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얼마가 흘렀든지 다시 돌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기에 헌책방 헌책입니다. 겉이 낡고 더러워졌어도, 판권에 적힌 책값보다 훨씬 많은 돈을 치러야 해도 살 만한 보람과 기쁨을 느낄 수 있는 헌책방 헌책입니다. 때때로 500원이나 1000원밖에 안 하는 헐값에 살 수도 있는 책이 뜻하지 않게 놀라움과 반가움을 선사하기도 하는 헌책방 헌책입니다. 사람은 늘 새로 나고 죽지만, 책에 담긴 이야기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유행 따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바로 유행이 되는 밑거름을 건네주는 헌책방 헌책이라고도 하겠네요.


 그러나 모든 헌책방 헌책이 볼 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어느 책은 버려지지요. 뭐, 백 해나 이백 해가 지나면 모든 헌책은 옛책 구실이나 값어치를 하긴 하지만, 더구나 돈이 많고 헛간도 널찍해서 간수할 수 있다면 모르지만, 조그마한 자리에서 살림을 꾸리는 헌책방으로서는, 책방 임자부터 ‘다시 볼 만한(팔 만한) 값어치가 있는가 없는가’를 따지곤 합니다. 그래, 다시 팔 만한 값어치가 없는 헌책은 거리낌없이 버려요. 버려지지요. 버려야 해요.


 우리 나라 방송풀그림은 어떨까요. 며칠 지난 풀그림은, 한두 달 지난 풀그림은, 한두 해 지난 풀그림은, 대여섯 해 지난 풀그림은, 열 해쯤 지난 풀그림은, 스무 해나 서른 해쯤 지난 풀그림은, 백 해쯤 지난 풀그림은 어떠하지요? 볼 만할까요? 볼 만한 재미나 보람이 있을까요? 다만, 방송풀그림도 아주 오래되거나 묵었다면, 자료로 값어치 구실을 합니다. 어떤 풀그림도 그렇습니다. 어떤 책이라도 무척 오래되었으면 지난날 자료가 되니까요.


 제가 방송풀그림을 그다지 안 좋아하기도 하지만, 텔레비전을 즐겨보는 분들 가운데 몇 달 지난 ‘재방송’을 재미있다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느낍니다. 몇 해 묵은 ‘재방송’은 더더구나. 열 해쯤 지난 연속극이나 익살이야기는 어떻지요? 1991년 프로야구 어느 경기 하나를 세 시간 동안 앉아서 볼 수 있을까요? 1994년 어느 연속극을 한 시간 동안 앉아서 볼 수 있을까요? 인기를 많이 얻었다는 한국영화를 텔레비전에서 볼 때면, ‘지금 와서 다시 보니 참 재미없네.’ 하는 느낌이 퍽 짙게 듭니다. 〈친구〉라는 영화를,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를 다섯 해나 열 해쯤 뒤에도 텔레비전에서 틀어 줄까요? 틀어 줄 때 볼 사람이 있을까요?


 지금 우리 나라 방송풀그림 눈높이는 ‘재방송으로 보여줄 값어치나 재미나 보람’이 없는 테두리에서 헤어나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재방송으로 보여줘도 한 해도 못 넘길 만한’ 테두리에 머물고 있다고 느낍니다. 생각해 보면, 제가 즐겨 찾아서 보는 책들 가운데에도 ‘한 해 지난 뒤’에도 읽고픈 생각이 안 드는 책이 참 많습니다. 지금은 교보문고나 영풍문고에서 아주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책들이지만, 그 책들이 얼마나 그 좋은 자리에 버틸 수 있을까요?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책들이 얼마나 오래 그 자리에 머무를까요? 열 해 앞선 때 베스트셀러를 오늘날 읽을 만할까요? 스무 해 앞선 때 베스트셀러나 서른 해 앞선 때 베스트셀러는 어떻지요? 요즘 베스트셀러를 열 해 뒤에도, 아니 다섯 해 뒤에도 읽을 만하다고 느낄까요? 그래서 신문에서 ‘아무개 책방 이주 베스트셀러 목록’을 붙이는 일은 참 쓸데없는 일인 한편, 폭력이라고 느껴요. 정작 우리한테 쓸모가 있고 재미도 있으며 즐거움과 보람이 있는 책목록은 베스트셀러가 아니니까요.

 
 책이든 방송이든 영화든 연극이든 다른 공연이든 문화든 예술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어느 무엇이든, 지금 곧바로뿐 아니라 앞으로도 꾸준히 즐길 만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밥을 좋아합니다. 밥 한 그릇은 지금 곧바로도 제 배를 넉넉히 채워 주고 기운을 북돋워 줍니다. 새힘을 선사해요. 이 밥은 몇 번을 먹어도 질리지 않습니다. 여태껏 얼마나 많은 밥그릇을 비웠을는지. 몇 만 그릇도 넘겠지요. 앞으로도 10만 그릇, 또는 20만 그릇, 또는 30만 그릇을 비울지 모릅니다.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밥그릇이요, 지금 이때에도 낮밥이나 저녁밥으로 제게 기쁨을 선사할 밥그릇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책도, 영화도, 방송풀그림도, 사진도,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곧바로 즐거울 수 있는 한편, 앞으로도 꾸준히 즐길 수 있는 책을, 영화를, 방송풀그림을, 사진을, 그림을 좋아합니다. 지금 곧바로만 재미있는 책은 싫습니다. 앞으로 좋아질 책도 썩 달갑지 않습니다. 한결같은 책, 꾸준한 방송풀그림, 곧게 이어가는 사진이 좋습니다. (4339.10.25.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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