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저녁 아홉 시가 조금 넘었을 때, 눈과 몸을 쉬고자 잠깐 자리에 눕는다. 불도 끈다. 조용히 드러누운 채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면서 두어 시간만 쉬었다가 일어나자고 다짐한다. 어느덧 두어 시간쯤 지났을까. 일어날까 말까 하다가 조금 더 눕기로 한다. 그러다가 얼핏 잠들었고 다시 깨어났을 때는 몸이 으스스 떨린 깊은 새벽.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웅웅웅 들린다. 곧 꺼진다. 다시 웅웅웅 돌아간다. 눈을 뜨고 누운 채 창밖을 바라본다. 별이 하나 보인다. 그렇구나, 별. 방바닥은 아직 따스해지지 않았고 몸은 으슬으슬 떨린다. 어떡할까. 이대로 죽 잘까, 아니면 일어날까. 망설이며 몸을 웅크리다가 벌떡 일어난다. 아, 춥다. 방온도는 아마 10도가 안 될 듯. 가지빛 고무신 꿰어신고 마당으로 나간다.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음, 별 많네. 예전만 못하기는 해도.

 새벽에 올려다보는 밤하늘. 고요한 이 새벽, 부엉이인지 소쩍새인지 밤새 한 마리 가늘게 우는 이 즈음. 저 멀리 큰길에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 없고 오로지 내 발자국, 내 몸 움직이는 소리만. 바람도 없어 나뭇잎 구르는 소리나 나뭇가지 떨리는 소리도 안 들린다.

 산기슭에 쉬를 한다. 몸을 조금 풀어 준 뒤, 탁탁탁 뛰어서 집으로 돌아온다. 방에 불을 켠다. 아, 눈부셔라. 어둠에 익숙해졌던 눈이 빛이 낯설어 찡그리게 된다. 부엌에서 물 한 모금 입에 넣고 오글오글 굴린 뒤 삼킨다.

 셈틀을 켜고 자리에 앉는다. 몸이 떨리기는 마찬가지. 그래도 얼얼한 손을 비비며 글을 쓴다. 보일러가 다시 웅웅웅 돌아간다. 그러다가 뚝. 방온도가 11도가 되었다는 불빛. 11도라. 한 사람이 깨어나 움직이니 이렇게 되나. 아직 손가락이 시리다. 조금 더 있자니 12도. 햐. 1도 더 올라갔네. 하지만 더 올라가지는 않겠지. 요새 날이 좀 풀린 듯하면서도 새벽엔 이렇게 쌀쌀하단 말이야.

 기름을 때는 조그마한 살림집. 올해는 기름을 얼마나 썼을까. 아침저녁으로 기름통을 살펴보는데, 올겨울에는 기름을 거의 안 썼다. 지난겨울에 넣은 기름이 아직도 제법 남았다. 잘하면 이듬해 겨울도 이 기름으로 날 수 있을 듯. 올겨울에는 이 집에서 혼자만 지내는데, 보일러 온도를 가장 낮추어 돌리고, 어지간해서는 돌리지도 않으니 이렇게 된다. 그만큼 집에서는 옷을 두툼하게 끼어 입는다. 큰방에는 아예 불을 안 넣는다. 겨울 한철 큰방은 얼음장이다. 작은방에는 언제나 이불이 깔려 있다. 이불이 깔리지 않은 자리에는 책과 옷가지를 쌓아놓았다. 조그마한 불씨라도 오래오래 남아 있기를 바라면서. 그래, 기름을 때며 살아도 이렇게 아끼고 아끼면 두고두고 쓸 수 있구나. 나무 땔감이나 연탄 못지않게 적은 돈으로도 겨울나기 할 수 있겠네. 하지만 연탄을 땐다면 이 겨울이 한결 따뜻하겠지. 훨씬 적은 돈으로.

 두 손을 가랑이 사이에 넣고 비빈다. 틈틈이 이렇게 비벼서 녹이지 않으면 손가락을 움직일 수 없다. 글을 쓰면서도 몸을 이리 비틀고 저리 움직인다. 그래야 몸도 안 굳겠지. 겨울을 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일 텐데, 이 가운데 ‘부지런히 몸 움직이기’가 있다고 느낀다. 사람들이 가장 안 쓰는 방법일 텐데, 나는 이 방법이 좋다. 시골 사는 분 가운데에는 나보다 더 춥게 살며 더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분도 많다. 움직이지 않으니까 춥다. 옷을 안 입으니 춥다. 그것뿐이다. 겨울에는. (4340.2.13.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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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뿌리
서숙 지음 / 녹색평론사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 책이름 : 따뜻한 뿌리
- 글쓴이 : 서숙
- 펴낸곳 : 녹색평론사(2003.5.10.)
- 책값 : 8000원

 
 새벽을 좋아합니다. 시골에 있든 도시에 있든 새벽이 참 좋습니다. 시골에서는 시골 나름대로 고요하고 으슬으슬 추운 새벽이 좋습니다. 도시에서는 도시 나름대로 시끄러운 소리 모두 잠든 새벽이 좋습니다. 지난날 서울에 살며 신문돌리기를 하던 때, 이 새벽이 참 좋아서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서 다른 딸배보다 먼저 일을 끝마치고 지국으로 돌아오려고 했습니다.


.. 점심으로 국수를 해먹고 맥주를 마셨다. 오랜 시간이 흐른 듯했는데, 충일한 기운이 몸안에 쌓인 듯했는데 여전히 정오였다. 학교에서는 전화 두어 번 하면 점심시간인데, 어떻게 시간이 이렇게 마디지요? 시골에서는 그럼 돈도 이렇게 마딜까요? 그럴 수도 있지요.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이 없으니 사고 싶은 욕망이 생길 틈이 없고, 생활이 그래서 단순해지고 ..  〈12∼13쪽〉


 술이 거나해서 비틀거리는 사람을 빼놓고는 새벽에 볼 수 있는 사람이 드뭅니다. 도시 골목길을 치우며 손수레 끌고 다니는 청소부를 빼놓고는 새벽에 길거리에서 일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는 새벽 두 시쯤 일어나 신문 부수를 헤아려 챙긴 뒤 자전거 앞뒤에 가득 싣고 달렸습니다. 신문돌리기로만 먹고사는 다른 신문사 총무도 비슷한 즈음 일어나서 새벽을 엽니다. 우유돌리기로 살림을 꾸리는 다부진 아저씨 아주머니 들도 비슷한 즈음 일어나서 새벽을 엽니다. 새벽길에 이분들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마주치면,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라도 꾸벅 인사를 하거나 ‘안녕하셔요’, ‘수고하셔요’ 하고 인사말을 주고받습니다.

 때때로 노래를 부르면서 돌립니다. 무언가 울컥하는 것이 있는 날은 큰소리를 질러 보며 신문을 돌립니다. 빗길에는 신문 젖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서고, 눈길에는 언덕길을 못 올라갈까 근심스러운 마음이 앞섭니다. 이른새벽 골목길을 지나가는 차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하는지 불쑥불쑥 튀어나오기도 하고 엄청난 빠르기로 쌩하고 지나갑니다. 이런 차를 부대끼면 차 뒤에 대고 주먹을 휘두릅니다.


.. 두 손으로 하던, 두 손 끝에 정성과 마음을 모아 하던 일들이 사라진 지금, 그 손들은 무엇을 하는가. 무슨 일을 하여서 잃어버린 집중과 긴장의 순간들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손을 쓰지 않으면서부터, 우리의 생각과 감정도 생기를 잃게 되고, 우리의 삶은 그만큼 나른해지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삶은 손을 통해 연결되는 현장성과 멀어지는 만큼 막연해지고 추상적이 되는 것이다 ..  〈114쪽〉


 새벽 신문돌리기에서 몹시 짜증스러운 사람이 여럿 있습니다. 이 가운데 하나는 순찰을 돈다는 경찰. 새벽 순찰을 돈다는 경찰은 신문배달부 자전거나 오토바이에 꽂힌 신문을 으레 슬쩍합니다. 그러고는 시치미를 뚝 떼지요. 골목길 안쪽 집에 신문을 넣고 헐레벌떡 돌아오면 저 앞쪽에 순찰차가 슥 지나가는 게 보입니다. 바구니에 꽂은 신문 부수를 세어 봅니다. ‘저 자식들 또 훔쳐가네’ 언젠가 코앞에서 슬쩍하는 모습을 보고 ‘야, 뭐 하는 거야!’ 하고 소리를 지르니 ‘어, 죄송해요. 그냥 뭐가 났나 보려고요.’ 하며 꼬리를 내리고, 언젠가는 ‘아저씨 오면 돈 주려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하면서 알량한 웃음을 짓고, 언젠가는 ‘우리들이 이 새벽에 이렇게 고생하는데 한 부쯤 주면 안 돼요?’ 하고 외려 큰소리입니다. 그러면 저도 한 마디 하지요. ‘저도 이 새벽에 이렇게 고생하면서 돌리는데 한 부쯤 사 주면 안 돼요?’


.. 가령, 쌀 한 톨이라도 애껴야 한다는 것은, 그것이 알뜰이나 절약의 차원을 넘어서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밥상에 밥 한 공기가 오르기까지, 곡식알들은 벌레로부터 비바람으로부터 새들로부터 오가는 사람들의 손길로부터 수확기의 뜻밖의 폭우에 이르기까지 많은 위기들을 넘기고 살아남았다. 그러니 설거지통에 쌀 한 톨이 떨어진들, 그걸 무심히 그냥 버리지 못할 것이다. 거기까지 살아서 온 그의 존재를 그런 식으로 허방을 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설거지 물에서 건져내어 잘 씻어 향긋한 밥을 지어 먹을 때, 비로소 쌀 한 톨의 삶은, 거기 연결된 생명의 손길들은 완성되는 것이다 ..  〈217∼218쪽〉


 우유상자를 여섯 통 자전거 앞뒤로 매달고 이른새벽부터 아침까지 돌리는 아주머니를 보았습니다. 앞에 하나, 짐받이에 셋, 짐받이 옆으로 하나씩. 아주머니는 저렇게 돌리고 한 달에 얼마를 벌 수 있었을까요.

 어느 날, ㅈ일보를 돌리는 총무가 우리 지국으로 찾아와 울면서 하소연을 합니다. ‘제 오토바이 못 보셨어요? 일을 마치고 쇠사슬로 묶어 놓았는데 누가 그걸 끊고 훔쳐갔어요. 그런데 지국에서는 오토바이 도둑맞은 건 제 과실이라면서 제 돈으로 그걸 물어내라고 해요. 아내하고 저하고 둘이서 1500부를 돌리는데 한 달에 70만 원 받아요. 오토바이 값은 80만 원이래요. 어떻게 하면 좋아요?’


.. 정말 그러네. 배낭들을 삐딱하게 걸치고 운동화를 신고 여기도 기웃, 저기도 기웃거리네. 이기, 우리가 차가 없어서 이럴 수 있는 기지요. 그건 그렇다. 서울에서 여기까지, 비행기 택시 버스를 타고 걷고. 자가운전을 하지 않아서 가능한 일이다. 전국의 도로 위를 달려가는 차들, 목적지를 향해 달리며 운전석에서 뒷자석에서 옹색하게 내다보는 풍경들 …… 물어서 버스표 사고 기다리고 그곳 사람들과 함께 타고 가며, 익숙하면서도 낯선 삶 속으로 잠시라도 들어가는, 그  홀가분하고 긴장된 순간들은 사라진다. 파스텔 색조가 사라지는 세계. 삶은 획일을 향해 질주한다 ..  〈136쪽〉


 새벽바람이 찹니다. 마당에 나가 새벽에도 아직 밝게 빛나는 별을 올려다봅니다. 이제는 밤하늘 별은 시골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아니 예전부터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고마운 선물입니다. 하지만 요즈음 시골사람들은 이 고마운 선물을 누릴 만큼 느긋함이나 아늑함이 없습니다. 그만큼 힘듭니다. 삶이, 사회가 팍팍해지니까요. 그렇다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밤하늘이 선사하는 고마운 별빛을 손사래치고 무엇을 얻거나 누리며 살아가는가요. 우리를 먹여살리는 따뜻한 뿌리는 무엇일까요. 언제나 새힘을 내도록 하고, 저마다 다른 열매를 맺도록 북돋워 주는 따뜻한 뿌리는 무엇일는지요. (4340.2.13.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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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손수건 - 미선이와 효순이에게 보내는 이용남의 포토에세이
이용남 지음 / 민중의소리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지난 2004년에 처음 쓴 글인데, 다시 읽어 보니 너무 섣불리 쓴 대목이 많아서 크게 고쳐서 아주 새로 썼습니다. 이용남 씨가 음독자살을 꾀한 날 부랴부랴 쓰느라 어설픈 데가 많을 수밖에 없겠더군요. 모쪼록, 이 소중한 사진이야기책이 제대로 알려지고 읽히고 가슴에 새겨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겉똑똑이 아닌 속똑똑이로 우리들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면 좋겠습니다. 이용남 씨는 2004년 5월 25일에 효순이와 미선이 추모비 앞에서 음독자살을 하려 했으나, 다행스레 목숨이 끊어지지는 않고 가까스로 살아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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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이름 : 어머니의 손수건
 - 사진+글 : 이용남
 - 펴낸곳 : 민중의소리(2003.3.15)
 - 책값 : 35000원

 미선, 효순을 그리며 부른 슬픈 사랑노래
- 이용남 씨가 담은 《어머니의 손수건》


 〈1〉 이용남 아저씨, 살아나셔야 합니다


 슬프다. 안타깝다. 괴롭다. 끔찍하다. 씁쓸하다. 눈물이 난다. 창피하다. 가슴이 탄다. 속에서 뜨거운 것이 넘어온다……. 이용남 씨가 파주에서 살면서 담아낸 ‘미군부대 만행과 이 땅 보통사람 역사와 삶’ 이야기인 《어머니의 손수건》(민중의소리,2003)이라는 사진책을 본 제 느낌입니다. 흐지부지되고 있는 ‘소파 개정’ 문제, 제대로 된 사과와 배상이 없는 미군범죄 사실을 밝히는 어려움과 이런 데에는 눈길도 안 두는 우리들 모습, 여기에다가 이 모든 현실에 마음아파 하고 안타까워 하다가 끝내 자기 목숨까지 놓으려고 한 이용남 씨 소식을 들었을 때 제 느낌입니다.

 이 글을 쓰는 제 눈가에 눈물이 핑 돕니다. 왜 이럴까요. 왜 이렇게 힘들까요. 왜 이렇게 촛불 하나도 함께 들지 못하고, 왜 이렇게도 ‘뚜렷하게 보이는 주한미군 범죄’를 범죄라고 말하지 못할까요? 지난날 홍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하지 못한 슬픔을 안고 살았다는데, 우리는 ‘주한미군 범죄를 범죄라 하지 못하는 아픔’을 안고 사는 게 아니냐 싶습니다.

 모쪼록 이용남 씨가 건강을 되찾길 바랍니다. 지금은 가슴아파하며 쓰러졌어도 다시 주먹 불끈 쥐고 일어나서 더 꿋꿋하게, 더 힘차게, 더 가멸차게, 더욱 입술 질끈 깨물며 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들은 우리가 이렇게 쓰러지기를 바랄 테니까요. 저들은 이런 지루하고 힘겨운 싸움에 지쳐서 우리 스스로 나가떨어지기를 바랄 테니까요. 저들은 바로 우리들끼리 이렇게 아파하고 괴로워하다가 농약 먹고 죽기를 바랄 테니까요. 살아남아서 더욱더 사진기에 힘을 싣고, 손가락에 힘을 싣고, 두 눈 부릅뜨고 이 세상을 똑바로 보고, 사진으로 올곧게 담아내야 합니다.


 〈2〉 《어머니의 손수건》이라는 책


 저는 아직 《어머니의 손수건》을 다 읽지 못했습니다. 책을 보는 동안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고 너무 아파서 빨리 읽을 수 없었습니다. 날마다 조금씩 보면서, 참 이런 일이 다 있구나, 어쩜 이런 일이 고쳐지지 않고, 우리 정부는 팔짱만 끼고 있을까, 어떻게 같은 나라 사람끼리 서로 생채기를 보듬지 못하는가…… 하고 느낍니다. 다 읽으려면 1/4을 더 읽어야 하지만, 이용남 씨 슬픈 소식을 들은 뒤, 여태껏 읽은 느낌만으로라도 서둘러 알려야겠다, 이 책을 사람들이 많이많이 사서 보고, 미선이와 효순이 일뿐만 아니라 주한미군이 저지른 온갖 범죄와 만행을 제대로 알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이 글을 씁니다.


.. 촛불이 광화문 네거리에 멈춰 섰습니다. 재벌 수구언론으로 불리는 신문사의 건물이 양쪽에서 내려다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월드컵 때문에 여중생 사건이 그냥 묻힐 뻔했다고 말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월드컵이 없었어도 아마 신경 쓰지 않았을 겁니다. 대한민국 언론이 해 온 일을 보면 알 수 있지요 ..  〈171쪽〉


 월드컵 축구 바람이 한창이던 때, 경기도 어느 시골길에서 중학생 둘이 장갑차에 치여서 죽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냥 친 게 아니라 앞뒤로 왔다갔다 하면서 주검을 아주 곤죽으로 만들었다지요? 시골길이라 사람이 안 보니 그렇게 죽여도 괜찮다고 생각했을까요. 자취를 없애 버리듯 짓밟으면 누구인지 모를 테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을까요.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이용남 씨 말마따나 두 여중생이 죽은 일은 ‘월드컵이 아니었어도’ 보도가 되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월드컵에 묻혔다’는 말은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언론사 기자들이 제대로 안 다루고 지나쳤는데, 그렇게 크게 불거져 나온 모습에 깜짝 놀라며 내뱉는 핑계입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마음에 끄집어낸 핑계입니다. 하긴, 기자들 문제만은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가 기사로 나왔어도 우리들 가운데 제대로 눈길을 둘 사람이, 마음쓰며 함께 아파하고 슬퍼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기자나 우리들 보통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이 먹고사는 일만으로도 힘겹고 바쁘다는 핑계를 날마다 내뱉으면서 ‘아유, 그런 데까지 어떻게 마음써요?’ 하고 둘러댑니다. 꽁무니를 뺍니다. 그러나 텔레비전 연속극 볼 시간은 잘만 있습니다. 노래방에서 신나게 노래 부를 시간은 잘만 있습니다.

 월드컵 경기가 다 끝난 뒤 대통령선거가 다가오던 즈음입니다. 두 가녀린 중학생을 기리는 촛불집회가 슬금슬금 일어납디다. 2002년 12월 7일 촛불시위는 고빗사위였습니다. 이 고빗사위에, 대통령선거를 코앞에 둔 때, 대통령후보로 나온 세 사람이 촛불시위 현장에 왔습니다. 이들 세 사람은 참으로 두 아이와 함께 아파하고 슬퍼하고자 왔을까요? 아니면, 표얻기를 바라는 마음에 왔을까요? 이날 촛불시위를 하는 광화문에 들어오려는 대통령후보 세 사람(노무현, 이회창, 권영길)은 끝내 마이크를 잡는 ‘영광’이라든지 무대 앞쪽에 다가가는 ‘영광’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이네들 ‘선거 홍보 차’가 못 들어오게 막았으니까요. 적어도 월드컵이 끝난 뒤에 한 번이라도 코빼기를 비쳤다면 모르되, 뻔히 다 보이는 꾐수를 썼으니까요.

 불평등으로 이루어진 한미 여러 조약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여기에 더 얄궂은 불평등 조항을 담은 새로운 조약이 다시 맺어질 판입니다. 애꿎은 목숨을 죽여 버린 살인자는 어떠한 조치도 제재도 벌도 안 받은 채 고이 잘살고 있습니다. 외려 그 병사가 피해자라는 말까지 나옵니다.

 이라크에서 학대받은 포로 이야기가 들려오기도 합니다. 미국 대통령은 어쩌다가 포로수용소에서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핑계를 댑디다. 하지만 따져 보셔요. 지구 곳곳 어디든, 미국 발길이 닿는 어느 곳이든, 이렇게 애꿎은 사람들이 피해와 학대를 받으면서 죽거나 다치지 않는지요.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아이티에서도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이라크에서도.


 〈3〉 왜 문제인가?


.. 주민들은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 말을 믿으라는 거냐”며 탱크 앞에서 연좌했다. 윌시 참모는 다시 주민들에게 “우리 병사들이 훈련에 지쳐 빨리 부대에 돌아가 목욕을 하고 잠을 자야 한다”며 비켜 줄 것을 요구했다. 주민들의 감정이 폭발했다. “뭐라구? 피곤해서 목욕을 해야 한다고…” ..  〈22쪽〉


 주한미군은 말 그대로 고생입니다. 고향을 멀리에 두고 말도 물도 낯선 나라에서 훈련을 받으며 사니까요. 게다가 ‘훈련 좀 하겠다’는 자기들이 제대로 다니지도 못하게 가로막는 ‘무식한(?)’ 주민까지 있습니다. 미군들이 보기에 참말 골때리겠지요. 은혜도 모르고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면서. 이라크에서도 ‘평화’와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고 ‘재건’을 시켜주겠다는데, 사람들이 제대로 안 알아준다며 투덜투덜대고 있겠지요?

 그래서 생각해 봅니다. 미군은 한국땅에서 고생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이렇게 애먹으면서, 욕먹으면서 한국땅에 있으려 합니까. 구태여 먼 나라에 와서 고생할 것 없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면 됩니다. 자기 나라에서 즐겁게(?) 군사훈련을 하고, 자기 나라 땅에서 즐겁게(?) 사격장과 폭격장을 만들어서 미사일과 총알을 쏘아대면 됩니다. 굳이 이라크에 있을 까닭도 없습니다. 제 나라 미국에서 민주주의와 평화를 이루도록 힘쓰면 됩니다.


.. 미2사단 민사참모 윌시 소령이 냉랭한 표정으로 불만을 털어놨다. “우리는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가족과 떨어져 이곳에 왔다. 훈련을 가로막는 행위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19쪽〉


 문제 고갱이는 여기에 있습니다. 대한민국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한국땅으로 왔다는 미군이 참으로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키는 투사(?)다운 삶을 꾸려 나가고 있느냐입니다. ‘평화로운 군사훈련이나 전쟁’이 있을 수 있을까요?

 왜 군대가 있어야 하고, 왜 무기를 만들어야 할까요. 왜 군인은 ‘민간인’을 그토록 괴롭힐까요. 민간인들이 이렇게 괴로움에 시달리고 들볶여야 한다면, 민간인들이 누려야 할 ‘평화’란 무엇일까요. 아니 처음부터 평화란 아예 없는 것, 누릴 수 없는 것 아니었을는지요.


.. 두 여중생의 죽음은 우연한 교통사고가 아닌 살인이었다. 여중생이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탱크 피해를 참다못한 파주 주민들이 탱크를 몸으로 가로막자 “민간인은 깔아 죽여도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한 미군 장교의 망언이 현실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  〈7쪽〉


 이용남 씨는 《어머니의 손수건》이라는 책으로 우리들한테 이야기를 건넵니다. 이 책이 나오게 된 가장 큰 발판은 ‘미군 장갑차가 짓밟아 죽인 두 여중생’이지만, 정작 큰 문제, 말썽거리, 아픔과 슬픔은 ‘전쟁무기에 길들어 버린 우리들’, ‘전쟁을 몰아내고 평화를 찾아야 하는데, 이런 데까지 마음을 안 두고 있는 우리들’을 있는 그대로 느끼도록 하는 데에 있다는 이야기를 건넵니다.

 효순이와 미선이가 죽기까지 얼마나 많은 한국사람들이 한국땅에서 주한미군 범죄에 시달렸나요. 얼마나 넓은 우리 삶터가 주한미군 군사훈련으로 더럽혀지고 망가지고 무너졌는가요. 한국땅에서도 이러할진대, 나라밖 다른 곳에서는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숱하게 일어날까요. 이라크에서 일으킨 전쟁 소식만 들어도 그렇잖습니까. 이번 전쟁으로 이라크는 역사와 문화가 깡그리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유적지도 무너지고 박물관도 부서지고 학교며 우체국이며 발전소며 주유소며 약국이며 자전거가게며 구멍가게며, 모든 곳이 싸그리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미군이 말하는 그 ‘자유와 민주와 평화’를 지킨다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4〉 미선이와 효순이뿐일까


.. 엄마의 손에는 손수건이 꼭 쥐여 있습니다. 딸이 세상을 떠난후 손수건은 늘 엄마와 함께 있습니다. 손수건에는 딸의 내음이 흠뻑 배어 있습니다. 딸의 서랍게 곱게 접혀 있던 손수건이 엄마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  〈57쪽〉


 효순이 어머님은, 또 미선이 어머님은 사진에서만이 아니라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실 테지요. 죽은 자기들 딸내미 때문에 눈물을 흘리겠지만, 자기들 딸내미 말고도 죽은 아이들 때문에, 또 앞으로도 죽을 수밖에 없을 또다른 아이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또 손수건으로 그 눈물을 훔쳐낼 테지요.

 당신들 딸내미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방을 보고, 걸상을 보고, 물건을 보고, 자수를 보고, 사진을 보면 눈물만 나고 한숨만 나온다는 어머님. 그래서 걸상을 태우기도 하고, 딸내미들이 쓰던 물건을 버려 보기도 한답니다. 하지만 가슴에 사무친 아픔까지 사라질까요.


.. 논 한가운데 경고 팻말이 박혀 있다. ‘대포 및 소총 사격 지역’이라는 내용이다. 이 스티커를 벗겨내면 ‘미국 정부 재산’이라는 글자가 나온다. 이 땅은 등기까지 되어 있는 개인 땅이다. 그런데 미군은 대한민국 정부가 자신들에게 준 땅이라며 ‘미국 정부 재산’이라는 경고문을 붙였다. 재산세는 농민이 내고 사용은 미군이 하는 스토리사격장의 풍경이다. 농민이 수없이 항의를 해 보지만 그럴 때마다 ‘주의’자가 하나 붙는다. 이른바 반미주의자. 끽소리 못하고 이렇게 수십 년을 살아왔다 ..  〈69쪽〉


 《어머니의 손수건》은 미선이와 효순이 이야기만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미선이와 효순이보다 더 끔찍한 아픔과 생채기를 안고 있는 사람들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누가 더 끔찍한 아픔과 생채기를 안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고압전류에 감전되어 두 팔과 다리를 모두 잃고 시름시름 앓다가 한 해 만에 죽은 이한테 미군은 달랑 60만 원 던져주며 ‘그걸로 끝’이라고 했다지요?

 주한미군 사격장은 쉴새없이 ‘중금속 오염 폐수’를 쏟아붓습니다. 최첨단 무기와 장비를 쓰는 미군이건만, 중금속 오염 폐수는 그냥 논과 밭과 도랑으로 흘려보냅니다. 가을에 벼를 베어 길가에 널어 두면, 미군 차량과 장갑차와 탱크는 ‘보란 듯이’ 그 널어 놓은 벼를 짓밟고 뭉개 놓은 채 지나갑니다. 길이 좁아서 밟는 게 아니라, 일부러 가던 길을 돌아와서 ‘착실하게 밟아 주고’ 가던 길을 다시 간답니다. 거짓말 같다고요? 그래, 거짓말 같으면 파주에 가 보셔요. 파주에 가서 그곳 농사꾼들을 붙잡고 물어 보셔요. 파주 농사꾼들 말이 믿기지 않으면 주한미군이 군사훈련을 할 때 몰래 지켜보셔요. 훈련을 마치고 부대로 돌아가는 길에 어떻게 하는지 살펴보셔요.


..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의 반미는 이념적 반미가 아니라 일상생활을 짓밟는 주한미군의 횡포에 대한 저항, 즉 ‘민중적 반미’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  〈71쪽〉


 〈5〉 할 일 많은 이용남 씨와 우리들


 이용남 씨 혼자서 이룰 수 있는 ‘주한미군 범죄 끝내기와 사과 받기와 배상 받기와 재발 방지’는 아닙니다. 혼자서는 달걀로 바위 치기입니다. 하지만 이용남 씨 혼자가 아닌 우리 모두 어깨동무하고 일어선다면 달걀로도 바위를 깰 수 있습니다. 깨고 말고요.


.. 주한미군은 25일 이렇게 말했다.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는 방관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여중생이 누려야 할 삶의 자유와 권리를 짓밟고도 주한미군은 오히려 자신들만의 자유와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  〈130쪽〉


 우리는 이 물음에 대답해야 합니다. 참말로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 반딧불(촛불집회 하는 사람들)이 버거킹(교보문고 앞 2층에 있는)을 향해 소리쳤다. 나와라! 버거킹 창 옆에 앉아 햄버거를 먹으며 밖을 내다보던 사람들이 슬그머니 일어나 안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우리 한번 불러 보자.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밑천인데, 쩨쩨하게 굴지 말고 가슴을 쫙 펴라” 당신들이 있기에 효순이, 미선이의 꿈은 이루어집니다 ..  〈145쪽〉


 주한미군 범죄, 한미주둔군지위협정(한미SOFA), 한미자유무역협정(한미FTA), 여기에 수많은 조약들. 이 모두는 우리들이 풀어나갈 일입니다. 좋은 쪽으로든 궂은 쪽으로든 우리들이 풀어나갈 일입니다. 이 땅,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니까요. 이 땅, 한국땅에 온갖 무기를 가져다 놓고 우리를 윽박지르는 미군과 한솥밥을 먹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니까요.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우리 둘레에서 일어나는 일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 둘레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아야 합니다. 책이란, 이런 여러 가지 이야기를 가만히 들려주는 길잡이 노릇을 하기도 합니다. 이 가운데 《어머니의 손수건》은 주한미군이 저지르는 범죄가 무엇인지, ‘소파’라고 하는 조약이 어떤 말썽거리를 담고 있는지 느끼도록 하고 알도록 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이런 책을 손수 찾아서 읽지 않는다면 말짱 헛것, 도루묵입니다. 우리들이 이 나라에서 어떻게 주한미군 범죄로 몸서리를 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데, 소파 협정이 왜 잘못되었는지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효순이와 미선이 아픔을 느끼겠어요. 촛불 하나 함께 든다고 다 풀어질 일일까요.

 우리 스스로 우리 이야기에 귀를 닫고 눈을 감고 고래를 절레절레 흔든다면, 앞으로도 이 모습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다가 언젠가 우리들 소중한 딸내미와 아들내미가 미군 장갑차에 떡이 되듯 짓밟혀 죽고, 미군 폭격기에 산산조각 부서져 죽겠지요. (2004.5.25.처음 씀/2007.2.12.고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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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달 넘게 끙끙거린 끝에 겨우 책이야기 하나 마무리지었다. 읽은 지는 좀더 되었지만, 느낌글을 어떻게 쓰면 좋을지를 놓고 갈팡질팡하느라 한 달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오늘 마무리지은 책은 《청소녀 백과사전》(김옥/나오미양). 참 오랫동안 붙잡고 있어야 한 책이라서 막상 느낌글을 다 쓰고 난 뒤에도 책꽂이에 선뜻 못 꽂았지만, 다음 책을 또 하나 찾아서 붙잡아야 할 테지. 세상에는 참으로 좋은 책이 여러 가지 있는 만큼, 딱 하나에만 매일 수 없는 법이니까.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책 하나를 떠나보낸 뒤, 느낌글을 인터넷새책방 〈알라딘〉 게시판에도 올려놓는다. 길이가 제법 길어서 붙여넣기를 하는 데에도 몇 분 걸린다. 느낌글을 올린 뒤, 그동안 올린 다른 글을 가만히 살펴본다.

 흠, 그동안 올린 다른 느낌글을 보노라니 거의 모두 별 다섯을 붙여놓았다. 〈알라딘〉에서는 별 다섯을 잣대로 책느낌을 매기도록 되어 있다. 문득, 나는 왜 별 다섯을 이렇게 많이 붙여놓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글쎄.

 책이름을 하나씩 읊어내려가다가, 아하, 그렇구나 하고 무릎을 친다. 별 셋, 별 둘을 붙일 만한 책도 얼마든지 느낌글을 쓸 수 있겠지. 하지만 어차피 내 시간과 품과 땀을 들여서 쓸 느낌글이라면 ‘별 다섯(더러 별 넷)을 붙일 책만 추려서 쓰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고, 나 혼자 읽는 책이라면 별 셋짜리건 별 하나짜리건 얼마든지 읽을 수 있지만, 굳이 다른 사람들도 읽도록 쓰는 느낌글이라면 ‘바쁘게 사는 이 세상 사람들한테는 별 다섯을 즐겁게 붙입니다!’ 하고 외칠 만한 책이어야지 하는 생각. (4340.2.8.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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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은서점 -

- 대방 헌책방 -


 “나는 새장 속에 갇힌 새여. 평생 한 곳에 묻혀서 바뀌지 않는. 자네는 참 자유롭게 사는구먼.” ― 서울 연세대 건너편 〈정은서점〉 아저씨

 “나도 10년 전에는 헌책방 찾아다니는 게 취미였는데, 요새는 나갈 수가 있어야지. 앞으로 꿈이 있다면, 오토바이 뒤에 수레 같은 거 붙이고 헌책방 찾아 돌아다니는 거예요.” ― 서울 대방동 〈대방 헌책방〉 아저씨

 
 헌책방 아저씨들 겨드랑이에 새로운 날개가 돋아나 홀가분하고 시원하게 온 세상을 훨훨 날아다닐 수 있는 날이 찾아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꼭. (4340.2.7.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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