고 어떤 도움책을 알려줄 수 있을까요.

 그림을 그리고픈 아이한테 입시미술이 아닌 생활미술을 일러 주면서, 스스로 자기 그림감을 찾아나서도록 이끌고, 학원미술이 아닌 자기 그림결을 찾는 그림그리기로 나아가도록 붙잡아 줄 고등학교 3학년 담임 교사가 있을까요. 사진을 찍고픈 아이한테, ‘오호라, 사진을 찍고 싶다고? 그렇다면 지금 네가 있는 이 학교에서 사진을 찍어 보지 않으련?’ 하고 먼저 나서서, 교실 풍경과 학교 삶을 두루 사진에 담도록 마음을 써 줄 만한 고등학교 3학년 담임 교사가 있을까요. 아니, 초중고등학교 아이들 삶과 교사들 삶을 사진으로 담아내어 보여주는 교사는 몇 사람이나 있을까요. 우리들이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느끼고 보았던 모습을 꾸밈과 거짓과 숨김과 감춤이 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고 힘쓰고 마음을 기울이는 ‘사진 찍는 교사’란 참말 있기나 할까요. 교사 스스로 더 넓은 세상을 보려고 하지 않으니까,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부모 스스로 더 깊은 세상을 느끼려 하지 않으니까, 아이들은 오로지 대학바라기만을 하면서 그 풋풋하고 싱그럽고 살가운 젊음을 형광등 불빛만 쬐며 허여멀건 얼굴로 늙어버리고 있지는 않은지요. 생각해 보니, 대학교에서 사진을 배우는 학생들도 자기들이 다니는 대학교 모습이나 대학생 삶이나 대학교 둘레 사람들 발자취를 사진으로 더듬거나 헤아리는 일은 안 하고 있네요.

 지난밤에 《전태일 통신》(후마니타스,2006)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짤막하게 쓴 글을 그러모은 책입니다. 이 가운데 민종덕이라는 분이 쓴 글을 읽으니, ‘국민학교 졸업장도 없는 전태일한테 명예졸업장(초등학교)을 주려고 하던 뜻깊은 일’을 이야기합니다. 글 끝에 ‘졸업장 하나 없이 살아간 전태일’한테 ‘졸업장이 꼭 있어야 했을까?’라고 하면서, 우리 사회는 왜 이리 졸업장 열병에 물들어 있을까를 놓고 따끔하게 한 마디 합니다. 대학교에 돈 많이 바친 어느 재벌총수한테 명예박사학위를 주려 하니 학생들이 반대하더라는 이야기를 곁들이면서.

 졸업장이 많다고 농사를 잘 짓지 않습니다. 졸업장이 많다고 차를 얌전하게 잘 몰지 않습니다. 졸업장이 많다고 사기공갈 안 친다는 법이 없습니다. 졸업장이 많다고 가난하고 힘겨운 이웃을 알뜰히 사랑하거나 보살피도록 마음을 더 기울이지 않습니다. 졸업장이 많다고 주정뱅이가 안 되지 않습니다. 졸업장이 많다고 자기가 땀흘려 번 돈을 사회에 돌려주며 값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되지는 않습니다. 졸업장이 많다고 동화책을 잘 쓰지 않으며, 사진을 더 잘 찍지도 않고, 만화를 더 잘 그리지도 않습니다. 졸업장이 많은 사람이 인문학 책을 더 잘 써내지 않는 한편, 종교를 다룬 책이든 문화를 다룬 책이든 철학을 다룬 책이든 경제를 다룬 책이든, 더욱 속속들이 헤아리며 짚어낼 수 있는 눈길이나 눈높이가 있지 않습니다.

 꿈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새벽까지 꾼 꿈을 깬 뒤 잠깐 눈을 붙였습니다. 그때 꿈속 고3 담임 교사한테 이렇게 읊습니다. “저는 대학교에 가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사진을 찍으며 살 생각입니다. 그래서 하나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다른 동무들 공부하는 데 거슬리지 않게 있고, 없는 사람인 듯 조용히 지낼 테니, 교실에서 사진을 찍도록 허락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가 다니는 이 학교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 10년쯤 뒤에 사진책 하나 내고 싶습니다.” (4340.10.17.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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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이 얼마가 흘렀든지 다시 돌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기에 헌책방 헌책입니다. 겉이 낡고 더러워졌어도, 판권에 적힌 책값보다 훨씬 많은 돈을 치러야 해도 살 만한 보람과 기쁨을 느낄 수 있는 헌책방 헌책입니다. 때때로 500원이나 1000원밖에 안 하는 헐값에 살 수도 있는 책이 뜻하지 않게 놀라움과 반가움을 선사하기도 하는 헌책방 헌책입니다. 사람은 늘 새로 나고 죽지만, 책에 담긴 이야기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유행 따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바로 유행이 되는 밑거름을 건네주는 헌책방 헌책이라고도 하겠네요.


 그러나 모든 헌책방 헌책이 볼 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어느 책은 버려지지요. 뭐, 백 해나 이백 해가 지나면 모든 헌책은 옛책 구실이나 값어치를 하긴 하지만, 더구나 돈이 많고 헛간도 널찍해서 간수할 수 있다면 모르지만, 조그마한 자리에서 살림을 꾸리는 헌책방으로서는, 책방 임자부터 ‘다시 볼 만한(팔 만한) 값어치가 있는가 없는가’를 따지곤 합니다. 그래, 다시 팔 만한 값어치가 없는 헌책은 거리낌없이 버려요. 버려지지요. 버려야 해요.


 우리 나라 방송풀그림은 어떨까요. 며칠 지난 풀그림은, 한두 달 지난 풀그림은, 한두 해 지난 풀그림은, 대여섯 해 지난 풀그림은, 열 해쯤 지난 풀그림은, 스무 해나 서른 해쯤 지난 풀그림은, 백 해쯤 지난 풀그림은 어떠하지요? 볼 만할까요? 볼 만한 재미나 보람이 있을까요? 다만, 방송풀그림도 아주 오래되거나 묵었다면, 자료로 값어치 구실을 합니다. 어떤 풀그림도 그렇습니다. 어떤 책이라도 무척 오래되었으면 지난날 자료가 되니까요.


 제가 방송풀그림을 그다지 안 좋아하기도 하지만, 텔레비전을 즐겨보는 분들 가운데 몇 달 지난 ‘재방송’을 재미있다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느낍니다. 몇 해 묵은 ‘재방송’은 더더구나. 열 해쯤 지난 연속극이나 익살이야기는 어떻지요? 1991년 프로야구 어느 경기 하나를 세 시간 동안 앉아서 볼 수 있을까요? 1994년 어느 연속극을 한 시간 동안 앉아서 볼 수 있을까요? 인기를 많이 얻었다는 한국영화를 텔레비전에서 볼 때면, ‘지금 와서 다시 보니 참 재미없네.’ 하는 느낌이 퍽 짙게 듭니다. 〈친구〉라는 영화를,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를 다섯 해나 열 해쯤 뒤에도 텔레비전에서 틀어 줄까요? 틀어 줄 때 볼 사람이 있을까요?


 지금 우리 나라 방송풀그림 눈높이는 ‘재방송으로 보여줄 값어치나 재미나 보람’이 없는 테두리에서 헤어나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재방송으로 보여줘도 한 해도 못 넘길 만한’ 테두리에 머물고 있다고 느낍니다. 생각해 보면, 제가 즐겨 찾아서 보는 책들 가운데에도 ‘한 해 지난 뒤’에도 읽고픈 생각이 안 드는 책이 참 많습니다. 지금은 교보문고나 영풍문고에서 아주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책들이지만, 그 책들이 얼마나 그 좋은 자리에 버틸 수 있을까요?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책들이 얼마나 오래 그 자리에 머무를까요? 열 해 앞선 때 베스트셀러를 오늘날 읽을 만할까요? 스무 해 앞선 때 베스트셀러나 서른 해 앞선 때 베스트셀러는 어떻지요? 요즘 베스트셀러를 열 해 뒤에도, 아니 다섯 해 뒤에도 읽을 만하다고 느낄까요? 그래서 신문에서 ‘아무개 책방 이주 베스트셀러 목록’을 붙이는 일은 참 쓸데없는 일인 한편, 폭력이라고 느껴요. 정작 우리한테 쓸모가 있고 재미도 있으며 즐거움과 보람이 있는 책목록은 베스트셀러가 아니니까요.

 
 책이든 방송이든 영화든 연극이든 다른 공연이든 문화든 예술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어느 무엇이든, 지금 곧바로뿐 아니라 앞으로도 꾸준히 즐길 만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밥을 좋아합니다. 밥 한 그릇은 지금 곧바로도 제 배를 넉넉히 채워 주고 기운을 북돋워 줍니다. 새힘을 선사해요. 이 밥은 몇 번을 먹어도 질리지 않습니다. 여태껏 얼마나 많은 밥그릇을 비웠을는지. 몇 만 그릇도 넘겠지요. 앞으로도 10만 그릇, 또는 20만 그릇, 또는 30만 그릇을 비울지 모릅니다.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밥그릇이요, 지금 이때에도 낮밥이나 저녁밥으로 제게 기쁨을 선사할 밥그릇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책도, 영화도, 방송풀그림도, 사진도,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곧바로 즐거울 수 있는 한편, 앞으로도 꾸준히 즐길 수 있는 책을, 영화를, 방송풀그림을, 사진을, 그림을 좋아합니다. 지금 곧바로만 재미있는 책은 싫습니다. 앞으로 좋아질 책도 썩 달갑지 않습니다. 한결같은 책, 꾸준한 방송풀그림, 곧게 이어가는 사진이 좋습니다. (4339.10.25.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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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 마흔에 길을 나서다
공선옥 지음, 노익상·박여선 사진 / 월간말 / 2003년 7월
평점 :
품절




- 책이름 : 마흔에 길을 떠나다
- 글 : 공선옥
- 사진 : 노익상ㆍ박여선
- 펴낸곳 : 월간 말(2003.7.5.)
- 책값 : 8500원



 이 책 하나 23 ― 우리는 모두 길 떠나는 사람
 : 공선옥, 《마흔에 길을 떠나다》를 읽고


 

 〈1〉 우리 살림살이가 우리 세상 모습


 오늘 아침은 조금 포근합니다. 어제 아침만 해도, 그제 아침만 해도 햇볕이 맑게 비추었으나 날은 쌀쌀했어요. 햇볕이 괜찮구나 싶어서 이불을 담벼락에 널었지만, 잘 안 마른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가을 아닌 가을이라서, 가을을 잊은 가을이라서, 가을이 이제 우리네 땅에 “한국사람들아, 나는 이제 한국땅에서 못 살겠다. 너네들이 돈벌이에 이름날리기에 무리짓기에 매달리면서 내가 깃들 조그마한 땅뙈기 안 남겨 놓는구나!” 하고 마지막말을 남기고 떠나는 즈음이라서 날씨 변덕이 대단합니다.


.. 그러나 배달호 씨가 다니던 회사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공기업이던 한국중공업이 두산이라는 민간기업으로 넘어갔을 때도 정부는 공기업의 실질적 주인이랄 수 있는 국민들의 의사는 묻지 않았다. 그리고 두산중공업으로 이름이 바뀌고 나자마자 한국중공업 노동자 천 여 명이 회사를 떠나야 했다. 한 사람의 노동자가 해고된다는 것은 그 노동자의 가정이 흔들릴 수도 있는 일이다. 가정이 깨지고 그 가정의 아이들이 버려지고…… ..  〈233쪽〉


 왜 변덕스러운 날씨가 되었을까요. 올봄에는 왜 이리 하늘이 뿌연 채 무더웠으며, 올여름에는 왜 이리 벼락비가 쉴 새 없이 오래오래 쏟아졌을까요. 올가을에는 왜 이리 더웠다가 확 추워졌다가 오락가락일까요. 올겨울은 어떻게 될까요. 올겨울은 무시무시한 강추위가 몰아닥칠는지, 아니면 파리와 모기가 알을 깔 만큼 텁텁한 날이 될는지.


.. “요새는 마트라는 게 생겨 가지고 장사 안 돼요. 자가용 타고 마트 가서 싣고 가면 그만인데, 이런 데 누가 옵니까?” 그는 하루 종일 연탄난로 끼고 앉아, 오지 않는 손님 기다리며 ‘테레비’ 보는 것도 중노동이라고 했다 ..  〈205쪽〉


 엊저녁, 집 앞에 있는 헌책방에 잠깐 들렀습니다. 헌책방 아주머니는 목요일에 진도에 다녀왔다면서, “이제 헌책방도 도시를 떠나야 할 때가 되었나 봐.” 하고 이야기합니다. “사람들 생각이 ‘거기 낙후되었잖아요? 거기 지저분하잖아요? 거기 그래서는 안 되잖아요?’ 하면서 책을 있는 그대로 못 보고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새 것 기준이 무엇이고 어디에 두는지 모르겠어. 기준도 없을 거야.” 하는 말을 붙입니다.

 책이면 그냥 책이지 헌책과 새책이 따로 없습니다. 공장에서 막 찍어서 잉크 냄새 폴폴 나는 책이 새책일 수 없습니다. 아직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원고를 묶어서 펴낸 책이라고 새책일 수 없습니다. 절판되었던 책을 새로 찍으면 새책일까요. 서른 해 동안 꾸준히 사랑받는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교보문고에서 사면 새책일까요? 이 책을 헌책방에서 옛날 문학과지성사 판으로 사서 읽으면 헌책일까요? 따끈따끈한 책을 교보문고에서 샀다고 해도, 책값을 치른 그때부터는 헌책인가요? 껍데기에 먼지 하나 안 묻히고 살며시 읽은 뒤 책꽂이에 얌전히 꽂아 놓으면 새책 대접을 받을 수 있나요? 우리한테 새 것이란 무엇이고, 헌 것이란 무엇일까요.


.. 안동 하회마을이 좋았던 것은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살지 않고 전시용으로 지어 놓은 ‘전통마을’이라면 정말로 끔찍할 것 같았다. 그리고 사람이 사는 곳에 삶을 위한 거래가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닌가. 갈수록 오는 사람은 없고 떠나는 사람만 있는 다른 농촌 마을에 비하면 하회마을은 그 얼마나 복받은 마을인가. 좀 뜬금없는 말인지는 모르지만,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서라도 사람을, 이웃을 반기지마는 가진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진 사람들은 그 누구도 얼씬하지 못하도록 담도 성벽같이 에워싸고 자물쇠도 철통같이 닫아 거는 것일까 ..  〈201쪽〉


 헌책방 아주머니는 말을 잇습니다. “기후변화도 다 사람이 만들어 가고 있잖아. 난데없이 폭포수처럼 비가 쏟아붓는다든지…….”

 전국 곳곳에 새 길을 닦는다고 부산합니다. 전국 구석구석에 새 아파트 올린다며 법석입니다. 도시 변두리고 시골구석이고 공장을 끌어들여서 물건을 팔 수 있어야 지자체 벌이가 늘어나고 우리 살림이 나아지기라도 하는 듯 이야기가 나옵니다. 수백 억이나 수천 억 원이 손해라고 하면서도 지하철 공사는 그치지 않습니다. 서울, 부산, 대구, 대전, 인천, …… 지역 지하철역은 큼직큼직 지어 놓습니다. 교통분담을 해야 한다고 말을 하는데, 자동차는 마냥 늘어나야 하고 버스도 하냥 늘어나야 하며 지하철도 끝없이 늘어나야 합니다. 지구 한쪽에서는 머잖아 석유가 동이 난다고 하지만, 우리 나라에서만큼은 기름먹는 자동차 생산을 자꾸 늘리려 하고, 자동차만 다닐 수 있는 찻길을 더 많이 더 넓게 늘리려고 합니다.


.. 그 노동, 그 땀, 그 눈물이 들어간 터전이라는 것이 그곳에 사는 사람한테 어떤 의미인지를 시골살이를 해 본 경험이 있는 나는 조금은 알고 있다. 그 노동과 그 땀과 그 눈물이 들어간 터전의 의미란, 말하자면 수 틀리면 돈으로 맞바꾸어 쉽게 손 털고 나갈 수도 있는 그런 종류가 결코 아니라는 뜻이다 ..  〈172쪽〉


 우리들 사는 집에서 일터까지 오가는 거리는 얼마쯤 될까요. 집에서 일터까지 걸어서 오가자면 얼마쯤 걸릴까요. 자전거를 타고 오가면 얼마쯤 되지요? 한 시간 걷기를, 삼십 분 자전거 타기를 꺼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기 집에서 가장 가까운 가게나 저잣거리에서 물건을 사지 않고, 꼭 자가용을 몰고 ○○마트에서 쇼핑수레 한 가득 물건을 사들여서 차 짐칸에 그득그득 싣고 돌아오지 않습니까. ○○마트에서는 비닐봉지 값을 얼마 받는다고 하며 비닐봉지 덜 쓰기를 하는 듯 보이지만, 정작 이곳에서 파는 물건을 보면 낱낱으로 비닐포장을 하고 있으며, 끼워팔기하는 물건마다 비닐이며 랩이며 테이프며 덕지덕지입니다.


.. 인사동에 딱 들어서는데, 받은 첫 느낌은 새로 단장하는 데 돈 꽤나 들었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인사동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  〈153쪽〉


 요일에 맞추어 쓰레기를 나누어 내놓는다고 해서 쓰레기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도시사람들 집과 길거리는 조금 깨끗해 보일 뿐입니다.

 우리들이 날마다 내놓고 있는 쓰레기는 참말 어디로 가고 있을까요. 그 쓰레기를 한 곳에 모아서 꾸역꾸역 쓰레기산을 이루어 놓는다고 해서 쓰레기가 제대로 삭을까요. 차에서 내뿜는 배기가스가, 우리들 집과 일터에서 때는 기름과 돌리는 에어컨에 들어가는 온갖 자원이, 냉장고며 가습기며 정수기며 텔레비전이며 전자레인지며 오븐이며 세탁기며 비데며…… 우리는 얼마나 알맞게 물건을 갖추어서 쓰고 있을까요. 꼭 써야 할 물건을 알맞는 자리에 두고 있는가요. 몇 해 쓰지 않고 내다 버리거나 ‘새 것’으로 갈아치울 물건을 유행 따라 돈푼 내며 주워모으고 있지는 않나요.


 〈2〉 우리 스스로 바라는 대로 살겠지


 가까운 헌책방으로 나들이를 가든, 서울에 있는 책마을 사람이나 동무를 만나러 가든, 가방에는 사진기 두 대를 챙기고 커다란 가방을 등에 메고, 앞에는 작은 가방 하나와 사진기기방을 멥니다. 꼭 행군을 앞둔 군인 차림새입니다. 늘 마주치는 이웃사람들도 “어디 여행 가셔요?” 하고 묻습니다. “늘 이런 차림인걸요.” 하고 대꾸하며 웃습니다. 동네에서도, 서울에서도, 또 다른 곳에서도, 긴머리에 깎지 않은 수염 얼굴을 보고는 “외국사람인 줄 알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산 같은 가방에 한쪽 손에는 늘 사진기가 들려 있고 덥수룩한 머리와 수염을 보면 그렇게 느낄 수 있겠지요.

 그렇게 보거나 말거나 저는 저대로 자전거를 몰며 길을 나서고, 때때로 자전거를 집에서 쉬게 한 다음 두 다리로 길을 나섭니다. 자전거를 몰 때면 한결 먼거리를 네 시간이고 여섯 시간이고 달립니다. 두 다리로 걸을 때에도 다섯 시간이고 일곱 시간이고 걷습니다. 양말을 신지 않는 맨발 고무신 걸음이니, 남들은 한 해 남짓 신을 수 있다던 고무신도 여덟 달이나 열 달만 되어도 뒷축이며 바닥이며 다 닳아서 구멍이 나고, 발가락이며 발바닥이며 굳은살로 딱딱합니다. 늘 무거운 짐과 사진기를 짊어지거나 자전거 손잡이를 잡아야 하는 손아귀는 굳은살이 깊게 박힙니다.

 땀이 물줄기 되어 볼을 타고 흐르거나 방울이 져서 똑똑 떨어지더라도 걷거나 자전거를 몹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 땅을 밟고, 내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나는 냄새를 맡습니다. 비록 나날이 답답해지는 바람이고 코가 매운 냄새로 비위가 거슬리고 속이 울렁거립니다만, 이 모습 이 삶 이 터전 이 사람이 우리들 이웃이요 우리 자신이며 우리 겨레이고 우리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 방 안으로 들어섰다. 냄새가 난다. 좋다. 그 방에서 나는 냄새는 바로 ‘옛날 엄마’ 냄새다. 신식이 아닌, 고생 많이 한 구식 엄마들만이 낼 수 있는 냄새가 바로 그 방에서 나고 있다. 나는 숨을 흠씬 들이킨다. 밖에서는 내린 눈이 녹아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  〈28쪽〉


 골목길에서도 무서운 빠르기로 내달리는 저 시커먼 자가용 모는 양복쟁이 아저씨도 우리 한겨레입니다. 담배꽁초나 빈 과자봉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길바닥에 휙휙 던지는 젊은이도 이 나라 한겨레입니다. ‘남자는 머리가 짧아야 하고 여자는 머리가 길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읋는 예닐곱 살짜리 꼬마아이들도 이 나라 한겨레입니다. 차방귀 고스란히 들이마시는 길바닥에 좌판을 깔고 1000원짜리 김밥과 가래떡을 파는 아주머니 할머니도 우리 이웃이요 한겨레입니다. 편의점 알바를 하며 날로 무뚝뚝해져 가는 어린 학생들도 우리 동생이며 한겨레입니다.

 사천만이 사는 남녘이라면 사천만 가지 얼굴이 있고 사천만 가지 목소리가 있으며 사천만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사천칠백만이 사는 남녘이라면 사천칠백만 가지 모습에 사천칠백만 가지 꿈에 사천칠백만 가지 이야기가 있겠지요. 그러나 꾸준하게 늘어나는 이 나라 사람들 숫자처럼 우리 삶이나 일이나 놀이나 이야기나 책이나 생각이나 몸짓이나 모양새들이 저마다 다르며 알콩달콩 어울린다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모두 똑같은 한 가지로 틀에 맞춰지는 사천만, 또는 사천칠백만이 아닌지요. 학교를 다니면 다닐수록, 텔레비전을 보면 볼수록, 인터넷을 즐기면 즐길수록 판에 박힌 길을 그예 달려가는 허수아비로 바뀌어 가지 않는가요.


.. “옥수수는 돈이 좀 되나요?” 솔직히 말하자면 묻기 싫은 질문을, 그러나 해야만 할 것 같은 약간의 의무감으로 묻고야 말았다. 돌아온 할머니 대답이, “돈이 되나 마나, 씨 뿌릴 때 됐으니 씨 뿌리고 거둘 때 되면 거두는 거지 뭐.” ..  〈76쪽〉


 살림집 앞으로 문구 도매상이 죽 이어져 있습니다. 어제 낮에는, 아스테이지를 사러 이 문구 도매상을 하나하나 들어가 보는데, 어느 가게에서도 아스테이지를 팔지 않습니다. 문구 도매상은 말 그대로 ‘도매상’일 뿐일까요. 아니, 이름은 도매상을 내걸지만, 이곳에서 다루는 물건은 몇몇 가지로만 못박혀 있지 않을까요. 가만히 헤아려 보니, 문구 도매상과 가까운 거리에 초등학교가 세 군데 있고 고등학교도 여럿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문구 도매상 골목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드는 문방구붙이를 살피거나 찾는 아이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기는 내가 살았던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그때는 그래도 집집이 부엌문 겸 현관문을 열어 놓고 살았다. 그런데 지금은 성냥갑 같은 붉은 벽돌 다세대주택들에 사람들은 갇혀 버린 듯이 느껴진다 ..  〈106쪽〉


 지지난주에 부산 나들이를 하면서, ‘부산에 왔기에 맛볼 수 있는 밥은 무엇이 있고, 부산에 왔기에 느낄 수 있는 골목은 어디가 있으며, 부산에 왔기에 함께할 수 있는 삶터며 놀이며 무엇일까’ 생각하며 부지런히 걸어다녔습니다. 자갈치시장이 있고 국제시장이 있고 광안리니 해운대니 있는 부산이고, 부민동이니 광복동이니 오랜 이야기와 역사가 있는 골목은 많기는 하나, ‘부산다움’이 무엇인가는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따지고 보면, 제가 사는 인천에서도, 가까운 수원에서도, 평택에서도, 천안에서도, 청주에서도, 대전에서도, 아산에서도, 홍성에서도, 익산에서도, 전주에서도, 그곳에 머무르기에, 또 그곳을 찾아갔기에 느낄 만한 삶터란 무엇일까 모르겠습니다.

 살고 있는 땅이름만 다른 우리 나라일까요. 우리들이 저마다 살고 있는 땅에서 자라는 풀과 나무가 다르며 흐르는 물과 바람이 다릅니다만, ‘그래 이것이군’ 하면서 마음에 깊이 새겨지는 이야기를 못 찾겠습니다.


.. 자신은 외국에서 살았지만 한국사람으로 자부심이 있고, 그래서 한국에 오면 더욱더 우리 말을 잘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단다. 그런데 왜 공사판에서 전부 일본말을 쓰냐, 언어가 있는 민족으로서 자존심도 없느냐, 대통령도 국민들에게 힘내자고 하지 않고 화이팅이라고 하더라, 말은 얼인데 이렇게 자기 말 천대하면 생김새만 한국사람이지, 다 외국계 민족이 될 것이다. 한국을 떠나기 앞서 최씨가 맨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국의 ‘배운 자’들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라고 했다 ..  〈114쪽〉


 우리네 구석구석 모두들 ‘먹고살기 어렵다’고 느껴서 그러할까요. 먹고살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가 지구자원을 얼마나 헤프게 쓰는지 돌아볼 겨를이 없어서 그러할까요. 어떻게든 돈만 더 벌면 되지만, 돈을 더 벌어도 나보다 더 많이 버는 남이 있어서 벌고 벌고 또 벌어도 마음이 차지 않을까요.

 우리는 얼마만큼 벌어야 비로소 ‘먹고살 만’하다고 느낄까요. 내 살림살이가 이웃 살림살이보다 얼마만큼 높거나 많아야 마음을 놓을까요. 내 차는 얼마나 커야 하고 내 집은 얼마나 넓어야 하나요. 차도 없고 집도 없이 살면 사람다움을 잃은 삶인가요. 자전거를 타거나 두 다리로 걸으면 바보인가요. 전세집이나 월세집에 살더라도 집옮길 걱정이 없이 오래오래 지내려는 마음이라면 너무 어리석은가요.


.. 미군이 이 땅에 주둔하는 이유는 그들의 배를 채우기 위함일 뿐이다. 그들은 이 땅에 주둔하는 게 아니고 점령을 하고 있는 것이며, 그들이 이 땅을 점령하고 있는 한에는 이 땅의 민중들은 그들의 ‘Meal’이 되고 있을 뿐이다. 이 나라 사람들에게 이 땅은 삶의 터전이지만 이 땅을 점령하고 있는 미군들에게 이 땅은 다만 작전지역 중의 한 곳일 뿐이다 ..  〈146쪽〉


 벼를 겨만 벗겨서 누런쌀로 먹으면, 깎는 데 들어가는 자원이나 품이나 시간이 덜 듭니다. 누런쌀은 흰쌀보다 우리 몸에 훨씬 좋습니다. 그러나 누런쌀이 몸에 좋다는 지식은 머리속에 있어도 누런쌀을 먹는 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저잣거리나 쌀집에서 누런쌀을 찾으려 해도 찾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덜 깎아 품이 적게 드는’ 누런쌀이 ‘더 깎으며 품과 자원이 더 많이 쓰게 되는’ 흰쌀보다 비쌉니다.


 〈3〉 길사람


 아침 빨래를 하면서 머리를 감습니다. 해바라기를 하며 기찻길로 전철이 오가는 소리를 듣습니다. 물끄러미 기찻길을 바라봅니다. 오늘 햇살은 제법 따사롭네요. 이불 널어 놓은 담벼락에 기대어 봅니다. 배추흰나비 한 마리 팔랑거리며 눈앞을 지나갑니다. 요 앞, 조그마한 텃밭에서 알을 깬 나비인 듯하네요.

 도심지 골목길이기에 길바닥은 모두 시멘트바닥이지만, 골목집 사람들은 흙을 조금씩 퍼 와서 작은 꽃그릇을 마련하고, 돌을 쌓아 텃밭까지 일구곤 합니다. 옥상에 텃밭을 마련해 나무를 심는 분도 있습니다. 메마르고 팍팍하기만 하던 도심지 한켠은, 골목집 사람들이 스무 해, 서른 해, 마흔 해, 때로는 예순 해 동안 한 자리를 고이 지키면서 가꾸어 온 풀과 나무로 작디작은 숨구멍이 생깁니다. 이 작디작은 숨구멍에는 애벌레도 꼬물꼬물 기어다니며 잎사귀를 뜯어먹었을 테고, 이 애벌레가 자라 흰나비도 되고 노랑나비도 되겠지요.


.. 그래, 아들아, 받아쓰기 좀 못해도 좋다, 영어 같은 거 안 해도 좋다, 그러나 풀빛 향기 가득한 오월의 저문 강가에서 어미와 함께 들었던 저 소쩍새 소리를 너는 기억하려무나. 눈물로 기억하려무나. 악은 딴 데 있는 것이 아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것이 악이다. 무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마음이 무기가 되고 흉기가 된다 ..  〈246쪽〉


 마흔에 길을 나섰던 공선옥 님은 어느덧 마흔다섯 나이로 달려가고, 머잖아 쉰 살 나이가 되겠지요. 그 쉰 살에도 지금과 같이 길을 나서면서 살아가실까요.

 생각해 보면, 공선옥 님은 마흔일 때만이 아닌 서른에도 길을 나섰습니다. 스물에도 길을 나섰고 열에도 길을 나섰겠지요. 다만 공선옥 님 스스로 그 나이에는 당신이 길을 나섰다는 생각을, 느낌을, 마음을, 넋을 부대끼지는 못했으리라 봅니다.

 저도 그래요. 곰곰이 돌이키면, 헌책방 나들이를 하든 골목길 나들이를 하든 저잣거리 장보기 나들이를 하든, 날마다 ‘길을 나서며’ 살고 있습니다. 집에서 살고 있는 집사람이면서, 길에서 사는 길사람입니다.

 내 이웃과 내 동무 모두 집사람이며 길사람입니다. 아직까지 자기 꿈을 펼치지 못하며 돈벌이에 매여 있는 동무들도 ‘멀고 먼 자기 꿈을 이루기까지 힘들고 고달픈 길을 돌고 돌아’ 길을 떠난 셈입니다. 인천 배다리 골목에 뿌리를 내려 쉰 해나 일흔 해를 살아온 아주머니 할머니도 ‘어디 먼 구경 다녀 본 적’은 없다고 해도, 바로 이 뿌리내린 동네 한켠에서 늘 길을 나서면서 살아온 셈이에요.

 사람마다 자기 길이 있고, 사람마다 제 깜냥과 주제대로 길을 나섭니다. 어떤 이는 몇 천 킬로미터 바깥까지 길을 나서고, 어떤 이는 몇 백 미터 테두리에서만 길을 나섭니다. 더 먼 데까지 나간다고 더 홀가분하거나 즐겁게 길을 나서는 셈은 아니라고 느낍니다. 가까운 테두리까지만 길을 나선다고 해서 다람쥐 쳇바퀴 도는 길나섬은 아니라고 느낍니다. 백 살까지 살아야 잘사는 삶이 아니고, 스물밖에 못 산다고 못사는 삶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한 달에 천만 원을 벌어야 잘사는 삶이 아니고, 한 달에 십오만 원 가까스로 번다고 못사는 삶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자기가 길사람을 느끼고 언제나 길나섬을 한다고 느낄 수 있다면, 어느 곳 어떤 자리에서 누구와 부대끼더라도 아름다운 자기 삶터를 두 발로 튼튼하게 디디며 걸어가고 있는 멋있는 사람, 곧 멋사람이라고 느낍니다. (4340.10.14.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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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이 가을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어젯밤, 그리고 오늘낮, 집에 있는 온도계를 보니 16∼17도입니다. 햇살이 내리쬐는 바깥은 20도를 넘길까요? 오늘은 며칠 만에 해가 얼굴을 내밀고 있어서 부랴부랴 이불을 걷어서 담벼락에 널어 놓습니다. 그러고는 머리를 감고 웃도리와 수건 빨래를 합니다. 온도계로는 가을이라 그런지 이른새벽이나 이른아침에는 머리감기 힘듭니다. 이제 막 가을 문턱을 넘어서서 그럴 텐데, 조금 지나면 익숙해지겠지요. 한겨울에도 찬물로 머리를 잘만 감아 왔으니까요.

 빨래는 집안에 널어 놓은 다음, 머리카락 물기를 조금 털어내고 마당으로 나와 해바라기를 합니다. 갈비뼈처럼 보이는 양털구름이 좋아 보여서 사진 한 장 찍습니다. 앞집 하나 건너에 있는 기찻길로 전철이 오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요새는 전철길을 따라 길게 울타리가 놓여서 시끄러운 소리를 조금이나마 막아 줍니다. 이 울타리조차 없던 지난날에는 기찻길 옆 사람들은 우예 살았을까요. 아니, 지난날에는 기찻길 옆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소리 공해’에 시달린다는 생각을 아예 안 했겠지요. 생각해 보면, 기찻길이든 넓은 찻길이든 가난한 사람들 살림집을 밀어내고 죽 밀어붙였어요.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 모여살던 마을은 그예 두 동강이 나서 얼결에 남북, 또는 동서로 갈린 채 서로 만날 수 없는 사이처럼 되고 맙니다. 때때로 고속버스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릴 때면, 이 고속도로 왼편과 오른편으로 갈린 마을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오갈 수 있을까 싶어 가슴이 짠합니다. 어쩌면, 두 마을 분들은 서로 오갈 일이 없을지 모르겠고, 고속도로로 나뉜 지 오래되어서 서로 오갈 일도 사라졌는지 모르겠어요.

 잠깐 동안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데에도 머리카락 물기가 거의 다 마릅니다. 웃도리를 들고 도서관으로 내려옵니다. 물 한 잔 마시고 책상 앞에 앉습니다. (4340.10.1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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