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 살 먹는 나무가 죽는 삶

 


  나무는 아주 오래 산다고 이야기한다. 참말 나무는 아주 오래 산다. 그런데, 사람도 누구나 아주 오래 살지 않았을까 싶다. 어느 때부터인가 사람들 스스로 ‘백 살을 채 못 산다’고 생각하면서, 또 이러한 생각을 퍼뜨리면서, 사람들은 스스로 제 목숨을 백 살 언저리에서 마감하지 않았으랴 싶다. 그러니까, 나무를 바라보며 나무는 아주 오래 산다고 여기기에, 나무도 스스로 이처럼 생각하고, 나무는 이러한 삶 그대로 오래오래 살 수 있는 셈이라고 느낀다. 다른 목숨들도 이와 같겠지. 사람들 스스로 밝은 생각 아닌 어리석은 생각을 품으면서 지구별 목숨들 삶과 죽음이 엇갈렸으리라 느낀다. 가만히 살피면, 사람들 때문에 숱한 목숨이 아예 똑 끊어지듯 지구별에서 사라진다. 하나하나 따지면, 사람들 때문에 어느 목숨은 갑작스레 끔찍하게 늘어난다.


  사람은 왜 태어나서 살아가는가. 사람은 언제부터 스스로 죽는다고 생각하는가. 사람은 언제부터 걷기만 할 뿐, 하늘을 날지 못하고 물위를 걷지 못할까. 사람은 왜 마음이 있고 생각이 있으며 꿈이 있는 한편, 사랑과 믿음이 있을까.


  요 며칠 나무를 깊디깊이 헤아려 본다. 호젓한 시골마을에서만 지내다가 퍽 먼길을 달려 도시 고등학교 아이들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로 찾아가다가, 나무 한 그루 싱그럽게 자라기 힘든 그 도시에서 이틀을 보내니, 내 몸과 마음이 그리 홀가분하지 못해 자꾸 나무를 헤아려 본다. 이동안 ‘이천 살 먹고 숨을 거두는 나무’ 삶을 떠올린다. 때로는 천오백 살 먹고 숨을 거두는 나무가 있을 테고, 어느 때에는 삼천 살 먹고 숨을 거두는 나무가 있을 테지.


  나무들은 더 오래 살아갈 수 있을까. 나무들은 그쯤에서 스스로 삶을 마감하면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려 할까. 나무들 스스로 그쯤에서 스스로 삶을 마감하기에, 이녁이 그동안 뿌린 씨앗이 무럭무럭 자란 어린나무가 힘차게 솟아오를 자리를 내어줄 수 있을까.


  유럽 나라는 모르겠지만, 중남미와 북미와 아시아와 호주와 아프리카에는, 또 아시아에서도 중국이나 일본까지, 천 살이나 이천 살을 먹고는 어느 날 문득 숨을 거두는 나무가 있으리라 느낀다. 그렇지만, 남녘이나 북녘에는 천 살을 먹은 나무조차 마주하기 힘들다고 느낀다. 그러니까, 남녘이나 북녘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천 살이나 이천 살을 살아오며 스스로 북돋우고 살찌운 슬기를 둘레에 골고루 나누어 주면서 삶을 마감하고 새 삶으로 나아가는 나무를 만날 수 없다는 소리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슬기를 빛내는 나무를 꾸준히 마주하면서 사람들 스스로 새롭게 거듭나지만, 남녘과 북녘은 스스로 슬기를 키우지 못하고, 스스로 슬기를 밝히지 못하며, 스스로 슬기를 누리지 못하는 나날이라고 느낀다.


  이천 살 먹은 나무가 죽는 삶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은 마음을 밝히지 못하곤 한다. 고작 도시에서 톱니바퀴 같은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될 뿐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월급봉투를 은행계좌로 받아서 ‘소비 쳇바퀴’를 돌 뿐이다. 이러는 동안 아이들한테도 똑같은 ‘대학입시 쳇바퀴’를 물려줄 뿐, 저마다 삶을 밝히는 길로 나아가지 못한다.


  미국은 한국전쟁 때 왜 남북녘 두멧자락까지 폭탄과 미사일을 뿌려대며 잿더미로 만들었을까. 미국은 한국전쟁 때 왜 이 나라 골골샅샅 민둥산이 되도록 모든 숲과 마을을 깡그리 망가뜨렸을까.


  사람들은 ‘수목원’에 가면 마음이 탁 트이고 머리가 환히 열리다가는 생각이 곱게 빛난다고까지 말한다. 과학자 아닌 누구나 이처럼 말한다. 그러면, 수목원이란 무엇인가. ‘숲’이 수목원이다. 숲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풀과 나무로 이루어진다. 농약을 치는 숲이 아닌, 숲결 그대로 흐르는 숲이다. 벌레가 살고 새가 노래하며 짐승들 보금자리가 있는 숲이 바로 ‘수목원’이다.


  나무가 나무답게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사람들한테 마음과 머리와 생각을 열어 준다면, 가끔 자가용 몰고 찾아가는 수목원 아닌 집 둘레에서 언제나 누리는 숲이 있어야 마땅하다. 고속도로를 내거나 고속철도를 낸다며 멧자락에 구멍을 내거나 아스팔트길을 함부로 늘려서는 안 된다. 고속도로는 더 없어도 된다. 새로운 찻길은 더 없어도 된다. 숲이 있어야 하고, 나무와 풀이 자라야 한다. 발전소를 더 지어서 전기를 늘려야 한다지만, 발전소는 더 없어도 된다. 나무가 설 땅이 있어야 한다. 전자파 일으키는 송전탑이 멧줄기 따라 길게 이어지도록 해서는 안 된다. 송전탑이 들판 한복판에 우뚝 서서는 안 된다. 송전탑을 세우지 말고, 천 살 이천 살 먹는 나무가 자라도록 해야 한다. 자가용을 몰지 말고 두 다리로 숲길을 걸어야 한다. 버스도 전철도 타지 말고 자전거를 몰며 숲 사이를 달려야 한다.


  미군기지가 떠난 넓은 터에 무슨무슨 시멘트건물을 세우지 말아야 한다. 그저 풀과 나무가 스스럼없이 자랄 숲을 일구어야 한다. 우리 삶터 곳곳에 빈터를 마련하고, 빈터가 바야흐로 숲이 되도록 돌보아야 한다.


  마을 어디나 ‘수목원’처럼 ‘숲’이 되어야 한다. 집집마다 나무를 보살펴야 한다. 어느 집이나 나무그늘을 누려야 한다. 학교도 관공서도 회사도, 무슨무슨 예술쟁이 작품을 건물 앞에 세울 일이 아니라, 씨앗 한 알에서 비롯하는 나무를 심어야 한다. 몇 천만 원이나 몇 억 원 한다는 소나무를 나무젓가락처럼 박지 말고, 나무다운 나무로 조그맣게 숲을 일구어야 한다.


  사람은 숲사람이다. 새는 숲새이고, 벌레는 숲벌레이다. 짐승은 숲짐승이다. 모든 목숨은 숲에서 비롯하기에 숲목숨이다. 나무를 베어 집을 지으려는 이들은 도끼로 나무를 찍기 앞서 나무한테 절을 한다지. ‘집지을 재료’ 아닌 ‘맑은 넋 깃든 숨결’을 얻기 때문에 나무한테 절을 한다지. 집을 지으려고 삼백 살이나 오백 살 먹은 나무를 벨 적에 누구라도 절을 했다면, 천 살이나 이천 살 먹은 나무가 스스로 삶을 마감하며 쓰러질 적에는 어떤 기운과 넋과 사랑과 숨결이 흘러나와서 우리한테 드리울까. 오늘 내가 씨앗 한 알 심으면 이천 해 뒤를 살아갈 내 뒷사람은 이 나무가 드리울 사랑과 꿈을 누릴 수 있을까. (4345.10.21.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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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2000살 먹은 나무'가 죽는 삶을 곰곰이 생각했는데, 뜻밖에 야마오 산세이 님 책이 새로 나왔구나. 숲속에서 살아가며 숲기운을 글로 나누어 주는 야마오 산세이 님 이야기책이 널리 사랑받으면서, 사람들마다 고운 숲내음 물씬 누릴 수 있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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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미즘이라는 희망- 삼라만상에게 길을 묻다
야마오 산세이 지음, 김경인 옮김 / 달팽이 / 2012년 9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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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야와 함께 1
타니카와 후미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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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랑하는 삶이란 어떠할까
 [만화책 즐겨읽기 186] 타니카와 후미코, 《사야와 함께 (1)》

 


  내가 나고 자란 인천에서 다닌 고등학교나 중학교에는 체육관이 없습니다. 이곳에는 아직도 체육관 건물이 서지 않습니다. 내가 다니던 중·고등학교 곁에는 화학공장이 있었는데, 학교가 서기 앞서부터 있던 공장입니다. 나는 중학교를 다니고 고등학교를 다니며 ‘학교 옆에 저런 공장이 있구나’ 하고 깨닫는데, 이 학교를 지은 이들은 어떻게 화학공장 곁에 학교를 지을 수 있었을까 궁금했습니다. 어떤 마음이요 어떤 생각이었을까요.


  곰곰이 살피면, 학교는 화학공장이 서고 나서 한참 뒤에 섰지만, 화학공장이 들어서기 앞서 그 동네에는 ‘사람들이 여느 살림집’을 꾸려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버젓이 살아가는 동네 한켠에 화학공장이 들어선 셈입니다. 새삼스레 생각해 봅니다. 화학공장을 세운 이들은 ‘사람들 살아가는 여느 살림집’을 어떻게 바라보거나 느끼며 공장을 세웠을까요. 공장 둘레에서 살아갈 사람들이 마실 바람과 물을 조금이나마 헤아렸을까요. 화학공장을 세우면서 쓰레기물을 어떻게 건사하거나 다루어야 할까를 얼마나 알뜰히 헤아렸을까요.


  중·고등학교 여섯 해를 다니며 날마다 화학공장 매연과 쓰레기물 냄새를 맡았습니다. 화학공장 둘레에는 폐수처리장도 있었습니다. 교실 창문 바깥으로는 폐수처리장에서 솟는 김이 늘 보였습니다. 학교 오가는 길에는 화학공장 굴뚝에서 구름처럼 피어나는 매염을 으레 보았습니다.


  공장은 우리 삶터를 북돋울까요. 어른들은 공장에서 일하며 받는 일삯으로 살림을 예쁘게 돌볼까요. 공장에서 새 물건을 잔뜩 만들어 주니, 사람들 경제생활이나 문화생활이나 사회생활이 한껏 나아질까요.


- ‘밝고 화사한 인사. 커다란 창문 밖에서 바람에 흔들리며 반짝반짝 빛나는 나무들. 이 모든 것들이 참을 수 없이 기쁘고, 이제 막 시작된 고교 생활이 얼마나 멋지고 근사할지, 정말 정말 기대됩니다.’ (8∼9쪽)
- ‘그렇구나. 다른 애들이 나랑은 뭔가 다르다고 느낀 건, 정숙함이나 멋진 특기 같은 것 때문이 아니라, 좀더 좀더.’ (31쪽)


  새 하루가 열립니다. 아이들은 오늘도 어제도 집을 나섭니다. 저마다 초등학교에 가거나 중학교에 가거나 고등학교에 갑니다. 때로는 기숙사에 묵으며, 늘 학교에 머뭅니다. 학교 둘레는 ‘어린이·청소년 보호구역’이라 일컫는데, 어린이와 푸름이를 지키는 자리로 여긴다 하면서도, 공장도 있고 고속도로도 있으며, 송전탑이나 유흥업소나 널따란 찻길이 으레 있습니다. 어쩌면, 이러저러한 ‘위험·위해시설’이 우리 삶터 곳곳에 있으니, 학교라 해서 이 ‘위험·위해시설’에서 홀가분하기는 어려울는지 몰라요. 학교에 앞서 우리들 삶터가 바로 이 ‘위험·위해시설’에 둘러싸인 셈이라 할 테지요. 자동차는 골목길에서도 싱싱 달리고, 공장은 어디에서나 매연을 내보내며, 발전소와 송전탑은 언제나 전자파를 뿜어요.


  학교는 숲 한복판에 깃들어야 아름다우리라 생각합니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숲 기운을 느끼고 숲을 보살피면서 숲사람 되는 길을 학교에서 배울 때에 아름다우리라 생각합니다.


  학교가 숲 한복판에 깃들 때에 아름답다면, 우리들 살림집도 숲 한복판에 깃들 때에 아름다우리라 느껴요.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언제나 숲을 느끼고 사랑하며 즐길 수 있어야 아름답겠지요. 어른들부터 숲을 한껏 누리고 좋아하며 보살필 때에 아이들 또한 삶을 가꾸거나 보듬는 마음길을 물려받을 만하리라 느껴요.


  숲은 푸른 숨결을 빛냅니다. 숲은 풀과 나무로 우거지며 푸른 빛을 펼칩니다. 숲은 온갖 새와 짐승과 벌레한테 보금자리를 내어줍니다. 숲은 온갖 새와 짐승과 벌레한테 밥을 내어줍니다.


  사람들도 숲이 있어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숲에서 ‘집지을 나무’를 얻습니다. 사람들은 숲에서 땔감을 얻습니다. 사람들은 숲에서 먹을거리를 얻습니다. 사람들은 숲에서 맑은 바람을 쐽니다. 사람들은 숲에서 나뭇잎에 반짝이는 햇살을 얻습니다.


  나무 한 그루는 사람뿐 아니라 모든 목숨들을 반가이 껴안습니다. 사람뿐 아니라 모든 목숨들은 나무 한 그루를 살가이 바라봅니다. 서로 아끼고 서로 돌봅니다. 따사로운 눈빛과 손길로 숲이 싱그러이 살아납니다.

 

 

 


- “아무것도 없다는 건, 앞으로 찾으러 갈 수 있다는 뜻이니까. 내 눈에는 너희 모두가 희망으로 가득 차 보이는걸. 정말 기대돼. 앞으로 뭐든지 선택할 수 있잖아.” (38쪽)
- ‘굉장해. 넓어져 간다. 바람이 불어, 나무들을 지저귀게 만든다. 미래의 언젠가 나는 어디에 있을까. 무엇을 하고 있을까. 조금은 무섭고 떨리지만, 그래도 가슴이 뛴다.’ (41∼42쪽)


  갓난아기는 냇물 소리를 들으며 새근새근 잠듭니다. 갓난아기는 풀벌레와 멧새 노랫소리를 들으며 아장아장 걷습니다. 갓난아기는 바람이 흔들며 내는 나뭇잎 노래와 풀잎 노래를 들으며 무럭무럭 자랍니다.


  쑥을 뜯으면 쑥내음이 퍼집니다. 미나리를 뜯으면 미나리내음이 번집니다. 정구지를 뜯으면 정구지내음이 감돕니다. 풀은 저마다 다른 풀내음으로 사람들한테 푸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풀은 사람 손을 거쳐 몸으로 천천히 깃들면서 푸른 숨결로 거듭납니다. 풀은 사람이 되고, 사람은 풀이 됩니다. 나무는 사람이 되고, 사람은 나무가 됩니다.


  천 해를 살고 이천 해를 살아온 나무는 천 해에 걸친 슬기와 이천 해에 걸친 깜냥을 둘레 짐승과 벌레와 사람한테 골고루 나누어 줍니다. 나무는 천 해나 이천 해에 걸쳐 숱한 씨앗을 숲에 퍼뜨립니다. 숱한 어린나무를 키우고서 나무는 조용히 숨을 거두며 쓰러집니다. 천 살이나 이천 살을 살아낸 나무는 어린나무한테 숲을 새롭게 가꾸어 주기를 바라는 꿈을 남기며 아스라한 빛 한 줄기가 됩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른은 어떤 빛줄기일까요. 나는 내 아이들한테 어떤 빛줄기 되어 삶을 일굴까요.


  어느 어버이라도 아이한테 돈을 물려주지는 못하리라 느껴요. 어느 어버이라도 아이한테 사랑을 물려주리라 느껴요. 어느 어버이라도 아이한테 집이나 땅을 물려주지는 못하는구나 싶어요. 어느 어버이라도 아이한테 씩씩한 몸과 튼튼한 손을 물려주는구나 싶어요.


- ‘선생님은 인생이 즐거우실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해 봅니다.’ (12쪽)
- “타나카 양, 왜 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지 알아?” “?” “꽃에는 요정이 있어서 보는 사람의 마음을 평온하게 해 준대.” (53쪽)


  1등을 해야 할 까닭이 없고, 책을 읽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밥을 먹어야 할 까닭이 없고, 옷을 입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시험을 치러야 하면 즐겁게 시험을 치를 노릇입니다. 책을 읽고 싶으면 즐겁게 읽을 노릇입니다. 밥을 마련하거나 차리려 하면 즐겁게 먹을 노릇입니다. 옷 한 벌 지었으면 즐거이 입고 뛰놀 노릇입니다.


  삶에는 까닭이 없어요. 즐거이 누리기에 삶이 될 뿐이에요. 삶을 어떤 모습이 되도록 이끌어야 하지 않아요.


  삶에는 틀이 없어요. 기쁘게 맞이하기에 삶이 돼요. 삶은 이래야 하거나 저래야 하지 않아요. 삶은 날마다 새로운 모습이에요. 삶은 늘 새로운 빛깔과 내음과 숨결이에요.


  더 예쁜 것이 없습니다. 더 못난 것이 없습니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더 나쁜 것이 없습니다. 모두 삶을 이루는 조각입니다. 모두 삶을 빛내는 자리입니다.


  졸립기에 누워서 자요. 고프니까 밥을 차려 먹어요. 냇물에 손을 담가 낯을 씻어요. 들판을 맨발로 거닐며 흙을 느껴요.


  가을을 맞이해서 가을을 누려요. 겨울이 찾아오니 겨울을 누려요. 꽃을 볼 때에는 꽃잎이 어여쁘구나 생각해요. 힘차게 뛰노는 아이들을 볼 때에는 아이들 몸짓이 야물딱지구나 생각해요.


- “나도 너를 좋아해. 언젠가 너와 내가 어른이 돼서 서로 다른 길을 걸으며 만날 수 없게 됐을 때를 상상해 봤는데, 너무 속상했어. 하지만 한편으로 괜찮다는 생각도 들었어. 옆에 없어도, 몇 년이 지나도, 미야비가 잘 지내고 있다면 나도 열심히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거든. 너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렇게, 그렇게, 나는 너를 좋아할 거야.” (80∼81쪽)
- ‘열심히 일해서, 하루라도 빨리 좋은 교사가 되고 싶다. 그렇지만, 조금은 여유를 부려도 되겠지.’ (126쪽)


  사랑하는 삶이란 어떠할까요. 사랑하는 사람이란 어떤 눈빛이 될까요. 사랑하는 꿈이란 어떻게 두근거리며 찾아올까요. 타니카와 후미코 님 만화책 《사야와 함께》(대원씨아이,2012) 첫째 권을 읽습니다. 하루하루 온통 사랑으로 살아내는 ‘사야’라 하는 푸름이 이야기를 읽습니다. 사야는 만화책에만 나오는 아이일 수 있으나, 참말 우리 곁 어디에나 사랑스레 있는 아이일 수 있습니다.


  스스로 삶을 사랑하는 사야입니다. 남들이 사랑하라고 말하니까 삶을 사랑하지 않아요. 스스로 걷고 싶은 길을 걷는 사야입니다. 남들이 일러 주거나 가르친대서 길을 걷는 사야는 아닙니다.


  아이도 어른도 스스로 숨을 쉽니다. 아이도 어른도 스스로 몸을 움직입니다. 아이도 어른도 스스로 생각합니다. 누구나 스스로 보살피는 삶입니다. 누구나 스스로 가꾸는 하루입니다.


  아침햇살은 새삼스레 빛납니다. 저녁햇살은 다시금 곱게 물듭니다. 하루가 조용히 흐릅니다. 맑은 바람은 시골마을에도 도시 한복판에도 상긋상긋 불고 싶습니다. 고운 햇살은 너른 들판에도 아파트 유리창에도 비추고 싶습니다. (4345.10.21.해.ㅎㄲㅅㄱ)

 


― 사야와 함께 1 (타니카와 후미코 글·그림,강동욱 옮김,대원씨아이 펴냄,2012.8.15./4200원)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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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잃어버린 글공책

 


  의정부고등학교로 강의를 하러 가는 길에 글공책을 잃다. 늘 기차를 타다가 모처럼 고속버스를 탔는데, 띄엄띄엄 쉬는 휴게소에서 쉬를 눈다고 내리며 조금이라도 글조각 끄적일까 싶어 글공책을 들고 내리다가 그만 어디엔가 놓고 고속버스에 다시 올랐다. 휴게소를 떠난 고속버스는 다시 휴게소로 돌아갈 수 없다. 글공책은 내 곁을 떠나 조용히 운다. 휴게소 전화번호를 알아내어 전화를 건다. 내가 깜빡 잊고 내려놓은 글공책을 찾을 수 있을까 여쭌다. 찾아보겠다고 이야기하지만, 몇 분 뒤 걸려온 전화를 받으니 내 글공책은 안 보인다고 말한다.


  잃어버린다. 두 달쯤 쓰던 글공책을 잃어버린다. 그동안 적바림한 이야기가 글공책과 함께 가뭇없이 사라진다. 글공책에만 끄적이고, 아직 옮겨적지 않은 싯말이며 여러 가지 글이 사르르 사라진다.
  사라진 글공책은 돌이키지 못한다. 문득 생각한다. 내가 즐겁게 읽던 책을 놓고 지나갔다면? 내 손전화기를 놓고 지나갔다면? 내 지갑을 놓고 지나갔다면? 내 사진기를 놓고 지나갔다면? 내 가방을 놓고 지나갔다면?


  어느 때라고 가슴이 안 아플 수 없다. 다만, 지갑이든 손전화기이든 사진기이든 가방이든 다시 장만할 수 있다. 글공책은 두 번 다시 장만할 수 없다.


  그래도, 글공책에 끄적인 이야기는 내 마음속에서 살아숨쉬며 가만히 기다리겠지. 내가 다시 떠올리거나 새삼스레 길어올리기를 가만히 기다리겠지. 사람들이여, 제 것이 아니면 건드리지 말고 그 자리에 그대로 두어 주시라. 사람들이여, 연락처 적힌 다른 이 글공책이나 수첩은 부디 임자한테 돌려주시라. 가로채거나 줍거나 빼앗는대서 이녁 것이 되지 못한다. (4345.10.21.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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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사진 하나 말 하나
 006. 책마실 아이와 헌책방 - 헌책방 유빈이네 2012.10.19.43

 


  돈 이천 원을 들고 헌책방으로 마실을 나옵니다. 아이는 돈 이천 원으로 여러 가지를 할 수 있을 텐데, 이 가운데 헌책방으로 책마실을 나와서 만화책 하나 가만히 살피는 놀이를 즐깁니다. 아이는 여러 만화책을 살피다가 한 권을 오래도록 들여다봅니다. 오래도록 들여다본 만화책은 내려놓고 다른 책을 하나 집어 장만해도 되지만, 굳이 오래도록 들여다본 만화책을 장만합니다.


  내 어린 나날을 돌아봅니다. 나도 이 아이처럼 책마실을 나와서 책을 살필 적에 오래도록 들여다본 책을 장만하곤 했습니다. 사서 읽고 싶은 책을 책방에 선 채로 먼저 죽 읽습니다. 죽 읽었으니 내려놓고 다른 책을 사지 않습니다. 참말 사서 읽고 싶은 책이기에 책방에 선 채로 한참 읽어 봅니다. 한참 읽으면서 그야말로 읽을 만하구나 하고 느껴서 즐겁게 장만합니다. 이렇게 장만한 책은 책방에서 한 번, 집에서 다시 한 번, 다음에 새롭게 한 번, 자꾸자꾸 되풀이하며 읽습니다.


  삶을 읽습니다. 책 하나에 기대어 삶을 읽습니다. 삶을 느낍니다. 책 하나에 빗대어 삶을 느낍니다.


  사람들은 글 한 줄 쓰거나 그림 한 장 그리면서 어떤 이야기를 책에 실을까요. 사람들은 사랑과 꿈과 믿음을 어떻게 나누고 싶어 책을 내놓고 책방을 열며 책마실을 다닐까요.


  돈 이천 원을 턱으로 집고는 만화책을 한참 살피던 아이는 책방 문을 열고 들어옵니다. 헌책방 아저씨한테 책값을 내밉니다. 헌책방 아저씨가 에누리를 해 줍니다. 아이는 에누리받은 돈을 한손에 들고 새로 장만한 책을 다른 한손에 듭니다. 아이는 한손에 꿈을 들고, 다른 한손에 사랑을 듭니다.


  책을 읽는 동안 길거리 오가는 자동차 소리를 못 듣습니다. 책을 읽으며 길거리 오가는 사람들 수다 소리를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을 간질입니다. 가을해가 저물며 얼굴을 적십니다. (4345.10.21.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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