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뿌리
서숙 지음 / 녹색평론사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 책이름 : 따뜻한 뿌리
- 글쓴이 : 서숙
- 펴낸곳 : 녹색평론사(2003.5.10.)
- 책값 : 8000원

 
 새벽을 좋아합니다. 시골에 있든 도시에 있든 새벽이 참 좋습니다. 시골에서는 시골 나름대로 고요하고 으슬으슬 추운 새벽이 좋습니다. 도시에서는 도시 나름대로 시끄러운 소리 모두 잠든 새벽이 좋습니다. 지난날 서울에 살며 신문돌리기를 하던 때, 이 새벽이 참 좋아서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서 다른 딸배보다 먼저 일을 끝마치고 지국으로 돌아오려고 했습니다.


.. 점심으로 국수를 해먹고 맥주를 마셨다. 오랜 시간이 흐른 듯했는데, 충일한 기운이 몸안에 쌓인 듯했는데 여전히 정오였다. 학교에서는 전화 두어 번 하면 점심시간인데, 어떻게 시간이 이렇게 마디지요? 시골에서는 그럼 돈도 이렇게 마딜까요? 그럴 수도 있지요.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이 없으니 사고 싶은 욕망이 생길 틈이 없고, 생활이 그래서 단순해지고 ..  〈12∼13쪽〉


 술이 거나해서 비틀거리는 사람을 빼놓고는 새벽에 볼 수 있는 사람이 드뭅니다. 도시 골목길을 치우며 손수레 끌고 다니는 청소부를 빼놓고는 새벽에 길거리에서 일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는 새벽 두 시쯤 일어나 신문 부수를 헤아려 챙긴 뒤 자전거 앞뒤에 가득 싣고 달렸습니다. 신문돌리기로만 먹고사는 다른 신문사 총무도 비슷한 즈음 일어나서 새벽을 엽니다. 우유돌리기로 살림을 꾸리는 다부진 아저씨 아주머니 들도 비슷한 즈음 일어나서 새벽을 엽니다. 새벽길에 이분들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마주치면,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라도 꾸벅 인사를 하거나 ‘안녕하셔요’, ‘수고하셔요’ 하고 인사말을 주고받습니다.

 때때로 노래를 부르면서 돌립니다. 무언가 울컥하는 것이 있는 날은 큰소리를 질러 보며 신문을 돌립니다. 빗길에는 신문 젖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서고, 눈길에는 언덕길을 못 올라갈까 근심스러운 마음이 앞섭니다. 이른새벽 골목길을 지나가는 차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하는지 불쑥불쑥 튀어나오기도 하고 엄청난 빠르기로 쌩하고 지나갑니다. 이런 차를 부대끼면 차 뒤에 대고 주먹을 휘두릅니다.


.. 두 손으로 하던, 두 손 끝에 정성과 마음을 모아 하던 일들이 사라진 지금, 그 손들은 무엇을 하는가. 무슨 일을 하여서 잃어버린 집중과 긴장의 순간들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 손을 쓰지 않으면서부터, 우리의 생각과 감정도 생기를 잃게 되고, 우리의 삶은 그만큼 나른해지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삶은 손을 통해 연결되는 현장성과 멀어지는 만큼 막연해지고 추상적이 되는 것이다 ..  〈114쪽〉


 새벽 신문돌리기에서 몹시 짜증스러운 사람이 여럿 있습니다. 이 가운데 하나는 순찰을 돈다는 경찰. 새벽 순찰을 돈다는 경찰은 신문배달부 자전거나 오토바이에 꽂힌 신문을 으레 슬쩍합니다. 그러고는 시치미를 뚝 떼지요. 골목길 안쪽 집에 신문을 넣고 헐레벌떡 돌아오면 저 앞쪽에 순찰차가 슥 지나가는 게 보입니다. 바구니에 꽂은 신문 부수를 세어 봅니다. ‘저 자식들 또 훔쳐가네’ 언젠가 코앞에서 슬쩍하는 모습을 보고 ‘야, 뭐 하는 거야!’ 하고 소리를 지르니 ‘어, 죄송해요. 그냥 뭐가 났나 보려고요.’ 하며 꼬리를 내리고, 언젠가는 ‘아저씨 오면 돈 주려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하면서 알량한 웃음을 짓고, 언젠가는 ‘우리들이 이 새벽에 이렇게 고생하는데 한 부쯤 주면 안 돼요?’ 하고 외려 큰소리입니다. 그러면 저도 한 마디 하지요. ‘저도 이 새벽에 이렇게 고생하면서 돌리는데 한 부쯤 사 주면 안 돼요?’


.. 가령, 쌀 한 톨이라도 애껴야 한다는 것은, 그것이 알뜰이나 절약의 차원을 넘어서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밥상에 밥 한 공기가 오르기까지, 곡식알들은 벌레로부터 비바람으로부터 새들로부터 오가는 사람들의 손길로부터 수확기의 뜻밖의 폭우에 이르기까지 많은 위기들을 넘기고 살아남았다. 그러니 설거지통에 쌀 한 톨이 떨어진들, 그걸 무심히 그냥 버리지 못할 것이다. 거기까지 살아서 온 그의 존재를 그런 식으로 허방을 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설거지 물에서 건져내어 잘 씻어 향긋한 밥을 지어 먹을 때, 비로소 쌀 한 톨의 삶은, 거기 연결된 생명의 손길들은 완성되는 것이다 ..  〈217∼218쪽〉


 우유상자를 여섯 통 자전거 앞뒤로 매달고 이른새벽부터 아침까지 돌리는 아주머니를 보았습니다. 앞에 하나, 짐받이에 셋, 짐받이 옆으로 하나씩. 아주머니는 저렇게 돌리고 한 달에 얼마를 벌 수 있었을까요.

 어느 날, ㅈ일보를 돌리는 총무가 우리 지국으로 찾아와 울면서 하소연을 합니다. ‘제 오토바이 못 보셨어요? 일을 마치고 쇠사슬로 묶어 놓았는데 누가 그걸 끊고 훔쳐갔어요. 그런데 지국에서는 오토바이 도둑맞은 건 제 과실이라면서 제 돈으로 그걸 물어내라고 해요. 아내하고 저하고 둘이서 1500부를 돌리는데 한 달에 70만 원 받아요. 오토바이 값은 80만 원이래요. 어떻게 하면 좋아요?’


.. 정말 그러네. 배낭들을 삐딱하게 걸치고 운동화를 신고 여기도 기웃, 저기도 기웃거리네. 이기, 우리가 차가 없어서 이럴 수 있는 기지요. 그건 그렇다. 서울에서 여기까지, 비행기 택시 버스를 타고 걷고. 자가운전을 하지 않아서 가능한 일이다. 전국의 도로 위를 달려가는 차들, 목적지를 향해 달리며 운전석에서 뒷자석에서 옹색하게 내다보는 풍경들 …… 물어서 버스표 사고 기다리고 그곳 사람들과 함께 타고 가며, 익숙하면서도 낯선 삶 속으로 잠시라도 들어가는, 그  홀가분하고 긴장된 순간들은 사라진다. 파스텔 색조가 사라지는 세계. 삶은 획일을 향해 질주한다 ..  〈136쪽〉


 새벽바람이 찹니다. 마당에 나가 새벽에도 아직 밝게 빛나는 별을 올려다봅니다. 이제는 밤하늘 별은 시골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아니 예전부터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고마운 선물입니다. 하지만 요즈음 시골사람들은 이 고마운 선물을 누릴 만큼 느긋함이나 아늑함이 없습니다. 그만큼 힘듭니다. 삶이, 사회가 팍팍해지니까요. 그렇다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밤하늘이 선사하는 고마운 별빛을 손사래치고 무엇을 얻거나 누리며 살아가는가요. 우리를 먹여살리는 따뜻한 뿌리는 무엇일까요. 언제나 새힘을 내도록 하고, 저마다 다른 열매를 맺도록 북돋워 주는 따뜻한 뿌리는 무엇일는지요. (4340.2.13.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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